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교회언니] 무명의 기독 여성 독립운동가를 위하여
- 양민경 기자 (국민일보)
년 4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 지역.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 직후 한 미국인의 주택에서 미국인 여성 한 명과 중국인 남성들이 나옵니다. 중국인 일행 중 한 남성은 미국인 여성과 부부인 듯 자연스레 운전기사가 딸린 차량에 동승합니다. 주변엔 일본의 밀정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진을 치고 있어 분위기가 삼엄했습니다. 하지만 일행을 태운 차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주택가를 벗어납니다.
첩보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내용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와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1883∼1979)의 회고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여기서 차량을 몬 운전기사는 피치 선교사이고 미국인 여성은 그의 아내 제럴딘 피치(1892∼1976) 여사입니다. 남편인 양 피치 여사의 옆자리에 앉은 남성은 누구였을까요.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나머지 중국 남성들은 김구 선생과 함께 피치 선교사 집에 은신했던 독립운동가들입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상하이를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한 백범 일행을 피치 부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운 것이었습니다.
제럴딘 여사는 일제의 폭압 아래 고통 받는 한국인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던 강단 있는 여걸이었습니다. 그는 피치 선교사와 결혼하기 전부터 중국에서 감리교 여성 선교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1717년 중국에 파송된 제럴딘 여사는 24년까지 감리교 청년회 총간사로 활동했습니다. 피치 선교사와 결혼한 후엔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남편과 함께 한국의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 받도록 힘썼습니다.
김구와 부부로 위장한 일 외에도 그의 여걸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제럴딘 여사는 당시 미국과 중국 내 여러 기성 언론에 한국 관련 글을 기고했는데 이들이 사실 관계와 다른 내용을 보도할 경우엔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일례로 42년 8월 뉴욕타임스가 “상하이에서 일본군에게 폭탄을 던진 사람은 ‘인 호히치’란 사람”이라고 기사를 낸 일이 있습니다. 제럴딘 여사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사람은 ‘윤봉길’이란 사람이며 이처럼 분명한 사실을 왜곡하는 행위는 명성 높은 뉴욕타임스에 큰 실수”라며 “뉴욕타임스는 관련 내용을 보도하기 전 미 국무성 등에 확인했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에서 잘못 보도된 기사로 인해 임시정부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사실관계 정정에 적극 나선 것입니다.
이 밖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적으로 다양한 활약을 펼쳤음에도 그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지난달 23일 ‘한·미 관계와 기독교 특별심포지엄’에서 제럴딘 여사의 행적을 재조명한 박명수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이승만 등 미주 한국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연구하다보니 피치 여사가 자주 언급돼 관심을 갖게 됐다”며 “해방 후엔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와 많은 여성들과 교류하며 이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도왔는데 이는 국내에서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내년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습니다. 제럴딘 여사뿐 아니라 우리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국내외 기독 여성들이 발굴되지 못한 채 무명으로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독립운동에 힘쓴 기독 여성을 발굴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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