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천년설의 개혁신학적 타당성
Ⅰ. 서 론
기독교 교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서 서서히 발전해 왔으며, 또 각 시대마다 강조점이 달랐다. 예를 들면, 2세기의 교회는 이방 종교와의 갈등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3세기 및 4세기의 교회는 신론, 특히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일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고 5세기의 교회는 인죄론에 초점을 맞추었고, 5세기-7세기에는 기독론이 주된 논의의 대상이었다. 그 후 11세기-15세기는 구원론 특히 속죄 교리가 교회의 주된 관심사였고, 16세기에는 구원론 가운데 특히 칭의 교리가 논쟁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종말론은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렇게 발달된 교리는 아니었다. 물론 19세기에도 종말론에 관한 연구가 영국의 다비(John N.Darby,1800-1882)같은 학자에 의해서, 또 미국에서 주로 근본주의 대 자유주의의 논쟁과 연관하여 상당히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아무래도 종말론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결론일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는 지금까지 갇혀있던 봇물이 터지기나 하듯이 여러 형태의 종말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어서 도리어 위험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움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개혁신학에 입각한 종말론에 관한 학문적 접근과 이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앞으로 목회를 계획하는 신학도로서 개인적 신학체계를 정립하는데 매우 귀중한 경험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본 연구는, 여러 종류의 종말론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요약정리하고 적절한 비판을 가한 다음, 천년왕국설에 대한 시대별 흐름을 파악해 보면서, 왜 무천년설이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타당한 종말론인지를 결론적으로 피력하고자 한다.
Ⅱ. 본 론
제 1장 천년왕국에 대한 제반 견해들
1. 성경적 배경
구약성경에 나타난 메시야 왕국은 다른 교리의 경우처럼 분명하지 않다. 우선 그 성격과 시기에 있어서 신비적이며 영원적인 경우와, 현세적이며 임시적인 것으로 나뉘며,또한 그 왕국의 범위에 있어서도 이사야서, 요나서, 말라기서와 같이 우주적인 것과, 에스겔서, 학개서, 요엘서 등과 같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배태된 메시야 왕국교리는 신구약 중간시대에 진일보하게 되는데, 특히 이 교리는 이 시기에 팽배했던 종말론적 묵시문학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 특징으로는 먼저, 메시야 왕국의 기간이 임시적이었으며, 그 기간도 40년, 100년, 600년, 1000년, 2000년, 7000년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위경서에는 역사를 주(週)로 설명하는가 하면, 유대랍비들은 시90:4 등에 의하여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하여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셨으므로 현세가 6000년간 지속된 후에 1000년간의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고, 그 후 제8000년대에 이르러 무궁한 세계가 시작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메시야 왕국에 대한 유대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말씀하신 것은 현세적이며 임시적인 메시야 왕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와서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고, 베드로 역시 같은 사실을 진술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이 성경적 배경에서 살펴보았을 때 요한계시록은 엉뚱한 문서가 아니라, 오히려 메시야 사상의 오랜 전승을 집약한 책이라고 볼 수 있는 바, 이러한 틀 안에서 천년왕국에 대한 제반 견해를 살펴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2.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전천년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의인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이며, 유대인을 회심케 하여 성지로 돌아오게 하고, 또한 유대인의 국가를 전례 없는 영광과 권능으로 재건하여 그의 성도들과 함께 천년 동안 이 왕국을 통치하신다는 학설이다. 특히 이 학설은 초대 교회에서 정설로 받아 들여졌고, ‘저스틴’(Justine)은 이를 정통교리라 하였다.
