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은사

[스크랩] 신유의 정의

수호천사1 2018. 11. 15. 21:58
신유의 정의

 

 

 


 

   신유의 정의는 일반 신유와 특별 신유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신유를 복음으로 믿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특별 신유만을 강조하고 있으며,일반 신유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일반 신유와 특별 신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특별 신유 와 일반 신유

 

   일반 신유는 하나님의 보호로 연약한 몸을 가지고도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병들지 않고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수반하는 치료의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부터 인간은 질병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육체는 각종 병균들로부터 침해를 받아가면서도 질병에 걸리지 않고 하루 하루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신유의 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신유는 육신의 질병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며,동시에 하나님의 보호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병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로 건강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일반 신유의 구속을 받은 사람이며,항상 신유의 은혜를 입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 신유의 은혜 안에 거하여 항상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질병에서 고생하다가 특별 신유의 이적으로 육신의 질병에서 구원받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특별 신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로 병 고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직 박사는  신유는 의술과 약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믿고 기도를 통하여 병이 낫는 것을 신유 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신유를 특별 신유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육체의 모든 질병,마귀에게 사로 잡힌 정신 병자,앉은앵이,그리고 나면서부터 불구자가 된 자들이 초자연적인 하나니  능력과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몸과 정신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심프슨(Simpson) 박사는  신유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인간의 육체 속에 주입(infused into human bodies)됨으로써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이며,육체의 연약하고 아픈 부분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통해서 회복시키는 것이라 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손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행19:11-12).  이러한 신유를 특별 신유라고 말한다.

 

  신유의 종류

 

   누가복음 5장에는 모든 신유의 모형을 보여주고 있음을 클리블리 포드(D.W Cleverley Ford)는 설명하고 있다.

 

     1) 영적인 신유(눅5:1-11): 베드로

   여기서는 영적인 상태에 대한 자기 인식과 은혜의 순간이 같이 나타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2) 질병의 신유(눅5:12-16): 문둥병자

   예수님은 자신의 순결함으로 병자에게 손을 대사 깨끗하게 하셨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되고 병든 자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베푸신다.

 

     3) 정신.신체적인 신유(눅5:17-26): 중풍병자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어떻게 용서하심으로 치유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십자가 공로--믿음의 확신--죄사함--치유

 

     4) 사회적인 신유(눅5:27-32): 레위

   레위는 그의 직업(세리) 때문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이었다.  동족과의 사회적인 장벽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장벽을 과감히 뛰어 넘으셨다. 

 
 치유의 성경적 어원 
글쓴이: 관리자 조회수 : 6 09.02.19 22:01 http://cafe.daum.net/nukoona/8EQQ/17 


신유의 용어
 

  

 

 

신유(Divine Healing)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가운데 항상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과 병들었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나음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신유의 은사는 우리의 육신을 온전하게 하고 영혼을 강화시키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은사의 이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16:18)는 말씀과 같이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를 한다든지 안수하는 일은 당연한 특권이기도하다.  그러나 신유를 믿는다고 하여 의약과 의술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유의 복음을 통하여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체의 구원도 받게되는 것이다. 

 

  신유 라는 단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질병이 낫는다는 말은 많은 곳에 나타나 있다.  이 신유라는 말은 신(神) 즉 하나님의 치료에 의하여 질병을 고쳐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신유라는 단어는 한글사전이나 성경 대백과사전에도 없다.  다만 치유(Healing)라는 일반적인 어의로만 사전에  치료에 의하여 병이 나음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유라는 말을 언제부터 처음으로 사용하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25년 카우만 선교사를 편집인으로 하여 길보른(E.A.Kilbourne) 선교사가 출판한  성서지침 (A Guide to Holiness)이라는 책에서 우리말로 신유라는 단어가 교회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뜻으로 처음 사용되어지기 시작을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치유에 관해 말할 때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치료 받는다는 뜻인 신유(Divine Healing)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신유의 어원

 

  히브리어로 신유는 '마르페'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치료하다 (렘14:19), 고치다 (렘8:15), 몸과 마음에 양약이 된다 (잠12:18,13:17,16:24),그리고  재앙에서 구원받는다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이 말의 뜻은 구약성경에서 여러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이아시스' 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병 중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나았다 (마8:8), 병든 자를 고치다 (눅9:2,히12:13), 마음에 악한 것들을 회복시키다 (마13:15)의 뜻으로 나타나 있다.  신 구약에 나타난 신유의 원어는 병에서 낫는 뜻 외에도 정신적으로 잘못된 것을 회복시킨다는 뜻을 지니는데, 몇가지 어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히브리어의 어원

 

   구약성경에서 명사로서 신유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두 가지의 단어가 있다.  그 하나는  아룩하 (arukhah)이며 다른 하나는  말페 (marpe)이다.

 

    1) 아룩하 (arukhah)

   ‘아룩하’ 는 의사가 상처를 고치기 위해 사용되는  긴 붕대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약성경(렘8:22,30:17,33:6)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이 단어의 뜻은 건강을 회복하다는 의미로  치료, 고침, 회복, 원상복구,완쾌,간척, 권리회복, 승소, 병이 차차 나아감, 회복기의 뜻이 있으며, 문자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로 온전함 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2) 말페 (marpe)

말페 (marpe)는 구약성경(렘14:19,역대하 21:18)에서  치유 와  고침 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시에  원기회복 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4:22)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잠12:18)이 이에 행당되는 것이다.  이  말페 의 본래의 뜻은  치료  즉 문자적으로약,상징적으로는 구출, 평온, 치유, 완쾌치료, 구제법, 교정법, 건강,건전,건강상태,위생,평강,부드러움,온화함,냉정,침착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3)라파 (rapha)

   라파 (rapha)는 고대나 현대 히브리어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로서 약 65회 기록되어 나오며 창 20:17에 처음으로 쓰이고 있다. 이 단어를 좀더 살펴보면:

 

* 치료하다,상처를 고치다.(창 22:17,욥 5:18)

*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다.(역대하 7:15,시 30:3)

* 수선되다.(렘 19:1)

* 위로하다.(렘 8:11,겔 34:4)

* 치료받다.(레13:37,사64:5)

* 자신이 고침받게 하다.(왕하 8:29) 등이다.

