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투, 십자가인가 십자군인가
- 정민영 (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
‘이슬람 쓰나미가 몰려온다’ ‘이슬람 난민들을 몰아내라’
요즘 한국사회뿐 아니라 교계에서도 자주 듣게 되는, 위기감을 조장하는 호전적 구호들이다. 우선 이런 주장이 사실인지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진리의 종교’인 기독교를 내세우는 교계가 언제부턴가 가짜뉴스의 산실이 되고 있는 모습이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종교를 떠나 무엇이든 주장하려면 먼저 사실 여부를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치자. 교회는 건강한 성경적, 신학적 원리를 따라 당면 현안에 반응하고 대처해야 한다.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물리치는 게 교회가 해야 할 일일까.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돼 타 집단을 배척하는 시대정신이 교회로 역류하는 게 정상인가.
동질집단이 배타적 이익집단이 돼 서로 물어뜯고 경쟁하는 것은 바벨탑 사건이 상징하는 죄성(罪性) 아닌가. 죄의 결과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엡 2:14)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무너뜨리신 샬롬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던가.
온 세상이 자기들만 살겠다며 타 집단을 밀어낼 때, 죄인 되고 원수 된 우리를 품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구현하는 ‘화해의 직분’(고후 5:18∼19)을 교회에 주시지 않았던가.
세상과 교회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일까. 세상이 전쟁을 선포할 때 은혜를 베푸는 데 있지 않을까.
필립 얀시는 그의 명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나의 원수는 누구인가. 낙태 지지자? 문화를 타락시키는 할리우드의 제작자? 도덕적 원칙을 위협하는 정치가? 도심을 쥐고 흔드는 마약 거물?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나의 정치 참여가 사랑을 몰아낸다면 나는 예수님의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사회의 당면 이슈는 중요한 것이며 문화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임하는 무기가 달라야 한다.”
세상 가치와 다른 복음적 가치를 구현하는 일을 성경은 ‘영적 전투’라는 은유로 묘사한다(엡 6:10∼17). 그 전투가 우리더러 십자군이 되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임하는 무기가 달라야 한다고 말한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한다. 십자군 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때 성 프란시스와 레이먼드 룰이 십자가의 길을 택한 이유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다. 그 의외성과 비논리성이 바로 놀라움의 이유다.
몰려오는 난민들과 무슬림들을 배척하는 게 타당해 보이는데(logic of ungrace), 하나님의 반전적 은혜(illogic of grace)는 우리에게 십자군이 아닌 십자가를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마 16:24)
얀시의 말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나는 나의 선행과 악행을 저울로 달아 항상 미달점을 찾아내는 계산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간직한 채 자랐다. 비은혜의 냉혹한 율법을 기어코 깨뜨리시는 자비롭고 관대하신 하나님. 나는 어째서인지 복음서의 그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 하나님은 그런 계산표를 다 찢으시고 충격과 반전으로 의외의 결말을 낳기에 으뜸인 단어, 은혜의 새로운 계산법을 도입하신다.”
[출처]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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