1) 전천년설의 개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옛 다윗왕국의 영광스러운 재건이 메시야의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왕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유대인들이 회개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 왕국의 시기를 자신의 재림시 까지 연기하셨으며, 동시에 교회를 세우시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부르셨지만, 복음이 사람들을 회개시키는데 스스로 불충분함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이 학설의 주장자들은 설명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마지막 날에 공중에 나타나셔서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키시고, 살아 있는 성도들을 산 채로 끌어올리신 후, 이 모든 성도들과 더불어 어린양의 잔치를 베풀 것이다. 그동안 지상에서는 처참한 환란이 있을 것이며, 이 기간에 이스라엘이 회심하여 성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이들 전천년설 주장자들에 의하면 이 환란기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셔서 온 인류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심판에서 양과 염소가 구분되고, 사탄은 천년 동안 감금되며, 적그리스도는 파멸되고, 환란기에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는데 이때 천년 왕국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왕국은 세계적인 주권을 가진 유대인의 왕국이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이 다스리며, 성전과 제사가 다시 봉헌된다. 그리고 이 천년동안의 회심의 역사가 지나고 나면 사탄의 군대와 하나님은 최종적인 격전을 치르게 될 것이며, 이 싸움이 끝난 후에 하나님은 사탄을 무저갱에 던져버리실 것이다. 사탄의 파멸 후에 불신자들에 대한 부활과 최종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이 전천년설 주장자들의 설명이다.
2) 전천년설의 문제점
이 학설은 예언서의 묘사에 대하여 부당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이 암시하는 영적해석을 설명하지 못한다. 즉 이 학설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적인 왕국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신약성경은 그것을 영적이며 우주적인 왕국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전천년설은 천국을 현실적인 실재라고 묘사하는 성구들과도 명백하게 모순된다. 그리고 성경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단번에 말하고 있으며, 의인의 부활이 마지막에 있을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지만, 전천년설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사이에 천년간의 간격을 둔다. 뿐만 아니라 전천년설은 성경이 제시하는 바와는 반대로 세 차례의 부활과 네 차례의 심판을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천년설은 성경과 배치되는 점을 수정하지 않는 한 학설로서 위치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3. 후천년설(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이후에 있다는 학설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현재 성도들이 살아가는 복음시대에 나타나며, 그리스도는 그 종말에 오실 것이다. 즉 현세대의 종국에 가서 재림이 있기 전 천년 동안은 복음이 크게 전파될 것이고 교회가 왕성해진 후에 재림이 실현 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1) 후천년설의 개요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전천년설에 대항하여 종말론적인 복잡한 사건들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관련 성구들이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사이에 천년의 간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무천년설 주장자들도 재림 전의 후천년적 기간설정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 천년의 성격에 대하여 후천년론자들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즉 후천년설은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직접적인 임재와 교회에서 성령이 임재하는 것, 그리고 능력을 약속하셨으며, 제자들이 그에게 요구한 것을 행하시기로 약속하셨다.
거기에 덧붙여 죄인들의 회심은 아버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천년왕국이 복음의 전파와 이에 따르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도입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진화의 완전한 자연적 과정의 대결과로 믿는 것이다. 즉 이들은 인간이 교육과 개정된 법률과 사회 개혁 등을 통하여 새 시대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2) 후천년설의 문제점
이 학설의 근본적 개념, 곧 전 세계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것,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리라는 생각들은 재림기에 관한 성경의 묘사와 조화되지 않는다. 더욱이 현시대가 대 격변으로 끝나지 않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미래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후천년설 주장자들의 관념도 역시 비성경적이다. 이에 더하여 인간이 교육, 법률, 사회개량 등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를 받게 되리라는 현대 신학적 관념도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된다. 왜냐하면 미래의 왕국은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권능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3. 무천년설(Amillennialism)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그의 부활에서부터 이 시대의 마지막에 구름을 타고 오실 때까지 확장된다는 견해이다. 물론 이때는 일회적인 부활이 있으며, 그리스도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회개하지 않는 땅에 오실 때이다. 따라서 양과 염소의 심판과 흰 보좌심판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며, 그 뒤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이 따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은 하늘과 땅에서 모두 ‘지금’이다. 이처럼 무천년설은 문자적인 천년설을 부정하고 ‘천년’을 우화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해석한다. 이 학설의 조상격인 ‘오리겐’(Origen)은 천년왕국설을 경책하면서 이를 전적으로 신령화 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을 체계화시킨 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로 본다. 천년왕국설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많은 영역에서 선두에 있었기 때문에 후대 신학자들이 명료하게 구별했던 강조점이 그의 저술에는 혼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무천년론자와 후천년론자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티누스를 내세울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가장 중요한 요점은 천년왕국이 일차적으로 시간적이거나 연대기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천년왕국의 의의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에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학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정통 신학을 확립한 ‘칼빈’(Jean Calvin)에 의해 수용되었음은 물론 종교개혁 시대에 천년왕국에 대한 제반 견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많은 장로교단은 물론이고 미국개혁교회(Reformed Church of America)와 기독교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등의 교단처럼 개혁파에 속하는 보수주의자는 주로 무천년주의이다.
