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영성,기도

[스크랩] 에드워즈의 하나님 체험과 청교도들의 관상기도 신비주의

수호천사1 2018. 12. 11. 15:19

에드워즈의 하나님 체험과 청교도들의 관상기도 신비주의

정이철  |  cantoncrc@gmail.com

 
 청교도들에게 흔했던 관상기도를 연구한 탐 쉬안다(Tom Schwanda) 박사


에드워즈가 칼빈주의 신학 사상을 구축하여 알미니안주의가 발흥하는 것을 크게 늦추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에드워즈의 일생은 종교개혁 신학과 칼빈주의 신앙을 수호하는데 헌신한 인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인「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Will, 1754)에서 당시 영국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오는 종교개혁 신학과 칼빈주의 사상의 가장 무서운 적 알미니안 신학의 핵심을 정 조준하였다. 아담의 반역죄의 영향 아래 태어나는 인간에게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의지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했다. 에드워즈는 다음의 성경 말씀을 의지하여 구원이 오지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에드워즈의 또 다른 대표작「원죄론」(Original Sin, 1758)도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오는 영국 국교회의 알미니안 신학의 원죄론으로부터 뉴잉글랜드의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존 테일러(John Taylor)라는 사람이 책「성경적 원죄에 대한 자유롭고 솔직한 조사」(the Scripture-Doctrine of Original Sin Proposed to Free and Candid Examination, 1740)이 출판되어 많은 목회자들이 애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죄의 종이 되었고,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알미니안 신학의 원죄사상을 논증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들에게 이 책은 반드시 응전하여 무너뜨려야 할 사탄의 아성이었다. 그래서 아이작 왓츠(Isaac Watts), 데이비드 제닝스(David Jennings) 등이 반박하는 책을 출판하여 대응하였으나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심지어 알미니안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한 존 웨슬리(John Wesley)까지도 이 책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면서 나름대로 대응하려고 궁리하였을 정도였다.1) 스코틀랜드 친구 어스킨이 이 책을 대서양을 건너편의 에드워즈에게 보내주었다. 에드워즈는 테일러의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우려하였다.

“우리의 경건하고 탁월한 신앙의 선조가 견지한 기독교 원리와 체계를 뉴잉글랜드의 서부에서 뿌리째 없애는데 (이 책만큼)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었다.”2)

결국 에드워즈의 탁월한 작품「원죄론」이 출판됨으로 인해 인간의 전적타락과 오직 택하심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부정하는 알미니안 신학의 원죄 사상과의 전쟁에서 칼빈주의는 우위를 점령하게 되었고 알미니안 사상은 상당히 후퇴하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이 정도로도 칼빈주의와 종교개혁 신앙을 수호하는 영적인 전쟁에 일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칼빈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에드워즈의 신비주의

그런데 이러한 그림과 도무지 조화되지 않는 또 다른 그림이 에드워즈의 신앙에서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에드워즈가 숲이나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면서 체험한 환상 같기도 하고, 상상 같기도 하고, 허상 같기도 한 특이한 영적 체험을 하였고, 그가 설교하고 인도한 집회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몸이 진동하고, 몸이 마비되고, 환상을 보고, 비정상적으로 울부짖고 ... 등의 훗날의 은사주의 집회 현상들이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숲에서 묵상하다가 체험 현상들을 살펴보자. 다음은 에드워즈 자신이 기록으로 남긴 것을 백금산 목사가 번역하여 자신의 저서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 없을까?」에서 소개하여 준 내용이다.
 

  

 

“때때로 산 속에 혼자 있거나 어느 한 적한 들판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달콤하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몰입해 있는 일종의 어떤 환상이나 끊임없는 생각 또는 상상에 빠지고 했습니다.”(166 페이지)

“목장을 걸어다니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위험과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내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166 페이지)

“거의 만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고요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순수함, 하나님의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 그리고 이런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습니다. ”(167 페이지)

“해마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종종 숲 속이나 조용한 곳을 혼자서 걸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168 페이지)

“종종 나는 시내에서 좀 떨어진 허드슨 강가의 조용한 곳에서 휴식하면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묵상하고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곳에서 달콤한 시간을 가졌습니다.”(173 페이지)

“거기서 약 3개월 동안 아파서 누워있었습니다. 병중에 있을 때 기쁘게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달콤한 능력으로 나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176 페이지)

“노샘프턴에 온 이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을 보면서 종종 하나님 안에서 달콤한 만족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나에게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177 페이지)

“하나님은 나에게 삼위일체적인 분으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품격 높은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79 페이지)

“나는 종종 그리스도의 탁월한 충만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온유하시고 적임자이신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만 왕으로서 내게 나타나셨습니다.”(180 페이지)

“1737년 어느 날, 나는 건강을 위해 말을 타고 숲 속으로 갔습니다. 휴식 장소에 도착해 평소처럼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즉, 그 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 되신 것과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수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또한 그 분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겸손하심을 보았습니다.