 

 

     B. 헬라어의 어원

 

    1) 이아오마이

 

   ‘이아오마이’는  병을 고치다,치료하다 는 뜻으로 헬라어의 어원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의학적인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언어에서 처럼 이 단어는 도덕적인 상처나 질병의 치료에까지 확장 사용되고 있다.  헬라어인 이 단어는 고전적인 어원에서 특수하게 죄를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죄 그 자체는 질병으로 알려진 것 외에 육체적,정신적인 병을 유발시키는 별개의 것이 아닌 일종의 질병으로 구분이 된다.

 

    2)‘소조’

   소조는 고전 헬라어에서 의료적인 의미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며 그 뜻은  보함,상하지 않게 지키다,구제하다,죽음으로부터 구원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치료의 의미는 물론이요 한 사람을 질병이나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헬라의 개념에는 몸을 구원하는 것이 전 존재의 구원을 향하여 내 딛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에 이 단어의 의미상으로 완전한 구원개념과 연결되는 동시에 이 단어에서 신학적인 용어인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말이 유래 되었다.

 

   3) ‘디아소조’

   ‘디아소조’는 복합어로  통하여 와  보존하다 를 결합시킨 단어로  기적을 뚫고 안전하게 가져오다  또는  위험을 헤치고 보호한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복합어의 단어들은 예수의 후대의 다른 사람들 사역에 치료가 나타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하였다. 

16C 불란서 외과 의사인 엠브로이즈 페어(Amboise Pare)는

말하기를 나는 상처를 싸매었지만 하나님이 치유 하셨다 라고 했다. 

 

헤드필드(J.A.Hadfield) 박사도

어떤 의사라도 사람을 고칠 수 없다.

다만 치료의 길에 환자를 올려 놓을 뿐이다 라고 했다. 

치료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렇다면 환자의 치유조건은 무엇인가?

 


기 도

 

환자의 치유조건 가운데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치유된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께 치료해 드리심을 위하여

간절하게 청원한 것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등, 예수님께서도 악귀추출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9:29)고 하셨다.

 

사도들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교회에 병든 자가 있을 때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기름을 바르고 위하여 기도하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믿 음

 

치유이적에 있어 환자의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 받은 사람들마다

예수님께서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주님께서도 네 믿음이 너를 치료했느니라 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때로는 주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순히 자기의 믿음으로

치유된 곳도 나타난다. 그런데 믿음이 치유의 조건은 되나

모든 병이 믿음으로 낫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죽음도 치유임을 알아야 한다.

사실 죽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궁극적 치유이시다. 

 

 

  낫지 않는 병  

신유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기도를 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다.

다시 말하면 신유의 능력은 모든 병자에게

다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에 불과하다.
기도해도 낫지 않는 병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중심으로 하여
낫지 않는 병의 원인을 해명하려고 한다.

하나님이 작정한 병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로 작정한 사람의 병은
기도해조 낫지 않으며,죽을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지 아니한다.

병들었을 때 기도하면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것이 있게 마련이다.

다윗은 밧세바를 통해서 얻은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금식기도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삼하12:16-18).

다윗이 이 아이를 위해서 금식기도를 했지만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를 용서해 주시지 아니하고
다윗 대신에 아들을 징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연단을 위한 병

사도 바울은 기도를 해도 낫지 아니하는 난치병이 있었다.
그는 이 병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으나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의 병을 위해서 기도할 때
신유의 이적이 나타났다. 그의 손만 얹어도 병자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질병은 고쳐주시지 아니하셨다.
이러한 병을 낫지 않는 병이라고 할 수 있다(고후12:7-9).

베데스다 연못에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중에서
38년 된 병자 하나만을 고쳐주시고
다른 병자들은 고쳐주지 아니하셨다(요5:3-9).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그 많은 병자들을 외면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뜻과 일치되지 아니하면
치료해 주시지 아니하신다.
그리스도의 뜻과 일치한다는 것은
영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병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회복보다도 영의 구원에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사한 것은 성경에 나타난 병자들은 거의가
신유의 이적으로 치유되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병든 자가 있으면
기도하라고 강조하고 있다(약5:16).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병자도 있으니
기도를 포기하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신유의 이적이 나타나든지 혹은 나타나지 아니하든지
우리는 병들었을 때에 하나님께 의지하고 고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자세라고 생각된다.
 

 

치유와 구원과 믿음의 관계

 

 

 

하나님께서 오늘도 병든 자를 고치시는가? 어떤 이들은 루터와 칼빈을 인용하면서 치유의 은사는

사도시대에 국한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구원을 법정용언인 칭의로 정의하고,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용서의 선언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구원에 인간의 상처와 고통의 치유도 포함된다는 진리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의 치유의 기적을 이성적으로 설명하여 합리화시킴으로 개신교 내의 치유교역(Healing Ministry)의 상실을 초래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신유의 은사들은 최면술이거나 암시법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불트만 학파는 기적을 원래 상징적인 행적이던 것인데 후대에 전승이 기적이야기들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신유의 은사에 관하여 활발한 연구와 함께 질병의 치유는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한 과정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오순절 교단들이 이에 앞장섰으며, 은사운동, 제 3의 물결을 주장하는 피터 와그너등도 신유의 은사는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임을 재확인하고 있다. 로마 천주교회는 종부성사를 임종을 위해 드리는 미사로 보기 보다는 치유의 미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요나회, 베다니 친교협회, 애비회와 같은 복음주의 신앙공동체도 점차 치유교역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영국성공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누가 의사단은 새로운 치유단체를 설립했다.

