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역사에 나타난 죽음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공동체 역사 안에서 형성되어 온 죽음관의 특징적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 전반적으로 G. 그레사케, 『종말신앙 - 죽음보다 강한 희망』, 졸역, 바오로딸 21999; H. 포그리믈러, 『죽음 - 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 이해』, 졸역, 바오로딸 21994; 리바니오/빈제메르, 『그리스도교 終末論』, 김수복 옮김, 분도출판사 1989; 프란츠 요셉 녹케, 『종말론』, 조규만 역, 성바오로 1998; 졸저, 『인간 -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K. Rahner, Zur Theologie des Todes, Freiburg 1958 참조.
이천여년간 이어진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죽음은 지상적 삶의 단절로서 그저 자연적 죽음으로 ‘중립적으로’만 파악된 적 없이 원조가 범한 죄의 형벌로서 규정하는 관점이 지배하는 가운데, 죽음과 함께 영원한 구원 또는 비구원이 시작된다는 신앙과 연계되어 있다. 죽음이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고금을 막론하고 영생 신앙의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 온 셈이다. 그런데, 죽음과 영생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다소간에 상위성을 지니며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죽음관을 지난 19세기 까지 - 지역에 따라 20세기 중엽까지 - 십수세기에 걸쳐 영향력을 미친 전통적 입장과 20세기 이래 형성된 현대적 입장으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한다.
I.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적 죽음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죽음관은 초기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교계 안에 정착되면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신앙 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죽음관은 성서-유다적 부활신앙이 신경(信經) 차원에서 구두적으로 고백되는 가운데에서 실질적으로는 플라톤-그리스적 영혼 불멸관의 수용을 통한 구령(救靈) 신앙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공통 지평 안에서 고대와 중세, 근세 이후에 나름으로 구별되는 특성이 감지되기는 한다.
1. 고대 교회의 죽음관
1) 사도적 교회 시기에,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고 승천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죽기 전에 체험하리라는 임박기대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죽음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분위기 안에서 생활하였다.
이에 관하여 그레사케, 위의 책, 90-99면; 포그리믈러, ⌈죽음-오늘의 그리스도교적 죽음 이해⌋, 139-146면 참조.
첫세대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을 원조 아담이 범한 죄의 형벌로서 규정한 성서적 전통에 머물러 있었다(창세 3,15-19; 로마 5,12; 6,23; 1 고린 15,22 참조). 죽음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아담의 죄와 원천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DS 222; 231; 372; 1511-1512; 2617 참조.
여기서 죽음은 생명을 감소시키고 파괴하는 세력으로서 죄의 귀결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직접 참여하리라는 열광적 기대 안에서 죽음을 개의치 않는 분위기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1 고린 54-55). 그들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의거하여 죽음을 거치지 않고 부활하신 분의 영광, 곧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는 오히려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날을 여러분이 고대하게 되었다는 것도 그들이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1 데살 1,9-10).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기 교회는 죽음이 현실적으로 제기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죽음이 닥치면서 인간의 육신에게서 생명의 힘과 같은 ‘무엇인가’가 이탈하고 부패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소멸되는 양상에 직면하여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의 사실성 여부가 심각하게 문제시된 것이다.
2) 초기 교회는 신자들의 죽음으로 야기되는 문제제기에 직면하여 성서-유다적 부활 신앙과 플라톤-그리스적 영혼불멸설을 융합하여 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의 죽음관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에 관하여 이미 앞에서 언급된 그레사케와 포그리믈러의 저서 이외에 K.P. Fischer,
“Der Tod-Trennung von Seele und Leib", in: Wagnis Theologie, hrsg.v. H. Vorgrimler,
Freiburg 1979, pp.311-338; J. Razinger, Eschatologie, pp.65-135 참조.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람이 죽고나면 불멸하는 영혼이 즉시 신의 세계로 귀환한다는 희망표상이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경에 확산되었던 오르페우스(Orpheus)를 종조(宗祖)로 하는 오르페우스교(Orphism) 안에서 본래 신적 영혼이 과실로 말미암아 육신 안에 유폐 상태에 머물다가 죽음을 통하여 사악한 물질계에 추락되었던 상태로부터 벗어나 선재(先在)하였던 신적 영역으로 복귀하게 된다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었다. 오르페우스교의 기본 입장에 관하여: G. Greshake, “Tod und Auferstehung",
in: ChGiMG 5, 88; E. Dassmann, “Orpheus/Orphik", in: LdR, 492; M.Detienne, “Orpheus", in: TER XI, 111-114 참조.
이 오르페우스적 신화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에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약 582-497경)와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기원전 약 493-433경)에 의하여 수용된 바 있으며, 마침내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 348/347)에 의해서도 포착되어 정선된 일련의 논증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ψυχἠ)은 육신(σώμα)과는 상반되는 실재이다. 플라톤의 영혼불멸설에 관하여: H. G. Gadamer, “Die Unsterblichkeitsbeweise in Platons ‘Phaidon'", in: Wirklichkeit und Reflexion, hrs. v. H. Fahrenbach, Pfullingen 1973,pp.145-161; H. Küng, Ewiges Leben?, München 1982, pp.99-103 참조.
