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영성,기도

[스크랩] 성신의 역사

수호천사1 2018. 2. 17. 23:04

성신의 역사

 

제1(요한복음 16장 7-15절)

요즈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기초의 도리를 생각하고 나가는데 지난 주일까지 “믿음”이라는 문제로 이야기를 했어요. 특별히 믿음 가운데 “구원 받은 믿음” 혹은 “구원을 실증하는 믿음”이란 어떤 요소를 가지고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기초적인 이야기 올시다마는 그 다음에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이렇게 중생하고 또한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은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는 새사람, 새사람의 생활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평이하게 다시 생각해 보려합니다.

새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얼른 도덕적인 면에서 무슨 완전 무결한 그런 생활은 아니올시다. 그러나 불신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이올시다. 다른 것이 거기 있다는 생활이올시다. 비록 그 사람이 유치한 것이나 흠있는 것이나 불완전한 것이나 혹은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점이 예수를 믿었다고 금방 다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갑자기 무능한 사람이 유능해졌다는 것도 아니지마는 그러나 거기에 불신자와의 생활에 비교할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그 다른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볼 때에, 그것은 하나의 어떤 목표를 향해서 자꾸 장성해가는 모습이 올시다. 그의 아는 것이나 그의 정의(情意)적 생활이 점점 성숙을 향해서 향상되어 나가는 장성의 생활 자세올시다. 그런데 이 장성의 생활 자세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 불신자에게라도 있는 것이고 그것을 다 구하는 것이 올시다마는 신자의 장성의 생활이라는 것은 불신자의 그 자기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든지 인격적인 성숙성을 향한 장성의 자태와 모든 점에 꼭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 있는데 그 다른 것들에 의해서 그 장성이라는 것은 그 현저히 불신자와 상이되는 부분들이 자꾸 더 명료해져 나가는 것인데 그것의 기초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전적으로 주님께 자기를 전부 헌상했다는 기본 위치가 거기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고 나온 사람으로 주께 자기를 드린다는 정신이 없을 때에는 그게 구원의 신앙이 그에게 주는 도리가 아니올시다.

우리가 구원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고 자기의 일생의 길을 주께 다 맡겨버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구상하고 계획하고 경영하던 것을 일단 다 포기해 버리고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이것은 어디서 시작하느냐하면 전적으로 자기를 헌상하는데서, 완전히 드리는데서 시작하는 거요. 예수를 믿고 나왔서도 자기를 드리기를 꺼려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의 공리적인 목적에 가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가는,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으로 환연히 깨어난 자태가 아니올시다. 여기에 세상의 종교, 기독교라는 종교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의 생활이 환연히, 찬연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오.

예수를 믿고도 아직도 자기를 주님 앞에 전부 드렸다는 정신과 그 자세를 가지기를 내적으로 꺼리면서 적당히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또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 윤리적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좀더 지적인, 또 좀더 무슨 발달한, 혹은 세상적으로 좀더 적합해 나가는, 이러한 등등의 자기의 이익에 대한 고려가 늘 앞서 나가는 공리 종교는 원래 기독교의 근본정신 하고는 대치되는 것이오. 그런데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안믿었을 때는 몰랐지마는 믿고난 다음에 깨닫는 것은 자기는 과거에 주께서 건지지 아니하셨다면 죽어있던 상태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 앞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분리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 서로 멀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보다 떨어져 있는 한 인간의 존재 상황이라는 거요.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까닭에... 그리고 그것은 빛이 세상에 임하여도 사람이 어두운 것을 더 좋아하는 까닭에 빛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같이 마음으로서 세상적인 것, 어두운 것, 죄, 허물,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허물과 죄 속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 행보를 하는 거요. 이것이 죽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죽었다고 에베소서 2장 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이제 다시 살리신 것이라.”

이렇게 다시 살아 났으면 새로운 생명 곧 중생 혹은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바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생명이 자연히 변화된 영혼의 기능을 통해서 나타나서 그로 인해 자연히 자기는 전적으로 주님 앞에 드리고, 살고, 맡기고, 의지하고 살아야지 그냥은 나대로는 못가겠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심정을 가지는 거예요. 그런 마음을, 지난번에 말한 바와 같이 정서적인 갈구와 완전한 의지라는 이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오. 이것이 구원의 신앙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 까닭에 먼저 전적으로 자기는 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다 주님 앞에 드리자.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영혼이 찬양하는 심정으로 엎드려 절을 하고자 할 때 어떠한 하나님이신가를 바로 알고 결례(缺禮)되는 일이 없어야 해요. 마치 우리가 새상의 훌륭한 이를 만나서 인사를 할 때에도 그이의 가치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내가 속속들이는 몰라도 적어도 그가 어떤 레벨(level)이 있는 인물인가를 알고 거기에 상당한 경의를 표해야지 그는 높은 분인데 그를 보통 대단치 않은 사람으로 여기고 내가, 비록 경의를 표하고 인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단히 실례가 되는 것이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도, 하나님 앞에 예배라, 경배라, 절한다는 말이오. 포로스큐네(προσκυνη)... 하나님 앞에 절을 한다 할 때도 하나님이 육신으로 계셨더면 그 육신 앞에, 마치 옛날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 사귀(邪鬼)들은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고 쫓아와서 그앞에 부복(俯伏)하고 엎드려 절하고 그러고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나와 지금 무슨 상관이 있어서 벌써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하는 말을 한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죠.

이와같이 그 본체를 바로 인식했을 때는 그 신비를 속속들이 우리가 알 길이 없을지라도 적어도 “우리 전체를 땅에다가 내던지고 엎드려 절해야 할 분” 이라는 그런것은 분별하게 되는 거요. 그와같이 우리가 참으로 예배를 드릴때도 하나님 앞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적어도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알고 모셔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고 마음이 허망하여지고 어두워져서 각각 버러지나 그 은이나 금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우상의 형상으로 신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 로마인서 1장에서 강렬하게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대신관계(對神關係) 그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면 그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느껴야 하냐면 나는 전부 그에게 드리지 않고서 내가 무엇을 스스로 주장하고 나도 하나의 주체성 있는 자라해서 대등한 위치에서 하나님 앞에 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오만하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 거요. 내가 무엇을 해야 그에게 상당한, 적당한, 합당한 경의를 다 드릴 수 있을까 할 때는 전부를 다 드려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인 거요. 이래서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전부를 드립니다 하는 것도 우리의 경배의 심정에 구체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고 이런 구체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서 “주여 나에게 있는 모든 것, 내 생명이 내 놓은 것을 생명 전체를 대표해서 혹은 상징해서 여기 드립니다” 하고, 여러분이 돈을 얼마를 드렸든지, 그것으로서 자기의 생명과 존재와 장래의 가능성과 내 일생과 지금까지 드린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대표적인, 상징적인 것을 갖고 드리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린 전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것도 아니예요.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그런것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오. 요컨데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리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 지금은 형편이 통화(通貨)라는 것이 있으니까, 통화를, 즉 돈을 갖고 대표를 하는 거요. 그때에는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정성을 물질로나 무엇으로나 갖다가 또한 드린 것이오. 이방 사람도 그런 짓을 하지만 이방사람은 “이것 잡수고서 새로 새 덕을 많이 입혀 주소서” 하는 태도이지 요컨데 교환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있는 진노를 좀 거두시고, 잡수시고 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해 주십시오” 뭐 이런 따위지, “이것은 다 주님께 속했습니다,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동안에 나는 이지러뜨리고 더럽히고 잘못했지마는 이제 하나님 앞에 그래도 이것을 드립니다” 이렇게 드리는 거요.

우리가 헌상할 때 마다 하나님 앞에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님, 이런 것이 없어서 필요해서 하나님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궁전에 나같이, 누더기와 같이,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는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남루(襤褸)같은 것을 갖다가 놓아서 놓을데가 있느냐면 놓을데가 없는 것이오. 여러분, 영화에서라도 보셨죠. 어떤 화려한 궁전에 씬(scene)을 촬영할 것 같으면 찬란한 대리석으로 꾸미고 그리고 모두 전부가 아주 깨끗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고 찬란한 옷을 입고 나가는데 어떤 거지가 누더기를 입고 들어 온다면 그것을 거기다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예복을 제대로 입어야 할 때에 예복을 제대로 입고 가지 아니해도 그것은 그 자리에 못가는 것으로 예수님도 그런 비유를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같이, 누더기 같은 남루같은 우리를 드린다고 뭐 대단히 주님이 받아서 부전스럽게 어디에다 두시겠는가? 그렇지만 그 크신 자비와 그 크신 사랑과 경영으로 “네가 더럽지마는, 네가 부족하고 이지러졌지만 나한테 내놓아라, 내가 너를 받을 것이다.” 받으신 다음에는 이를 거룩되이 하시고 이것이 합목적적으로 쓰이도록, 효과있게 쓰이도록 은사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다시 이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오. 드리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오.

드렸다는 것은 우리의 관념에 자기라는 생각, 내 것이라는 생각을 떼라는 거요. 드렸으니까. 이제 내 것은 없는 거요. 무엇이든지 있던 것을 다 드려버렸으면 그 다음에는 내 것, 남은 것 아무 것도 가치있는 것은 없는 것이오. 내가 소위 가치있다고 생각하던 것을 다 드려버리는 것이오. 이래서 우리의 매일매일의 생활의 행보까지라도 드리라고 구약에서는 그것이 소제(素祭)라 해서 자기가 늘 먹는 고운가루 에바 1/10을 갖다가 드리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전체를 다 드리는 이 헌신이라는, 헌신(獻身)이란 것은 몸뚱이만 드리는 이야기는 아니오. 우리의 영혼을 담고 있는 이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올시다. 이것을 아직도 마음 가운데 깨름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태도를 취하지 못한이가 있다면 오늘이라도 그것을 취하는 것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다운 정당한 도리인 것이오. 청년이 자기가 기독교를 이용해서 기독교 안에서 자기가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것 포기해 버리고 이제는 주님 앞에 다 드려버려야 할 것이오. 주께서 다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고 드리는 것이오.

둘째, 그 근본 자세에 있어서 안믿는 사람과 성장하는 점에서 다른 것은 무엇이 더 현저해가냐면 만사에 있어서 자기의 전적 무능력이라는 것, 전적인 무능력, 이것이 아담이 처음에 시초에 범죄를 한 이래로 사람은 그 죄에서 돌아설 능력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상실됐다는 이 거룩한 교리로 토우틀 이너빌러티(total inability)라는 거요. 전적인 부패, 그러나 그 부패에서 회복할 능력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믿은 다음에는 자기라는 것을 의지할 아무것도 없는 것이오. 의지해 가지고 이룰 것이 없는 줄 아는 거요. 여기에서 무엇이 생기느냐면 지난번 구원의 신앙의 제 세째요소 피두키아(fiducia)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의지적(意志的)인 요소라는 말이오. 의지(依支)한다는 말이오. 트러스트(trust) 한다는 말,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오.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그 하나님께 의지한다 할 때에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활 행보를 다스리고 힘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일으켜 주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법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는데 그것은 무엇이냐면 성신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고 그렇게 가르쳐 주시고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환기도 시키시고 그렇게 주장하시는 거요. 그런고로 좀더 구체적인 말을 하자면 전적으로 성신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 다음에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자기의 인간이라는 것과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할 때, 물론 인간관이 벌써 변했어요. 과거와 같이 자기를 인정하는 어떤 것도 없는 것이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 안에서 비로서 자기는 새사람으로 존재한다는 인정을 하는 것이오. 그러면 옛사람은 나에게 의미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요. 이렇게 해서 자기의 능력만 부인할 뿐 아니라 자기라는 가치의 본존(本存)을 부인해 버리는 것이오. 그뿐더러 그러한 자기가 인생의 길을 갈 때에 어디로 향해서 간다는 것을 스스로 정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무서운 죄악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요. 이렇게 해서 무엇보다도 인생의 목적은 내가 내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아는 거요. 하나님께서 거룩히 정해주신 목적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룩히 정해주신 길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확연히 깨닫고 나가는 것이오.

이것이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 생활의 제일 먼저 근본적으로 늘 저변에 깔려있는 중요한 사상인 것이오. 에배소 2장 10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하나님이 그냥 아무렇게라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아주 정밀하게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가장 효과있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거요. 정밀한 기계를 만들어 놓듯이 만들어 놓았다 그 말이오. 워크맨쉽(workmanship, 직공등의 솜씨, 기술 혹은 그 기술에 의해 완성된 물건) 하나님의 솜씨를 보일만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말이오.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었는데 어떻게 했는고 하니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창조를 하신 그런 대상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창조를 받은자라 그 말이오. 이것은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은자는 죽은 것이니까 새로운 생명으로 새피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창조라는 사실이 있지, 있는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오.

거기 창조의 요소는 새로운 생명이 들어 간다는 것이 창조의 요소요. 처음에 창세기 1장에 <창조>란 말이 세번 나올 때 볼 것 같으면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할 때 어떻게 하셨는가? 그 흙으로 빚어 놓았다는 말이 있어요. 그 흙으로 빚은 것은--그것은 이미 있던 재료지만--그것으로 빚었다는 것은 곧 창조를 즉시 표시하는 말은 아니오. 사람이 생령(生靈) 되었다는 것이, 즉 하나님의 기식(氣息)이 거기 들어가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 전에 일찌기 없었던 것,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 가운데에서만 그 거룩하신 신비 속에만 있던 것이지 일찌기 현상 세계에나 혹은 피조된 세계에 생각할 수 없던 것이고 있지 못하던 것이다 말이오. 이것이 창조, 조성(造成)이란 말이고 창조한다는 말 뜻이오.

그런데 여기서도 카이네 크티시스(καινή κτίσις),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 창조함을 받은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합목적으로 새로 창조를 하시되 그냥 아무렇게라도 어디든지 두루두루 쓰게 한것이 아니라 정밀하게 그 솜씨를 보여서 만드셨다는 것은 어딘지 어떤 목적을 위해서 꼭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고 그 목적 아니면 그것은 이지러지는 것이고 그것은 비틀어지는 거요. 어떤 정밀한 기계가 제자리 아닐 것 같으면 안맞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이와같이 새로 창조를 해놓은 것이라, 이 일은 이 선한 그 사람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새로 피조(被造)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피조된 이유를 구성하는 그 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예비하사” 이전에 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지혜와 도략을 가지고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심이라” 우리로 하여금 다른 데로 비끄러져서 제 마음대로 이상(理想)이라고 세우지 않고 그 안에서 반듯이 살게 하신 것이라, 이것이 에베소 2장 10절에 있는 말씀이오.

우리에게는 그와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해서 목적적으로 피조된 것들이오. 그렇다면 자연히 우리의 길도 자정(自定)하는 거요. 목적이 있으니까 길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오. 이 길에 의해서 우리는 이 원단(元旦)에 시편1편 강해를 늘 해나가는데 이번달 초에도 다시 시편1편을 우리가 강해했어요. 여러분 시편1편 다외시는 말씀이지요. 거기 볼것 같으면 악인과 의인을 대립해 놓고서 악인에게는 자기의 이론과 사상이 있어요. 에싸(הצע 모의, 충언, 계획, 작전, 상담, 꾀) 그래서 악한자의 의논대로 복 있는자는 행하지 않는 것이라. 거기 의논이 있다 그 말이오. 거기에 사상이 있고 거기에 주장이 있고 거기 인생론이 있어요. 그 다음에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거기 죄인들은 자기가 가는길들이 있는 것이오. 서 있는 길들이 있어요. 그 인생의 길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다들 가고 있어요.

그 다음에는 그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있어요. 결국 이런 세계를 충성하는 것이다. 여기 좌정하자. 모샤브(בשׁומ, 앉다)라고 해서 말하자면 그 사람들의 좌처(坐處)요. 꼭 어떤 의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샤브할 때는 집단적으로라도 같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그러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오만해서 그것이 인생이 참으로 도달해야 할 자리인가? 그것이 인생이 올라가야 할 목표지 인가를 확연히 결정하고 이것이 기다할 때는 그것이야말로 오만한 정신과 이론이 되는 거요. 아직도 암중(暗中)에 모색(摸索)을 한다면 그것은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기다하고 단정할 때 그 독단은 오만이라 그 말이오. 그런 오만한 자의 자리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거기 볼것 같으면, 2절에 보면 의인에게는 그에게 주시는 지혜는, 거룩한 빛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요. 악인의 인생론이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주장에 대립해서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랬고 그 다음에는 거기 5절을 볼 것 같으면 의인의 회라는 것이 있어요. 오만한 자의 자리에 대립해서 의인들의 에다(הדע 회중, 회합) 혹은 그것이 나중에는 교회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했습니다마는, 사람들이 모아서 그것을 큰 목적을 위해서 같이 호흡하고 나가는 그런 자리요. 그런 회(會), 의인의 회가 있고, 또 거기 6절을 보면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이 있는 것이라고,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라고 했어요. 죄인의 길, 악인의 길은 망하지만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다. 이렇게 우리는 시편 1편에서 거기 분명히 의인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들이 무엇을 자기가 흡수해서 자기의 영혼과 정신의 양식이 되게 할 것인가 믿고 어떠한 길에 서 있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세계를 향해서 가고 어디에서 자기는 안착(安着)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할 것인가를 가르쳤어요.

이와같이 여호와의 법을 앎에도, 의인의 길에서서 행함에도 그로 의인의 회중에 일원으로서 자기가 생활해 나가는 것도, 요컨데 이것이 또 확대해서 말할 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인데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힘주심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고 힘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그 역사를 즉 하나님이 많은 은혜, 준비해 주신 은혜의 역사를 우리에게 직접 내리시고 주장하시고 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그 분을 우리는 성신이신 하나님이라고 늘 말하신 것을 배웠지요. 아드님이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속죄의 일을 이루셨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크신 작정하에서 경륜을 해 놓으셨으면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서 적용되려고 할 때에는 성신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요.

성신이라는 말은, 신약에는 성령이라고 요즈음 개역성경에는 되있습니다만 옛날 성경에는 성신이오. 이것도 어떻게 해서 신약만 그렇고 구약에는 아직도 완전히 다 성령이라 하지 않고 성신이라고 하는 데도 나오고, 뒤섞여 나오고 있는데 요컨데 그것은 어느 말을 쓰시든지 상관 없어요. 다만 우리 교회에서 성신이란 말을 쓰는 것은 신(神)이란 말이 하나님의 인격을 구체적으로 표시할 때에는 영(靈)이란 말보다 신(神)이란 말이 더 접근한 말이 되는 까닭에 쓰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신으로서 영적인 역사(役事)를 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고 그의 인격적인 존재, 삼위(三位)의 일위(一位)로서 인격적인 존재를 중시할 때 신이란 말을 썼어요. 그런 까닭에 성신이라 그런줄 아시고 성령이라고 하시고 싶은 분은 성령이라 한다고 뭐라고 할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하십시오마는 왜 성경이, 신약이 누구한테 의논하고 슬그머니 성령으로 고쳐 놓았는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요즈음 번역하는 일에 때때로 그런 일이 자꾸 발생하니까... 그것은 어떻게 되었든지 문제는 그 성신께서 우리에게 모든 필요한 은혜들을 적용하시는 것이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세계에 살아 가면서 우리를 자신의 인생관 뿐 아니라 윤리관이나 도덕관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완성이라는 생각의 윤리관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함으로 전체가 거룩되이 지어져 간다는 데에 대한 책임자로 처하는 것이 첫째 임무로 따라서 개인이 혼자 도덕적으로 성자되었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주의 깊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일부분이 되어서 그와 신비한 연합체를 이룬다는 것, 미스티컬 유니온(mystical union)이란 것, 즉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라는 이 것이 우리의 윤리관을 형성할 때에도 기본적인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이 되는 것을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이오.

동시에 우리의 살고 있는 생활은 이 세상에서 한 시민으로 여러가지 직업에 종사하고 살지만 그런 모든 것은 다만 이 세상에서 육신이 살기 위한 방편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에서, 장사하는 일이면 장사하는 일,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증거해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오. 그것이 교회라고는 안해요. 장사하는 일이 교회의 일은 아니지만 어떤 한 신자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구속을 받고 성신을 의지해서 살면서 장사를 할 때에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오. 먹어서 기운을 얻어서 기운을 영광을 위해 쓰라는 말 뿐 아니라 너 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어야겠다 하는 이야기요.

이와같이 광범하게 신자 생활, 어떤 면에든지 그것을 위하지 아니하는 그런 면이 없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지, 생활은 별달리하고 종교는 별달리 있어가지고 그것이 분리되어 가지고 주일날 만은 기독교인이고 다른날은 안믿는 사람하고 크게 차이 할 것 없이 현저한 기독교적인 아무런 사상이나 정신이나 프린시플(principle, 원칙)이 작용하는 것이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 태반을 상실하는 것이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매일매일 촌시(寸時)의 생활 전체에 있어서 그 사상이든지 그 인생의 행보든지 그 전체의 나가는 목적이든지 전부를, 거기서도 전부 지배하고 주장하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이루게 하시는데 의미가 있는 거요. 이것이 신자 생활의 요체(要諦)라는 것이오.

이런 생활이 없이 예수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 종교를 만들어 낼른지 몰라도 그로 말미암아서 허다히 많은 부분이 은폐되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신 그리스도를 은폐하는, 거꾸로 가는 일을 많이 하기가 쉬운 거요. 교회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려면 그 교인들이 매일매일 나가서 생활하는 데서 어떠한 사상, 어떠한 목적, 어떠한 인생의 행로 어떠한 태도, 어떠한 참된 하나님 나라적인 윤리관, 도덕관, 그런 세계관 그런 사관(史觀)을 가지고 거기에 준해서 살아가는가에 의해서 되는 것이지, 그것을 떠나서 교회 안에 와서 열심으로 종교적인 행사에만 치중해 가지고 교회가 바른 의미를 다 가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바른 의미란 그런 종교적 행사에 있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교회란 말뜻은 코뮤니오 쌍토룸(communio sanctorum)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들 즉 성도라고 하는 자들이 서로서로 가지고 있는 커뮤니언(communion, 친교)에서 형성하는 것이라고, 이렇게만 1세기의 사도들은 생각했던 거요. 모여서 어떤 행사를 어떻게 한다는 데에 주의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가서 시민 생활을 해나가는데 의미가 있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던 것이오. 어떻게 나가서 시민 생활을 한다는 것은, 현실 생활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보가 영광의 저 목적지를 향해서 매일매일 전진해 나가는 거요. 죽어서 천당가는 데다가 목표를, 최종의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영화되어서 영원히 거룩한 교회로서의 신령한 각 부분을 다 완성해서 드러내는 시간을 향해서 자꾸 전진해 나가는 것이오.

그럴려면 우리가 이런 모든 점에 있어서 심히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성신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것, 성신님께서 주장하시는 그 생활가운데 들어 간다는 것이 심히 중요한 것이 올시다. 성신은 이게 동시에 예수님의 영이라. 사도행전 16장 7절 보면 성신이 아시아도(道)에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그래서 바울선생이 아시아도로 안들어가고 거기를 알과(마땅히 찾아야 할 친한 사람의 집 문 앞을 지나면서도 만나보지 않고 지나감)해 가지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기아로 들어가려 할 때에 또한 못들어 가게 되었는데 누가가 그것을 기록하기를 7절에는 “예수님의 영이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셔서 못들어 갔다”고 기록했어요. 성신은 예수님의 영이라. 혹은 오늘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6장 7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保蕙師)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있을 때에 여러가지를 가르쳐주시고 예수님이 같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그 육신의 생활에 있어서도 어찌할 바를 늘 가르쳐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사실인 것을 생활로서 다 경험했어요.

예를들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저 동편으로 건너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가지고서 기지사경(幾至死境)에 그만 배 한쪽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한테 쫓아가서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는데 돌아보시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까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니까 즉시 잔잔해 버렸단 말이오. “어째서 너희는 이렇게 믿음이 적으냐?” 하고 예수님은 그때 책망하신 일이있죠? 그러니까 모두들 “저가 대체 뉘기에 바다와 바람도 순종하는고” 했다고 그랬어요. 이와같이 예수님과 같이 다니면서 죽음에 임했을 때에도 “선생님 살려주십시오” 할 때에 예수님은 항상 보호하셨어요.

그렇게 튼튼하게 믿고 의지하는 그분이 이제 떠나가신다는 고유(告諭)를 하시니까 걱정이 많았어요. 걱정이 많으니까 요한복음 14장부터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고 근심하지 말 것을 차례차례 고유해 나가시면서 여기 16장에 와서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내가 너희하고 같이 있으면 항상 너희와 같이 있게도 되지 아니할 것이니까 내가 떠나가는 것이 결국 너희에게 유익할 것이다. 만일 떠나가지 않는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것을 너희들을 돌아보고 보호해주고 그럴 것이지마는 떠나간다면 나를 대신해서 내 임무를 할 그분이 오신다. 그래서 내가 너희 은혜를 늘 보호해 주듯이 그 은혜를 보호해 주실분, 그래서 아마 보혜사(保惠師)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오.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이 보혜사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의 하실 일을 마치 예수님이 하시는 것처럼 그러나 그 보다는 훨씬 광범위로 훨씬 미묘한 데까지 육신이 아니고 온전히 신으로써 하시는 까닭에 미치지 아니하는 곳이 없는 곳까지 사람의 속에까지 다 미쳐서 일을 하실 그분이 곧 보혜사라 그 말이오. 혹은 다른 보혜사란 말도 쓰셨는데 그 말은 그 은혜를 지키시는 분으로는 예수님 당신이지만 내가 떠나가면 훨씬 광범위로, 훨씬 능력있게 또 그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올 때에 그 많은 사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돌아보실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모든 임무를 남김없이 다 행하실 것이다. 내가 떠나간 후면 그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실 것이다 그랬어요. 너희한테 보낼 것이다. 떠나지 아니하면 내가 너하고 같이 있으니까 내가 돌아보지만 그러나 그것은 12사람이나 혹은 주위에 있는 당신의 늘 접근해 있는 제자들에게만 하는 일이 되겠지만 떠나간 다음에는 그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의 조건하에서 이미 벗어나서 완전히 영으로만 계신 까닭에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그 하나님의 무소부재와 무소불능의 크신 능력을 가지고 부소부재하신 그의 지혜를 가지고 곧 필요한 때 모든 필요를 충당해 주시는 거요. 이렇게 해서 성신을 보혜사라, 마치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때에 그 제자들의 은혜를 보호해 주신 것과 같이 성신께서는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또 주장해 주시는 것이오. 힘주시고 하시는 것이 올시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 할 때에 골고다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 골고다를 지난 이후의 시대요. 골고다의 사실이 역사의 사실로 확연히 서 있어서 그 사실과 동시에 그것이 실재의 세계에서 나타내시는 모든 은혜를 받고 사는 시대요. 그러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또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지난 주일 오후에 그 이야기를 조금 했지요. 예수님을 따라 가려고 좇아 가겠습니다 하는 사람들. 각각 그 결함을 주께서 지적해 주신 것인데 요컨데 생전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에는 육신으로 계신 그분이 간 곳을 가는 것이 따라가는 것이 되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대해서 “주여 주를 따라 가겠습니다”라든지 혹은 “너는 너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한 말이 그때에 한(限)한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역력히 나팔소리 같이 잘들리는 소리인줄 우리가 다 아는데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오. 그중에 한가지 여러분 아실 것이 있어요. 예수님을 대신해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지시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보호하시고 힘주시는 그 분, 그 다른 보혜사 성신께서, 예수님의 영께서 나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그러기 까닭에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도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성신을 좇아서 행하거라.” 성신을 좇아서 가거라 그 말이오. 누구를 따라 가느냐? 성신께서 너를 지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대로 가거라, 그것이 중요한 말씀의 뜻이 올시다.

이와같이 성신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성신께서는 먼저 우리 안에 와 계시고 한번 와 계신 성신이 다시 적당한 시기에 그가 죄를 짓고 잘못할 것 같으면 떠나가 버리고 그런 일이 없단 말이오. 이것이 은혜의 시대에 있어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도리인 것이오. 혹은 구약에서 “주여 나에게서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 하든지 다윗이 기도를 했다 할 때에 인격자이신 성신님의 내재의 문제를 그 때 논한 것이 아니오. 그때에는 “성신의 능력으로, 기능으로 감화해 가지고 있던 사실에서 나를 탈취해 버리시고 거기에서 이를 빼앗아 버리시면 아주 무능하고 저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은사가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찬송하고 백성을 다스리고 그러겠습니까?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나를 이 자리에 두신 이상 그 일을 할 수 있게 그냥 성신을 거두지 맙소서” 하는 말이고 그런 말을 갖다가 신약에다 함부로 들여 붙여 가지고 생각지 마셔야 해요.

성신께서 한번 들어오신 다음에는 다시 우리에게서 분리되시는, 영원히 떠나시는 법은 없으나 우리가 “성신을 소멸치 말라”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9절 말씀대로 소멸하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내주 하신다 하더라도 오직 성신을 근심하시고 계신 것 뿐이오. 에베소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근심케 하는 것이오. 죄로서, 성신님께서 감화하시사 “자, 이리가야 하겠다. 가자” 하고 그 유기적인 역사를 하실 때, 강제로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마치 내 의식속에서 성신께서 불어넣어 주셔서 내 자신이 가야할 당위를, 가야할 필요를, 가야할 신성한 의무를 느낄 때 “아니 그래도 가면 손해 보겠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되면 내가 굉장히 손해를 보는데, 내 일생에 그 꿈이 다 무너지겠는데” 하고서 안가면 그 성신을 소멸하는 것이 되는 것이오. 오늘날도 마찬가지요, 그건.

성신께서 은사를 주시고 능력주시고 목표를 향해서 밀고 나가시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도하시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뿌리치고 “아니, 아니오. 내게는 손해 되겠습니다” 할 수가 있는 것이오. 이런 것이 오늘날도 있기는 있는 것이오. 이것은 우리가 다음에 좀더 구체적으로 배울 것이고, 한번 들어오신 성신님은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히 늘 함께 하시는 것이오. 성신께서는 이 세상을 향해서든지, 믿는 사람에게라든지 또 믿는 사람에게라도 특별히 성신님을 좇아서 나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가가 성경에는 분명히 씌여 있어요. 이것이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알고 깨닫고 나가야 할 도리 올시다. 이번에는 우리가 믿음이란 말에서 잠시 떠나서 성신께서 어떻게 우리를 주장하시고 이끄시는가 이것을 차례차례 배워 가십시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 크신 사랑으로 저희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성신께서 저희 안에 내주케 하심으로 저희 안에서 저희의 영혼과 더불어 도고도 하시고 증거도 하시며 저희를 위하여 거룩하신 능력을 나타내시고 유기적으로 저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큰 사실을 믿사옵나이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기경(奇擎)한 것과, 괴이한 것들을 찾지 아니하고 가장 정신 똑똑하게 가장 온건하게 그리고 가장 인격이 명료한 사람다웁게 주의 성신을 좇아서 가게 하시고 그 거룩한 도리를 저희가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시고 이러므로 주께서 저희를 만세전에 경영하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새로 정밀하게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는 인생의 행로를 걷게 하시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거나 자기의 인간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의 길을 스스로 취하고 가던 그 아담과 같은 죄를 다시 범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고 전적으로 무능력 한 것을 알고 자기를 온전히 포기하고 주께 다 드리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2강(갈라디아서 5장16-26절)


오늘도 지난 주일 아침에 계속해서 우리 믿는 사람이 구속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새사람이 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리 곧 성신님이 우리를 어떻게 주장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가르쳐 주시는가는 도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사람이 중생한 후에 새로운 사람 즉 새로운 생명에 의해서 한 인간적인 모든 활동, 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여러가지 불완전이 있고 잘못이 있고 유치한 바가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믿지않는 사람과는 다른것이 거기 있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그 향하여 나가는 목표가 그리스도적인 품성과 마침내는 그리스도적인 사명을 각성하고 사는 생활을 하도록 지향하고 가는 것이지마는 처음에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성이라는 것이 점점 고귀한 것으로 바뀌어가고 올라간다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것이 완전한 형태는 다 아니고 거기 인간으로서 여러가지 불완전이 있을지라도 고귀한 형상으로 차츰차츰 나가는 변화가 성장해가는 모습에 더 나은 인간성이라는 것이 발휘되지 아니하며는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이오.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그러고, 예배당에만 다닌다고 그러지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지마는 이런 종교적인 행사로서 자기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요. 그것을 비 기독교적이라고는 안할 거요. 그렇지만 참으로 새생명이 그 속에 있어서 그 속에서 정상적으로 역사해가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증명할 도리가 없어요. 또 증명을 하지 않고서 저는 혼자 예수 믿었느니라 할 때에 스스로 속는 일이 많은 것이오. 위험한 일인거요. 남이 나를 보아주시오 하고 남에게 꼭 증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스스로가 증험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오. 그게.

이러한 권고라든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꼭 강단에서 여러분께 애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자든지 서로서로 할 수 있는 얘기인 거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겠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취는 것이지 남이 어떻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닌 거요. 항상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까닭에 어떤 표준을 세우고 우리 생활도 단속하라는 말을 그전부터 이 성약교회에서는 해왔어요. 큰 원칙은 자연스럽게 되어야지 거짓을 꾸미지 말라고 그랬고, 자유스럽게 하지 구속받아 가지고 율법이 강제하는 그 강제력하에서 움직이는 것은 율법에 대한 자유는 아니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법을 무시하는 것은 무법인거요. 법을 짓밟는 것은 범법인 것이오.

그러나 거기에 항상 신령하라는 말이 붙어 있었어요. 그러면서 여러분이 다시 기억하시겠지만 생활에 남의 프라이버시(privacy)에 대해서 얘기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다른 사람 이러내 저러내 하고 그 사람을 끄집어 내어 가지고 취모역자(吹毛覓疵)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했어요. 왜 그러냐하면 이것이 한국사회에 아주 널리 퍼져있는 큰 폐단인 까닭에 좀 교회로서 신성하고 거룩한 자태를 가질려면 그러한 폐단에서 탈피해야지 항상 어느 때까지 어린애 같이 두 세 사람 모이면 남의 흉하적 얘기하고 또 원래 사람이 사람의 얘기를 평가를 자기 레벨(level)에서 해버리는 까닭에 자기하고 레벨이 다른 사람을 우리가 바로 파악하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운 것이오. 사람 속의 깊은 것을 우리가 얼른 알기 어려운 까닭에 폐일언하고 원래 동양의 일반적인 교훈에도 남의 결점을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고, 여러분 그런 얘기 들었지요? 어머니가 자식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까 한번은 어떤 다리 저는 사람이 다리를 절고 가니까 아기가 어머니보고 저기 저 사람은 왜 다리 한 짝이 저렇게 짧아서 절고 가느냐 하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돼, 다리 한짝이 길다고 그래라. 그런식으로 말했다고 이게 교묘한 얘기요. 얘기 가운데 그런 우스운 얘기 가운데 교훈을 담은 것이오. 그게... 사람이 보기를 항상 남의 짧은 점만을 볼려고 하는 그런 경향을 고쳐 줄려고 그러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프라이버시는 말하지 말라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성경 야고보서에서도 충분히 우리에게 가르쳐 준 도리인데, 많은것 가운데 한국사회에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그 비속한 비천한 행습에 대한 것을 경고를 하고 원 성약교회가 무엇이 다르다 할 것 같으면 다른 면을 생활이나 사람 사는 관계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나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아무 것도 다른 것 없고 우리는 특별히 예수를 믿겠다 하면 뭐 하나 특별한 것 있는가 하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거예요. 이것이 벌써 금년, 작년의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해 된 얘기요. 그러면서 항상 때때로 그것을 반복을 했어요. 이 중생한 사람의 생활이라는 문제를 이야기 할 때 멀리가서 굉장한 생각을 하지말고 우리 생활 주변에서부터 우리 생활 습관의 시시한 너절한 저급한 비천한 인간성부터 고쳐나가는 것이 이게 중요한 거요. 그 찬송부르고 기도하고 왔다 갔다 하면 저절로 고쳐지는 것이 아닌거요. 자기 반성을 해서 의식적으로 이것 여기에 나의 큰 잘못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 안믿는 사람처럼 자기가 각고면려(刻苦勉勵)하고 자기가 노력해서 진압해 가면서 수신(修身)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신을 의지해서 그가 나를 이끄시는 대로 자꾸 따라가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것 여러번 여러번 한 얘기 올시다.

이걸 다시 이번 신앙의 기초도리를 반복할 때에는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또 이렇게 얘기를 아니하면 아마 들을 기회가 별로 없을거예요. 누가 이 바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이러구 저러구 한다고 그 사람을 충고할 일은 없어요. 뒤에 앉아서 욕은 할지언정 그 사람을 면대해서 이러저러게 보이는데 어떠느냐고 충고를 할 수 없어요. 그건 피차의 감정문제도 있고, 남의 위신 문제도 있지마는 하기가 어려운 것이 있어요. 내 평가가 바르지 그른지를 모르는 거요. 나 역시 별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 놓고 이렇다 저렇다 하고 가장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있다고 좇아가서 그대가 이렇게 하니 이렇게 않하면 좋겠다고 해 보면 나는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단 말이오. 이러니까 사실상 소위 그 책선(責善)을 한다는 것, 선한 것을 가지고 그를 책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닌 것이오. 아니지마는 도리를 가지고서 어떤 개인을 지목치 않고 일반적인 원칙 하에서 얘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게고 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은 착심하시기 바랍니다. 모여 앉으면 하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이길 바라는 거요.

아상(我象)이라는 문제 즉 나라는 것, 그 각각 자기의 문제요. 가장 심오한 자기의 문제요. 내가 얼마나 무얼 잘 해 볼려고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라고 하는 것을 드러냈는가! 또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보기에도 못된 인간성이 휙하고 발휘되는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인가? 이것 다 돌아봐야 하는 것이오. 안돌아 보고서 교회 안에서 교회에 있는 여러가지 기독교리에 다른 여러가지의 것을 도도히 얘기하여 보아도 그 인간성의 장성이 없으면 하나님의 그 거룩한 말씀을 깨달아야 할 그 사람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것이오. 이것은 다른 과학하는 것과는 달라요. 다른 과학이라는 것은 지적 기능이 지극히 우수하여서 인간적으로 못되었을지라도 재주가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잘 외고 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말은 욀지라도 밤낮 외기만 하지 말 뜻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얼마든지 있는 거요.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도리를 깨달으려면 그 사람 바탕이 성신님의 조명을 받아야 하고 성신님의 주장하시는 바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야 그의 품성의 성신의 열매가 나오는 것이오.

여기도 그러니까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 즉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 이런 말로써 적어도 아홉가지 속성을 하나의 성신의 열매라는 말로 표시했어요. 성신의 거기에 관사를 따질때 거기에 있는 그 수, 수로 따질 때 원어대로는 이게 단수요. 성신의 열매들은 아홉가지다는 게 아니고 한 성신의 열매에는 이런 아홉가지의 속성들이 있는 것이다는 의미요. 이렇게 해서 사랑은 있는데 희락이 없다 그렇게 말이 안되는 거요. 이런 것이 그 속성이 있어서 사과에는 무엇은 있는데 무엇은 없다. 사과에 있는 성분을 쓱 써놓고 그 중에 무엇무엇은 이 사과에는 없고 그 중에 무엇무엇은 이 사과에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요. 어떤 사과가 반드시 구유해야 할 그 속의 성분이 있으면 그것은 있어야 사과요.

그와같이 그 사람이 참으로 성신의 주장하시는 바 되어서 그 결과를 내는 사람이라면 우선적으로 그 품성에 인간성에 나타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오. 품성이라는 것은 도덕적인 성격이라는 말이오. 모럴 캐릭터(moral character), 그것이 간단하게 동양말로는 품성(稟性:선천적으로 타고남)이라 품수 품자를 써서 이렇게 말을 하는데 그 사람이 도덕적인 성격에 분명히 이런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이런 그 신령한 생활, 신령한 생활이란 말로 아주 굉장하게 이상한 말은 아니고 어떻게 자기는 늘 기도만 하고 신비한 세계에서 계시만 받고 사는 그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거요. 성신께서 우리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주장하심으로 먼저 우리 인간성이란 것이 조화있게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덕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둘째 문제는 이러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은 이것이 사랑하기 공부... 옛날에 충헌이 쓴 글을 볼 것 같으면 그런 인도주의적인 그런 논제를 가지고 얘기할 때 이제부터는 사랑하기 공부를 했다. 사랑하기 공부를 하는 까닭에 어떤 일이 있을 때 그전까지는 성을 발끈 내가지고 그 사람하고 다투고 내가 잘했다고 주장할 텐데, 아서라 내가 사랑을 하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되겠는가 하고 꾹 참고 그래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될 수 있는대로 그를 괴롭게 하지 않을려고 하면서 자기 할 일을 얘기하고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는 인도주의자 누구든지 생각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여기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란 말이오.

