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자료

[스크랩] “칠십 이레”(단9:20-27)

수호천사1 2019. 2. 11. 22:49

칠십 이레(9:20-27)

 

1. 다니엘이 한 기도의 본질(9:20)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작정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기도 내용은 이스라엘 민족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을 위한 것이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간절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먼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만 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죄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문제였다. 다니엘이 그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자복한 것은 그가 실제로 지은 구체적인 죄라기보다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백성으로서 그의 죄도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은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소간 다르다. 아담의 자손인 모든 인간은 당연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점은 죄의 집단성에 관한 문제이다. 다니엘은 의인이자 믿음의 조상으로서 설령 큰 죄가 없이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한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는 한 그 역시 죄에 참여한 것이 된다. 즉 다니엘은 자기와 이스라엘 민족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윤리를 앞세워 의인이 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또한 올바른 교회의 자리를 벗어나 혼자 의로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하고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한다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을 떠난 위치에 있다면 다른 악한 자들과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동시에 자복했다. 그는 그 죄를 자복함으로써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결심을 한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런 의미에 국한된다면 그것 역시 개인의 종교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한 방편이 될 우려가 있다. 다니엘은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과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2. 하나님의 응답(9:21-23)

 

선지자 다니엘이 간절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일상적인 저녁 제사를 드리는 시간 즈음 그가 기도하는 동안, 앞서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가 급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와서 앞뒤 정황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당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생활 칠십년 이후에 본토로 귀환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다니엘이 확정적으로 알고 있던 때였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자신이 온 목적은 지혜와 총명을 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그는 또한 다니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자임을 언급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이자 당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서 다니엘이 반드시 알아야 할 구속사적인 내용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은 가브리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냥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을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70이레와 앞으로 오시게 될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메시아에 관련된 예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의미이다. 다니엘에게 특별히 그 말씀이 주어진 것은,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 본토로 돌아가게 되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70이레는 단순한 역사적 전개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토 귀환은 결코 자유로운 삶의 획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귀환의 근본적인 목적은 저들의 독립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이방민족의 압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저들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그 점을 분명히 알려 주셨다. 이는 비록 다니엘 뿐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본분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예루살렘과 그 가운데 세우신 성전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 칠십년을 마친 후 본토로 귀환하게 되면 장래 그곳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특별히 70이레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주셨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그 의미를 마음속 깊이 품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에 관한 모든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연대에 관한 문제는 더욱 그렇다. 이는 하나님께서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그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생각하면 인간들에게 구체적인 내용을 연대기적인 비밀의 영역에 가두어 둠으로써 겸손한 삶을 요구하셨음을 기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서에 기록된 말씀을 마지막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도록 하신 것(12:9)에는 그런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70이레에 관한 예언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다니엘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무리하게 해석하여 단정적으로 확정지으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되 모든 것을 확정지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가운데 70이레에 연관된 해석을 시도한다면 그것 자체로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해석을 하는 가운데 자기주장을 확정지으려는 자들이 역사 가운데 많이 있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겸손한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그 말씀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깨달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다윗 왕국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니엘의 70이레에 관한 예언이 커다란 소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다니엘 이후의 구약시대 성도들이 70이레의 의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은 틀림없다. 나아가 선지자들과 민족 지도자들은 그에 더욱 민감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다니엘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에스겔을 비롯해 그 후에 살았던 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 선지자들은 물론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등 온전한 신앙을 가졌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그것의 의미를 깊이 상고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은 숫자적인 의미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비단 정확한 연대를 산정하여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마 예루살렘을 중건하라(9:25)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명(王命) 자체뿐 아니라 그 명령이 있었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다니엘의 70이레 예언은 구약시대 성도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3. 칠십 이레의 기한(9:24-27) 

 

다니엘서의 70이레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 왔다. 그것을 전적으로 상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구체적인 연대를 분명히 제시하는 세대주의적 입장을 가진 자들도 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그 내용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단순한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자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70이레에 관한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연대기적 접근을 해야만 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연대를 손꼽아 계산하며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힘든 여건 가운데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계시된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원천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셨음을 다니엘에게 알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은혜였다. 그 때가 완료되면 모든 허물과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9:24)

 