육신이 물질적인 사멸적(死滅的) 실재임에 반하여, 영혼은 정신적이고 불멸적 실재로 파악된다. 인간 생명의 원리인 영혼은 피상적이고 변화무상한 물질계로부터는 취득할 수 없는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과 같이 영속하는 정신적 관념(ἰδἐα)들을 인식하고 있다. 한 실재의 인식은 동질적 실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인데, 영혼이 무상하지 않고 영원한 정신적 실재를 인식하는 때문에 자체적으로 무상하지 않고 영원한 실재에 참여하는 불멸적 실재라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관념들의 인식은 물질계에 유폐되기 이전에 선재하던 관념세계에서의 삶에 대한 ‘기억’(ἀνάμνησις)을 통하여 성취된다. 이처럼 영혼은 지상의 현실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지상실재의 몰락과정에 편입되지 않고 영원한 관념의 세계에 속한다.
플라톤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을 비본래적인 것으로 파악하면서, 인간의 삶은 무상한 현세의 물질적 상태에 정초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진리 위에 정초해야 하고 인간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소외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 신적 세계로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바로 죽음 안에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된다고 파악한 것이다. “그(인간)한테 있는 죽게 마련인 것은 죽지만, 불사불멸하는 것(영혼)은 잘 보존되어서 죽음으로부터 떠나간다.”
Platon, Phaidon 106e; 포그리믈러, ⌈죽음⌋, 142면; 같은 저자, Hoffnung auf Vollendung,p.143에서 재인용.
육신으로부터의 영혼의 분리로 파악하는 플라톤의 죽음관 안에서 영혼은 죽음에 의하여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신적 세계로 귀환하면서 목표에 도달한다고 파악된다.
3) 플라톤-헬레니즘적 죽음관이 그리스도 교회 안으로 깊이 수용되면서 성서-유다적 죽음관 내지 부활관의 변형이 야기되기에 이른다.
고대 교회의 걸출한 지도자들은 거의가 헬레니즘 문화 풍토 안에서 출생하고 성장하면서 종교적이고 철학적 그리스 사상의 지평 안에서 생활하였다.
예컨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 오리게네스의 플라톤적 입장에 관하여: E.v. Ivanka, Plato Christianus. Übernahme und Umgestaltung des Platonismus durch die Väter, Einsiedeln 1964, pp.101-148; H. de Lubac, Geist aus der Geschichte, Einsiedeln 1968 참조.
나 아우구스띠노(Augustinus, 354-430) 아우구스띠노의 플라톤적 입장에 관하여: E. v. Ivanka, op. cit., pp.189-222; E. König, Augustinus philosophicus. Christlicher Glaube und philosophisches Denken in den
Frühschriften Augustins, München 1970 참조.
와 같은 동서 교회의 대표적 교부들은 같이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 요소로 파악하였다. 물론, 그들은 일반 그리스 사상가들처럼 영혼 자체의 불사불멸성을 주장하지는 않고 하느님의 피조물성을 보면서도 육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결국, 죽음 속에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해방을 누리는 영혼 구원을 중시한 점에서 전인적 구원과는 달리 플라톤과 같은 이원론적 견해를 개진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동방교회나 서방교회를 막론하고 육신과 현실세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세지향적 구원관이 정착하게 되면서 사도적 교회 시대의 하느님 나라 기대사상이 점차적으로 후퇴하고 죽음을 통한 영혼 구원사상이 전면에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천상 고향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는 교회 분위기 속에서 죽음은 인간 생명의 돌이킬 수 없는 종결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나타났으며, 지상에서의 전체 삶이 애초부터 죽음에로 나아가는 도정으로 보여졌다. 죽음은 영혼을 천국에로 이르는 여정을 향하도록 풀어주고 임종자는 착한 목자로 비유되는 여행 동반자로서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은 육신의 죽음을 영생의 목표에로 이끌고, 순교자가 겪는 육신의 죽음은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새로운 생명에로 인도하는 죽음은, 마치 세리(稅吏)가 세금징수를 위해 길가에 앉아 있드시, 악마들이 바로 죽음의 순간에 영혼을 위협하는 두려움에 찬 순간으로 파악되기도 하였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가운데 맞는 정신적 죽음은 이미 현세에서도 위협적으로 작용하기에, 생전에 삶과 죽음은 서로 관통한다고 파악되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띠노는 자연적인 ‘육신의 죽음’(mors corporis)과 하느님을 저버린 가운데에서 맞는, 영원한 저주 죽음으로서의 ‘영혼의 죽음’ (mors animae)을 구별하기까지 하였다.
