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디아스포라

[스크랩] 중국의 모든 한인교회들에 바란다.

수호천사1 2008. 10. 4. 20:43

중국의 모든 한인교회들에 바란다.

중국의 한인사회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경우 현재 한인거류민들의 수는 5만을 상회한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해서 한인의 베이징 거류민은 20만명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만큼 한인들의 중국진출은 무섭게 증가되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이다.

중국에 한인의 숫자가 증가하면 또한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인교회의 숫자도 증가될 것이다. 이는 예상이 아니다. 이미 이러한 현상은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진출한 한인들의 증가와 아울러 한인교회의 증가는 이미 시작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인교회의 증가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며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려되는 바 또한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에 한인교회가 증가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한 때 한국교회의 고도성장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는 20세기 말렵부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 원인은 한국교회의 지나친 개교회주의 팽창과 맛물려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물리적인 교회성장론이 가져 온 부작용 때문이었다.

한국 일부교회들의 대형화는 한국교회의 성장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꾸준하게 고도로 성장하여 크게 부흥해 왔던 한국교회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990년대 초에 이르러 한국교회의 성장은 정체되기 시작하여 침체의 나락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해가 거듭될수록 심해졌다. 결국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추락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가 한국교회에는 내재해 있었다. 전체 한국교회가 성장이 정체되면서 퇴조되고 있는데 비해 대형화되어 가는 교회의 숫자는 해마다 증가되었으며, 전체 한국교회의 숫자도 꾸주히 증가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한 미스테리였다.

1990년 대 초, 한국교회는 전체 성도들의 숫자가 1,200만 명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십 수년이 지난 오늘까지 불변의 숫자로 한국교회에 의해 주장되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 정부의 고위 종교담당자가 밝히는 한국교회 신자의 숫자는 '카토릭을 제외하고 전체 프로테스탄트교회와 침례교도들의 합이 800만명대이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스스로 조사하여 발표한 통계와 정부에 의해 발표된 통계가 일치하지 않고 있음으로 보아 '한국교회 성도들의 수는 1,200만명이다'라는 숫자는 허수였음이 드라나고 있다. 이로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교회는 1990년 대 이래로 플러스 성장이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한국교회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한국교회의 전체 숫자는 해마다 증가해 왔고, 일부 교회들의 대형화 추세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교회의 성장은 정체되고 더 나아가 퇴조하게 되었는가? 어느 기독교계 신문기자는 '한국교회 교인의 숫자는 800만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혹 600만을 겨우 넘을지 모른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주장을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분명히 한국은 1990년대 초에 비해 지난 십 수년동안 수 백만 명이 자연증가에 의해 인구가 증가되오 왔다. 따라서 한국교회도 단순한 논리로 정체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인 증가를 기대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자연적인 증가를 고사하고 오히려 그 수가 큰 포인트로 감소되어 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여 교회의 부흥을 추구하는 어려운 일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복음을 들었거나 깨달은 이들을 대상으로 교인의 숫자를 채울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선호해 왔다. 따라서 이미 다른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을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배가운동을 빌미로 빼앗아가는 교인쟁탈전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음이다.