우리가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바는 이 말씀이 메시아 예언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끝없이 진행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심판과 더불어 마감하시게 된다. 따라서 정한 기한이 이르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게 되는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사실 불신자와 배도자들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방인의 포로로 사로잡혀가 신음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본토에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말씀 자체가 참 소망과 기쁨이 된다. 그전에 여러 선지자들과 다니엘에게 보여주셨던 모든 이상들과 예언이 때가 이르면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은 궁극적인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위 본문 말씀 가운데서 또 하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바는 지극히 거룩한 자에 관한 이해이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지극히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극히 거룩한 자라는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 거룩한 자가 장래 70이레로 정한 때가 이르면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사실 이미 다니엘서에 기록된 여러 예언들 가운데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숱하게 등장하셨던 분이다.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을 파괴한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용광로에 나타나셨던 사람의 아들 같은 분, 벨사살의 왕궁 벽에 나타났던 손가락의 주인, 다니엘의 사자굴에 나타나셨던 인자 같은 이가 곧 지극히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이다.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실제로 이 세상에 오셔서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써 왕이 되어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최상의 소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것은 70이레의 의미와 그 기한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종말의 시기에 대해 궁금해 하던 제자들과,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전 재림의 때와 기한에 대한 궁금증을 가졌던 제자들을 기억한다. 

이처럼 다니엘서에 예언된 70이레의 기간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산정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는 때와 기한에 대해 궁금해 하던 제자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답변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는 70이레라는 구체적인 연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연대 추정에 더욱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우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에 대한 구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즉 그것이 일반적인 상징에 머무르지 않고 그 가운데 구체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나름대로 70이레에 대한 연대를 추정 계산하며 계시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듭 밝히지만, 필자가 성경의 전체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연대를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연대 자체의 정확성과 그에 대한 확정을 짓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역사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주의 깊게 더듬어 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은혜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해서 연대기 자체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과거 역사와 더불어 이를 더듬어보기 위해, 바벨론에 의한 유다왕국의 패망과 포로생활 70, 그리고 그 후 본토 귀환과 함께 전개되는 연대기적 순서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및 공 사역과 예루살렘 성전의 최종적인 파괴 연대를 기억해야 한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이스라엘 민족과 예루살렘 및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소유한 구속사적 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그에 대한 대략적인 연대는 다음과 같다: BC605년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침공을 받아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다. 또한 BC597년에는 바벨론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침공해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BC586년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은 파괴되어 그 안에 있던 거룩한 성전기물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졌으며 유다 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은 처참한 상태에서 이방의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포로생활 70이 예언된 바대로, 예루살렘과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했던 바벨론 제국은 BC539년 메대 왕국의 다리오 왕에 의해 패망하게 된다. 뒤이어 BC538년에는 유대인들을 포함한 속민(屬民)들의 귀환 허용이 포함된 고레스 왕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그에 따라 BC536 이스라엘 민족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 귀환이 이루어졌으며, BC458년 에스라에 의한 제2차 귀환, 그리고 BC445년 느헤미야에 의한 제3차 귀환이 진행되었다. 

그 기간 중에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본토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들은 많은 반대에 부딪치면서 일시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그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결국 성전공사는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다리오 왕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던 다리오 1(BC522-486)가 통치할 때인 BC520년경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 의해 재개되었다(1:14,15). 그리고 그 성전은 다리오 1세 왕의 즉위 6년인 BC515년 경 봉헌하게 되었다(6:15,16) 

