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基督敎와 三自愛國敎會!
중국이 종교정책을 통해 살펴 보았듯이, 기독교가 중국에서 차지할 수 있는 위치는 상당히 독특한 것으로, 여타 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는 중국정부에 의해 공인된 삼자교회라는 용어로 다시 설명이 가능하다.
이미 언급했듯이 삼자교회는 중국정부가 공인한 유일한 기독교 단체로서, 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선하지 않고서는 중국내의 정확한 기독교계의 현실을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삼자교회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왜 중국의 기독교계가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라는 양대산맥으로 분열 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할 수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중국 기독교계의 큰 흐름과 아울러, 큰 흐름을 주름잡는 하나의 축인 삼자교회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중국적인 상황과 역사, 그리고 삼자교회를 생성한 삼자애국운동의 성격과 주요 사상 및 활동내용, 또한 삼자애국운동에 포함되어 기독교 활동을 규정지은 삼정정책을 먼저 살펴 보고 , 중국의 기독교계가 중국정부에 부합함과 동시에 중국교회를 생존 시키기 위해 정치적 입장을 밝혔던 기독교 선언과 신학교와 예배형식 및 문제점을 통해 삼자교회의 현실에 보다 접근한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의 큰 흐름
현재 중국에는 두 종교의 교회가 존재한다. 하나는 공개적 교회 두 번째는 가정교회라고 불리는 지하 교회이다. 이에 중국교회자체의 전도활동 상황과 분석4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의 정부 공식적으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목사가 1,050명, 세례교인이 5백50만 명이고, 교회당이 6,000개에, 신학교는 13개에 이른다고 되어있다.
중국교회자체의 전도활동 상황은 소극적인 전도활동이라는 한마디로 표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연로한 목회자들은 과거의 쓰라린 기억 때문에 소신껏 목회하기보다는 매일 장시간의 회의만 하면서 활동은 별로 안하고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소신 있는 젊은 지도자들도 이러한 분위기와 제한 때문에 전도활동이 상당히 소극적이다.
따라서, 교회가 교인을 훈련시키고 전도활동을 하도록 장려하기보다는 종교활동 자체를 관리하는 듯한 인상이 짙다.
4 (KCM HONE/ 세계 선교 정보/아시아)
2. 삼자교회의 역사
1807년 영국 런던선교회 소속이었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ison)이 최초이 개신교 선교사로 중국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데, 사실상 이는 중국 선교를 위한 네번째 시도었다. 그러나, 당시 외국인은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그는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카오에서 거주하면서 중국어 사전편찬, 성경번역 등의 문서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영국에 패하게 되고, 1842년에 난징조약을 조인할 수밖에 없게 되자, 조약 내용에 의거, 외국 선교사가 중국연안 5개 항구(광저우, 햐면, 푸저우, 닝보, 상하이) 범의 내에서 전도할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아편정쟁에서 패한 중국은 1858년의 텐진조약과 1860년의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외국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외국 선교회들은 많은 선교사들을 중국에 보냈고, 전도, 학교설립, 병원설립, 출판사업 등의 사역을 했다. 이러한 선교사역의 형태는 중국이 공산화 되던 1949년까지 계속되었고, 중국의 선교사역이 활발해지면서, 중국 현지의 전도 동역자도 양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 의화단 사건인 반기독교 운동으로 2000여 명의 새긴교 신자, 189명의 선교사와 그 자녀들이 순교를 당했고, 1911년 청 왕조는 손문의 민주주의 혁명에 의해 붕괴되었다. 민국 성립 후, 기독교는 합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으며, 중국 신도들을 선교에 대한 책임을 느껴, 뜻을 세우고 자립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1918년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중화내지전도회를 발기하였고, 최초로 중국인이 조직한 선교회가 생겼다.
1920년부터 1922년 까지 중국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신문화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오직 과학과 민주주의만이 중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믿고, 1922년에 기독교를 미신적으로 여겨 이를 거부하는 반기독교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많은 자립교회가 건립되기도 했다. 그렇듯 교회는 핍박을 받는 한 편,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1930년대 교회는 더욱 서로간의 단합과 "토착화 운동"을 중시하고 자치, 자양, 자전을 강조하는 삼자운동을 전개했다, 삼자 정신은 적지 않는 중국 신도들에 의해 인정 받게 되었으며, 20-30년대의 교회는 이미 서양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중국에 맞는 교회를 건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삼자는 하나의 구호적 수준에 마무르다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하나의 조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요종5이 주석이 되어 이 운동을 주도하며 서양교회 배척운동을 했는데, 비단 서양 선교사들을 배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양교회와 무관한 자립교회 지도자인 위치만니와 왕밍따오 등도 모두 토옥되였다. 참고로, 1949년 다잇 교인은 80만명 정도였다.