성신께서 열매를 내게 하실 때 여기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어놓고 희락이란 열매를 그 다음 날 맺어주고 또 화평이란 열매를 준다. 거기에 있어서는 일면을 보면 사랑인가 하면 이면을 보면 희락이고 이면을 보면 화평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 심상 가운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말미암은 즐거움이나 그러한 펠로우 쉽(fellowship)이 아니라 성신 안에서 의와 평안과, 기쁨이라는 희락과 평강이라는 그런 말을 다 공통으로 쓰고 있어요. 사랑이란 바른 것,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오. 자기의 당위 그것이 있고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거기에는 평안이 있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 나라라고 로마인서14장 17절에 말했는데 그 하나님의 나라가 그 속에 먼저 있고 그 다음에는 인내라든지 자비라든지 양선이 주로 물론 대외적인 것이오. 먼저 마음이 있어야지만 그것이 대외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을 하는 거요. 무슨 일이 있었을 때 오래 참는 것, 여기에 반드시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을 받았으면 오래 참아가면서 그냥 버티어 나가는 것, 또 양선이란 것은 사람 사는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이 남보기에 거세고 따지기만 하고 억세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항상 부드럽고 양선하다 그 말이오. 그 다음에는 그런데 이 양선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친절이라는 말과 대단히 가까운 말이오.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인거요. 불친절하지 않다는 말이오. 그게 그러며는 그 다음에 볼 것 같으면 온유하다는 건 특별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며는 그 사람이 부드럽다, 부드럽다는 것은 모든 사람앞에 줏대도 없이 아무렇게나 히물히물하다는 말이 아닌 것이오. 그게. 이 말은 하나님이 무슨 명령을 하실 때 그 명령에 대해서 드세지 않고 반항하지 않고 따라간다는 그 말을 가르친게요.

그러면 이게 하나님께 대한 덕도 있고 인제 예를 하나씩만 들었으니까 이걸 지금 내가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니까 혹은 양선이 있고 충성 그 다음엔 온유, 절제 이런 모든 것은 반드시 이건 하나님께만 대한 것이다, 이건 사람에게만 대한 것이다, 이건 자기에게만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엄격하게 현저하게 이렇게 나누기는 어려운 것이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현저하게 이렇게 나타나는 게고 그 나타날려 할 것 같으면 대내적으로 자기 속에 그것이 확연히 늘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그러기 까닭에 이러한 말씀들에 의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그 인간성이란 것 혹은 인간적인 도덕적 성격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오.

이 도덕적인 성격이라는 것이 사람을 대하든지 하나님께 대하든지 자기 자신이 홀로 고요히 생각하든지 거기에 이모저모로 드러나는 것이오. 처음에 가령 사랑이라는 말도 반드시 자기 혼자의 세계만의 얘기는 아니요. 대상도 있는 것이고 그 대상의 첫째는 주님인 거요. 그렇게 해서 사랑, 희락이라는 것도 주님 앞에서 주님의 그 약속을 믿고 마음에 기쁨을 얻는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덮어놓고 히죽히죽 웃으라는 것도 아니요. 화평이라는 건 마음이 아무것도 않는 무심상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 평안이라는 것은, 사도바울 선생도 히브리 사람으로 히브리적인 개념이 늘 거기 주요하게 작용하고 성경에 있는 평안이란 말 뜻이 이에 헬라어에 있는 평안이라는 말 뜻과는 반드시 같지 아니해요.

그것 무엇이냐하면 히브리 말에 샬롬(םולשׂ)이라는 말이 오히려 더 강렬하게 그 평안이란 말 뜻을 표시하는데 여러분 자전거를 타고 갈때 자전거를 타고 자꾸 가며는 바퀴가 둘이니까 직선에 있는 바퀴가 둘이라도 서서 가지마는 안가며는 자빠지는 거라 말이오. 이와같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이라는 것은 끝없이 자꾸 전진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번영이라는 말로, 자꾸 발전해 올라간다는 의미로도 사용하는 거요. 여기 이 샬롬이라는 말을. 그러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향상해 나아갈 때에 가지는 안정을 의미하는 거요. 그냥 아무 것도 않고 은둔해 버리고 조용히 앉았으면 걸릴게 없으니까 얻는 그런 정요라는 것 정적이라는 것 그런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다는 충만한 가운데 어디를 향해서 자꾸 갈 때 얻는 그런 평안인 것이오.

그리고 오래 참는 것도 그렇고, 그 다음에는 자비라 하는 것도, 자비라는 것은 말하자면 사람에게 대한 바른 동정, 불쌍한 사람의 불쌍한 경영을 내일이 아니라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같이 생각하고 적어도 자기와 관계있는 일과 같이 생각할 때 생기는 그 측은한 심정도 생기는 게요. 이러한 것도 자비요. 또 그에 대해서 나도 무엇을 좀 해야겠다는 긍휼이라는 것이 있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저희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그랬는데 그 긍휼이라는 것, 이러한 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고, 아까 양선이란 것이 하나의 친절이라든지 충성이라든지 하는 것은 또 하나님 앞에 맡은 것을 끝까지 잘 봉사해 나가는 것이고, 온유라는 것 명령을 순종해 나가는 것, 절제라는 것은 자기 인생은 낭비하지 아니하고 아무것이라도 좋은 일이라면 덮어놓고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하되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있게 해라 그 말이오.

그래서 자기 에너지나 자기의 모든 기능을 잘 항상 저축해 두고 보존해 두었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은 거기에 적응하게 쓰도록 하라는 것이지 시간과 정력과 자기 생활을 낭비해 버리라는 것이 아니예요. 할려고 안하더라도 지금은 낭비할 수가 얼마든지 있어요. 어떤 사회에 나가서 취직해 가지고 일하고 살려 할 것 같으면 많이 일을 자꾸 시키고 또 주인네는 돈 줬다는 핑계로 일을 자꾸 시키며는 좀 더 자기가 다른 고요한 시간 좀 더 자기 생각에 자기 인생이 가치있게 살아 갈 수 있는 여러가지 것이 있을 거예요. 반드시 어떤 바깥에 나가서 돈 버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것 할 수 없는 이런 사회적인 상태 가운데 이 세계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처해있는 것이오.

아무리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다 거기다 갖다가 쏟는거요. 이어 여기에 있어서 자기가 어떻게 하면 절제하느냐 어떻게 하면 존절히 해서 가장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느냐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이오. 이것이 특별히 자본주의라는 것이 고도로 발전해 가지고서는 어느 때에는 거의 독점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되는 데에 따라서 사람을 잡아다가 얼마든지 그 자본에 있는 위력을 가지고서 쓸때 사람들은 자기가 살려니깐 자기 노동을 댓가로 하고 거기에 가서 취직을 해 가지고 일을 하면 그러느라고서 그만큼 많은 세월을 다 보내는 것이오. 일주일의 제일 좋은 시간을 거기서 보내지 자기가 좀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 반드시 보내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한 이러한 현재 일종의 그 흔히 쓰는 그 필요악이라는 것, 네서서리 이블(necessary evil)이라는 것의 속에 살면서 자기는 어떻게 해야 가장 가치있는 인생을 보낼 것인가 할 때 그것이 절제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오는 중요한 문제가 될 거예요. 적어도 절제라는 것을 생각해야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오.

또 그런 생각을 할 때 거기에 있어서 고귀한 인간성을 가진다는 것, 그걸 품고 산다는 것은 메마른 사회에서 그냥 사는 것 보다는 훨씬 가치있는 생활이란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것이오. 그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이것도 유용이 될 수 있다면 써야 하겠다 할 때는 그것도 고귀한 것이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을 전부 주님을 위해서 다 바치라고 하는 거요. 이래서 비로소 너는 인생의 낭비가 아니고 그것이 의미있는 생활로 변해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장사하는 사람이 점방에 앉아서 장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될 때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는 의미를 자기가 깨닫고 거기에 맞취서 그렇게 나가면 거기에 맞춰서 자기를 조절해 가면서 나가면 그만큼 의미를 가지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고귀한 말인 것이오. 인생의 모든 면에 하나님의 통치 대권이 늘 행사되고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이렇게 해서 성신의 열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에는 필요한 것인데 이런 것을 우리가 맺고 살아갈려고 할 것 같으면 물론 성신께서 우리들 앞에서 충만히 역사하셔야 하는 것이오. 그냥 저절로 후다닥 되는 것은 아닌 거요. 그런데 성신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를 주장하시는 그일에 대한 것을 지금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 것인데 성경에서 볼 것 같으며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들의 인생 안에서 역사하시는 얘기가 빌립보 2장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 안에서 행하신다” 그게 여러분은 이같은 빌립보서 안에서도 또 여러가지 우리에게 늘 기억하고 생각하는 말씀을 주신 것을 생각하실 거예요.

“너희가 그런고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점방에 앉아서 장사를 하든지 혹은 사무실에서 시무를 봐주든지 그건 직접 내일이 아니고 기업주의 일이지마는 그러든지 혹은 밭에 나가서 밭을 파고 논갈이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그랬으니까 그 말은 대단히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이오. 아 내가 점방에 나가서 장사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하는 길이 있다. 내가 기차를 타고 갈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는 길이 있는 것이다고 그 그렇게 길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위해서 해라는 것이지 아무 방법도 없고 어찌 할 바도 모르는데 무조건 해라하는 막연한 이야기는 아닌거요.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이 세속 어떤 사업을 하든지 우리 자신이 그것은 내가 하고 교회에 가서 예수 믿는 일은 예배드리는 일은 그건 성신께서 내 안에서 하셔야 하고 그렇게 나누고 하는 것 아닌 것이라 말이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첫째 가르치고 그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그 기뻐하시는 뜻이 있어요. 그에게서 하게 하실려고 너희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어떤 소원을 내가 품지마는 하나님이 그 소원을 품게 하시고 그것은 하나님이 기쁨을 거두실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건 여러분이 아마 잘 아시는 말씀일거요.

빌립보서 2장 13절에 여기에 행하게 하신다는 말은 그에게 능력을 공급해서 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 하는 말, 여러분 요새 흔히 많이 쓰는 에너지(energy)란 말, 에네르기 혹은 옛날 에네르기라고 옛날에 한 때 많이 독일식 발음을 해서 그랬는데 요새는 영어식으로 에너지라고 하는데 에너지 어떻다, 에너지 절약해야 한다. 얼마만큼 들어간다 그 에너지란 말하자면 무엇을 할 수 있는 세력, 힘 , 그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무엇을 할 수 있는 힘, 건설할 수 있는 힘, 혹은 파괴할 수 있는 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소작해 갈 수 있는 힘인데 그렇게 힘을 발휘한다는 말, 헬라말로는 에네르게오(ένεργέω). 에너지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왔어요. 이 동사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이 행하신다는 말을 꼭 그 말을 갖다 썼어요. 에네르게오, 에너지를 공급하셔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건 또 네 맘대로 네 멋대로 해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데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이 그 능력을 공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비췸으로 소원을 가지게 하고 소원을 가진 다음에 주신바 공급하신바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로 행하게 하셨다 이런 말 뜻이올시다.

이게 안믿는 사람, 특별히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완고히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꼭같이 그 속에서 역시 에네르게오하는 에너지를 공급하게 해서 하게 하는 자가 있다고 에베소서 2장 2절에 가르쳤어요.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신이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역사한다는 말도 똑같이 에네르게오, 같이 에너지를 공급해서 그 불순종의 자식들속에서 일을 하게 하는 그런 말을 썼어요. 이렇게 대조할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주시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여 주시고 소원을 받게 하셔서 가고 하나님을 순종치 않고 제 길을 가는 사람들은 꼭 안믿는 사람만을 꼭 의미하는지는 의문이오!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고서도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갈려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자기가 소위 이상이라 하고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특별히 청년시기에 무엇이든지 장래 함직한 할만한 것이 있음직한 그때에 자기를 내세워서 자기의 행복주의를 위해서 즉 자기 이상의 만족을 위해서 그게 정신적인 가치든 물질적인 가치든지 무슨 만족을 위해서 나아가는 일이 많이 있다 그 말이오. 그런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지금 에너지를 공급해 가지고 자꾸 하고 빌고 나가게 하는 것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의 머리되는 자란 말이예요.

그걸 여기서 에베소서에는 가르치는 것이오. 그게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시고 소원을 두시고 그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그 도리를 그냥 저절로 앉았으면 아는 것도 아니고 않았으면 되는 것이 아니요. 가만히 앉았는 속에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이 되는지 순종의 아들이 알 길이 없어요. 이래서 그 거룩한 도리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깨우쳐 주시고 그와같이 살게 하실려고 예수님이 계실동안에는 돌아 보셨지만 예수님이 땅에서 떠나가신 다음에는 내가 지금 실상 너희에게서 떠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떠나지 않고 있으면 보혜사가 오시지 않지만 내가 떠남으로서 보혜사 그가 오실 것이니 그가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지난 주일날 본문 가운데서 우리가 본 것, 요한복음16장 7절 8절 말씀이에요. 그래서 성신께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경영하셨고 주께서 준비 하셔서 다 만들어 놓으신 그 은혜를 우리것이 되게 하실려고 우리 안에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이게 성신이신데 이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그것을 역사해가시는 그 도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오. 성신을 받는다는 그것은 이상한 신통력을 얻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런 것만 생각해 가지고서는 갑자기 손이 떨렸느니 갑자기 열이 났다더니 갑자기 무슨 환상을 봤다느니 그런 이상한 말을 할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든지 참으로 믿고 정당하게 하나님 앞에서 믿는 사람답게 생활을 해 나갈려면 성신님께서 그안에 계셔서 그를 주장하시지 아니하시고는 갈 재주가 없는 것이오. 그러지 아니할 때는 그 사람은 옛사람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에요. 그게.

그렇기 까닭에 이런 점을 우리가 주의해서 성신의 내주라든지, 교도, 가르치심이라든지, 인도라든지, 증거라든지, 도고라든지, 혹은 충만의 여러가지 역사 이런 것이 아주 기이한 종교현상으로 절대로 생각하지 마시라는 거요. 이거야 말로 가장 정상적인 소위 노말(normal)한 신자 생활에 있어서의 필요 조건인 것이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이상하게 무슨 제 삼의 은혜, 제 이의 은혜 하면서 딴 소리를 자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비치하시고 받게 하시는 은혜를 제 맘대로 나누어 가지고서는 차별을 만들고 구별을 만들고 클래스(class)를 만드는 그런 잘못된 짓이란 말이오.

첫째 성신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다하는 사실을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할 터인데 와 계신 성신은 언제 얼마동안이나 계시고 얼마동안 계시다가 나가시느냐 그런일은 우리가 참 주의해야 할 일들이예요. 성신의 내주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 그에게 성신 떠났다.” 이런 소리를 옛날에는 많이 하고 돌아다녔어요. 지금도 많이 하는지 지금은 접촉이 잘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왔다갔다 하면서 누가 와서 강설을 하고 얘기하는데 그냥 성신 은혜가 충만하여 가지고 사람들이 성신을 받아가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뭐 이상한 종교현상 이야기를 자꾸 하고 그러고서는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해서 죄를 지으니까 그냥 성신이 거기서 떠났다고 이렇게 성신께 대해서 한번도 공부도 안해보고 제 마음대로 이렇게 중대하고 주요한 도리, 믿는 사람이 새생명을 받은 다음에 사는 도리는 성신을 떠나서 성신과 떠나서 별달리 절대로 할 길이 없다는 이 큰 사실을 무시해 버리고 믿는건 내 힘으로 믿고 성신님은 특별한 종교의 귀족 계급에만 임하고 이런 생각하는 것 아주 잘못이란 말이오.

그런고로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과 또 그것이 신자에게 어떠한 역사를 하신다는 것, 특별히 충만하셨을 때의 역사는 어떠한 현상이 있다는 것,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슨 역사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는 잘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 의해서 살도록 하고 우리 주님께서도 그 제자들에게 내가 있는 동안은 내가 돌아보지만 내가 간 다음에는 차라리 그게 좋은 것은 성신님이 즉 보혜사가 오셔서 너희를 다 돌아보시고 세상에 대해서도 죄와 의와 심판으로 책망하시고 일반 은총의 역사에서도 성신께서 하시는 게고 특별한 은혜의 역사에 있어서도 너희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도리들을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시는 것이오.

그러면 성신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내주하신다, 그런 사실을 우리가 볼 때 몇가지를 보십시다. 첫째 성신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 여러분은 고린도교회에 바울 선생이 편지를 할 때 3장 처음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형제들아 너희에게 편지를 할 때 신령한자에게 하듯 할 수가 없어서 육신에 속한자 곧 그리스도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하듯 한다. 내가 너희에게 젖으로 먹고 단단한 음식을 안줬는데 지금도 너희가 감당못할 것이다. 그때도 감당못해서 그랬다. 너희가 어찌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냐, 인간이 아니냐, 그냥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희에게 성신님이 어떻게 역사하셔서 충만하게 주장하시는 사실이 있느냐 하면서 2장 14절 보면 전연 이 세상에 성신과 상관없는 사람, 소위 보통 육의 생명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적인 일, 하나님의 성신의 일을 받지 않는다. 이건 왜 그런고 하니 저가 미련하게 여기는 까닭에 그렇고 또한 저가 깨달으려고 해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만 분변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15절에는 2장15절에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분변하지마는 아무도 저를 또 분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 사람은 분변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말하면 신령하다는 것은 결국은 진리에 의해서 바른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있어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도리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다 아니다 하는 것을 잘 분별해 가는 것이 이게 신령한 자라 그거요.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속에서 살아서 역사해 가는 사람인 것이오.

그러고서는 3장 첫절에 들어와서 너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분쟁이 있는 것, 시기가 있는 것, 어찌 너희가 사람과 같이 보통 인간과 같이 행한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역겨워서 거기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그러면서 너희에게는 성신이 없다든지 성신은 한번은 들어갔다가 떠났다든지 하는 말을 하시지 않고 거기 같은 3장 16절17절에 정신차리라 그랬어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신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각각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 성신의 전이다 하는 것, 그런 의미도 있겠지마는 이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고 뭐 여기서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해서 성신님은 너희라는 이 거룩한 교회를 성전으로 삼고 계신다. 물론 우리가 교회론을 배울 때 교회는 하나님의 집 곧 성신의 전이다 하는 말을 우리가 배웠지요. 배울 때도 이 말을 인용해서 고증을 해 갔어요. 또한 “이 교회는 곧 하나님의 집이오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하는 말씀을 우리도 이용했던 것이오.

다음에 17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또한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너희도 거룩하니라 그러니까 거룩하라는 것이오. 왜 거룩하냐? 너는 하나님의 성전이니까, 그러니깐 교회도 거룩해야 하고 개인도 그런 의미에 있어서 거룩해야 하는 것이오. 거기 다시 이번에는 고린도전서를 그냥 계속해서 나가보면 6장에 가서는 그 사람의 생활 행동을 어떻게 단정하게 거룩하게 구별되이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 말이오. 안믿는 사람과 같이 방탕하지 않아야 하고 마음대로 저를 제가 주장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 말이오. 이래서 그때는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는 네 너희의 몸은 하나하나의 몸을 얘기하는 거요.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신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이제는 교회전체 보다도 그 몸 하나하나를 얘기하는 거요. 너희의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그 성신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사신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 하는 말이 여기 나와 있어요. 몸으로 영광, 몸으로도 영광 돌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요. 이게. 우리의 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이 되기도 하고 오욕을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오. 그게. 다른 사람 앞에 그것이 그 사람의 몸의 행동이나, 그 사람의 왔다 갔다 하는 것이나 그 사람의 개인 접촉하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존중하고 나타내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그 뭐 예수 믿는다는 사람 꼬락서니를 보면 그렇게 무지하고 무례하고 우습고 이렇게해서 욕을 돌리기도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게 이렇게 해서 성신님은 그의 속에 각사람의 속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에요. 그게. 로마인서 8장 9절을 보면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신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 곧 성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또 고린도 전서 2장 12절을 보더라도 “우리가 받은 신은 이 세상 신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온 신이니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주신 여러가지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또 그런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우리에게 가르치시는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신은 들어왔다가 나갔다 무슨 잘못했으면 한번 들어오신 후에도 그 사람이 잘 유지하고, 열심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예배당 다니면 계시지마는 그 사람이 타락하고 그 사람이 아무렇게나 하고 그럴 것 같으면 성신님은 나가신다. 그러면 어느정도 타락하면 나가시고 어느정도 훌륭하면 늘 계시는 건가? 또 그것을 따져야 할거요.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안따지고 자기 눈에 보기에 아 저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 저래서 써야 하나? 그러고서는 어떤 도덕적인 문제, 어떤 어느때나 아주 시시한 문제, 어느때 아주 말단의 문제만을 가지고라도 곧 폄론을 해 가지고 그 사람 성신 떠났다 이런 말하기가 참 쉬운 것이오. 여러분 우리들은 항상 이점에 대해서 안믿는 사람들의 비난을 늘 고려할 것이 있어요. 믿는 사람 말 잘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 말쟁이 같이 말들을 잘해서 그리고 보통 안믿는 사람들은 쓰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말들을 자기네 종교적인 내용을 가지고 하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고 말을 수근수근 수근대기 잘하고 그런다고 이게 아주 딱질린 얘기요. 우리교회에서는 옛날부터 이런 것을 절대로 하지 않도록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런 비천한 일로 자꾸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해왔어요.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한번 오시면 성신님은 다시 떠나시는 일이 없이 영원하신 것이예요. 이것이 요한복음 4장 13절 14절에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예수님께서 그 수가의 여인을 대상으로 거룩한 도리를 가르치시고 특별히 우물 길러 온 여인인 까닭에 물에 대한 생명수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실 물이 있다는 것을 얘기하셨어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 내가 줄 물이 따로 있는데, 지금 이 샘물 여기 너희 네 샘물,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샘물이 되리라. 거기서 샘물이 영생하도록 끊임이 없이 솟아 나올 것이다. 그 얘기요.

이건 상징적인 말에 불과해요. 그 물이 무엇인지 그때 아마 그 사마리아 수가 여인도 알턱이 없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많이 와서 믿었으나 자세히 알았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이 요한복음에서 그걸 해명을 해줘요. 7장으로 쭉 내려가서 읽어보면 37절로 39절에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제 여기 예수님이 주실 물이 있는 얘기를 한단 말이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고 샘물이 되어 흐른다”고 그랬지요. 이 생수의 강 얘기를 여기 다시 하셨어요.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신께서 사람의 속에 들어가서 마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늘 거기서 신선한 사역을 하실 것이다 그 얘기요.

그런데 여기 보며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신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은 예수님이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고 하나님께서 성신을 한량히 주셨다 그런 말과 모순되는 것 같지마는 예수님께서 주실려고 약속하신 그 성신을 지금 주실려고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다 그 말이예요. 그런 현상, 말하자면 그래픽(graphic)한, 사실적인, 현상적인, 그 묘사적인 말로서 표현한 것이오. 그러니까 이런 말을 보다가 오해해선 아니되요. 예수님에게는 성신이 없었다고 한마디로 단언해서는 아니되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보혜사가 아직 올 시간이 아니니까 아까도 읽었지만 요한복음 16장 볼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부활하시사 승천하신 다음에 내가 가서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너희에게 보내마 하고 몇번이나 그 보혜사에 관한 것을 약속을 하신 거요. 그가 아직은 오시지 아니한 까닭에 사람들이 정확하게 그걸 아마 몰랐었던 까닭에 이 말을 거기다가 써붙인 것이오. 그게.

그건 어떻게 됐는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대로 볼 때에 성신께서는 한번 오시면 영원하시고 또 그런 까닭에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거룩하신 뜻을 이룰려고 끊임없이 사역을 하시는 것이지마는 여기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도리는 우리는 얼마든지 성신을 저항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랬어요. 얼마든지 성신의 하시는 일을 막고 방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고. 그리고 그것은 제 이름하에 제 선의 의욕하에, 제 이상하에 하는 일이 또 많은 것이오. 자기가 잘못 되어서 정욕으로 죄짓고 성신을 근심케도 하지마는 또한 자기에게 베푸시사 감화하시고 유기적으로 사역하시는 성신의 감화와 가르침에 대해서 주의해서 생각을 집중해서 그것이 성신께서 나에게 비취시는 도리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당연한 도리다 하고 이렇게 깨달아 가지는 않고 소홀하게 아무렇게나 대하고 다른 종교적인 열정이 먼저 나를 지배해서 자기 생각하는 선입관적인 종교로 자꾸 밀어 댈려고 하는 까닭에 마음이 온유하질 않고 또 예하고 언제든지 대화가 되어 있지 않고 언제든지 자기의 주장하나가 그 속에 있어요. 아니 종교는 이래야 한다, 열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열심으로 뭐해야 한다, 무엇이 자꾸 붙어 있다 그말이오. 자꾸 그 무엇이 붙어 있는 것 때문에 그러고 그것이 종교의 미명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까닭에 성신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자꾸 저해해요. 이러니깐 성신을 소멸하지 말라. 이 말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우리가 성신께 대해서 안믿는 사람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할 사람 종류는 성신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인 거요.

그러나 그건 논할 것 없고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할 때에도 항상 성신을 거스린다고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항상 성신을 거스린다고 막 스데반의 사도행전 연설을 보면 끝에가서 나중에 책망하는 것을 여러분은 보실거요. 이스라엘 백성이 성신을 거스리고 살았단 말이오. 믿는 사람들도 오늘날 크리스챤들도 수다한 사람들이 성신을 거스리고 살아가는 거요. 그게.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자꾸 자기 맘대로 자기 생각하는 종교로 믿고 나갈 것 같으면 거스리는 짓 밖에는 없어요. 오늘 본문 말씀 16절을 보면, 또 갈라디아 5장 16절에도 육신의 소욕이 있다. 에피뚜미아가 있어요. 쌁스의 에피뚜미아(σαρξ의 επιθυμια), 육신의 원하는 바가 있다. 그것이 이상일 수도 있고 이건 좋은 욕망일 수도 있어요.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바울 선생이 말할 때 거기 에피뚜미아라고 그 말을 썼어요.

같은 어원에 있는 말을 그러니까 반드시 나쁜 욕망이란 말이 아니라 육신 제 자신으로는 위대한 욕망이라고 하겠지만 그게 위대한 욕망이라 할지라도 네 육신에게서 나온 이상 네 옛사람에게서, 너라는 인간에게서만 나온 이상 성신을 거스린다. 그리고 성신께서 원하는 것 그런 것 다 거스리는 것이다. 성신은 그것을 타협하고 중간에서 얘기를 한다든지 영입해 준다든지 하는것 아니다 그것을 언제든지 거스린다고. 내 생각에는 그것이 성신의 뜻같고 하나님의 뜻 같지마는 네가 성신님의 조명과 인도를 받아서 얻은 것이 아니면 그렇게해서 네게 비취는 것이 아니면 그건 성신을 꼭 거스리는 일에 적당하다는 것이다고. 이렇게 해서 성신이 우리 안에 먼저 신자의 속에는 다 계신 것이오.이게. 또 우리는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있고 성신의 가르치심을 받는다는 말도 있고, 인도를 받는다는 말도 있고, 또 성신이 우리를 위해 도고 한다는 말도 있고,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이런 말들을 앞으로 차례차례 조금 더 우리가 구별해 가면서 생각해 나갈 것이오.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성신님께서 저희 안에 거하시고 성신께서 보혜사로서 우리의 은혜를 온전케 하시며 은혜로 말미암은 거룩한 열매를 맺되 먼저 우리의 인간성에 도덕적인 품성을 맺게하시는 역사를 하시지마는 이 가장 기초적인 일부터 저희들은 미명하에서 그럴 듯한 구실하에서 항상 저항을 하고 항상 소멸을 함으로써 사실상 10년을 예수를 믿고도 그의 도덕적 성격에서 조화있게 그리스도적으로 자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보통 이세상 사람이 변화하는 그런 스타일(style)정도의 변화만을 가지고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인 것 같이 스스로 속기도 쉬운일이 많사옵나이다.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저희가 또한 여러가지 세상의 문제와 마음의 여러가지 문제를 부딪혀서 만났을 때 그 때 우리의 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사람들은 각각 반성할 수 있는데 그런 때 우리의 장성이 너무나 미미하고 보잘것이 없어서 거대한 문제 앞에서 어찌 할 수 없이 넘어지는 현상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장성이 성신으로 말미암아 건강하지 못하고 또한 조화가 있지 못한 것을 항상 느끼옵나이다. 주님의 중요한 사실을 간과치 않고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우리교회 각원이 중심에 깊이 생각하게 하옵소서.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무슨 일을 경영하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참된 길이 거기 건전하게 설려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전다웁게 거룩한 생활을 하고 그 거룩한 생활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이하고 특이한 종교적인 생활이 아니고 가장 정상적인 인간 생활을 하되 성신께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으로서 우리 안에 열매 맺게 해 나가시는 생활에서 늘 그런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조화있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 것을 명심하게 하시고 혹은 오해 가운데 그릇된 생각 가운데 하나님의 성신과 신령한 생활도 우리를 특이한 종교 귀족의 생활과 같이 생각하거나 신통력있는 생활과 같이 생각하는 모든 오류와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하시고 당연히 성신께서 내주하시고 내주하신 그 거룩한 목적에 의하여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늘 받지 아니하고는 차라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깨닫고 알게 하시사 저희들 스스로를 돌아보아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그 도덕적인 성격이 건실한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장성함이 없이 항상 비천한 세상 사람과 같은 마음가운데 있는 여러 불결한 것들, 미움이라든지, 시기라든지, 질투라든지, 또한 괴악한 것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대로 저희 안에서 판을 치고 지배하고 문제 앞에 성냥을 그을려고 할 때 그냥 불 붙어 올라오고 하는 이런 저희의 가장 비속한 상태를 건져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비옵나이다.

주님이여, 거룩한 고귀한 인격에 고상한 인물다운 인격의 완성이 사람의 노력으로가 아니고 성신님의 주장과 그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아서 성신을 좇아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이 확실한 생활의 행보가 먼저 우리에게 있으므로 교회의 행보도 건전할 것을 알고 바로 서게 합소서,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3강(베드로후서 3장 8-18절)

  오늘은 지난 주일 아침에 계속해서 성신께서 우리들 안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또한 역사하시는 도리에 대하여 다시 상고하겠습니다. 성신님의 역사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성삼위의 그 각각 우리가 알만하게 특성적인 그 역사의 어떤 성격적인 것, 분명한 것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올시다. 신약에 와서는 구약에서보다 훨씬 성삼위의 그 거룩하신 역사나 그 양상에 대해서 밝히 알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는데 각각 그 경영하시는 내용에 있어서 그런 것으로 우리가 곧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오.

예를들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할 때에 주로 예수님의 하신 일의 특색이란 구속이라는 사실이올시다. 구속이라는 모든 은혜의 사실을 그는 다 준비해 놓으셨고 그리고 그 일에 필요한 하나님의 법에 의해 필요한 일들을 완성하신 것을 보이십니다. 성부의 하시는 일이라 할 때에 크신 작정하에서 창조의 일을 현저하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올시다. 그러면 성신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이냐 할 때는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 개인이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령한 몸을 거룩하게 성화해 나가는 일, 그러면 아버지와 아드님이 이미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시고, 비치하시고, 이루어 놓으신 여러 은혜들을 우리가 받아서 실제로 그 은혜 가운데 우리와 관계 맺어질 수 있도록 하시는 역사, 그러니까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은 곧 성신님의 역사이시고 성신님의 하시는 일이 올시다.

성신님께서는 물론 그 독특한 그 성신의 한 인격을, 품위(品位)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오. 하나의 퍼어슨(person), 영어로 말할 때 한 person, 한 인물(人物)이라, 한 인격(人格)이라, 그러한 모든 요소를 구비해서 포함하고 있어요. 마치 아버지께서 한 person, 인물 혹은 인격으로서, 아드님이 하나의 인격으로서, 성신님도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 특색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예요. 성삼위의 도리는 물론 대단히 오묘한 도리이고 깊고 깊어서 사람들이 다 말로 이야기 할 수도 없고 우리가 다 잘 깨달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거기 분명히 신비한 사실이 있다는 것과 그 성삼위가 세 신의 일이 아니고 한 하나님의 세 개의 인격적인 활동이고 그것은 각각 호칭을 할 때에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 아드님 되시는 하나님, 성신님 되시는 하나님 이러한 말로 부를 수 있게 됐고 또 신학상, 개혁 신학상 늘 그렇게 불러오는 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신께 대해서도 첫째 생각할 것은 늘 한 세력이든지 한 능력이든지 현상이든지 어떤 감화든지 그런 것이 제일 중요히 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엄연하신 존재라는 점이 아드님이나 아버님이나 그 인격적 존재의 현저한 것과 같이 현저한 것이 올시다.

이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이라는 말이 어느새 신약에서만, 이것은 구약에서도 반드시 다 그런 것도 아니올시다마는, 신약에서만 알지 못하던 새에 성신으로 부르던 말이 성령으로 모두 고쳐져서 모두 그렇게 하는데, 그야 어떤 말을 쓰던지 그것은 표시니까 그 말을 쓰는 것이 무방하지만,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신이란 말을 써 온 이유는 인격신을 표시할 때는 영이라는 육에 대립되는 상대어(相對語)보다는 다같이 인격이면서도 사람이라든지 천사와는 대립되는 신이라는 말로 우리가 표시하는 것이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신이란 말을 쓰던 예(例)올시다. 그렇기 까닭에 신이라 하는 말을, 성신이라 하는 말을 그냥 쓰는데 이 말에 의해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성령이란 말을 쓰고 싶은 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그냥 쓰시라는 말이오.

그러나 성령이나 성신이나 어떠한 말로 표시했든지 그 말이 대표하는 그 성격의 첫째 앞서는 것은 그의 인격이지 그의 감화나 또한 그의 능력, 세력의 작용이라는 것이 아니올시다. 그런고로 우리가 성신을 의지한다든지 성신님의 인도를 받는다든지 가르침을 받는다든지 심지어 성신을 받았다라는 말을 쓸 때라도 그 말이 될 수 있는대로 인격신이신 하나님의 그 삼위(三位)의 일위(一位)가 되시는 성신의 그 인격적인 존재 사실에 모호하거나 배치되는 그런 용법을 하지 않는 것이 늘 중요한 것이 올시다.

함부로 ‘성신 받았다’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인격신을 받았다 하는 말로 만일 치중(置重)하고 생각할 때는 주의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어요. 성신을 받았다라는 말이 비 성경적이란 말은 아니올시다마는 그런데 그런 독특한 용법을 쓸 때 그 독특한 경우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런 말로 어떤 구체적인 사실을 강조하느라고 쓰는 그것을 그냥 보편화하고 일반화해서 성신을 받았다, 성신을 받았다 하면 다른 것보다도 무슨 이상한 힘을 받았다든지 어떤 신통력을 얻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의미로 자꾸 표현하기가 쉬운 것이오. 그런 말은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성신께서 내 안에 와 계신다는 말로써 그런 뜻으로 성신 받았다 하려면 성신님은 들어왔다 나갔다 하시는 법이 없다고 우리가 지난 번에 배웠어요. 그리고 믿는 자에게 그 은혜를 보존하시기 위해서 보혜사(保惠師)로서 한 번 중생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면서 그 시간에 와 계시면 그 다음 부터는 영구히 우리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런 후에도 새벽기도할 때도 성신 받게 하소서 주여, 성신이여 강림하사 하고서는 마치 성신 받지 못한 것과 같이, 이것이 과거에 우리 한국교회에 있던 많은 폐단이올시다. 우리교회, 한국교회에 원로가 되실 만한 훌륭한 목사님들도 이 사람이 참석한 새벽기도회, 소년시절에 참석한 새벽기도회는 주로 이 성신 받으라 하는 것을 강조했어요. 그러니까 그 때에는 멋모르고 그렇게 기도를 했지요. ‘나도 성신 줍소서.’ 그래도 아무 감흥이 없어서 ‘아마 나한테는 성신님이 별로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하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에게 한 번 주신 성신이 또 새롭게 무슨 이상한 현상을 일으켜야만 하겠다 생각해 가지고서 계시면 계시다고 조금 소리좀 내 주십시오 하는 식으로 성신받았다고 소리를 하고 ‘주십시오’ 하는 소리를 쓴다면 그것도 참 아주 그 별로 대단히 만홀히, 그 예(禮)에서 많이 벗어나는 일이예요.

신뢰한다면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각 개인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계신 성신님께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나를 무엇하려고 나같은 사람의 속에 와서 계시는가? 이것을 우리가 더 주의해서 깨닫고 거기에 의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아직 계시지 않는 양으로 와 계십소서 한다든지 성신 받아야겠습니다, 성신 줍소서 이렇게 자꾸하는 것이 뜻을, 그 말 뜻을 성경에서 성신받는다는 말 뜻을 모르고 그것을 아무렇게라도 원용(湲用)해서 쓰는 것은 참말로 혼돈을 일으키는 장본이올시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성신님의 그 하시는 일에 대하여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구원, 인류의 구원 혹은 결국 모든 것의 구원의 큰 사실의 공로를 다 쌓아놓으셔서 그 공적과 그 공효(功效)라는 것이 거기에 분명히 있게 해놓으셨으면 성신님의 큰 일은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거요.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그 추호도 흠이 없는 절대의 의를 완전히 다 이루셔서 충당(充當)하셔서 구원의 모든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공효로 쌓아 놓으셨으면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니올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는데 그는 그 생명을 버린 대상들이 있어요. 누구를 위해 버렸는가? 오늘날 여기 앉은 우리들을 위해 다 버리신 것이오. 그러나 여기 앉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로 흘러 가면서 지금까지 내려온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 생명을 버리신 것이지만 동시에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버리신 모든 자에게 저들을 위해서 쌓아 놓으신 이 공효의 축복을 그들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하늘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거란 말씀이오. 그런데 그와 같은 공효를 주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그 일을 하실 때는 거기에 분명히 당신이 그 거룩한 법칙을 따라 쓰시는 법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성신님, 즉 다른 보혜사이신 그분이 와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보존하시도록 하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의 그 사역을 통해서 오늘날 그리스도는 우리의 안에서 우리에게 일을 계속적으로 하시고 계신 것이오.

성신님은 물론 그리스도의 그 특별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이것 만이 하시는 일의 전부는 아닌 것이 올시다. 즉 구원의 사실에 관여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은혜를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내려 주시고 받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고 발전하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것만이 성신님이 하시는 일의 전부는 아니예요. 하나님의 성삼위의 일위로서 창조에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신이 관여를 하셨고 또 그가 이 세상에 있는 여러가지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현상에 있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살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동안에 그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과 그런 생애를 잘, 무량(無量)히 보낼 수 있도록 늘 이 천지에 있는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베풀어서 보존하고 그것이 타락해서, 악화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재촉을 빨리하지 않도록 어떠한 하나님의 크신 법칙과 경륜하에서 이를 유지하고 이것을 흑암 가운데서 파괴하고 파멸해 버리지 않도록 하시는 이 큰 일이라는 것, 이것은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이라는 거요.

이런 일반적인 성신님의 역사가 있으므로 사람이 세계에 있어서 살면서 사람끼리에 악마와 같이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고 죽어 버리고 그냥 소실되고 하나님의 진노로 불타버리고 하는 일이 급격하게 다 쏟아지도록 하지 않고 악한 사람이 비록 있고 불의가 거기에 창궐(猖獗)한 것 같을지라도 유지하는 것이오.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대로 만사를 하나님의 법에 조금치도 어김이 없이 그 법칙에 의해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막을 것을 막으셔요. 예를들면 적그리스도가 지금 나타나고 싶지마는 그것이 제 때에만 나타나게 하려고 막으시는 일도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 가운데 하나이고 마귀가 준동(蠢動)을, 요동을 해 가지고 사람들을 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잡아서 휩쓸고 싶지만 못하게 막아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성신님의 일인데 이것이 이 세상과 이 일반적인 세계에서 베푸는 바 하나님의 보통의 은혜, 혹은 일반의 은혜, 혹은 커먼 그레이스(common grace)라는 것, 그것을 가지시고 내리시는 거예요. 이러한 은혜가 아니면 이 세상이라는 것이 도저히 그대로 존재도 할 수가 없는 것이오. 성신님의 역사는 그런고로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역사, 일반 역사, 일반의 은혜, 즉 보통의 커먼 그레이스에 의한 일반적인 역사, 소위 제너널 오퍼레이션(general operation)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하시는 것이오.

