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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간의 실재성 문제

수호천사1 2019. 2. 7. 10:00

인간의 실재성 문제



1 “인간의 실재성(The reality of man)”이라는 주제는 신학뿐 아니라 철학, 나아가서 모든 학문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주제이다. 특히 신학이라는 학문은 이 주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만약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말”로 정의해 본다면 신학이란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신앙을 학문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정작 신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학문적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학문은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기술 또는 서술하여 명확한 말로 정의함으로 전개되고 발전된다.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를 인간의 정신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부단히 그 의미를 학문적으로 정립하려고 노력한 것이 학문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우리의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고백의 “상대”이고,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상대”이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그 분을 취급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다. 고대인들은 신을 사유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다. 특히 기독교가 전파되어 인간의 사상을 지배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기독교의 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고 이런 분은 처음부터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생명의 실재성이었다. 생명의 실재성, 특히 하나님의 생명의 실재성을 어떻게 인간이 사유할 수 있으며 또한 이것을 인간의 말로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신학이 안고 있는 중요한 과제였다. 고대인들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궁의 숙제로 남아 있다. 과연 하나님의 실재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때 분명히 주지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실재성이란 “하나님”이라는 어떤 실체가 가지는 고유한 실재성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과 관계하는 하나님의 실재성”을 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의 실체나 객관적 존재자 혹은 “그것”으로 표현되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말씀”이다. 비록 성경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나님이 그려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인간과 같이 하나의 존재자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기뻐하고 질투하고 분내시며 자비롭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표현된다. 보수주의적인 신앙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데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과 같이 표현된 이 점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도 그런 분임을 믿는 성향이 강하게 된다. 하나님을 인간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결과로 인해 하나님을 신앙인의 모습 안에서 활동하는 분으로 혹은 신앙인을 위하여 울고 웃으며 질투하고 분노하는 분으로 자연스럽게 그리게 된다. 사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인간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보인다. 몰트만(J. Moltmann)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오로지 인간의 자의식을 의식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무한자를 의식하는 것은 의식의 무한성을 뜻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넘어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고 단지 인간에서 생각되는 하나님이라 한다면 그 하나님의 무한이란 인간의 유한에서 상상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철학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공통점을 인정한다. 하나님을 신앙인도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철학과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하여 실재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연역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어 하나님은 하나의 존재자가 될 것이며 신들 가운데 하나의 신, 신들 가운데 강한 신 정도가 될 것이다. 

3 성경은 하나님을 “말씀”과 관련하여 묘사한다. 나아가서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인간을 향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실재성은 인간의 실재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인간의 실재성과 분리되어 논할 수 없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실재성은 곧 인간의 실재성을 드러내는 생명의 원천이며 근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생명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하고 나아가서 인간의 근원이 어디에 놓여 있음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로고스로 묘사하였고 그 로고스를 사람들의 빛이라고 본 점은 옳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말씀, 즉 로고스이고 이것이 곧 사람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빛이라고 요한은 이해하였다(참고. 요1:1-5). 하나님의 실재성은 곧 인간이 누구냐를 밝히는 실재성이다. 이 점에서 인간 이해의 접근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 그 출발점은 인간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실재성은 곧 인간 이해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 세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는 곧 인간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드러내는 질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눈에 거슬리는 인간 이해가 있는데 그것은 소위 세속적 인간 이해라 불리는 관점이다. 세속적 인간 이해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 있다. 인간에게서 자기 이해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고 나아가서 자기 이해의 근거에서 신의 실재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뿌리를 가깝게는 근대의 자아 발견의 철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데카르트(Descartes)에서 볼 수 있고 멀리는 고대인들의 철학적 사유에서 볼 수 있다. 인간에게서 자기 이해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에서 신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인간의 방식으로 사랑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보게 된다. 철학의 문제는 신을 사랑하지 않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신을 사랑하는 열정이 강하지만 인간의 방식으로 신을 사랑하려는 열심이 문제이다. 철학에서 하나님 사랑은 에로스가 분명하다. 인간을 연역해서 신에게로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철학을 ‘신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문제는 사랑 없음이 아니라 인간의 방식으로 신을 사랑하려는데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신앙을 앞세우지만 인간의 방식으로 신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철학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 이해의 출발점을 세속인들은 “자아”에서 찾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에서 찾는다는 점이 대조적입니다. 