1954년 7월에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 우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였으며, 이에 가입치 않으려는 전도인은 모두 체포되었다. 목회자들은 모두 노동생산에 투입되었고, 예배드리고자 하는 신도들은 비밀리에 가정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55년 10월에 정부는 삼자 이외에는 어떤 기독교 활동도 불법이라고 선포한 뒤, 전국 교회를 대대적으로 합병하여 교회 숫자를 크게 감소시켰다. 이에 상하이에서 약 250여 개의 교회가 7개로 베이징에서는 64개의 교회가 5개로 합병되었다.
1966년에서 1967녀에 걸친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삼자의 활동조차도 정지되고, 교회는 큰 핍박을 경험하였다. 1976년에 이르러, 모택동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이 나자, 1979년에 삼자교회가 다시 문을 열었다, 이 삼자는 일찍이 중국 교회에 존대하던 것이었기에 당시로 보아 새삼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모택동 사망이후 다시 활성화 된 삼자교회는 공산당과 연합하여 가정교회 및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삼자에 가입하도록 강요하거나 공안국에 고발하는 역할도 하기도 했다.
5 (오요종은 "하나님은 교회로부터 인류구원의 열쇠를 빼앗아 타자에게 주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공산당이다. 그는 혁명정부의 사회주의적 변혁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국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표하여서 기독교와 자본주의 손잡은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빠짐으로써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사회적 필요에 적절하게 응답할 수 있는 이념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삼자애국운동은 중국적인 상황 안에서 어떻게 해야 기독교가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대한 결과이다.)
3. 삼자애국운동의 성격과 주요 사상
1) 성격
삼자 애국운동은 집권 중국 공산당의 종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애국적 종교조직"이다. 때문에 중국에는 공식적으로 교파가 삼자 교회하나뿐이다. 삼자교회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중국정부의 어용교회는 아니다.6 다만 중국정부의 통제를 받기로 합의가 되어 있는 교회로, 예배 및 신앙 정신의 자유는 허락 받았지만, 전도 활동의 자유가 없는 교회이다. 공개 교회란 삼자교회로 대부분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위원회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인데 공개 교회에는 삼자교회 외에도 정부의 허가를 받은 도 다른 교회들을 포함한다. 이들은 1940년 이후에 종교집회 장소를 등록하는 과정에서 일부 교회들이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교회를 정부에 등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삼자애국운동 조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삼자애국운동은 삼자를 기초로 삼아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의 삼자란 자치, 자양 자전의 약자이지만 1930년대의 중국 교회의 자립 운동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성격은 철저하게 교회 혁신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 애국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삼자애국운동은 20세기초인 20-3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성격이 바뀌어 새로운 운동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공산당 정권의 통제로 실시되다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모든 삼자교회는 문을 닫는다. 그러다가 70년대 초 중국과 미국이 수교하면서 서양사절단을 배려해 다시 열게 되었다. 삼자교회는 중앙 정부의 통제와 탄압 정책 하에 어렵게 작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러한 교회들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공개적으로 예배와 정상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정부측 삼자애국 운동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삼자교회의 지도자들은 법률에 합당한 종교활동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정부측의 통제는 받는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삼자교회측은 이 합법적으로 공간을 늘리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삼자애국운동의 정치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 운동에 저항한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은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대부분 1955년과 1958년의 두 차례에 걸쳐 토옥되었다.