2. 중세 이후의 죽음관
중세 교회의 죽음관은 전반적으로 이전 시대의 죽음관의 연장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 시대에도 유다-성서적 부활신앙이 그리스적 영혼불멸설과 연계되어 사후 영생 신앙으로 나타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에 관하여: J. B. Metz/F. Fuirebza, “Der Mensch als Einheit von Leib und Seele", in: Mysterium Salutis II, pp.584-636; R. Schulte, “Leib und Seele", in: ChGiMG 5, 5-61; 졸저, 『익명의 그리스도인-칼 라너 학설의 비판적 연구』, 바오로출판사 1985, 31-83면; 졸저, 『인간. 신학적 인간학 입문』, 서광사 1989, 57-80면 참조.
1. 중세에 교회 당국은 일련의 교의(敎義) 결정을 통하여 죽음과 사후 생명에 관한 가르침을 반포하였다. 이들은 원죄의 결과라는 성서적 죽음관과 함께 육신과 영혼의 분리라는 그리스적 관점을 수렴하고 있으며, 죽음이 내세에서의 영원한 실존 양식을 결정하는 지상 생명의 순례 기간의 끝이라는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중세초 418년에 개최된 카르타고 공의회(Concilium Carthaginense)에서 첫 인간이 원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도 죽어서 육신을 떠났으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단죄함으로써 죽음이 원조가 범죄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DS 222 참조.
529년에 개최된 제2차 아라우시카노 공의회(Concilium Arausicanum
그리고 트리덴티노 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6)는 ‘원죄 교령’(原罪敎令)에서 교회의 이전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DS 1511-1512 참조.
그리고 교회 당국은 제5차 라떼라노 공의회(Concilium Lateranense V, 1512-1517)에서 각 인간이 불사불멸하는 영혼을 가진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DS 1440-1441; 그리고 2617 참조.
이 공의회는 인간의 영혼이 사멸적이고 모든 인간들 안에서 오직 유일한 하나의 영혼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면서 영혼은 불사불멸적이고, 육신의 다수성에 상응하여서 다수라고 가르치고 있다.
1336년에 반포된 교황 분도 12세의 헌장 「복되신 하느님」(Benedictus Deus)에 따르면, 죽음 속에서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즉시 하느님께로 나아가 사심판(私審判)을 거쳐 지복(至福)이나 영벌(永罰), 또는 정화를 받다가 세상 종말시에 부활한 육신과 결합한 상태에서 공심판(公審判)을 받게 된다. DS 1000-1150 참조.
교회의 이 가르침에 따르면, 한 인간의 죽음 속에서 즉시 영혼이 처하게 되는 상태와 세상 종말에 육신의 부활을 통한 전인적 상태 사이에는 구별되는 상태가 존재한다. 소위 ‘사심판’과 ‘공심판’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처지가 ‘중간 상태’로 지칭된다. 이 상태를 인정하는 교회 당국은 죽음 뒤에 따르는 내세에서의 개별 인간의 단일성 내지 지속성을 유지하려는 취지를 보여준다. 졸문, “교회의 부활 신앙”, 『2000년대의 한국교회』, 성바오로출판사 1993, 49-54면 참조.
2. 고대 교회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의 플라톤-그리스적 죽음관이 13세기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적 죽음관으로의 변형을 이룩하는 일이 적어도 신학계에서 발생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48/83-322/21)의 인간관을 비판적으로 원용하여 ‘영혼이 육신의 유일한 형상(形相)’이라고 규정하면서 인간존재의 단일성을 강조하였다.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q. 76a. 1-3; J.B. Metz/F. Fiorenza, op. cit., p.610 참조.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영혼과 ‘제1 질료’(materia prima)로 구성된 존재이어서 영혼은 ‘형상’으로서 ‘제1 질료’ 안에서 자신을 실제적으로 표현하고, 자기 본연의 구체적 실재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형상으로서의 영혼을 통해 자신을 구현하게 되는 ‘제1 질료’ 또한 비형상적 사물적 실재가 아니라 영혼처럼 내적 존재원리로 규정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두개의 온전한 실체(實體)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단일적 인간의 두 형이상학적 원리들로 파악한 것이다. 그에게서 육신은 더 이상 영혼과 대조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영혼은 존재하기 위해서 육신성을 자기 자신의 실재로 정립한다. 영혼이 소여된 시공간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만 실재하는 한에서 인간의 육신이란 그의 현실적인 영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요, 전적인 인간실재를 두고 볼 때에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세상적 시공간적 자기소여성 안에서의 영혼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러한 단일적 인간관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서의 죽음관에도 변화를 수반한다. G. Greshake, "Tod und Auferstehung", pp.89ff. 참조.