4 그러면 “자아”는 무엇이고 “하나님”은 무엇인가? 보통 세속적 인간학에서는 “자아”와 “자신”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인간 이해는 “자신”에게서 시작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는 하나님에게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우리는 “상대”로 이해한다면, 기독교적 인간학은 인간 이해를 “상대”에서 출발한다고 해야 한다. 여기서 “자신”과 “상대”라는 개념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이 개념들은 사실 일상적인 삶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들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라고 할 때 보통 “나”라고 하지만 인식이론적으로는 “주체” 혹은 “주관”이라고 부른다. 윤리학적으로는 “인격”이라 할 수 있고 종교심리학적으로는 “의식”이라 칭하며 언어학적으로는 “주어”라고 부르며 신앙적인 말로 바꾸면 “영” 혹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가 철학에서는 자주 “정신”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결국 “자아”, “나”, “자신”, “주체”, “주관”, “인격”, “주어”, “영”, “의식”, “정신”이라는 말들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서로 같은 말이라고 이해하면 거의 정확하다. 이런 용어들과 대립되는 말들은 “타자”, “너”, “남”, “객체”, “객관”, “상대”, “육”, “무의식” 등으로 표현된다. 이 용어들을 통해 실재성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실재성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의미를 또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5 실재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전혀 새로운 질문이 아니다. 이미 고대로부터 던져진 질문이었고 학문의 발전 과정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던져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언어로 정의되지 못한 개념이기도 한데 실재성이란, 본질적으로 언명되거나 언칭될 수 없는 생명과 살아있는 모든 존재자 전체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실재성은 존재자와 관계하는 개념이 아니라 존재와 관계하며 본질 혹은 근원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용어이다. 

6 여기서 실재성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대조적인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Wahrheit) 개념이다. 다 알다시피 진리 문제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를 취급하면서 종국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규정하고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곧 무엇이 선이고 악이냐를 결정한다. 옳은 것은 선이고 그른 것은 악이 된다. 그런데 진리의 출발점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찾으려고 하고 그 잣대에서 선과 악을 정의하려고 한다. 진리 문제는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를 찾는 것이고 거기에서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는데 문제는 옳고 그름의 잣대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두드러진 사실은 옳고 그름의 잣대가 “유용함”에 강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옳은 것이 되며 결국 선이 된다. 유용성은 옳음이고 그것은 곧 선이 된다. 진리의 잣대는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데 있다. 

7 진리의 잣대가 유용성에 있다면 그 유용성은 항시로 변할 수 있다. 지금 시대에 유용했던 것이 다음 시대에는 무용할 있고 지금 사람들에게는 무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다음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간음이 과거에는 가정을 세우는데 무용했기 때문에 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다지 악으로 취급되지 않고 있으며 10년 뒤에는 아마도 진정한 사랑을 위한 유용함이 될는지 모른다. 결국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에 따라 진리가 결정된다면 그것은 항상 가변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진리의 가변성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전통적인 진리 개념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보통 전통적인 진리 개념은 “참된 것은 확실한 것(ens verum ens certum)”이라는 명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확실한 것은 참된 것이고 유용한 것이고 옳은 것이고 결국 선한 것이 된다. 진리 개념이 가지는 도식은 확실한 것이 선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확실성의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는 데카르트를 잊을 수 없다. 그는 실재성을 확실성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최초의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전제는 “확실하면 연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든 실재성을 확실성에서 규명하려고 했고 설명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실재성을 여는 열쇠로 “확실성”을 잡았는데, 문제는 “무엇이 도대체 확실한가”를 찾아야 했다. 그에게 긍극적으로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자아(Cogito)” 였다. 그는 “의심”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통하여 “자신”이 가장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의 실재성 이해에 있어 출발점은 “자신”이었다. 사유를 통해 자신의 확실성을 얻게 되었다. 자신이 주관으로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동시에 자신을 객관으로 세우기도 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존재를 발견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의 발견은 정신 사상사적으로 아주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즉 인간을 근대 이전의 인간과 근대 이후의 인간으로 구분시켜 놓았던 발견이었습니다. 그 이후 철학은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을 실재성의 근거로 세워놓는 학문의 방식을 유지한다. 그런데 이런 사유의 결과는 니체의 “신의 죽음(Gott ist tot)”이라는 사상으로 결론짓게 된다. 신의 죽음은 곧 포스트 모던의 사상의 핵심적 동인이 되는데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신의 실재성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었다. 이제는 인간이 신의 형상이 아니라 반대로 신이 인간의 형상이 된 셈이다. 