그러나 이런 성신님의 일반적인 사역, 역사를 하시는 것은 그것 그대로만 무제한 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최종이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저한 사실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의 복리와 보존과 또 일을 달성하는 생활을 위해서 그 주위에서 늘 역사하시는 까닭에 이 세상에 사회가 질서가 있고 사람들에게 그래도 정의 관념이 있어서 불의에 대해서 대중이 분노를 하고 또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고 선을 행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고 불쌍한 이를 보면 동정하는 일들이 있고 이런 모든 일들이 그것대로 한 사회를 형성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복리와 또한 향상과 결실을 돕기 위해서 선용되고 있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할 거요.

그런 것을 각성한 사람 같으면 그 사회에 자유가 있을 때 그 사회에 복리를 위한 노력이 있고 사람들의 정의관이 아직도 있어서 그것에 차탄(嗟嘆:탄식하고 한탄함)을 하고 대부분이 지지를 할 때는 역시 성신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의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 자꾸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큰 사회가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맹목한 가운데 그냥 밀고 나갈 때 하나님의 그 거룩한 법칙과 우리로 다 측량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한 큰 사회라도 폐쇄해 버리고 더 살기 어렵고 더 의를 행하기 어렵고 더 하나님을 찬송하기 어려운 사회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이오.

여러분은 이 공산주의 국가나 적색 제국주의의 체제하에서 무서운 그 발굽아래서 꽉 눌려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만큼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는가 생각해 보세요. 우리만큼 자유롭게 성신님의 특별한 은혜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가? 자유롭게 성경을 볼 수 있는가? 자유롭게 성경을 보고 거기에 대해서 그 뜻을 묵상하고 생활을 해 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세계의 큰 부분에서 벌써 이와같은 무서운 검은 구름 혹은 도도한 탁류가 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깨우치지 못하고 한 사회가 악으로만 자꾸 치닫고 그리고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람들이 타락하고 불의한 데로만 자꾸 가고 이 세상 사람하고 똑같이 공리적이고 자기 종교적 욕심만 채우려하고 나아가는 동안에는 언제 하나님의 진노에 저촉할지 알 수 없는 거요. 성신님께서 근심하시고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 ‘회개하고 바로 서라’ 할 때에 회개하고 바로 서야 하는 것이오. 그런 것이 하나만이라도, 우리 조그만 교회 하나라도 정신을 차려서 서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생활 태도가 있어야 할거요.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이 없을 때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것을 여러분은 보셨어요. 의인 50명 때문에, 의인 45인 때문에, 40명 때문에, 심지어 나중에 10명 때문에, 10명만 있다면 10명 때문에라도 내가 그것을 아끼마. 이것이 중요한 것이오. 사회라는 것은 거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 예수님이 오시는 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들려서 공중으로 올라가 버리면 더 아낄것이 없는 까닭에 대 환난으로, 물론 그 환난은 큰, 그전부터 있어 오지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하늘이 뜨거운 불에 다 녹아지고 체질이 불에 녹아질 것이라, 녹아질 것이라 그랬어요. 이런 무서운 사실이 발생할 것을 알아야 할거요.

그렇기 까닭에 한 사회에 의로운 사람들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얻은 하나님의 그 거룩한 백성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로 존재하는 거요.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고 따라서 그 생활이 항상 경건하고 단정해야지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한없이 종교를 자기 공리적인 목적을 위해 추구하고 나아가는 것 가지고는 안된다 말이오. 이게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신님의 그 거룩한 사회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역사라는 것을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이오.

이 그리스도의 지금 계속하시는 일이란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신님의 우리에게서의 적극적인 역사,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 전체위에서 항상 역사하셔서 보존하시고 또한 지키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성화하시고 이것을 향상시키시고 이것에 결실을 하도록 힘 주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쳐주시는 그런 역사가 있다고 그랬어요. 그런 역사는 성신님이 단독으로 하신다고 생각지 마시고 그 일과 그리스도의 일과는 하나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하는 것이 아니오. 여러분은 요한복음 16장 13-14절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거기 볼 것 같으면 주께서 성신님이, 장차 보혜사가 오셔서 진리,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할 것인데 그가 장래 일을 말할 것이고 그가 내 일을 가지고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고 자의(自意)로 하시지 않고 내 일을, 여기 성신님과 그리스도의 일은 혼연히 하나인 것을 그리고 성신께서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오.

이 성신에 관한 도리를 구약에서부터 우리가 공부해 나와야 하겠지마는 구약에서 공부할 때 이것은 우리가 이 짧은 기간 안에 그렇게 상세하게 다 논하기가 어렵지만 다만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한가지 구약의 성신에 관한 것을 우리가 이야기 할 때에 하나님의 신이라, 여기 성령이라 쓰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라 하는 말로 표현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반드시 다 어떤 인격자를 표시하는 말은 아닌 것이오. 그러나 인격자 아닌 다만 세력이나 감화나 그것만을 표현한 말도 아닌 것이오. 또 그 속에 어떤 인격자란 것을 분명히 나타낸 그 인격인 요소가 들어 있을지라도, 이 하나님의 신이란 그 말을 쓴, 그렇지만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제 삼위인 성신의 역사라고 단언하기가 어려운 데가 있어요. 그런고로 이와같은 용어 ‘하나님의 신’이란 용어가 혹시는 표상적으로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기식을 표시하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하나님 당신을, 하나님의 신이 어떻게 어떻게 하셨다 하는 말로,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 하는 말과 꼭 같은 의미로서 사용한 것이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제일 이 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사상은 생명의 힘을 특별히 표시하려 할 때에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므로 이 피조물 가운데 그가 생명체로서 존재하게 하려는 것, 그런 때에 하나님의 신이란 말과 결부되어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는 그런 정도로 하고 오늘 날 우리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공부는, 지금 성신님은 어떻게 역사 하시느냐? 가령 일반적인 은혜의 사실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느냐?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가령 진리의 성신 그분이 오셔서,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죄와 의와 혹은 심판으로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도 이 세상에 대한 역사의 한가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 제일 중요히 관심해야 할 것은 지금 일반적인 역사 위에다가 우리 안에서의 특별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이오. 이것이 일반역사와 대립해서 신학상 특별한 역사라, 더 스페셜 오퍼레이션스(the special operations), 이 특별한 역사라는 말로 쓰는데, 그것은 마치 일반역사가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 위에 역사하는 그 사역을 의미하는 것과 비슷하게 하나님의 그 재창조된 새로운 생명체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또 그들 위에서 역사하는 그것이 특별한 역사올시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신의 일반의 역사의 은혜 가운데 다른 어떤 사람에게 못지않게, 늘 받고 살지만 그 위에다가 가(加)해서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그 대상으로, 또 그 특별한 역사의 은혜 아래 늘 살고 있는 것이 올시다.

그러면 성신님의 여러가지 역사를 그 한 사람의 내부에서 하시는 그 역사를 그 사람은 어떻게 바르게 판별하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요. 먼저 그러면 성신님의 신자에게서 하시는 특별한 역사를 보면 중생도 성신님의 역사로 “중생의 씻음과 성신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한 것을 우리가 디도서 3장 5절로 7절까지에서 지난번 봤어요. 그 다음에 우리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지난번에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에 특별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신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그런고로 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다”하는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할 때 무엇보다도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의 모든, 우리 몸의 움직임,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성전의 존재로서 하나님을 표시하고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한다 말이오.

어제 저녁에 여기 우리 합창단들, 찬양대를 모아서 이야기할 때도 잠깐 했지마는 우리가 찬미하는 제사를 드린다는 것,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리면 달리 우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못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그 미(美)를, 그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드러내는 거요. 그런고로 찬송을 교회가 예배의 중요한 프로그램(program)으로서 드리게 돼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정신 자체가 찬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니까 그래요.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앞에 절하는 것이니까 찬송을 하게 되는데 그런 때에 그냥 다 알아버린 찬송이라 벌로, 반사적으로 그냥 그대로 하고 그리고 마음은 딴 곳으로 움직이고 그렇지 않고 그 말과 그 곡조에 마음을 집중해가지고 또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이 찬송을 올리는 제사를,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고 할 때에 달리 우리가 어떻게 안할지라도 그것으로써도 우리 몸으로 우리 육체의 기능의 작용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영광을 위한 것이 되는 거요. 물론 선행하는 것도 그렇게 되는 것이고 몸으로 산 제사, 교회의 일을 위해 자기 시간을 내고 몸을 내서 수고를 하면 그것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한 일체(一體)가 되는 거요.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기쁘시게 흠향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몸으로써 친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성신님께서 내주하시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안해야 할 것인가를 감화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오. 그 몸이 성신의 전이라. 하나님의 성전의 전에 하나님의 성신이 거하신다 할 때에 누구냐 할 것이면 삼위되시는 하나님, 즉 성신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 말씀이오. 우리를 또 인(印)치셨다 해서, 거룩한 교회의 형상에 있어서 인치심을 받았다 확실한 확증은 해 주셨다 하는 것, 세례를 주셨다 하는 것.......

성신의 세례라는 것은 누구 말마따나 어떤 사람이 성신 충만을 곧 세례라고 이렇게 혼동해 놓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말할 때 그 사람이 충만한 사람들은 아니오. 그러나 그 사람들 보고 말할 때는 내가 너희에게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한다. 너희는 감당 못한다. 이렇게 책망을 하면서도 그러면서 우리는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느니라 한 것이지, 충만하다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올시다... 충만하다는 것은 에배소서 5장 18절에 “성신의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 볼 것 같으면 성신께서 그와같이 충만히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의사로서 그것을 저해를 하지 않고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거요.

주의할 것은 이런 모든 역사는 우리 의식을 박탈해 버리고 당신이 들어와서 입신(入神)한 사람같이 딴 소리를 한다든지 딴 생각을 갑자기 가진다든지 내가 생각지 못한 기상천외한 생각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유기적인 역사, 올개닉 오퍼레이션(organic operation)이란 것, 이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내 지적인 작용, 정의적인 작용에 함께 작용해 가지고 결국 내가 노력하고 내가 찾고 내가 논리하고 내가 결론을 얻고 내가 행동하고 내가 밀고 나가는 거요. 이렇게 해서 외인이 볼 때는 신통력이 아닌 아주 노말(normal, 일상적인)하고 아주 정상적이고 아주 똑똑한 자기가 움직이고 나가는 거요. 그 사람이 움직이는 거요. 그런데 이것을 마치 사람의 의식을 박탈해 버리고 신통력이 들어와서 야단 내는 것같이 하고 무슨 입신한 것처럼 말하는... 이것이 성신 충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부정당한 생각이오.

성신충만이라는 것이 원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의 위치인 것이오. 어떤 특수한 종교 귀족에게만 임하는 독특한 사건이 아닌 것이오. 그러나 성신께서 당신의 의사대로 어떤 사람을 갑자기 어떤 특별한 능력을 주어서 그 어떤, 소위 요즈음 말하는 그 카리스마(kharisma)라는 것을 주어서 일을 하시려고 할 때에 보통사람 이상의 어떤 독특한 현상이 들어날 수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 충만이라 할 때에 먼저 카리스마틱한 것이 튀쳐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품성이 그리스도적으로 서는 것이오. 그의 도덕적인 성격, 그의 마음 쓰임이 그의 심정가지는 것이 그것이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먼저 화(化)하는 거요. 이 말은 그가 무식하던 사람이 유식해진다라든지 모르는 것을 다 무불통지(無不通知)한다든지 그렇게 금방 변해서 뭐 새사람이 되어서 이상하게 된다는 말도 아니올시다. 어디까지든지 그러한 그릇, 그릇 안에서 일이 되는 거요.

충만이란 말도 그릇에다 물을 부어 가지고 가득히 부었다는 말과 같은 뜻인데 우리 그릇이 작으면 작은대로 가득히 붓지 작은 그릇이 갑자기 그냥 배나 3배나 4배나 그러한 것을 용인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견이나 지혜의 장성이나 다 분량이 있어서 충만하면 그것이 성신님의 주장하시는 바 되어서 성신님의 감화 가운데서 정상적으로 자꾸 자라가는 것을 의미하지 갑자기 그 사람이 5살 먹은 사람이 한 25세나 된 청년 같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아니올시다. 충만한 까닭에 그는 자꾸 정상적으로 먹고 크고 자라나는 거요. 그런고로 그 사람이 장성의 정도가 어디가 있는가에 따라서 그가 어린아이이면 어린아이짓도 하는 것이고 연약하면 연약한 만큼 밖에 감당 못하는 것이오. 이것을 충만하다 해 가지고 신통력이 붙고 초인이 된 것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오.

이런 사람들에게서 성신님이 하시는 역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르치는 역사를 해요. 그 다음에는 인도하신다. 손을 잡고 끌고 가는 역사를 하시는 거요. 그 다음에는 우리 신과 더불어 우리 속에 있는 영을 감화하셔서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을 확증해 주는 거요.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는 거요. 그 다음에는 우리 안에서 친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는 것이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 신으로 더불어서 역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 성신님이 간구하는 것은 유기적인 역사인 까닭에 우리가 그것을 아는 거요. 마음 가운데 우리가 참된 기도라는 것은 성신의 간구와 더불어 할 때 참으로 능력있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방도로서의 충분한 효과를 내는 기도를 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는 우리 안에 충만하신 그는 우리에게 찬송을 하게 하고 감사를 하게 하는 거요. “성신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고”라고 그랬죠. “마음으로 주께 찬송하고 또한 주께 감사하도록” 했어요. 이와 같은 일이 성신님의 우리에게 있어서 역사의 몇가지, 성경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몇가지 올시다.

이제 오늘은 시간이 많이 갔을지라도 한가지 우리가 주의해서 배웁시다. 이것은 첫째 우리에게 큰 문제라는 것은 무엇이냐 할 때에 성신의 여러가지 우리 안에 있어서의 역사 그것 자체들을 그 사람은 어떻게 판별하느냐? 예를들면 나에게 성신님이 가르치신다 하면 내 생각인가 성신님의 생각인가? 이것을 내가 어떻게 판단해서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요. 그것 아마 참으로 성신님을 꼭 따라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너희는 성신을 좇아 행하라” 했으니 성신을 좇아가고는 싶은데 성신님의 가시는 자취를 내가 보아야 하지 않은가? 성신이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자’하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내 마음 가운데 우연히 ‘아 이리로 가야겠다. 저리로 가야겠다. 이 버스는 타야겠다. 이 버스는 안타야 겠다’ 그것이 성신님의 인도라고 생각한다면 아 내가 혼자 망상을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러한 것들이 흔히 발생하는 것들이오. 이러한 것들이 성신의 도리에 대해 깊이 생각치 못하면 필연 그러한 이상한 생각으로 유도되기가 쉬워요. 그래 이제 어떻게 그 사람이 판별하느냐? 가령 성신님의 가르침이나 인도를 다 아는 그 사람이 어떻게 바로 그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인하고 그에 순종하겠는가 하는 문제올시다.

성신이 한 사람 안에서 하시는 역사, 성신의 한 사람 안에서의 그 역사는 아까 말씀한 것은 첫째 내 안에 계시다고 그랬어요.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거요. 내 안에 계신 것을 지금 당장에 내가 성신이 그 안에서 어떤 이상한 작용을 하심으로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 요것, 성신이 이 안에서, 요렇게 역사하시는 구나” 그렇게 성신을 해석해야 하고, 성신님의 내주라는 것은 그러한 심리현상이겠는가? 그것을 우리가 주의해야 해요. 내주(內住)라, 내 안에 성신님이 거하시는 것의 여부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거요. 첫째의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이것이 있는 사실인 거요. 그런고로 새로운 생명은 분명히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 선언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사는 사람이지 그것이 과연 그런가 하고 의심하고 그것을 퇴(堆:물리거나 물리침)하는 법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성신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하고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바울선생이 고린도 교회에 두번이나 3장이나 6장에 그 말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었어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신의 전인줄 모르느냐? 왜 그것을 모르느냐고 이야기 했어요. 이런 말이 오늘 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첫째, 새로 창조를 받은 이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약속이나 명확한 선언에 대해서 의심을 붙이지 않고 믿는 것이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가지는 신앙인거요. 구원의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믿고 나가는 것이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하실 때에 부활에 대해서 이의를 붙이지 않고 다른 괴상한 해석을 붙여가지고서 그것을 무슨 상징화하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딱 믿는 거요. 이러한 것을 확인하고 나가는데는 물론 테두리가 있어요. 모든 성경의 하는 말이 명확하게 약속이라든지 선언은 아니예요. 어떤 것은 표상적인 표현을 한 것이 있어요.

이렇기 까닭에 이제 앞으로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것을 우리가 공부해 갈 때 배우겠지마는 교회의 권위와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흘러 내려와서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신 교리의 큰 테두리 안에서 늘 내가 믿는 것이지 무엇이든지 성경이 이랬으면 그 말이 어디 한 군데 간단히 난 것도 그렇다고 믿는다면 성경 자체가 원래 그런 의도로 쓰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어요. 서로 얼른 보기에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선언들이 있는 거요. 한편은 ‘한다’하고 한편은 ‘않는다’하고...‘해라’ 해놓고 ‘하지 말라’ 하는 식으로 나왔단 말이예요. 구약에 여러가지의 제사의 법 같은 것,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이런 것들을 다 드려라 하는 것이 구약에서, 오경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시편에 있어서는 40장에 있어서는 “주께서 번제와 소제를 기뻐하지 않는다 기뻐하셨더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고...  시편에서 여기서 저기서 우리가 그런 것을 볼 수가 있어요. 또 주께서 내 귀를 그 40장에, 내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하면서 이야기 해요. 그러면 주께서는 하라고 해 놓고 나는 기뻐하지 않는다 가져오지 말아라. 여러분 배웠죠. 이사야 1장에서 댓바람에 다시는 그런 것 가져오지 말라고. 아니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우리가 좋든지 나쁘든지 기왕 부족은 있고 죄는 있는 몸이지만 이것 갖다 드리겠습니다. 이것 하나님 명령하신 것 아닙니까 하고 이론(異論)할 것이오. 그러나 주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런 까닭에 항상 성경의 말씀은 건실한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을 믿는 것이, 받는 것이 안전한 것이지 건실한 교리의 뒷바침이 없이, 테두리가 없이 그냥 자기가 이것은 성경에 씌여 있는 말이다 하고서 그대로 믿고, 곧이 곧대로 믿고 그놈 대로만 나가야 한다 하고 나갈 때 자체의 모순 가운데 빠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믿되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일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적인 보증으로 마땅히 사람이 그대로 믿고 받아야 할 도리라 하고 확인해 놓은 것들은 성신님께서 그런 거룩한 말씀의 해명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인 까닭에 그것이 많은 이설(異說)이 있을지라도 쭈그러짐이 없이, 흠(欠)이 없이 그대로 계계승승(繼繼承承) 전승해 올 수 있도록 만드신 까닭에 그것에 의해서 믿는 것이라 말이오.

단순히 내가 독립해서 성경 하나만 들면 믿을 것 믿고 안 믿을 것 안 믿고, 그렇게 못되었어요. 왜? 나 한사람의 기억이나 판단력이라는 것은 아주 국한되어 있는거요.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이 역사를 통해서 계승해서 낳고 또 낳고, 낳고 또 나서 계승해서 전해주고 연구하고 깨닫고 그리고 이야기한, 말하자면 신약의 선지자들이 그 전해준 말씀이라는 것은 그것은 고귀한 것이오. 이 고귀한 유산을 가지고 거기에 의해서 우리는 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오. 이것을 무시하고 보편의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의 내용을 이번에는 볼 수 있는 교회 안에서 해명하고, 해명한 바를 받도록 하신 까닭에 어떤 유명한 선생이 말한바와 같이 ‘해명된 진리도 진리다’ 그렇기 까닭에 해명된 진리를 진리로 받고 나갈 것이다. 어떤 한 개인이 해석한 것이 진리라는 것이 아니라 해명되었다 하면 그것은 분명히 교회요. 확실한 도그마(dogma, 교리)로, 교회의 확실한 선언으로서 교회적인 권위를 가져야 하는 것이오.

이 교회적인 권위라 하는 것은 보편의 교회의 권위에 가장 가까와야 되는 것이고 그것은 역사적인 테스트(test), 시험을 지내서 풍우상설(風雨霜雪)에서도 끄떡 않고 그 시험을 끝내서 금과 같이 빛나는 교리들인 것이오. 이렇기 까닭에 우리 교회는 그런 교리들을 우리의 표준문서라 해 가지고 선언해 놓은 것이오. 이 태두리 안에서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 다 아시죠? 그것이 무엇인지? 그렇기 까닭에 이와같은 교회의 권위라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개인의 권위, 개인의 좁은 지혜와 지식과 판단력을 제일강산(第一江山:경치가 썩 좋기로 첫째 갈만한 산수)으로 여겨서 성경만 들면 자기는 무불통지(無不通知)다. 그 뜻을 정확하게 정당하게 오도됨이 없이 파악할 줄 안다는 것은 굉장한 교만인 것이오.

이렇기 까닭에 성신의 내주, 내 안에 살아계신다는 이 거룩한 사실도 성경이 명확하게 우리에게 선포한 말이 있고 이 말에 대해서는 그 말이 표상적인 언어라든가 그것이 별다른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사람을 오도하기 쉬운 이상한 표현법이라든가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봐서도 알고 교회도 역사적으로도 증명해 내려오는 거요. 그래서 이러한 조목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성신님은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첫째 믿어야하는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한 것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한가? 사람의 그 연약하고 변하기 쉽고 취약한 이성과 판단에 의해서 실험을 했다고 하는 것을 쥐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가 할 때에 최종적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명확한 선언,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시련을 겪어서 금과 같이 빛나는 그것, 이것이 더 중요한 거요.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 말씀의 선언에 의해서 그 선언을 해석하고 사실을 역술(譯述)해 나가는 이것은 신학이 되고 이것은 중요한 해명의 활동이지만, 어떠한 명제 하나를 놓고, 가령 예를들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이 조목 하나를 놓고, 제목 하나를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이 입증한, 성경이 선언해 놓은 그것을 믿는 것 보다는 예수님은 누구냐 할 때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의 모든 사업이나 언어가 의미가 없으니 우선 신이라는 가정 가운데서 출발해서 생각할 때에는 신인 까닭에 영원히 죽을 수가 없고 죽는다는 것은 신으로서 적극적인 행동이 되는 까닭에, 무엇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 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다시 생명은 그에게 명확히 있다는 정상위(定裳位)로 돌아가야겠다. 그렇기 까닭에 그는 부활했다. 신이니까, 죽을 수 없으니까 살았다 그 이야기요. 이것이 칼 바르트(Karl Barth)가 이야기하는 부활에 대한 논리요.

그러면 이와같은 것이 신학이 되느냐 하면 신학이 안되는 거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논식(論式)에 의해서, 사람의 논리 형식에 의해서는 논법을 가지고 증명을 하겠다는데 결국 사람은 그런 것을 수긍할런지 몰라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선언했으니까 의심붙을 여지없이 믿는 것이다고. 이것이 신앙 태도인 것이오. 이 신앙태도 하에서 그것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내가 해석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자기가 그 제목을 놓고서 그 제목을 제 멋대로 논리해가지고 다행이 결론이 긍정적으로 도달했으니까 그렇다 한다면 자기를 믿는거요. 자기의 논식이라는 것을 너무 의지하는거요. 사람은 보편적으로 논리의 형식, 소위 사고의 방식이라는 것이, 형식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것이 선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만들어 내신 까닭에 둘에다 셋 보태면 다섯된다는 것을 아무도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오. 다만 그 수의 이름은 둘이라고 하든지 투(two)라고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러나 이런 것들은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요. 왜 그러냐면 그것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것을 아는 재주가 없어요. 이렇기 까닭에 우리의 본성의 가지고 있는 광명이라는 것은 다 한계 안에서, 조건 안에서 움직이는 거요.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고귀한 사실들, 특별한 은혜의 사실들은 계시에 의해서 그리고 이 계시는 일반계시가 아니라 특별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알도록 하신 것이오. 이 특별한 계시 하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믿어야 할 것으로 선언하시고 그것이 교회의 대 기둥이 되고 대본(大本)이 되었을 것 같으면 그 믿는 거요.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이것은 대본의 하나인 것이오. 성신님이 안계셨다 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이것은 전혀 별다른 종교학을 하나 만들어야 할거요. 이렇기 까닭에 무엇보다도 첫째는 성경이 우리에게 명시하신 까닭에 우리의 감성, 그렇게 느꼈든지 안느꼈든지 그것은 크게 필요없는 것이오. 내가 이 속에 성신이 계시다고 찌르르 했든지 안했든지 그것이 하나도 나에게는 도움이 안되는 것이오. 오히려 이상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이에 내주하신 성신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면 그 행하시는 여러가지 사역은 경험할 수가 있는 것이오. 지내온 다음에 나를 인도하심을 분명히 알 수 있고, 지내온 다음에 아! 나를 붙드사 바로 가르쳐 주셔서 내가 곁길로 들어가서 저 사람들과 같이 방황하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한다 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생애 가운데 때때로 생각할 수 있는 거요. 그것은 뭐냐면 맺은 열매로 봐서 그것을 아는 것이다. 나무를 아는 것이다 그랬어요. 그러면 그때는 성신님이 내주하셨다는 그 거룩한 말씀과 약속하에서 이루는 이 일들은 결국 궁극적으로 다시 돌아가서 성신님의 내주라는 것이 진리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하는 거요.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감성을 가지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내가 인도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내 마음 가운데 참 찬송을 올렸고 성신께서 기도하신 그 기도에 내가 참여했고 증거하시는 것을 받고 했으면 성신님이 내주하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것이라 그거요.

이렇게 내주라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이지만 이제 우리가 구체적으로 더 알아야 할 문제들은 어떻게 하면 그 가르침을 우리가 알 수 있는가? 어떻게 받는 것인가? 어떻게 성신님의 가르침과 그렇지 아니한 것을 판별해 가면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인가? 이것도 중요한 것들이오. 우리가 이 다음 시간에 그것을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께서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룩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성신께서 저희 안에 거하셔서 역사하시는 그 여러가지 은혜롭고 사랑이 깊으신 역사를 분명히 받으면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한가지 한가지 생활의 경험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을 하나의 역사적인 변증으로 사랑하시는 성신님의 거룩하신 도리를 더욱 확신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을 저희가 아옵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들의 생활 행보에 있어서 항상 반성하여 성신께서 어떻게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며 어떻게 나에게 가르쳐 주시고 증거하시고 도고하시며 찬송과 감사를 일으켜 주셨는가를 늘 바르게 파악하고 깨닫고 이런 일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자기 종교적인 욕심과 소원에만 매달려 가지고 사는 일을 하지 않고 진리의 사실들을 우리의 생애와 역사를 통해서 항상 우리에게 명시하시고 깨닫도록 하실 때 그런 일을 소홀히 않고 바로 깨닫고 나아가게 하시옵소서. 성신님의 거룩한 도리를, 또한 성신님의 비취심과 저희 마음을 여시사 깨닫게 하심에 의하여 바로 깨닫게 하시고 의지하여 주님의 그 가르치심에 풍부한 은혜 가운데 들게 합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4강(로마서 8장 1-11절)


 

교회가 연례(年例)로 중요한 시기를 맞이할 때 특별히 그것을 기념하는데 이 특별히 기념하는 교회 일로서 우리 교회에서는 이번 주간 목요일 저녁 7시부터 세례와 성찬의 성례를 우리 교인들 앞에서 베풀것이올시다. 이미 광고했지만 미리 이 시간에 우리 예배하는 이 시간에 그것이 주님 앞에 아주 신성한 중요한 일이므로 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자기를 깨끗이 잘 보존했다가 나오시기를 바라는 뜻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오는 목요일 저녁, 수난 주간 가운데 주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기념일이올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날 성찬을 행할 것이고 동시에 세례를 베풀 것이올시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주최해서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동우(同友)교회인 강변교회가 그날 저녁에 같이 여기에 참석할 것이올시다. 강변교회에서 마침내 그날 저녁에 같이 참석하기를 기꺼이 원하고 나온 까닭에 그러면 우리가 한 교회인 까닭에 우리가 이것을 같이 집행할 것이지만 우리가 주최해서 하는 줄로 아시고 우리는 같은 동일한 교회, 큰 교회 안에 있는 강변 교인들을 맞이해서 같이 성찬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또 그 다음에 주님의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오는 주일날, 오는 주일 오후의 예배는 이것을 저녁으로 미루겠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기념하는 특별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뭐 예배가 특별한 것 있고 보통인 것은 없습니다만 순서를 좀 종래의 정규적인 순서를 바꾸어서 찬양을 중심으로 해서 할 것이므로 그날 저녁 7시부터 시작을 하겠습니다. 이것도 우리교회와 강변교회가 합해서 하는 것이올시다. 그런 줄 아시고 이것이 무슨 축전으로 즐기려고 하는 것보다 중심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즐거움을 바로 깨닫고 맛보기 위해서 우리 주님을 찬송하려고 찬송을 위하여 모이는 저녁이올시다. 그런 줄 아시고 이것도 마음을 준비하시고 경건하게 신령하게 혹여라도 그런 축전 기분 가운데서 인간적인 축전으로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 오전에 강설한 그 강설을 계속해서, 주로 이제 수난 주간이니까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듯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이번 ‘신앙의 기초 도리’라고 하는 제목하에서 시작할 때에 이야기한 까닭에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서 지금 신자의 생활에 관한 것을 이야기해가는 까닭에 그대로 그것을 계속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알고 그렇게 합니다.

성신께서 이 세상에 일반적인 역사를 하시고 또 성신께서 믿는 자들 안에서 특별한 역사를 하신다. 거기에 의해서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을 바르게 늘 잡고 거기에 의해서 우리는 중생하고 새사람이 된 이후에는 그런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우리가 처음부터 생각하고 이야기했는데 그 성신께서 신자들 속에서 역사해 가시는 사실의 중요한 것이 첫째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 안에 각각, 개인 개인 안에 성신님은 이미 계신 것이고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그것을 들었지요. 그런고로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거하신다. 육이라는 말에 대립해서 영이라는 말을 쓴 까닭에 오늘 우리가 성신이라고 할 때에 독립된 한 인격을 표시할 때 신이라는 말을 썼지마는 그것이 상대적인 어(語)로 쓸 때 영이라는 말을 또 쓰는 것이올시다. 다같이 하나의 단어를, 원어를 그것을 신이라고 했다, 영이라고 했다 표현을 하게 됐는데 그것은 우리의 과거에 내려오던 한 역사에 그런 사실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 뿐이고 그런 그 번역에 너무 구애될 것은 아니고 우리는 그의 도리를 중요히 늘 보아야 할 것이올시다.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 다음에 성신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 다음에는 성신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다음에는 성신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하신다. 또 성신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하신다. 도고를 하신다. 또 성신께서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우리로 찬송과 또한 감사를 가지게 하셔서 “성신 충만을 받으라 그래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라.” 그리고 다음 차례에 “주께 감사하라”는 말씀을 했는데 이와같이 성신님의 그 우리 안에서의 역사는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보면 이런 말씀들이 거기에 모두 있어요.

그런데 물론 성신님의 그 역사에 관해서는 이 세상 전체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반드시 의미를 가지고 어떤 효과, 어떤 하나님 법칙에 의한 영향을 꼭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전체에 모든 인류 속에, 인류 위에 하나님의 성신님은 역사하셔서 가령 일반의 은혜라, 보통 은혜라 하는 말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하나님 형상에 상응(相應)한 의와 선과 미와 진리를 추구하는 생활 태도가 그러한 제도, 그렇게 사회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들, 이런 것들이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여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그 구원하신 백성을, 주께서 기르시고 그 나라를 거룩되이 발전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서 또한 하나 부대적인 한 원조의 사실로서 전능의 왕께서 그 전능의 그 왕, 국왕, 힘의 국왕, 그러한 왕국에 있어서의 그 전능의 왕께서 주님의 친히 통치하시는 사실은 그의 신인 성신께서 일반적인 은혜와 일반적인 역사 커먼 오퍼레이션(general operation)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은혜 커먼 그레이스(common grace) 이것을 가지고 역사해 나가시는 까닭에 거기에서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일반 계시에 의한 가르침이 또한 있는 것이올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의 사역이라는 것이 섭리라는 한 명확한 사실로 또한 나타나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고 하나님의 보존하심이 있고 또한 시의(時宜:그 때의 사정에 알맞음. 그 시대에 적합한 사회적 요구)에 서로 협조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존재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이런 하나님의 섭리의 사실은 또한 사람들에게 늘 적용되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중요히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일반론이 아니고 특별히 구원을 받은, 중생하고 새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성신님의 내주나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고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받는 것인가 하는 그런 독특한 현상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특별한, 성신님의 특별한 역사의 현상을 지금 공부해 나가는 것이올시다. 그것이 여러분들, 우리 신자들의 생활에는 실질상으로 가장 유익한 교훈이 될 것이므로 그점에서부터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이제 일반적인 역사의 여러 그 도리는 그것은 나중에, 후일에 다시 그 특별한 역사라는 사실을 공부해 나갈 때에 필요한 사실로 때때로 관언(關言)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중점으로 생각할 것은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 즉 가르치심이오, 그것을 이번에는 생각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희를 인도하시리라.” 그 인도라는 말은 호데게오(όδηγέω), 안내해준다. 요것이다 요것이다 하고 지적해서, 지시해서 끌고 가신다는 그런 의미이고 로마인서 8장 14절에 있는 인도라는 말과는 같지 않다고, 또 갈라디아 5장에 있는 “너희가 성신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율법에 있지 않다”의 거기 인도라는 말도 로마인서 8장 1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은 어(語), 단어를 써서 아고(άγω) 꼭 붙들고 다른 데로 비키지 못하게 하고 끌고, 끌고도 가시고 혹은 보호하고도 가시고 계호(戒護)해 주시면서 가신다. 이런 말과는 다르다고 그전에 말씀을 드렸는데 요한복음 16장 13절의 인도라는 말은 번역이 인도일지라도 영어 성경도 같이 리드(lead)라 번역했을지라도 그런데 개념은 무엇이냐면 주로 “요것이 기다. 요것은 아니다” 하고 이렇게 일러 주시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도 “우리가 받은 이 영은, 혹은 신은 이 세상의 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신이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여러가지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알려 주시는 것이라 그말이오. 또 분변케 하시는거요.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아까는 12절 말씀을 내가 읽었는데, 14절 말씀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 보통 자연의 생명만 프슈키코스(psuchikos, φυχικός) 즉 프슈케(psuche, φυχή)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신의 일을 받지 않나니 이는 저가 미련히 여김이오 또 깨닫지도 못할지니(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分辯)함이니라.” 영적으로야 분변한다고 그랬지요. 아나크리노(ανακρινω)한다고. 자세히 살펴 가지고 과연 그런지 아닌지를 다 따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로서만 한다 하는 말을 거기에다 썼어요. 이렇게 성신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바로 알게 하심으로 바른 크라이테리아를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주시고 따라서 우리의 영혼의 기능에 유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바른 판단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 그거요. 이런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의 자식답게 살아가려 할 때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바르게 알고 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오.

이런 성신의 가르치심이든지 성신의 인도든지 또한 성신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에서 기본적으로 여러분이 언제든지 주의하고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오. 거기는 하나의 목적이 있어요. 마치 성신의 내주, 내 하나 하나의 속에 거하시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요. 성신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한 성신이 열 사람이면 열 사람에게 다 계시는 것인데 한 성신이 열 사람에게 계신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의 속성 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으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항상 어떤 일정한 범주 하에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논리와 사고에서는 그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면 열 사람 속에 하나 하나의 인격이 있다면 열 인격이 아니냐고 얼른 따질 것이오. 그러나 그런 점은 항상 성신님께서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그 독특한 속성, 편지(遍知)라든지 편재(偏在)라든지 하는 또 편능(遍能) 다른 말로 말하면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소불능(無所不能), 무소부지(無所不知)라는 것, 이 거룩한 속성 하에서 필연적으로 우리한테 나타내시는 일이란 말이오. 성삼위의 거룩한 신비의 양상이 자연히 이런 신비한 여러가지 사실들을 하시게 하는 것이오. 그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시는 거요. 그러면 성신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이것은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 그리스도의 신령한 일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거룩한 목적 하에서 그것을 현상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보편의 교회에서만 이룬 사실이라고 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이 현상의, 가시(可視)의 교회 안에서 그것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성신님은 우리 각 사람 속에서 내주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여기 에배소 4장 4-5절을 볼 것 같으면 거기 “몸도 하나고 또 성신도 하나시니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의 부르심도 하나라.” 이 “하나”라는 말을 자꾸 강조해요. 5절 보면 “주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고 또 하나님도 한 분이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다 받아서 그 생명 안에서 혼연히 그리스도의 신령한 한 몸, 하나의 거룩한 사실을, 존재의 사실을 일으키는 거란 말이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와 온전히 일체(一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만 그리스도에게서 내린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된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것이오.

이러한 거룩한 도리는 교회 역사에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개혁 시대에 이르러서 찬연히 그 문제를 아주 깊이 생각들을 해서 칼빈 선생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유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 즉 미스티컬 유니온(mystical union) 신비적인 일체성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누가 됐든지 문제는 우리가 받은바 고귀한 신앙과 교리의 유산 가운데 있는 이런 신령하고 깊은 도리로서 반드시 교회를 바로 깨달으려면 우리의 구원의 사실이 어떤 위치, 어떤 양상, 어떤 성질을 가진 것인가를 바로 알려면 이것을 모르고서는 안되는 것이오.

이 동양적인 종교의 나쁜 영향을 받아 가지고 항상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로만 모두 생각하는 이런 습관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거요. 우리의 인간관이라든지 세계관을 좀 고쳐야 해요. 어때야 할 것 같으면 성신님의 내주도 그러하시고 성신님의 가르치심도 유니오 미스티카라는 큰 사실, 그래서 그것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는 커뮤니오 쌍토륨(communio santorium), 성도들의 거룩한 한 가정을 이루는 사실, 기반을 이룬 사실, 커뮤니티(community)를 만들어 나가는 이 사실에다가 중점을 두고 인도도 하시고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내주도 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이 점을 우리가 오늘 제일 먼저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이 내주하시는 사실이 이 거룩한 교회의 중요한 사실을 바르게 하고 정당하게 구현될 수 있도록 하신다는데 목적을 두고 하시는 것이지 그 사람의 복리를 위해서나 그 사람 개인이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게 하신다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버려야 해요. 왜냐? 우리 개인이 혼자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은 없는 것이오.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 아닌거요.

하나님의 법칙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함으로 비로소 우리가 죽었던 자가 산 사람이 돼서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정을 받고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이 있는 까닭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 가치체로서 인정을 받은 것이고 이 생명체는 그리스도와 저(자기)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자들이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 보편의 교회요. 처치 캐톨릭(church catholic) 보편의 교회라는 말, 즉 신비하고 보이지 않고 하늘에 있고 땅에 있고 고대(古代)에 있고 지금도 있고 그리고 그것은 영원까지 있어야 할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라는 말로 표상적으로 표현한 그 거룩한 사실 안에서 비로소 나의 존재와 가치는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인정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않고 하는 문제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살아 있는 사람이라야 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존재를 인정하시고 가치를 인정하신 사실은 유니오 미스티카 안에서만, 신비한 일체성을 이룬 안에서만 그것은 있는 법칙이올시다. 그런 까닭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할 때에 궁극적으로 항상 신령한 신비의 일체를 이룬 사실이 정당하고 또 의미있게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것을 완성하시는 지경으로 끌고 가시는 그 사실에 나의 부분을 하기 위해서 나에게 성신님의 가르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의해서 늘 생각해야 해요.