6 (왕쓰웨, 1998년 11월 8일, 한동대학교 학생들과의 간담회 )
2) 사상
① 자치-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며
② 자양-자신이 신자와 목회자들을 길러낸다.7
경제적 자립은 1940년대 이후부터 중국개신교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중의 하나였다. 이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 중국 교회는 기관들과 교회가 교육 의료 사회 사업 등을 통해서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이렇게 하자면 외국의 자금에 의존하는 길 밖에 없었다. 특히 농촌교회는 상황이 심각했는데 이렇게 되니 중국교회는 외국의 선교단체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반 불신자는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교회에 등록한 자들의 일부만이 도움을 받았고 이렇게 되니 교회는 중국인민들과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교회가 외국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대체로 개신교는 나라의 어려움을 빌미 삼어서 선교사에 붙어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중국 지성인들에게 주었고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쌀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까지 전락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외국 선교회가 중국에 심어준 교파주의의 병페였다. 본국 교회나 산교회가 자기 교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중국 안에서까지 교파주의를 깊이 심어주었다.결국 외국선교사의 선교 목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 일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자기 교파의 수적 확산들의 국가나 인민들에게 봉사하기 이전에 외국 선교회에 충성해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외국의 지원에 의존한 중국 교회는 점점 더 외국적인 것이 되어갔고, 민족의 문제와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1950년 '티엔' 펭(천풍) -> 삼자교회의 공식 잡지 의 한 사설은 이에 대한 위기의식을 말하면서 이제 중국교회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자립의 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려는 새로운 중국 교회에 있어서 다음의 4가지 어려움이 장애물로 떠올랐다. 첫째는 중국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교회건물 건축의 난립과 운영에 대한 경험 미숙이다. 둘째는 자신들의 호구지책도 어려운 재난이다. 섯째는 교언들의 자립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십일조 정신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자기의 책임분량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것은 역시 선교부의 경제원조 때문이였다.
결국 교회의 자양과 자치 노력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교인들은 시화주의 사회가 제대로 발전될 때에 경제적인 빈곤이 없어진다고 믿고 생산적인 노동에 참여하는 운동을 벌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는 중국개신교가 모든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전망을 발전시켰음을 의미한다. 즉 자치, 자양의 중국 교회는 중국 전 인민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을 교회 밖의 인민들과 구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들과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③ 자전-스스로 복음을 전한다.
자치나 자양이 49년 이후 새로운 중국에서의 교회 상을 모색했다면 자전은 신학적 문제를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이 새로운 중국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중국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복음증거가 외국선교사에 의하여 외국식으로 이루졌고 패권주의에 유리하도록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중국인민들을 위한 복음 증거, 즉 자전은 따라서 삼자 애국운동의 핵심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중국인민들을 위한 전도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전의 출발점은 중국의 혁명적 운동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증거나 공감대를 찾는 결단에 있다. 이것은 과거의 증거와 개념이 다른데 과거의 증거란, 사람들을 기독교 울타리 안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울타리밖에 있는 양들은 빨리 구원하여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오는 행위가 복음 증거요 전도였다. 그러나 자전에서는 그와 반대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따라서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말고 교회 밖에 있는 중국인민들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해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 기독교는 더 이상 중국 전체와 구별된 서양의 한 분파가 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중국 전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복음은 300만 명의 것만이 되어서는 안되고 전체 인민의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전이다. 즉, 누가 설교 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이익을 위해 그 설교가 공헌하는가에 있다.
7 (홍성현 편지,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 한우 1992)
이렇게 삼자란 자치, 자양 자전의 약자이지만 1930년대의 중국 교회의 자립 운동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성격은 철저하게 교회 혁신 운동과 반제국주의 운동, 애국 운동을 의미한다. 이상의 원칙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기독교의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음을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터득하게 되었다. 다른 인민들이 사회건설을 위해서 주일에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자신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공장의 일을 그만두고 빠져 나와서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혁명 이전의 신앙 증거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전을 통해 일터에서 머물러 일하면서 신앙을 증거함으로써 믿지 않는 다른 동료들과 구별되지 않은 채 더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공자에서는 모범 노동자가 되는 것, 학교에서는 모범 학생이 되는 것, 농장에서는 모범 농부가 되는 것이 참 기독교의 증거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삼자 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 정책을 위한 운동이었으므로, 교회는 예배나 기독교의 본질을 탐구하는 등 인간의 내면적인 일체의 종교활동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특히 유물론에 기독교의 본질이 회석되어 그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4. 삼자애국운동의 활동내용과 삼정정책