이 은혜는 아주 조용하고 달콤하게 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보다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함은 모든 생각과 개념을 삼킬 만큼 충분했습니다. 이 체험은 제가 판단하기에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눈물을 홍수처럼 쏟으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나의 영혼이 텅 비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 나는 다른 때에도 여러 번 이와 아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 때마다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180-181 페이지)

“나는 여러 번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사역을 느꼈습니다. 성령의 거룩한 역사로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 영혼 속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전달하심을 통해 무한한 영광과 달콤한 셈으로 나타나셨습니다.”(181 페이지)

“최근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더욱 충만하게 그리고 더욱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즐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에 계시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184-185 페이지)

 

에드워즈가 경험한 이러한 체험들은 성경에 나오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 나타난 특별계시 체험과는 달라 보인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계시 체험은 내용과 의미가 분명하였다. 그런데 에드워즈에게서는 뭔가 일어나기는 했는데, 무엇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주 모호하다. 그러나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어떠한 내용의 환상을 어떤 모양으로 보았다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우나, 그렇다고 아무런 신비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환상이라고 해야 할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상상이라고 해야 할지 ... 환상이라고 표현하기로 하자!

 

에드워즈와 성령의 특별한 은사

에드워즈는 환상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 에드워즈가 딱히 환상 하나를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학적인 입장을 밝혔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말씀이 담긴 ‘충동’(impulse, 예언 등을 의미하는 듯)이 일어나려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게 임한 ‘영감’(inspiration)이 임하여야 하는데, 그런 ‘특별한 은사’(extraordinary gifts)는 사도시대에만 존재했다고 보았다.3) 에드워즈가 1742년에 남긴 말 속에는 더욱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나타나지 않음을 명시한다.

“현재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하심에 매우 해를 미치는 잘못된 것 하나는 오늘 날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나 영감(inspiration)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오류를 보호하여 주고 계속 지지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 인도되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잘못된 행실로부터 벗어나고 변화되지 못할 것이다.”4)

에드워즈는 사도시대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내포된 예언, 환상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도시대에만 있었던 성령의 특별한 은사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방언과 예언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에드워즈가 환상 보는 것에 대해 완전히 문을 닫았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 부인 사라가 몇 번이나 입신하여 천국의 황홀함을 맛 본 것에 대해 에드워즈는 심히 기뻐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남긴 글들에서 그는 여전히 입신에 들어갔던 사라가 환상을 경험한 것을 매우 아름답게 기술하였다. 에드워즈가 환상을 보는 것에 대해 어떤 신학적인 입장을 가졌는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환상에 대해서는 거부하고, (에드워즈가 잘 쓰는 표현으로) 성령이 신자들을 성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음을 신자들에게 전달하여 주는 성령의 영광스러운 사역으로서의 환상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인정했던 것 같다.

에드워즈의 이런 성향 때문에 개혁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서로 에드워즈가 자기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계시를 동반하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 사도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개혁주의자들이 그를 지지하고, 계시가 없는 성령의 특별의 사역으로서 환상 등을 경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했으므로 은사주의와 신사도 운동가들도 그를 지지한다.

 

에드워즈와 청교도들의 관상기도 

에드워즈가 자신이 체험하고 자선에 기록한 내용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처음부터 에드워즈의 모습이 관상기도하는 사람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자주했다. 왜냐하면 그가 체험한 것이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환상과는 달라보이기 때문이다. 은사주의자들의 환상이 성령에 의해 선명한 이미지로 나타나고, 그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또는 성령을 체험하였다는 내용이 많고, 그때 달콤함, 신비함, 기쁨, 즐거움 등의 행복감을 느꼈다는 내용이 많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에드워즈가 남긴 글을 번역하여 소개하여 준 백금산 목사는 에드워즈가 자신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을 주로 어떤 단어들로 표현했는지를 분석하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체험에 대한 내용들을 그의 자서전에서 여러 가지의 용어로 표현합니다. 즉 감각하다(sense), 보다(see), 나타난다(appear), 여겨진다(seem), 느껴진다(feel), 체험한다(experience), 맛보다(taste)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5)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은 무엇보다 달콤하고 기쁘고 즐거운 체험이었다는 것을 그는 달콤함(sweet), 즐거운(delight), 기쁜(joy), 유쾌한(pleasant) 같은 형용사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어들의 빈도수는 에드워즈 자서전의 거의 매 페이지 마다 나타나고 있습니다.”6)