또한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은 BC458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지도자였던 에스라에게 본토 귀환을 원하는 자들을 인도해 가도록 조서(詔書)를 내림으로써 두 번째 귀환이 이루어졌다(7:11-13). 그런데 왜 왕은 그런 특별한 조서를 내렸을까? 그것은 아마도 쉽게 동화되지 않는 유대 민족주의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점은 적어도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페르시아 제국을 위한 정책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는 본토로 귀환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하고 영적 회복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애썼다. 이는 사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페르시아 제국의 법보다 모세를 통해 허락된 이스라엘 민족의 법을 우선시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BC445년 페르시아 왕은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중건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무너진 성곽을 건축하게 된다(2:7-9).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보수하며 건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은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분명한 사실은 페르시아 제국이 그에 연관된 정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와 유대인들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우리는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활동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 - <율법 교육> - <성벽중건>의 도식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된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허물어진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이 다시금 확립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앙적인 삶을 회복하는 언약의 백성들을 통해 메시아가 선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 사역, 그리고 그에 대한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최종파괴 연대이다. 예수님은 BC4년 경 탄생하여 AD26년 경 공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 후 AD30년 경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셨다. 그로부터 40년 정도 지난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인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니엘이 예언한 70이레에 관한 의미와 더불어 위에 기술한 연대기를 배경으로 하여 70이레의 예언에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70이레에 관한 역사적인 의미와 더불어 연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70이레의 시작과 끝에 관한 언급과 함께 메시아 예언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9:25)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생각해 본다. 그것은 우선 70이레의 시작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날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 예언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중건 명령은 언제 내려졌는가? 만일 그에 대한 사실적 해석이 분명하다면 아무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인 견해들이 있어 왔다. 그 중 하나는 BC538년 고레스 왕의 귀환 칙령이 내려질 때 이미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포함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견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스룹바벨과 함께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건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지배국의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는데 귀환자들이 그것을 어기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립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마 고레스 왕은 귀환만 명령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명령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수의 학자들은, BC445년을 70이레가 시작되는 시점인 예루살렘 중건명령이 있었던 해로 간주한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유다 총독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명령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느헤미야서 2장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연대를 다니엘서에 기록된 페르시아 왕의 예루살렘 중건명령과 동일한 것으로 확정지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혹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또 다른 시기에 그와 유사한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는가? 조심스런 견해이지만, 필자는 BC445년의 중건명령에 앞서 BC487년경에 그 명령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BC536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1차 본토 귀환이 있은 지 거의 백년이 지난 BC445년에 예루살렘 중건을 처음으로 명령한다는 것은 그 공백 기간이 너무 길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 봉헌된 것이 BC515년이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제국에 연관된 당시 국제적인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완성되고 봉헌할 시기의 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1세 왕이었다. 그는 호전적인 인물로서 BC492년 그리스를 공격하여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의 군대는 에게 해 북쪽 바다를 건너 트라키아를 공격하지만 거센 폭풍으로 인해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 그는 BC490년 또다시 에게 해를 지나 그리스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당시 다리오 1세 왕은 동쪽으로 상당히 넓은 영토확장을 꾀했다. 그리고 서쪽 세계를 향한 정복 야망을 가졌던 그는 몇 차례의 원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죽고 난 후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에 오른 후 다시 한번 그리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만다. 페르시아 군대는 BC480년 살라미스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페르시아 원정은 실패하여 소아시아 지역의 많은 도시들을 잃게 되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다리오 1세의 정략적 태도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선 다리오 1세는 BC492년과 490년 두 차례에 걸쳐 그리스 공격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군대를 재정비해서 그리스를 공격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그리스 원정을 실패한 후 다리오 1세는 그리스의 동향과 독특한 민족성을 지닌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은 그가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예루살렘 중건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명령했다. 그것은 명령을 받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싫어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강압적인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리오 1세는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을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유대인들의 민심해이(民心解弛)로 인한 동요를 우려했을 수 있다. 그와 같은 우려는 오랫동안 있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할 때도 많은 사람들은 그와 유사한 염려를 했다. 물론 그에 대한 우려의 이유는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두 차례 승리를 맛본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건너 이스라엘 지역을 통과해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해상활동과 해상전투에 능했던 당시 그리스 군대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다양한 이유와 함께 다리오 1세는 BC487년 예루살렘 중건을 명령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나중 페르시아 제국의 유다지역의 총독 느헤미야를 통해 또 다른 역사적 이유와 맞물려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이 보수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이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게 되면 끝을 내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며 뒤이어 고레스 왕의 예루살렘 귀환 칙령이 내려졌다. 그 후 다니엘을 통해 70이레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 가운데는 7이레, 62이레, 한 이레 등으로 구분된 이레가 중요한 의미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BC536년 본토로 귀환한 후, 7이레(49) 후인 BC487년에 있었던 페르시아 왕의 예루살렘의 중건 명령이 내려진 시점 사이에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들어있지 않았을까?  7이레 기간 중에, BC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이 본토로 귀환한 유대인들의 손에 의해 다시금 재건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 성전 재건이 완성되었을 때, 성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는 성벽의 보수와 예루살렘 중건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몇 가지 형편들을 감안해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번째 본토 귀환 후,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재건과 더불어 7이레인 49년이 지난 BC487년 경 예루살렘 중건명령이 내려졌을 수 있다. 페르시아인들의 정치적 의도와 정책 목적은 분명했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그 역사 가운데 작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가설을 재구성하며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다리오 1세가 예루살렘 중건명령을 내렸다면 그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원활한 정국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국내적인 정서때문이든 대외적인 국제관계 때문이든 페르시아를 위해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만일 이러한 역사 구성이 가능하다면, 그 때 왕위에 있던 다리오 1세 왕이 BC485년에 죽게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어떤 문제 때문이었다 할지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엿보게 해준다. 그것이 비록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왕의 건강상의 문제라 할지라도 통치 말기에 처한 왕은 조급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을 것이다. 