 

치유교역은 감리교회와 장로교 같은 대 교단 교회에서도 급증하고 있다. 치유교역에 참여하는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계속 늘고 있다. 신학자들도 교회교역에서 치유의 위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뚜르나이젠은 목회교역 안에 영혼의 치유로서 치유교역을 포함시키고 이 교역은 모든 목사들이 필수적으로 수행하여야 하는 중심교역이라고 보았다.

 

바르트는 치유가 교회의 필수교역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틸리히는 구원을 주로 치유의 관점에서 정의했다. 피터 와그너는 치유의 교역이 교회성장과 복음 선교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오늘 이 시대에 병든 자에게 치유의 능력을 베푸신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령의 치유가 하나님의 구원의 한 과정임을 믿는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교역 가운데서

치유가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지를 살펴보고, 치유는 전인(全人)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임을 고찰하고, 치유와 구원과 믿음의 관계 등을 보기로 하겠다.

 

 

1. 예수님의 기본적인 목회주제로서의 치유교역

 

복음서는 예수님의 교역(Ministry of Jesus)을 소개하면서 한결 같이 질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신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적들도 대부분이 병든 자를 고치시는 사건들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병을 고친 기적이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에게까지만 나타나고, 성경이 기록된 다음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병을 고치는 기적은 단순히 증거의 기적일 뿐이라는 주장은 복음서를 읽을 때에 설득력을 잃어 버린다. 어떻게 그 수많은 기적과 사랑의 접촉이 단순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도들임을 증거해 주기 위한 기적에 부과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병든 자들의 병을 고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아니면 질병의 어두움으로 고통 당하는 자에게 그 어두움의 구름을 걷어 버리고 밝은 빛을 선물하고자 하는 사랑과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을까? 필자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들은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는 증거의 기적이라기 보다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여 그들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원의 대 드라마의 중심 주제라고 믿는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중심 교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자와 고통에 걸린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 병자를 대려 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4:23-24)

 

마태는 9장 35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는 예수님의 중심 교역(Ministry)을 심방, 교육, 설교, 병고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예수님은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보낸 질문에 대답하면서 메시야 교역의 중심 가운데 하나가 병을 고치시는 일임을 천명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하는 질문은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진정으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입니까?』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교역을 소개하므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답한다.너희의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예수님은 메시야 시대를 예언한 구약선지자들의 말씀이(사29:18, 35:3-6등) 자기에게 그대로 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게 함으로 세례요한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예수님은 메시야 교역의 중심에 병을 고치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고난 당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일들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초기 교역은 병 고치는 일에 집중되고 있음을 공관복음서는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 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눅4:40).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 지 아니하시니라(막1:32-34).마태는 예수님의 기본적인 교역의 중심에 병을 고치는 교역이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이다. 이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말씀하시며, 메시야 교역의 핵심을 노래한다. 마태는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시기 위한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는 것까지 포함한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질병을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따라서 하나님의 교역(the ministry of God)을 위임 받은 목회자의 기본적이요 중심적인 목회주제 가운데 하는 치유교역이요,

 

치유교역을 회피하거나 가볍게 보는 것은 하나님의 교역의 근본을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목회자들을 통하여 질병의 어두움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심으로 그들을 덮고 있는 사망의 그늘과 어두움의 그림자를 벗겨 내고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으로 가득하게 하려고 하신다.

 


2. 예수님의 치유모델

 

예수님의 치유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병 고침 자체의 기적적 행위보다는 병으로 고통 당하는 환자 자신과 그의 전인적인 구원에 더 큰 관심이 있다. 우리가 훌륭한 의사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에 능력 있는 의사, 병을 잘 고치는 의사, 진단을 기가 막히게 하는 의사, 뛰어난 기술을 가진 의사 등으로 이야기 한다.

 

의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병을 얼마나 잘 진단하고, 그 병을 잘 고치느냐에 있다. 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며, 환자의 심정에 공감하며, 병 고침을 받은 이후의 삶에까지 관심을 갖는다면 이에서 좋은 일은 없지만 사람들은 의사에게 이런 것까지 필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의사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병을 고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 안에서 병 고침의 은사를 받고 병 고치는 일에 충성하는 교역자들은 의사처럼 전적으로 병 고침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

 

그들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은사의 측면을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그 병을 고치셨다는 하나님의 치유를 강조하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는 환자의 신앙을 강조하며, 환자 자신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하려고 힘쓴다는 점에서 의사들과 다른 관심을 가지고 병을 고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좀 더 포괄적으로 환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병 고치는 교역자들은

첫째로 병자들 자신에게 보다 환자 이외의 어떤 것들을 더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사에 관한 관심,

하나님이 고치셨다는 믿음,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의 확신, 병 고침을 받은 자들로 예수를 믿게 하려는

선교적 관심 등을 강조함으로 그들은 환자 자신에게 깊이 관심을 갖지 못한다.

 

두 번째로 병 고치는 교역자들은 병을 고치는 그 일, 즉 환자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것에 너무 깊이 빠져 있다. 이 모든 것은 교역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관심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에 대한 관심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환자 자신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병을 어떻게 고치느냐?

또는 그 환자에게 믿음이 있느냐? 또는 하나님만이 이 병을 고치는 것이나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 등에 그렇게 큰 열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가끔 환자에게 믿음이 있어야 고치는 것처럼 이야기 한 경우도 있으나(막5:34, 10:52 등), 그 때에도 예수님의 진정한 관심은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환자에게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예수님은 그들을 민망히 여기신다(막1:41).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깊은 연민을 느끼신다(마9:36). 마태는 환자들을 포함하여 고난 당하는 인간들을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4:15-16)이라고 표현한다. 환자들을 어떻게 고치느냐고 중요하지만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에서 고통 당하는 그들을 보며,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그 현실을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그 병을 친히 짊어지고 자신이 그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랑이 예수님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을 본다.