삼자애국 운동의 활동에 대해 먼저 언급하자면, 그 중 첫번째는 혁명선언의 서명 운동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반제국주의운동 및 애국 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은 1950년 한국 전쟁 때 항미 원조 애국 운동이라 명칭하고 교인들은 미 제국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조선을 원조할 것을 표명하였다. 또 미국이 일본을 무장시키는 일에 반대하는 강영회와 시위운동을 전국에서 실시하였으며, 월남 전쟁이 발발한 후 64년 9월에는 반미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세번째로 꼽을 수 있는 활동은 공소운도이었다. 이것은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반제국주의 분자를 고발하게 하는 운동으로 각지에 공소회를 개최하게 하여 제국주의 분자의 친구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발연설을 하게 하였다. 1951년 5월에 시작하여 그 해 12월까지 108회에 걸쳐서 공소회가 있었다. 고발의 주요 이유는 종교의 이름 밑에서 제국주의와 반동 통치 계급의 이익을 꾀하여 출한 사상, 무저항주의, 종말론의 사상을 선전하여 중국 교회의 애국사상을 소멸케 했다는 등의 조항이었다. 또 외국 선교사의 경우는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단지 중국인에게는 빈곤을 감수하면서 영혼 구원만을 권장하는 일도 이에 해당되었다. 중국인의 경우에는 미 제국주의 수족으로 활약했던 자, 장개석을 돕고 인민을 압박한자, 그리고 장개석 정권 하에서 유교적 신생활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자 역시 이에 해당되었다.9
그리고, 네번째로는 학습운동이 이루어졌는데, 교인들이 신중국 정치와 가치관을 학습하는 운동이었다. 주로 오용종의 <기독교 혁신운동 학습수책>이나 유양모의 <모택동 사상 학습수책>, 그리고 <기독교와 세계평화> 등이다. 또한 상해, 광주, 북경, 남경, 중경, 서안, 장사, 무한, 항주장 등지에 시사 학습회를 조직하였다. 이 학습회는 삼자운동 위원회와 정부 당국이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예를 들면 1953년 8월 20일부터 1월 1일까지 상해에서 개최한 학습회는 81명의 목사와 전도사 등이 참석하였으며, 강사는 9명의 공산당과 2-3명의 교인이였다. 일과는 아침에 30분간 예배를 드리고 강의, 토론으로 학습을 실시하였다. 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국주의에 대하여, 특히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문화침략을 위해 이용한 것에 대하여, 중국의 위대함과 장래의 전망에 대하여, 정부의 종교정책과 삼자운동에 대한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토론은 참가한 한 사람씩 과거를 말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하게 하여 새로운 학습에서 얻은 지식의 바탕위에 자신의 삶을 정립하게 했다.10
마지막으로, 삼자애국운동의 주요 활동 내용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출판물의 심사이다. 이것은 친미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기독교 출판물에서 이러한 출판물에서 제국주의 사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심사하는 활동이었다.11 이로 인해, 1951년도에 상해, 한구, 성도의 주요 기독교 출판사 서적 1750종을 심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불합격을 당하였으며, 또 상해에서 발행한 양 40종의 정기 간행물에서도 11종이나 정간 처분을 당하였다. 또한 1951년 4월에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성립되었을 때에, 정식적으로 <주간 천풍>을 공식 잡지로 선정하였다. 12
이제, 삼정정책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 보도록 하겠다.
중국은 1982년 개헌을 했는데 그 중 제 19호 문건에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정의하고 있다. 정상적인 종교 활동이란 중국이 인정하는 애국적 종교단체들의 감독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것을 좀 더 풀어 말하면 삼정정책 즉 정편(定片)-지정된 사역의 범위/ 정인(定人)-지정된 사람/ 정점(定点)-지정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종교활동을 말한다. 다음은 삼자애국운동의 기본 정신인 삼자운동에 대한 것으로 이것은 중국 기독교 정신의 근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이후에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되였다. 13
9 (오요종, 기독교 혁신운동 상해수첩 상해 1953 )
10 (F: Price jones The Church Communist China: A protetant Appraisal, NY, 1962)
11 (김수진, [중국 개신교회사], "혁신 선언과 중구교회" 부분에서)
12 ([중국 개신교회사]' "혁신 선언과 중국교회" 부분에서)
13 (석은혜, [중국을 주께로] 98.11.12 "중국교회 얼마나 알고 있나?")
5. 기독교 선언
1950년, 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천명하는 새로운 문서이다. 주은래를 만났던 교계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정권을 달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중국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교회 쪽에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더 적극적으로 공산정권과 교회가 너무 소원해진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정권에 가까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이 선언문은 기독교와 외국의 제국주의가 연결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시작한다. 동시에 교회가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 반대하고 노력에 참여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 기독교 선언에 서명하도록 사회적 압력이 가증적 중립을 지켜왔는데 이젠 정치적으로 새 정권에 충성을 해야 한다는 점, 둘째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적합성 여부 셋째는 선교사들과의 친분 관계 등이다.
'기독교 선언'은 교회의 상황에 대한 정치적 선언이다. 이것은 결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적 선언이 아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전체 중국인민이 애국하는 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표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의 자유는 애국심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기본입장이 천명된 것이다. 이런 입장은 정부가 먼저 유도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기선을 잡고 실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기독교 선언'이 발표되면서 그 여파로 자아 비판회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자아비판은 재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이 미국 제국주의주구 노릇을 했음을 비판했다.