8 확실성과 자아와의 관계는 놀랍게도 “신의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이에 대해 철학자들은 왜 이런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다시 사유했다. “신의 죽음”은 인간이 영이나 생명의 문제를 확실성이라는 초점으로 연구하면 반드시 실재성의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진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인격주의자들(Personalist)과 실존주의자들(Existentialist)의 사유는 데카르트 이후 관념주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실재성 이해에 다른 방식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결론은 자아의 확실성이 실재성을 접촉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가 확실성에 기초하여 사유하는 한, 그 자아가 실재성을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익함에 기초한 진리 문제만 접촉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들에 의하면 실재성은 진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의 문제이고 생명은 진리 문제를 넘어가는 것이었다. 특히 인격주의자들에 의하면 진리와 실재성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구분되는 것들이었다. 진리는 진리를 얻는 방식에 의존해야 하지만 진리를 얻는 방식으로는 실재성을 얻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9 그렇다면 진리를 얻는 방식은 무엇이고 실재성을 얻는 방식은 무엇인가? 전자의 방식을 “주관-객관의 관계 방식(Subjekt-Objekt-Verhltnis)”이라고 부르고 후자의 방식을 “주관-주관의 관계 방식(Subjekt-Subjekt-Beziehung)”이라고 부른다. 전자의 방식을 “인식에 의한 방식”이라고 하고 후자의 방식을 “인격에 의한 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자의 방식으로 사유하면, 사유하는 인간 자신의 실재성은 확실해지지만 “상대의 실재성(하나님의 실제성)”은 상실된다. 그래서 인격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은 후자의 방식으로 실재성을 얻고자 노력하게 된다. 전자의 방식을 흔히 전통적인 사유라 부르고 후자의 방식은 현대 사상에서 주로 취급되는 사유의 방식으로서, 다르게 표현하면 “나와 너의 관계 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현대 신학자들은 주로 이 방식을 통해 성경과 신조를 해석하였고 신학을 조직하려고 노력한다. 사실, 현대 철학자와 신학자치고 이 방식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비록 때로는 이 방식도 나름대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신학자 그뢰게(G. Gloege)의 말대로 “우리는 인격주의가 주창하는 이 방식 뒤로 더 이상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길 원치 않으며 들어가서도 안된다(Wir knnen, wollen und drfen hinter den Personalismus nicht mehr zurck)”는 제언을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방식은 현대 사상을 위한 위대한 발견이었고 흔히 이것을 가리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유의 대전환”이라고 까지 불릴 정도이다. 