 

의사는 병을 고쳐주고 얼마나 받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병 고치는 교역자들도 적어도 병을 고친 후에 얼마나 신앙이 부흥하고, 교회가 성장하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즉 병 고침으로 생겨나는 유익 또는 결과 또는 내가 받는 반대급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자들을 사랑하고, 환자들을 아끼며, 환자 자신을 위하기 때문에 병 고침의 대가로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대는 오직 그 환자들이 더 심한 것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죄를 범치 않는 것이었다.(요5:14).

 

그것은 예수님이 받을 반대급부라기 보다는 환자 자신을 위한 권면이요, 부탁일 뿐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환자들의 연약함과 질병을 고쳐 주시고 자신은 그들이 담당했던 연약함을 친히 자기 몸에 담당하시고, 그들이 짊어졌던 병의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의 치유는 자기가 짊어지고 담당하는 치유이다. 나는 고통 당하고 너는 즐거워하고,
나는 병을 짊어지고 너는 건강하고, 나는 죽고 너는 생명을 얻으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요,

치유교역의 중심이었다.

전적으로 환자를 사랑하여 그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예수님 자신이 담당하고, 그들의 건강의 대가로 자신은 그 병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치유교역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담당해야 할 치유교역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치유의 특별한 점은 환자의 전인구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 환자의 몸을 고쳐 건강하게 사는 것, 환자의 정신적인 평안,
환자의 사회관계의 회복, 환자의 영적인 삶의 회복 등 예수님은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장애들에서 해방되는 전인적인 건강과 영적인 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 1장 40-45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치유사건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이 문둥병자는 단순히 몸의 질병 때문에만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날마다 지체들 중 하나가 죽어가는 병을 앓고 있는 육체의 질병을 갖고 있는 자다. 그는 질병의 공포 속에서 불안과 절망과 수치와 원한과 저주를 안고 사는 정신적•정서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격리 수용되어야 하는 고독의 사람이요,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사람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고 문둥병자 촌에 구금되어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을 받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저주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저주하며 고통가운데 버려두는 하나님이 되어 버렸고 따라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 상태에 있다. 문둥병자의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전인적이요, 영적이다.

그의 문제는 단순히 병을 고쳐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전인적인 관심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몸의 질병에서의 회복뿐 아니라 전인이 회복되어야 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먼저 관계가 단절되어 사람들과 교제가 금지된 이 문둥병 자를 만나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자격이 없는 그 사람을 만나 주시고 있다. 예수님의 만남은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필요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었다. 즉 문둥병 환자와 같은 마음을 품으셨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문둥병 자를 보았다. 문둥병자의 깊은 심정 속에 들어가 그의 마음을 고치고 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의 몸에 대었다.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서 예수님은 문둥병 자를 감싸 안고 있다. 예수님은 그를 자기 품에 받아 들이고 있다.

문둥병 자는 이제 예수님과의 육체적인 접촉 속에서 소외와 단절의 아픔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가고 있다. 과거에 하나님은 자기에게 저주의 병을 주신 분이었으나 이제 자기를 만나주신 메시야는 자기의 더러운 몸에 손을 대시고 받아 주시므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의 문이 열리고 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문둥병자의 육체적 질병을 고쳐 주시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되셨을 뿐 아니라 그 병을 짊어지신 분이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있다. 예수님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은 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어 모세가 명한 예물을 바치게 함으로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공적인 증거를 받게 만든다.

제사장이 공적인 증거는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사회적인 관계 회복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의 문제들을 모두 제거하여 한 인간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고 있다. 얼마나 넘쳤으면, 예수님이 경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처럼 많이 예수님을 전파했겠는가?

예수님의 치유는 교역자들의 목회의 모델이다. 치유의 근원이 하나님 이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치유의 능력이 그분에게서 오고 있다는 것도 교역자들은 알고 있다. 교역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통로에 불과하다. 교역자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여기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병으로 전인적인 장애를 경험하며 고통 하는 환자를 사랑하며 그를 전인적으로 회복시키며, 영적으로 성숙하게 성장시킨 다는 예수님의 관점에 더 집중하여 교역을 하여야 한다.

3. 신유의 은사와 구원 모든 치료가 구원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모든 의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교역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치유를 논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틸리히의 주장은 우리의 논의 밖의 일이다.

신유의 은사는 육체의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가진다는 데에서 의사의 관심과 비슷한 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신유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다. 이것은 단순히 의사가 병자 앞에서 치료행위를 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브리스터(C.W. Brister)가 지적한 대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환자 앞에 설 때에 그 환자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거기에 임재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세운다. 즉 신유의 은사는 그 시작에서부터 몸의 질병의 치료와 함께 그 환자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교회 공동체에서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친다. 가끔 약품이나 기름이나 물이나 의술을 병행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이 때에도 믿음의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수하며 병을 고친다.

이 때에 환자는 자기의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자가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자기에게 임재 하신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는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신유의 은사가 주 예수님을 환자와 직접 연결시켜 주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유는 그 자체가 영적인 행위요 영적인 사건이다.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즉 신유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 속에 들어오셔서 병으로 고통 하는 환자를 병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건강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유를 통하여 환자에게 들어오시며, 환자의 마음과 정서와 삶을 총 제적으로 회복시키실 뿐 아니라 그 환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만든다.

우리 인간의 수평적인 삶의 여러 차원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인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영적 삶의 회복에서 완성되어 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평적 삶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수평적 차원의 삶을 건강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불구자에게 완전함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은 애굽의 억압과 폭력에서 이스라엘 구원하시며, 모든 대적 자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지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평적 차원은 그 자체의 건강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라는 두 가지 삶의 차원을 가진다.

예를 들면 몸이 건강회복만으로는 몸의 가치가 완성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몸의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여야 진정한 몸의 건강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즉 몸의 건강은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으며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목적과 가치를 발견하여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에만 완전한 건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신유는 몸의 치료에만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건강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시어 우리의 질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영적으로 회복시키신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의 질병을 고치실 때에 그 질병의 치유와 함께 영적인 구원에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환자를 고치시며, 치유된 환자에게 더욱 영적 건강과 몸의 건강을 증진시키도록 교회에 위임하신다 요약하면 모든 신유의 과정은 영적인 구원에서 완성되며, 영적인 구원은 몸의 치료와 전인건강을 회복시킬 때에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넘치는 삶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든 치유의 과정을 통해서 믿음은 환자와 신앙공동체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신유은사란?