에배소 2장 10절도 볼 것 같으면 그 개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제작하셨다는 말이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창조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 선한 일이란 “이 일은 하나님이 이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다.” 이렇게 해서 너는 네 마음대로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너희가 믿는다면 그 믿음이 있은 다음에 네 멋대로 사는 길은 없는 것이다. 네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그 길도 없는 것이고 네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자정(自定)한, 스스로 정한 그 법칙대로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는 무엇을 위하여 있게 하셨는가는 지으신 이의 소관이고, 마치 토기장이가 토기 하나를 가지고서 토기를 만들었으면 상위에다 올려 놓고 큰 도가니를 만들었을 것 같으면 원 장독대나 어따 뭐 그런데다 놓는 것이지 장독대의 도가니를 밥상 위에다 올려 놓는 사람은 세상에 없는 거요. 이렇게 각각 쓸데가 있어서 그 목적을 가지고 만드시고 하나님이 산발적으로 즉흥적으로 만드는 법이 없다 이거요. “이전에 예비하사”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만세전에 거룩하신 경영대로 너를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실 위에 있을 것 같으면 이 사실이 바르게 잘 구현되기 위해서 성신님은 보혜사로서 모든 은혜를 보존하시되 나를 가르치시기도 하시고 인도하시기도 하시고 또는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그러는 것이오.

그러면 무엇보다도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성신님이 내 안에서 무엇을 가르쳐 주신다 하는 데의 목적이라는 것은 거기 그런 것이 있는데, 만일 어떤 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 할 때에는 하나님은 필연 그를 위하여 그 예비하시고 정해 놓으신, 경영해 놓으신 거룩한 일, 선한 일이 있을거요. 그러면 그 길로 그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오. 그 길로 그가 들어가도록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기다리고 인도하시는 대로만 받는 것이지 제멋대로 제 장래의 길을, 나는 무엇이 되겠다 무슨 가(家)가 되겠다 않는 것이란 말이오. 만일 참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 앞에 새로남을 받았다는 것이 확신이 들어가면 또 그것이 안 들어가고 어떻게 하는 길이 없고 들어가면 그날부터 자기의 과거에 가지고 있던 계획이나 이상이라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거요. 그것을 쥐고 앉아서 요것을 좀더 미화해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것을 합니다 하고 어줍지 않은 생각은 안해야 하는거요.

그것을 포기하고 “주여, 나를 위해서 정하신 길은 무엇이고 경영하신 일은 무엇이며 계획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만세전에, 이전에 예비하셨다고 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이전, 하나님의 이전(以前)이라는 것은 모든 것보다 앞서는 거요. 그런고로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밀하시고 완전하신 계획 가운데서 나도 그 계획 안에서 살도록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거요.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바라고 그리고 무엇이든지 인도하시는 대로 가르쳐 주시는 대로 나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나는 순종하고 살겠다고.... 이것이 전적인 헌신이라는 거요. 다 드려서,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스스로 운전하려고 절대로 하지 말란 말이오. 이 전적인 헌신이 모두 부족해 가지고 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 되어 가지고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통에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온전히 헌신을 하고 전부를 드리고 그의 인도를 받아 나가게 되면 두개의 단계가 있어요. 이것은 도리에 의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거요. 첫째는 그가 어떤 일정한 지점까지 장성해 올라가야 하는거요. 아주 유치한 자에게 어린 아이에게 나락섬을 한 섬씩 짊어지고 이것을 짊어지고 고개를 올라가자고 않는거요. 그러나 필요는 나락섬을 한 섬 짊어지고 가게 될 필요가 생겼는데 자기 힘으로 봐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어요. 그렇기 까닭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기사 열매를 거두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는 특권을 그에게 주시고자 하시면 특권을 받을 자격을 구비케 만드시는 거요. 이것이 육성하는 길이오. 이래서 장성, 성숙의 경지까지 올라가게 하는 거요. 사람의 일이 현 역사의 세계에서 물리적으로 구체적으로 늘 있을 때에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다 갖다 놓이시는 이런 장성, 이것이 상대적인 의미로 그것이 성숙이란 것이오.

그런고로 그런 사람, 예를 들면 전쟁에 나가려면 열 살 먹은 아이는 무장시켜 가지고 싸움시키려고 내보내지 않아요. 장정을 뽑아내는 것이오. 사람의 완전한 성숙이란 것을 우리가 다 기대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장정이 되면 정상적으로 노말(normal)하게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어떤 일정한 표준을 세운다면 그 표준하에서 군인을 뽑아내는 것이고 그 뽑아낸 군인이 그 표준에 적용되었을 때 비로소 중무장도 하고 전투에도 나가고 사지(死地)에도 나가서 싸우게 만드는 거란 말이오. 우리에게 말을 하실 때 우리의 사명의 수행의 길에 관해서 교회를 말할 때는 전투의 교회라, 쳐치 밀리턴트(church militant)란 말을 써요. 이것이 신학상으로 아주 중요하게 쓰는 말이오. 이 전투의 교회라는 것은 이 땅 위에서는 필연적으로 싸움을 하게 돼 있어요. 악마의 세력이 있고 그것이 교묘하게 여러가지 형식으로서, 합리적인 물질적인 협상으로서, 환경의 사실로서 자꾸 부딪치는 거요. 거기서 그것을 극복하고 어떤 것은 배제하고 싸워가면서 전진해야 할 때 그 싸움에는 성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공격의 유일한 무기로 쓰이는 것을 그 전에 배웠지요.

에배소 6장에서 다 보면 전부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에 불과해요. 가령 허리띠를 매고 그 다음에는 의의 흉배라는 것을 붙이고 또 화평한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쓴다. 전부가 이것은 전쟁 마당에서 자기가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요. 특별히 그 중에 믿음의 방패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마귀의 화전이 있어 가지고 멀리까지 미치는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어요. 내게는 그런 것이 없는데 내가 화전을 쓴다는 말은 없어요. 그런고로 이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막아내면서 접근해서 최후에 내 칼이 도달할 수 있는데까지 가서 그를 찔러야 한다. 그런 때 너는 성신의 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는 빛이되고, 자기의 발등에는 빛이되고 혹은 등불이 되는 거요. 이것을 우리가 배웠지요. 어떤 사람에게는 메스가 되는 거요. 그래서 관절과 골수, 저 숨은 것까지라도 찔러서 쪼개기까지 하는 것이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도리가 되는 것이오. 그렇지만 성신의 검이 되는 것도 어떤 사람에게 되는거요. 아무 한테도 성경 몇구절만 외면 그 검이 있다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그런고로 이번에는 검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용(用)을 보면 그것은 검을, 검을 쥔 사람이 쓸 수 있을 때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칼을 내두를 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어가지고 가서 네가 격검(擊劍)을 하라든지 펜싱(fencing)을 하라든지 칼로서 나와 전투를 하라든지는 말도 안되는 것이오.

이와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경우에는 검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고 있어야 하는 거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겪으라 군사로 뽑힌 자는 자기를 기쁘게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주 명료하게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나를 군사로 뽑은 그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사랑하던 것들이 많고 자기가 쥐고서 아끼던 것들도 많지만 일단 전신에 나갈 때는 어느 때는 다 포기해야 할 때가 오는 것이오. 그리고 오직 내가 이 앞에 놓여 있는 싸움을 싸우러 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 선생도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셨다”고 이렇게 했지요? 그 마지막에 쓴 편지, 디모데후서 4장에 그런 말이 있는 것을 잘 아시지요.

이와같이 선한 싸움이라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그 자녀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합목적적으로 정밀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제작한 바라, 제작 받았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성숙성이 있는 위에서 해야 할 자기의 인간의 사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오. 그렇기 까닭에 교육도 시키고 또 교양도 쌓게 하고 여러가지 훈련을 하게 하고 해서 합목적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도록 길러내시는 기간이 있는 거요. 자기가 그것을 충분히 의식을 했든지 못했든지 그것 문제없이 훈련하시는 거요. 이렇게 나아가시는 기간이 있지마는 이 기간이 지나서 어떤 일정한 포인트 혹은 지점에 이르면 그 다음부터는 항상 앉아서 책만 쳐다보고 공부만 한다고 그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가서 해야 할 일을 하라 그것은 다 그 시대라든지 역사라든지 현실이라든지 하는 모든 문제, 물질적인, 물리적인 현상과 서로 대조해 가면서 그 사람이 나가서 일을 하게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일을 시킬 것 같으면 그것이 그에게는 사명이 되는 거요. 이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데는 절실하게 성신님이 언제든지 모든 일을 가르쳐 주시는 대로, 즉 안내해 주시는 대로 받고 인도하시는 대로 받고 가는거요.

그렇기 까닭에 성신님께서 가르쳐주신다 하는 일에 그 큰 목적은 이렇게 함으로 그 개인이 자기의 사명을 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그 개인이 보편의 교회, 쳐치 캐톨릭(church catholic)속에서 자기의 부분에 서서 자기의 해야 할 당위, 의무를 충실히 다 감당하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하는 것이란 말이오. 이렇게 함으로 궁극적으로 그 교회가 건전하게 주께서 경영하신 그대로 주께서 계획하신 그대로 건전하게 형체를 이루어서 마침내 그것을 완성하는 날 주님은 재림하시고 그 거룩한 신령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은 영원한 위치로 들어갈 것이란 말이오. 영원한 세계, 영광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씀했어요. 이러한 궁극적인 큰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개인을 뽑아 내시고 그를 기르사 그 안에 거하시면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거요.

성신님이 나를 가르쳐주시기를 여러분 누구든지 원하시거든 이 큰 목적을 잊어버리지 말고 해야지 내 욕심을 위해서 내 종교적인 욕심이나 내 도덕적 완성이라는 그 개인적인 윤리관에 의한 욕망을, 자기의 욕망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 성신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셔야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선하게 살고, 그 하나님의 뜻과 선하다는 말은 밤낮 이야기는 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내신 본래의 큰 목적과 도리에 대해서는 모르고 앉아서 항상 일대일이라는 생각, 내가 무슨 이상한 지식을 갖든지 꿈을 꾸든지 환상을 보든지 무슨 소리를 듣든지 이런 이상한 데로 달아난 이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이게. 거룩한 보편의 교회의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보이는 교회 안에서 그 사람이 얼마만큼 자기의 당위를 잘 해 나가는 것으로 나중에 나오는 것이오. 결산을 자꾸 지어가는 거요.

그리고 그것이 좀 더 크게 말하면 보이는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돌아가요. 왜? 모두가 보이는 교회가 규정할 때는 모두가 교회의 일은 아니오. 장사하는 것은 교회의 일이라고 안해요. 그러나 늘 말했지만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인거요. 그를 상인으로 쓰시면 상인으로 상인답게 장사하는 그것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겠다는 목적이 분명히 있는 것이오. 장사의 목적도 있는 것이지 돈벌어 가지고 내가 잘 살자는 것이 최종의 목적이 아닌 것이오. 하나님의 가르쳐 주시는 거룩한 목적을 따라가면 가는 동안에 즉 의(義), 자기 의라는 것, 당연히 해야 할 당위를 찾아가는 동안에 그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이 모든 필요한 것을 준다해서 자기 먹고 입고 쓰고 사는 것들을 거기다 충당해 주시는 거요.

그런 까닭에 우리가 우리의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관을 그릇되이 가지지 않아야 해요. 나 하나로서 무엇이 완성이 안되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리스도에게 붙고 그의 생명이 연결됨으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것은 보편의 일원이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고 땅위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보이는 교회안에서 자기의 당위를 충실하게 해 나가고 그것은 마침내 또한 일면으로 보면 자기가 받은 바 사명을 끝까지 충실히 완수해 나가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성신님의 내주와 힘주심과 인도와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 이거요. 이 점이 지금 우리가 우선적으로 이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올시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가 성신님의 그 가르친다는 문제에 대해서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는데 지금 이야기 한대로 벌써 그것을 아시겠지만 그것이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를 판별해 주시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거요. 성신님의 가르치심은 “아! 너 그것은 나쁜 일이다. 아! 좋은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윤리적인, 도덕적인, 선악의 사실을 위주하는 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의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거요. 이것이 없는 것은 아니오. 선과 악을 분별하도록 우리에게 감화하시고 가르쳐주시는 것이 있지마는 성신님의 가르치심의 가장 크고 또한 본질적인 부분은 어디에 있냐면 보편의 교회 안에서 그가 일생 이루고 나아가야 할 그 사명을 위주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더 심히 중요한 일이라고... 이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것이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겠다. 의미가 없는 것이오. 내게 무엇을 주셨든지 당위를 하는 거요.

사람은 자기의 삶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는 것이 아니오. 어느 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는 것이오. 그 마음 가운데 확신이 오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준비가 자기에게 얼마만큼이라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일에 대한 자기의 의사가 하나님께서 이미 비치하신 바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해서 그것을 마음 가운데 기뻐하면 이로서 대체로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요. 이것이 개혁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도리올시다. 그 사람이 그것이 사명인가 아닌가를 우리가 따질 때는 너 거기에 은사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먼저 따지는 거요. 목소리가 아주 쉬어서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은 성악가가 못되는 것이오. 그런 사람이 성악가가 되겠다면 그것은 은사 없는 것을 가지고 괜히 쉰목소리 가지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가 가장 목적에 합당하게 쓰이도록 하시는 거요.

이렇게 해서 먼저는 그 사람의 은사를 보고 거기에 대한 어떤 준비가 있는가를 보는 것이고 그리고 그 방면으로, 지금 자기가 원하는 이것이 나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이 아닌가하고 생각되는 그 방면으로 인도해 나오시는 어떤 경험이 있어야 하는 거요. 즉 전에 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게 그런 인도를 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경우에 흔히 성신의 인도라는 것을 잘못 생각해서 다른 문은 다 닫히고 그 문 하나만 열렸으니까 인도다, 이점을 우리가 주의해야 할거요. 하나님께서 물론 그 섭리에 의해서 우리의 환경의 사실에 있어서 무엇을 가르쳐도 주시지만 다만 어떠한 사실이 그밖에는 없으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라고 속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인 것이오.

사람이 평소에 공부를 열심으로 않고 흥청거리고 놀고 하다가 어떤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니까 안되고 또 다른 학교에 입학하려니까 안되고 하니까 나중에 제일 쉬운 어떤 학교, 특별히 그런 실력을 과히 중시 않는 그런 학교에 쑥 들어가고서는 하나님이 인도해서 이리로 갔다. 왜 그러느냐? 다른 문은 다 닫히고 이것 하나만 열려서 들어왔다고... 자기의 잘못과 결핍과 자기의 그 게으름이란 것은 하나도 따지지 않고 마치 하나님이 그리로 보낸 책임자인 것같이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미국에서 한 번 어떤 사람보고 어떻게 해서 신학교에 왔느냐고 신학생한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주께서 인도하셨다”고, “너는 주께서 인도하신 것을 어떻게 해서 아느냐”하고 물었더니 “다 다른 문이 자꾸 닫히고 이 문만 열려서 왔다”고 그래요. “너 그것 참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다른 문 다 닫히고 하나만 열리면 그것이 지옥이라도 하나님의 인도라고 가겠느냐? 그것 판별은 네가 해야 되지 않느냐? 아닐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는 것이지 어째서 네가 거기에 가느냐?”

이런 것 아주 흔히 경망하게 생각해서 마치 자기의 모든 잘못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거두는 것을, 이것은 잘못의 결과가 대부분 있는 것이오. 거두는 것을 하나님이 책임자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께서 환경으로써 인도하신다. 성신님이 그렇게 안하시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아주 주의해야 하는 것이오. 혹여라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그런 망상을 하지 아니해야 하고 오히려 그런 것은 훨씬 거룩한 도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익숙한 사람, 현실을 잘 보는 그런 선배나 스승에게 묻는 것이지 그것을 함부로 자기가 “이것이 옳다”고 않는 것이오. 그 신학생과 같이 그런식으로 다른 문 닫히고 이것만 열렸다. 다른 문 닫힌 것이 아니오. 제가 닫았지. 왜냐하면 다른 사람 모두 들어가는데 저는 실력이 부족해서 낙제하는 것 뿐이오.

그런데 실력 부족한 사람이 꼭 신학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거요. 미국에서는 이야기가 있어요. 대통령을 할만한 유능하고 준비가 있는 사람이 목사가 되면 그것이 좋은 목사가 되고 한 주의 지사가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의 지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 버리고 목사가 되면 그것은 그만큼 은혜를 끼치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물론 유럽 국가에서는 이 서구라파나 미국 같은 국가에서는 목사될 그 자격과 품질이라는 것을 아주 높이에다 놓고 보지, 그냥 쉽게, 수월하게 않는거요. 개혁교회가 특별히 그랬어요. 왜냐하면 개혁교회의 특성은, 특성의 하나는 진리를 사람에게 주신 일반적인 이성과 논식에 의해서 성신님이 조명으로 인도를 받아서 선천적인, 이 선험적인 논식(論式) 즉 사고의 형식에 의해서 우리는 규명해 가는 까닭에 꼭 우리가 일일이 다 경험해야만 그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규명해서 나오는 것인 까닭에. 그것은 해명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명된 진리도 진리로 받는다는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해명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고도의 교육도 받아야 하고 고도의 경험도 있어야 하고 깊은 통찰력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아무렇게라도 돼 가지고 자기 기분대로서 한마디로 사해(私解), 사사롭게 해석해 가지고 이것이 뜻이다. 그것은 안되는 것이란 말이오.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결국은 논식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주신 이 사고의 형식인 까닭에 거기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고 타당성이 있어야 하는 거요. 보편 타당을 무시해 버리고 이것은 진리다, 진리다 하는 것은 독단에 불과한 것이오. 그런 까닭에 신학이라는 것이 있는거요.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성신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이 그 환경이라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즉 하나님의 일반 계시의 사실과 하나님의 보통 은혜의 사실 속에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방법으로 쓰시사 결국 궁극적으로 이것이 성신님의 가르침이라고 확인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게 되어야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이지 덮어놓고 그럴듯하다는 것은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아까 말한 것과 같이 그렇게 그릇된 데에 빠져 들어가기가 쉬운 것이오.

이렇게 해서 자기 환경이 나를 인도했다는 것은 환경이 인도했을 뿐이지 성신님이 꼭 인도했다고 단언 못하고 혹여라도 그로 말미암은 중대한 과오와 실수라는 것을--그 때는 모르고 있었다가 성신님이 인도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 했다가--하나님께 돌치는 그런 망발에 빠지기가 쉬운거요. 이래서 항상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오. 신자는 자기의 환경의 변화나 그 거룩한 인도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아니나 이런 때는 신중히 문제를 다른 가능성을 늘 쳐다봐야 하는 것이란 말이오.

다만 하나님의 도덕적인 법칙, 그것만 배울 뿐만 아니라 지금 말씀 드린 대로 우리 환경의 변화, 그에 대한 자기의 깨달음이나 해득이 무엇을 가르치느냐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데 하고서는 도덕적인 법칙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인생의 행로의 방향과 전진의 가르침과 인도도 거기에서 흔히 구하려고 하는데 이런 경우에 성신의 가르치심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를 성신의 가르치심에서 우리가 이제부터 배워나가야 해요.

거룩한 나라의 원칙과 그 사실에 지식이 빈곤한 사람은 이러한 때에 자기 환경에 어떤 사실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 듯 할 때에 방황하기도 쉽고 어느 때는 확신도 없이 암중에 자꾸 모색하기가 쉬운 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알아야 할 것은 먼저는 그 특별한 계시 안에서, 일반계시 말고 특별한 계시 안에서 이미 가르치신 중요한 사실, 하나님이 나를 계획하시고 나를 거룩하고 높은 위치에다 두셨으며 거기에 상당하게 자격을 구비케 하도록 나를 길러 주시고 힘주시는 그 일을 먼저 배워야 하는 거요. 그 일이 먼저 앞서야 하는 거요. 그래서 사명의 확인이 있기 전까지는, 내 사명을 알게 되는 때까지의 하나님의 준비의 인도가 거기에 있는 것이고 나를 준비해 주시는 인도요. 그런 기간이 있는 것이고 일단 사명이 그에게 있은 그 때부터는 이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다른 말로 말하면 거룩한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람의 꾀로 하지 않고, 사람의 효과주의를 노리지 않고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밀고 나가려고 하는가 하는 이런 거룩한 도리를 배워서 그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 그거요.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리 사명이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는 거요. 예를들면 교회를 형성해 놓고 교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에서 벗어나는 헌금의 강요나 헌금의 징수(徵收)라고 할는지, 원, 헌금을 좀 부과해서 내라고 자꾸 요구하는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헌금이지 받으실 수 없고 얼굴을 찡그리실 수 밖에 없는 것을 해서 자기 살림은 잘 할는지 몰라도 해놓고 그래도 가르치려고 교회를 하는 것이지 원칙을 파괴하려는 단체를 만들려고 교회를 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자기 개인 생활도, 교회 생활도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거룩한 원칙하에서만 사명을 수행하는 거요. 꾀를 부려가지고 숏컷(short cut), 지름길이라는 것을 가는 그런 법이 없어요. 대도(大道)를 늘 걸어가야 하는 것이오. 성신님의 가르치심의 목적은 그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일생을 정당히 살아가면서 낭비를 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생활, 곧 그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을 하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아까도 바울 선생의 말과 같이 자기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 사명을 완수했다, 싸워야 할 싸움도 다 선한 싸움을 싸웠다, 또 내 믿음은 떨어지지 않고 지켰다고 나는 믿는다. 당당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늘 같이 했다는 것은 성신님의 인도와 성신님의 가르치심 가운데서 살았던 까닭에 그렇고, 그렇게 풍부하게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유례가 별로 드물어요. 아주 특색있는 인물이오.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자기는 편지로 썼지만 그것은 성경으로 오늘날 남게 되었다 그말이오. 또 성신님 대(對) 한 개인으로만 성립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성신님이 보편의 교회에 은혜를 내리사 이루어가시는 일, 그 일환(一環)으로, 한 부분으로서 그 개개의 분자에게도 가르치심의 역사를 하시는 것을 먼저 우리는 주의해야 할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먼저 성신님의 특별하신 역사, 이것이 중요한데 성신님의 특별역사라는 말은 신학상으로 이 말, 스페이셜 오퍼레이션(special operation)이라는 말은 어디에 적응하는고 하니 마치 일반은혜라는 것이 일반 피조물에게 내리시는 거룩한 은혜로서 성신님의 일반적인 역사라는 것은 피조물들 위에 일반적으로 하시는 역사를 의미하는 거기에 대조해서 그와 비슷하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에게 그 새로운 생명의 보호와 육성과 충분한 가치 발휘를 위해서 하시는 그 역사가 곧 특별한 역사라는 것이오. 이게. 그런고로 이 특별한 역사 안에서 그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물들어 가지고 압도 당하지 않게 늘 막아주시는 것도 있고, 그를 길러 주시는 것도 있고, 일생 그의 할 일을 가르치시며 알아야 할 거룩한 지혜를 주시면서 인도해 나가시는 것들이 있어요.

이런 모든 특별한 역사도 물론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두 배우셨어요.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나 대(對) 성신,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혼연히 내 자신의 영혼의 모든 기능을 쓰셔서 나는 깨닫게 하시고 나는 생각하게 하고, 나는 판단하게 하고, 나는 마음을 먹게 하고, 나는 마음을 느끼게 하고... 이렇게 내 자신의 영혼이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완전히 그 사람 한 개인의 어떤 활동인 것이지 심리적인 활동인 것이오.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성신은 내 의지를 억압하거나 내 정서를 어디로 치워 버리거나 내 요구라는 것을 무시해 버리고 다른 것을 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충만한 은혜 안에서 유기적으로 역사하시는 거요.

그러나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그럼 그러한 상태가 있고 그렇지 않은 상태가 있느냐 하면 분명히 그렇지 않은 상태가 있는 것이오. 이 그렇지 아니한 상태에 비로소 저오(抵悟:서로 어긋나 거슬림. 서로 용납되지 않음)라는 것, 서로 착오가 나는 거란 말이오. 나는 원하는데 성신님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 거기 나타나는 거요.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 가운데서 단순히 어떤 미미한 그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미미한 심적인 갈등이라든지 하는 그런 정도로 끝나는 것은 아니오. 이런 현상이라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좀 더 자세하게 꼬집어서 생각을 하고 싶은데 문제는 유기적인 역사가 없다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무리 새생명을 가졌다 해도 옛사람에 속해서 그냥 사람대로만 산다면 거기서 성신님이 그것이 전부 역사해 가지고 그 마음을 일으킬 까닭이 없는거요.

그런데 자기는 자기 스스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하고 자기 출세를 죽겠다 하고 노리면서 “아, 이 권력의 세계나 혹은 이런 큰 세계에도 내가 나가서 아, 신자가 이런 대 재벌이 되었다든지 대 통치의 권력을 가지는 사람이 되었다. 아, 이러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된다”고 어줍지 않은 생각을, 되지도 않은 생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까지 자기를 나중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성신의 교도(敎導)를 받은 사람이라고 갖다 들어 붙이는 망상이 있는 거요. 이런 망상에서 우리는 주의하셔야만 할거요, 이게.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오늘 이제 차례차례 해 나가겠지만 오늘은 이미 많이 시간이 갔으니까, 첫째 한가지 주의할 것은 내가 주님의 도를 바로 먹고 바로 크는 것이 성신님의 가르치시려 하는 것인데 이런 바로 먹고 커서 장성시키는 이 일에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이 나타날 것이오. 그런데 이 가르침이라는 것이 꼭 내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바깥에서도 오는 것이오. 첫째는 물론 성경 말씀으로 하는 까닭에 그것이 내 안에 그냥 있던 것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던 여러가지 도리를 날마다 공부하는 데서 배움으로 지금까지 좁던 생각과 몰랐던 것을 깨닫고 아는데서 이번에는 문제를 새로 보고 새로 깨닫고 새로 생각하는 거요. 이렇게 나의 장성을 첫째 붙들어 주시고 주장하시는 이 성신님의 이 가르치심이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성경으로 하시는 것이고 또 성경의 거룩한 뜻을 해명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에 의해서 의미를 터득하게 하시나 그러나 궁극적으로 항상 특별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오. 그러나 이 성경으로 한다는 사실에서 오도(誤導)되는 일이 많단 말씀이오. 잘못가는 길이 많단 말씀이오. 이게. 이 잘못가는 길이라는 것이 큰 문제요. 다음 시간부터 우리 그 문제에 대해서 자꾸 계속해서 생각하시지요. 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하시는 주여!

저희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사 성신님이 저희 안에 거하시고 저희에게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은혜로 주신 여러가지 것들을 가르쳐 주시는 이 큰 역사를 하시는 것을 확신하옵나이다. 그러나 그것을 저희들이 확신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어야겠고 그것이 저희에게 실제로 늘 적용되는 데서만 저희의 행보가 정당한 것을 믿사옵나이다. 저희가 그렇지 못하고 항상 자기 옛사람에 속해서 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기 종교로 열정을 해서 하면서 마치 성신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돌려대 말하는 여러가지 오류가 참으로 있기 쉬운 빈곤한 지식과 빈곤한 이해 가운데 있는 일을 주께서 불쌍히 보시고 건져내어 주셔서 참으로 이 거룩하고 신령하고 오묘한 도리를 바로 깊이 깨달아서 저희의 생의 행보가 확고하게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그의 인도함을 늘 명확하게 받고 알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5강(사도행전 10장 1-8절)


우리는 그동안 주일 날 아침에, 우리의 신앙의 실천 생활상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 나가는데 특별히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건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 생각해 가는 중이올시다.

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 또 그 인도하신다는 그 사실, 이것이 우리 생활에서 현실적인 중요한 문제로, 진실히 주를 의지하고 살려하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깊이 생각지 아니할 수 없는 문제올시다. 특별히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고 그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여러가지 것들을 보존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려고 그리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 증거하시고 우리에게 찬송과 감사와 그 여러가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심정을 일으켜 주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성신님의 특별한 은혜요. 또 이 시대 혹은 새로운 하나님의 경륜의 시기, 소위 그 오이코노미아(οικον ομια)라는 것, 이런 시기에 있어서 우리의 가지는 한 큰 특권인데 이러한 특권이 우리에게 바로 늘 행사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그릇되게 생각해 가지고 함부로 이루다가는 어느 때는 하나님 앞에 더 큰 책망과 또 괴로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 성신님의 가르치심 혹은 인도, 이 둘을 서로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같이 놓고 생각해 나가는데 먼저는 가르치신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주의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이 오묘한 도리인 까닭에 그 한가지 한가지 조목의 조건들을 들어서 설명을 해 갈 때에 나중에 전체를 종합해서 생각하기가 어려우므로 제 일착으로 우리가 비교적 기억하기 쉽고 알기 쉬운 방법으로 종합적으로 일일이 고증을 하고 설명을 안하더라도 큰 제약이 없겠습니다.

성신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사 가르치신 이 사실을 바로 먼저 이해해야 해요. 무릇 성신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은 직접이오 간접인 여러 현상이 있는데 주로 성신님의 역사가 유기적인 역사라, 이것이 특색있는 그리고 보편적인 역사올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신님은 따로 계시고 나는 따로 있어서 내 의지는 반드시 성신의 의지와 같지 않게 움직여 나가는데, 성신님이 의지를 보이시고 네가 이렇게 따라 가겠느냐 반대하겠느냐? 네가 네 마음대로 가겠느냐? 나를 좇아 오겠느냐? 이렇게 항상 하는 상태에서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수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성신님의 인도를 받는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성신께서 내 안에 사시면서 나의 생각과 나의 판단, 결정, 의지의 발동, 행보 전체를 내가 스스로 한 것과 같을지라도 사실은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이 유기적이라는 것이오.

올게닉(organic)하게, 말하자면 따로 따로 두 개의 인격이 움직인다는 것보다도 인격자이신 그 성신님의 거룩하신 인격적인 발휘가, 즉 생각하시고 또한 마음에 느낌을 가지시고 또한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는 이런 모든 인격적인 활동 그 자체가 내 것이 되어 가지고 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고 내 자신이 활동하는 것이고 내 자신이 그런 심정을 품는 것이고 이런 것이 유기적인 활동의 상태올시다. 그러므로 성신 받는다 해가지고 자기가 갑자기 홀연히 어떤 입신 상태에 들어가서 자기의 의식을 상당히 제한하고 별다른 인격의 의식이 나의 위에 군림해 가지고 나를 끌고 나간다든지 나에게 명령한다든지 이런 상태가 유기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늘 주의하세요.

왕왕이 성신님의 활동의 역사(役事)의 상태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륜의 정책이라고 할지 방침이라고 할지 그 하나님 크신 사역의 계획이라는 것이 그것이 어느 시대를 통해서든지 꼭 한가지 양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계약을 하시사 그 계약 아래에서 사람에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상태나 또한 그 진리의 이해할 수 있는 상태에 따라서 즉 계시와 판례에 따라서 그들에게 어떻게 일을 하시는 것인데, 이런 하나님의 계약과 계약에 의한 거룩하신 은혜의 여러가지 방도, 방법이라는 것을 오해해 가지고 극단적으로 세분을 해서 이 세대에는 이런 조건 하에서 사람이 구원을 받고 저세대에는 저런 조건하에서 구원받고 한다는 이런 설, 이런 배제(配制), 혹은 행정이라 하는말, 디스팬세이션(dispensation) 이런 주의(主義-세대주의), 오이코노미아(οικονομια)라는 일종의 주의인데 그것이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부터 팽배하게 일어나 가지고 미국으로 와서 마침 한국에 선교사들이 최초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선교를 하려고 들어올 때에는 그러한 식, 새로운 주의가 마치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개혁교회의 금과 같이 빛나는 교리인 것같이 잘못 가지고-그 시대는 그것이 또 한창 창궐하던 시대니까-들어와서 그래서 한국의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전파되었어요. 우리 한국교회의 초대의 훌륭하다는 목사님들에게도 그것이 참 강렬하게 나타나서 사경(査經)한 것, 가르친 것들을 볼 때에 그런 것들이 많이 있고 모든 한국에 있는 성경학교라는 성경학교의 공부지를 보면 그때 그런 식으로 일색으로 썼어요. 그런 역사적인 원인 하에서 오늘날 여러가지 그릇된 것이 빚어진 걸 우리는 항상 통탄할 수 밖에 없는거요.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오해해서는 안돼요.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의 크신 계약 하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다루시는 어떤 방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일양(一樣)이 아니다 하는 말과 가령 에덴의 무죄시대라든지 그 다음 양심세대라든지 그 다음은 인간 전국세대라든지 혹은 아브라함의 허락세대라든지 모세의 율법시대라든지 그 다음에는 은혜의 세대요 앞으로는 천년왕국 세대요, 이렇게 배제를 제 마음대로 해가지고 떠드는 것과는 전연 딴 이야기 올시다.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과의, 인류와의 어떤 언약하에서, 당신이 사실상 언약을 하셔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그렇게 가장 이지적으로, 가장 이성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에 거기에 사람에게 사람다웁게 살기 위해서 조건을 내시고 하나님도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이렇게 하면 거기에 상당한 보응이라는 것, 상당한 나의 태도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계약이 되었는데, 하나님 당신이 계약을 하실 필요가 없는 주권자시지마는 당신 스스로 당신을 낮추시사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있어서 너 이렇게 하라 그럼 나 이렇게 하마 마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헌법을 세우시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렇게 해서 한세대의 큰 계약은, 그걸 가리켜 옛날의 계약-왜냐하면 그 계약이 경신이 되어 가지고 새로운 많은 은혜의 조건이 거기에 이제는 구체적으로 계시의 발전에 따라서 나타나는 까닭에 새로운 이 계약하에서 볼 때에는 그 전 것을 가리켜 옛날의 계약이라, 이래서 우리는 옛날의 계약을 주로 다룬 책이 옛날의 계약, 구약이오, 옛날 계약... 그러고 새로운 계약을 주로 다루어서 이야기한 것이 신약이라 그 말이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에 구약전서라든지 신약전서라 이런 말을 쓰지만...

그러면 성신님의 역사의 양상을 볼 때에 구배제에, 옛날의 오이코노미아 하에서의 하나님이 성신님께서 역사하시는 양식이라는 것이 꼭 신약에 와서 역사하시는 양식과 같지를 않다 말이오. 왜 그러느냐 하며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와 계시면서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너희는 이 땅을 떠나지 말고 여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기다리고 있으라” 하시면서 승천하셨죠! 그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냐 할 때에 오순절에 베드로가 연설하면서 그것이 이 약속이다 하고서 성신의 특별하신 충만한 역사, 특별한 양식의 역사요, 이건... 특별한 스타일(style)의 역사 그걸 가르친거요.

그러며는, 그래서 오순절날 그 성신의 충만한 역사가 임한 것을 사람들이 새술에 취했다든지 이것이 무슨 일이냐고 의혹하고 알아 보기를 원할 때에, 내가 이것이 무엇인지 너희에게 일러주마고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고 지난 번 우리가 이 강해를 했어요. 그러며는 이러한 점으로 볼 때에 성신님께서 그 세대에 어떤 양식으로 일을 하셨느냐는 것은 이게 역사적 사실을 다 들어서 설명을 하려며는 장황한 이야기가 되고 지금 우리의 문제는 현실 생활상 지금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것이오. 그러니까 그 배제에 있어서 성신님은 어떻게 역사했느냐? 그 성신의 역사의 여러가지 양식이 있어서 구약의 그 성신의 역사로 말미암은 특별한 일은 어느 때에는 삼손과 같이 아주 비상한 대력을, 물리력을 터득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있는 삼손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 이스라엘의 혼자 군대노릇을 했다 말이오. 필요할 때에 그렇게도 성신님은 역사하지마는 그것이 꼭 오늘 꼭같이 일양으로 같은 법칙하에서 언제든지 똑같이 아무 구별없이 그냥 역사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오. 가령 사울에게도 사울왕 말이오. 성신이 갑자기 임하시니까 혼자서 갑자기 예언을 하고 떠들고 그랬다 하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가 왕되기 전에... 그러한 어떤 독특한 현상이라는 것과 오늘날 신약의 시대에 들어와서 성신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 일양이 아닌 까닭에 성신님의 충만한 역사, 내주와 가르침과 인도하심의 역사를 마치 구약에서 보는 그 인상 그걸 갖다가 그걸 적용하고 그렇다고 그걸 가지고 함부로-자세히 연구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성신 받아야 한다, 구약의 삼손이 성신 받음으로 어떻게 되고 누가 성신 받으므로 어떻게 되고 하는 식으로 자꾸 이야기하는 것,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래서 강조하는 것은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시라는 것이오. 그렇게 딴 인격으로 와서 제한을 하고 입신한 상태에서 나를 운전하듯이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나가는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을 바르게 하고 내 마음 먹는 것을 바르게 하고 내 심정을 바르게 하고 내 행보를 바르게 잡아 주시는 것이오. 그리고 그런 점은 성경을 기록한 성경기자들이 가장 풍부한 영감과 성신님의 특별하신 감동과 주장하에서 기록했던 성경을 기록할 때의 양식도 그런 것이지 모두 다 입신상태에서 자기 모르는데 딕테이트(dictate) 말하자면 서취(書取)를 시킨 것이 아니다 그 말이오. 성경에 어떤 부분이 신비하게 적접 임하는 부분이 없는 것 아니오. 모세가 가령 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가락으로 쓰셨다는 말로 표현한 계명을 받을 때에는 모세 자신의 두뇌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에서 내려오신 온전히 모세를 떠나서도 발생한 사실이라는 것이오.

그렇지마는 모세의 많은 글들은 그 모세의 생활이라든지 환경이라든지 자기 자신의 노력이라든지 궁구하고 살핀 것이라든지 연구한 것이라든지 그것이 산물인 것이오. 이사야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다니엘도 다 그래요. 그걸 떠나서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불러내 가지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불통지(無不通知)한 상태로 쑥 들어가서 갑자기 무엇을 알고 그렇게 성신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오. 더군다나 성경을 쓸 때는 만일 그것을 성신의 영감으로 썼다는 사실을 잠깐 고사하고 두어두고 그걸 냉정하게 관찰하면 그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문제가 있고, 사도 바울 선생이 많은 그런 그때의 교회들의 문제들을 가지고 듣고서 들은 다음에는 마음 가운데 이건 이렇게 해야겠다고 판단한 그걸 가르치는거요.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예의(豫議)조사가 있고 성실한 파악이 있은 다음에는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해주려고 그런거요. 이것이 개인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는 어디까지든지 그 사람의 작품인 것이오.

따라서 일기가성(一氣呵成), 즉흥적으로 쓱 써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오. 시간이 없고 긴박할 때에는 불가부득이 빨리 썼겠죠. 하지만 바울 선생이 가령 로마서를 썼을 것 같으면 숨을 그냥 쉬는 동안에 척척 써 가지고 딱 끝났다고 얼른 그렇게 해 가지고 카피(copy)를 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서 생각을 하고 생각한 다음에 말이 되도록 자꾸 했고 문장도 구사할 때 생각을 하는거요. 단어조차 생각한 거요. 단어를 생각한 흔적이 얼마든지 있어요. 무슨 말을 써야 정확하게 이 말이 전달될까? 오해하지 않을까? 비슷한 말이 많을 때에는 아주 말 가운데는 주의깊게 선택하는 흔적들이 다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신뢰하고 그 말에 대해서 조금만 다르면 반드시 비슷한 말하고 비추어 가지고서 비슷한 말이라고 덤팽이 공사로 얼른 넘겨 짚고 이야기하지 않는게고 이건 말이 이만큼 다르니까 그만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는 거요. 그리고 바울 선생은 말을 참 주의시켜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그 말을 너희가 굳게 믿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으리라”고 그랬어요. 내가 전한 그 말을 믿는다. 언어라는 것이 심히 중요했다 그 말이오. 유기적인 역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오.

우리는 가령 예술적인 영감이란 문제를 논할 때에도 사람이 어떤 신비한 상태, 사람이 일반적인 심리학에서 얼른 해석하기 어려운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오. 음악가가 음악적인 영감을 얻어야 위대한 작품을 쓰는 것이고 문필가가 훌륭한 영감을 얻어야 아름다운 글을 쓰는거요. 거기 쓸 때에 그 문필가에게 물어 보세요. 말을 선택하는가 안하는가? 오히려 리얼리즘(realism)의 스타일에 있어서는 언어가 백 가지가 있더라도 그 중에 가장 효과있는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을 그 다음에 써 넣어야 한다고. 그 유명한 플로벨(Flaubert)이 그의 제자 기드 모파상(Guyde Maupassant)을 가르칠 때에 “너는 백가지 표현에서 한 가지만 뽑아라” 그게 리얼리즘이라고... 그러니까 모세(?)나 북구라파의 사가(Saga)를 버금해서 오늘 날 현대에 와서 가장 리얼리즘의 가장 극치를 이룬작품이라는 것은 모파상의 작품이 아니오? 왜 그러느냐 하면 언어를 선택할 줄 아는 까닭에 그래요. 예술가의 예술적 영감에 있어서도 이러한 지적인 노력, 이런 판단의 작용이라는 것이 강렬하게 비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란 그때의 중요한 여러가지 것을 그 사람들은 그때에 당면한 문제 앞에서는 중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그 앞에 놓고 있던거요.