10 그렇다면 이 방식이 왜 발견되어졌으며 왜 필요하며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이 방식이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학문적 토론이 필요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이 개념을 그다지 잘 이해하는 것 같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자주 왜곡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 방식의 필요성을 종교 심리학과 실존주의 철학과 관련하여 논하고자 한다. 우선 심리학의 연구와 관련하여, 융(C.G. Jung)의 발견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점이 많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고려할 것은, 만약 누가 융의 심리학이 기독교적이냐를 묻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적 교리와 얼마나 상충하느냐를 묻는다면 ‘기독교적이다’ 혹은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학과 심리학은 서로 다른 차원이고 무엇보다 심리학은 기독교의 교리를 신앙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비기독교적이기 때문에 신학과 신앙에 무관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주변 학문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자들은 관심 영역인 신학만으로도 실재성을 취급하는데 족하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실재성은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알고 있는 영역보다 훨씬 크고 다양하며 에벨링(G. Ebeling)의 말대로 “실재성은 이런 학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1 융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함께 금세기의 위대한 발견을 담고 있다. 그의 이론 가운데 우리에게 관심을 주는 부분은 “집단 무의식”이다. 이것은 개인 무의식과 달리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세계의 실재성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의식에는 억압된 성적인 욕구나 충동만 있다고 보는 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종교적 원천과 같은 창조적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융은 “원형(archetype)”이라고 명하였는데 거기에는 모든 인류의 태초의 시간부터 내재하는 무엇이고 인간 정신의 본능적인 힘의 원천이며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행도의 유형이나 범주가 기인된다. 그래서 의식이 이 무의식을 인식하고 만날 때 소위 “자기와의 만남”, 즉 통합적 개성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종교적 체험은 바로 의식과 집단 무의식과의 조우에서 비롯된다. 융의 유명한 주장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을 위한 삶이라고 한 점에 있다. 마치 수면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과 같이 인간의 자아는 끝임 없이 “자기”를 향해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 “자기”가 바로 하나님이다. 현대인은 상징이나 신화나 체험을 상실한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 일수록 자아가 자기를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체험의 여정이 어렵다고 하였다. 

12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상은 하이데거(M. Heidegger)의 실존철학에서 논하는 “무(das Nichts)”이다. “무”의 발견은 특히 그의 후기 사상에서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인간은 이것을 불안과 염려라는 형태로 접하고 있다. 이런 형태로 접하고 있는 한, 존재는 “무”이다. 달리 말하면, 존재의 뿌리가 되는 것이 “무”이다. 독일 프라이부르거 대학 취임 강연이라고 할 수 있는 “형이상학은 무엇인가?”에서 그는 존재의 의미를 무 속에 가라앉는 것으로 보았고 존재 그 자체를 무로 입증하고 있다. 거기서 “무”를 “존재의 베일(Schleier des Seins)”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는 “공허한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의 존재자에 대립된 “타자”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 무의식의 세계와 하이데거가 제시한 “무”의 상관 관계이다. 이들은 전혀 무관한 것들인가?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물론 이해와 해석의 여지가 많겠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용어가 달랐을 뿐이지 모두가 실재성을 말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실재성은 융에 의하면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놓여있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근거가 되는 “무”에 해당된다. 이들이 공통점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생명의 근원이 발산되는 곳은 의식일반을 넘어서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실재성은 의식의 지평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용어로는 “무의식”과 관계하고, 철학적인 용어로는 “무”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집단 무의식”과 “무”가 인간의 의식에게는 마치 없는 것처럼, 인지될 수 없고 파악 불가능한 존재이며 경험될 수 없는 지평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여기에서 생명의 근원이 기인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과연 이 실재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가져올 수 있는가? 

13 융은 이 실재성을 “자기(Self)”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무”로 보았다. 동양의 노자도 자연 뒤에는 “무”가 있다고 이들과 유사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사상의 대가들은 공통적으로 실재성을 감지하고 있었고 이 실재성은 현실의 세계(present-at-hand)에 의해 간단하게 파악이 안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으로 인해 현실의 세계가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왜 그들에게는 이 실재성이 이렇게 보였을까?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이 실재성은 우리에게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이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 기독교인과 전혀 무관한, 외계인들을 위한 발견들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실재성을 기독교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는 없을까? 기독교가 만약 이 실재성과 무관하다면 지극히 작고 편협한 종교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이 실재성과 과연 무관할 수 있을까? 융이나 하이데거의 사상이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비판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로 보인다. 지금은 이들의 눈에 비친 이 실재성을 기독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우선으로 비친다. 