 

 

1. 은사의 정의

  은사란 헬라어 ‘카리스마’라고 한다.  이 말의 뜻은 값 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란  이다.  은혜이 선물이란 사람의 공로가 일체 포함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영적 재능의 축복을 말한다.  은사는 교회에서 몇사람을 세워서 그들의 맡은 직책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주신 선물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고전7:7).  그리고 특별 은사는 교회에서 특수한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신 선물이다(고전12:28).

 

    2. 은사의 종류

   신약성경에 나타난 은사는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이적적인 은사와 교회의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비이적적인 은사로 구분되어 있다.  말씀의 은사중에는 사도의 은사(고전1:17,갈2:7),선지자의 은사(행11:28,13:1,15:32,21:9),가르치는 은사(롬12:7,고전12:28),지혜의 말씀의 은사(롬11:33),예언이 은사(고전12:10),방언의 은사(12:10),방언 통역의 은사(고전12:10),영 분별의 은사(고전12:10) 등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봉사의 은사중에는 능력 행함의 은사(고전12:10),병 고치는 은사(고전12:9),서로 돕는 은사(고전12:28),다스리는 은사(고전12:28),믿음의 은사(고전12:9)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각종 은사들은 한 성령으로부터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전12:11).

 

  

3. 신유의 은사
신유의 은사는 봉사의 은사이다. 병들었을 때 귀신을 내어 쫓고 질병을 고치는 은사를 말한다. 이 신유의 은사는 예수님 시대 이후에 사도들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신유의 응답은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누구든지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신유의 이적이 나타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약5:15). 병든 자들이 목히자들에게 와서 병을 위한 기도를 요청할 때 나는 신융의 은사가 없어서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신유의 은사가 없어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인 것이 아니며,동시에 나는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할 것 뿐이고,병의 치유 문제는 하나님이 처리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할 때는 항상 내가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하신다고 생각할 때 신유의 이적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신유의 은사도 지속될 줄로 믿는다.

4. 신유 은사의 유익성
신유 은사는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실재와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예배에 생기가 넘치게 하며 성도들의 친교를 증진시키고 전도에 불을 붙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케 한다. 성령의 은사는 나약한 사람들을 분발시켜 교회가 성장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을 부여한다. 오순절의 성령역사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의 사역은 특별히 신유은사에서 강력하게 활용되고 있다. 신유 은사 및 은사들의 유익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도들을 권면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한다.
누구든지 은사를 받으면 분발하여 일어서게 되고 열심히 활동하게 된다. 오늘날도 침체상태에 빠진 교회는 신유의 은사를 받아 행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

2) 능력 있는 증거를 한다.
스데반의 순교의 은사 를 통해서 복음은 더 넓게 확장되어 나갔다. 각종 은사들의 행함은 복음전파에 활력소가 됨으로써 노늘날에도 육익한 것이다. 베드로는 병 고치는 은사를 받아 미문 곁에 앉은뱅이를 일으킴으로써 능력있는 증거를 보여 그 결과 5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속임수에 대한 능력있는 확증은 지식의 은사를 행함인데 그 결과 남녀 큰 무리 를 교회로 인도했다.

3) 성령 충만한 지도자를 배출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미면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사도들은 초대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 을 선택하여 세웠다.

4) 서로 하나가 되는 친밀한 교제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더욱 큰 결과의 하나는 교회에서나 소회의 모임에서 더욱 깊이 하나되는 친교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성도들 각자의 은사와 상대방의 은사를 깨닫고 존경하면서 서로 상호의존성을 인식할 때 친교와 사랑속에서 하나가 된다.

5) 예배에 대한 더욱 깊은 체험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은사를 행함은 예배에 대한 아주 깊은 체험으로 인도한다. 자칫 잘못하면 형식과 의식으로 굳어지기 쉬운 예배를 살아 움직이고 협동적이 되게 하고 용기를 붇도아 주고 기쁨이 넘치게 하는 예배를 체험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산교제를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개개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성도들의 모임과 교회에 역동적인 힘을 주게 되고 생명력이 넘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해 나갈 것이다.


5. 신유의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는 방법

1) 기도하되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
2) 믿음이 없이는 은사가 나타날 수 없다. 그러기에 말씀의 토대위에 믿음을 굳게 갖고 기도하라.
3) 당신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4) 은사의 특성들은 습득되어져 실행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
5) 내면적인 깊은 개인적인 영적상태에 반응을 보여라.
6) 은사의 발견내지 개발 사용을 방해하는 상황을 제거하는 과정을 점 검하라.
7) 목회자나 은사 체험자로부터 조언을 받아라.
8) 은사 체험자들로 구성된 봉사대나 전도대를 조직 활성화하라.

이렇게 자신의 은사를 발견해 냄으로써 나 자산이 진정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유는 구원과 함께 육체와 영혼의 복합적인 건강으로 볼 수 있으며 순간 순간 회개로 인도하는 희망적이 모습을 갖는다. 또한 개개인을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삶의 가치를 풍성하게 하는 신앙성장을 가져옴으로써 하나님과 관계회복으로 전인적인 신유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갖고,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4-7). 이런 의미로 볼 때,신유의 은사 또한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고 이러한 은사는 세 가지 면에 뿌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모든 은사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총과 능역의 나타나심이고,
둘째,모든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 이요,
세째,은사는 분명히 유익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졌다는 것등을 고려할 때 오순정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므로... .(행2:41-42) 우리 또한
기도함으로써 신유의 은사를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다.

6. 신유의 목적
예수님은 전도하실 때에 신유의 이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셨다. 어떤 때에는 신유의 이적으로 인하여 영적인 복음이 가리울 정도로 신유의 이적을 많이 나타내 보일 때도 있었다. 이렇게 신유의 이적이 많이 나타난 배후에는 반드시 뚜렷한 목적이 있다.

