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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대적

수호천사1 2019. 2. 11. 22:49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대적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반역적인 대적은 판에 박힌 일이 교회의 삶 가운데 "주인"이 되는 일상의 독재입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조직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성공적이기만 하면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정상적인 것으로 용인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다음 주일 경배가 어떨 것인지, 경배 가운데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 A.W. 토져 

 

■ "모세는 요단 강 동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호렙 산에 있을 때에,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산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니,  이제 방향을 바꾸어 나아가, 아모리 사람의 산지로 가거라. 그 인근 모든 지역, 곧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남부 지역과 해변으로 가거라. 또 가나안 사람의 땅과 레바논과 저 멀리 있는 큰 강, 유프라테스 강까지 가거라.  내가 너희 앞에 보여 주는 이 땅은, 나 주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이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라."(신명기 1:5-8)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대적은 습관의 독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방랑하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한 동안 안전한 산기슭에 머무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의 심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로잡고 있던 구태의연한 상태에 개입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곳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을 관찰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이 머물러 있던 그 산이 그들의 영적 체험이나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땅에 언젠가는 들어갈 것이라는 소망을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돌아다니며, 멋지고 편안한 장소에서 야영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틀에 박힌 일상의 심리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일상의 심리에 빠져 버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같은 장소에 계속 머물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부()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이었던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더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투지를 발휘해 끝내 싸웠을 것이고 아마도 에돔 사람들을 격퇴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앞으로 전진해 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빈둥거리며 하루하루 변함없이 그 상태가 계속되기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적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적을 식별하는 바로 이 문제에 관해 비현실적인 대답을 늘어놓으며 무의식적인 위선으로 대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요"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일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은 자유주의 때문에 그렇게 많은 골치를 앓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세가 쓴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이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창조 기록이 단순히 종교적 신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이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거나 그분이 재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주의 뒤에 자신을 숨기고, 우리의 가장 큰 적이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로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와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믿음을 굳게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유주의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정부와 아무런 갈등도 겪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그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면 밤새도록 기도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부는 우리를 귀찮게 하지도 않으며 우리를 문제시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감시해서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비밀경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땅에 살고 있으며 이런 특권에 대해 하나님께 매일 감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일상의 독재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반역적인 대적은 판에 박힌 일이 교회의 삶 가운데 "주인"이 되는 일상의 독재입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조직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성공적이기만 하면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정상적인 것으로 용인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다음 주일 경배가 어떨 것인지, 경배 가운데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을 미리 예언할 수 있고, 아무도 하나님께로부터 비상한 역사를 바라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습관적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판에 박힌 일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우리는 다음 주일에 일어날 일만 미리 예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달에 일어날 일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내년에 일어날 일도 미리 예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현재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고 미래가 현재를 그대로 답습하는 상태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공동묘지에서 일어난다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공동묘지가 관습에 순응하는 것 말고 다르게 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순응주의자들은 마을 공동묘지에 묻혀 잠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도 성가시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곳에 가만히 누워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정상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은 고인(故人)으로부터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공동묘지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판에 박힌 일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공동묘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많은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지어 버리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어 버리는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예측 블가능이란 분위기가 존재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거의 완벽하게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얼어날 것인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사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마지막 심판날'과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이유로 들어 책임을 회피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부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상태가 반드시 미래의 상태를 항상 결정지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새로운 일을 기대하면서 성장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가 부패해 가는 점진적 3 단계

 

어떤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즉시 바쁘게 움직임으로써 그것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 내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궁극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영혼과 마음의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우리가 잘못되어 가는 몇 가지 점진적 단계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1단계 : 기계적 단계

 

먼저 내가 앞으로 기계적 상태라고 일컬을 단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신앙 활동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면, 우리가 부르는 그 찬송들을 믿고 싶어 한다면, 복된 영적 개혁이 빠른 시간 내에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계적 상태에 사로잡혀 아무런 느낌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아무런 감탄도 없이, 어떠한 행복한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이 그저 종교적 활동을 반복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감격도 느끼지 않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지만 아무런 놀라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기계적 상태의 모습입니다.

 

2단계 : 습관적 상태

 

기계적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습관적 상태라고 일컫는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계적 상태의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기계적 상태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면 습관적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지만 심각한 병을 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그 사람의 아내를 불러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 남편에게는 충격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남편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남편의 병은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그러나 정작 그 사람은 자기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자기 사업에 매달려 부지런히 일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골프나 테니스를 치러 갈 수도 있고, 심지어 힘든 사냥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병을 앓고 있지만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 사람의 죽음을 앞당길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습관적 상태는 기계적 상태에 속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습관적 상태의 가장 큰 위험은 이 속박되어 있는 상태를 감지하거나 느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3단계 : 부패한 단계

 

세 번째 단어가 있습니다. 나는 이 단어를 별로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는 이 단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바로 '부패'라는 단어입니다. 교회는 내면적 부패 때문에 항상 시달리고 있습니다. 부패한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자면, 더 좋은 것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장을 행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 심리 상태에 빠지게 되고 영적으로 굳어지기 시작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나는 성장하고 싶어 하는 많은 복음주의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장하고 싶어 하며 주일학교를 더 크게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아서 자신들의 습관적 상태를 나누고 싶어할 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계적 상태를 축하하는데 도움을 주고, 결국에는 함께 부패에 빠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경배에 역사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서 회개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전혀 없고, 자신의 길을 고치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경건하게 보내는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싶어 할 뿐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도대체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서, 아무런 느낌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아무런 감탄도 없고, 아무런 놀라움도 없는 우리의 죽은 경배를 반복하겠다는 말입니까? 우리와 함께 기계적 상태의 노예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기만일 뿐입니다.

 

나는 우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단지 자기 기만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지 오래되었으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산지로 나아가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새로운 영적 체험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을 우리는 이 시대에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삶, 기쁨에 넘치는 삶, 거룩한 삶, 열매 맺는 삶,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 이 모든 것들은 다 우리의 것입니다.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능력,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도 응답.. 이것들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보라. 나는 너희들에게 이 땅을 주었다.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언약으로 주셨습니다. 가서 그것을 취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들의 모든 후손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17:20).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감히 어떻게 계속해서 기계적 상태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앞으로 진행해 나가라고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계적 상태에 있을 때, 그들 스스로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면 가브리엘 천사라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계적 상태에 있지 않다면, 내 설교에 화를 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기계적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정말로 기계적 상태에 빠져 있다면, 여러분은 그곳에서 빠져 나와야만 합니다.

 

나무로 만든 보조 다리와 건강한 다리의 차이점은 나무로 만든 다리의 경우, 찔러도 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부패한 교회와 살아있는 교회의 차이점은 살아있는 교회의 경우, 찌르면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내면적 부패에 빠진 교회는 아무리 찔러도 이미 죽어 있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아있는 나무는 싱싱하고 푸른 나뭇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로 나무껍질 깊이 상처를 내 보십시오. 수액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늙어 죽은 나무는 늙은 까마귀가 내려앉아 지낼 수 있도록 그곳에 그냥 서 있을 뿐입니다. 칼을 꺼내어 파고 싶은 만큼 깊이 파 보십시오. 그 나무는 죽었기 때문에 아무리 파도 수액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내 설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내 설교를 듣고 화를 내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면 여러분 가운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리라고 믿습니다. 



 A. Tozer/ Rut, Rot or Revival』  "습관적 신앙에서 벗어나라"(이태복 옮김:생명의 말씀사)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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