14 이들에게서 인간의 인식의 한계와 주어진 것으로서의 실재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목해야 한다. 인식이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 데카르트의 자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데카르트의 자아란 심리학적으로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고, 실존철학에 의하면 존재의 의미를 만나는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무의미로 전락하게 만드는 자아였다. 이런 인간의 의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실재성을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신기하게도 우리 기독교인들도 “체험”이라는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의 신앙의 체험이 융의 “자기와의 만남”이나 하이데거의 실존과 존재 의미의 만남인지는 토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실, 하이데거의 체험은 “사유의 체험”이지 신앙의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15 과연 기독교인의 체험은 무엇의 체험인가?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사유한 사상가들이 있다. 예를 들어 철학자로는 부버, 에브너, 로젠츠바이크, 그리제바흐, 에렌베르크, 로젠스톡크 후시, 뢰비트, 마르셀, 야스퍼스, 가다머, 레비나스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신학자로는 대표적으로 브룬너, 고가르텐, 하임, 오트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의 사상들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통점은 “너의 실재성(Wirklichkeit des Du)”이다. 특히 “나와 너” 개념을 최초로 발견한 에브너라는 언어철학자는 자신의 고유한 전제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실재성은 너의 실재성에 의해 결정된다(The reality of the I is determined by the reality of the Thou)”고 말이다. 여기서 “너의 실재성”은 곧 하나님의 실재성이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사상들을 표현할 때 공통적으로 “너의 실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곧 신앙의 체험을 전제하고 있다. 

신앙의 체험이란 곧 하나님을 “당신” 또는 “너”로 만나는 체험이라고 한다. 그리고 “너”의 발견은 곧 “나”의 발견이기도 하다. 에브너는 “너의 실재성”의 발견을 “말씀”의 발견과 동일시한다. 특히 에브너의 언어철학은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실을 제공한다. 위에서 이미 잠깐 보았지만 융은 의식의 지평 넘어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였다. 융에게는 말하자면, 각 인간은 태어나면서 “개인 무의식”과 아울러 “집단 무의식”이라는 엄청난 심연을 공짜로 가지는 셈이다. 그런데 융과 같은 영역의 학자도 아닌 에브너가 언어 연구를 통해 내린 결론은 “각 인간은 말을 가진다(Der Mensch hat das Wort)” 였다. 좀 비약해서 표현하면, 융이 가리키는 집단 무의식을 에브너의 입장에서 보면 “말을 가진다”로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의 영혼을 융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보았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와 연결되는 실존으로 보았다면, 에브너는 말과 언어의 관계로 보았던 것이다. 필자는 이 점에서 에브너를 이들보다 훨씬 기독교적이라고 평가한다. 적어도 그의 사상은 개혁주의의 신학 모토인 “하나님은 말씀이다”는 사상을 잘 대변해 주는 기독교 철학으로 비친다. 비록 여기에서 이들의 사유를 다 소개할 수 없어도 결정적인 몇 가지는 소개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실재성의 체험”이다. 과연 실재성과 체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16 실재성은 본질적으로 인식이나 이론,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인식”이란 다 알다시피 항상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데, 실재성은 처음부터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나 양의 대상이 아니다. 인식에 있어서 두 가지 선험적인 카테고리를 칸트는 시간과 공간으로 규정하였다. 지금의 우리 현대인의 인식이 공간적인 면에 너무 관계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면 실재성은 엄밀히 말해 시간과 관계한다. 그리고 시간과 관계하되, 지나간 시간과 다가 올 시간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간에 관계한다. 그러니까 실재성과의 만남은 곧 현재와의 만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은 실재성과 관계하는 시간들이 아니라 실재성을 사유하려는 인간의 사유가 만들어낸 임의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과거나 미래는 인간의 사유가 만든 임의적인 시간들이라면 실재성이 일어나는 시간은 오직 현재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만남은 오로지 현재에서만 주어진다. 체험은 이런 현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17 그러면 현재란 무엇일까? 통상 현재를 “지금 여기서(hic et nunc)”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순간”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현재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순간인 셈이다. 그러나 이 표현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본질이 원래 순간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가 현재를 순간으로 만난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실재성과 직접 관계하는 현재가 원래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성과 관계하는 우리 인간이 현재를 언제나 “순간”으로 만나고 있다. 현재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순간”인 이유가 있다면, “현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란 스스로 우리에게 자신을 처분하는 것이지 우리가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이외에 현재를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짐승은 시간 속에 살지만 시간을 의식하지 않으며 또한 의식할 수 없다. 따라서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시간은 유독 자신을 우리 인간들에게만 처분하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은 시간 속에 살면서 동시에 시간을 의식하며 또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주 시간이 간다고 한다고 한다. 이것은 시간이 실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간 자신이 시간에 의해 무의미로 내버려지고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의식하는 자신이 흘러가는 존재임을 발견한 표현이다. 시간의 핵은 현재이며 이 현재를 인간은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 현재를 체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순간”인 것은 현재가 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를 항상 순간으로 만나는 우리에게 본질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럴까? 이것을 어떤 현상처럼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은 될 수 있다. 즉 인간의 의식과 관계하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인간이 임의적으로 만든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실재성은 인간의 의식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 안에서 파악이 되지 않는다. 실재성은 우리의 의식의 차원보다 더 깊고 심원하며 무한한 영역에 거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고 비추는 생명이다. 우리의 의식이 실재성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실재성이 우리의 의식에 빛으로 자신을 비춘다. 우리의 의식은 실재성을 잡으려 하지만 실재성은 우리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 것이다. 오히려 그 스스로 우리에게 자신을 비추는데 인간의 영혼은 이 빛으로 살아간다. 