그 사람들이 회천(回天)의 대업을 지금 한다고 혹은 영세불망의 진리를 내가 쓴다고 이렇게 자부해 썼다는 것은 아니오. 다만 필요한 것, 중요한 것,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이제는 기록해야겠다고 했다 그 말이오. 이런 것을 할 때에 그 사람들은 취사선택을 하고 퇴고를 하고, 다른 말로 말하면 지울 것 지우고 넣을 것 다시 넣고 그렇게 하고 가령 오늘 날도 무슨 글을 쓸 것 같으면 원고지에다 올리면서 교정을 하는데 교정을 한다고 할 때에는 교정을 할 때에 다시 새로운 사항이 나서 어떠한 단어를 고치기도 하고 어떠한 문장을 조금 바꾸어서 쓰기도 하고 ‘아니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아니치 못한다’ 그렇게 뒤집어 놓는다든지 해서 그 말이 여운이라는 것이 이번에는 어떤 강조를 더 이룰 수 있게 그렇게 만드는 것이오. 글 쓰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는 것이오. 음악을 짓는 사람들도 다 하는 것이고 어떤 창작을 하든지 할 때에 일기가성으로 즉흥적으로 하는 일이 없어요.

그러면 하물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쓰는 사람들은 그때의 당면의 문제의 중요성으로 봐서라도 심히 신중한 문제 앞에 섰는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그 당면의 문제들을 때때로 검토해 보면 역사의 방향을 전환하는 문제도 거기 있는거요. 그런데 그런 것을 그렇게 그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에 대한 의식을 충분히 했든지 안했든지 그런 것을 소홀하게 아니했단 말이오. 그러면 이만큼 성신의 유기적 역사라는 것을 강조했어요.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란 거요. 성신의 비상한 초범한 역사란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나 그게 상궤(常軌)가 아니니깐 언제든지 성신의 거룩한 조명과 인도와 가르치심을 받으려고 하거든 어떤 비상한 상태, 비상한 종교적인 상태에 들어가기를 기대하지 말라 그것이오. 그런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것뿐이고 일반적으로 지금까지의 그리고 신약에 있는 모든 사실들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서 검토할 때에 거기는 유기적인 역사란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따라서 성경의 영감을 말할 때에도--축자 영감이나 목적 영감이니 이상한 말까지 다 만들어 붙이고 그러지마는--그게 동력적인 영감이라든지 기계적인 영감이라든지 아마 이게 신학적인 용어일텐데 그렇게 말을 하지 아니하고 기계적인 영감 같은것 주장 아니해요. 개혀교회가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유기적인 영감이다. 성경은 유기적으로 영감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동력적으로 성경을 쓴 사람은 어떤 그런 이상한 신통력이 그에게 항상 비치되어 있어서 거기에 의해서 썼다는 그런 것도 없고 기계적으로 서기가 불러 주는 대로 받아 쓰듯이 마치 오늘날 dictaphone에 의해서 써 내려가듯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말이오.

유기적인 영감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의 지식이나 그 사람의 경험이나 그 사람의 의욕이나 그 사람의 심상이라는 걸 전부 지배하는거요. 지배한다는 것은 그것 없애버리고 딴 걸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쓰시는 거예요. 그 사람이 모르는 이야기는 안쓰는 거요. 그 사람이 자기의 지식의 한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지식의 사실을 가서 저촉해 가지고 언급하는 일이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만큼 미리 미리 그 사람들을 준비하신 건 사실이오. 그러기에 각각 가지고 있는 은사라는 특색이라는 것을 다 선용하시는 것이오. 바울선생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한 지식과 논리력을 써서 그의 신학적인 체계를 사상적인 체계를 이루는 데 다른 누구보다도 적격자이니까 그렇게 썼다 그말이오. 요한이 가지고 있는 시적이오. 그러고 항상 멀리의 사실을 바라보는 그런 성격과 그런 은사는 결국은 요한의 서신이라든지 묵시록 같은 것을 쓸 수 있게 만들었다 말이오. 이렇게 각각 그 사람이 충만해 가지고 있는 은사를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 안에 성신이 충만해 가지고 역사한 것이오. 암만 충만하더라도 그릇이 적으면 적은 대로 밖에는 더 안되는 것이오. 충만하다고 해서 갑자기 모르던 것이 다 알아지는 것이 없는 것이오.

그러면 이렇게 성신님이 유기적으로 성경을 쓰는데 있어서 영감으로 써서 그것을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 이렇게 말하듯이 성신님의 우리 안에서의 역사도 오게닉 오퍼레이션(organic operation), 유기적인 역사라 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런 유기적인 역사에서 우리는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또한 기대하고 또 그것을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고 원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할 문제는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것이 그것이 꼭 무슨 소리로 내게 금방 들리듯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게닉 오퍼레이션이라 할 때에는 유기적인 역사라 할 때에는 그걸 기대할 수 없는 것이오. 내가 생각이 떠오르기를 바랄지언정 나에게 무엇이 나 이외에서 내 청각을 통해서 무엇이 들려 오기를 바란다든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결국에 내가 A라는 것을 생각했다가 엔티-A를 생각하더라도 내가 생각을 하는거요. 나는 내 스스로 소위 디베이트(debate)하는 거요. A를 해야 할건가 엔티-A를 해야 할건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이렇게 하면서 아니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 그럴 때 다 면밀하게 판단하고 면밀하게 항상 재보고 하는 것이지 그런 것 없이 그냥 마치 내가 모르겠으니까 빗 떨어지는 대로, 돈 떨어지는 대로 혹은 외면의 어떤 이상한 현상이 나에게 보여 주는 대로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거요. 끝까지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이 분명한 의식의 작용하에서 문제를 얻어 내려고, 해결을 얻어 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이런 것이 심히 중요한 일들인데 이와같은 것을 우리가 볼 때에 성신께서 일반적인 역사, 제너널 오퍼레이션(general operation)이라는 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 피조물들 위에 하나님께서 그걸 보존하시고 그걸 다스려 나가시는 거룩한 도리 이것을 가르쳐 하나님의 프로비던스(providence) 즉 섭리라 그러는데 하나님의 그 거룩한 목적을 향해서 당신이 친히 다스리고 보존하시고 또 그뿐만 아니라 협조라는 말 혹은 어떤 일이 꼭 동시에 발생해야겠다는 것이오. 오늘 읽은 이것을 볼지라도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간 일을 볼지라도 베드로에게 어떤 이상으로서의 깨달음을 주시고 그리고 동시에 복음을 받아야 할 고넬료에게도 주시고 이것은 동일한 성신께서 동시에 서로 서로 협조해서 일이 될 수 있도록 문제를 일으킨 거란 말이오.

컨커런스(concurence)라는 이런 사실들 이게 다 섭리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섭리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인데, 이런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 사실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존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까닭에 이러한 성신님의 역사, 즉 은혜를 적용하시는 역사 이것을 소위 common grace, 보통 은혜, 일반 은혜라 할 때 일반의 은혜를 보존하시고 또 그것을 내려 주시고 거기서 열매를 거두게 역사하시는 일반적인 역사가 불신자에게든지 신자에게든지 다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보이신 그 거룩한 계시가 일반계시의 사실로서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과 또 그 위에 하나님의 성신의 일반은혜와 일반적인 역사라는 것은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서 늘 같이 역사함으로써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하는게고 경험 가운데 이치를 깨닫는 거요.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이렇게 해서 어떤 경험에서 쓴 경험을 한 사람은 내가 쓴 경험에 비추어서 그전에는 모르고 술덤벙 물덤벙 했고 모르고 뛰어들듯이 뛰어 들어봤지마는 다시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하고 거기서 배운 교훈이라는 것 이것을 살려서 쓰는 거요. 그럼 그것이 무슨 교육이 아니냐 하면 그것도 교육인 것이오. 그것이 가르침이 아니냐 하면 그런 것도 배우는 것이고 그 가르치는 것을 불신자들은 어떻게 해서 배웠는지 알 수 없지마는 다만 제 경험이다. 세상의 사리가, 돌아가는 것이 어떻다 하는데 불신자들이 그걸 하는 것을 보면 거기 기본적으로 일반 이치라는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일반적인 진리, 특별하신 진리가 아니라 일반적인 진리의 터 위에서 일반 이법(理法) 위에서 그 사람들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거요. 그건 대단히 논리적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자기의 경험도 그 사람의 예리하고 정당한 논리에 의해서 다시 이런 것을 반복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되는거요. 이런 것도 배운 결과요. 안 배운게 아니오. 생활을 통해서 배운 것이오. 그러면 신자에게는 그것이 없느냐 하면 신자에게도 그런게 있는게요. 왜냐하면 신자도 이 세상에서 인류의 식구 가운데 하나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내리신 일반은혜 가운데 신자들도 매일 호흡하고 사는 것이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그런 일반 이법이란 것을 항상 토대로 하고 특별한 이법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정당하지 그걸 무시하고 특별한 이법(理法) 하나만이 전부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대단히 그릇된 것이오. 왜냐할 것 같으면 많은 성경의 교훈이 이미 내려 준 공리라는 것 엑시엄(axiom)을 기초로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성경의 모든 도리라는 것은 공중에 떠올라서 이 세상에는 이미 비치되어 있는 어떤 이법, 어떤 질서도 다 무시해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처럼 하나님은 창조하신 사실 그 위에서 피조물 가운데 구원을 하시는 것인 까닭에 그가 피조물인 것은 사실이고 피조물이 받는 바 일반 이법하에 그 카테고리(category)하에서 은혜도 받고 규제도 받고 하는 건 다 사실인 거요. 믿는 사람은 공중 열길 높은 데서 떨어지면 안 죽는다든지 안 상한다든지 그런 법 없는 것이라 말이오. 그리고 인력에 의해서 당하는 일은 마찬가지오. 그러기 까닭에 과학적인 이치라는 것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이란 것을 반성하고 반성하는 데서 얻는 바 어떤 결론은 새로운 지식이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그런 것은 누가 가르칠 것이냐 할 때에 크게 말할 때에 일반은혜나 일반의 역사라는 성신의 역사에서 얻는 까닭에 그런 개괄적 의미에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은 또한 그런 것이다 그거예요. 그러나 본론에서 성신의 가르침이라 하는 말은 그것을 의미하지는 않는거요. 요걸 전제로 하고 거기까지 따져서 일일이 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에서 성신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런 새로운 오이코노미아로 들어와서 성신께서 어떤 신자든지 중생한 사람의 속에 보혜사로서 내주하고 계신 그 사실의 터 위에서 가르치시고 나가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볼 때에는 거기에 몇가지 중요한 것들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가르친다고 할 때에 가르치시는 그 사실은 어떤 일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오. 일정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과 물론 목적을 생각하면 까닭이 있는 것인데 그것은 실지로 나타나기를 그 사람에게 그 가르침이라는 것이 무엇을 이루느냐 하며는 그 사람의 장성에 필요한 양식이 되어서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자꾸 장성해 가도록 만드시는데 첫째의 까닭이 있는 것이오. 이것이 큰 목적 안에 있는 작은 목적들인 것이오. 그 까닭이 있어요. 즉 그 사람을 정상적으로 장성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거요. 이런 의미에 있어서 교육적인 의미를 늘 가지고 있는 것이오. 나에게 어떤 사실로써 새로운 어떤 이법, 이치를 깨닫게 하셨으면 그 이치는 내 안에서 그냥 살아 있어야 하고 나는 그걸 망실하지 않아야 해요. 잃어버리지 아니해야 한다 말이예요. 그걸 또 잊어 버려서도 안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그 다음에 올 문제에 있어서는 판단할 때에 중요한 재료, 크라이테리어의 한가지가 되어 가지고 움직일 것인 까닭에 그것을 잘 쥐고 있어야 하는거요. 또 그 다음에 나는 생활 경험 가운데서 성신님의 인도하시는 속에서 부딪힌 문제 앞에서 그것에 대한 의미, 이치를 깨닫게 되면, 행득을 하게 되면 거기서 또 하나의 지식을 얻은 것이오.

이런 것들이 축적을 하고 또 단순히 그런 생활 경험 뿐만 아니라 훌륭한 서책이나 훌륭한 선생이나 또한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의 가르침이라든지 또 전해주는 것에 의해서 이걸 한 마디로 말할 때에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거룩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전수해 주는 것들을 내가 받을 때에 거기서 필연적으로 나는 하나의 사상적인 축적을 하게 되는거요. 이렇게 해서 하루 아침에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세계관이나 사관이나 또한 그 여타의 우리가 반드시 알고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사상적인 기저(基底)라는 것은 가령 사회라는 것은 뭐다, 가정이라는 것은 뭐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뭐다, 미움이란 것은 뭐다 하는 이런 거룩한 사상들이 내 안에 자꾸 쌓이고 쌓여 축적되어 나가는 데서 나는 그 다음의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좀 더 풍부한 크라이테리어를 가지고 사는 것이오. 이와같이 인도해 나가시고 이와같이 알려 주시고 나아가는 것이 성신님의 역사의 한 가지요.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 하며는 가만히 앉았는데 이렇다, 이리 가거라, 저리 가거라 얼른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먼저 이러한 큰 내 인생의 생활의 길에서 내가 하나님에게 은혜로 받은 것들의 의미를 더 깨닫고 알게 해 주시는 이런 것들이 성신님의 가르침인데 이 성신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그 사람이 잘 배우고 깊은 것을 배우려고 할 것 같으면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한 것이오.

①첫째의 조건은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하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런고로 내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 하면서 오직 일생을 주님의 뜻대로만 살고저 할 때 주님의 뜻을 나에게 가르쳐서 점점 더 거룩한 사상의 내용으로 축적시켜 나가는 것, 모든 진리 가운데로 나를 자꾸 이끌고 나가시는 것, 요한 복음16장 13절의 말씀이 그렇죠. “보혜사 그분이 오시면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하나의 진리에서 그 다음의 새로운 사실로, 또 하나의 진리로 이렇게 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너를 이끌고 가실 것이다” 요게 기다, 요게 아니고 안내해 주실 것이다고, 호데게오(όδηγέω)라는 말을 썼다고 했지요. 이렇게 인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이게 성신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양식이오. 그 말을 우리 성경이나 영어 성경이 다같이 인도한다는 말로 번역했어요. 호데게오.

그렇지마는 그건 그 전에도 말씀드렸지마는 붙들고 간다는 말보다는 안내한다, 일본문자로 안내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날 우리식 말로는 지도(指導)한다, 인도한다 그 말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거기 인도란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인도란 것은 지도한다 말이오. 길을 비추어 주는 것, 이리 가야겠다 이리 가자, 이것은 우리가 성신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는 갈라디아 5장 18절 말씀의 그 인도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오. 또 로마인서 8장 14절 말씀의 그 인도라는 말과도 다른 말이오. 다 같이 인도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어도... 요컨데 이렇게 보여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게 맞구나 이게 바르구나 하고서는 자꾸 따라가게 하시는 것인데, 이와 같은 것이 성신의 인도의 한 중요한 방식인데 이런 것 하려면 바라가지고 요구하고 원해야지 제가 제 마음대로 제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내가 덜거덕해 가지고 손해가 될런지 이익이 될런지 모르겠다는 자기의 공리적인 타산하에서 하나님이여 뜻을 보여 주십시오 한다며는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갈리가 없는 거요.

전에 우리는 야고보 1장 5절-8절을 강해할 때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두 마음을 품어 가지고 의심하고 믿었다 안믿었다 이렇게 바다 물결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자같이 이런 두마음을 품은 자는 아무것도 하나님께 얻을 것을 생각하지 말아라.” 이런 말을 하셨어요. 즉 자기 자신이 버렸다 혹은 자기 이익으로 되돌아갔다. 은근히 최종의 노리는 것은 자기의 정신적이었든지 물질적이었든지 어떤 행복을 자꾸 노리고 있는 이런 심정을 가지고 안되는 것이오. 한 마디로 말해서 옛사람이라는 것이 그냥 살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옛사람의 이상인지 야심인지 하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그 방법으로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적용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에게 그런 에누리를 하고 그렇게 제 멋대로 자기 인생을 쥐고 앉아서 제 일생을 제가 쥐고 앉아서 경영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성신님께서 이리 가거라 저리 가거라 그런 가르침은 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말이오. 그런 사람 속에 성신님은 오직 그의 가지고 있는 완고와 옛사람 때문에 성신님은 근심하시는 것 뿐이오. “하나님의 성신님을 근심시키지 말라” 그랬지요. 근심하시는 거요. 그런 사람은 자기의 목적과 합하지 않으면 비합목적적이라는 그런 단순한 자기의 이익하에서 참된 감화라는 것도 알아 보지도 못하고 소멸시키는 거요. “성신님을 근심시키지 말라” 하셨지만 소멸하는 거요.

항상 성신을 거스린다고 스데반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을 할 때 쓴 말이 있는데 성신을 다 거스려 나가는 것이오. 그러면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겠다면 어림없는 이야기요. 그런고로 귀기본(歸基本)해서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아상(我相)이 없어야 하는 것이오. 아상이라는 것이... 나라는 것이. 옛사람이 살아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규율이든지 자기의 인생 철학이라든지 자기의 살고 있는 어떤 스타일이라든지 그런 것을 앞에다 딱 내어 놓고 그 안에서 성신이 뭘 해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물썽하게 성신님의 인도를,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오. 그런고로 오직 성신의 가르침을 무엇이 되었든지 가르쳐 주시면 그대로 나는 살겠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라고는 없다고 자기의 죄있는 것과 부족한 것과 멍청한 것을 알고 성신께서 가르쳐 주시기만 바라고 맡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②둘째는 기도하는 거요. 성신님께 대한 이 기도라는 것은 이건 참으로 중요한 것이오. 왜냐하면 이 기도에 있어서 비로소 우리는 그 문제를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것으로 마음을 집중하고 온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것을 비로소 유약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오. 그러한 기도라는 것은 어떤 형식을 취했든지 그러나 마음 가운데서 우러나는 것이오. 주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주님의 뜻을 보이시면 보이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혜가 없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 모르는 걸 알기 원하는 걸 구하라고 그랬지 가만히 앉아서도 저절로 안다고 생각지 말아라 그것이오. 또 야고보 4장 2절에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오” 구하지 않는 까닭에 너희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3절에 “네 쾌락을 네 복리와 네 즐거움을 위해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벌써 구하는 심상의 위치가 틀렸다 그거요. 그러기 까닭에 진정으로 오직 그 뜻만을 이루려고 구한다는 것이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올시다. 이것 하나 하나가 나중에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해 가겠지만 우리가 기억하기 편하기 위해서 그냥 하나씩 하나씩 제목만을 이야기 합니다.

③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실되이 사랑하고 찾는거요. 그건 그때의 의미에서 어디로 봐야 이 일을 알까 하고 목전에 어떤 목표, 알고자 하는 이것을 알려고 갑자기 성경을 사전 찾듯이 찾는 그런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평소부터 사랑하고 거룩한 도리를 언제든지 근실하게 배워서 내가 문제있을 때에 그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더 높아지도록 평소부터 이것을 공부하고 사모하고 사랑하고 있으라는 말이지 영어 단어 모르니까 사전 찾아 가지고 단어 찾듯이 찾는 것은 아니다 그거요. 이것이 또한 심히 중요한 것이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찾느냐 했더니, 성경을 자기가 늘 읽어 가는 데를 읽어 가며는 그때 가야 할 것인지 와야 할 것인지 문제에 대해서 가라고 하는 말이 자꾸 나온다는 거요. 그러면 가라는 말에서 “아! 그러면 가야겠다”고... 그리고 결정한다 말이오. 세상에 그렇게 이상하게 기계적으로... 그게 정당하게 쓰는 법이 아니오. 절대로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오. 성경에서 원래 성경이 주고자 하는 거룩한 사상과 도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좋아하시는 것, 경영하시는 것, 나한테 하고자 하시는 것, 이런 것들을 자꾸 자꾸 터득해서 깨닫고 알아가라 그것이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오.

④그 다음에 중요한 한가지는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거룩한 교회가 그것을 역사적으로 테스트(test)해서 우리에게 물려준 바 신령한 훌륭한 유산들을 아주 존중히 여겨라 그말이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할 때에 성경을 보고서 거기서 무엇을 깨닫겠다 할 때에 자기가 아무런 규범이 없다면 규제가 없고 힌트도 없고 한다면 그걸 보아 가지고 척 그 도리를 잘 깨달을 사람이 많은 게 아니오. 이게 무엇인지 몰라서 어떤 사람이 가장 그럴 듯하게 얘기하면 그렇겠다 하고 그냥 따라가서 오도(誤導)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이 전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아까 말한 그 배제(配制)주의(세대주의)적인 그런 사상이란 거요. 그게 원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게 그릇된 것이, 악화가 들어오면 양화는 자꾸 몰려나가는 거요. 가장 그럴 듯하고 가장 쌈박한 까닭에 자꾸 받아 들이는 것이오. 이러기 까닭에 그것이 건실한 역사적인 test를 겪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바 금과 같은 유산들이냐 그러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들이 한 때에 일어나 가지고 떠드는 이야기냐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해요.

이렇게 해서 거룩한 교회가 규제하는 것과 유산으로 물려준 것을 잘 받으려고 할 때에는 거기에 어떤 책을 가지고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보아 가지고 사상적인 함축을 좀 더 쌓는 것이고 훌륭한 스승에게 배우기도 하는 것이고 이런 훌륭한 스승에게 배운다는 것은 교회가 마련한 바 참 귀중한 방법인 것이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 강설하는 시간이오. 강설(講說)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그 은폐되었던 것을 가급적 해명해 주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훌륭한 스승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해명해 간다는것,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던 것을 기이하게도 자꾸 터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오. 그런데 그것이 명확하게 바른 교리와 또 거룩한 유산 위에서 발전해서 깊이 판 이것들이어야지 사람들이 (워치만 니 계통의 지방교회 처럼)제 멋대로 그것이 그렇다하고 그럴듯한 말로 얘기하는 것은 안된다 그것이오. 이렇게 해서 강설이라는 것도 어떤 거룩한 위대한 유산, 이 헤리티쥐(herityge)라는 것, 위대한 유산의 테두리라는 것과 그 금과 같이 빛나는 거룩한 도리를 발판으로 해서 전진해 나가는 그것이 중요하다 그거요.

우리가 개혁교회라고 할 때에는 개혁교회의 유산이 위대하고 거룩한 까닭에 개혁교회란 말을 붙이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것을 바르게 전승한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이야기했어요. 서책도 거기서 나와야겠고 스승들도 그 거룩한 도리 안에서 그런 거룩한 집안에 들어 있어서 비로소 그 시대의 새로운 사실을 해석하고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것을 자꾸 찾아 나아가는 거요.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들이라” 그랬어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세워놓은 그 거룩한 도리의 유산을 계승해서 받은 자란 그말이오. 이런 것들이 지금 먼저 중요한 것들이오.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우리는 해명해 가야 할텐데...

오늘은 이미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말씀을 드리려고 하던 것을 여기서 중단할 수 밖에 없어요. 오늘 우리는 고넬료의 집을 처음 방문한 사도 베드로에 관한 사실을 처음에 조금 읽었지마는 다음 시간에 여러분이 오실 때에 사도행전 10장을 좀 다 읽어가지고 오세요. 왜냐하면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하나의 유례(類例)를 아주 적절하고 훌륭하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적어도 베드로의 어떤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이 그 때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인데, 베드로의 역사적으로 큰 의미있는 하나의 산을 넘는 이 행동은 성신님의 가르침과 인도없이 저 혼자 한 것이 아니오. 여기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의 자취를 찾는 것이오. 그걸 찾아 보고자 특별히 이 장을 전부 강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또 고낼료에게 임하신바 그 거룩한 환상의 은혜는 어떻겠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씩 보고 지나가자는 것이오.

왜냐하면 성신님의 특별하신 새로운 배제 하에서의 역사의 양식은 구약의 어떤 부분보다 신약의 부분에서 비로소 우리가 명료하게 그리고 착오없이 알 수가 있어요. 그런고로 구약을 text로 취하지 않고 신약에 성신님께서 처음에 교회를 세우실 때 그 거룩하신 역사를 위한 사도든지 특별히 바울이든지 혹은 이방인으로 처음으로 거룩한 복음이 들어간 백부장 코넬리우스든지 이런 사람들, 고넬료, 이러한 사람들의 기록에서 중요한 것들을 보는 것이오. 지난 번 이야기했지요.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봐야 할 여러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그런데 첫째 중요한 것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큰 초석을 어떻게 놓고 어떻게 발전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해서 주의를 해야 하지마는 성신께서 어떻게 가르치시고 어떻게 인도하시며 사람들은 성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나? 특별히 베드로의 경우를 우리가 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그 거룩하신 신으로서 저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거룩한 도리를 저희가 배울 뿐 아니라 확신하는 터 위에서 생명의 양식으로 이를 저희 안에 간직하고 소화하고 또한 주께서 보이시는 거룩한 길을 행진할 수 있게 모든 은혜를 준비하신 것을 감사하오며 이 거룩한 도리를 저희가 잘 깨닫고 저희 매일 매일 생활에서 성신님을 멀리하고 자기 스스로 그냥 생활을 유지한다거나 성신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귀족계급에 한한 일인 것과 같이 그릇되이 생각하는 일이 없이 각각 나에게 주신 큰 은혜로 알고 이리하여 성신님을 의지하고 그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서 생활이 낭비가 없고 보람이 있고 신령한 생활의 성격을 확실히 띠어서 거룩한 교회의 바른 자태를 여기 드러내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6강(사도행전 10장 34-43절)


오늘 아침에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라는 제목하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생각할려고 하던 사도행전 10장에서의 한 실태, 그 원칙을 나열하는 것보다 대체(大體)를 가지고 그 실태에서 몇가지를 또한 생각하려고 했는데 오늘 오후에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주로 사도행전 10장에 있는 이야기인데, 이 10장을 가지고 이제 생각해 보면 고넬료가 어떤 환상을 본 다음에 그 명령대로 사람을 욥바에 있는 피장이 시몬의 집에 우거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보낸 것이올시다.

그런데 그 이튿날에는 베드로가 한낮에 지붕에서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 중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찾게 되었어요. 그래 그 사람들이 온 내력을 듣고 그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단숨에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여기는 욥바고 욥바에서 지중해를 옆으로 끼고 즉 왼쪽으로 서쪽으로 지중해를 끼고 반듯이 올라가면 샤론의 둥지라고 하는 가장 잘 알려진 평야, 샤론의 백합화라든지 샤론의 장미라든지, 장미도 비슷하고 백합화도 비슷하고 나르시서스(narcissus), 즉 수선화도 좀 비슷할 그런 꽃이올시다. 그러나 거기 둘 다 있어요. 그런 종류의 장미, 함박슬렐이라는 것 그 다음에 백합화 슈샤니, 그런 것들이 거기 아름답게 피고 비옥한 땅인데 거기를 얼른 개략해서 약 150리 올라가면, 욥바에서 조금 올라가면 바로 거기가 텔아비브(Telaviv)이고 텔아비브에서 계속해서 해안으로 올라갈 것 같으면 가이샤라인데 여러분 다 아시는 것과 같이 가이샤라는 그 때 팔레스틴을 통치하고 있던 이 로마의 그 지역 감사라고 할런지 지사라고 할런지 총독이라고 하든지 무엇이 됐든지 좌우간 거기에 다스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빌라도나 혹은 베스도나 펠릭스는 다 사도행전에서 혹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다 아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 위에 있는 상관은 저 수리아에 있는 사람이고 그 아래에서 이 사람들은 통치를 맡은 사람들인데 맡았다고 하더라도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사람같지는 아니해요. 훨씬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는데 거기의 수부(首府)가 바로 가이사랴예요. 그럼 거기 수부에, 말하자면 총독부가 있는 곳이니까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군대가 주둔한데서 백부장으로, 즉 지휘관 장교로서 일하고 있는 코넬리우스, 즉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 이 사람의 사실(史實)이 여기에 기록된 걸 여러분은 아실거요. 그러니까 한 150리 길이 되며는 걸어서 오면 하루 반나절이 걸리게 되니까 고넬료가 오후 한 3시 경에 환상을 보고 즉시 사람들을 보냈다고 하더래도 그 이튿날 낮에쯤에나 도착할 것이란 말이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거기서 환상을 보고난 다음에, 밥을 좀 차리라 하고 올라가서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고 난 다음에 바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거기서 찾아와서 만나 가지고 이야기를 듣고서 떠날려면 이제 그 이튿날 새벽이나 일찌감치 일어나 가는 것이 좋으니까 거기서 그날을 우거하게 하고 이튿날 그러니까 고넬료가 사람을 보낸걸 보면 그냥 그게 무엇일까 하지않고 그 천사가 나타나서 명령한 그 말을 듣고 거기에 의해서 사람을 보내니까 사람은 준비를 해가지고 떠나서 밤을 도와서 온 것 같아요. 준비를 해 가지고 석양에 선선할 때 떠나 가지고 밤새 걸어서 그 이튿날 한 낮에 오전중에 여기에 온 것 같아요. 이래가지고 그 이튿날 베드로랑 그 일행이 아마 일찌감치 일어나 가지고 그 먼길을 온 사람들이 노독을 풀기위해서 하루밤 거기서 쉰 다음에 아침 일찍 일어나 가지고 당일에 당도할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하겠으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걷게 했는지 혹은 무슨 말을 가지고 와서 타고 가게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모시러 왔으니까 그냥 걸어 갑시다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이렇게 해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그 날 도착을 했더니 고넬료는 자기의 일가 가까운 친척들과 그 뿐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까지 불러서 모아놓고서 조용히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그곳에 가서 묻는 말은, 여기 28절 29절을 보며는 “당신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유대인이 이방 사람과 서로 교제하지 않는 것,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을 다 아는데 그게 위법인 것을 아는데 내가 특별한 어떤 계시에서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이것 때문에 내가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습니다. 나를 무슨 까닭으로 불렀느냐?”고 물었어요. 그래 30-33절이 고넬료가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한 것이 올시다. 즉 환상을 본 것을 그대로 다 이야기하고 그 대답에는 마지막에 “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어요. 자기네가 베드로 앞에 있습니다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오늘 읽은 34절로부터 43절까지 이 고넬료의 그 일족과 거기 앉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올시다.

전할 때 받은 바 강렬한 인상을 먼저 이야기했어요. 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취하시는 표준은 외모가 아니고, 즉 형상이 유대 사람이거나 이방 사람이거나 당신과 같이 로마 사람이거나 이런 것으로서 따지지를 아니하시고 오히려 어떤 나라 사람이 되었든지 각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자를, 당위를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대로 늘 준행하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대표적인 용어죠.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고 또 두려워할 줄 알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뭐며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는 것도 성경에 의라는 말로 표현했어요. 그것이 그 가령 그 사람이 그 재물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다 주었다. 인류애에 근거둔 행동이지마는 그것을 단순한 자비라 하지 않고 “그 의가 영원히 있나니라” 해서 의란 말을 써요.

의라는 말은 아주 광범한 말로서 사랑이든지 인자든지 긍휼이든지 혹은 참는 것이든지 혹은 용기 있게 나가는 것이든지 또 옳게 판단하고 의를 좇아가는 모든 것을 종합해서 구체적으로 실천적으로 행동할 때 의라는 말로 표현했어요. 이게 성경의 용어이고 구약에는 특별히 그것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그러한 사람이 그렇게 정당하게 바른 품성과 바른 도덕적인 생활과 또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른 일들을 바르게 하느라고 애쓰고 나가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의인이라, 그래서 아브라함도 의인이라, 롯도 의인이라, 노아도 의인이라 이런 의인이라는 말로 거기다 붙이는 거요. 그러니까 그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당신네들을 보고서 깨달았다. 나를 그 기이한 환상으로 먼저 가르치시더니 이렇게 깨달았다 했어요.

그 다음에 한 말씀이 차례 차례 있는데 오늘은 그 경위, 가령 환상을 봤다든지 하는 그것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고넬료의 집에까지 인도하실양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강렬한 유대주의적인 사상 가운데서 그냥 주저 앉아있는 베드로가 이렇게 이방 사람의 집에 썩 들어오지 아니할 것이 분명하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가 이방사람의 집에라도 와서 하나님이 명하는 대로 행할 수 있게 그의 사상적인 입각지(立脚地)라는 것을 시정해 주신 것이오. 너는 부정하다 했고 너는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관념하에서 차별을 했지만 이제 하나님이 한번 손을 드사 정결케 했으면 다시 네가 전통적으로 가진 관념하에서 판단하는 그것은 효과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 하지 말라고 한 까닭에 내가 여기에 왔다는 고백을 했던 것이오. 고넬료에게 말할 때... 그래 이제 처음 인상은 하나님이 사람을 외부의 형식, 그게 가령 형상이라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시각적인 형식 뿐만 아니라 그의 가지고 있는 어떤 생활의 스타일도 외모라는 것이오. 가령 그것이 유대적인 스타일, 양식, 그것이 외모예요. 형식이나 양식이나 이런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취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을 강하게 인상 받은 것으로 이야기 한 다음에 이 베드로가 이제 해나가는 말을 볼 것 같으면 몇가지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되 제일 먼저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라.” 즉 “만유의 주”라 했어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믿고 살았던가를, 믿고 이야기하는가를 여기에 표시하는 것이오.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그것을 당신이 알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다 그 이스라엘 자손에게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보내신 말씀은 무엇이냐 하면 요한의 세례를 반포한 그때 이후로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이올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오. 그것은 당신네들도 이미 아시거니와 그건 무어냐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신과 권능을 기름붓듯 하셨으며”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신이 기름붓듯이 부음받아서 충만하였다 하는 것이오. “하셨으매”(저가) 지상에 있어서의 생활을 잠깐 표시하는 것이오. “저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그 착한 일이란 곧 마귀에게 눌린 세력에서 벗겨 주시는 일이다. 마귀에게서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그 마음이 흑암에 눌렸든지 육신이 악으로써, 육체의 악으로써 눌렸든지 그걸 다 고치시고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와함께 하셨음이라.”

여러분 이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 주의하세요.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계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그 막연한 추상적인 용어를 쓴 것과 다른 것이예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 뜻에는 몇가지가 있어요. 하나님의 보호가 그와 함께 했다든지,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가 그에게 함께 했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들어가서 하나님의 성신이 그와 함께 했다든지 그런 정도의 이야기예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할 때는 그는 사람이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또 한면 같이 계셨다 그말이예요. 그는 디엔드로포스(theanthropos)라 말이예요. 하나님-사람, 신인(神人)이라는 말, God-man이오.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다. 그게 하나님이 그에게 함께하셨음이라.

그러기 까닭에 신인이 행하여 하실 일을 마땅히 하신 것이올시다. 우리는 유대 사람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을 같이 보고 또한 증참한 까닭에 우리가 그의 증인이올시다. 베드로는 자기가 그의 증인이다고 했어요. 그렇지 만은 그 다음에 한 이야기는 이러한 신령하고 숭고한 그분과 선을 행하고 마귀의 세력에서 사람을 건져내신 그분에 대해서 저들, 막연히 저들이라고 했지만, 로마사람들이라는 말보다도 악당들, 특별히 유대사람들이오. 저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했어요.

그 다음에 40절에는 그의 부활을 이야기한 거요. 즉 복음 사실을 다 여기에 포함해서 이야기해요.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셨다 그거요. 그런데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그냥 다 공개적으로 나타내신 것이 아니고, 모든 백성에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그것을 나타내 보이시는 까닭이 있는 것이오. 본 사람은 그에 대한 증거자란 말이오. 그러니까 그 증거자, 그 나타내 보이신 그 사실을 후일에 증거해야 할 그 증인들, 그럼 그 증인들이 누구냐 하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에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증거인데 우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무엇보다도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셨을 때 그 오후에 우리는 만나서 함께 모시고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같이 음식을 먹을만큼 분명하게 우리는 보았고 같이 회합했고 같이 지냈습니다.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분은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전도의 내용에 또 하나 우리가 전도란 지금 사실을 증거하니까 증인이니까 증거를 하는거요. 어떠한 예수님이었나? 신인이신 예수님, 땅에서 생애를 보내셨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붙들려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셨다. 그 다음에는 보이시되 그것을 증거할 사람들인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렇게 했지요?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명령하여 백성에게 전도를 하게 하지마는 그 내용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며는 하나님이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분이 곧 이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게 했다. 여기서 죄에 대한 것을 논하는 거요. 재판장이오. 신자도 또 죽은자까지라도 마지막에 심판의 부활, 생명의 부활은 다 일어나서 그에게 재판을 받을 것이고 그 행한대로 그에게 모든 공로에 따라서 또한 판단하실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분이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고 저에게 대해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를 하는데 모든 선지자들이 하는 증거는 그럼 무엇이냐?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그가 누가 됐든지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셨느니라”고 얘기 했어요.

그럼 여기서 예수님은 만유의 주 예수라 하고 그가 땅에 계셨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 분이었다. 또 흑암의 세력의 총대표인 마귀의 세력에 눌린자들을 건져 내 주셨다. 그렇지만 저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려 내셨고 살아나신 그분은 당신을 보이되 아무에게나 한 것이 아니고 그걸 증거한 우리들에게 즉 부활하신 다음에 함께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명하사 가서 전도를 하되 산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으로 되신 분이, 재판장이신 그분이 또 이분이다 하는 것을 일러 주게 했고, 선지자들은 일찌기 무어라고 증거했는고 하니 저를 믿는 사람들은 그가 누가 됐든지 그 이름을 힘입어서 죄 사람을 받는다고 증거한 그 예수다. 그 예수를 지금 소개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 44절로 끝절까지 보며는 그 결과는 어찌되었나? 이 말을 여기까지 했지 이 말을 좀 더 보태서 무엇이 있을른지 우리가 알 수 없는데 그것만으로도 메시지 내용은 사신(使信)의 내용은 벌써 충분했다 그말이오. 이 말을 할 때 그 사람들 위에 성신님의 특별한 강림의 자태가 증험할 수 있게 자기네가 틀리지 않고 그를 확인할 수 있게 내리셨다 그말이오.

항상 그런 스타일로 성신님이 꼭 내리신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순절 때 그 큰 성신 강림의 사실의 그 결과를 어떤 식으로 보였는가 말이오. 뭐지요 그 결과는? 각국 방언을 하고 그 방언들이 무엇인가를 거기 왔던 사람들은 알아들었고, 하되 아무 소리라도 그냥 중얼거린 것이 아니고, 그것은 반드시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할렐(ללה)의 어떤 부분들을 각국방언으로 하게 된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그들이 그것을 곧 알아 들었단 말이오. 그런데 여기서도 여기까지 말을 할 때,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성신님이 거기 이 말을 듣던 모든 사람에게 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친구였든지 그의 식구였든지간에 그들 위에 다 내렸다. 내려가지고 그 방언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방언으로써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말이오.

그러니깐 이것을 보고서 베드로와 같이 온, 그 할례받은 사람들, 즉 유대주의적 신자들도 깜짝 놀랐어요. ‘원! 하나님이 할례받지 않은 저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받으셨다는 확실한 증거로 성신을 내려 주셨는가!’ 이 “이방인에게도 성신을 보여주신 것을 인하여 놀랐다.” 기이하게 생각했다, 놀랐다 그 말이오. “그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그 사람들이 들으니라” 그랬어요. 역시 할렐을, 하나님을 높이 찬양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 결과로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 사람들이 우리와 꼭 같이 성신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준다는 형식을 이제 금할 수 있느냐?’ 실질과 큰 사실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증명되는데도 사람이 제도로써 그것을 막는 법이 어디 있느냐? 누가 능히 세례줄 것을 금할 권위가 있느냐? 해놓고 거기에 아마 같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접붙이는 세례를 그들에게 다 주었어요.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올시다.