그에게서 죽음은 인간의 피상적 부분으로서의 육신만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 인간을 관통한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으로서 육신의 붕괴만이 아니라 자신을 육신-물질적인 것 안에서 구현하는 영혼의 와해를 뜻한다. 그렇다고 인간이 간단히 무(無)에로 빠져든다는 것은 아니다. 영혼에 의해 형상화되지 않게 된 사체(死體)는 자체의 존속부분으로 서서히 해체되고, 정신적이고 불멸적 형상으로서의 영혼이 ‘인간으로부터의 어떤 것’(pars naturae)으로서 계속 존속한다.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서 ‘하나의 본성을 거슬르는 상태’, 일종의 불구상태에 머문다. 이 관점 안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개입없이 죽음 이후의 영혼의 존재란 생각될 수 조차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교회의 교리 안으로 수용되었다. 이에 관하여 특히 J.B. Metz/F.Fiorenza, op.cit., pp.614-617 참조.
1311년에 소집된 비엔나 공의회(Concilium Viennense)는 인간존재를 이원론적으로 규정하려는 영신주의(Spiritualismus)를 거슬러 인간의 단일성을 옹호하였다. DS 902; 그리고 DS 3002; 3221; 3224 참조.
이 공의회에서 ‘영혼이 육신의 형상’이라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진술되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입장으로부터 볼 때에 죽음을 통하여 실현되는 인간의 구원은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양될 수 없는 육신-영혼 단일성으로서의 전인의 완성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입장이 중세에 적어도 신학계 일각에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사자(死者)들의 부활신앙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교회는 현세적 인간과 부활한 인간의 동일성 내지 지속성을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사자들이 현세적 육신 안에서 부활하리라고 가르쳤다. 이를테면, 675년에 11차로 소집된 톨레도 공의회(Concilium Toletanum)는 모든 사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부활할 것이나, 공기형태이거나 다른 육신으로서가 아니고 현재 살고 존속하며 움직이고 있는 현세적 육신을 입고 부활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DS 540; 또한 DS 325; DS 801 참조.
3. 종교 개혁자들에게서 중세 가톨릭 교회와 공통적이면서도 구별되는 내용을 지닌 죽음관이 형성된다. 이에 관하여 주로 K, Fitschen, "Tod IV", in: hrg.v. G Müller,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XXXIII, Berlin 2002, pp.610-614 참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36) 역시 죽음을 원죄의 결과로 파악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죄악을 처부수시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죽음과 죄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극복하는 일이다. 루터에게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이 정신적 국면에서 극복한 바 있는 육신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나타내는 ‘암호’이다.
그리고 루터는 율법 밑에서 죽음은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거부이지만, 복음 안에서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까닭에 수락해야 하는 하느님의 교육적 조치로 대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한에서 그리스도교적 실존은 죽음의 갈구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령 미사에서 안에서 망자를 기억하는 전례와 연옥에 떨어진 망자들을 위한 염려는 불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사자들을 위한 모든 역사(役事)들을 거부하였다. 사자들은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잠들어 있고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개신교회 영역에서 루터가 허용하기는 했던 사자들을 위한 전구(轉求) 기도를 포함하여 매장과 망자(亡者) 추도는 19세기까지 별다른 전례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개신교 장례기도문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무력하게 만드셨고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며, 죽음에 직면하여 삶 안에서의 죄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는 루터의 기본 상념들이 개진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형성된 생명 의식은 그리스도교 영역 밖에서 새로운 죽음 의식을 계발하였다. 여기서 죽음은 삶의 목표로서가 아니라 끝으로 파악되었으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측과 프로테스탄트 측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은 세상과 지상 생명의 무상과 허망을 깊이 체험게 하면서 재차 죽음의식을 예리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세상의 기쁨과 죽음의 음울함이 교차하면서 죽음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망자들을 기리는 설교와 의식들이 많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근세초 시대 분위기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되는 죽음관을 정립하였다:
3. 전통적 죽음관의 특성
그리스도 교회의 전통적 죽음관은 사사화(私事化)되고 내면화된 탈세계적이고 탈사회적 죽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관하여 졸문, “졸말론의 어제와 오늘”, 『2000년대의 한국교회』, 21-26면; 졸문,“죽음의 이해와 종말신앙”, 『제삼천년기의 한국교회와 신학』, 바오로딸 2000, 348-358면 참조.
1) 전통적 죽음관의 탈세계성과 탈사회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볼 것이다.
예수의 지상 생활이 끝나고 임박한 것으로 예고된 그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일차적으로 죽음 이후의 자신의 개인 운명에 쏠리게 된 것이다.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에서 죽더라도 내가 과연 어떻게 영원히 살 수 있는가?” 피안에서 불멸하는 개인의 영혼 구원에 역점을 두고 형성된 죽음관의 지평 안에서 사회-정치적 연관으로 유대된 인류 전체와 세계 전체의 완성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뒤편으로 밀려나면서 현세 부정적인 입장이 형성된 것이다. 이 죽음관 안에서 사회・정치적 현실 세계는 자체적으로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현 세계의 의미란 고작해야 영혼 구원을 위한 시험 기간, 즉 사사화되고 내면화된 윤리-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피안세계를 준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서만 드러날 뿐이었다. 피안세계에서의 보수(報酬)가 차안 세계에서의 삶의 결과에 따라 내려진다고 강조되기는 하지만, 현 세계는 영원한 피안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사라지는 무상한 실재로 간주되면서 부정적 실재로 나타난다. 차안과 피안의 분리에 정초하고 형성된 전통적 죽음관은 신앙생활 자체를 탈세계적이고 탈사회적인 내세지향적 성격을 지니도록 만들었다.
