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韓人과 朝鮮族의 불신적 관계는 치유되어야 한다.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중국에서 만나는 韓人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朝鮮族과 가까이 하지 말고, 朝鮮族을 믿지 말라. 朝鮮族을 가까이 하거나 朝鮮族을 믿으면 반드시 손해를 보게되기 때문이다'라는 권면이었다. 이러한 권면은 중국에 비즈니스 목적으로 들어온 韓人들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을 복음으로 섬기기 위해 왔노라는 일꾼들에게서도 한결 같이 같은 권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朝鮮族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에서 만난 朝鮮族들 역시 '韓人들은 하나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韓人들에 대하여 불신감을 드러내거나 심한 경우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속내를 감춘채 韓人들의 곁에서 그들을 돕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비즈니스 목적으로 중국에 머물고 있는 韓人들과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복음으로 중국인들을 섬기기 위해 왔노라는 韓人 일꾼들에게도 동일한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함께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관계는 몹시 불편할터인데.... 이렇게 불편한 관계로 어떻게 한 목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지금 중국에서는 韓人과 朝鮮族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히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불신하거나 심지어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의 속내를 밖으로 들어내지 않고 있다. 겉으로는 분명히 아무 문제 없는 파트너로 서로가 서로를 치켜 세우기까지 한다. 철저하게 위장되고 가장된 서로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랬다. 서로는 서로에 의해 개인적인 이익을 이루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기적인 이익에 대한 기대감은 상대방을 마음으로 불신하거나 더 나아가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들언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이기적 욕심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다. 좋은 우호적인 관계로 추진되어야 할 일들이 이러한 자신의 이기적 목적의 성취를 위해 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한편은 상대방을 이용하고, 다른 한편은 그것을 역이용하는 추악한 관계사슬이 유지되고 있음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으면서 함께 하는 일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거나 불신하면서 어찌 그들이 추진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히 성공할 수 없는 일이다. 실패가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일을 진행한다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패가 뻔한데도... 부실한 결과가 뻔한데도.... 계속되는 일의 추진이야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상호간의 엄청난 손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러한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중국에서의 韓人사회와 朝鮮族 사회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환경 속에서 피차의 목적이 성취되는 아름다운 결과를 창출하기 위한다면, 상호적인 불신의 그릇된 관계는 치유되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 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생산적인 존재로 변화되어야 한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그릇된 관계는 청산되어야 한다. 이렇지 않고는 건전하고 생산적인 관계로 새롭게 발전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韓人과 朝鮮族은 같은 민족이다.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는 같은 조상의 후예들이다. 韓人과 朝鮮族이 조국을 달리함은 단지 시대가 만들어 낸 정치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이렇게 정치적인 문제가 韓人과 朝鮮族의 민족적 정체성까지 갈라놀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히 국적은 달라도 한 민족이요, 한 동포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韓人과 朝鮮族은 같은 말과 글을 사용하는 동포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매우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서로의 이익에 反한 反民族的이고 反同胞的인 분열의 씨앗이 될 상호적인 경계심과 불신은 마땅히 치유되어져야 한다.