지금 그것이 대개 여기 있는 내용의 개략인데 이 개략 가운데서 우리가 몇가지 보십시다. 몇가지 10장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이장에 일어난 이 사건이라는 것은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데 어떤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줘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보이시고 생각하게 하시고 생각하던 나머지 고넬료에게서 보낸 사람들이 와서 그 사정 설명하는 것을 듣고 베드로가 거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을 알고 비로소 깨닫고 곧 그들과 함께 갈 것을 작정하고 그들의 노독을 풀기 위하여 하루 거기서 쉬게 한다음 이튿날 함께 그들과 가이사랴로 가서 이방인의 집, 고넬료의 집에 자기가 온 이야기를 내가 유대사람이다. 유대사람의 법을 지켜온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정결케 한 것을 불결하다 하지 말라고 했던 까닭에 내가 왔으니 왜 나를 청했는가 라고 물어서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여기 볼 것 같으면 성신께서 가르치심이 베드로에게 그런식 환상으로 가르쳤고 또 사정이, 환경이 그에게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어요. 그런걸 그렇게 깨달을 때는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같이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가 있는 까닭에 깨닫는 것이지 그냥 덮어놓고 “아, 이것이다” 하고 얼른 정하지 못하는 것이오. 철저히 논리적으로 규명할려고 하면 가령 자기가 그런 환상을 보았다고 할지라도 그 다음에 고넬료에게서 보낸 사람들이 와서 무어라고 말할 때 그것이 그 환상의 의미인지 그 환상의 의미는 별다른 곳에 또 있는지 의심을 할려면 할 수 있는 것이오. 그건 절대로 빈틈없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이다고 확정하기 어려운 것이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고 주장하심을 받는 위치에서 자기가 기도하고 본 환상에서 보자기에 있는 여러가지 짐승, 결, 불결의 짐승들을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해가지고,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들을 내가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자기가 유대 주의를 잘 지켰던 것을 이야기 할 때, 네가 그 유대주의 지켰다는 그것이 어느 때는 무용하게 된다. 하나님이 만일 깨끗하게 한다면 너는 그래도 더럽다고 하겠느냐? 대체 최초에 더럽거나 깨끗하게 정하신이가 누구냐?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시면 네가 그래도 더럽다고 하겠느냐? 그런 논리요. 그래서 거기 대해서 그렇다, 원래 결, 불결이라는 가치 판단의 표준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의한 것이지 그것이 생래로 자연스럽게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비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요 분명히?

가령 그 사람들이 불결하다는 짐승을 보더라도 오늘 날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반드시 그 짐승이 불결한 것은 아니오. 파충류는 우리가 불결하게 느껴지지마는 토끼 같은 놈, 발굽이 갈라졌다 어쩌다해서 또 뭐 그런것 사반같은 것 이런 걸 볼 때는 뭐 오히려 애완적으로 볼 때나 아름답고 깨끗한 놈도 있단 말이예요. 돼지는 그렇다고 하겠지마는 그 외에 산에서 뛰는 여러가지 짐승의 불결하다는 것들은 우리 보기에는 대단히 사랑스러운 것들이 있는 것이예요. 심지어 요새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큰 구렁이를 보고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건 어찌 됐든지 그 심미의 표준이라는 것이 사람들에 따라 다른거요. 사람들에 따라서... 그러니까 최종의 절대적인 표준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 정하시는거요.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나님이 정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중대한 교훈과 큰 뜻을 가르쳐 주시려고 짐승을 가지고 나눠준거요. 

그런데 그런 것을 여기서 환상중에서도 보고 깨닫고 둘째는 자기가 받은바 거룩한 사명이 있는 거요. 베드로는 그 사명에 대해서 소홀히 하려고 한 사람은 아니예요. 그 사명은 뭐냐? 그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하는 것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해야 해요. 각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게 예수님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내린, 사도들에게 내린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isson)인 것이오. 그래 그것이 위대한 명령이오. 그런데 그 위대한 명령대로 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그건 언제고 어떻게 해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베드로에게는 중대한 장벽이 하나 딱 걸려 있는게 있어요.

그건 유대주의라는 것이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대사람으로 이방사람과 어떻게 접촉하며 이방사람을 어떻게 무슨 조건하에서... 그러면 유대사람으로 유대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사회로 즉 거룩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의 사회로 맞아 들일 것인가? 여기서 발생한 이론, 결국은 추출된 이론이라는 것은 할례를 주자는 것이오. 이방사람도 마땅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고 일단 선민의 테두리에 들어와 가지고 거룩한 이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새로 받아라. 이러한 소위 쥬다이져(Judaizer), 유대주의화 운동자들이오. 이런 사람들이 초대교회에 중대한 장벽 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유대주의라는 무서운 철벽 안에다가 복음 선물을 딱 가두어 놓고 그리로 들어오면 너희가 자유롭게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이 밖으로는 안 나간다는 무서운 주장과 그러한 행습이, 행동이 한개의 큰 사회 세력으로 형성되어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이때쯤이면 교회가 선지 가깝게는 한 5년, 좀 멀다면 한 10년쯤 된 때요. 생각건데 아마 AD30년 정도. 교회가 처음으로 섰던 그때부터 한 10여년 지났다고 할 것같으면 AD40년정도 되었을 때 이런 운동이 발생되었을 것이오. 그래서 교회의 경영이라는 건 유대주의학자들의 주도적인 세력하에서 움직여 나갔던 것이오. 이것이 무서운 사실이오.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한번 큰 충돌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생겨야 할 것이었어요. 그 충돌의, 발생한 큰 격돌의 한 가운데에서 앞장 서 가지고 싸운건 물론 사도 바울이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하여 크게 기독교 역사상 금을 그은 획시기적인 사실에서 판단되었던 것이 예루살렘의 공회라는 것,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것이올시다. 그게 주후 50년, 교회가 선지 20년만에 결국은 그 때 오랬동안 곪았던 것을 터트리는 판이오. 거기서는 맹렬한 논쟁들이 오고 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맹렬한 논쟁이 오늘날에 현세로 기독교 역사상 큰 사실이 케쏠리시티(catholicity), 그 카토릭성, 즉 보편성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것이 그렇게 굉장한 논쟁이 될만한 사실이겠는가? 하지마는 오늘날의 눈으로 볼 때 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눈으로 볼 때는 유대주의적 세력이 기독교 전체를 차라리 모나폴리(monopoly), 전매특허를 딸려고 쥐고 앉았었던 시대란 말이오. 모두가 유대사람이오. 사도들도 다 유대사람이오. 이방사람 하나라도 낀 일이 없어요. 그런고로 그 세력은 다 유대주의로 흘러가고 만거요.

이런 무서운 사실이 앞으로도 계속할텐데 앞으로 계속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거룩한 경륜과 계획하에서 우선 지금 교회가 선지 5년으로 10년 사이에 벌써 이런 초석을 놓기 시작한 거요. 그런고로 이것이 말하자면 유대주의의 철벽이라는 일각을 무너뜨리고 복음이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그 효시(嚆矢)의 이야기올시다.

이러한 큰 중대한 의미를 포함해서 성신님은 베드로를 선택해 가지고 쓰시는 거요. 왜 베드로를 선택하느냐? 이건 유대주의자 아닌 어떤 바깥의 다른 사람들이 하면 싸움이 안되는 것이오. 또 사도들 가운데서 이런 문제가 발생되어 가지고 철벽을 뚫고 나가야 해요. 그러려면 유대주의자요 사도 중에 있어서는 저명하고 적극적인 인물인 베드로를 선택하셨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그럴듯하게 그렇겠다고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도 마땅하게 느껴지는 것이오. 요한이나 마태나 바돌로매나 다른 사람을 썼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베드로를 써 가지고 서로 자신의 문제와 동시에 기독교의, 하나님의 새로운 오이코노미아의 문제를 여기서 크게 부각시켜 가지고 큰 돔을 하나 세우고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역사적인 행보를 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해서 유대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했거나 해탈한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이 사도 베드로는 한 AD44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두번째 올라 왔다 돌아갔죠? 그후에 베드로가 아마 안디옥을 방문한듯해요.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 14절을 보며는 바울 선생이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하면서 책망할 일이란 것은 유대주의와 문제에 대한 중요한 일이오. 사건--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사건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안디옥에 오니까-- 벌써 거기에 이방 사람들이 교인들이 되어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것이 한 2년쯤 후가 되었을 거요. 즉 42년경에 베드로가 가서 새로 그 이방 사람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에게 큰 사도로서 환영도 하고 같이 이야기도 하는데서 이야기만 하는 정도가 이닐 것 아니예요? 자연히 음식을 같이 먹자, 그러면 그때 ‘예, 당신은 이방 사람이니 안되겠오. 암만 기독교인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주의요’하고 유대주의를 내세워야 하는가? 기독교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그 가르침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로서 내세워야 하는가?

베드로는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사람인 까닭에 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절대로 회피하거나 사양하거나 할 처지가 못되요. 모든 것을 따져 볼 때 같이 음식을 먹었지요. 그런데 유대 사람은 이방 사람하고 교제를 한다든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유대법으로는 위법이란 말이오. 아까 고넬료의 집에서도 말을 하듯이 그랬으면 괜찮지만은 예루살렘 감독 야고보, 이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요. 예루살렘의 감독 야고보가 사람을 보냈어요. 이 때에 온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주세력을 가지고 있던 할례파, 할례를 받고 유대주의적인 색체를 강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데 베드로가 거기 있으니까 누가 와서 유대에서 형제들이 왔습니다. 아무게 형제, 아무게 형제가 왔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서 베드로가 난처하게 됐거든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할례파들인데 필시 비난을 굉장하게 하고 막 욕질을 퍼부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란 말이오. 어쩌면 좋을까 하다가 슬그머니 안먹고 싶은척하고 일어나 버렸다 말이오. 이게 대사도 베드로를 일어나게 했어요.

왜냐? 그속에 철저히 기독교의 가지고 있었던 보편성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라든지 교회의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속성 케솔리씨티(catholicity)라는 것이 아직 들어가지를 않았어요. 이래 가지고서는 슬그머니 일어나니까 거기에 있는 다른 몇사람들도 거기에 유혹되어서 함께 일어나고 그러니까 같이 음식먹던 사람들에게 있어 기가막힌 일이 되고 말았어요. 그렇게 하는 저것이 지금 가짜 사랑이었나? 저 친절이 가짠가? 아까는 그렇게 형제, 형제 해 가면서 모두 그러더니... 그러니까 바나바도 거기 앉았다가, 바나바는 거기서 주동적인 목사 아니었어요? 앉았다가 바나바도 ‘그러면 나도 일어나야겠구먼’ 하고서 모두 다 일어났다 그말이오.

바울만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그 외식에 대해서 분개했다는 것이오. 개인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이건 기독교의 큰 문제다. 바울과 같이 영리한 사람인 까닭에 문제가 항상 어디에 집중되었는고 하니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진행의 내용은 무엇이냐? 어떤 성격을 가졌느냐? 유대주의적인 철벽 안에다 가두어야 할 것인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케솔리씨티라는 것이 창달하고 퍼져나가야 할 것인가? 할 때 명확하게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것,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 유니버설리티, 혹은 케솔리씨티라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요. 오늘날에도 그것은 위대한 것이오. 기독교회에서 케솔리씨티를 뺀다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교회냐? 금방 문제의 하나요. 대 속성의 하나요.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교회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교회는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인거요.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유대주의라는 구각(舊殼)에다가 꽉넣어 놔 둔체 그걸 헐어 버리려고 않는다 그말이오. 이게 말이냐 하고서는 바울 선생이 베드로를 면책했어요. 거기 성경을 볼 것 같으면 물론 그건 말을 쓰려고 그렇게 쓴 것이지만은 그 면책의 내용이라는 것을 볼 것 같으면 베드로 선생 당신이 유대사람이면서 유대사람답지 않게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 왜냐하면 이방사람은 다 맞아들여야겠고 또 유대의 모든 법을 여기서는 지켜가지고 안될 것으로 하고 지금까지 살면서 그럼 이 사람들은 당신이 그런다며는 할례를 받고야 꼭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이런 주장으로 굴레를 씌우려는가, 즉 이방 사람도 유대인답게 살게 할 작정인가? 당신도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다른 말로 말하면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법에서 우리는 이탈하고 나가야만 이 교회라는 것이 바로 서겠는데 이탈했다고 스스로 그러는 사람이 이게 뭐냐? 그 사람들도 함께 집어 넣을 작정인가? 라는 논리로 면책을 했단 말이오. 그 면책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요. 14절까지.

그런데 그것이 한 AD44년경이랄 것 같으면 고넬료의 집에서 상당히 그 때는 새로운 시대적인 큰 거보를 내디딘 것같이 분명히 우리가 보이는데 그후에 불과 한 4년이나 5년사이에 아직도 완전히 이탈을 못하고 그 큰 세력에 밀려가지고서는 부지불식간데 점점 예루살렘에 있는 그 많은 신자들, 유대주의적 신자들 속에서 자기도 동화되어 가지고 들어 갔었다 말이오. 말하자면 그 사상성이 독창적으로 강렬하지를 못하고 어떤 모습이냐 하면 행동에 있어서는 발빠른 인물이지마는 사상적으로는 그냥 질질 끌려간 것이오. 이러한 문제가 베드로 사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런 일은 오늘날까지도 늘 있어요. 그때 볼 것 같으면 각각 한10년전이나 20전에 전에 고넬료 집에서 당한 일과 그때에 받은바 그 거기에 묵시에 관한 것을 그것을 가지고 맹렬하게 사도 바울의 논증에 뒷받침 해가면서 자기도 같이 과녁 노릇도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공회의 대세는 기독교의 큰 진리를 바르게 천명하는대로 들어가고 말았어요.

그러면 이런 일이 여기에 발생하지만 이 베드로 자신이 어떻게 했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보는 문제인데 지금 고넬료의 집에 갔다가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받은 베드로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했었나 하는 것을 조금 추적하는 것 뿐이오. 그렇다면 지금 성신께서 아까 말한 것과 같이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나타내서 새로운 오이코노미아가 어떠한 것이냐? 그것은 유대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할 수 없었던, 도무지 유대사람으로 전통적인 완고에서는 상상하지 못하는 이 큰 사실들이 여기 발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하고 베드로도 그때는 그걸 그렇게 깨달았으니 각나라 사람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는다고까지 즉 거기에 외모라는 것을, 외부의 양식이라는 것을, 스타일이라는 걸 생각지 않았던 베드로요. 그러면 그런 깨달음을 가질 수 있는거요. 성신의 가르침으로... 허나 그것을 자기가 견지하지 아니하면 대사도 베드로도,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가지고 활동했던 그 사람도 어떤 방면의 좀 더 부지런하게 그걸 밀착하고 견지하고 나갈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는 말할 수 없어요. 말할 수 없으나 좌우간 무슨 이유로인지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다시 안디옥에 가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말이오.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것을 우리가 배울 때 항상 우리 자신의 책임이 무엇보다도 큰 것이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성신께서는 가르치시되 그때는 순종하고 그래서 어떤 때는 획시기적인 일이지마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상의 한 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생명의 양식이라는 그것이 우리에게 살과 피가 되어가지고 우리의 생명력을 더 발휘하게 하는 한 중요한 재료, 한 원인이 되어야 하는거요.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안되고 희미해지고 그래서 그것이 자기 전체 사상의 초석이 되지 못하고 한 때의 감격과 한 때의 교훈에 머물러 버린다 할 것 같으면 후에 다시 자기는 옛 그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쉬운 것이오. 정신적인 그 자세가 향상이 안되고 도로 후퇴해 버리기가 쉬운것이다 말이오.

성신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은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오. 성신님이 인도해서 이룬 일은 그 자체는 역사적인 거보요. 이 고넬료의 문제는... 그렇지마는 베드로 개인에게 있어서의 그 계시의 사실은 그게 무슨 연고일른지 그것이 귀중하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 후퇴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친구인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강렬한 책을 받았단 말이오. 강렬한 규제를 받았다. 그 강렬한 비판을 받은거요. 그러고서 정신을 차리고 이번에는 예루살렘 공회에선 자기도 맹렬하게 함께 나서서 다시 전진을 했던거요.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받았던 그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문제를 생각하는데 요켄데 모든 것이 합력해서 가령 그 사람이 환상을, 그 욥바 피장의 시몬 집에서 우거하면서 지붕에 올라가서 환상을 본 것이라든지 고넬료의 보낸 사람을 만난 것이라든지 함께 고넬료의 집에가서 사정을 자세히 알고 하나님의 이루시는 일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라든지 이것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다 성신꼐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신 결과로 되는 거요. 그런고로 가르치심이라는게 “아무개야, 네가 이거해라. 이것 저렇게 해라” 이것만이 또 그런 양식을 언제든지 바라지를 아니해야 하는거요. 그런 양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말(normal), 우리의 정상적인 생활가운데서는 없는 거요.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마는 하나님의 배제(配制:여러 종류의 약제를 배합 함)의 그 특별한 은혜가 오늘날 성신을 우리에게 보혜사로서 내주케 하시고 내주하시는 성신님의 역사로 감화하시고 또한 우릴 주장하시므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이렇게 해서 가르쳐 가시는 거요.

알게 하신다는 것, 우리가 받은 신은 이 세상 신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이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여러 것들 깨닫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장 12절 말씀과 같이 이와같이 우리를 알게 하시려고 하신거요. 그 알게 하신다는 것이 반드시 나에게 속삭여 가지고만 알게 하시는 것은 아니오. 나는 내 환경을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큰 뜻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하고 자기자신이 무엇을 받았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알아가는 것이오.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성신의 가르침을 받을 때 늘 고려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어요. 첫째 우리는 자기 자신이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부르심을 받고 어떤 은사를 받아서 무슨 자리에 세움을 입은자인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거요. 베드로는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이고 그것은 새로운 거룩한 경륜을 퍼칠 사람이고, 그건 지금까지 없던 일인 까닭에 거의 창조적인 새로운 일이고 그런고로 거기는 사람들이 예기치 않고 준비치 않은 것인 까닭에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던 일이오. 그런 일에 자기가 전면에 서있는 사람이라는걸 느꼈어야 하고 아마 느꼈을 거요. 이게 자기라는 것을 먼저 바로 생각해야 하고 자기를 생각할 때 아상이 없어야 하는 거요. 내 자신의 목적과 공리를 위하여야 한다는 게 없어야 해요.

둘째는 자기를 생각할 때 자기의 분수를 알고 있어야 해요. 자기가 무엇하는 사람인가 무얼 할 수 있는건가 분수모르고 부허하니 신기루 같은 이상을 꾸미고 그림을 보고 앉아있는 것은 그게 정당한 것이 아닌거요.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준비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해서 크고 기이한 일은 생각치 않는 것이 하나님 종들의 태도였어요. 주여! 내가 누구오니까 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겸손한게 겸손이 아니오. 자기는 자기대로 사명이 있는 것을 알았어요. 일이 너무 벅찬 것을 알았어요. 몇번 실패 했으니까 그 실패했던 원인을 후에 반추해보고 뒤돌아보고 반성해 볼 때 내가 그 임(任)에 당할 사람이 아닌 것을 아는 거요. 너무나 일은 벅차고 크다. 그리고 나는 첫째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사람이 지지하지 않는데 혼자 가서 지도자라고 하느냐? 그것 아주 자명한 도리인거요.

그러니까 그냥 겸손으로 한 양이 아니올시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까닭에 정직하게 고백한거요.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보내리라. 그 사람들의 마음을 네게로 모아 줄테다.’ 이렇게 해서 약속을 받은 사람들도 처음부터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뽐내고 나서는 일이 없어요. 위험이 있을때 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아가겠느냐고 할 때 그건 내가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뭐냐하면 희생을 의미하는 거요. 마치 이사야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니까 주여 저를 보내옵소서.” 나중에 죽음을 각오하고 갔고, 과연 전설대로는 톱으로 켜서 죽임을 받은 사람이오. 그런건 있지마는 어떤 큰 일에 대해서 ‘아, 하면 보람이 있겠는데, 내 생이 가치가 있겠는데’ 그런 생각을 않는거요. 항상 겸손한 위치에 있어요. 이렇게 해서 제 분수를 알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누구든지 자기가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아라 그랬어요.

그러기 까닭에 이렇게 자기 분수를 안다면 자기를 먼저 생각할 것이고 다음에는 자기 환경이라는 것을 읽고 해석해야 해요. 인터프리트(interpret)해야 하는 거요. 자기 환경이 이 전체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대해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해석할 줄을 알아야 해요. 그러면 이 환경(circumstances), 혹은 자기 가지고 있는 일 전체의 어떤 사실이든지 거기에 대한 자기의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것이 그에게 있으려면 해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재료가 있어야 하는거요. 그런 까닭에 항상 평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바 거룩한 내용이 체계 있는 사상으로 그의 안에 있어야지 편언척구(片言隻句:한 두 마디의 짧은 말과 글)가 와서 갑자기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하고 결정을 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여러가지 사상적인 기초를 가져야 해요. 인간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나? 가정이란 어떻게 보셨나? 사회란 어떻게 보셨나? 경제란 어떻게 보시는건가? 정치란, 또 문화의 여러 양식 같은 것, 여러 다양한 각 장르(genre)이런 것에 대해서 이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럼 우리는 어떤 도덕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어떤 전통에서 살고 있는가? 그건 바른가 그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언가? 이런 것이 다 사상이라는 거요. 하나님 나라의 건전한 사상 속에서 자꾸 자라나야 하는거요.

그래서 각 사람이 장성한 분량이 있는 것인데 그 장성한 분량에 응해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지, 덮어놓고 일양 모두가 똑같은 아이디어(idea)로서 성신의 인도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아니오. 그 사람의 그릇을 따라서 장성한 분량이라는 것은 그릇이 얼마만큼 크고 얼마만큼 유용한가에 따라서 말하는 것이오. 그러면 자기를 생각할 때 아상이 없어야 하는 것과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과 또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그리고 그 사명하에서 그리스도적인 품성하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을 바로 생각하는 것과 자기 환경이 나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어떤 환경이 왔으면 여기서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를 늘 바로 생각해야 하는거요.

이 환경이라는 것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그것이 가장 권위있는 하나님의 인도인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오. 환경의 조성에는 그것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오. 내 잘잘못이 다 붙어다니는 거요. 잘했으면 그렇지 않고 잘못하면 이렇게 되고 하는 것이다. 붙어서 내 환경을 이루는 거요. 그런데 자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은 없이 어떤 환경을 덮어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기 맹종한다면 그 큰 잘못인거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이 아니다고 전에도 내가 이야기했지요? 어떤 사람이 어째서 너 신학교 왔느냐 하니까 다른데 시험 다 봐서 떨어지고 그리고 문이 다 닫혔으니 할 수 없이 그 문만 열려서 들어 왔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소명있느냐 하니까 그것이 소명이라고... 그건 기가 막힌 이야기요.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해야 하고, 더 사명 의식이 분명해야 하고 남의 인생의 길을 가르쳐야 할 사람이 제가 제 길도 모르고 앉아서 거기 들어가서 공부하겠다고 한다면 그런 학교 거기서 해서 뭣 되겠는가? 그러면 그런 사람이 목사되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 답답한 이야기오. 슬픈 이야기이고...

그런 까닭에 사명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을 할 때 그것이 그릇되이 오해를 하면 안되는 것이오. 어떤 문제가 어떻게 되었으면 첫째 거기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내가 그때 그렇지 아니했다면, 내가 좀 더 부지런하고 내가 좀 더 근실했더면 지금 저렇게 안 되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환경의 여러가지 착찹한 양상 가운데에 있는 어떠한 이블(evil)이라는 것, 악이라는 것, 혹은 결함이라는 것, 이런 것이 나의 결함과 관계가 있는 것이 많아요. 때때로 우리는 탄식해요. 하! 내가 오늘 올라서야 할 자리를 못 올라서고 잘못해 가지고 열 걸음 걸어야 할 것을 세 걸음 걸었으니 나머지 일곱 걸음은 부채(負債)다. 그 부채가 그냥 그 이튿날 또 있고 또 있고 그래서 누적된다면 나는 얼마후에 도달한 것은 도달해야 할 지점의 십분지 일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 1/10에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그렇게 생각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저기 100이라는 데를 주시려고 했지만 내가 잘못해서 나는 이걸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의 은혜가 겨우 그 정도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내 잘못이 많아서, 내 부채가 많아서 그렇게 되는 거요.

그러나 그런데에 그런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오. 기왕 나는 부채를 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내 죄를, 내 부채를 주여 용서하시옵소서. 첫째 부채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빈곤이나 잘못이라는 것을 나에게서 토죄(討罪)하실 수 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공로로써 먼저 죄책에 대해서 책망에 대해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거요. 책망에 대해서 용서를 받으면 진 부채가 홀연히 다 충족이 되느냐 하면 충족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결국은 그런 것이 나라는 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거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의 오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훨씬 이 보다는 하나님 앞에 더 충실하고 하나님의 그 맡기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야 하지만 겨우 되다 못되어서 이 정도다 하는 것을 느끼고 살아라 그거요.

그러더라도 하나님이 쓰실 때는 기이하신 손으로 역사하시는 거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실패하지 않으시는 거요. 나를 들어서 쓰고 내가 쓰인 부분은 아마 백분지 몇이나 되는가 하는 그런 정도지만 결국은 상은 내가 마치 다한 것 같이 주시는 거요. 이것이 우리가 이 현세에서 끝날 수 없는 우리의 부채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영화를 입히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셔서 영광의 세계에서 계속적으로 주를 봉사하게 하시는 거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주님은 여러 번 그것을 이야기하셨어요. 상을 받는다는 것과 벌을 받는다는 문제... 그래서 영광의 세계에서 상을 가지고 살 때 땅 위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축적이 있을 때 그만큼 더 들어와서 많은 것으로 맡길테니 이제는 주인의 즐거움을 누려라. 많은 것으로 맡기마.

여러분, 이런 거룩한 도리에 의해서 자기라는 것을 늘 반성하고 그러나 현재 내가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일을 할 그 주체는 모양이 이꼴이지만 이런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이것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면 이 환경에서, 이 능력에서, 나의 이 용력에서, 용량에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내가 탄식만 하고 앉았어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오. 탄식은 앞으로 자꾸 다시 반복해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릇된 역사적인 원인을 자꾸 심는 일을 이제는 지양해 버리도록 하는데 유효한 것이지 그냥 앉아서 센티멘탈만 한다는 것은 소용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면 가지고 있는 자본이 이 뿐이다. 이것만이라도 가지고 그러면 최선을 여기서 하자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이하신 손으로 인도하시는 거요. 최선을 해 나가려고 할 때.. 그것도 우리가 믿는 거요. 우리에게 있는 그것만 가지고 전부인양 써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못나고 힘없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맡기면 어리고 유치할 지라도 세상의 지혜자에 능가하는 거룩한 일을 자꾸 해주시는 것이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특별히 선택함을 받은 특권들인 것이오. 이런 큰 은혜가 있는 것이오.

성신님의 인도는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서 이룰 바를 우리 내부에서 인도하시지만 동시에 성신님의 그 은혜의 역사는 우리 외부에서라도 내 스스로가 자기의 용량 때문에 감히 손대지 못하는 일도 필요할 때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려고 할 때는 이루어 버리시는 것이라 말이오. 이와같이 성신께서는 또한 함께 일하시는 것이지 나만 시켜가지고 일 시켜 가지고 내가 내놓으면 그것이 결론의 전부는 아닌 거요. 여기에 은혜로우시고 감사하신 주님의 거룩하신 마련, 준비가 있는 거요. 나는 결국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대단히 적은 부분이지만 주께서는 마치 많은 부분을 내게로 회향(回向)해 주시는 것 같이, 마치 내가 할 것 같이 나와 관계되어서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거란 말이오.

여러분, 그런 예를 간단한 데서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우리가 그 일을 내 스스로 하면 내 가지고 있는 에너지나 용량에 의해서는 어떤 일정한 정도밖에 못하는 거요. 그러나 어떤 자연적인 세력이라는 것이 가담해서 큰 일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오. 자연 세력이란 것이 가담할 수가 있어요. 사람은 이것을 우연이라 그러고 재수가 좋았고 그러고 운세가 좋았다고 말해요. 세상 사람은 그래요. 세상 사람은 그런 알지 못하는 것을 많이 기대하고 있는 거요. 재수가 좋으면, 운수가 좋으면 하고...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움직이되 하나님께서 마치 내 자신을 그 일에 올라타고 할 수 있도록 주위를 주장하시고 타고 갈 수레를 만들어 주시면 나는 그것을 타는거요. 말하자면 그 전체의 환경과 역사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그 위에다 올려 앉히면 나는 타고 갈 수 있는 것이오. 그러지 못할 때는 못가는 거요.

그런 까닭에 이와같은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 기묘하신 손 안에서 움직이는 까닭에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라는 것은 나에게 있지만 동시에 어떤 일의 계획과 운영이란 건 나 이외에까지 다 미쳐서 전체 위에서 역사해 가는 거요.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생애 가운데 나타나는 큰 도리인 것이오. 우리가 가령 거룩한 도리를 알았다고 합시다. 거룩한 도리를 알았지만 그것을 남에게 전달한다고 할 때 가령 책을 써서 냈다고 해요. 책이 얼마만큼 나갈지는 우리는 아무 예측도 못하는 거요. 어떤 예상을 한다고 하지만 바다에 뭘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어디서 어떤 세력이 어떻게 움직여서 그외에 그때의 시세의 불리라고-도는 말에-시세 불리해서 아주 잠겨 버릴 수도 있고 그런거요. 그것 다 알 수 없는 거요. 그러나 꼭같이 유용하고 꼭같은 정도의 것인데도 시세가 좋아서 싹 나가는 일도 있고 시세가 불리해서 갇혀 버리는 일도 있고 그런거요.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내가 아무리 지혜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알고 미리 조처 못하는 거요.

그러기 까닭에 전능하신 손에 딱 맡기고 나의 당위를 하고 나는 내 길을 간다 그것이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이것을 싣고 갈 거대한 시세를 역사적인 현실에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 사람들의 마음에든지 그러면 어떤 큰 움직임이든지 거기다 그 놈을 탁 놓아서 밀고 나가시는 거란 말이오. 여러분, 그런 일을 생애 가운데서 많이 당해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기묘하신 손으로 그때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도저히 이것이 이렇게 될리가 없다 하는 것이 많이 있는 거요. 우리는 거의 그런데다 많이 그 혜택을 받고 살아요. 그런 혜택을...

그렇다면 그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령 어떤 컨커런스(concurrence)라고, 꼭 그때 적시에 발생하는 일이 있어요. 적시에 발생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우연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필연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거번먼트(government), 통치의 한 방법인 거요. 컨커런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일이 동시에 발생해서 서로 협조해 가지고 일이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말이오. 어떤 사람이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을, 어떤 시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지 아니했더면 그 일생이 지금 그 후의 그 사람의 생애에 비춰볼 때는 전연 별다른 길로 갈 뻔 한거요. 그런 일도 많이 있는 거요. 그런데 그의 인생의 길을 가다가 누구를 만났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아주 중대하게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란 말이오. 인생의 행로가 그렇게 달라지는 거요. 그런 일 얼마든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지요? 그 용케 어떻게 그때 그렇게 만났나? 언제든지 그 사람이 기다리고 앉았다가 만나는 것은 아니오. 이것은 컴 어크로스(come across)하는거요. 처음 만난 그것 때문에 그때부터는 그의 인생이 전연 새로운 것으로 시작된 것이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놓고 볼 때도, 이런 걸로 볼 때도 하나님의 그 기묘하신 손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은 그뒤에 하나님의 기묘하신 준비와 그 은혜의 모든 배치가 있어 가지고 그와 더불어 합작해서 일을 해나가신 거요. 여기서도 고넬료의 집 안에서도 준비하게 하신 것이고 그것도 환상으로, 베드로에게도 준비하게 하신 것이오. 그리고 여러가지 모든 사실들이 거기 베드로로 하여금 거기 가서 그런 역사적인 거보를 내디디게 하신거요. 그러면 그런 사실들을 우리가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신이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신다 할 때는 거기에는 부르심의 큰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라는 것은 베드로가 그때 자기의 그 걸음이 욥바 시몬의 집에선 내디디고 말을 탔든지 걸었든지 가이사랴를 향해서 걸어가는 그 걸음이 역사적인 거보가 될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베드로 자신도 몰랐을 거요.

이렇게 자기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큰 의미를 자기 발걸음 하나 하나에다 벌써 족적(足積)을 남겨 놓고 간 거요. 이러한데서 하나님의 성신의 인도의 기묘한, 신비한 점을 본 거요. 이런 신령한 거룩한 뜻을 알고 먼저 그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해 나가신다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지적이어서 우리들 자신이 성실하게 아상이 없이 자기 분수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거룩한 뜻을 늘 찾고 그렇게 하고 그 거룩한 말씀의 뜻은 개인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하는 그것을 따르지 않고 교회가 전통적으로 고귀한 유산으로서 받아 내려온 것을 전할 때 그 테두리안에서 전하고, 이렇게 해서 비끄러진 생각을 아니해야 된다 하는 것들을 우리가 주의합시다. 다음 시간에 우리가 또 생각합시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님의 극진하신 사랑은 저희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너무나 많은 부채를 지고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어서 좀 더 쓰일 가치가 없는 것들이지만 극진한 사랑으로 오셔서 기묘하게 그 거룩한 은혜로 인도해 주시고 만날 사람을 적시에 만나게도 하시고 또 생각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보여 주시기도 하시고 인도도 해 주신 그 주님의 여러가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할 때에 만만이나 감사하옵나이다.

이 거룩한 도리를 더 깊이 깨닫고 저희가 성신의 인도함을 늘 받고 살게 하시고 혹여라도 아상에 의해서 자기의 궁리와 자기의 열정을 실현해 보려고 하는 그릇된 태도를 버리게 하시고 자기의 분수 너머의 생각을 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또한 자기에게 부탁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끝까지 충성스럽게 해 나갈 수 있게 저희 주위 환경의 여러가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깨닫고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 마치 베드로가 찾아온 고넬료의 집 사람들의 대화를 들을 때, 그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그때 당면했던 자기의 환경이 주님의 뜻을 따라서 샤론의 들을 건너서 가이사랴로 가라고 하신 것을 곧 느끼고 알고, 또 많은 사도들이 다 자기의 환경과 자기의 당면한 문제를 명석하게 해석하고 꺠닫고 나간 이 사실을 알고 자기의 환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할 줄 알도록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시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항상 자기를 단속하고 바로 거룩한 사상을 포회하여서 문제에 임했을 때 문제를 하나님의 나라의 안목으로 보고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도리를 더 깊이 깨달아 알게 하여 줍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7강(사도행전 16장 6-15절)

오늘도 지난 주일에 이어서 하나님의 성신께서 우리 각 사람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는 도리를 또한 별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가겠습니다. 이 도리가 심오하고 혹은 어려운 데가 있는 까닭에 도리를 교리와 같이 엮어서만 이야기하면 얼른 다 알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해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런 중요한 실례도 보는 것이 좋은 까닭에 그런 방식으로 이걸 생각해 나겠습니다. 이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인걸 여러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어떤 것이 덜 중요한 것 없지만 매일매일 생활에 있어서 이것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주의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개괄적으로 먼저 큰 것 몇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째는 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든지, 인도라는 이 역사는 우리 안에서 유기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의식의, 우리의 영혼의 기능의 어떤 부분이든지 제한을 한다든지 탈취한다든지 하시는 일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가장 충실하게 잘 쓰셔서 하시는 거라고 하는 거예요. 둘째는 성신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데는 그냥 하는 게 아니고 항상 어떤 큰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에 향하여 가도록 하는 것이고 이건 기본적으로 사람이 중생한 다음에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말 가운데에서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냥 아무 일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종교로 쥐고 인생을 제가 결정해서 가는게 아니고 성신께서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리로 끌고 가시기 위해서 그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한 인도하시는 것이다 하는 거요.

이 목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원대한 한 가지만 가지고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어느 때는 원대한 것에 붙여서 당면의 목표라는 것도 또 거기에 그걸 수반하고 있는 것이올시다. 이와같이 해 나갈 때 거기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성신이 거룩되이 각 사람을 역사해 주시는데 따라서 조화있게 일이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그거요.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던 이야기를, 그 역사를 우리가 공부를 했는데 성신님 사역 가운데에는 베드로에게도 어떤 환상으로 계시를 하셨고, 고넬료에게도 환상으로 계시하셔서 결국 이런 것이 서로 합쳐서 그 큰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동시에 발생 혹은 협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을 여기서 보았어요.

그 다음에 우리는 이야기하기를 성신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으려면 자기 욕심을 가지고 자기 목적을 가지고 성신님께서 좀 유리하게 인도해 달라고 그런 짓 해 가지고 하는게 아니다 그거요. 그러면 자기 목적이나 자기의 욕심이라는 것이 없어야겠다면 얼마만한 정도로 없어야겠느냐 할 때 결국 한마디로 ‘나’라는 것, 옛사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이 생생한 현실로 자기에게 있을 때 성신님의 명확한 가르침과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언제든지 아상(我相)이라는 것이 없어야 할 뿐더러 성신님이 지시하는 데로 절대로 순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마음 가운데에 그 사실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그와 같이 원하시는 때에 적시에 나를 가장 은혜롭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다리는 대망의 신앙이라는 것이 늘 필요하다는 것이 올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진 마음 상태를 가지고 구하는 거요.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라 그랬어요. “너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함이오”그랬어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너희 쾌락으로, 헤이도네(ήδονή), 쾌락으로 쓸려고 잘못 구함이라” 그랬어요. 야고보 4장 2절, 3절... 그러며는 우리는 구하라는 거요. ‘성신님이 나를 이 일에 있어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주소서. 저는 오직 순종할 것 뿐이로소이다’ 그것이오.

성신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또 그 가르치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신께서 나에게 단계적으로 감화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이끄는 사실을 어떤 도중에 그만두고 저지하고 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그거요. 이것이 “성신을 소멸치 말라” 하는 뜻이 올시다. 우리가 기도해서 구했으면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에 하라고 하는 일, 당장에 목전에 알지 못하는 것이 딱 당해서 이것 주시오, 저것 주시오 이러지 말고 성신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순서에 의해서 차례차례 터득해 가거라 하는 거요. 나는 당장에 이것이 몰라서 답답해서 물었지만 성신님 말씀이 너는 그걸 알려면 그 이전에 벌써 알았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이전에 네가 깨닫고 알고 있어야 할 것들도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이걸 내가 일러준들 너는 깨닫지 못한다. 네 그릇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선 이것부터 해야겠다 하고 우리에게 그 먼저의 단계, 먼저 주어야 할 것을 먼저 주시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주님도 우리에게 구한 다음에는 찾아보라고 했고 찾아본 다음에는 문을 두드리라. 이렇게 해서 구하고 찾아 보고 문을 두드리는 순서를 가르쳤어요. 구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요.

이와같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만일 구했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찾는 단계의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말이오. 자기 현재의 마음 상태를 잘 살피고 자기 분수를 알고서 크고 기이한 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목전에 가장 정당한 일을 하고저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오. 이상을 품고 주를 위해서 내가 이걸 하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떠들지 말고 그것이 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인 이상에는 주께서 받지 아니 하시는 것인줄 알고 항상 분수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도 명확한 인생의 사명이라는 것이 없다면, 자기 일생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없다면 지금 그의 단계는 자기가 정당히 더욱 장성하기 위하여 주력해야 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사명을 받을 만한 그릇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그러나 만일 사명이 있다 할 것 같으면 충성으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른길을 늘 찾아서 나갈려고 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올시다. 자기 현재의, 다음에 자기 현재의 환경의 조건들을 늘 주의해서 찾아보는 것이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내 현재의 환경이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걸 해석해서 자기가 이 자리에서 믿는 사람답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답게 가야 할 길을 가야한다 그거요.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이오. 하나님께 맡기고 비록 앞 길이 막막할지라도 보이시는 한 길을 전진해 나가는 이것이 정당한 생활로 성신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받아가는 사람의 자태올시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 보이신 원칙들에 의해서 원래 사상에 함축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오. 성경의 원칙들은 사사로이 풀 것이 없는 까닭에 일(?) 하나님의 성신이 역사를 통해서 가르쳐주셔서 역사의 고귀한 유산으로서 받아오게 한 것을 항상 터 삼아 가지고, 중요한 근거지 삼아서 그런 튼튼하고 건전한 교리의 터 위에서 문제를 해석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그러한 걸 잘 가르치는 책이든지 좋은 친구든지 훌륭한 스승이든지가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을 물어서, 해명해서 가르치는 것에 근실하게 늘 참석하고 배워서 자기가 건전한 사상을 함축해 가지도록 해야 할 것이오.