두 차례의 그리스 원정에 실패한 다리오 1세 왕이 재위 말기에 이르러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명령했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 때는 이스라엘이 BC536년 본토로 귀환한지 7이레(49)가 되는 해라는 점도 구속사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염두에 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쉽게 연관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출생하시면서부터 왕으로 오셨다. 그는 나중에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왕이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찾아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이가 어디 계시뇨?(2:2)라고 선포한 점과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고 경배한 것은 처음부터 그의 왕위를 받아들인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 때 예수님이 처음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확인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69이레(483)가 지나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이 차면 기름부음 받은 왕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메시아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약속이 제시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기한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은 역사적 구체성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69이레에 대한 정확한 기간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 가운데는 이미 구체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예루살렘 중건에 대한 명령이 있은 후 69이레가 되면 이 땅에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신 메시아가 오시게 된다는 사실이다. 

메시아를 대망하던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기다렸던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다니엘의 70이레 예언과 연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 당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여가 있었겠지만 성경을 통한 계시적인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동방에 있던 박사들 곧 성경을 연구하던 서기관들은 69이레의 마지막이 되어가는 그 때 즈음 베들레헴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7이레와 62이레가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다니엘서에는 69이레라 하지 않고 7이레와 62이레를 분리하여 표현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분명한 점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이는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있은 후 한 이레 즉 49년 동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일 70이레가, BC487년에 예루살렘 중건 명령이 내려지고 그 때 시작되었다면 그로부터 7이레 곧 49년 후인 BC438년까지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 때는 과연 어떤 특색이 있는 시기였을까? 그 시기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제사를 지냈지만 성벽이 허물어진 상태였으므로 거룩한 성전이 보호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중건되고 성벽이 보수됨으로써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 

다니엘서 예언 가운데는 곤란한 동안(in time of trouble)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垓字)가 완성될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 때는 과연 언제일까? 이는 아마도 성이 중건되는 동안 반대파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당한 곤란을 겪게 될 형편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란 말 속에는, 예루살렘 성내는 질서가 회복될 것이지만 외부적으로는 공격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성벽을 중심으로 안팎이 선명하게 구분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에스라의 율법 교육과 더불어 민족적 정체성 회복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기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70이레의 예언이 메시아와 직접 연관된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영원한 왕이 이 세상에 오시게 되지만 죄에 빠진 악한 세상은 그를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그에게 상당한 고통이 따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다니엘서는 7이레와 62이레 후에 메시아께서 도래하지만 그가 곧 끊어지게 될 것을 예언했다.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9:26) 

 

이 본문에서 62이레 후란 7이레와 62이레가 지난 다음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70이레의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직접 연관된다. 그런데 그 때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오게 되지만 곧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오시게 되면 오랜 기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끊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우리는 본문 가운데 사용된 끊어져 없어진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명이 끊어지는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글 성경들 가운데는 그 문구를 죽음에 연관된 것으로 직접 번역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성경 번역본들은 직접 그렇게 번역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주석이나 해석에 있어서는 대개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필자는 이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님의 갑작스런 은닉으로 이해한다. 다른 성경 번역본들에는, 그가 끊어진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없어지게 될 사실에 대한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신 후부터 삼십년 후 공 사역을 시작하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출생하셨을 때 헤롯 대왕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영아살해정책을 폈다. 그는 아기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를 찾아 죽이고자 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을 부모와 함께 애굽으로 피신시키셨다. 그 사건을 두고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는 메시아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에 연관된 사실도 언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후 없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죽음에 연관된 그의 끊어짐만 언급되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리고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게 된다는 말은 로마제국 황제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언급될 마지막 한 이레(7)와 그 절반에 해당하는 3년 반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읍과 성소 파괴를 언급한 이 예언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 군대에 의해 파괴된 것과 직접 연관된다. 이 사건은 감히 하나님의 언약을 담은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사탄에 속한 자들의 무서운 세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종말이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악한 통치자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에게 속한 악한 자들이 상당한 세력을 펼치는 듯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는 사실이 예언된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는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며 황폐하게 될 것이 작정되어 있음이 예언되었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은 인간 역사 가운데 지속된다. 다니엘서에는 그 전쟁이 세상 끝까지 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그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가운데는,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온 이후에 일어나게 될 그의 사역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구체적인 메시아 사역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이다. 이는 물론 위에 언급한 다니엘서 9 26절에 있는 말씀에 대한 보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연관된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9:27)