18 우리의 의식이 이 생명으로부터 비침의 “상대”가 되는 지점을 “체험”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체험은 하나님의 무한하고 깊은 실재성이 연약하고 시간 속에 사는 우리의 의식에 비추실 때, 즉 아주 작은 우리의 의식에 깊고 심원한 생명이 빛으로 자신을 비추실 때 비로소 시작된다. 하나님의 실재성과의 만남이 있기 전의 우리의 의식은 하나님의 실재성을 찾으려는 노력, 즉 부단히 이데아를 만들며 과거와 미래 속에 스스로 주인으로서 거하려 한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님의 실재성을 꿈꾸면서 이데아를 만든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사유와 사상은 내용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본질은 실재성을 형이상학적으로 꿈꾸는 “정신의 꿈(Traum vom Geist)”에 해당된다. 그러나 실재성은 인위적인 노력과 무관하게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실재성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며 인간을 향해 “말씀”한다. 

19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실재성을 순간으로 만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시간 속에 사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시간 속에서 만나야 하는 유한한 존재임을 뜻한다. “현재”야 말로 인간이 하나님의 실재성을 체험할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일 것입니다. 현재 이외의 시간은 하나님의 실재성과 무관한 시간이다. 사유나 사상은 인간의 자아가 현재에 거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에 거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사유나 사상은 시간에 자신을 맡기고 참여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고 시간을 “그것”으로 화석화하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간을 점유하려는 한, “현재”는 잃어버리게 되고 그 대신에 과거나 미래를 가지게 된다. 과거나 미래는 현재의 상실로 인해 인간이 임의적으로 가지는 시간이다. 결국 인간의 사상이나 사유는 과거와 관계하지, 현재와 관계하지 못한다. 