지금부터 10 수년 전만 해도 중국과 한국은 정치적인 사상문제로 피차 적성국가였다. 이러한 두 나라가 외교적으로 수교되면서 국교가 정상화되어 양국간에 국민들은 서로 내왕하는 관계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수 많은 韓人들이 새로운 꿈을 실현하기 위한 희망의 땅으로 밀물처럼 몰려들고 있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있던 중국대륙으로 들어와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韓人들의 중국진출이 쉬운 것은 어쩌면 중국의 朝鮮族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중국에는 비록 국적은 달라도 분명히 한 민족이요 한 동포인 朝鮮族이 있었기에 韓人들의 진출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업이나 일을 위해 외국으로 진출하려면 항상 언어의 장벽이 크게 문제될 수 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대상과 어떤 사업이나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위험부담을 각오하는 하나의 큰 모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언어의 소통이 없이 외국에 사업이나 일로 진출하는 것을 대부분 두려워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韓人들의 중국진출은 매우 쉬웠다. 중국도 분명히 언어의 장벽이 높은 외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사업이나 일을 위해 진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에는 朝鮮族이라고 하는 같은 조상의 후예들이 뿌리 내리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분명히 韓人들에게 있어 중국으로 진출하여 성공을 장담할 수 있는 최고의 기득권임에 분명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거니와 양국의 수교 초기에는 韓人들에게 있어서 朝鮮族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韓人에게 있어서 朝鮮族은 필연적 관계를 맺어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하고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불편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있었다. 상호적인 필요에 의해 서로가 서로의 이용가치가 유효하다고 여겨지기에 스스로를 속이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관계가 얼마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스스로를 속이는 행동은 또한 스스로 속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서로에게 속는 파괴된 관계는 서로에게 결코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오직 피차에 위해됨이 분명한데도 이러한 관계는 끝임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 유익한 관계여야 할 韓人과 朝鮮族의 관계가 서로가 서로에게 불편한 관계로 전락된 것인가? 왜 서로에 대한 심리적 경계는 나날이 높아지고 상호적인 불신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는가? 같은 민족으로의 동질성을 갖기보다는 자꾸만 이질적인 존재로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 장벽은 높이 쌓여만 가고 있는 것인가? 겉으로는 웃는 얼굴로 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을 철저하게 불신하는 이러한 풍조가 왜 생겨야만 했는가?
서로 아름다워야 할 관계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상호적인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협력의 기대감은 점점 잃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한 배신감과 적대감이 증가되고 있었다. 상호적인 불신을 가진 협력의 결과는 좋은 기대를 성취할 수 없는 법이다. 상대방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희생물로 이용하려는 태도는 결국 건전하고 유익한 결과를 낳기보다는 상호적으로 물질적인 손해와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히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점점 상호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관계로 추락되어지는 추한 모습만 들어날 뿐이다.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중국에 있는 韓人과 朝鮮族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불신의 장벽만큼이나 전체 韓人사회나 전체 朝鮮族 사회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가지게 되어 오늘의 韓人과 朝鮮族 사회는 나날이 냉각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국에서의 韓人과 朝鮮族의 관계는 치유되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연구하여 파악해 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주께서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서진사역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기 때분이다. 참으로 서진사역을 위해 부담을 주신 한국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임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찍부터 서진사역의 뜻을 이루시고자 이 땅에 朝鮮族을 뿌리내리게 하셨다. 한반도의 5천년 유구한 역사를 관장하시고 오늘까지 보존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무지함과 편협함과 아집으로 인하여 파괴된 韓人과 朝鮮族의 관계로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韓人과 朝鮮族의 상호적인 불신으로 냉각되어 가는 관계는 치유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역사는 언제나 관계를 통하여 이루신다. 그 관계는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먼저 중요하게 여기심을 알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주님께서 친히 사람의 형상을 취하사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거기에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자격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시키신 후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있었던 파괴된 관계를 치유하시고자 십자가에서 대속의 희생을 스스로 감당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주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무너진 관계를 치유하시고자 십자가의 희생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그렇다면 이제는 한국교회가 韓人과 朝鮮族 사이에 일어난 불신으로 인해 무너진 관계의 치유를 위해 스스로 값을 치르는 희생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분명히 누군가는 한 개인의 역량이나 한 단체의 역량으로 이루어질 내용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스스로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韓人과 朝鮮族의 상호적 관계는 치유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韓人과 朝鮮族의 파괴된 관계를 치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적 희생을 감당할 수 있는가? 먼저 한국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 외형적인 성장에 사생결단하듯 하는 그릇된 부흥의 논리가 먼저 개선되어야 한다. 