마지막에 하나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라 하고 토라(torah)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이 생명을 얻게 하는 길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고, 정죄하는 기능을 우리에게는 가지지 아니하고, 선행을 강요하는 강요자로서 존재하지 않지마는, 생명의 성신의 법에 의해서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 까닭에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에 있어서는 그것이 우리의 인식에는 생활의 기준을 보여 주는 것인 까닭에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생의 생활에서 이렇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까닭에, 우리 생활의 기준으로서, 규칙으로 도덕적인 것 즉 선악의 도덕적인 판단의 기준으로서 율법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고 둘째는 어떠한 나라를 구상하시고 이 법을 옛날 히브리 사람들에게 내리셨던가를 종합적으로 대국적으로 잘 관찰하고 배우며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거룩한 나라의 자태를 우리가 찾는거요. 이러한 것들을 배워서 이 법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기능을 살리는 거요.

이래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다같이 존중히 여기는 것이고 그뿐아니라 법이라 할 때는 하나님이 하라든지 하지 말라시는 모든 말씀을 포함해서 광범위의 법이라는 말로 써요. 꼭 모세의 율법 613조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오. 그러면 복음을 믿어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이오. 안믿으면 멸망한다 하는 것도 하나님의 법인 것이오. 그런고로 이 법에 의하여서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복음을 믿고 하지 말아라 하는 것에 의해서 불신의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 말이오. 그런 까닭에 덮어놓고 법을 무시한다는 생활의 태도라는 것은 무법자요. 무정부적인, 정신적 무정부적인 인물이란 말이오. 스피리츄얼 애너키즘(spiritual anarchism)이란 것은 무서운 타락인거요.

또 법이라는 성격상 필연이 거기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하세요. 통치 대권의 발휘라는 것이 거기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할거요. 왜냐하면 법은 권위를 의미하는 거니까. 따라서 비통치자가 거기 있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 거요. 그 관계가 무엇인가를 법은 보여 주는 것이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정당한 것을 인식하려면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또 거기 통치권이 행사되는 사회, 그 영역이라는 것이 어떤 레벨(level)의 양상을 띄고 있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오. 그러면 법과 성신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의 심상과 행위도 다만 도덕의 완성을 위한 것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바른 자태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 나라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와같이 법은 중요한 것이오. 법에 대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은혜시대에 속하고 율법시대에 속하지 안했다는 이상한 구분을 해 놓은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의 내신 법이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중요한 효용이라는 것을 때때로 등한히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걸 우리가 심히 중요히 생각 하십시다.

이제 오늘은 너무 이 교리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딱딱한 이야기인 까닭에 그 여타의 다른 실례를 들어서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지난번 말씀대로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라고 그랬어요. 그 사람의 모든 의식 활동, 다른 말로 말하면 영혼의 기능들을 충분히 구사 활동시켜서 성신님의 가르치시는 도리대로 그가 나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가르쳐 주신다 말이오. 그의 인격과 그의 영혼의 기능들을 충분히 활용하시는 것이다 그거요. 이 경우에 그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의 영혼의 기능 활동에 기본적으로 중요한건 감정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중요한 건 덮어놓고 나가겠다는 의지의 활동이 아니고 제일 먼저 바르게 인식한다는 사실인 것이오. 무얼 바로 알아야 그 바로 안 것 때문에 정당한 정서도 작용하고 지적인 감정이나 정당한 정서도 생기는 거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줄 알았을 때는 호감을 가지는게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을 때는 그의 일에서 증오감을 가질 수 있는거요. 이 일이 가치있는 일로 바로 알았으면 좋은 정서가 움직이는 것이고 무가치하고 타기할만한 일로 알았으면 타기하고 마는 것이오. 기본적으로 바른 인식을 가진다는 건 가장 중요한 거요. 따라서 바른 인식 하에서 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 왔을 때는 비로소 자기 의지라는 것이 그리 향해서 움직이는 것이오. 이렇게 그 사람의 인식, 이것이 여타의 정서나 의지의 활동에 앞서서 있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인식 내용이 정당해야만 할 것이다 하는거요.

그런데 우리가 중생할 때에 성신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을 뿐아니라 이 새로운 생명이 한 인격을 형성해서 인간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으로 가지고 있던 영혼의 기능이라는 것을 수선을 하시되 극단적으로 변화를 시켜서 과거에 알지 못하고 생각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알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적어도 그런 기능을 주셨어요. 성신님이 그걸 비취셔야 “아, 이것이 그것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그걸 알 수 있는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기능 활동은 있어야겠다 그말이오. 이렇게 해서 성신님이 “아,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나셨다” 할 때는 과거에는 한사코 반대하던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고 완전히 무시해 버리던 사람이 과연 진리올시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오.

이것이 그 영혼의 기능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켜서 과거에는 깨달을 수 없던 인간적인, 푸슈키코스(ψυχικός)의 영역에서, 자연인인 영역에서부터 끄집어 올려서 하나님의 성신의 조명을 받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신 것이란 말이오. 이 영혼의 기능의 극단적인 변화라는 것이 새로운 진리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따라서 하고자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말이오. 성신님의 이 유기적인 가르치심, 유기적인 인도를 받기 위하여서는 그의 인식 내용을 성신님께서 먼저 바로 잡아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란 말이오. 여러분, 성신님의 가르치심은 오늘 어떤 문제 앞에서 “요건 저렇고 저건 저렇다” 하고 가르쳐 주시는 것으로만 기대하지 말라 그것이오.

원래 그 쌓아진 것이 부족하고 그릇되어 있으면 그것부터 고쳐져야 하는 것이오. 그의 사상이나 그의 생각이나 그것이 편협하고 동굴 속에 갇힌 것같이 많은 사람이 하니까 저도 따라가는 종족의 우상같이 그렇게 되었으면 그것부터 두드려 고쳐 주셔야만 바로 생각할 수 있을 거요. 그래야 유기적으로 바른 생각과 바른 관념 바른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오. 이것이 먼저 고쳐져야 하는 것이오. 덮어놓고 고쳐지지 아니하고 아주 이렇게 편협하고 편견이 있고 잘못된 정신 속에 성신님이 가르쳐 주시면 무엇이든지 안다고 그렇게 생각지 말라는 거요. 그건 유기적인 활동이 아니오. 가지고 있는 그 사람 논리의 그 시발점, 말하자면 여러가지 프레미스(premise), 전제들 이런 것을 그냥 놓아두고 성신님이 가르쳐 주면 된다는건 말도 안되는 것이오.

유기적일려면 그 사람 사상 자체가 자연스럽게 그걸 구유(具有)하고 조화되어야 할터인데 성신님의 가르침과 조화되어야 할터인데 그 사람의 사상이나 논리가 자연스럽게 조화될려면 그 사람이 서있는 비뚜러진 전제나 비뚜러진 논거가 수정되어야 한다 말이오. 이러기 위해서 원래 중생한 사람에게 성신께서 가르쳐 주심으로 깨닫게 하사 과거에 가지고 있던 누습(陋習)의 사상과 누습의 주관이라는 것, 편견이라는 걸 자꾸 털어버리게 하시는 것이오. 사회관도 그렇고 인생관도 그렇고 혹은 도덕관도, 혹은 그 여타의 여러가지 사상적인 여러 내용에 대해서 자꾸 고쳐져야 한다 그말이오. 즉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서 말씀에 의해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전통적이고 고질적이고 완고했던 생각을 뒤집어 고쳐 놓아야 하는 것이오.

어떤 사람이 이 사회에 나가서 사람들을 위하여서 봉사를 하겠다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도리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인류애가 있어야 하는 것이오. 인류애가 있을려면 인류는 무엇이다 하는 인생에 대한 바른 가치 판단이 있어야 하는 게고 이런 바른 가치 판단이란 것은 그 인생관이 성경에서 나온 바른 것으로 형성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 여타의 인간적인 생각은 철학적인 관점에서의 인생관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같은 동일한 관점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의 사상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의 정신은 다 씻음을 받아야 하고 그대신 신령하고 건전한 정신으로 충족한 것으로 다시 건설되고 채워져야 하는 것이오. 이것이 심히 중요한 것이올시다.

그렇지 않고 앉아서 때묻고 완고하고 누습에 젖고 편견이 있는 데서 성신님의 가르침을 원합니다 해서 어디다 무엇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가르쳐 줄 때 너 이것도 아니라, 저것도 아니라고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오. 그것 안 가르치시는 게 아니오. 성경을 보면서 아닌 것을 깨닫는 것이오. 이게 성신이 가르치는 것이오. 너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사상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인간관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가정관도 고쳐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회관도 다 고쳐라. 자꾸 고치라고 하는 것이오. 그러고 그것을 교회는 교회대로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오.

성신님의 이러한 거룩한 가르침의 실례로서는 우리가 무엇이 있느냐 할 것같으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유용한 일을 할려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특히 자기의 그 봉사의 면에 대하여 정당한 인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오. “내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서 그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성신님 가르쳐 주십시오” 한다면 “네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고 네가 일 하려는 그 방면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이 무언가를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그걸 먼저 알아야겠다” 보이는 것이오.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아서 바로 하려고 할 것 같으면 교회에 대해 그 활동, 교회 활동이나 교회의 존재등에 관해서 정당한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오. 이것 없이 교회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하면 자기 딴엔 자기 나름대로 교회관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되지 하나님의 교회에 진정으로 보탬이 될른지, 손해가 될른지 그 측량을 할 수 없는 일이오. 인류사회에 무슨 봉사를 하고자 하더라도 먼저 그 인간관이 바로 서 있어야 하고 바른 봉사를 위하여는 그 인간관이 항상 정당한 데서 흘러와야 해요. 사람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또한 그 대상의 진가와 그 인격을 바로 인식하는데 있는 까닭에 인식치 못하고는 바른 사랑을 못가지는 것이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바른 사랑을 가지고 다 살지라도 주께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한 것이오.

그런고로 성신께서 한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서 유용히 가치있게 쓰시고저 하실 때에는 성신님의 이 유기적인 역사로서 그 사람이 자기 할 일과 일터를 바로 알고 바로 보도록 하시되 그러한 주관, 그런 판단과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그의 인식 내용에 먼저 바르고 넉넉하게 되어 있도록 하실 것이다 말이오. 인식 내용이 바르고 넉넉하게 된다는 건 논리가 정연하고 풍요한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오. 그 사람이 좋은 그릇으로 쓰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그 사람이 정상히 장성해 가지고 그가 자기의 맡은 일에 확신과 불굴의 뜻으로서 전진할 수 있도록 그의 인식이 깊고 체계가 있는 한 큰 사상으로 바르고 볼품이 있게 육성되어야 한다 말이오. 이것을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상도 성경이 가르친바 여러가지 바른 사상도 무시하고, 단편적인 편언척구(片言隻句)의 하나님 말씀만 되어가지고 뭐한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닌 것이오.

그런고로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근실하게 배워서 거룩한 사상이 그 인물을 이루어 가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러한 확신의 터 위에 서도록 또 그 사람 안에 충일하도록 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일이고 있어야 할 일이 올시다. 먼저 성신께서 나를 이끄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게 하시고 조명하심을 감사하면서 좋은 말씀을 바르게 해명받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고 낭비하지 말고 근면하게 배워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관찰이라든지 사상을 고귀하게, 논리 정연하게, 풍요하게 가지도록 목표를 세우고 나가는 것이 옳다 그것이오. 그러고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더욱 받겠다고 하라 그거요. 이런 경우에 좋은 예가 하나 있어요. 그 예는 사도 바울의 생애올시다. 그 일례로서 바울이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타낸 중요한 태도 하나를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고 나갔는가? 이 구절은 여러번 읽어서 여러분 잘 아시는 것이오. 바울 선생이 제 둘째번 여행 때의 노정이올시다. 그러면 제목을 삼아서 성신님의 가르치심에 대한걸 배울려고 하는데, 제목을 붙이자면은 ‘성신께서 바울을 어떻게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는가?’에 첫째는 그의 세계관과 거기에 의한 그의 복음의 행진은 어쨌는가? 바울 선생이 복음을 듣고 일차, 이차, 삼차 여행을 하고 마지막엔 로마로 항해를 했어요. 여러분 다 잘 아시는 것이오.

바울 선생은 아마 주후 31년경에나 회개를 하고, 30년이나 31년이라고 하더라도, 45년에 제1차 여행을 떠나서 대체로 48년까지, 그러고 50년에서 53년까지 제2차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54년에서 57년까지 제3차 여행을 했고, 그 다음에는 58년에는 고린도에서 돌아와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잡혀가지고 붙들려서 가이사랴에 2년이나(옥살이를 하고) 있다가 60년, 61년 그 겨울에 로마로 항해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로마의 가이사에게 상고를 해서 상고심에서 결국 바울은 석방이 되었고, 후에는 다시 옛날 교회를 찾아보러 마게도냐 지경으로 왔다가 혹은 마게도냐 그렇지 아니하면 아시아에 와서 드로아 근방에서 잡혔어요. 그건 벌써 네로의 박해, 64년부터 시작된 박해가 사방으로 로마제국 사방에 미친 때이니까 잡혀서 로마로 가서 마침내 66년이나 7년경에 로마에서 순교를 하신 것이오. 바울 선생의 나이도 대게 그만한 정도예요. 큰 차이가 없어요. 돌아가시던 그 해 주후 67년이라면 예순일곱쯤 되었을 때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해도 대차가 없어요.

이와같은 그 생애의 움직임을 볼 때에 바울선생이 주님을 만나서 회개를 한 이래부터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자태라는 것은 역력해요. 역력한데 그의 가지고 있는 사상과 성신님이 그걸 쓰셔서 인도하시는 내용과는 아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움직이고 있어요.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유기적인 역사라 하는 어떤 현실 어떤 사실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오. 그에게는 직접적인 환상이나 계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상 그것 자체를 계시로서 받아들이지 아니 했어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을 볼지라도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서 곧 마게도냐 가기로 힘썼지만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일러라.” 하나님이 이렇게 부르신다고 그 내용은 그렇게 인정한 것이지 환상 그것 자체가 곧 계시다고는 생각지 아니했어요.

그건 우리가 이 다음에 다시 생각할 문제지만은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바울 선생은 복음을 들고 복음을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나가는데 지리적으로 볼 때 항상 시작을 수리아 안디옥에서 했지만 항상 서쪽으로 갔어요. 사도 베드로와 같이 동쪽 바벨론을 향해 간 일이 없어요. 북쪽 빅트리아나 엘람도나 이란쪽으로 올라간 일이 없어요. 알르메니아로 간 일도 없고 소아시아로 들어가 가지고 소아시아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갈려고 한 일이 한번 있지만 비두니아로 갈려고 오늘 기록에서 한번 있지만 예수의 영이 딱 막고 못가게 하니까 다시 서진(西進)해서 드로아까지 가서 드로아는 에게해에 있는 해안이죠? 아시아에 있는 항구요. 고대에 그 트로이 있는 유적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이름이 그 이름대로 트로이, 이에 호머의 시 가운데 나오는 트로이란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드로아라고..... 거기서부터 성신님의 거룩하신 인도를 받고 비로서 마게도냐 헬라로 갔고 그러고 자기 원하는 대로 결국은 로마로 가게 된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들고 바울 선생은 서쪽으로 나갔다는것... 서쪽으로 나가되 지중해 서쪽으로 자꾸 나가되, 지중해 연안으로 아프리카론 가지 않고 항상 이쪽 헬라 즉 마게도니아와 아카이야 그 다음에는 에게해를 넘어서 저쪽 아드리아 앞 바다를 넘어서 로마로 갔어요. 바울의 당면의 목표는 로마였어요. 왜 바울 선생은 이랬나? 바울은 거기 대해서 자기 자신은 아무런 상념이 없는데 성신께서 그리로 가거라 하고 밀어대서 그랬는가 하면 그게 아니오. 성신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까닭에 바울 선생에게는 그런 사상이 움직였고 이 사상의 움직임 하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이렇게 나가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당위다 하고 그러고 나갔던 거요.

성신님의 인도를 받을 때에 이와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사상을 품은 사람은 그 사상 자체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사실들이 생기는 것이오. 가령 사람이 인간관을, 고귀한 인간의 존엄성이란 것을 인정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학대한다든지 인간을 천시한다든지 무시하는 일은 반대하고 나설거요. 그런 일이 자기에게 닥칠 때는 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필연적인 거요. 왜? 그 사상이 그런 인간관을 가진 까닭에 그렇다 말이오. 가정관이 조선(祖先)을, 선조를 말이오, 신화하는 가정관을 다 불식시켜 버리고 다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대일로 서 있다는걸 안사람은 자녀들의 인격에 대해서 자기 소유물과 같이 생각하던 누습을 버릴거요. 그러고 자기의 행복이나 자식의 행복을 전제로 하고 나가던 유디모니즘(eudaemonism) 사상에서 벗어난 사람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 때문에 자식들을 기르고 사상을 부여해 줄 것이오.

이와같이 그 사상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행동이 나오는 게고 그 언어가 나오는 것이오. 따라서 그것은 정당한 사상과 성신께서 그에게 함축해주신 거룩한 도리가 그 속에 있으면 거기 의해서 움직일 때 성신께서 힘을 보태어 주셔서 그 일이 이루어 나가도록 해주시는 거란 말이오. 그러한 거룩한 사상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 앞에 장애가 있을 때에는 장애를 물리치고 가는 것이지 장애에 타협하고 넘어지고 되돌아서는 법이 없는 것이오. 이와같이 기계적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가장 영혼의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인간답게 나가는 이 사람에게 정당하게 인도함을 받는 생활이 나타날 것이오.

사도 바울 선생에게 내리신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는 그의 사상과 그 세계관, 그 사관, 그런 것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늘 가지고 있었다 하는 것이오. 성신님의 은연(隱然)한 주관 하에서,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그는 그 사상이 육성되어 왔던 것이 올시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금방 된 건 아니오. 다만 그는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헤브라이즘에 일대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오. 헤브라이즘도 계시에 터를 두고서 구성되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편협성과 편견과 잘못된 것들을 일단 다 한번 불식해 버렸다 그말이오. 이 바울 선생의 가치의 전도(顚倒)라고 할지 사상자체의 정리라는 것이 그의 입신 이후에 있었다는걸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어요... 또한 사명받은 후에 그의 사명수행의 길은 그의 사상의 터 위에서 그의 진로를 정해 주었고 거기에 의해서 전진하게 한 것이 올시다.

성신께서 바울 선생을 들어서 이방의 사도로 쓰실 때에 하나님의 그 만세전의 경영을 따라서 이미 준비해 놓으신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 그러한 사상가를 만들어 주신 후에 쓰신 것이오. 그냥 갑자기 쓰신 것은 아니다 그거요. 기독교의 신학을 가령 바울 선생의 일을 보십시다. 기독교의 신학을 체계 있게 세워서 후대에 가장 정연하게 전수하도록 바울 선생을 들어 쓰셨음을 우리는 보는데 이런 바울이 가지고 있는 그런 논리적인 은사가 움직인 것만 아니라 그의 가지고 있던 교육과 그의 사색과 또한 그의 사상가로서의 함축을 다같이 써서 그렇게 만든 것이오.

그 일단 예를 우리가 오늘 읽은 사도행전16:6-15절에서 보는 것이 올시다. 이거 6절로 15절까지 여기 이야기는 제 둘째번의 여행... 이 둘째번 여행 기록은 사도행전 16장부터 18장까지 있는 기록이올시다. 장소는 마게도냐, 헬라 이것이 중요한 여행지였어요. 주후 50년으로부터 53년까지 해수 한 4년간 한 것인데, 간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의 일로 서로 다투고 나누어서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마가 요한을 데리고 자기 고향 땅 구브로로 가서 거기서 전도를 하고 바울 선생은 실바누스라는 사람 실라라고 하는 사람을 택해서 데리고 먼저는 수리아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도보로, 육로로 북쪽으로 가서 소아시아로 가는 그 타오르스 산쪽을 향해서 가 가지고 길리기아 문이라는 길리시언 게이트(cilician gate)라는 산을, 허리를 짤라가지고 통하는 길을 만들었어요. 거기를 통해 지내 가지고 소아시아 땅으로 들어가서 주로 갈라디아 땅으로 나갔어요.

그런데 갔다가 루스드라에 가서 더베, 루스드라로 갔지만 루스드라 땅에서는 일찍이 제 일차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죽을뻔 했지요? 돌로 맞아서 죽은 줄 알고 사람들이, 유대사람들이 끌어다가 성밖에다 내친일이 있어요. 그렇지마는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기적으로 그는 회생해서 일어나서 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다음에 이고니온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루스드라에서 제자를 하나 만났는데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유대사람인 디모데올시다. 그래서 디모데를 할례해가지고 데리고 갔으니까 바울, 실라, 디모데, 그 다음에 드로아에서 볼 것 같으면 아까 읽은 말씀, 바울이 이 마게도냐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며” 우리라는 말을 썼어요. 이걸 기록한 사람은 누가인데 여기서부터 누가가 가담한 것을 표시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드로아에서부터 우리라고 말할 때 자기를 포함한 일행 누가, 빌립보 사람인 듯한 사람인데 마게도냐에 빌립보 사람 헬라 사람이오. 그도 거기 가담을 해서 일행이 바울과 실라-바울이나 실라는 다같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오. 그 다음에는 디모데 그러고 누가 이 사람들이 올시다.

이 사람들이 한 여행인데 누가는 드로아에서부터 출발해요. 바울과 실라는 육로로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가지고서 타우르스 산과 길리기아 문을 지나가지고 들어왔다 그랬어요. 그래 가지고 성신이 그들을 인도해서 나가는데 이 바울이 갈라디아 땅에서 어디로 갈려고 했느냐면 서쪽에 있는 로마의 도(道), 프라빈스(province), 아시안 프라빈스(Asian province)라고 여기에 아시아(도)라는 말은 로마의 도의 이름이 올시다. 이쪽으로 갈라디아가 있고 하는데, 여러 도의 이름이 있는데 가장 서쪽으로 붙어서 에게해에 접해 있는 도, 그 수부가 에베소인데, 그것이 아시아도인데, 이 아시아도 생각건대 에베소를 향하여 갈려고 했던 것 같은데 성신이 아시아(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막으셨다 그랬어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막으셨는가를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으나 어찌하든지 나중에 바울 선생은 누가하고 이야기를 할 때 성신께서 가기를 막으셨다, 성신께서 막으신 일이 아니라면 그후에 발생한 여러가지 일에 일치성이 없지 않으냐, 그후에 발생한 여러가지 일의 역사적인 중요성을 우리가 관찰할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거기 있은 까닭에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막으신 것이다 해서 막은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 막았다는 것을 확언(確言)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일거요. 왜냐하면 자기가 아시아에 가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가를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자기의 아는 대로 되지 아니한 것이오. “아, 내 안 대로 그 때 아시아에 가서 이렇게 이렇게 했더면 빌립보의 일과 이 마게도냐 일과 아가야 일과 나중에는 이 헬라 전체에 일어난 일, 이런 일들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다른 때 해서도 꼭 되리라고 장담 못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는 아무 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오. 하나님의 원하시는 그 때에 나가서 그 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믿었어요.

복음은 내가 전하면 되는 것은 아니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적시(適時)에 쓰시고 적시에 건져서 원하시는 그 시간에 거기 거룩한 교회를 형성하고 그 나라를 세워 나가시는 거요. 이러한 것을 확연히 믿는 그 신학을 가진 바울로서는 자기가 아시아에서 지체하고 방황하는 일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이렇게 이런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에 과연 그것을 막아주셨고, 막아 주셨기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런 큰 일을 하게 되었다고 이른 거요. 이런 까닭에 아시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그때의 형편 때문에 못들어 갔다고 하더라도 훗날 회고할 때는 그 형편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부터 성신님의 역사라 하는 것을 믿었던거요.

혹 사가(史家)들은 생각하기를 바울이 가지고 있는 큰 병이 있어요. 바울에게는 안질도 있었고 또한 고질(痼疾)이 있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그는 고린도에서 자주 말하기를 사탄의 사자라고, 자기는 자기의 몸을 찌르는 가시를 육체에 가졌다. 그래서 육체상 단단한 고통이 하나 있던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나 바울은 분명히 눈병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눈이 잘 안보여 가지고서 편지할 때도 디모데에게 거의 다 대필(代筆)하고 자기가 인사는 큰 글자로 써서 인사를 하고 그랬지요. 그러나 뭣이 되었던지 바울에게 혹시 그 때 어떤, 그냥 전체에 몸에 병, 질병이 생겨서 전도할 수 없는 처지가 있어가지고 산간 고지대인 갈라디아 땅에서 그냥 쉴 수 없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오. 그래서 아시아를 가서 일을 할려고 하던 것을 못하고...

그러면 병이 나으면 아시아로 들어 갈려고 했을 터인데 병상에서 그는 묵상하고 생각하는 도중에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안(案)를 좀 고쳐보자 생각하고 그 둘째 안이라는 것이 그대로 아시아의 북쪽을 그냥 통과를 해가지고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흑해 연안에 있는 비두니아 쪽으로 올라 갈려고 했어요. 비두니아로 자꾸 올라가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아마 알메니아로 올라 가겠지요. 그런데 비두니아로 올라 갈려고 하는 것을 예수의 신이 또한 허락지 아니 하셨다, 막았단 말씀이오. 그때 또 무슨 사건이 생겼는지 모르나 막았어요. 바울에게는 또 직접적인 계시가 있던 까닭에 혹은 바울 선생에게 밤에라도 낮에라도 어느 시간에 주의 성신이 나타나서 그리로 가지마라, 이것이 내 뜻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었고 선생은 그것을 혼동 없이, 착오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인 까닭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도리로 확신하고 그걸 통해서 드로아로 갔을런지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이러고저러고 하는 것은 재료가 없는 이상 만들어 낼 필요가 없는 거요. 그가 형편이 그렇게 됐든지 혹은 직접적인 계시에 의해서 던지 좌우간 아시아도와 비두니아로 가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이것은 후에 수료(?)할 때 “하나님의 성신이 혹은 예수님의 영이 막아서 우리는 못갔다, 가지 말라고 했다. 즉 예수님의 신이 그리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는 것으로 확실히 인정하는 말이오.

그래서 여기 드로아에 왔는데 여기 드로아에 와 가지고 누가가 여행에 가담을 했습니다. 여기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본 것이오. 이 환상을 바울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여행하던 첫해의 환상인 것이오. 아직 어디 멀리 간 때가 아닌 까닭에 주후 50년경 일일 것이오. 그 환상에 마게도니아 사람의 상이 나타나 가지고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구하라.” “바울이 이상을 본 후에 우리, 즉 누가를 포함한 일행은 곧 마게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재료가 무엇이 되었든지, 재료가 자연 현상이든지 특이한 환경이든지 우리의 시각을 통해서나 우리의 촉각이나 우리의 감각 기능을 통해서 무엇이 되서 왔든지간에 온 거요. 그것은 항상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의 성신의 뜻을 알고자 하고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걸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 이건 그렇습니다” 하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말이오.

왜냐하면 가상(假想), 헛된 상도 많은거요. 이 사람들이 환상을 봤으니까 우리도 환상만 보면 하나님의 환시다 하고 생각했다가는 큰 야단 날 수가 있어요. 이 사람들은 다 환상을 보되 환상에서 방황하지 않을 크라이테리아(criteria)가 풍부하고 그리고 경험도 풍부하고 또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까운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아직 시대가 계시 시대요. 계시의 시대인 까닭에 특이한 계시의 내용이라는 것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많이 있지마는 계시 시대가 지난 이후부터 사람은 함부로 환상을 본다든지 묵시 받았다든지 계시 받았다든지 이렇게 해서 성경적인 권위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지침으로서의 권위 있는 소리를 다시 할 수 없는 것이란 말이오. 이것을 오해하고서 자기도 같은 레벨(level)에서 환상을 받는 것같이 마치 바울이 환상을 보고 베드로가 환상을 봤으니 나도 보니까 묵시를 받았다, 그 무슨 소용이 없는 이야기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계시가, 특별계시가 완성되기 위하여 자꾸 내리는 시대의 사람인 까닭에 그들을 도구로 잡아서 특별계시를 자꾸 내리시는 것이지 마는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기에 특별한 계시의 도구라고 자만하고 있습니까? 마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과 같은 동렬에 있는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해야합니까? 겸손하게 생각을 해야 하는 거요. 우리에게 있어서 함부로 계시를 받을려고 않는 것과 또 감각적으로 오는 것이 우리의 가지고 있는 연약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될 수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해요.

바울 선생에게도 이 마게도냐의 환상은 환상 그 자체를 계시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해석했단 말이오. 해석할 만큼 마음에 준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우리를 부르신 것으로 인정했다고 했어요. 이것이 부르신 것이다. 그런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자면 그 의미를 해석한 거요. 그래서 이런 우리를 인정했다는 중요한 사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해요. 어떻게 바울은 이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여기 이 기록에서 그리고 바울 선생이라는 그 인물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찾을 수 밖에 없어요.

이미 시간이 많이 갔으니까 오늘은 이만큼 하겠습니다. 기도하시지요.


거룩하신 주님이여.

사랑하시는 주님이 저희에게 크신 사랑으로 성신님의 가르치심이라는, 빛을 비추심이라는 큰 사실의 은혜가 있게 하시고 저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말씀에 의하여서 그 가르치심을 받아 가지고 당연히 우리들 자신의 양식이 되어서 건전하고 충일한 인격적인 능력을 보유하게 되어 가지고 거기에 의하여 저희의 길을 열어 주시는 대로, 눈 앞의 문제를 제출해 주시는 대로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고 또한 걸어가야 할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을 저희가 믿사옵고 이와같이 모든 것을 주장하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들 모두가 주의 거룩하신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의 도리를 바로 배우고저 이제 주의 말씀에 의하여 상고하고 있사오니 성신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여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거룩한 도리 안에서 건강하게 서서 살게 하시고 기괴한 일을 하는 일이 없게 하시며 건전하고 건실한 인격자로서의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주여, 앞으로의 시간에 더욱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 오묘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성신의 역사 제8강(사도행전 22장12-21절)


오늘 아침에 우리가 성신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에 관한 성경 말씀의 도리를 계속해서 생각했는데 아침에 시작한 강설이 완결을 못보고 그대로 있으므로 오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 16장에 있는 6절로부터 15절까지에 있는 말씀을 아침에 읽고 거기에 의하여서 바울 선생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난 환상을 보고 그의 청하는 말을 듣고 이에 마게도니아로 가고저 힘썼는데 그 힘쓴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줄로 인정한 까닭에 그랬다고 했어요. 그 환상 자체를 인정하든지 해석하는건 환상을 본 사람의 일이 올시다. 환상을 보았을 때 그것을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지난 번에 배운대로 베드로는 네 귀를 맨 보자기가 내려와서 그 안에 여러 짐승이 있는걸 잡아먹으라는 환상을 보고도 무엇인지를 잘 몰랐고 뜻을 알려고 궁리를 하고 있었지요? 나중에 고넬료의 집에 간 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 바울 선생은 이때에 환상의 의미가 드로아에서 이러고 주저하고 있을게 아니라 마게도니아 땅으로 향하여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으로 해석한 까닭에 이에 일행이 거기서 마게도니아를 향해서 갔어요.

그러면 이와같이 어떤 환상이었든지 어떤 감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준 것이든지 뭐 꼭 환상이 아니드래도 우리가 어떤 본 것, 들은 것 또 우리 스스로 생각한 것 이런 것들이 성신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서 나가는 사람에게 그 사람에게 자격과 장성의 분량을 따라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오. 그러고 또 하나는 그러한 독특한 현상에 대해 들은 것이라든지 본 것이라든지 깨달은 것이라든지 생각한 것이든지 심지어 꿈이라도 그런 독특한 현상에 대한 해석과 태도라는 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결정인데, 신앙이 옅은 사람이 덮어놓고 바울 선생같이 믿음이 높고 풍부한 크라이테리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해석같은 것을 마치 자기도 할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해서 함부로 묵시하기를 원하고 꿈보기를 원해서 한다면 오도(誤導)되기가 대단히 쉬운 것이올시다.

이제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어째서 그는 그 환상을 자기를 마게도니아로 부르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는가 라는 점이올시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니아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줄로 인정함일러라.” 이것이 사도행전 16장 10절 말씀인데 환상을 본 다음에 바울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결론을 내렸다 하는 이야기올시다.

그러면 이 환상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생각하십시다. 어째서 바울은 이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것이라고, 마게도니아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을까 할 때, 첫째 바울이 전도 여행한 생활기록을 보면 바울은 세번 전도여행을 했어요. 제 일차, 이차, 삼차. 일차는 바울 선생이 예수를 믿고 선 이래로 한 15년쯤 되어서요. 그런고로 주후 45년부터 48년까지 사이로 제 이차는 50년으로부터 53년까지의 사이, 비교적인 연대올시다만 대체로 어떤 일정한 시간이라는 걸, 시기라는 걸 우리가 상상해 가면서 하는 것이 늘 생각하기 편이합니다. 1년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게 큰 문제가 되는게 아니오. 제 3차는 54년으로 57년까지고 58년 이른 봄, 이른 봄이 아니라 겨울이겠지요. 정월에 나서서 돌아오기 시작해 가지고 4월에는 빌립보까지 육로로 왔어요. 그래서 무교절 지난 다음에는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와가지고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할려고 애를써서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붙들린 것이... 그 다음에 로마로 가게된 시초 올시다. 그래서 61년 60년, 그 겨울에 걸쳐서 그는 로마로 항해를 했는데 이와같이 세번의 전도 여행이든지 로마행이든지 다 바울이 평소부터 간절히 소원하던 바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예요. 전도 여행을 할 때도 그는 서쪽을 향해서 자꾸 전진을 했고 로마 가는걸 원래부터 마음에 소원을 한 바요. 이와같이 바울 선생은 복음을 가지고 동쪽으로 가지않고 북쪽으로 가지않고 혹은 남쪽으로 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쪽으로 마게도니아, 헬라 그 다음에 로마를 향해서 갔던 것이오.

그런데 이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은 바울이 아시아에만 국한되었던 발걸음을, 그러고 아시아안에서 빙빙 돌려고 하던 것을 성신께서 막으시고 예수님의 신 곧 성신께서 그걸 못하게 하시고 그 대신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여서 서진을 하게 만드신 것이오. 이 환상은 그런고로 그에게 있어서는 그의 전체의 생애와 역사를 놓고 볼 때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그 후의 발전의 역사를 놓고 볼 때는 지극히 중요한 발걸음, 역사적인 거보를 내디디는 일에 지침이 되어가지고 있었던 거요. 환상 자체에 대한 해석이 그렇다 말이오. 그러면 환상이 없었더면 해석이 없었을 터이니까 이 환상이 그에게 이렇게 임하게 하고 그것을 바로 해석해서 그래서 복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아시아 사람들의 세계에서만 왔다 갔다 하던 그가 이제 헬라의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로마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자꾸 전진하게 된 거보를 내디디는 것이오.

이런 획시기적인, 아주 역사를 긋는 큰 걸음을 하는 바울의 자태야 말로 당당한 개선장군과 같이 움직인건 아니오. 만일 로마 어떤 장군이 군대를 끌고가서 어떤 지방을 정복했으면 그 지방의 이름으로 그에게 봉작(封嚼)을 하고 그를 로마시에서 화려하고 찬란하게 큰 개선식을 해주고 그때에 연도에 수많은 사람이 환호를 해주고 병거를 몰고서 빛나고, 빛내게들 갔을거요. 그렇지마는 그런 모든 것 다 합친 것보다도 위대했던 큰 발걸음은 이제 복음이 주로 유대 사람들과 아시아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대로 갇혀 있던 데서 일단 터져 나가 가지고 에게해를 넘어서 저쪽 마게도니아와 아카이야 즉 헬라 땅, 다시 아드리안 바다를 너머서 로마로 나가는 최초의 큰 발걸음 이었어요.

그는 자기와 실라, 디모데, 누가, 이렇게 아마 성경책은 큰 두루마리니까 짊어지고 말을 타고 갔었는지, 걸어갔는지 아마 배타고 가서 다시 거기서 말을 구입하기가 어려웠더면 바로 육지에 내려서 빌립보까지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오. 누가 보든지 길가는 나그네 한 너덧 사람이 그리고 터벅터벅하고 들어오는 걸로 보았지 그게 전 세계에 군림할 위대한 큰 세력과 능력과 영광의 전진의 자태라고 아무도 몰랐을거요. 그러나 그건 사실상 역사로서는 너무나 큰 거보의 자태올시다.

그는 그이의 당대의 세계를 시찰을 할 때 관찰을 하고 있을 때 어떻게 보았는가? 먼저 바울 선생이 본 세계관이란걸, 또 관찰이라는걸 따져 보아요. 둘째는 그는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 두 가지를 항상 중요히 가지고서 자기의 지금 현재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렇게 그 사실을 거기서 정해요. 이렇게 해서 이 세 가지의 조건 하에서 주께서 지금 자기를 쓰셔서 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고 그 다음에 그 동안에 제 일차 전도 여행, 제 이차 여행은 지금 이제 시작한 터예요. 겨우 수리아 안디옥에서 북행했다가 서쪽길로 소아시아로 들어와서 길리기아를 지나서 길리기아로 왔다가 지금 왔다 갔다 하다가 무시아 앞에서 결국 드로아로 왔던 것 뿐이라 말이오. 그러면 일차 여행과 금번 지금까지 온 (이차)여행 가운데서 그는 주님의 뜻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서 주님은 무엇을 재가(裁可)하시고 무엇을 재척(除斥)하셨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만한 재료를 놓치지 않고 가지고 있었을 것이오.

그러면 무엇을 재가하셨냐 할 때 일차 여행의 사실 몇 가지를 중요하게 보십시다. 일차 여행은 45년부터 48년까지 사이에 한 것인데 주로 이 소아시아 땅에서 했어요. 먼저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로 서쪽으로 나와서 수리아 안디옥의 해항이 되는 입구의 항구가 되어있는 실루기아로 왔어요.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그냥 바로 건너서 구브로 섬, 살라미로 갔어요. 구브로섬의 동쪽에 있는 항구요. 살라마에서부터 섬을 통과해 가지고 섬서쪽에 있는 섬 수부 바보에 이르렀어요.

바보에 이르기 까지는 그렇다 할만한 특이할만한 것이 없었지마는 일단 이 구브로의 수부인 바보에 이르러서 로마의 원로원이 보낸 총독 써기우스 폴루스(Sergius Paulus),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이 이 구브로섬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또 진리를 간곡하게 알아 보고자 하는데, 그 사람 측근에 엘루마라고 하는 박수가 붙어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하는 것이 훌륭하고 자기야 말로 하나님의 사자라고 자기를 과시하고 있다가 바울의 일행이 --그때는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 요한이 같이 갔는데-- 바울의 일행이 거기에 이르러서 도를 전하니까 그게 무엇인가 하고 서기오 바울, 이 총독이 알아 보고자 하는 것을 자꾸 방해하고 모르게 하니까 바울 선생이 마침내 그걸 보다 못해서 그를 붙들어 놓고 엄책을 했어요. 공의의 원수, 엄책을 했어요. 이 엄한 책망을 들은 엘루마에게 마지막에 무엇을 바울 선생에게 증거를 주었느냐 하면 네가 이제 잠깐 해를 보지 못할것이다 했더니 과연 갑자기 눈이 멀어 가지고서 나갈 곳을 두루 사람의 도움을 청하면서 찾았다 그말이오. 무서움에 질려가지고...

이걸 물론 총독도 보았고 바울 선생 자신도 그걸 보고 주께서 우리의 전하는 일과 전진해 나가는 일에 권위로 보증하신다는 걸 믿었을 것이라 말이오. 그건 그에게 중요한 경험이오. 깊이 주님을 권위로써 우리의 일을 보증하시고 함께 하신다 하는 걸 믿었어요. 이 코스(course)를 정한 것은 자기네였고 기도하고 맘 가운데 이렇게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그러고, 바나바로 말하면 원래 구브로로 한번 가는 것이 자기에게도 여러가지로 편이하겠다 생각하고 아마 갔겠지마는 그러나 이 방향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열납이 되어서 앞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발전의 형태를 지리적으로 어디로 취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나가는데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말이오.

매사 이런 일이 오다가다 닥치는 데로 가는게 아니오. 어떤 치밀한 생각 가운데 또 치밀한 관찰 가운데, 또 얻은 바 경험이라는 것을 소중히 여겨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늘 찾는 것이 신자, 성신의 가르침을 늘 받기를 원하는 사람의 생활 태도인 것이오. 이것이 이 엘루마가, 박수가, 그냥 판수가 되어가지고 혹은 청맹과니가 되었는지도 몰라요. 갑자기 안보이고서 그냥 두루 나갈 곳을 찾으니 이것이 13장 8절로 12절에 있는 말씀이오.