저들은 영혼의 불사 불멸성을 믿는 종교적이고 죽음관을 하나의 환상이라고 비판하면서 사후의 내세를 믿지 않고, 죽음을 현세 삶의 종말이자 단절로 이해하면서 현세의 삶에만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은 조기 사망을 비자연적인 재앙으로 간주하지만, 소위 ‘천수’(天壽)를 누리고 노년기에 맞는 죽음을 ‘자연적 죽음’이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죽음이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모든 소외로부터의 해방 노력을 통해 쟁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오늘날에는, 죽음이 사회 문화의 맥락 안에서 천차만별의 양식으로 발생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부르조아 세계에서 죽음은 최대한도로 그 시각이 연되며 그럴듯하게 꾸며진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때이른 불의한 죽음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매일처럼 죽음과 동반하여 살아가고 있다. 수백만의 아기들이 한 살도 채우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영양실조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강국들과 부유한 계급들에서는 이미 옛날에 극복된,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오늘날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사회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부강국들과 부자들의 가공할 이기적 결정에 의하여, 부강국들과 부자들의 인간적 범죄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 수명을 다하고 고령에 편안히 죽을 수 있는 사람의 경우가 매우 드물다.” 리바니오/빈제메르, 앞의 책, 206면 이하.
독일 철학자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에 의하면, ‘자연적 죽음’ 개념은 죽음 이후의 피안적 삶에 대한 단호한 부정을 자체 안에 내포하는 세계 변혁의 새로운 실천 계획을 의미한다. “피안 세계의 부정만이 결과적으로 차안세계의 긍정을 가져온다. 천국에서의 보다 개선된 삶의 지양(止揚)은 다음과 같은 요청을 내포한다. 지구에서의 삶은 개선되어야 한다. 그것은 미래를 게으르고 비활동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의무와 활동의 대상으로 변모시킨다.” L .Feuerbach, Gesammelte Werke VIII, hrsg.v .H.-M. Sass, Stuttgart 1960 ff, pp.354- 355; 포그리믈러, 앞의 책, 33면에서 재인용.
‘자연적 죽음’의 주창자들은 죽음을 불가피한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개인들이 인간적 연대감에 입각하여 인류의 자유 신장에 기여함으로써 역사 속에 계속 살아 있을 수 있게되기에 ‘불멸한 것’으로 남는다고 본다.
II. 현대 교회의 죽음관
현대 그리스도교 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죽음관의 특성을, 죽음 자체와 영혼과 육신의 분리를 통한 영혼불멸성의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기로 한다. 이하 내용에 관하여 그레사케, ⌈종말신앙⌋, 90-107면; 같은 저자 "Tod und Auferstehung", pp.109-120; K. Rahner, Zur Theologie des Todes, pp.17-26, 52-66; 포그리믈러, ⌈죽음⌋, 146-169면; 같은 저자, Hoffnung auf Vollendung, pp.141-155 참조.
1. 현대 교회의 죽음 이해
현대 교회의 죽음관도 본질적 내용에서 전통적 입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개진하는 죽음관에는 무신론을 위시한 현대 사조의 죽음관의 도전적 통찰이 나름으로 수용되어 있다.
1) 개인의 죽음은 자연적으로 맞이하거나, 죄악에 사로잡힌 가운데 맞게 되거나, 신앙 안에서 맞이하는 가에 따라 다른 의미로 파악된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죽음이 인간의 삶을 무에로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존 양식을 종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죽음으로 한계지어진 시간 안에서 인간은 세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생물과 사물들과 맺는 다양한 관계 안에서 자신을 성숙한 인격으로 이끌어야 한다. 죽음이 자유 역사의 끝이자 완성인 한에서 죽음은 인간이 자유 안에서 자신의 현존재를 전적으로 성취하는 지고의 행위로 이해되고 이 죽음은 무(無)에로의 생명의 해소를 뜻한다기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영위되는 인간 삶 양식의 지양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인간의 죽음이 지상에서의 삶을 시간적으로 한정시킨다는 사실 자체를 죄악의 결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죽음을 현실적으로 체험하는 유형 양식은 죄의 결과라고 본다.