Abraham Kuyper, Herman Bavinck, Louis Berkhof, William Hendriksen 등이 지지하는 이론이며, 최근에는 화란과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천년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천년설은 계시록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무천년설은 계시록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로 한 역사의 마지막 기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전 교회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믿는다. 즉 그것을 미래적인 의미가 아닌 과거나 현재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 무천년설은 요한계시록 20:4-5에 언급된 두 부활을 이해할 때, 첫째 부활(20:4)은 영적 부활로, 둘째 부활(20:5)은 육체적 부활로 해석한다.
셋째, 무천년설은 요한계시록 20:2의 사탄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 때,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탄에게 승리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십자가 승리로 사탄은 결박당하여 세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마태복음 12:29이다. 따라서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되어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고 주장한다. 천년 왕국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실현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이고 가시적인 지상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이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스리는 통치를 말한다.
넷째, 무천년설은 성도의 휴거를 그리스도의 재림시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미래적인 사건이 아니라 단순히 기독교인의 죽음으로 해석하거나 재림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공중으로 올라갔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문자적인 7년 대환란을 부정하고, 그것은 늘 환란을 당하며 사는 성도들의 지상생활 자체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말론적 구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단 한 번의 최후 심판이 있고, 그 결과 의인과 악인이 영원한 최종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다섯째. 무천년설은 성서의 예언을 미래적인 것으로 취급하기보다 역사적인 것이나 상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전천년설은 그리스도 재림 후 천년 동안 그의 지상 통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후천년설은 그리스도 재림 전 교회 시대 말기에 지상에 의와 평화의 황금시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무천년설은 그리스도 재림 전 전체 교회시대에 죽은 성도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믿는 것이다.
제 2장 시대별로 본 천년왕국설
1. 초대교회의 천년왕국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따라서 신약에는 그리스도의 조속한 재림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확실하게 보게 된다. 초대 교부들 중의 일부는 요한계시록 20:1-6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구별하고, 그 사이에 천년왕국(millennial kingdom)이 있다고 믿었다. 어떤 이들은 이 천년왕국의 소망 속에서 살면서, 그 미래의 기쁨을 철저히 물질적인 것으로 상상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파피아스(Papias)와 이레네우스(Irenaeus)가 더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바나바(Barnabas), 허메(Hermas), 저스틴(Justin), 그리고 터툴리안(Tertullian)과 같은 이들이 비록 이 교리를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지나치게 비약하는 것만큼은 피하였다. 또 케린두스(Cerinthus), 에비온파(the Ebiontes), 몬타누스파(the Montanists)들도 천년왕국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전천년기설자(Premillenarians)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이 초기 3세기 동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분별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지극히 제한된 수에 불과하였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이그나티우스(Ignatius), 폴리캅(Polycap), 타티안(Tatian),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 테오필루스(Theophil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 디오니시우스(Dyonysius), 그리고 그밖의 중요한 교부들의 사상에서는, 천년왕국 교리의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초대교회의 천년왕국론은 점점 힘을 잃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 몇 세기가 흐르게 되고, 교회에 대한 박해가 멎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확고한 발판을 굳히게 되고, 심지어는 국교의 자리까지 이르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교회는 현세의 사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특별히 성경의 비유적 해석법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의해 소개되어, 오리겐 같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 역시 천년왕국의 소망을 냉각시키는 상대적인 효과를 초래했다.
