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주일(히4:4-13)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4-13)
안식일
유대인들은 초기부터 안식일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안식일은 창세기에 근거를 둔 것으로 일주일의 일곱 번째 날입니다. 정확히는 히브리인들은 모든 새로운 날들을 일몰로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의 일몰 때로부터 토요일 해 지기 전까지를 말합니다.
이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음으로 죄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민15:32-36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지낼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모은 일이 발각되었습니다. 아마 땔감용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모세와 아론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모세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리할지를 몰라서 일단 그 사람을 가두고 나서 여호와께 여줍니다. 아마 잘 아는 사람일수도 있고 어쩌면 친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지도자는 공사를 구분해야 하기에 많은 갈등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온 회중이 그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이른바 투석형(投石刑)으로 그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심지어 안식일에는 자신이 부리는 종들에게도 일을 시키면 안 되었습니다. 오직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성막(성전)에 모여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지 못하는 지방 사람들은 회막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람만 안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지도 매 7년에 한 번씩 안식합니다. 이 해에는 어떤 씨앗도 심지 않고 땅을 쉬게 합니다. 이 해에는 빚진 채무자가 땅의 소산물을 얻지 못하므로 빚을 독촉 받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돈을 빌려 준 사람에게 안식년 한 해 동안에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 준 사람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안식일 규례는 유대인들에게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그런데 누가복음 6장 5절(12:8)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빙자하는 신성모독죄를 범한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의 말씀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즉,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은 집을 지은 자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집을 지은 자의 상속권을 받은 자이며 그의 자녀들은 그 집에 사는 자로 설명됩니다. 나아가 히브리서 식대로 하자면 집과 안식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집의 주인은 안식의 주인이며 예수님은 동시에 집과 안식의 주인이 됩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보아도 예수님은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증명하십니다. 으로서 마 12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를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항의를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삼상21:6에 기록된 다윗의 이야기를 들어 그들에게 왜 안식일에 제자들이 한 일이 타당한 가 설명합니다. 즉 다윗과 그 수하들이 사울 왕에게 쫓기어 도망 다닐 때에 배가 고프자 제사장 외에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얻어먹었다고 사례를 들면서 안식일 보다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드러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어던 손 마른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는 안식일이 의미하는 그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보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에만 더 관심을 보이던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엎은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동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고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 그 자체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안식일 규례의 의미를 가르치고 실천하셨습니다. 이 모든 행위가 가능한 것은 예수님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라 함은 모든 주권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은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시고 이를 보호하는 법령도 제정하셨습니다. 남의 재산을 침해하여 손해를 입히거나 돈을 빌린 경우 손해 배상을 하거나 이자를 더해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이라 해도 하나님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주인이십니다. 세상 주인은 밑의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고 억압하지만 하나님은 최고의 주권을 가지신 주인이시면서 그 주권을 오히려 자녀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언제나 더 많은 축복으로 갚아주시는 일에 사용하십니다. 계산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하시면서 늘 손해 보는 장사를 하시는 셈입니다.
3. 주일예배
초대교회의 공동체는 유대인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고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생기게 되자 더 이상 회당이나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시록에 따르면 1세기 중후반에 벌써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모이는 것 대신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은 유대 식으로 말하자면 한 주간의 첫날이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 안식일 후 첫날인 주일에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었습니다.(마20:19-23). 이때 의심 많은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손가락을 예수님 옆구리에 있는 못 자국에 넣어보고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요20:24-29). 이런 사례들이 안식일 예배가 아니라 주일예배로 전환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일은 한 마디로 ‘주님의 날’(ὴμερα κυρίου)입니다. 신약설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네 번 등장하는데 그 중 세 번(살전 5:2, 살후 2:2, 벧후3:10)은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하는 말로, 나머지 한 번(계 1:10)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신약 시대의 주일과 안식일의 상관성에 대해 각 신학적 입장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예수님의 부활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제자들은 구약의 안식일의 규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행1;12, 16:13) 사도 바울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 앞에서 강론을 했습니다(행18:4). 이는 예수께서 부활했지만 제자들이 그 부활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따랐던 유대인들이 이제 신약 즉,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교회질서를 구축하게 주일성수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입장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십계명 중 안식일에 관한 제4계명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율하던 것이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규율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특히 주일을 지키는 동기는 안식일을 지키는 동기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안식일 제도 자체가 구약의 의식법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개종을 했음에도 여전히 안식을 준수하는 중세 유대교 개종자들과 카톨릭 교회가 제정한 여러 성일들로 인하여 대중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진 것을 염두하고 안식일과 주일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는데 이는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는 주장입니다.
