다시생각 해야할 중국의 선교정책
나두산 목사/
필자는 지난 1년여 전에 있었던 뉴욕 무역 센타 911테러로 인하여 미국 방문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때에 [남가주 부흥교회]와 [미주 복음 방송국]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미주 지역 이단 실태와 대책 방안 그리고 한국에서 난립하고 있는 이단들의 현상에 대하여 강의를 한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금번에는 중국지역에 만연하고 있는 [사스]라는 이름이 붙혀진 괴질의 급속한 확장으로 중국방문을 꺼려하고 있는 싯점에 중국교회에 한국교회 이단들의 침투실태가 심각하다며 [이단과 대처 방안]에 대하여 강의 요청을 받았다.
중국 선교에 남다른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최 영백 목사님(국제 신학대학원 선교 담당 부총장, 중국 해서(海西)신학교 교장, 좁은문 교회 담임목사)의 중국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는 진심어린 강연 요청은 [사스]의 두려움도 주의 만류도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필자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동안 중국교회에 대한 현상에 대하여는 중국이 개방되어 교회의 문을 연지 20여년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을 방문한 많은 목회자들과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를 통하여 입소문으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중국교회의 실태와 중국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등에 대하여 알고 싶었고 조선족과 중국교회의 신앙 열정 정도를 알고 싶었다.
중국은 개방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종교에 대한 개방도 동시에 하였지만 그동안 들어왔던 소식들은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 기사와 말보다는 기독교를 박해하고 선교사들에 대하여 공안 요원들의 감시와 핍박이 심하여 선교사들이 비밀리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조선족 목회자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궁금하였던 부분에 대하여 질문을 하면서 배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금번 강의가 중국 동북 지역 삼성을 목회 할 수 있는 00 신학교 1기생들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씩 3일간 24시간을 강의 하기로 계획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설래 이는 가슴을 안고 중국 남부항공에 몸을 싣고 2시간 10분동안 날아서 하얼빈공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중국 시간 오후 8시 40분(한국시간오후9시40분)이었다.
중국 정부로 부터 공식 허가가 난 신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한 [이단에 대한 강의]였지만 신학적 자질의 부족으로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국제 라이프선교회] (회장)한태랑목사께 도움을 요청하여 중국어로 번역한 [루이스벌코프]의 [조직신학 개론]를 60권을 만들어서 55권을 가지고 들어 가는 모험을 하였다.
책을 가져 갈려고 하는 마음을 먹었 때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며 확신에 찬 마음으로 시도를 하였지만 가슴속에서는 하나님의 보호 하심이 없으면 모두 압수를 당하고 벌금을 물어야 할 처지 이므로 조마 조마한 마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하심에 맡기는 기도로 꽉차 있었다.
통관대를 통과 하자 마자 앞사람이 책때문에 걸리었다. 그사이 자연스럽게 가방을 챙기어 나오려 하자 "book!" 하며 여직원이 내곁으로 다가 왔다. 그런데 왠일인지 내마음은 너무나 평안한 마음으로 사로 잡혀 졌고 나는 웃으면서 다가가서 손에 들었던 책가방을 열어 보여 주자 공항의 여직원은 앞쪽에 있는 책만 한권 꺼내들고는 웃으면서 펼쳐 보더니 가방 뒤쪽에 있는 강의 원고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무엇이냐를 물어서 "notebook"라하자 의외로 인사까지 하면서 보내 주었다.
손에 들었던 가방에도 또 다른 5권의 책이 있었고 다른 가방에도 많은 책이 들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간섭에 의하여 여직원의 눈을 가리워주었고 내미소만 바라 본것 같다. 통과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감격과 감사가 내가슴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중국이 큰 나라다 라는 사실이 대하여 아직 실감을 하지 못한 필자는 마중 나온 00신학교 담당자로 있는 P선교사님의 영접을 받아 강의 장소 까지 중국 영업용 택시를 타고 달려 갔다. 위도상 우리 나라 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추울거라는 생각 때문에 겨울 옷을 준비하여 갔는데 바람만 조금 있을 뿐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하얼빈 공항을 빠져 나간 택시는 하얼빈 시내를 가로 질러 시멘트로 만든 이차선 고속도로를 접어 들면서 중국땅이 크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다.
좌우로 흐릿하게 보이던 끝없는 들판과 차창 밖으로 스치고 지나 가던 중국의 농촌 집들은 암흑으로 쌓여 졌고 가끔씩 반대편 차선으로 달려 내려 오는 트럭 들과 차들이 아슬아슬하게 피하여 지나 가곤 하였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휴게실이 없어서 쉴 수도 없고 다만 지계를 벗어 날 때마다 톨게이트가 있어서 도로비를 내느라고 차가 잠깐씩 멈출 뿐이었다
고속도로는 우리를 태운 젊은 중국인 기사(한족)도 피곤한지 준비한 물병을 연거퍼 들여 마시면서 상향등을 켜고 달려 오는 상대편 차의 기사들을 향하여 욕을 해대곤 하였다.