참으로 외형적인 성장을 과시하는 일부 대형교회들의 성장은 순수한 복음의 열정으로 인한 성장이 아니다. 교인들의 안일한 신앙생활의 선호와 일부 목회자들의 개인적 인기에 편승되어 일어나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 인한 성장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해에 수 백명에서 수 천명씩 전도했노라며 간증왕으로 선정되어 이 교회 저 교회로 간증하기에 바쁜 간증자들의 간증조차 공허한 메아리로 울려지는 허망한 숫자 놀음만이 한국교회에 가득했다. 이러한 일이 바로 한국교회의 아픔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의 한인교회에 한국에서 일어났던 이런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한국교회의 물리적인 성장지상주의의 그릇된 풍조와 교회와 교회간의 무리한 경쟁으로 인한 부작용이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음이 목격되고 있다. 한국교회의 거짓된 성장주의가 서서히 이 땅에 세워진 한인교회에도 전이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에 한인의 진출이 증가되면서 더욱 심각한 현상으로 증가되고 있다. 교회의 물리적인 성장의 거짓된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지금까지 보였던 한인교회의 일치된 담합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그를 대신하여 서로가 경쟁이라는 치졸한 분쟁의 조짐으로 균열되어 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제 알겠는가? 왜 필자가 중국에 한인교회가 증가됨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우려가 일어나고 있어 안타까워하고 있는지 이해하겠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건물의 대형화와 무리의 집단화를 성경적인 교회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히 교회는 건물의 대형화와 무리의 집단화가 아니다. 참된 교회는 성도들의 친밀한 모임이어야 한다. 성도들의 친밀한 모임은 결코 건물의 유무와는 무관한 일이다. 또한 무리의 집단화와도 전혀 무관함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부흥이라는 미명하에 건물의 대형화를 추구하기 시작했었고, 이로서 무리의 거대 집단화를 통한 세력화가 진행되어 왔다. 이 때부터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깊은 병에 들게되었고, 이로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한채 퇴락의 길로 치달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이런 전철을 벌써부터 중국에 진출한 한인교회들이 닮아가려 하고 있다. 아직 중국에서의 한인교회가 뿌리를 깊이 내리기도 전에 한국교회의 어두운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벌써부터 한인교회는 대형화를 추구하고 있었고, 급기야건물의 대형화의 바램을 기대하고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우리는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이 가져온 병패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했다. 교회의 대형화는 분열과 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본주의적인 조직화가 시도되었고, 그 결국은 일인 독재의 기형적 목회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교회는 부단히 흩어지는 교회였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흩어져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건물의 대형화나 무리의 집단화가 아니라 계속 흩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 중국의 가정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흩어짐의 현상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원형이 회복되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온주지역 교회들은 한 때 중국 전체교회를 영적으로 대표할만큼 우수한 교회였다. 그 교회들은 영적으로 성숙되어 꾸준히 성장하며 전체 중국교회들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그런 온주지역 교회들에 시련이 닥쳐왔다. 중국의 문화혁명이었다. 이 때 온주지역의 수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경향각지로 하방되기 시작했다. 그때만해도 그들은 교회의 위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전국에 복음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하방된 성도들이 정착하는 곳에는 새로운 교회들이 하나 둘 세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진정으로 중국교호가 내실있게 성장했던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온주지역 교회들은 위기가 왔다. 그 위기는 중국의 참담하기만 했던 문화혁명 시기가 끝나면서 찾아 왔다. 문화혁명시가가 끝나면서 온주지역 교회들은 재건되었고, 다시 부흥의 기틀을 잡아 갔다. 교회가 재건되면서 한동안 하방으로 사방에 흩어졌었던 과거적 아픔이 치유되면서 서서히 무리의 집단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상업적인 재주가 있었던 온주인들은 경제적인 풍요도 함께 누리기 시작했다. 무리의 집단화와 경제적인 풍요가 그들에게는 최고의 위기였다. 그러나 온주의 교회들은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한 채 무리의 집단화와 경제적인 풍요가 추구하는 안일한 신앙생활을 선호하게 되었다.

온주인들은 더 이상 박해와 핍박을 받는 가난한 신앙생활을 원하지 않았다. 무리의 집단화로 세력화를 이루며 안일한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당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외형적인 교회당 건축에 치중하면서 무리의 집단화를 이루어 가는 온주의 교회들은 더 이상 성장하고 않았다. 교회의 외형적인 모습은 점차로 웅장해 갔지만 성도들의 숫자는 증가되지 않고 정체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 전체교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영력은 날이 갈수록 소진되어 가고 있다. 결코 외형적인 교회의 성장이 진정한 교회의 성장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영적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그들은 점점 세속화의 길로 급하게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 한국교회가 무리의 집단화와 건물의 대형화나, 중국 온주지역 교회들이 무리의 집단화와 교회당 건축의 붐은 동일하게 내실있는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영적 성숙은 퇴보되거나 상실되어 왔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그런 한국교회와 온주지역 교회들이 범한 시대적인 오류를 지금 중국에 진출한 한인교회들이 답습하려 하고 있음이 감지되면서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옴을 감출 수 없어 속이 아련해진다.