1) 약속된 메시야를 믿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신유의 이적을 행한 목적은 하나님이 보내주시기로 약속된 메시야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유의 이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시기로 약속된 메시야임을 믿게 되었으며 또한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된 것이다. 신앙이 없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도 신유의 이적을 나타내 보일 때마다 감격에 넘쳐서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며 믿었던 것이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5).

2) 죄 사하는 권세를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유의 이적을 행하셨다. 인자가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히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막2:101-12).

3)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신유의 이적을 많이 행한 것은 그것을 통해 영적 교훔을 주기 위함이었다. 병자들의 유적인 치료보다도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예수님은 더 원하신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귀하다고 강조한것으로써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병자들을 신유의 이적으로 일으키시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신앙의 성장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4) 복음의 진실성을 위하여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행한 신유의 이적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실한 복음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유의 이적은 그 당시 복음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아니했으나 신유의 이적을 본 후에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믿게 된 것이다. 사마리아에서 전도했던 빌립은 신유의 이적을 통해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데 성공하였다.

5)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신유의 복음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한 영혼을 천하보다도 귀중히 여기셨다. 영혼 뿐만 아니라 병든 육체를 불쌍히 여기시어 병든 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하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 (히4:15-16).


7. 하나님의 신유에 권능이 각 개인에게 임하는 방법
이 방법에 대하여 존 터너(J.Turner)는 말하기를 모든 치료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은 우리 몸속에 회복시키는 힘을 주셨다 고 한다. 신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하신 방법은 여러 가지로 분류될 수 있으며 질병에 대해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에게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 신유역사의 치료의 형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분을 하고져 한다.

1) 믿음을 통한 신유의 역사
이 믿음은 실현될 수 있다는 소망과 확신 그리고 결국은 실현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17:20)고 말씀하신 것도 상기된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이고,이 믿음이 하나님의 자비와 의의 능력과 기적을 동반하는 초자연적인 확신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 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예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 그러므로 신유의 역사는 질병을 치료할 때에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병자를 치료할 수 있으며 또한 이 같은 믿음은 병을 치료받게 되는 치료의 긍정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2) 말씀을 통한 신유의 역사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가운데서 이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으며(마4:4-10) 병든자의 질병을 치료하셨다. 이 말씀은 신약성경에 다양한 표현의 하나님의 말씀으로(마15:6),주의 말씀으로(시119:9),은혜의 말씀으로(행20:32),진리의 말씀으로(고후6:7),생명의 말씀으로(빌2:16)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을 이 말씀으로 치료하셨다(마8:5-13). 베르로도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니라 ( 전1:23)에 말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는 힘이 있다 (살전2:13)고 하였으며 히브리서 기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으며 운동력이 있다 (히4:12)고 하였다. 말씀를 통한 신유의 역사는 성경을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치료되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3) 예배를 통한 신유의 역사
존 터너(J.Turner)는 주의 이름으로 교인들이 모인다는 것은 이미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예배 의식속에서는 누군가가 어떤 종류의 치료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고 말하고 있다. 마음에 믿음의 자세가 있고 영적인 믿음의 분위기가 되어 있을 때 치료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찬양으로 영육간에 긴장감이 풀어져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게 되며 예배의 목회기도를 통하여 감사와 회개 그리고 중보기도의 내용으로 치료가 되고 예배의 말씀 선포를 통해 더욱 긍정적이고 확신있는 태도로 변화가 될 때 예배를 통한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예배에는 반드시 치료의 역사가 나타날 만한 영적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병자가 그의 육신을 편안하게 하고 기뻐하며 긴장을 없애야 한다.
(2)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도록 격려한다.
(3) 모든 두려움,분노,근심,죄의식으로부터 청결케 하고 강한 의지가 환자 에게 있어야 한다.
(4) 자신이 소원한 것을 현상화하여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로와지는 모습을 그려보아야 한다.
(5)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4) 기도를 통한 신유의 역사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특별한 사안을 요구하면 그 분이 해결해 주실 줄 믿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도는 습관적이거나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자기의 전 인격을 투자하는 작업인 것이다. 기도할 때 믿음의 새함을 얻게 될뿐만 아니라 질병과 고통에서 자유하고 치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어드 힐트너(S.Hiltner)도 말하기를 기도는 성도 자신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을 믿으며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큰 힘이 되어주셔서 싸워주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싸우고 계시며 앞으로도 싸워 주실 것을 믿을 때 영적으로 육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믿음의 기도를 예수님이 보여주셨는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고 하셨다. 기도가 믿음을 동반할 때에 병든 자는 치료되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믿음과 기도는 그리고 신유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어떠한 질병이라도 치료하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5) 안수를 통한 신유의 역사
안수를 통한 신유의 역사는 신유자가 병든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했을 때 치료되는 상태를 말한다. 성경은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도록 말씀하고 있지는 않다. 질병을 고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안수하는 사람이나 안수받는 사람이 피차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에 겸손히 무릅을 꿇을 때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안수기도는 후계자를 임명할 때(신27:18) 후손에게 축복을 상속할 때(창48:14) 희생의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때(레1:4) 레위인을 하나님께 봉헌할 때(민8:10) 등이 있다. 신약시대에도 안수라는 말이 63회나 나타나 있는데 그 뜻은 얹는다,만지다 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신약에는 안수기도가 문지르는 안찰방식의 기도로 나타나 있지않다. 신약의 안수기도는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축복하실 때(마19:15),문둥병자를 치료하실 때(막1:4),일곱 집사를 임명했을 때(행6:6),아나니아가 바울의 눈을 뜨게 했을 때(행9:12-17),성령세례를 받기 위해(행8:17) 등이 있다.


