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
비유(比喩, Parable, 헬 파라볼레, 히 마샬)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동의한다. 당시 랍비들도 비유로 제자들을 교육했다고 한다. 그러나 랍비가 행한 비유와 예수께서 행한 비유는 같은 유형이 아니라고 한다. 랍비는 왜 비유로 말했고, 예수는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헬라어 ‘파라볼레, παραβολή’는 파라(para·옆에) 볼레(bole·던지다)이고, 히브리어 ‘마샬’은 진리 전달 수단, 지혜를 가리키는 말, 수수께끼, 이야기로 사용되었다.
비유의 목적이 무엇인가? 비유를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인가? 이해를 혼란시키기 위한 수단인가? 성경에서는 비유를 들어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했다(마 13:10-13, 막 4:11-12).
로버트 스타인(Robert H. Stein, 1935-)은 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1981년)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제자들에게만 주기 위한 방편으로 비유(막 4: 11-12)을 난제로 규정하며, 수사법 중 반어법(irony)으로 해소했다. 반어법은 반어(反語)를 사용해서 숨겨진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기술 중 하나이다. 다드(C. H. Dodd, 1884-1973)는 비유를 “자연이나 일상에서 이끌어낸 일종의 은유(metaphor)나 직유(simile)”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에 대한 가장 유력한 연구자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이다. 예레미아스는 루터파 선교사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1910-1918까지 8년을 거주한 전력이 있다. 히브리어, 아람어 등에 탁월한 실력자로 알려졌다.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비유>를 1952년에 초판을 발행하면서 개정을 거듭했다. 예레미아스가 주장한 주요 요지는 “예수가 전한 비유를 1세기 청중들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었는데, 사도들이 신비를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비유에서 예수의 직접 육성(ipsissimavox Jesu)을 들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예수의 비유에 대해서 두 관점이 수립된다.
첫째 예수 비유의 목적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는 사도들의 제시이고,
둘째 비유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한다는 것이다.
두 관점의 주요한 상이점은 사도의 이해에 대한 태도이다. 예레미아스는 사도의 제시를 거부한 것이다. 그것은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1694-1768)의 원리인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들 간의 연관성을 깨버린 것”에 것이다.
필자는 성경대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천국비밀(마 13:10), 하나님 나라의 비밀(막 4:11)을 제자들에게 알리시기 위함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마 13:15, 막 4:12에서는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함을 목표로 한다고 하여, 더 깊은 미로로 인도하는 것 같다.
씨 뿌리는 비유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법이었다고 예레미아스는 설명했다. 예레미아스는 예수가 죽은 후 10년 안에 비유들이 다르게 해석되었다고 제시했다(11쪽). 그렇다면 20세기 팔레스타인에서 1세기 팔레스타인을 직접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류는 칼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1949년)에서 규정한 주전 8-3세기까지를 차축 시대(車軸時代, Achsenzeit, Axial Period)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뒤로 산업혁명(18-19세기 초반)과 프랑스혁명(1789-1894)에서 의식의 대변혁을 이루었다. 그 시대의 산물 중 하나가 1775-1783년에 전쟁을 통해서 독립한 미국(America)이다.
예레미아스는 비록 선교사의 아들이지만, 산업혁명의 산물로 아시아를 정복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예루살렘에서 거주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 1세기 팔레스타인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은 망상(妄想)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50년 전 역사 이해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인의 이해로 과거를 구현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는 사도의 이해로 바른 믿음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집단이다. 라이마루스의 후예들은 그 방식을 거부했다. 라이마루스는 자기 생전에 자기 작품을 공개하지 않고 죽었고, 유고작품으로 새로운 표지(standing point)를 확립했다. 예레미아스는 그 표지에 충실하게 적응해서 자기 확문을 이루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로 예수의 직접 음성을 듣고 예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확언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를 믿음으로 정진한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깨닫지 못하게 했을까? 세례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고, 예수께서도 초기에 회개를 촉구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회개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다. 필자의 견해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도록 인내를 훈련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되지 않을 때의 자세는 교사를 인정하고 깊이 인내하는 훈련이 학생에게 필요한 자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더 깊게 설명했지만 비유를 깨닫는 제자는 없었다. 오래 참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결국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0-67)고 질문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께서 생명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떠나지 않겠다고 답변하셨다(요 6:68).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고 떠났다(요 6:71). 그리고 진정한 회개가 깨닫고 결행하는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에 등장한 이단은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인데, 그들의 주된 가르침은 “깨달아 믿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사도들로 세우신 방식은 “복음을 듣고 믿는 방식”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자기가 질 십자가 구속을 향한 여정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는 복음 선포이다. 11명의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고 가슴 칠 배신을 하였지만 예수 제자로 교회 기초가 되었고, 1명 제자는 예수를 팔았고, 가슴 칠 배신에서 자결하여, 영원한 저주에 이르렀다.
고경태 목사
'복음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믿음이란 무엇인가! (0) | 2019.02.07 |
---|---|
[스크랩] 인간의 실재성 문제 (0) | 2019.02.07 |
[스크랩] 믿음의 9계단 / 믿음은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즉시 회복하는 것입니다(요일1:3-10,190118/이병천목사). (0) | 2019.01.22 |
[스크랩] 설교와 영감(靈感 : inspiration) - [3] (0) | 2019.01.17 |
[스크랩] 설교와 영감(靈感 : inspiration) - [2] (0) | 2019.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