6. 삼자교회가 운영하는 신학교
중국에 있는 삼자교회의 숫자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현재 공인된 교회의 숫자는 대략 13만 곳 정도 되고, 교인 수는 1천 2백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교인들을 담당하는 목사는 1천 2백 명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금도 2-3일에 하나씩 문을 연다고 하니 목회자 수급 계획이 얼마나 급선무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국에 있는 신학교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모두 페쇠되었다가 1979년부터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17개을 공인된 신학교가 있다. 그러나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하여 현재에는 17개의 공인된 신학교가 있다. 그러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신도수에 비해, 목사의 배출은 지극히 산술급 수적이다. 정부가 입학정원을 철저하게 제한하고, 설사 교육을 다 받고 졸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안수를 미루거나 허락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재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1983년 이후 문을 연 17개 신학교에서 배출된 목사가 경우 1200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터무니 없이 부족한 지도자를 양육하기 위해, 교회 내에서 비밀리에 자체적으로 지도자 훈련반을 만들어 2개월 정도의 훈련을 시키고는 있지만 이 경우는 매우 단기적일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이 있다.14
그러나 일단, 중국 정부가 공인한 신학교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통일된 학제가 실시되고 있지는 않다. 어느 학교는 4년제가 있는가 하면 2년제, 3년제, 5년제로 운영하는 신학교도 있다. 이중, 5년제의 신학교의 경우, 2년 동안 수업을 받고, 1년간은 실습을 해야 한다. 이 실습 기간이 끝나면 다시 2년간 수업을 받기 때문에 총 5년의 기간이 요구되는 것이다.
14 (왕쓰웨, 1998년 11월 8일, 한동대학교 학생들과의 간담회)
7. 삼자교회의 예배 형식과 현황
삼자교회의 현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다시 삼자교회가 문을 열어 활동했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삼자교회의 정치적인 색깔을 인식하여 여전히 가정교회에 남아 있기로 했다. 이 때부터 삼자교회는 공산당과 연합하여 가정교회 및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삼자에 가입하도록 강요하거나 공안국에 고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많은 삼자교회가 복음적인 교회로 변하고 있으며, 해외 교회들도 '삼자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다'라고 인정함녀서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이 들을 돕는 사역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중국 국무원에서 밝힌 <백서>에 의하면, 1980년대이래 매년 회복되어 새로 건축된 교회가 6백 여 개소이다. 1966년 말까지 인쇄된 <성경>의 발행 총수는 1천 8백 여만 권에 이르고 있고, 중구기독교협회가 1983년부터 출판한 찬송가 <찬미시>는 발행 총수가 8백 여만 권에 달한다.
또한 성도 수는 약 1천만 명, 목회자는 1만 8천 여명, 예배당은 1만 2천 여 개소, 간이활동장소(집회처소)는 2만 5천 여 개소이다16. 교회는 계속 부흥되고 있고, 성도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일례로 베이징에 있는 충원먼 교회의 주일예배를 보는 매주마다 3청 여명이 예배를 드린다.
삼자교회의 예배 순서는 한국교회와 비슷하다. 항주에 있는 사징당 교회는 주일 아침 예배를 3부로 나누어서 드리는데 아침 6시 30분이 1부, 2부는 8시 30분, 3부는 11시 30분이다. 그러나 교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복도 같은 데라도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비디오를 설치해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 시간은 약 2시간 걸린다. 1시간 정도는 설교를 할애하고 나머지 순서들이 또한 1시간 정도 걸린다.
대개 성가대 대원은 10명에서 30명 정도다. 어느 학교를 막론하고 성가대가 있어서 예배를 진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주일학교 의 운영은 법적으로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18세 이하는 절대로 종교 교육을 실시할 수 없다. 다만 장녕를 상대로 새 신자반을 운영하여 일반적으로 예배시작하기 1시간 전에 성경 공부를 실시하고 있다.
삼자교회에도 부흥회가 있지만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 부흥회가 기간 동안 개인 전도는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16 ([중국을 주께로]98/11."삼자교회와 가정교회", p 12-13)
8. 삼자교회의 문제점
삼자교회의 문제점을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동시에 또한 가장 개선이 시급한 문제가 바로 지도자 양육과 신도 교육에 관한 것이다.