여기서 보면 안수기도는 축복,사명,치료,임명 등을 할 때 사용됐음을 알 수 있으며 안수는 안수 받는 당사자에게는 큰 축복이 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안수를 통하여 질병이 치료된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마9:18,막5:23,6:5,7:32,16:18,눅4:40,13:13). 안수기도를 통한 치료가 사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통한 손길을 믿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신유자를 통하여 온다는 확신과 신유자의 확신에 찬 신뢰와 믿음과 함께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안수라는 통로를 통하여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5) 자아 고백을 통한 신유의 역사
고백을 통한 신유의 역사란 병자가 믿음으로 죄를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 죄에서 자유함과 함께 치료를 받는 상태를 말한다. 성경은 죄 때문에 질병이 생김을 가르쳐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야고보도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약5:15-16)고 하며 죄의 용서와 치료는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2:5) 함으로 환자의 질병이 치료된 것은 죄로 인하여 질병이 발생한다는 확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사죄(용서)와 신유 그리고 고백과 신유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죄를 사함 받는 순간 질병이 치료받았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 질병이 치료되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6) 축귀를 통한 신유의 역사
축귀를 통한 신유의 역사란 귀신을 쫓아냄으로 질병이 치료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특히 신약의 공관복음서들 중에서 귀신들을 쫓아 내심으로 신유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도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다(마10:8,막3:15,눅9:1). 이에 힘입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다(마7:22).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하면 귀신이 떠나는 동시에 질병이 치료되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가버나움에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사건(막1:21-28,눅4:31-37),거라사 지방 군대귀신 들린자가 무덤사이에 있는 것을 보시고 그 귀신을 돼지에게 쫓아내신 사건(마8:28-34,막5:1-20,눅8:26-39),벙어리 되게 한 귀신을 내어 쫓으신 사건(마9:32-34),눈멀고 벙어리 되게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마12:22-24),어린아이에게 간질병으로 고통을 준 귀신을 내어 쫓으신 사건(마17:4,막9:14-29,눅9:37-43),이방여인이 자기 딸의 귀신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막7:26) 등으로 많은 곳에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7) 명령과 선언을 통한 신유의 역사
명령과 선언을 통한 신유역사는 믿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 내지는 선포할 때 질병과 귀신의 억압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동시에 질병이 치료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 신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이름으로 명령과 선언하는 데 있다. 예수님의 명령과 선언 앞에는 자연도 순종하였고 귀신도 그 어떠한 것도 순종과 굴복 뿐인 것이다. 바로 이 믿음의 명령과 선언이 지금도 신유 목회자들을 통해 신유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그리고 상을 들고 너희 집으로 돌아가라 (막2:11)고 말씀하셨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곧 명령이요 선포인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에게 네게 줄 수 있는 은과 금은 없으나 내가 네게 명하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손을 내밀어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행3:6-9)라며 이렇게 믿음의 명령과 선포에는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가르키고 있다.

8) 기름을 통한 신유의 역사
기름을 통한 신유의 역사란 기름을 치료제로 사용하여 질병이 치료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기름이란 병자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 병자들에게 기름을 바르고 고치고 치료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막6:13). 구약에서도 기름을 치료제로 사용하였다. 사1:6에 보면 병이 머리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의 상처를 그리고 상한것,터진것,맞은 흔적을 기름을 발라서 치료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또 신약의 눅10:34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강도 만난 사람을 주막 주인에게 부탁할 때 상처에 기름을 바를 것을 부탁한 사건과 약5:14에도 믿음의 기도로 병자를 치료할 때 먼저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리고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기름은 처음에는 의학적인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로 종교적 의미가 가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름과 신유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오늘날도 이 기름을 통하여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병자를 치료해 주실 것을 믿는 기도로 신유의 역사는 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유방법  

 

 

 

예수님께서는 손으로 병자를 접촉하시거나 안수하시므로 신유를 베푸셨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신유 방법 중 제일 많이 신유 방법으로 사용되어

치료의 사건이 나타난 것은 이 안수의 방법이다. 

이 안수의 방법은 예수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심으로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다(막6:5). 

그리고 말고의 상처를 손으로 접촉하면서 치료해 주셨고(눅22:51)

문둥병자를 안수하였고(마8:3)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마3:15) 소경의 눈에

안수함으로 치료하셨으며(마9:29)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아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안수하여 치료하셨다(눅13:11).

 

반면에 예수님의 접촉에 반해서 병자들이 예수님의 몸이나 옷에 손으로 접촉할 때도

치료받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마5:25-34).  또한 막6: 56에 예수님의

신유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에라도 손에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리라 .이렇게 예수님이 직접 손으로 접촉 또는 안수하거나

병자 편에서 손으로 예수님을 만지거나 옷에 접촉했을 때도 치료되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이 일은 사도시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났고(행3:7) 교회시대인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말씀과 명령으로 치료하신 방법

 

예수님은 말씀과 명령으로 신유를 나타내셨는데,이 방법은 귀신을 추방할 때인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치료해 주셨고(막5:8) 또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에

명령으로 신유의 기적을 베푸셨으며(요11:43) 몇 명의 문둥병 자를 치료해 주셨을 때도(눅17:14)

그리고 백부장의 하인(마8:13)과 왕의 신하 아들을 치료해 주실 때(요4:50)와

베데스가의 연못가에 혈기 마른 사람에게 신유의 은혜로 치료해 주셨을 때도(요5:8)

예수님은 말씀과 명령으로 신유의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침과 흙으로 치료하신 방법

예수님께서는 신유를 베푸신 중에 침과 흙을 섞어 치료하신 신유의 방법이
세 군데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침을 직접적인 신유의 기능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치료에 앞서 인격과 권능의 매개체로서 사용하신 것이다.
막7:33-34에 예수님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치료하실 때
예수님의 손가락을 귀에 놓으시고 손에 침을 뱃으시고
그 손으로 병자의 혀에다 대시고 치료하셨다.
막 8:23에도 소경을 치료해 주실 때 동일한 행동을 취하셨으며
요9:6-7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침을 진흙에 이기셔서 그 진흙을
소경의 눈에 문지르시고 소경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시면서 침과 진흙의 방법으로 신유의 기적을 행하셨다.

