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영성,기도

[스크랩] 영적인 (Spiritual Life) 삶이란 무엇입니까?

수호천사1 2018. 2. 14. 09:21

영적인 (Spiritual Life) 삶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인 삶이란 생각 (Thought)입니다

                       


성경이 말씀이라고 불리는 것은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이 생각들은 혼의 정신작용 (사고방식) 안에서 순환합니다.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어휘력이 없다면 그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삶을 즐길 수 없습니다. 성경의 어휘나 원리, 교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신자가 성경적 사고(思考)/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친밀한 관계를 결코 발전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감정에는 생각이나, 이성, 상식이 없습니다. 감정은 생각하고 결정 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라, 혼을 완전히 알고 이해하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정이 올바르게 기능할 때 그것은 훌륭한 것이지만, 감정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못하면 오히려 영적 성장의 주된 방해자가 됩니다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불안정하며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감정은 혼의 생각의 기능에 종속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으므로 우리는 생각에 의해 다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을 소유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분노나 후회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수사법 (rhetoric: 말이나 글을 꾸며서 보다 아름답고 조리 있게 만드는 기법) 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손, 눈과 같은 표현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간적 특성들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분노, 후회 같은 표현은 신인동감동정설(神人同感同情說)이라고 하고 반면에 하나님의 손, 눈과 같은 표현은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이라고 명명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에서 많은 문학적 기법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표현은 영원한 안전 보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문학적 기법입니다. 요한복음 10:28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 , 분노, 후회 같은 것들은 인간이 지닌 특성들입니다. 분노는 감정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노의 죄를 범하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후회는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시에 모든 것을 항상 알고 계시고 또 완벽한 분이시므로 결코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감정은 항상 변합니다. 감정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하나님이 감정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변하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그것은 생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2:16후반 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생각)을 가졌느니라.” 우리는 감정이 아닌 생각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베드로후서 3:18)

 

빌립보서 2:55입니다. 너희 안(너희 혼 안)에 이 마음(성경 말씀)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구절에 쓰인 헬라어 φρονω / phroneo”는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단어는 현재 시제, 능동태, 명령법으로 쓰였으므로계속해서 생각하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성(humanity)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라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성경 말씀)의 주요(선구자, 설립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영적 생활의 시범을 보이셨음) (성경 말씀을) 온전케 하시는 이인(그리스도는 인성 안에서 영적 생활을 완성하셨음) 예수를 바라보자(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 복종과 사랑).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하나님의 행복의 공유가 가장 강력한 동기를 제공함) 십자가(역사상 최대의 압박)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대신 받고 있던 죄들에 대해 반발하지 않으셨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의 인성). (히브리서 12:2)

 

어떤 것에 집중하려면 그에 대한 지식과 자기 훈련, 겸손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께 우리의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께 대해 생각하라고 명령 받았습니다.는 신성(神性)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를 뜻하고예수는 구원자를 뜻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인성 (humanity)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걸머지신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구절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라고 명령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의 33년 동안의 생애에 관심을 집중하라고 명령을 받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 동안 교회 시대 신자들을 위하여 영적인 삶에 대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하게 태어나셨고 결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완전함을 지키셨습니다.  게다가 지상에서의 33 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성경 말씀을 신진대사 (소화 흡수) 시키셨습니다. 그 성경 말씀으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미덕을 발전시키셨고 최고로 친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함과 미덕 그리고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친밀한 관계가 예수님의 혼 안에 놀라운 행복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견디게 한 동기였습니다.  헬라어ντί / anti"와 동명사가 합해질 때 그 뜻 중의 한가지는.....때문에입니다.
그리고
πρκειμαι / prokeimai”가지고 있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의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드러내어진 (예수님께서 소유하셨던) 행복 때문에라고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이 행복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는 것과 관련된 고통과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는 할 수 있는 최대의 동기를 가지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기는 예수님의 완전함과 혼 안의 미덕과 하나님과의 조화로운 친밀한 관계에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동기는 최대한으로 가능한 미덕의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적으로 전진하기 위해 두 가지 힘, 즉 성령 충만의 능력과 신진대사 시킨 (소화 흡수된) 말씀의 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하여금 말씀을 배우고 신진대사 시켜 (소화 흡수하여)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의 영적인 삶은 하나님의 생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구약 성경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시대를 예언하신 분으로서 신약 성경의 서신서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가 구약의 교훈적인 내용들 (고린도전서 10:11)과 신약 서신서에 나타나 있는 영적인 삶을 이해하게 되면 이 땅의 삶을 사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사시는 동안에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이사야 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시대 각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 충만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진 분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시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의 배 위에 있을 때 큰 폭풍이 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은 매우 평안하셨고 그래서 바다의 그 사나운 폭풍 중에서도 잠드실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올바른 방법이란 하나님의 생각 즉 하나님의 약속과 교훈의 말씀들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감정에 의해 지배되는 신자는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올바른 방법을 사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마태복음 8: 23-27)

 

그 때 나약했던 제자들은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닥친 절망적인 상황에 하나님의 생각을 적용하는 대신 그들은 두려움과 히스테리로 흥분했습니다.  불행히도 나약하고 무지하고 감정적인 그리스도 인들은 기적에는 깊은 인상을 받으나 하나님의 생각이 요구되는 믿음으로 안식에 거하는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 폭풍의 재난이 닥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보다는 오히려 그 상황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셨습니다. 기도 그 자체는 문제 해결 장치가 아닙니다. 걱정과 두려움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도우셔서 이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는 응답되지 않을 기도를 합니다. 문제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제 밖에 있을 때에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영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압박과 문제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삶에 은혜를 적용하심으로써 많은 문제들을 해결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 이것은 생각의 문제이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에는 생각이 요구됩니다. 은혜의 적용에 비록 생각이 요구된다고 하더라고 은혜의 적용에 대해 감정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물론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은혜의 해결책에 대해 너무 감사하여 그로 인한 행복 때문에 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로 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아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39)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은 자기 자신의 뜻보다 더 중요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4:31)

 

명령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없으므로 순종하기 위해서는 명령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은 순종과 관계 있고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감정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경 공부 시간에 어떤 신자가 (말씀에 감동 받아) 운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인성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를 들어, 장래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적인 삶은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고 그 생각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감정은 영적인 삶에 좋은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만 감정이 영적인 삶은 아닌 것입니다. 


예배의 능력은 생각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성령)과 진정으로(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사도 요한이 예배에 대해 논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영이신 것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감정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요한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정이 없으시기 때문에 감정으로 예배 드려서는 안됩니다. 요한은 예배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두 가지 능력, 즉 성령 충만과 말씀의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전능하심은 감정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생각은 감정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신진대사 시켜 (소화 흡수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두 번째 능력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생각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찬송 예배는 신자가 그의 혼 안에 신진대사된 (소화 흡수된) 말씀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찬송은 가사에 나타나는 생각과 가락에 나타나는 감정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찬송 가사를 생각하며 감사드릴 때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가락에 들어 있는 감정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삶은 생각이지 감정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베드로가 그가 쓴 성경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감정이 아님)에서 자라 가라

 

 

Max Klein 선교사/성경적 주제에서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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