그 중 첫번째가 급증하는 교회와 양육훈련의 부족인데 이로 인해 교회가 부흥되고 신자가 늘어나는 이유가 삼자교회에 소속된 교인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라고 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오히려 영적으로 갈급한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증가하는 추세이다. 새로운 신자들에 대한 양육과 기존신자에 대한 훈련, 조직적인 교회의 선교활동이 부족하다. 사실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고 있다. 심지어 4년제 신학원과 대학원을 나온 젊은 목사조차도 "제자훈련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 모르는 실정이다.
그리고 또한, 신학교육시설의 부족과 낙후성 역시 지도자 양육과 신도교육에 관한 문제중의 하나이다. 태반으로 부족한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1년, 2년, 4년제의 신학교 등이 13개 개설되였다. 그러나 배우려는 사람은 많으나 여러 가지 제한과 시설부족, 교수의 부족 등으로 인해 극히 일부분의 학생들만 공부하고 있다. 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의 참고서적이란 지극히 미미하여 4년간 교재를 베껴 쓰다 졸업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학을 졸업한 이들이 부족한 그대로 각 지역에서 열심히 지도자로 활약하는 것을 볼 때,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부의 감시와 통제로 인해 외부와의 접촉을 약간 꺼려 한다.
평신도 지도자 배양학습의 어려움 역시 지도자 양육과 신도 교육 상의 문제인데. 삼자교회에 소속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열심있는 교회는 매년 공식적으로 1개월 -3개월의 성경학습을 실시한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진행되며 학습수료 후 각 교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허락이 주어지므로 대단히 주요한 학습이다. 그러나 문제는 활동할 수 있는 허락이 주어지므로 대단히 주요한 학습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도하는 선생들의 성경지식과 목회경험, 방법론 등이 부족하여 아쉬운 점이 많다. 때문에 여전히 지도자가 부족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삼자교회는 1천 8백 여명의 목사가 있는데. 이들이 1천명 정도의 신도를 양육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정저우에 있는 어떤 목사의 경우 그가 담임하는 교회는 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동시에 100여 곳의 집회소를 돌보아야 한다. 원래 맡겨진 설교, 양육사역 및 회의 등은 빈틈없이 시간이 짜여져 있는데. 또 덤으로 각 집회소를 지체들의 필요를 돌아본다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우선 매년 실시해야 할 성례전은 겨우 2년에 한번 할까 말까 할 정도로 시간에 쫓기고 있다. 그래서 어는 교회를 한 번 방문하게 되면 그 교회 교인들이 무릎을 끊고 엎드리면서 좀 더 머물면서 설교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애원하는 예배가 끝나고 밤이 되면 교인들이 잠들기를 바라는데. 좀처럼 잠이 들지 않다고 한다. 목사를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틈만 나면 도망하려고 하는 것이 삼자교회의 목사님들이다. 이렇게 목사가 말할 수없이 힘이 들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방으로 장로, 집사, 신학생, 또는 똑똑한 평신도들에게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위촉을 하고, 이들은 삼자애국위원회나 삼자교회에서 출판한 설교집이나 교리서 같은 책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다. 17
지도자 양육과 신도 교육에 이어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삼자교회의 문제점이 바로 성경 찬송 출판상의 어려움이다.
애덕기금회가 성서공회의 도움을 받아 인쇄기를 기증 받고, 현재 남경 근처에서 성경과 찬송가를 출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전이다. 이미 500만 권 이상의 성경이 출판되었으나 농촌의 신자들에게까지 공급되려면 아지 태반이 부족하다. 또 요즘은 제한적이나마 기독교 계통의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다.
세번째로 삼자교회의 문제점은 주일학교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삼자교회는 주일학교 발전에 어려움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현재 3내지 4억의 인구18로 추산되는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는 복음을 전할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삼자교회에는 주일학교가 없다. 그러나 대개 장년 예배에의 참석은 허락하기 때문에 부모를 따아왔던 유년부 아이들을 따로 모아 성경 교육을 시키기도 하지만 교재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최근 들어 많은 교회에 주일 학교가 세워지고 있지만 경험이 없기에 주일학교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삼자교회의 문제점은 전도활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 시책에 의하면, 삼자교회는 공개적인 전도대회를 가질 수 없다. 현재 신도들의 대부분이 자기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고 교회 내의 교인수가 많아짐에 따라 목사의 목회 능력을 초과하고 있어 목회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17 (김수진, 중국 개신교회사, 홍성사, "중화인민공화국고 기독교 삼자 운동")
18 (왕쓰웨, 1998년 11월 8일. 한동대학교 학생들과의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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