그 다음에 바보에서 배를 타고 북행을 해서 소아시아 땅 밤빌리아 버가에 도착해 가지고서 거기서 바로 북쪽으로 쑥 비시디아 부근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비시디아 안디옥이라지만 비시디아 땅에 있는 건 아닙니다. 바로 그 주변에 있어서 안디옥하면 수리아에 안디옥이 있으니까 이 비시디아 안디옥이란 말을 붙였는데... 거기에 가서 두 안식을을 지내게 되었어요. 첫 안식일에 이야기하니까 다음 안식일에 다시 와서 이야기를 하라고, 그래 가지고 그 다음 안식일에 그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이 핍박을 하므로 떠나서 이고니온으로 간 것이 그 다음 기록입니다. 이고니온에 이르러서는 오래 유하고 있었다고 14장 3절에 이야기해요. 거기서는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다시 거룩하신 신령한 능력으로 초 비상한 그 섭리로, 특별한 섭리요. 그들과 같이 하시사 보증하신다는 걸 의미하는 거라 말이오.

그들은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이 양분이 되어서 바울과 바나바를 좇는 그룹이 있고 그걸 방해하고 있는 유대 사람들을 좇는 그룹이 있어요. 유대 사람들이 화가 나니까 나중에 폭도를 일으켜 가지고 돌로 치고자 하니까 그만 두 사도가 그것을 알고 거기서 도망해 나갔다 그 말이오. 그래서 이고니온서 도망해 나갔어요. 가서는 어디로 갔느냐 하면 이번에는 루스드라로 내려 왔어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차례차례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루스드라지요. 이 루스드라로 오니까 나면서부터 좌객(座客)인 사람이 있어요. 발을 못쓰는 사람, 이 사람을 나수운 것이 빌미가 되어 가지고 루스드라 사람들, 루스드라 사람들은 특별히 감정이 잘 격한 사람들이오. 오늘날 프랑스 사람들하고... 그런데 그런 고올(Gaul)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그만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고서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임했다 해서 바나바는 키도 큼직하고 풍신이 잘생겼으니까 주신 제우스라고 그러고 바울은 말을 잘한다고 해가지고 헬 메스, 머큐리(Mercurius), 이렇게 해서 막 화관을 가져오고 제사를 드릴려고 소를 끌어오고 제물을 바치려고 신 앞에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옷을 찢고 나가서는 “형제들아, 이런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고... 이제 나와서 이 도를 가르치는 데 무슨 짓이냐고 겨우 뜯어 말렸어요.

뜯어 말려서 좀 그래서 그냥 두고 말았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아래로 쭉 내려온 유대인들이 저자들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하는가 보자, 보니까 사람들이 막 환호를 하고 야단을 내고 제사를 드릴려고 하니까 시기도 나고 둘째는 저것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꾸 문제가 커지겠다 하고 거기서 당을 짜 가지고 사람들은 초인해서 그만 바울을 돌로 쳤다 말씀이오. 그래 돌로 쳐가지고 바울이 그냥 맞아서 거기서 죽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죽은 줄 알고 그놈을 질질질 송장을 끌어서 성 밖에다 내치고 가버렸다 그말이오. 그랬더니 밤이 되어서 제자들이 죽어있는 바울곁에 둘러 있으니까 바울이 벌떡 일어나 가지고 즉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서 그렇게 돌로 맞아서 죽었으리라고 인정할 만큼 맞았는데 그냥 벌떡 일어나서 다시 성내로 들어가 가지고 잠깐 거기서 수습을 한다음에 거기서 떠나가지고서 이고니온 안디옥, 그래 가지고 안디옥에서 남쪽으로 쑥 바닷가로 가까이 내려오면 버가, 밤빌리아 버가요. 그래서 앗달리아라는 거기가 항구인데 그 앗달리아에 가서 배를 타고 돌아 왔어요.

이것이 제 일차 여행 때 기록인데 바울로서는 굉장히 큰 경험을 한 시기요. 하나님이 그 초자연적인 특별한 섭리 즉 기적이라는, 기사라는 큰 섭리의 보호와 보증을 가지고 그에게 응락해주셨다는 경험을 생생하게 했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절처(絶處)에 이르렀을 때도 하나님이 크신 손으로, 기이한 손으로 보호하셔서 그를 살리사 앞으로 두고 쓰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말이오. 이렇게 해서 바울 선생에게 있어서는 제 일차 여행의 사실을 그가 가지고 있는 사명에 대한 중요한 보증이 되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그 사명감이란걸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얻기 시작했느냐 하면 다메섹 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그 시간부터 새로운 사람이 되면서 그가 다메섹의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 가지고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데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율법의 의로 말할 때는 경건하여 모른 유대사람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그의 눈에 안수를 함으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소경이 되었던 바울이 보게 되고 그러고 아나니아가 이야기 한 것이 있어요. 이런 바울 선생의 개심, 혹은 회개의 기록은 사도행전에 3번 나오는걸 여러분 아시지요. 하나는 그 기록 그대로를 누가가 쓴 것은 사도행전 9장 1절로 19절에 있고, 또 하나는 바울 선생이 58년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루살렘에서 폭도에게 붙들려 가지고 시끄러운 일이 일어나니까 천부장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그를 빼가지고 갔다가 영문 안에다 가둔 다음에 그를 나중에 심문을 한 일도 있는데 그 때 자기가 로마 시민인걸 이야기해서 나중에 가이사랴로 보낸 것을 여러분 아시겠지요.

그때 그는 폭도들이 야단내는 것을 천부장이 빼돌려 가지고서 하도 사람들이 막 소란을 하고 들어와 가지고 에워싸니까 할 수 없이 막 군인들이 바울 선생 몸둥이를 위로 쳐 들고 그러고 겨우 폭도들 사이를 빠져서 천부장 영문으로 들어 왔어요. 그러니까 천부장보고 내가 이 사람들 한테 말을 좀 하게 허락을 해달라고 해서 그래서는 결국 아, 네가 헬라말을 아는구나 하고서는 네가 옛날에 자객을 데리고 나갔던 그 사람 아니냐고 그것이 좀 얼마전에 있었던 반란 사건을 생각해 가지고 물어본 일도 있지요? 어쨌든지 그는 층계에 서서 자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유대 사람이지 그런 이방 사람이 아니다는 것과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니까 작은 고을 사람이 아니다고, 이런 것이 22장 1절로 21절 가운데 있어요.

거기도 오늘 우리가 읽은데가 그 연설의 중간 부분부터예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왔던 부분부터를 오늘 여기서 낭독을 했는데 거기도 볼 것 같으며는 그 후에 두번인데 첫째는 제 일차 방문 때가 35년경 바울 선생이 다메섹에 갔다가 아라비아로 왔다가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때가 35년경이오. 그땐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에서 교사 노릇을 하고 있으면서, 구제품을 걷어가지고서 예루살렘 교회로 다시 왔던때,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던 그 때, 그러니까 주후 한 44년경인데 그 때의 일인지 우리가 확실히 정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지 그는 아마 생각건데 35년인 것 같아요. 예루살렘에서 묵시 가운데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리고 이 폭도들 한테 자기의 사명에 대한걸 이야기할 때 하는 말이 “주께서 나더러 이르시기를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에게로 보내리라.” 이렇게 멀리 이방 사람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는걸 이야기해서 자기 사명의 내용은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걸 여기서 이야기했어요. 그러고서 마지막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의 회개의 상태를 좀 이야기 한 것이 26장 9절로 18절 가운데 있습니다. 그건 어쨌든지 우리가 이제 바울을 놓고 보십시다.

바울이란 사람은 원래 길리기아 다소 출생이올시다. 길리기아 다소라는데는, 길리기아는 여러분 소아시아 땅에 길리기아도가 있지요. 그 길리기아도의 다소라고 하면 당시의 로마제국 내에서 헬레니즘 문화와 학문의 부로서 가장 뛰어난 도시의 하나였어요. 가장 훌륭한 헬레니즘과 학문의 부가 어디냐면 애굽의 알렉산드리아고, 또 하나 위대한 철학과 학문의 부가 어디냐 하면 저 아카이야의 아덴이고 또 하나가 길리기아의 다소였어요. 그래서 오늘날로 볼 때면 훌륭한 고등학문, 즉 대학이라는 것이 거기 있어서 준총(俊寵)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오. 생각컨데 바울도 거기서 공부를 했던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고로 그의 성부(성富)한 지식과 또 잘 연마된 지적인 활동이 여기 있었던 거요.

그리고 그러한 굉장한 데서 유대 사람의 지식으로 나서 그는 바리새인이오, 동시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그 천부장이 공회 앞에다 세웠을 때 거기에 공회원들 보고 자기가 자기의 신분을 이야기 할 때 말한 것이 23장 6절에 있어요. 그러면 자기도 바리새인이고 자기 아버지도 바리새인이다 그거요. 사람으로는... 그의 법으로는 나면서 부터의 로마시민이오. 그런고로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모양이지요. 이렇게 해서 인물로서 히브리 사람이고, 또 그는 위대한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오. 가말리엘이라고 할 것 같으면 당대에 히브리 헤브레이즘의 최대의 선생의 하나예요. 아마 가말리엘 당대에는 그가 가장 높았던 인물이오. 그래서 교법사 가말리엘이 공회에 일어나서 말을 할 것 같으면 그 말이 비중이 커서 늘 근청(謹聽)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때에 예수님 당시나 바로 전에 그때 유대 사람들의 사회에 학문의 사회를 들여다 볼 것 같으면 가장 위대한 교사가 힐렐(Hillel)이라는 교사가 있었고 그래서 그 이를 높이 사모를 해서 그의 위대성을 모세 이래로 최대의 선생이라고 높일만큼 위대했던 인물이오. 그의 교훈이란 항상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것이오. 그리고 번문욕례적이 아니라 그말이오. 거기 비교해선 예문이 또 우리 한국식으로 보면 예문의 의식을 가장 강하게 잘 가르치는 샤마이(Shammai)라는 선생이 있어요. 이 두 할파가 죽 내려오지만 힐렐의 학파가 압도적으로 큰 세력과 영향력을 미쳤는데 이 가말리엘은 힐렐학파의 후계자로 또 일설에 힐렐의 손자였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한 이한테 히브리학의 정통을 공부하고 또 히브리적인 정신을 가장 정신적이고 심오한 철학적인 것을 체득하려고 한 사람이오. 그것이 계율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그 큰 사상을 전해 주는 것이오.

예를 들면 힐렐이 가르친 도리 가운데는 누가 가장 부요로운 사람인가? 세상에 부자라 하는 사람이 많지만 누가 가장 부요로운 사람이냐? 자기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요로운 사람이다. 이렇게 하는 가르침이 있어요. 이러한 식 교육, 말하자면 실질적이고 심오한 내용을 가진 정신적인 교육을, 헤브레이즘의 진수를 가말리엘에게 받은 사람이오.

그러나 그는 나면서부터 가말리엘에게 가기까지 가말리엘에 가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기까지는 다소의 헬레니즘의 그 가장 난숙(爛熟)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오. 이렇게해서 헬레니스트요, 가장 강렬한 헬레니즘을 또한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감수성이 예민하고 또한 풍부한 지력을 갖고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던 그는 그걸 잘 흡수한 사람이오. 거기에 헤브레이즘의 정통과 정신을 또한 흡수한 사람이오. 그런고로 그이는 자기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 생이란 그것도 22장 3절에 말하고 또 그이가 가말리엘의 문하였다는 것도 그 자리에서 이야기 했어요.

그는 그런고로 헬라의 세계 헬레니즘의 세계라는 걸 아주 숙지하고 있었고 헤브레이즘이 가지고 있었던 약점과 강점을 잘알고 있었던 사람이오. 그가 자기 스스로를 말할 때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다. 내 족속을 말하면 베냐민족이다. 베냐민족하면 최초의 이스라엘의 임금을 낸 족인 까닭에 항상 고귀한 족이라고 존경을 받았던 족이오. 나는 베냐민족이다,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다, 내 열심으로 말한다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게 기독교가 처음에 나올 때는 조상의 유전에 위반이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난 반대하고 사람을 잡아다 옥에 가두고 한 사람이다. 그만큼 앉아서 잔소리만 한 사람이 아니고 또 적극성을 띠고 불의에 대해서는 직접 전선에서 싸운 사람이라 그거요.

그것이 그 사람이 지금 어떠한 인물인가? 인물을 아는 데에 몇가지의 생각할 조건이고 그가 처해있는 시대는 어떤 시대냐 하면 줄리어스 씨저, 율리어스 케자르가 로마제국의 기초를 닦아놓고 그의 후계자인 오거스터스가 비로소 황제로서 임페레토(Imperator)라고 해가지고 존엄자 오거스터스, 존엄자, 명령자로 떡 서서 거기서부터 엠퍼러(empero), 황제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명령자로 서서 그래서 아주 엄위가 있고 존엄하고 권위가 있는 로마제국을 제국다운 제국을 건설했더라 말이오. 이 로마제국 건설당시에 그 초대 황제인 오거스터스(Augustus) 실질상 로마제국의 제 일대는 그의 선배인 줄리어스 씨저요. 그는 황제라고 자기가 존칭은 아니 했을지라도 실질상 황제의 모든 기초를 닦고 권위를 다 쥐었던 것이오.

그러니까 보통 로마제국을 말할 때 율리우스 게사르, 씨이저부터 시작을 하지만은 좌우간 우리 주님은 이 오거스터스 때, 가이사 아우그스라고 하는 오거스터스때 났던 것인데 바울도 그때에 났던 사람이라 그말이오. 아무리 연령을 더 많이 해보아도 적게 해보아도 오거스터스때 난 사람인 것이오. 오거스터스는 주전 31년으로부터 주후 14년까지 산 사람이니까 그안에 바울이 났던 것이오. 오거스터스 지나서는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라는 황제가 무난하게 그 제국 창업한 제국을 잘 지키고 나갔어요. 그 다음에 나온 갈리굴라(Caias, AD 37-41)가 있고 그 다음에 클라우디어스(Claudius, AD 41-54)가 있고, 그리고 네로(Nero, AD 54-68)가 있는데, 이런 황제들이 있는 동안에 그는 살았어요. 즉 다섯 황제의 기간동안 그는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서 살았던 것이오.

그러면 로마제국을 지금 건설해서 창업의 그 찬란한 영화와 위대한 능력, 창업을 했으니까 위대한 능력을 가진 시간이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가지고 있는 세계 정책에 의해서 헬레니즘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해 들어가는 것, 즉 배척하지 않고 그걸 짜부러뜨리지 않고 그걸 풍부하게 받아드려서 자기네 것으로 삼으려고 오고 거기에 라틴족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질서와 군대와 법률이라는 걸로 그리고 정치라는 걸로 찬란한 제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지금 앞으로 더욱더욱 융성시키려 전진해 나가던 그런 시대에 바울 선생은 태어나서 호흡을 하고 보고 있었다 말이오. 퇴폐와 타락의 시기가 아니오. 융성과 창업의 시기였어요. 그러기에 여기서 기독교도 시작을 했어요. 그 생애를 통해서 창업의 로마의 제국의 화려한 것, 그것을 보아가면서 지냈던 것이오. 그런고로 이 로마의 문화란 헬라의 헬레니즘의 문화와 로마의 이 질서와 군대와 법과 정치와 그 번영을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바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 해가지고 일단 점령한 자리를 능력있게 통치를 하므로 로마제국 판도 사방에서 어디서든지 분란이 나서 괴로운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단속하고 철과같은 손으로써 누르고 있었다 말이오. 당시의 문화와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의 총 중심지는 말할 것도 없이 로마시예요. 메트로 폴리스(Metro Police)라는 로마시라 그말이오.

그러면 바울 선생은 이방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큰 사명을 느끼면서부터 내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려면 이방 어디를 향해야 하겠는가?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지 다 이방이오. 유대사람들이 아니면 히브리 사람들 아니면 이방이오. 그런데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할 때에 그는 어디를 향했는냐 하면 서쪽을 향했더란 말이오. 그는 복음의 선전에 가장 중요한 기지로서 또한 복음이 나타내고 있는 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비교적 잘 갖추어 있는 자리로서는 헬레니즘의 찬란한 문화와 로마의 위대한 정치, 경제, 군대와 법률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어떠한 건강한 사회가 필요했더라 말이오. 그래서 그는 그런 건강한 사회에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오. 그러면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는거요.

그리스도 교회의 복음, 바울 선생이 전한 복음, 그것을 바울 선생은 잘 이해를 했고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성격, 또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그 인류에게 관계되어 있는 성격을 잘 알고 있었어요. 대인속죄로 말미암은 구원과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는 이 큰 진리의 사실이 그 속에 들어가서 나타낼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거룩한 보편의 교회를 또한,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사회적인 결속과 활동을 통해서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말이오. 정신적이고 심오한 진리의 내용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면에서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 이 복음에 있는 그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뭐냐하면 그 첫째의 한가지는 보편성이라는 거요. 복음이 가지고 있는 유니버셜리즘(universalism)이라는 것이오. 인종과 국경이라는걸 무시하고 방언을 무시하고 문화의 정도를 무시하고 어디까지든지 사람이 사는 곳에는 구원의 복음은 전달되어야 한다는 이 사실이오. 또 그래서 조성된 거룩한 교회라는 것은 실질상 바울 선생이 쓴 글에 의하면 하늘에 있고 땅에 있어서 이 보편이라는 것은 보통 다만 이 지구상에서 널리 퍼져있는 정도가 아니라는 거요. 하늘에 있고 땅에 있는 이 교회라는 것은 땅 위에서 인종이라든지 언어라든지 문화 형태라든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국가라든지를 넘어서 늘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국경을 넘어가는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만일 국경을 봉쇄하고 넘어오지 못하게 할 때는 그 봉쇄한 것을 뚫고 넘어갈 수 있는 더 큰 세력이 필요한 거요. 쇄국했던 나라에 복음이 들어 갈려고 할 때는 쇄국을 부수고 개항시키고 개화시킨 그 국권이 움직일 때 함께 복음이 들어갔던 것을 여러분 아실 것이오. 이것이 중국에 복음들어 올 때의 현상이었고 한국에 복음들어 올 때 현상이오. 한국이 1884년에 엘렌 의사가 와서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때 이조 정부의 말기 때인데 그걸 허락지 아니 했어요. 그러니까 광해원을 만들어 놓고 앓는 사람을 낫게 하다가 갑신정변을 당해가지고 민중전이 그 사랑하는 조카 민영익이가 칼에 맞아 죽게 되어 있으니까 다른 것으로, 아무리 한의로 해보아도 안되니까 데려다가서 수술도 하고 약을 발라서 잘 낫게 해주니까 그것 때문에 왕비가 고맙게 여겨서 상을 내려야 하겠다고 하니까 다른 상은 필요없고 내 소원을 들어 주시라고, 소원이 뭔가 했더니 서양에서 선교사를 불러 들여와서 전도를 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 서양 선교사 들어오는걸 그 때 용인을 했다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때의 전체의 정치 정세가 움직이는 까닭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다 되어 있지만 이렇게 해서 그 이듬해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1885년에 처음에 한국에 들어와서 전도하기 시작하고 이렇게 해서 밀려들어오는 외세라는 것 때문에 개화할 수 밖에, 문호를 개방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예요. 일본은 어떠 했습니까? 양이(攘夷)를 할 것인가, 오랑케를 쫓아 낼 것인가 개항을 할 것인가 페리가 군함을 가지고 막 들어와서, 우라가에 들어와서 개항을 해라 하고 덕천막부(德川幕俯, Takigawa)때 마지막 장군에게 교섭을 하니까 최후 단안을 내려서 개항을 하고 그러고 들어왔기에 한국보다 빨리 서양 서구라파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기독교도 우리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왔어요.

그러면 이와같이 세계 국경을 넘어 서는 것이 복음이라고 하지만 복음을 든 사람이 국경을 넘을려는 것은 용이한 것이 아닌 것이예요. 여기 필요한 것은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국가적인 권위의 배경과 실지 세력이 뒤에 필요하다 그 말이오. 바울 선생은 그의 영민한 추리력이라든지 상상력으로써 현실 문제라는 것과 복음이 요구하는 이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 사람이오. 그런 위대한 지도자였고 인물이었던 것이오. 이렇게 해서 유니버설리즘(universalism)이라는 것은 땅 위에서라도 거룩한 복음은 널리 퍼져야 하겠고 퍼지기 위해서는 퍼질 수 있는 중요한 추진력의 본부가 있어야겠다, 중심 세력이 항상 있어야겠다는 걸 생각했다 그 말이오. 그는 그 중심세력이라는 것이 기독교인들 끼리 모여 앉아서 많이 모아 앉아서 세력을 만들자는 그런 의미가 아닌거요. 무엇이 복음을 실어서 보낼 수레가 되려는가 보았다 그말이오. 이걸 볼 때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이 로마제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세력을, 거기다 복음만 실어 놓으면 이건 퍼져서 저 북족으로 브리테니커와 저쪽 브리톤으로도 나가고 고올(Gaul)로도 나가고 어디로든지 퍼져 나갈 수 있다 생각했다 그말이오.

그런데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보다 더 긴박한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기독교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도의 문화성을 가지고 있다는걸 바울은 자기 자신이 신학을 엮으면서 말한거요. 고도의 문화성. 진리는 깊고 오묘해서 간단한 A, B, C로 모두 알아 듣는 것이 아니고 쉬운 말 몇마디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연구를 요하는 것이다. 야만의 사회에서는 찬란한 꽃을 피기는 어려운 것이다는 말씀이오. 기독교가 야만의 사회에 들어가면 그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로 들어 갔을 때 그 사람들을 점점 개화는 했을지언정 그 사람들의 그 상태, 문화의 옅은 비천한 정도 그것 그대로해서 꽃을 피우지는 않는다 그말이오. 비천한 사회는 비천한 종교가 있는거요. 사람들이 미신에 젖었고 그러고 잡된 사신 우상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사신 우상이 와서 난무를 하는거요. 무당이 와서 난무하듯이... 고도의 사회, 이지적이고 고학적이고 문화적인 사회에 당하느냐면 당치 않는 이야기요.

그러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고도의 문화성이란 것, 비류없이 높은 문화성이라는 것, 그것은 그 자체가 문화적인 사회를 요구하는 거요. 문화적인 사회로 들어 갈수록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자태는 찬란하게 나타나 뵈는거요. 그 천리(天理)의 깊은 것을 진리의 깊은 것을 더 흡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야 하겠고 또 거기에 의해서 인생의 여러가지 문제를 심오하게 파고 이야기하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사회 현상을 가진 데라야 하겠고 인생의 가능성, 뭐든지 잘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집성해 있는 곳 이런 것은 고도의 문화 사회라는 것이오. 오늘날 세계의 대도시를 보세요. 뉴욕을 쳐다봐요. 런던을 쳐다봐요. 거기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과학적인 정예(精銳)가 거기에 모여 있고 동시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인간 악의 극치라는 것은 저런 것이다 라는 것을 뵐 수 있는 것들이 모여 있는거요. 이런데에서 복음의 대답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제출되는 문제 앞에 대답이라는 것도 나오는거요. 저런 현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는 무엇으로써 대답하는가를 보여주는거요. 이런 사회 문제 하나를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그런 현실 앞에 서서 어떻게 서가는 것인가를 실증해야 할 것이란 말이오. 그러며는 필연적으로 이렇게 고도의 문화성을 가진 기독교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깊고 높은 진리와 비류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그런 복음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첫째, 그 우주관에 있어서는 절대 주권자의 주권 행사 아래 만물이 일사불란하게 질서를 유지하고 그걸 질서 안에서 우주의 만상은 운행되고 있는 것이올시다. 그 다음에 그 역사성을 볼 때에는 높고 높은 법칙하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늘 창조되고 진행되게 되는 것이며 또 그것은 아무 목적없이 맹목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빛나고 높은 목적을 향하여 만유를 통어(統御)하고 사역해 나가시는 것이고 거기에 있는 높은 도덕성은 순결하고 고상해서 그 높은 사상, 높은 예술성 그런 것들 모두다 기독교 자체가 나타나 뵈는 것이오. 여러분, 기독교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가장 고귀한 예술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고귀한 도덕의 표준들을 찾을 수 있고 인류에게 있어 위대한 목적이 무엇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을 보았고 그 역사는 어떤 고귀한 법칙 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고 우주라는 것은 일사불란히 최고의 권위자 아래서 시장의 권위자 지극히 높으신 권위자, 엘 엘리욘(ןוילא לא) 앞에서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배운다 말이오. 얼마나 고도의 문화성을 가진 사상의 내용인가요? 이것이 야만의 사회에서 그 정화를 나타낼 것이 못되고 가장 높은 문화와 교양을 가진 사람들의 사회에서 비로소 금과 같이 빛날 수 있는 내용이올시다.

그러기 까닭에 여러분,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의 그 거룩한 내용이라는 것이 찬연히 빛날려면 사람들이 무지한 가운데 그냥 주저 앉아서 안되는거요. 사람들은 훨씬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고도한 위치로 자꾸 올라 가야 하는거요. 훌륭한 교회가 될려도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개인 개인이 고상한 인격자들로 구성이 되어야 하는거요. 적어도 그게 코어(core) 멤버가 되어가지고 움직여야 되는거요. 항상 비천한, 아주미말적인 말단적인 도덕 문제 가지고서는 이러고 저러고 논할 그런 타개할 만한 위치에서 저회(低回)를 하고 있어가지고 고도의 교회가 되지 못하는거요. 이러한 고도의 문화성을 볼 때에 복음의 참된 빛은 세계의 인종들 가운데에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데에서 비로소 그 바른 자세를 나타내게 될 것이 자명한 이치올시다.

바울 선생에게는 그런 사회는 어디냐 할 때 빅토리아나 엘람도에 있는 것이나 이란이나 애굽의 도시가 아니고 헬라의 로마의 세계로 봤다 그말이오. 헬레니즘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문화성을 봤어요. 깊은 철학을 보았어요. 로마가 가지고 있는 잘 통제되어 있는 질서를 보았고 그리고 건설할 수 있는 박력을 보았다 말이오. 그리고 그게 재패한 나라요. 패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요. 그러면 거기다가 복음을 실어 놔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 말이오. 그래서 세계의 신약의 복음이라는 것은 최초의 선포지인 예루살렘에서 마치 못자리에서 모를 옮겨다가 심듯이 합리적으로 옮겨심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그러냐? 예루살렘은 어느덧 바울 선생이 활동하던 그 시기에 문제가 있는 도시가 되었어요. 그 문제라는 것은 유대주의의 철벽으로 둘러쌓는 도시가 되었다 말이오. 이것 없이 이방 사람에세 자유롭게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구상과 진리의 내용을 구애없이 퍼쳐나갈 도시를 향해서 그런 세계를 향해서 가야겠다. 바울 선생은 그것을 원한거요.

이 복음의 모라는 것이 어린 싹들이 이식될 곳은 지금 강렬한 팽창력과 발전력을 가지고 있느 헬레니즘의 세계요. 로마의 세계이었던 것이올시다. 그것은 바벨론이나 프러시아의 동방의 세계가 아니고 또한 일찌기 문화의 모태 노릇을 해주던 메소포타미아도 아니고 또한 애굽의 삼각주도 아니었다 말이오.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그 다음에는 로마요. 그리고 과연 그는 거기로 갔어요. 복음은 서진하여서 서쫏으로 전진해서 헬라와 로마의 세계에서 활짝 피어나야 할 것을 그 비젼(vision) 속에서 그는 보고 있었고 그러한 바울은 그러기 위해서 전도자로 뽑힌 자기가 당연히 복음을 들고 교회를 세우면서 서쪽으로 로마와 헬라의 세계를 향해서, 그 심장부를 향해서 전진해야 할 것이었단 말이오.

복음의 고도의 문화성에 대한 그의 정당한 이해와 복음이 가진 높고 큰 세계를 이 세계로 택하신 백성들을 듣게 하여 거기서 인류 사상이 찬연히 빛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출현케 할려고 하는 바울 선생의 이 정당한 세계관, 사관은 그의 사명의 수행지로서 헬라 로마의 세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올시다. 바울 선생의 이런 지식과 통찰력과 열정이 자기에게서 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그에게 그걸 열어서 깨닫고 그 사상이 점점 성숙해서 확고하게 되게 하신 것이올시다. 그는 오래전부터 성신의 가르치시는 큰 은혜 속에서 그의 고도의 사상과 관찰들이 형성되었던 것이올시다. 실로 성신님이 가르치신다는 일은 그 누구에게 있어든지 일조에 몇가지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보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생명의 양식으로 그 말씀을 먹으면서 자라나는 사람들은 그 동안에 벌써 성신님께서 당신이 그릇으로 쓰시기 위하여 적절하게 그들을 가르쳐서 함축있는 사상의 터 위에 확립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란 말이오. 이와같이 성신의 가르치심은 가르침이라는 것이 단편적이고 일조의 문제고 잠시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길게 그를 양육하고 교육하고 그에게 거룩한 사상으로서 점점 축성하게 축적하게 하시는 것이올시다.

바울 선생은 그러한 거룩한 정신 하에서 서쪽으로 갈려고 했고 그 일을 위해서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제3차 여행을 끝내고 올 때 배를 타고 마지막에 이 팔레스틴으로와서 드로에 내렸을 때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큰 환란이 거기서 기다린다고 말을 했지만 바울 선생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갔던 거예요. 그리고 그 다음에 가이사랴에 왔을 때는 일곱 집사의 하나인 빌립의 집에 들어갔더니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와가지고 바울 선생의 띠를 가지고서 자기 손은 묶고 장차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띠 임자를 이렇게 묶을 것이라고 말했는데도... 그러니까 그 일행이 다같이 거기 있는 사람들 앞해서 예루살렘으로 부디 올라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지 말라고,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는가? 내가 거기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죽는 한이 있더래도, 죽을지라도 나는 거기 간다. 그런 간곡한, 공고한 결심을 하고 들어 갔어요.

그러나 그는 거기에 가서 폭도에게 잡혀 가지고 이제 목숨이 어떻게 될려는지 천부장은 어떻게 할려는지 해서 천부장은 그를 심문해 봐도 모르겠으니까 공회에다 내놨었는데 공회에서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는 그 밤에 그날 밤에요. 사도행전 23장 11절 보면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이름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하리라.” 이것이 주후 58년 6월의 일인데 로마로 가기 전 한 2년이나 전일인데... 그렇게 로마로 갈 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때 이래로 바울은 항상 마음이 로마를 향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로마로 가야겠다. 끝까지 로마로 가서 일을 이루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러면 그가 그러한 정신과 또 그러한 사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큰 구상을 잘 이해하고 깨닫고 전한 그런 사상, 그런 사상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서쪽을 향해서 가야 한다는 정신 하에서는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았을 때 서진을 지금 해야 할 것인가? 자기 환경을 돌아 볼 때는 마게도니아에 가서부터는 지금까지는 무슨 말을 썼던지 유대 사람을 만나면 히브리 방언 즉 아람 방언을 썼겠고 일반 사람들을 만나며는 헬라어를 썼겠지마는 이제 저쪽으로 가면 거기는 아마 주로 헬라어가 많이 사용되는 것이오. 그러면 헬라어는 마게도니아 사람이 와서 청할 때도 헬라어로 이야기했을거요.

바울 선생은 자신이 나면서부터 자기 어학이 헬라어요. 말하자면 양 방언이란 말이오. 아람 방언하고 헬라어하고 또 성경을 많이 공부했으니까 히브리어하고 이렇게 하고 있었고 또 그는 로마에 가서 썼으면 아마 라틴말로 썼을거요. 이렇게해서 어학으로도 섬부(贍富)한 인물이오. 자기와 같이 가던 실라라는 사람도 -실바누스- 헬라어를 잘 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누가는 원래 아마 빌립보 사람일 거요. 헬라 사람이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 사람이오. 이렇게 해서 다 그 사람들은 어학으로도 무장 되어 있는 사람들이오. 그러기 까닭에 그때 드로아에서부터 바로 마게도니아 땅에 가서 전도를 시작하는데 어학에 지장이 없었다 그거요. 그것이 큰 지장이 될뻔 했는데 어학에 지장이 없이 자유롭게 가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마게도니아 사람이 오라고 하는데 그것은 덮어 놓고 아니다 하고 그래야 할 것인가? 준순(逡巡) 방황할 것인가? 지금까지 여기도 못가게 하고 저기도 못가게 하셨는데 이제 우리가 나가서 해야 할 곳은 어딘가? 결국 이 아시아(도)가 아니고 이 아시아 이외의 다른 어디로 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둘 중의 하나요. 일단 돌아가서 다시 출발을 않으면 여기서 그냥 전진을 하든지 그러나 자기네가 원래 나올 때의 예산대로는 그렇게만 하고 돌아 가려고 한 것은 아니오. 즉 못했으니까 이러고 주저앉고 있는 것이지 그런고로 자기네의 원래 소원대로도 상당한 여유를 두어두고 앞으로 많은 시일 동안 전도를 해야겠다고 나섰던 거요.

그러면 그들의 결론은 결국 마게도니아로 가자. 마게도니아로 가자. 이 환상가운데 마게도니아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는데 그게 하나의 자극이 되어서 우리가 마게도니아에 가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것이 바울 선생이 생각했던 것이오. 그래서 마침내 우리가 다같이 그럼 마게도니아로 가도록 해 보자고 의논을 해서... 왜 그러느나 하면 이 환상 가운데서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청한 것을 보며는 주께서 우리를 마게도니아로 보내사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려고 하신 뜻이 있는 것 같다. 이미 그런 것 같다는 정도에서 끝내지 않고 그것이 분명하리라고 생각했을 거요.

그것이 분명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다른 외증은 없어요. 그런 문제는 다른 외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대체로 성신께서 나를 지금 이렇게 가라고 하시는가를 확정 할려면 반드시 그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해요. 기도하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면 너희 속에 큰 확신으로 주셔 더 준순 방황하지 말고 나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이것이 보통으로 있는 일이오. 이렇게 해서 기도하는 가운데에서는 자기가 따지면 말이오. 아주 이지적인 사람이 잘 따지는 것이오. 만일 안 간다면 무엇인가? 안 간다면... 그러면 그 대신 어떤 효과 있는 일을 내가 하느냐 그걸 따지는 거요. 내가 만일 안 간다면 그건 결국 내가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에 대한 것을 의심하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걸 따지는 거요. 따진 결과 결국은 내가 믿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려고 하고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해 오고 저 서쪽, 저 세계를 향해서 갈려고 했으면 더 기다리고 자꾸 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나가자 하고 나갔어요.

그러니 바울 선생으로서는 그때에 50이 넘은 나이오. 이제는 적극적이고 가장 중요한 일을 해야 할 터인데 복음을 그쪽으로 이식하겠다는 큰 일을 이제 언제까지든지 유예하고 있을 것인가? 이제는 밀고 나가자. 아마 그러한 마음의 확신이 생겼을 거요. 그러기 까닭에 마게도니아 사람의 환상이 우리를 부른 그것은 하나의 자극이 되지만 요컨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가도록 정신을 한번 쇄신케 하시고 깨우치시고 또 생각하게 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현실에만 몰두해 있었다. 이 아시아에서 뱅뱅 도는 것으로 몰두해 있었고 항상 거기만 할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오. 일단 대륙을 바꾸자. 이제는 유럽 대륙으로 들어가자. 여기서 유럽대륙으로 들어 갈려고 새로운 생각을 한 거요. 자기네 생각하고 보던 시야를 돌렸어요. 넓은 세계로, 헬레니즘의 세계로 돌렸단 말이오.

이런 큰 비약을 하려고 할 때 물론 그에게 있어서는 생각할 여지가 있어야 하고 그런 생각을 여념이 없이 그냥 현실에 붙들려 매달렸던 것을 현실을 막아 놓으신 다음에는 좀 생각해라. 봐라. 너는 지금까지 무엇을 기도하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네가 준비가 다 되어 있고 나도 지금까지 너를 뒤에서 붙들어 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일을 준순하고 기다려야 하느냐? 아마 그랬을런지 몰라요. 그때 그 마음 가운데는 “아니다. 이제는 더 주저 할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는 헬레니즘의 새로운 대륙을 향해서 가자” 하고 떠났던 거예요. 그것이 결국은 주님께서 보증하시는 일이 계속해서 자꾸 일어나는 거요. 주님께서 보증해 나가는 일이...

그러면 이런 성신님의 인도하시는 그 인도의 방법일지, 혹은 인도하시는 모양, 양상이라는 것은 그게 단편적인 한 두 가지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그런 것으로 알아 듣지 아니한다는 것이오. 그건 나를 길러서 내가 충분히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동시에 성신께서 감화하셔서 어떤 문제 앞에 내가 방황하고 문제를 포촉을 하지 않고 있을 때 같으면 그것이 무엇이 됐든지, 환상이 됐든지, 꿈이 됐든지 혹은 현실이 됐든지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어가지고 좀 생각좀 해라. 오라! 너는 잊어버리고 있느냐 하고 할 때 “아, 내가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그 동안 잠시 현실의 여러가지에 너무 몰두해서 공연히 바쁘다가 잊어버렸구나. 이제는 더 중요한 것, 내 생애 가운데 더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 전진에는 더 중요한 이 문제를 생각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요. 마게도니아의 환상은 적어도 그에게 생각을 돌려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전진이 어떻게 되야 하겠는가? 너는 평소에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그런데 지금 너는 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고 그걸 힐란 하듯이 물었을 거요. 사실상 바울 선생으로서 가지고 있던 사상으로 봐서, 서진의 사상으로 봐서 선진을 했어야 해요. 진작 서진을 했었더라도 상관이 없었을 일이오. 아시아에서 자꾸 뱅뱅 돌 이유가 없는 것이오. 그리고 이 서진이라는 사실은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출발점이오.

그러면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뜻을 행한다 하면서 항상 너무 자기 현실이라든지 당면한 일이 자기를 압축해서 좀 더 중요하고 좀 더 크고 아니 그 보다 본질적인 일, 근본적인 일, 제일 강령이 되는 일은 뭐냐 하는걸 잃어버리기가 쉬운 거요. 그런데 너는 왜 그것이 가장 네 생애에 가장 강령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네 자신의 일은 열심으로 하기는 한다마는 네 전체의 주장이나 신념에 비출 때 모순되는 일을 하느냐? 주저 하고 저회되는 일은 하느냐 묻는거요. 마게도니아의 환상은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의 주의해서 생각지 아니했던 큰 문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역사적인 발전의 큰 단계에 대해서 다시 정신을 들여서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가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서쪽으로 보내셨다.” 그러고 떠났어요.

이것이 성신님의 인도하실 때의 양상인 거요. 이런 것은 대체로 하나의 퍠턴이오. 여러분들도 만일 성신님의 인도를 받아서 자기 생애의 길을 갈려고 할 때는 그런 문제, 어떤 중요한 문제 앞에 이를 거요. 그런데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문제와 자기가 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서로 맞지 아니할 때가 있는 거요. 그런때 기도하고 당연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전진하도록 하시는 거요. 이런 것을 우리는 우리 생애 가운데서 경험하기도 할 것이오. 중요한 것은 항상 성신님의 인도는 먼저 할 것은 먼저 시킬려고 그러고 중요한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하시고 아주 큰 문제를 지역 말단의 문제보다도 먼저 앞세우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거룩하신 주님이시여. 주께서 저희를 부르사 주님의 크신 계획 안에 두시고 일을 이루실려고 하실 때 저희들은 멍청하고 어리석어서 관견하고 동굴속에서 제것만 생각하기 쉽사오나 때를 따라서 자극하시고 눈을 여셔서 새로운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을 믿사옵니다. 이리하여 저희들이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 가장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생각하게 해 주시고 시기 놓치지 않고 적시에 생각할 수 있게 하시고 이리하여 주저없이 이 크고 주님의 거룩하신 뜻에 합당한 길을 향해서 용기있게 전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들의 가는 길을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항상 목전에 구애되어 가지고 있으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못하는 데가 많이 있습니다. 원하시는 그 일을 향해서 용기를 가지고 주를 의지하고 발을 내 디딜수 있는 용기도 믿음도 확실하게 가지게 하시고 그러나 오판하게 아니하고 확실한 바를 판단하여서 움직여 나가게 합소서. 이러한 길의 작용에는 성신께서 힘 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러지 않고는 성신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사옵나이다. 저희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생각이 주님의 거룩하신 큰 뜻과 그 나라의 거룩한 경영과 계획에 비추어서 항상 바른가 혹은 인간적인 것인가 내 자신의 것에 불과한 것인가를 바로 판단하고 바로 서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홍전 목사/성약교회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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