한편 서방에서는 어거스틴의 강력한 영향, 즉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 시 함으로써, 교회의 사상을 미래에서 현실로 돌이키게 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어거스틴은 사람들에게 천년왕국을 구하려면 “현재의 기독교 시대”(in the present Christian dispensation)에서 찾으라고 가르쳤다.
2. 중세기의 천년왕국설
중세기에는 일반적으로 천년왕국설이 이단처럼(as heretical) 여겨졌다. 사실 여기저기서, 또 여러 종파 사이에 일시적이며, 산발적으로 천년왕국의 소망이 싹튼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0세기에는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하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적그리스도(Antichrist)가 속히 나타난다고 하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천년왕국의 희망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예술은 종말론에서 자주 그 주제를 택하였다. ‘진노의 날’(Dies Irae)이라는 성가는 다가올 심판의 공포를 부르짖으며, 화가들은 화폭에다 세계의 종말을 묘사하였고, 단테(Dante)는 ‘신곡’(Divina Comodedia)에서 지옥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3. 종교개혁시대의 천년왕국설
종교개혁 시대의 천년왕국설은, 개신교의 반대를 받았지만, 아주 광신적인 재세례파나, 제5왕국설자(the Fifth Momarchy Men)들과 같은 몇 종파들은 다시 불을 지폈다. 루터(Martin Luther)는 심판날에 앞서, 그리스도의 지상왕국이 있으리라는 것은 ‘꿈’(dream)에 지나지 않는 다고 냉소하면서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아우스부르그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은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전에, 경건한 자들이 세상나라를 차지하고, 악인은 어디서든지 억압을 당한다는 유대사상을 퍼트리는 자”(17장)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제2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은 “더욱이 우리는 심판 날이 오기 전에 지상에 황금시대가 있으며, 그때에 경건한 자들은 세상 왕국을 차지하고, 그들의 대적은 그들 발밑에 밟히리라는 유대인의 꿈을 정죄한다”(11장)고 선포했다.
4. 17세기의 천년왕국설과 후천년기설
17세기에 와서는 또 다른 형식의 천년왕국설이 나타났다. 소수의 루터파와 개혁파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유형적 지상천년 통치설을 거부하고, 천년왕국의 영적 개념을 더 옹호하였다. 세계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교회에 임재하시는 시기가 오게 되는데, 이때에 성도들은 이것을 비상한 방법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며, 세계적으로는 종교적 대각성이 또한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그후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왕국이 평화와 의의왕국으로 건설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천년기설(Premillennialism)과 구별되는 후천년기설(Postmillennialism)의 초기 형식이었다.
5. 18-19세기의 천년왕국설
18세기와 19세기에 와서 천년왕국설은 다시 어떤 계층에서 대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벵겔학파(the School og Bengel)와 최근의 에어랑겐학파(the School og Eelangen)의 옹호를 받았다. 또한 이 주장의 지지자들을 들면, 호푸만(Hofmann), 델리취(Delitzsch), 오벌렌(Auberlen), 로테(Rothe), 엘리웃(Elliott), 커밍(Cumming), 빅컬스테드(Bickersteth), 보날스파(the Bonars), 알포스(Alford), 잔(Zahn) 등이다. 최종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순서와 천년왕국기에 있을 실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전천년기설자들(Pre-millenarians) 사이에서도 의견대립이 아주 심하였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정확히 측정해보려는 시도가 수없이 되풀이 되었으며, 또 일부에서는 큰 확신을 가지고 그 시기가 임박하였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 모든 측정들은 다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후, 그의 일시적인 지상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특히 오늘날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으나 신학적인 견해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후천년기설’(a new form of Postmillennialism)이 나타나게 되었다. 장차 올 왕국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갖게 될 터인데,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법이 널리 보급되어 평화와 정의, 그리고 현재의 영적 세력이 만발하는 영광스러운 개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천년왕국의 소망의 회복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라우센부쉬(Rauschenbusch)의 사상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천년왕국의 교리는 어느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에도 구체적으로 표현된 적이 없고, 따라서 이것을 공식적인 ‘교회의 교의’(dogma of the Church)로 간주할 수 없다.