 

기름부음 받은 왕이 하시는 사역은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는 일이다. 본문에 언급된 는 메시아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장차 많은 백성들에게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다. 그런데 그는 그 이레 즉 7년의 절반의 기간에 해당하는 3년 반 동안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게 된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는 앞의 9 26절에 기록된 대로, 끊어져 없어졌던 메시아가 공 사역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드러나는 것과 연관된다. 즉 그는 배도에 빠진 헤롯왕의 악행으로 인해 약 삼십년 동안 은닉한 후 세례요한의 사역을 통해 공사역(AD27-30)을 시작하셨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이레의 절반 곧 3년 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7절의 상 반절에 기록된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라고 기록된 말은 예수님의 공 사역 기간에 발생하는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3년 반 정도의 공 사역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성전 제사와 예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선포하셨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진정한 제사장이며 제물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 전에 하던 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물을 잡아 번제와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예루살렘에 두고 그를 배척하여 성전에 동물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소행에 지나지 않는다. 

 3년 반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로 바쳐져 구약의 언약을 완성하시게 된다. 다니엘의 예언 가운데 7이레와 62이레가 시간적으로 연결된 개념이라면 마지막 한 이레는 그렇지 않다. 그 이레는 나중에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7절의 하 반절에 나타나는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는 말은 AD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를 앞둔 약 3년 반 동안 있었던 유대반란(AD66-70)에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본문에 나타난 미운 물건이란 헬라 계통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일을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운 물건이란 역사적으로 그 후에 나타난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마태복음 24 1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 기간 동안 유대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다니엘서 12 7절에 기록된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는 예언과 연관된다. 이 말은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메시아가 통치하는 새로운 왕국의 설립으로 인한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진다(12:7)는 말은,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인들과 그것을 파괴하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무런 세상적인 권세가 남아있지 않고 완전히 깨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본문 말씀 가운데서 성도들의 권세가 완전히 깨어진다고 하는 말을 주의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천년왕국인 보편교회 시대가 도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다니엘의 70이레 가운데 69이레가 마치는 시점을, 인간의 몸을 입고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탄생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등장해 3년 반 정도의 공사역을 하시게 된다. 그것이 다니엘서의 7이레의 절반인 3년 반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로 인해 사십 년 간의 사도교회 시대가 진행되며 메시아 왕국인 보편교회 시대의 기초를 놓게 된다. 즉 앞의 3년 반은 이후 따르게 되는 사십년의 사도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십년이 끝나갈 무렵 다시 7이레 가운데 절반인 나중 3년 반의 구속사적 실행이 이루어진다. AD70년을 앞둔 3년 반 동안 또다시 배도자들인 유대인들과 불신자들인 로마인들에 의해 엄청난 고통을 겪은 후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인 새로운 보편교회가 설립되게 된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3년 반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장래 세워지게 될 하나님의 보편교회의 기초가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동방박사들 칠십 이레 계산

 

다니엘서에 예언된 70이레는 메시아 예언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는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에게 특별히 보였던 별은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표지이기도 했지만 동방박사들이 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역할을 했다. 박사들은 그 별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을 만났으며 그 별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께로 갔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바는 동방박사들은 구약성경의 기록을 통해 주님의 강림 시기를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박사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출생할 지역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밀에 가려진 장소가 아니라 말씀 속에서 이미 공개된 사실이다.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그가 태어날 장소 뿐 아니라 그가 태어나게 될 시기에 대해서도 이미 성경 가운데 어느 정도 계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성경에는 그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70이레가 메시아께서 강림하게 될 시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면, 구약시대 성도들이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신약시대와 차이나는 구약시대의 특별한 계시적 방편을 기억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능하다. 즉 우리는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특별계시들이 주어졌던 사실을 기억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동방박사들에게 특별한 별을 계시하신 것과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관심 있게 읽고 묵상하던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 민족에 허락된 특별 계시에 따라 메시아가 오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은 메시아를 막연하게 기다린 것이 아니라 다니엘서에 기록된 70이레와 더불어 성경에 기록된 때를 기억하며 구체적인 시기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실은 메시아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어졌는데도 동방박사들이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복음서의 문맥을 통해 볼 때 그들은 메시아가 없어졌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다니엘서에 기록된 메시아의 끊어짐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다니엘서의 70이레의 기간을 연대기적으로 확정짓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선상위에, 하나님의 메시아 예언을 두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그 시기 자체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다. 대신 그에 대한 연대기적인 관심을 기울이되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광호 목사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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