5시간 이상을 달렸을까? 선교사님 입에서 “이제 마지막 톨게이트입니다. 이제 약 20-30분이면 우리 집이 있는 M도시 입니다.” 하였다. 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새벽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교사님! 인천 공항에서 하얼빈 까지 오는 거리 보다 하얼빈에서 M도시 까지가 몇배나 시간이 더 걸리는군요” 하며 피곤한 웃음으로 큰 나라 임을 실감하며 웃었다. 한국으로 말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만큼은 되는 듯하였다.
“선교사님! 택시비는 얼마나 하나요?”
“부담을 느낄가 봐 말을 하지 안으려 했는데… 한 사람 앞에 100원입니다. 초등학교 교사 한달 봉급이 500원이니까 중국에서는 큰돈입니다. 그래서 서민들은 장거리만큼은 택시를 탈수 없으므로 기차를 많이 이용합니다. 큰 나라 이지만 철도망이 잘 발달 되어 있어서 전국 어디나 기차만 타면 갈 수 있습니다.”
“아니 이 큰 나라를 기차를 타고 언제 갑니까? 비행기를 타면 빨리 갈수 있자나요”하자
“비행기는 서민들에게 있어서 그림의 떡입니다. 비행기를 한번 탈려면 북경까지 1000원은 주어야 하는데 서민들의 봉급 두어달치 입니다.
중국에서 여행을 할 때는 반드시 마실 물을 준비 하여야 하며 차를 타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와야 합니다. 그래서 한족들은 장거리 여행을 할 때 한 보따리씩 먹을 것과 물을 준비하고는 침대 칸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면서 갑니다.
침대칸도 4인이 들어 갈수 있는 1등급과 6인이 들어 갈수 있는 2등급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침대 칸에 탈수 없으므로 우리나라 60-70년대에 달리던 등받이가 재 껴지지 않던 기차와 같은 차를 타고 하루고 이틀이고 갑니다.”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새벽 두시가 훨씬 넘어서야 M도시 선교사님의 아파트에 도착하였다.
운전을 할 때 고속도로상에서 상대편 차의 기사들에게 하였던 태도 와는 달리 상상외로 친절한 중국인 택시 기사는 내 기내용 가방을 들고 아파트 입구까지 들어다 주는 등 매우 친절하게 말하였다. 첫인상 부터가 그 동안 들어 왔던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기 지고 있었다.
1.중국의 경제 체제 변화
중국은 냉전체제가 와해된 이후 군사력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감소됨으로써 더 이상 국제질서가 과거와 같이 미국과 러시아에 의해 주도되던 상황이 계속되지 않게 되고,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 유럽,일본 및 중국 등에 의한 다극체제가 새로이 형성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또한 구소련 붕괴이후 경제력을 중심으로 하는 종합국력이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게 됨으로서 세계 각국이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냉전이후 국제관계에서 경제력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국가간 경재의 중심이 군비경쟁에서 종합국력의 경쟁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인식하면서 중국은 기존의 폐쇄적인 경제체제에서 개방적인 체제로 변환되면서 대외적인 안보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경제발전전략은 1978년 11월 중앙공작회의와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여왔으며, 당시 회의를 통해 결정된 사안은 다음과 같다.
1.중요한 기본적 사상으로 유지되어왔던 좌편향과 인식의 문제들을 시정한다.
2.더이상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삼지 않으며,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을 위해 노력한다.
3.농업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4. 국민경제의 비례 불균형과 경제관리 체제와 권한의 과도한 집중화 현상을 해결한다
라며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 발전하여 갔다.
그 결과 2002년에 중국의 GDP는 세계 4위로 올라 서고, 이를 구매력 기준으로 평가하면 미국을 앞지르고 일본의 2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경제적 진보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그로 인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분출과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가 생겨 나면서 공산주의 경제 체제와 맞지 않는 사회적 현상으로 인하여 불만 세력들에 의하여 1989년에 천안문에서 거대한 사건이 터지기도 하였다.
이때 당시 실력자인 등소평은 자기 후계자로 지목했던 호요방과 조자양을 민주화 세력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기 손으로 숙청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고 여기에 대하여 서방 세계의 반발이 일어 나면서. 개방과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경제개혁과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치개혁을 어떻게 적절히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중국의 정치, 사회는 평온한 것 같고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고 지금의 변화의 방향 즉, 국제화, 정보화, 민주화의 방향을 거역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중국은 계속적인 변화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국의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국의 종교정책 (0) | 2008.10.29 |
---|---|
[스크랩] 중국의 종교정책 (0) | 2008.10.29 |
[스크랩] 중국 땅에 맞는 선교정책 (나두산) (0) | 2008.10.27 |
[스크랩] 중국선교를 실패하는 6가지 이유 (0) | 2008.10.27 |
[스크랩] 중국교회의 안정적 부흥을 위한 교회조직과 목사안수 필요성 (청죽) (0) | 2008.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