제 3장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무천년설에 대한 타당성
이 장에서는 무천년설이, ‘출범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미래의 종말론’(future eschatology)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신학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무천년설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먼저 용어의 정의에 있어서, ‘출범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이라는 용어가 ‘현실화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는 용어보다 더 낫게 여겨지기 때문에 ‘출범한 종말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출범한 종말론’이란 말에는 위대한 종말론적 새김이 역사 속에 이미 실현되었다는(이미 새겨졌다는) 사실을 아주 잘 반영하는 한편, 미래에 있을 계속적인 종말론의 전개와 최종 완성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범한 종말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다른 종말론적 사건들도 여전히 미래에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출범한 종말론’을 논하면서 무천년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한다.
1) 그리스도는 죄, 사망, 사단을 누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구속의 희생으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죄를 패배 시키셨다. 또한 죽음을 맛보시고 무덤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예수그리스도는 사망을 패배시키셨다.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하셨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과 그의 사악한 군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며 최종적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 가장 중요한 날은 아직 미래의 일인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라, 과거에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초림이다.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 역사상의 궁극적인 이슈들은 이미 결정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승리가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2)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와 미래 모두를 포함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다윗왕좌의 문자적 회복을 믿는 유대인 왕국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의 지상 천년왕국의 건립을 연기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 현재 역사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예수의 재림으로 도래할 세상에서 완전히 그 모습이 나타나기로 되어 있다고 믿는다. 무천년설을 주창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역사 속에서 다이나믹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며,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만드신 전체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의 실재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는 말씀으로 예수는 왕국이 이미 임재하였음을 분명히 가르치셨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대답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왕국이 여전히 미래에 도래할 왕국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특별히 하신 말씀과, 종말론적 비유에서 가르치고 있다. 바울도 왕국을 현재와 미래에 모두 존재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존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에 올 것이라는 사실은 그 왕국의 신하들인 우리들로서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일종의 긴장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미 그 왕국에 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왕국의 완전한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그 왕국의 축복들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그 왕국의 완전한 승리를 기다린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정확한 시기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역사의 종말이 멀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긴박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계속해서 계획을 세우고, 아직도 오랜 시간 계속될지도 모를 이 세상에서 미래를 위해 계속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와 그의 대의를 위해서 완전한 헌신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개인들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구속의 목표에 비추어 삶의 모든 것과 현실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우주의 어느 한 부분도 그리스도께서 “그것은 내 것이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 완전한 헌신에 있어서 역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수행하는 것으로써 보아져야 한다는 기독교인의 역사철학을 의미한다. 이러한 왕국 환상은 예술과 과학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것임을 반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찬양을 위해 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기독교인의 문화철학을 포함한다. 또한 그 왕국의 환상은 모든 소명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것이 공부이든, 가르치는 것이든, 목회하는 것이든, 사업, 공업 또는 가사 일이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찬양을 위해 행하여져야한다는 기독교인의 직업관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3) 마지막 날은 미래에 있을 사건이지만,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자주 경시되고 있는 종말론의 이 측면은 신약성경 메시지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지금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지막 때’가 그리스도의 재림직전 어느 특정 시기를 말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전체시대를 기술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그들이 말하고 기록할 당시에 그들이 이미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후 마지막 때에 모든 육체에게 물 붓듯 부으시는 성령의 강림에 대하여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그의 설교에서 이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가 지금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도 “또한 말세를 만난 무리”라고 당대의 신자들을 기술함으로써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도 요한 역시 당대의 독자들에게 그들이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요한이 흔히 쓰는 “말세”라는 종말론적 사건들의 최종적 완성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출범한 종말론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종말론적 축복들의 시작들을 맛보고 있다는 것과,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에 직면해서 어쩔 줄 모르는 허약한 죄인으로 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령의 성전들로서, 그리고육체를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못박고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자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우선적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갖게 한다.
