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복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선포하심으로 율법으로 통치되는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거룩한 나라로 세우신 것은 그들이 거룩한 나라 백성의 자격을 갖추었거나 그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수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으며 그들이 거룩한 언약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통치의 법이었을 뿐 아니라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주어졌던 생명의 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할례를 행하여 언약에 참여하면 언약의 당사자 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누릴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갈릴리 산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심으로 자신의 나라를 세우심.
이제 가나안에 세워져서 율법으로 통치되었던 다윗왕국을 하늘에 속한 나라로 완성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셨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으로 율법 아래에 매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히셔서 만유의 주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으로 통치되던 다윗왕국을 하늘에 속한 나라로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천국을 설립하신 일이 자신에게 나아온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복되도다.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나라를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갈릴리 산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심으로 율법으로 통치되었던 다윗왕국의 완성인 종말의 천국을 설립하신 것입니다.
남은 자의 탄식을 끝내시는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을 이방의 권세인 로마의 통치 아래에 넘기셨습니다. 이처럼 이방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율법에 부착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는 경건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당시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로마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는 남은 자들에게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구원의 주로 오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선물하시는 산상수훈의 복은 이방의 권세 아래에서 이방의 핍박과 조롱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탄식하였던 남은 자들의 탄식을 끝내는 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의 권세 아래에서 하나님만을 바라고 울고 있는 남은 자들을 위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남은 자들의 탄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 온유함과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할 뿐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들과 조상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이 이방의 권세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로부터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너희 하나님이 있다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었겠느냐?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의 신보다 못하도다" 라고 핍박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끊어진 암흑 가운데 거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왕좌에 앉아서 율법으로 통치하는 다윗의 후손 왕들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경건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소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의로움은 율법에 부착하여 언약백성으로 서는 것임.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하여 여호와와 언약을 체결하였던 옛 언약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룩함과 의로움은 언약 당사자로서 언약의 법을 따라 언약 당사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의로움은 언약 당사자로서 언약의 법인 모세율법을 따라 바로 서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의 도덕적인 완전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들은 범죄 하여 부정한 이방 땅으로 이거 당하였으며 가나안에 남아있는 자들은 이방 권세인 로마의 치리 하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의 권세와 이방의 통치 아래에 거하였기 때문에 아무리 율법에 부착하여 경건하게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세율법과 제도를 따라 씻고 제사하지 못하는 부정한 이방인과 같았습니다. 이방의 치리 하에 잇는 한 그들은 흑암 아래에 거하는 부정한 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통치 아래에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벗어난 자들이어서 언약 밖에 거하는 이방인과 같은 부정한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남은 자들은 부정한 땅과 이방권세의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만을 바라고 소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의로움은 거룩한 가나안에서 모세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왕들이 율법을 가까이하여 국가의 정사를 도모하면 그러한 왕의 통치는 곧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통치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백성들이 율법을 거스려서 범죄 하였거나 형제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허물을 졌으면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에게 나아와서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려서 사유함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모세율법에 부착하여 언약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의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율법의 통치 안에 거하여 성전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구원이고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적으로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율법의 통치가 없는 이방 당이나 이방의 권세 아래에 있다면 그것은 흑암 가운데 거하는 부정한 백성과도 같았습니다. 모세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백성으로 판정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의롭고 불의한 여부는 언약의 법인 율법의 통치 안에 있는지의 여부로 판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자들의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가나안에서 이루어진 율법의 통치 안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으로부터 주어지는 핍박과 조롱 가운데서도 오직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랐습니다.
남은 자들의 구원의 주로 예수님께서 오심.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남은 자들의 구원의 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복되도다. 너희들이여, 이전에는 너희의 심령이 가난했지만 이제는 낙심하거나 울지 말아라. 내가 왔기 때문에 너희는 배부를 것이며 부요할 것이고 위로를 받음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들이여 복이 있도다. 너희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하늘의 기업을 주시는 분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구원자로 왔으니 나를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나를 섬기는 것은 나를 보내신 나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로 인하여 배부르고 만족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원수의 조롱 가운데서 남은 자들의 탄식을 완성시키는 왕이십니다. 그는 구약의 의인들의 믿음의 결국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처럼 남은 자들은 이방의 핍박과 조롱 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랐으며 선지자의 약속의 결국을 바라는 가운데 인내하였던 청결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만민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도록 세움을 입은 제사장 나라이었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과 모든 민족을 화평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의 젖과 꿀로 복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가 되며 이방인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누리는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에 부착하여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부정한 땅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이방의 핍박과 조롱 가운데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돌아오는 긍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였지만 화평의 상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고 위로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는가 이제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화평을 전하였지만 이방인들은 그들을 대항하였으며 결국에는 그들을 정복하고 핍박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여 세상 민족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하였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복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창조자가 거기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서 남은 자들은 그들이 받았던 모든 핍박이 열매를 보게 되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님께서 남은 자들의 모든 애통을 끝내시고 이전에 받지 못했던 상급의 결과로서 거기에 오셨다고 현재와 미래형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심으로 종말의 천국이 거기에 임하였습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부활을 통해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나라이며 재림하실 때는 그 나라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남은 자들의 탄식을 끝내려고 오신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남은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으로 거기에 오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핍박받은 자의 복.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의"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율법에 부착하여 하나님과 동행했던 의를 가리킵니다. 지성소 가운데 좌정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에 부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율법에 부착하여 하나님을 섬겼지만 이방은 그들을 조롱하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남은 자들이 받았던 핍박을 자신과 연결시키십니다. 남은 자들의 받았던 핍박을 자신을 핍박하는 것으로 연결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오심으로 그들의 눈물과 탄식은 끝났습니다. 다윗왕국은 외적으로 망한 것 같았지만 자기 백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거기에 임하셨습니다. 성전에 암하였던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임마누엘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임하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이처럼 권세 있는 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그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인하여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하는 일이 계속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이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모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제자들로부터서도 배신을 당하셨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다시 살리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왕으로 세우셔서 만국이 복종하는 나라로 완성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범죄 하여 이방의 땅으로 쫓겨났으며 그 가운데서 경건한 자들은 흑암의 이방 땅에서 심령이 가난하여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였습니다. 그들은 비참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형제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또한 만민이 하나님과 화평하도록 하나님의 아들로서 수고하였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핍박이었고 조롱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그들 가운데 보내셔서 그들의 결핍과 탄식을 끝내시는 종말의 천국을 선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처럼 구약에서 주어졌던 율법의 멍에를 매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 온유함이나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무엇인지 몰랐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추구하며 이것들이 풍족하면 자신들의 영혼이 평안한 것처럼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게 하셨으며 하나님에 대한 심령의 가난함이나 애통함, 온유함이나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우리에게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여러 모양으로 조롱과 핍박을 하고 있으며 휘장 밖의 질서인 세상의 가치관과 가르침, 이스라엘의 육체만을 상관하였던 율법(구약성경)의 가르침이 교회에 액면 그대로 도입되어 설교되고 가르쳐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세의 교회로 변질시키고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중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마음 속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지의 끊임없는 송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주 예수를 인하여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깨어있어서 인내함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왕, 우리의 생명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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