칼빈은
사도 바울의 주장(갈4:10-11)을 근거로 제4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칼빈은 날들에 차별을 두는 것은 미신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institutes, vol. 2). 그럼에도 칼빈은 안식일의 종말론적 의미와 현실적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안식일의 의미를 주일에 투영하여 주일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며 이날을 지킴으로써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신명기 설교에서 그는 “안식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까지는 율법 아래에 있는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서 폐지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셨을 때 성취될 것을 드러내는 형상과 같은 것이었다.”며 안식일은 실체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비록 안식일이 폐지되었지만 안식일 제도가 갖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가 함께 폐지되었다고는 보지 않았습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 개혁가들의 견해들은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던 절기들의 미신적 준수들이 참된 기독교적 경건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보는데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일성수를 비롯하여 어떤 특정한 행위의 의무들을 율법적으로 규정하고 이것들을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으로 준수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과 복음의 광채를 흐리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자유를 율법의 속박으로 묶어두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은 주일성수에서 미신적이고 공로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그날을 명실상부하게 그리스도의 구속과 인간의 자유가 기념되는 ‘주의 날’이 되게 하고자 기치를 높이 든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안식일과 주일 사이의 신학적 연속성을 주장했습니다. 즉 주일은 안식일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이러한 주일관은 당시 주일성수와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는 청교도신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영국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정치적 박해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청교도들은 주일이 단지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기리기 위한 날이 아니라 동시에 자연법에 근거를 둔 날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청교도들은 주일성수가 단지 성경의 교리를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자연법적으로도 6일 창조 후에 하나님이 안식한 정신을 수용하여 6일 동안의 노동을 쉬고 안식하는 날의 개념으로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구약의 안식일 날과 신약의 주일을 통합하여 주일성수의 전통을 세운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안식일 제도의 영속성에 대한 주장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로 수납됩니다.
그는 구약의 안식일 제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약의 주일 제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안식일 계명은 돌 판에 새겨진 것으로 그 내용은 영원히 지속되는 의무로서 그리스도는 십계명 중 어떤 계명도 폐지하지 않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성경은 두 종류의 창조를 말하는데 구약의 교회가 옛 창조를 기념한 것처럼 신약의 교회는 새 창조를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엿새 동안의 창조 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찰스 핫지도
안식일 제도의 영속성 안에서 주일의 개념을 밝히었습니다. 그는 주일 제도는 궁극적으로 온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할 안식일의 기독교적인 적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듯이 신약의 기독교의 주일 제도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4. 주일을 왜 일요일에 지켜야 하는가?
안식교를 비롯한 일부 이단들은 기독교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대표적인 배교의 한 형태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일요일이 원래 로마제국 시대에 태양을 숭배하는 날이었다고 근거를 대면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한 것은 이교와 종교적으로 혼합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식의 주장은 자가당착의 논리다. 로마제국 시대에 일주일의 모든 날은 모두 이교적 숭배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원래 일주일의 기원은 고대 바빌로니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천체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는데 태양(일요일)을 중심으로 달의 날(월요일), 화성의 날(화요일), 수성의 날(수요일), 목성의 날(목요일), 금성의 날(금요일), 토성의 날(토요일)로 정하고 숭배를 조장했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신들을 숭배하는 날들로 일주일을 정했습니다. 일요일은 태양신을 숭배했고, 월요일에는 달의 신을, 화요일에는 전쟁의 신 티르(Tyr)를, 수요일에는 폭풍의 신 오딘(Odin) 혹은 우든(Woden)을, 목요일에는 벼락의 신 토르(Thor)를, 금요일에는 사랑의 신 프레야(Friya)를, 토요일에는 땅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숭배했습니다. 오늘날 일주일의 각 이름들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교가 주장하는 논리대로 하자면 토요일을 주일로 삼는 자신들은 땅의 신을 숭배하는 이교적 문화에 혼합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오늘날 주일을 일요일로 하는 규정에 대한 많은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의 주일은 안식 후 첫날이 되는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2:27).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으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뵌 날도 안식 후 첫날이며(마28:1, 막16:9),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일곱 교회의 계시를 본 것이 바로 ‘주의 날’인 주일이었습니다(계1:10). 2세기경의 교부인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글 ‘마그네시아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은 안식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날, 즉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위해 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가는 글
오늘날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부활에 대한 믿음과 중요성이 퇴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주일성수에 대해 가장 올바른 전통을 세웠다고 평가되는 우리의 청교도 선조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일을 당연시했고, 율법 아래의 안식일을 넘어 그 정신을 품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정신을 높이 기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전통이 역사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기독교회의 주일은 로마제국의 태양신 숭배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또 기독교회의 주일은 안식일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다. 이것은 모든 율법을 폐기했다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복음 안에 그대로 녹아 들어가 위대한 복음의 광채로 함께 빛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모든 율법의 내용을 성취하셨으며 새로운 창조의 시대를 열었으며 죄인을 볼모로 삼고 있던 사망권세를 꺾으시고 그리스도인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선사하시었습니다. 주일은 바로 이 주님의 부활하심과 승리하심을 기념하고 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 사랑과 복음을 만천하에 전하는 날로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예배모범이라는 문서를 만들어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제 6조의 내용입니다.
1. 주일 아침에는 개인으로나 혹 권속으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되 특히 저희 목사가 그 봉직하는 가운데서 복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묵상함으로 공동 예배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준비하라.
2. 개회 때부터 일심 단합함으로 예배 전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정한 시간에 일제히 회집함이 옳고 마지막 축복 기도할 때까지 특별한 연고 없이는 출입함이 옳지 않다.
3. 이와 같이 엄숙한 태도로 공식 예배를 마친 후에는 주일에 연회나 세속적 쾌락을 삼가며 남은 시간은 기도하며 영적 수양서를 읽되 특별히 성경을 공부하며 묵상하며 교리문답을 교수하며 종교상 담화하고 신학을 연구하며 시편과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병자를 방문하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무식한 자를 가르치며 불신자에게 전도하며 경건하고 사랑하며 은혜로운 일을 행함이 옳다.
올바른 주일성수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바로선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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