상대의 믿음으로 치료하신 방법

예수님께서 신유를 베푸실 때 상대방의 믿음의 중요성을 보시고
치료하신 사건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
병자의 믿음을 보시며 그 믿음 위에 신유의 역사를 행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명의 소경을 치료해주실 때에 소경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마9:29)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던
혈류 병의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막5:34)고
말씀하시면서 신유의 은혜를 베푸셨다. 이렇게 예수님의 신유에는
믿음의 중요성을 전제로 하면서 신유의 역사를 행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의 치료에는 병자의 믿음과 동시에 제삼자가 소유하고 있는
믿음이 신유의 질병의 치료에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사건(마8:5-13) 등을 들 수 있다.

예수님은 신유역사를 행하시기 위해서는 신유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병자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심을
알 수 있다. 이런 믿음이 결여되어 있는 나사렛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없음을
봐서도 곧 이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신유 방법을 요약해 보면
말씀(Word),안수(Touch),축귀(Exocism),병자의 믿음(Faith)과
주변 사람의 믿음 등으로 치료하셨는데

이것은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정신 치료법(Psychotherapy),
말씀 치료법(Logotherapy),사랑 치료법(Love therapy),
믿음 치료법(Faith Healing),신적 치료(Divine Healing)에 해당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과 신유

 

1.     예수님의 신유의 특징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항상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앞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더욱이 병 고침의 신유는 복음전파와 함께 항상 동시적인 사건으로 일어났다.

 

 

1) 예수님의 신유는 메시야 즉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예수님의 신유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의 선포이다. 그러기에 신유의 체험자들이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을 체험한다. 복음이 구원의 선포라면 신유는 그 구원의 일 부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역에서 설교와 가르침과 신유는 하나였다. 이것들은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2) 에수님의 신유는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증거하고 있다.예수님의 신유는 구속적인 은혜와 그 은혜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의 질병에 근원을 확실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 질병이 단지 육체적인 것만으로 혹은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그 인간이 속해 있는 악의 세력까지 포함해서 승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곧 온전한 신유를 이루시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신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으며(마12:38)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백성들 중에 임한 것(눅11:20)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신유역사를 나타내실 때에 에수님 자신이 가르치시고 선포하신 메세지와 행하신 신유를 연결시키시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메시야이며 사단의 세력과의 대결에서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것과 그 승리가 곧 하나님 나라가 임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신유에 대한 기초적인 진리를 몇 가지로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볼 수 있다.

(1) 예수님의 신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인간성 회복에 기초를 두고 있다.
(2) 예수님이 신유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모든 영역에까지 포함된 전인구원에 근거를 두고 있다.
(3) 예수님의 신유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영혼구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4) 예수님의 신유는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단의 의도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인간의 몸과 정신과 영이 하모니를 통하여 완전한 건강을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신유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의 장애물을
제거하기를 원하시며 지금도 계속 제거하며 치료하고 계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유의 차원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신유의 기초가 되며 본질인 것이다.

2. 예수님의 신유 동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신 후 신유역사를 나타내기 시작하셨다(눅3:21-22,4:4-19). 예수님은 몰려오는 모든 병든자(막7:31-37)와 귀신들려 고통 당하는 자(마17:14-21)를 고치시고 심지어 육체적으로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요11:43-44).

예수님은 병든자, 마귀에게 눌린자, 죄인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
눅13:32절에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고 하심을 보아도 생의 많은 비중을 치유이적에 사용하셨고 또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요 합당치 않다는 반대를 무릎 쓰고서도 병자를 고쳐야겠다는 그분의 의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치유이적의 사역은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12제자들(마10:1-15)과 70문도(눅10:1-20)와 그밖에 믿는 자들에게(막16:17-18) 이러한 사역을 위임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유역사의 동기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병든 자들의 편이 되어
                            수 많은 신유의 역사를 행하시고 계시는가?

(1) 병든 자를 치료하기 원하심

예수님은 병든 자가 있을 때 항상 치료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마8:7)고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완전히 동일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고통이 예수님이 고통이 되었고 사람들의 슬픔이 예수님의 슬픔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찾아온 병자 중에 치료 받지 못하고 돌아간 병자를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은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료해 주시기를 원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사단의 세력에 대한 분노이다

예수님은 질병이 외부로부터 칩입해 들어오는 원수로 간주하고 계셨다.
그래서 정신적인 질병이나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악한 영의 세력이나 영향권 아래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 악한 지배 세력을 향하여 꾸짖고 비난하시고 내어 쫓으셨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신유사건이 더러운 영을 꾸짖으시고 쫓아내시는 것으로(막1:25) 시작되고 있다.

또한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이나(막5:8) 간질병을 앓는 소년을 치료해 주실때도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 (막9:25)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사고는 악한세력(사단, 귀신들과 파괴적이며 비창조적인 것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을 거스리는 것들)은 병자들을 지배하고 있거나 저어도 부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본질상 이러한 악한 세력들과 맞서시고 이런 악한 영들에 대해서 적대심을 가졌던 이유로 인하여 귀신들을 굴복시키시고 이로서 사람들이 영육간에 건강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3)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진 죄를 회개하는 것을 도와 주시기 위해 신유역사를 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와 질병은 함수관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계셨기 때문에 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가와 고통과 슬픔을 갖다 주는 질병에 대해 단호하셨으며 더 나아가 사람들의 온전함과 신앙의 성숙을 이끌기 위하여 필요함을 인지하고 계셨다.

막2:1-12에 중풍병자의 치료사건과 요5:1-14의 베데스다 연못가에 병자를 치료하신 신유사건에서 예수님은 질병과 죄를 결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죄는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질병을 유발시키는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신유역사를 베풀고 계신 것이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하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신다. 즉 예수님의 신유를 통하여 치료를 받는 사람이나 그 신유의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시에 보다 더 경건하고 성숙한 삶을 영위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권능에 대하여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삶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