4) 계시록 20장의 “일천년”에 관한 한, 우리는 현재 천년왕국 안에 있다.
계시록 20장 초반부의 “일천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사단이 잠깐 동안 결박에서 풀릴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직전까지 연장된다는 입장을 위해 증거가 제시되었다. 계시록 20장의 천년에 대한 무천년설의 입장은 사단이 이 기간 동안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천년 왕국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사단이 결박되어 있다는 것은 오늘날 이 세상에서 사단이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이 시기 동안 만국을 현혹할 수 없다. 즉 복음의 전파를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동안의 사단에 대한 결박은, 환언하면, 선교와 복음전파를 가능케 하며, 이러한 사실은 지상교회에 위안의 근거가 될 것이다.
무천년설은 또한, 이 천년의 기간 동안에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몸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비록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몸이 부활할 때까지는 완전하지 않다 할지라도 축복과 행복의 상태이다.
2. ‘미래의 종말론’에 관해서 무천년설은 다음의 것들을 인정한다.
1) “말세의 징조”는 현재와 미래의 관련성을 모두 갖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말세의 어떤 징조들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예를 들면, 모든 나라들에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 전체의 회심, 대 배교, 대 환란 및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시기에 나타날 배타적인 것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초창기시대부터 있었으며, 현재에도 존재한다. 이것은 재림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먼 미래에 있을 사건 정도로 인식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한 번의 일회적 사건일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시대구분론적 전천년설 주창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칠년의 기간사이에 두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는 주장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단 한 번의 일회적사건으로 이해한다.
3) 예수 재림시 신.불신자 모두 단 한 번의 일회적인 부활사건이 있을 것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신자의 부활과 불신자위 부활을 천년기간으로 분리하는 보편적인 전천년설 교리를 반대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또 셋 또는 네 번의 부활이 있을 것으로 주장하는 시대구분론자들의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와 같은 다수의 부활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4) 부활 후, 살아있는 신자들은 갑자기 변형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이 교리에 대한 근거는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의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 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하신 말씀이 근거가 된다.
5) 영화롭게 변형되면서 모든 신자들의 휴거가 이때 일어난다.
막 변형을 입은 살아있는 신자들과 함께 죽음에서 막 부활한 신자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구름 속으로 올리어 간다. 그와 같은 “휴거”가 있을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시대구분론자들과 무천년설의 주창자들의 “휴거”에 대한 분명한 개념의 차이가 있다면, 시대구분론자들은 휴거 후 전체 교회가 천국으로 들림 받아 칠년 기간 동안을 지낼 것이며, 이때 지상에 남은 자들은 대환란을 겪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있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와 같은 칠년 기간이나 또는 이 시기에 교회가 지상에서 천국으로 옮길 것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보지 못한다. 신자들이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몸들은 하늘에 속하지 아니 하고 지상에 속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영접”이란 말로 번역된 말은(apantesis) 초기신약시대에 귀한 방문객에게 시(市)가 베푼 공개 환영을 기술하는데 사용한 용어이다. 사람들은 귀한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하여 시 밖에서 맞이하여 도시로 돌아온다. 이 말이 가진 유사성에 근거해서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부활하여 변형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림을 받아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이며, 이 마중 후에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6) 이제 최후의 심판이 뒤따른다.
시대구분론자들은 적어도 세 번의 분리된 심판이 있을 것으로 보통 가르치고 있지만,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일어날 단 한번뿐인 최후의 심판이 성경적 증거를 갖고 있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그때 그리스도의 재판석 앞에 나타나야 한다.
최후의 심판 목적은 세 가지의 목적을 갖게 될 것으로 본다. 첫째, 그것은 각 사람에게 할당된 최종적인 운명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적군들 사이에 역사적인 큰 대조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것은 각 개인이 받을 상급의 정도와 징벌의 정도를 나타낼 것이다.
7) 심판 후에 최종적인 상태가 시작될 것이다.