‘감각하다’, ‘보다’, ‘나타난다’, ‘여겨진다’, ‘느껴진다’, ‘체험한다’, ‘맛보다’, ‘달콤함’, ‘즐거운’, ‘기쁜’, ‘유쾌한’ 등 이와 같은 단어들로 표현되었던 에드워즈의 영적인 경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 대체 어떤 신비한 경험이었기에 이런 단어들로 표현하였을까? 이전에 가졌던 이 생각을 또 한 번 더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에드워즈가 관상기도에 빠졌던 모양이다!”

신사도-은사주의 성향의 관상기도 지지자들이 점점 늘고 있는데, 그들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주 임재체험’을 한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관상기도하는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장 경지는 신인합일의 영성이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에드워즈의 신비 체험을 관상기도와 연관시키면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인 은사주의자들의 환상 체험과는 그림이 조합되지 않는다.

“대체 청교도 인물과 관상기도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매우 주목되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2018년에 예장 고신으로부터 교류금지 대상으로 결정된 분이 있는데, 그 분은 <바른믿음>을 열심히 읽으면서 “정이철이 ....”라는 제목의 비판의 글들을 자주 올린다. 이 분은 관상기도를 매우 지지하는 분이다. 이 분이 쓴 관상기도에 대한 글 링크를 누군가 나에게 보내주었다. 읽어보니 이 분이 2015년에 쓴 글이었는데, 놀랍게도 청교도들도 관상기도가 깊은 연관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분이 이 글을 쓴 이유는 개혁주의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관상기도를 이단시하는 것에 반발하여 개혁주의의 조상 청교도도들도 관상기도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청교도와 관상기도 신비주의

시카고의 휘튼대학(Wheaton College)의 실천신학 교수인 탐 쉬안다(Tom Schwanda) 박사의 저서「영혼의 재창조: 청교도주의의 관상적 신비적 경건」(Soul Recreation: The Contemplative-Mystical Piety of Puritanism, 2012)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 책은 청교도와 관상기도가 연관이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관상기도를 즐겼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책이라고 한다.

저명한 신학자 J. I 패커(J.I. Packer)가 이 책의 서문의 글을 장식했는데, 그는 청교도들의 관상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쉬완다 박사는 하나님 안의 즐거움을 강화하는 통로인 관상기도를 갱신하는 (청교도 역사의) 회복이 오늘날 건전한 복음주의 영성에 훌륭한 기여를 할 것으로 믿는데, 나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작 앰브로즈에 관한 연구서인 이 책을 열정적으로 추천한다.”

풀러신학교 총장인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는 추천사에서 청교도들의 관상기도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훌륭한 책에서 탐 쉬안다는 최근에 우리가 후회할 정도로 비밀로 하고 있었던 사실-청교도들이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 더 나아가서 심오한 깔뱅주의자가 되는 것 즉 신비주의에 대한 가르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책의 132페이지에는 대표적인 청교도 지도자 존 오웬의 말이 실려 있는데,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함, 소망, 사랑 및 은혜를 ‘관상’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교제의 작은 일부이다”
 

이 책의 저자의 연구에 의하면, ‘관상적-신비적 경건’이 주류 청교도들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었다고 하는데, 만일 에드워즈에게도 관상기도 성향이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에드워즈가 1737년 말 타고 숲에서 가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자주  경험했다고 자서전에 기록된 신비한 체험들이 관상기도의 영성 체험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에드워즈 관련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영성’, ‘묵상’이라는 단어들은 관상기도와 연관이 있었을까? 속단하지 말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지켜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 말고 다른 분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연구하여 주기를 바란다. 



정이철 목사는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이다. 총신대학(B.A),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아세아연합대학 대학원(Th.M), Liberty Theological Seminary(STM)을 졸업했다. Fuller Theological Seminary(Th.M)에서 수학했고, 현재 미시간의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Th.M)와 Liberty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계속 연구한다.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제3의 물결에 빠진 교회」, 「가짜 성령세례에 빠진 교회」를 출판하였고,「침묵기도, 중보기도, 방언기도」출판을 계획하고 있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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