중국의 한인교회들은 모국교회의 실패와 중국 온주지역 교회들이 실패한 길을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한인교회가 무리의집단화와 대형화를 추구하는 계획들은 여기에서 응당히 중단되어져야 함이 옳다. 그러나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지금 중국의 한인교회들이 모국교회와 온주지역 교회들이 이미 경험한 잘못된 전철을 밟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중국의 한인교회가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한인교회를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모국의 일부 대형교회에 의해 사주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진정 중국의 한인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분명한 이유를 깨닫는다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한인교회로 바르게 서기를 원합니다면....

더 이상 모국교회의 그릇된 사주를 따르지 말고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나 모국교회의 조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성숙된 교회의 자화상을 하루 빨리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비자치적인 교회로 추락되는 수치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중국의 한인교회도 얼마든지 자양, 자치, 자주가 가능한 교회로 당당하게 설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결코 허약함의 약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한인교회가 자리잡은 이 나라를 향한 필연적 섭리가 있다. 그러한 이 나라에 하나님은 한인들을 이주시키셨고 이들을 위해 한인교회를 세워주셨다. 그렇다면 한인들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섭리가 있음도 분명하다. 그렇다. 분명히 중국에 한인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는 한인교회는 그 뜻을 알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 한인교회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개체적으로 흩어진 중국의 한인교회들이지만,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약한 힘을 하나로 뭉쳐 협력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상호적인 협력만이 한인들을 이 땅에 이주시키시고 그들을 위해 한인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근본 목적과 이유가 적합한 교회들로 완성되어져야 한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한인교회들이 여러 곳이 있다. 최근까지 ○개처의 교회들이 있어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우의를 다져왔었다. 따라서 그들은 '베이징 한인교회'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고, 상호적인 경쟁을 피하며 공동체적인 교회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더 나아가 그 교회들은 '미래에 중국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선교적 공동의 관심사를 과제로 하여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담합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최근들이 이같은 담합은 서서히 균열이 생기면서 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한인교회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 별개의 집단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한인교회들의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단합이나 일치는 정보의 공유를 나누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상호적인 경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현재 베이징의 경우 한인교회를 표방하고 있는 교회의 숫자가 이미 10여 곳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은 각자 한인사회에 자신의 교회를 알리며 교세의 확장을 위한 경쟁체제로 돌입되었다. 이들 교회는 각각 모국교회에서 파송된 주체세력에 의해 관리되거나 운영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에서 가장 병폐로 여겨졌던 건물지상주의와 교세의 대형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복음을 듣거나 깨닫지 못한 이들을 전도하기는 어려운 길을 택하기 보다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다른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을 빼앗는 교인쟁탈전의 부끄러운 작태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베이징에서는 아주 엄청난 소문이 일고 있다. 한국의 모 대형교회가 어마어마한 자금을 동원하여 베이징에 대형교회를 건축하려고 한다는 소문이다. 그런 소문은 한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일부 대형교회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베이징에 지교회를 세우는 일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일은 한국대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머지 않아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로 관심이 클 수밖에 없다. 과연 한국교회의 일부 대형교회가 벌리는 베이징의 대형교회 건축계획이 가져오게 될 결과에 대한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베이징에 한인교회가 대형교회로 세워지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중국의 한인사회나 미래적 측면에서 중국선교에 얼마나 긍정적일 것인가에 대하여는 도저히 밝은 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래도 역사적으로 교회의 대형화와 교회의 성장이 무관했다는 사실들을 부인할 수 없기에 긍정적인 기대보다는 부정적인 우려가 더욱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한국교회가 대형화되기 시작하면서 한국교계의 난맥상을 확실하게 경험한 바 있으며, 중국의 경우에도 온주지역 교회를 통해 여실하게 교회당의 대형화가 가져오게 된 부작용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한국교회는 지속적으로 교회의 대형화가 진행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대형화 이면에 감추어진 한국교회의 실체는 애써 외면하려고 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한 교회의 대형화와 외형적인 성장이 결코 한국 전체교회의 진정한 성장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한국 전체교회의 퇴보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참으로 한국교회의 미래가 밝으려면 한국교회의 과오를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힌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이와 같은 악습의 폐단을 중국의 한인교회를 통해 전이하려고 하는 사실이 자못 안타깝다 못해 답답하기만 한 것은 필자의 기우일까?