본래 진화적 세계 안에서 살아가도록 조성된 인간은 ‘자신의 삶의 행위’ 속에서 자신의 자유의 역사를 완성 단계까지 고양시켜서 삶을 완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삶을 잘못 이끌어갔다. 인간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과 책임있는 삶을 영위하는 대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2고린 5,15) 위한 것으로 여기며 생활한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또는 하느님을 거슬러서 충만하고 거룩한 삶을 열망하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려고 한다. 인간이 현세의 쾌락이나 부, 성공, 권력 등을 소유함으로써 삶을 소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그를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의미를 거스르는 삶의 단절로 체험된다. 죽음 속에서의 생명의 손실은 소유하고자 하는 원의로 구성되어 있었던 자기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다.
이처럼 죄인의 죽음 체험, 사실상 모든 인간의 죽음의 체험은 죄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죽음은 하느님과의 복된 일치에로 이끄는 관문으로가 아니라, 지상 생애의 무의미하고 어두운 단절로서, 의문 투성이이고 위험스럽고 인간을 공포 속으로 휘몰아가는 무시무시한 실재로 체험된다.
인간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안에서 그분처럼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을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께로 양도할 때에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만 자유롭게 되고 모든 것을 수락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 이 자아 포기의 체험이 죽음 속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자유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탈(逸脫)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자신이 무력하게 되는 절정으로 체험하게 된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러한 무력감을 절망하지 않고 최후까지 희망하면서 수락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선물로 다가온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이러한 죽음을 맞는 인간은 자신에 대한 아집(我執)이자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는 자세를 보여주면서 아울러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벗어나고 죽음 앞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평화로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신앙 안에서 자기의 생명을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과 과제로 받아들이고 이웃 인간들에게 봉사하며 살아가면 죽음이 희망의 장으로, 하느님의 영광 안으로 이전하는 복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에 관하여 졸저, 「그리스도와 구원」, 성바오로출판사 1981, 114-116면 참조.
이러한 죽음의 체험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결실이다. 신앙과 예수 추종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본질 소인으로서 선익을 위한 헌신과 봉사에 자신을 양도하는 사람은 죽음을 진정하고 궁극적 삶으로도 체험한다. 죽음과 삶의 이러한 변증법적 일치 안에서 ‘죽으면서 살아갑니다’(2 고린 6,9)로 증언되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정식으로 표현된다.
‘전적 죽음론’의 견해에 따르면, 영혼육신 분리로서의 죽음 표상은 죽음이 인간의 본질을 전혀 관통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냄으로써 죽음의 엄혹성과 철저성을 결여하고 있다. 유한한 인간에게서 죽음을 초월하여 불멸적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영혼을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것이 죽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전적으로 죽음에 처해진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은 전체 인간의 절멸로서 여하한 타협이 불가능한 삶의 단절로 규정되고 아울러 ‘죽음까지의 삶’과 ‘죽음을 넘어선 삶’ 사이의 비연속성이 강조되어 있다. 인간 편에서는 아무런 관계의 담지 능력이 결여된 가운데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의만이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독일 신학자 윙겔(E. Jüngel)은 인간의 삶이 세계 안에서 다수의 친교관계 안에서 영위되는 데, 죽음은 삶의 관계를 타파하는 무관계성의 사건으로, 그래서 인격의 종말로 생각되어야 한다고 본다. “죽음은 모든 삶의 관계들을 전적으로 단절하는 무관계성(Verhältnislosigkeit)의 사건이다.” E. Jüngel, Tod, Stuttgart 1971, p.145; 포그리믈러, 죽음, 94면 이하 참조.
‘전적 죽음론’의 극단적인 경우에 영혼은 존재하기를 그친다고 강조되고 있다. 유연한 입장에 따르면 영혼이 일종의 수면 내지 마비상태에서 계속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자의 경우 사자들의 부활은 일종의 새 창조로 파악된다. 부활은 하느님이 인간에 대해서 가지신 기억에 의거 육신과 영혼으로서의 전인의 부활로 심층으로부터 새 창조로 이해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영혼이라는 ‘본성’(natura) 자체가, 플라톤-그리스적 영육 이원론에서 규정되듯이, 불멸의 능력을 소유하는 실체라고 대하지 않고 불사불멸의 영원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선물이기에 불사불멸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하 내용에 관하여 그레사케, ⌈종말신앙⌋, 90-107면; 같은 저자 "Tod und Auferstehung",pp.109-120; K. Rahner, Zur Theologie des Todes, pp.17-26, 52-66; 포그리믈러, ⌈죽음⌋,146-169면; 같은 저자, Hoffnung auf Vollendung, pp.141-155 참조.
그리고 교회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 인간 영혼이 본질적으로 육신과 관계를 맺는 속에서 실존한다는 입장을 부단히 피력해 오고 있다. 여기서 육신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지 않는 영혼은 일종의 ‘불구존재’이고 인간의 일부이고, 전인적 인간일 수 없다는 통찰이 생겨나게 된다. 교회의 입장을 최근에 가장 권위있게 천명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II, 1962-1965)는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에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드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賤視)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하겠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자신 앞에서 영적 불멸의 혼(魂)을 긍정하게 될 때...단지 물리적 내지 사회적 조건의 소산인 덧없는 환각에 속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깊은 진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14항.