불신자들과 그리스도를 거역한 모든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며, 한편 신자들은 새 땅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 것이다. 새 땅의 개념은 성경적 종말론에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연구해야할 필요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천상에서 영원토록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새 땅이 있을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계시록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새 땅으로 내려올 것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당신의 거처를 가지질 것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새 예루살렘에 있을 것을 우리들에게 말할 때, 오는 세계는 하늘과 땅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합류할 것을 비유적인 언어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상태에서 영화롭게 된 신자들은, 하늘과 새 땅이 그때는 하나가될 것이기 때문에 하늘과 새 땅 모두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사역의 우주적인 중요성은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에 닥친 저주는 언젠가 제거될 것을 포함한다.
전천년설 주창자들은 무천년설 주창자들이 미래의 왕국을 단순히 영적이고, 지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가르친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무천년설의 견해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약속의 땅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소유가 될 것과, 이리가 어린양과 살 것과,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지상에 충만할 것을 예언하는 구약성경의 예언은 단지 일천년 기간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취될 것이라고 믿는다.
3. 무천년설의 몇 가지 암시들
1) 신구약성경을 함께 묶는 것은 은혜언약의 통일성이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성스러운 역사가 일련의 특출하고 공통성 없는 시대로 구분된다고 믿지 않으며, 전체 역사에 흐르는 단 하나의 은혜언약으로 본다. 이 은혜의 언약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새 땅에서 하나님과 그의 구속된 백성이 함께 하는 영원한 거처에서 정점을 이룰 것이다.
2) 하나님의 왕국은 인간 역사의 중심이다.
왕국은 구약시대에 예언되고 마련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상에 세워졌으며, 신약시대와 뒤따르는 교회시대 전체에로 확장되고 팽창되었으며, 결국 도래할 세상에서 완성될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이시다.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의 주권아래 있으며, 그의 목적에 보조적이었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입증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축복들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주로서 기쁘게 섬기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4) 모든 역사는 우주의 완전 구속인 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각 개의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항상 구별할 수 없다할지라도, 우리는 역사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일 것인가를 안다. 우리는 새로워진 우주의 일부분으로써 새 땅을 고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목적을 현실화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재의 통치에 있어서나 하나님 왕국의 임재에 있어서, 그리고 목표를 향한 역사의 흐름에 있어서 믿음은 이 세상 죄의 존재와 사악한 왕국의 지속적인 발전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에 의해서 수반된다.
무천년설 주창자들은 완벽한 사회가 현 시대에는 현실화 될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죄를 이긴 예수그리스도의 승리는 결정적이었으며,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는 현재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믿음 위에 세워지고, 사랑 안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는 소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천년왕국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그의 왕국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의 영감적인 환상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의 종말론이다.
Ⅲ. 결 론
우리에게 있어서 종말신앙은 역사의 주인 되시며 구원의 주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분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생의 삶을 이루시게 하실 것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의 인간적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삶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충실하고 책임을 다하는 빛 된 삶을 사는 것이 또한 우리의 올바른 종말 신앙관이라고 할 것이다.
이제 천년주의를 배척하였던 칼빈의 말을 인용하면서 본 보고서를 맺으려고 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25장 5항에서 “천년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통치기간을 천년동안으로 제한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천년주의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들의 오류에 구실을 준 것이 계시록에 있음이 분명하나, 그 계시록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의 조작은 너무 유치해서 논박할 필요가 없다. 천이란 수는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하는 각종 고난에만 적용된다. 오히려 성경전체가 택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은총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 악의를 품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천년설은 성경적이며,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올바르고 타당성 있는 교리임이 명백하다.
http://lovingall.org/zbxe/index.php?mid=pds&category=1266&document_srl=24730
'예언,종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종말론 정리 (0) | 2018.02.13 |
---|---|
[스크랩] 무천년설에 대한 문제점 (0) | 2018.02.13 |
[스크랩] 종말이 오면 지구는 파멸하는가? (0) | 2018.02.13 |
[스크랩] 그리스도교 역사에 나타난 죽음관 (0) | 2018.02.13 |
[스크랩] "천국"과 "하나님 나라"가 다른가? (0) | 2018.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