한 개인이나 교회의 성장으로 큰 사역을 도모하겠다는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되어 서로가 서로를 세우며 한 가지 뜻을 향하여 동역하는 하나님의 공리를 이루고자 하는 겸허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중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중국의 선교를 위해 감당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중국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시대적인 사명의 당위성에 대하여 깊이 있는 성찰과 이해가 필요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시대적 부흥은 분명히 중국교회를 섬기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음을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한국교회가 해야 할 진정한 사명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올바르게 감당하려고 했더라면 결코 중국교회를 지배하려고 하거나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들을 형제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들을 친구로 여겨야 했었다. 한국교회가 이런 마음과 자세를 중국과의 수교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가지고 중국선교에 임하였더라면 오늘날에 일어나고 있는 중국에서의 韓人과 朝鮮族 사이의 파괴된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호적인 공존 속에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큰 도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한국교회에 중국을 섬길 수 있는 넉넉함을 허락하셨다. 이미 朝鮮族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 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섭리중에 한국교회가 21세기에 서진사역의 관문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자 철저하게 준비해 놓으신 프리미엄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 프리미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韓人과 朝鮮族의 관계가 더욱 아름다운 동역적 관계로 발전시켜 그들과 함께 서진사역의 역군으로 복음의 길을 향한 대장정을 이룰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주의적인 욕심과 패권주의적인 오만함이 하나님의 뜻을 어지럽히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아직도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이 남아 있음을 믿는다. 중국에서의 韓人사회와 朝鮮族 사회에 드리워진 불신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한국교회의 헌신적 희생을 요구하고 있음을 깨달야 한다. 이 일은 어느 누구에게 맡겨진 사명이 아니라 오직 한국교회에 맡겨진 중차대한 사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천하는 대 결단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중국교회를 새롭게 인식하라. 이를 위하여 한국교회는 먼저 군림하는 자세로 중국교회에 물질적인 지원이나 신학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전부인양 거드름 피우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국교회가 한국교회의 지원없이는 물질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교회답게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착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중국교회는 한국교회의 물질적인 지원이나 신학적인 지원없이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영적 교만은 오히려 중국교회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중국을 겸허하게 섬길 줄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에서의 韓人사회와 朝鮮族 사회의 파괴된 관계가 치유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상호적으로 파괴된 신뢰가 치유됨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헌신적 희생 없이는 중국에서의 韓人사회와 朝鮮族 사회의 불신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음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헌신적 희생이 물질적인 지원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임을 기억해야 한다. 함께 하고자 하는 정신, 동역을 인정하며 상대방에 대하여 인격적인 신뢰를 가지는 태도가 더 중요한 때문이다.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던 초기에 한국교회가 朝鮮族에 쏟았던 정성이 이제는 반목과 불신으로 파괴되자 그들을 피하여 중국의 한족에게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회피의 비굴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제는 어느 부분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중국을 섬기려면 그들 모두를 끌어 안고 무너진 관계,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여 치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진정으로 한국교회는 중국에 살고 있는 朝鮮族이든 한족이든 불문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정신, 동역을 인정하며 상대방에 대하여 인격적인 신뢰를 쌓으려는 겸허함으로 섬기는 섬김의 태도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참으로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성장은 괄목할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세계선교를 위해 얼마나 많은 금자탑을 쌓아 왔던가! 그러나 냉철하게 그 실체를 조망해 보기로 하자. 한국교회으 선교가 나타나는 외형적인 성공의 크기는 내용적인 면에서 그 기대치가 철저하게 미달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사실을 더 이상 감추려고 하지 말자. 솔직하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 그런 후에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이켜 반성하며 남은 시대라도 잘못된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세계선교가 외형적인 크기에 비해 내적인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서구사회의 선교정책을 그대로 답습함으로 비롯된 물질만능주의적 선교정책이 가져온 부작용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선교지를 지배하려는 지배주의적인 선교정책과 남에게 보여 과시하고자 하는 전시행정적 선교정책이 가져온 부작용이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성공적인 선교는 물질적인 후원이나 행정적인 지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지인과 더불어 마음으로 공감해야 한다. 마음으로 현지인과 친구가 되어 그들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지배자가 아니라, 리더가 아니라 섬기는 종으로, 친구로 다가가야 한다. 마치 우리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스스로 이 세상에 찾아오시사 우리의 친구가 되신 것처럼,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향하여, 더 나아가 세계교회를 향하여 이러한 겸허한 자세와 태도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한국교회는 진정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21세기의 선교대국으로의 먼저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한국교회가 선교하는 세계교회로부터 사랑받게 되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중국에서 韓人과 朝鮮族의 불신적 관계는 치유되어야 한다. 이 일은 한국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국교회만의 특권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의 중국인을 향한 헌신적 희생이 절실하게 필요한 작금의 상황임을 깊이 인식한다면 중국에서 韓人과 朝鮮族의 불신적 관계는 분명히 치유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이징에서
石一進 씀
200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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