현대 가톨릭 신학에서 ‘사자들의 부활’ 내지 ‘육신의 부활’ 상념에서 현세에서 살았던 개인의 부활인 한에서 어떠한 양식으로거나 삶의 정체성을 지속시키는 요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 개진된다. 이러한 영육합일적 입장에 상응해서 오늘날에는 죽음 속에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세상 마지막 날에 육신이 영혼을 뒤따라 영생에 참여한다는 표상 대신에 죽음 속에서 이미 육신의 부활, 전체 인간의 부활이 발생한다는 견해가 많은 신학자들과 공식적이라 할 만한 교회문헌에서도 피력되고 있다. 개인의 죽음 속에서의 육신 부활을 말하는 견해에 관하여 로핑크,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신교선/이석재 역, 성바오로출판사1986, 31-55면; 독일어판 화란 교리서,Glaubensverkündigung für Erwachsene, Nijmegen-Utrecht 1968, pp.524-531; ⌈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 하나인 믿음⌋,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한국신학 연구소 펴냄, 분도출판사1979, 517-520면 참조.
여기서 부활은 신체나 시체의 재생을 뜻하지 않고 육신-영혼적 단일 존재인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리게 됨을 뜻하고 있다. 물론 죽음 속에서 부활한 육신은 현세적 육신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이차적 새로운 실재이다(1고린 15 참조). 부활한 육신은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는 하느님에 의하여 철저히 관통되는 육신적 인격체로서 현세 인간의 사고와 표상능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새 창조의 결실인 것이다.
그리고 한 인간이 세계 안에서 생활하다가 죽고 난 후,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이 현세에서 맺은 모든 관계로 파악된다. 죽음을 통한 부활에서 한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맺었던 모든 관계, 즉, 인격적이고 사회・정치・문화적 차원의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가 해소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은 다른 인간들과 세계 전체와 여전히 유대되어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 자체가 바로 세계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활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의 인격체와 세계 자체가 부분적으로나마 완성의 상태에로 도달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유대를 맺는 가운데 충만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
2. 현대 교회의 ‘죽음의 문화’ 이해
현대 가톨릭 교회는 죽음을 당대의 지배적인 시대적 특징과 연관시켜 ‘죽음의 문화’로 규정하면서 대조되는 ‘사랑의 문화’ 건설을 촉구하고 그 실현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교황은 반생명적 현상들의 배후에 문화적 위기가 자리잡고 있으며, 현대 세계 안에서 생명에 대한 공격이 사회 여론과 공권력에 의해서 광범하고 체계적으로 자행되고 있어서 생명을 경시하는 반생명적 풍토가 확산되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사회가 생명에 반하는 행위들을 용인하고 조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명을 거스르는 실제적인 ‘죄의 구조들’을 만들어내고 강화하는 ‘죽음의 문화’를 고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복음」, 24항.
생명을 위협하는 갖가지 폭력, 학살, 전쟁과 같은 기존의 재앙에 더하여 발생하는 새로운 반생명적 위협들이 만연하면서 죽음의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진정한 ‘죽음의 문화’라는 형태를 취하는 그러한 문화의 출현입니다. 강력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향들이 이러한 죽음의 문화를 활발하게 조장합니다. 이 경향들은 지나치게 효율성에만 관심을 가진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라고 부추깁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 상황을 바라본다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싸움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더 큰 수용과 사랑과 보살핌을 요구하는 생명은 쓸모없는 생명이라고 간주하거나 또는 참을 수 없는 짐으로 생각하며, 따라서 이런 저런 방식으로 그런 생명을 거부합니다. 병이나 장애 때문에, 더 간단하게는 단지 그 존재 자체 때문에,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들의 복지나 생활 양식을 위협하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없애버려야 할 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 12항.