20 필자는 하나님의 실재성과 관계하는 인간의 존재를 “사람” 또는 “영적 존재”로 규정한다.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실재성을 무시로 만나고 체험하는 존재이다.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이 실재로(wirklich) 임하시는 장소이다. 하나님이 관념으로 혹은 이데아로 그려지는 장소가 아니라 실재로 거하시고 상주하시는 장소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인으로 거하시는 집이다. 바로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된다. 신존재 증명은 발설되는 이론적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만 증명된다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노력이 철학과 교회에서 많이 있었지만 이런 증명은 신의 실재를 증명한 것이 아니고 신을 그리는 인간의 이데아를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실재성은 이런 증명을 통해 입증되지 않는다. 인간이 실재성이 임하는 장소가 될 때 비로소 그 실재성은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재성은 오직 “사람”만이 증명할 수 있고 “사람”에게만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21 그렇다고 “사람”은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래 모습을 지칭한다. 여기서 “본래 모습”이라고 할 때 ‘인간의 본래 모습이 어떠하길래 그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이란 곧 불순종 이전의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할까? 사실 우리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어차피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래를 잃어버린 인간이 상상을 통해 그 모습을 다시 찾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잃어버렸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그리는 모든 “본래 모습”이란 허구이며 상상이며 증명할 수 없는 환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22 하나님의 실재성과 관계하는 인간성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은혜가 있다면 그는 예수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원형”에 해당될 것이다. 그 분은 “만들어진 상”이 아니라 “만드는 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 분은 사람의 본래 모습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형이라고 해야 한다. 예수가 “사람”을 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예수를 닮았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인간(Der wahre Mensch)”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실재적인 인간(Der wirkliche Mensch)”에 해당된다.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하는 하나의 사명을 가진 존재이지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를 사람의 뿌리라고 하면 어떨까? 이 생각은 ‘예수 안에서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사사한다. 하나님의 실재성과 관계하는 존재는 예수 안에서 갖게 되는 인간성, 즉 “사람”이다. 원형인 예수로 인해 그와 같은 존재로 변화된 존재를 가리킨다. 이것이 사람의 원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안에서 그와 닮은, 달리 말해 그와 유사한 인간성을 가지는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23 필자가 이 책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어떤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의미를 아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가 무엇을 말했고 무엇을 행했고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필자에게는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사람”을 비추어주는 본질적인 해답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존재를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인간(Der Mensch zwischen Gott und Welt)”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사는 존재이다. 서양의 세속 철학적 인간 이해에서 손상된 면은 바로 “사이(Zwischen)”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에로의 인간”이든지 반대로 “세상에로의 인간”이든지 어느 한 편에 선 인간 이해가 되었다. 전자는 세상 없는 하나님을 가졌고 후자는 하나님 없는 세상을 가졌다. 전자를 관념주의적 인간 이해라 부르고 후자를 실증주의적 인간 이해라 부른다. 전자는 인간의 “육체성”을 무시하였고 후자는 인간의 “영성”을 간과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세울 수 있다는 자율주의적 인간성을 가진다는 데 있다. 

24 하나님의 실재성과 관계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세우는 자율주의적인 인간이 아니다. 자율주의적인 인간이란 “상대”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세우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상대”로 인해 존재, 즉 “상대 “앞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를 뜻한다. 자신을 부정해야 “상대”가 나에게서 주인이 될 수 있고 나에게서 역사와 창조의 능력으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여기서 “부정”한다고 할 때 단순히 패배주의적인 혹은 허무주의적인 열등감을 뜻하지 않는다. 나를 부정하는 것은 곧 “상대”를 부르는 것이 된다. “너로 인해 내가 된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기부정은 곧 기독교의 믿음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믿음을 가진 인간성일 수 있다(참고. 빌2:5-11). 


이 존재는 세상 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도 아니다. 세상에서, 혹은 세상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이고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사는 자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사람에게 비로소 “앞에서(coram)”라는 말은 의미 있는 표현이 된다. “사이”를 발견하는 자만이 “앞에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주의 인간학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homo coram Deo)”을 강조한다면, 정확하게 말하여 “세상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homo coram mundo ad Deum)”이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향하는 인간(homo coram Deo ad mundum)”을 뜻한다. 하나님과 세상은 “사람”에게는 장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의 생명이고 생의 의미이며 그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수환(광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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