아직도 중국은 선교초기이다. 물론 중국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역사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선교초기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필연적인 역사의 순리는 지금 막 선교의 문이 열려지고 있으며, 그 문을 통하여 성령의 불길이 서서히 강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이미 그 실체가 드러난 교회의 외향적 성장지상주의가 무분별하게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고 서글프게 한다. 이러한 감정은 필자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우려는 현지에서 오랫동안 사역하고 있는 일부 동역자들이 같은 생각을 품고 마음 아파하며 답답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인교회는 일치된 모습을 중국교회에 보여줘야 한다. 그들이 하나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중국교회는 한인교회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신뢰받지 않는 한인교회는 결코 중국교회의 동반자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한인교회는 더 이상 외형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외형적인 성장에 앞서 일치된 사고력과 믿음, 그리고 미래사명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주께서 왜 중국에 한인교회를 세우셨는가?'에 대하여 바르게 자문하고, 그에 합당하고 명쾌한 답을 신앙적 고백으로 자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인교회는 중국교회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뿐만 아니라, 중국교회를 크게 해롭하는 집단으로 전락되어 주님의 거룩한 섭리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주님의 나라에서 책망받게 될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진정으로 바른교회의 성장은 건물의 건축유무에 있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지금 중국교회는 사도행전적인 교회의 성장이 불길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믿고 그들을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우월감에 도취되어 중국교회에 훈수를 두거나 지배하려고 하는 식민주의적인 선교의 그릇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중국교회를 가장 가까이서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요, 친구로서 중국의 한인교회가 되어져야 한다. 웅장한 건물 건축을 통한 물리적인 성장의 기대감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은 바른교회의 성장과 무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바른교회의 성장을 퇴보시키는 악성 바이러스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는 교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중국의 한국교회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더 이상 한국교회는 거대한 교회당 건축지원의 명분으로 한국교회의 외형적인 성장의 그릇된 모습을 수출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제는 중국교회로 중국교회답게 해야 합다면, 중국에 있는 한인교회도 중국교회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도행전적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중국의 한인교회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오른손의 역할로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더 이상 한인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그릇된 계획은 포기되어져야 한다. 오히려 작은교회를 지향하며, 중국인들 속에서 인정받고, 중국인들 사회에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로 발전하고 증식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선교정책이야말로 중국에 한인들을 이주시키사 한인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큰 뜻을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 일을 위해 더 이상은 중국내에서의 한인교회가 분열하거나 교인쟁탈전의 부끄러운 추태를 벗어 버리고 다시 하나의 모습으로 일치된 아름다운 공동체의 다양성을 드러날 수 있도록 한국의 모국교회들은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중국은 날마다 변화될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한인교회도 중국의 변화와 발을 맞추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중국의 한인교회도 중국의 한 교회로 교회답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한국적인 교회의 전이는 더 이상 포기하고, 가장 중국적인 교회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 길만이 중국에서 한인교회가 최후까지 존재하면서 이 땅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거룩한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한인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

하나님은 참으로 중국의 한인교회가 변하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외형적인 교회의 성장에 집중하지 않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 겸허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자신의 실체를 돌아보며 중국에 이주한 한인들로 한인교회를 세우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하심이 이루어지길 위해 주님은 지금도 한인교회의 변화를 끝임없이 기다리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깨달음이 있지 않고는 한인교회의 존재가치는 뿌리채 흔들릴 것이며, 한인교회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교회로 발전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참으로 필자는 중국의 모든 한인교회들에 진심으로 바란다. 중국이 변하는 것처럼 한인교회는 변해야 한다. 한인교회의 변화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이 땅에 한인들을 이주시키시고 그들을 위해 한인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수 있다. 참으로 중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526

출처 : MyLoveChina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