2)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교회와 신자들의 자기 복음화에 입각하여 선의의 개인 내지 단체들과 협력하여 현대 세계 안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를 주도하는 세속주의의 도전을 극복하고 ‘사랑의 문화・문명’의 창출을 도모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계기술의 발달에 입각한 힘과 자산의 축적을 지향하는 이러한 소유 정향의 죽음의 문명보다, 정의롭고 형제애 넘치는 인간적 문명의 실현을 지향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물질을 극복하고 ‘사랑의 문화’ 내지 ‘사랑의 문명’을 건설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계획이거니와,... 인간의 문명 전체를 ‘사랑의 문명’으로 변형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는 죽음의 문화에 의해 각인된 현대 문명의 위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평화, 연대, 정의, 자유의 보편 가치들에 기초하는 사랑의 문화・문명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죽음의 문화’를 거슬러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면서 생명의 증진, 인류의 평화와 환경 보호를 위한 학술적이고 실천적 노력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 실천, 세계 안에서의 정의와 평화 구현을 위한 투신 행위들, 국제사회에서 빈국들이 안고 있는 부채의 탕감 내지 감면을 위한 노력, 상이한 문화 사이의 대화, 여성의 권리존중, 가정과 결혼의 장려행위 등의 노력을 통하여 ‘생명의 문화’ 창출을 위해 나름대로 진력해 오고 있다. 한국 교회 역시 80년대 이래 범교회적으로 일련의 생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금 세계에 만연된 ‘죽음의 문화’의 기본성격을 언급하면서 이에 대조되는 입장을 정립하는 것이 요청된다.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죽음의 문화’가 그동안 인류 세계 안에서 동서를 막론하고 지배적인 문화로서 ‘남성 문화’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죽음의 문화는 강자가 약자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시하는 특징을 지닌다. 우선적으로, 세계 안에서 인격적 인간이 비인격적 자연 사물을 정복하고 소유물화하는 것이 정당시되어 있다. 또한 부강한 구미 백인 사회가 주도세력으로서 빈약한 유색인 주변 제3세계를 군사정치경제종교적으로 우위권을 행사하며 지배하는 것이 정당시된다. 각 사회 안에서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소수 상위층이 빈한하고 무력하고 소외된 다수 하위층 위에서 특권을 향유하는 질서가 고착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 안에서 여전히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을 정당시하는 질서가 건재하고 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을 정당시하는 문화는 ‘남성 지배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이처럼 강자가 약자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형태의 ‘죽음의 문화’는 ‘남성 지배 문화’로 규정되어 마땅하다.
이러한 ‘남성 지배 문화’에 대조되는 문화가 ‘여성 문화’이다. 이 문화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과 수탈과 소유 대신 상호간의 섬김과 나눔과 공존을 본질로 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 문화는 ‘살림의 문화’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현존하는 지배적 남성 문화에 대조되는 여성 문화의 창출을 통해서 ‘나눔의 경제’가 지니는 문화사적이고 구세사적 의미가 올바르게 드러나고 좌표가 제대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III. 결론 - 가톨릭 교회의 정화(淨化) 필요성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형성된 죽음관을 전통적이고 현대적 입장으로 대별하여 살펴 보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소유・지배 정향의 문화인 죽음의 문화가 주도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 자신이 현실적으로 소유‧지배‧죽임의 문화에 속하지 않는지를 진정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초기 교회인 예수의 제자공동체 안에서 일반 사회에서 당연시 되어온 소유와 지배의 삶의 자세와는 대조되는 나눔과 섬김의 생활 양식이 활성화 되었다. 그분과 함께 시작된 하느님 나라로서의 제자공동체는 애당초부터 구성원들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드는 형제-자매적 공동체였다. 그런데, 지난 80년대 이래 한국 교회의 지도층은 군사 문화의 통치집단에 버금가는 권위적 종교관료 집단이 되어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직자들이 내면적 영성을 고양하고 심화시키는 영성가로서 생활하기보다 행정적이고 사법적 권한을 행사하는 종교 관료로서 일반 신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관료집단에게서 소유와 지배 정향의 생활자세가 정착되어 있고 집단적 이기주의의 행태를 드러내고 있다. 사랑의 문화 내지 문명은 소유가 아닌 나눔을, 지배가 아니라 섬김을 추구한다. 교회 지도층들이 소유와 지배에 정향되어 있는 현대 사회 풍조와는 대조되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소유와 지배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오늘날 인류 사회 안에서 소유와 지배, 그리고 죽음의 문화에 대한 염증이 확산되고 대조적인 삶이 이미 다양하게 추구되고 진전되고 있다. 소유와 지배, 그리고 죽임이 정당시되는 전체주의적 체제가 외면당하고 각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질서가 정치제도 차원에서 세계적으로 정착되는 단계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이 접어들고 있다.
‘남성 지배 문화’ 집단으로서의 가톨릭 교회가 구미 사회에서 거의 철저하게 불신당하고 외면당하는 것은, 모든 개인이 인격제로서 존중받아야 된다는 범인류적 공감대와는 무관하게 전근대적 위계질서에 입각한 권위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소유・지배・죽임의 ‘남성 지배 문화’로서의 ‘죽음의 문화’를 탈피하지 않고 나눔・섬김・친교의 ‘여성 문화’로서의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는데 적극 투신하지 않을 때에는 존폐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는 21세기 중에 사랑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역사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고착되다시피한 ‘반생명적 지배-복종 관계의 죽음의 문화’를 지양하고 새로운 ‘형제자매적 친교 관계의 사랑의 문화’를 교회와 세계 안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 구성원들 스스로 먼저 비복음적이고 반생명적 소유와 지배 정향의 사고 및 생활 양식으로부터 나눔과 섬김 정향의 사고와 생활 양식으로의 철저한 전환을 이룩함으로써 생명을 수호하는 과업 수행에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일 때에 죽음의 문화가 사랑과 생명의 문화로 변형되는 놀라운 일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믿는다.
심상태(수원가톨릭대 교수・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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