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학

[스크랩]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

수호천사1 2018. 1. 8. 15:33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의미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일을 흔히 "예수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그 의미가 손상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좋은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존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의미를 함의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돈과 재화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학 기술을 믿거나,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믿는 이들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대체 이 "예수 믿는다"는 말로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1)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고(예수님을 "구주, 구원주"[Saviour]로 믿음)

(2) 삶 전체를 예수님을 의존해서 살아간다(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음)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차례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번 호에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우리의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의존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점,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우리의 상태가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전혀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2:1). 이를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의 영혼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기 이전의 상태를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보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바르고 온전하게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 한 사람만이 예수님과 관계되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상태를 성경을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또는 다른 인간들의 힘에 의존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을 철저하게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참으로 철저하게 절망한 이들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신이 구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어떤 기여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자신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를 하나님께서 구원 사건을 일으키신 그대로, 또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후에 우리의 자리, 우리의 형벌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리 구속[代贖]의 방도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구원 사건을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이루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전 15:3,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신 이런 구원의 방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서,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건과 그것을 전하는 말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고전 15:2).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의 구원 방도는 너무 쉬워서 그런 식으로 구원하려 하신 것은 옳지 않다든지 하는 식의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의 방식을 어리석은 것이라거나,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하여 죽고 돌아가신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고전 1:18, 24), 그 수욕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든지, 있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라든지, 실제 역사 가운데서의 부활은 없이 그 의미만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오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시고 다시 사신 것에 온전히 의존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25).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며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그것에 근거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에 있음을 믿으면서, 언제까지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구원을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영원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든지 구속해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찌기 죽임을 당하셨던 그러나 다시 사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어린 양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 드리며 감사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만 하고 있는 이들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손발이 되어 그가 이루시려는 일을 열심히 이루어 가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의 또 다른 부분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
우리는 지난 번 글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였다. 그것이 예수 믿는 일의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일은 단지 그것으로 그쳐지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Saviour)로 받아들인 이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모시고 산다. ,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종(slave or servant)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1. 우리의 소유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우리의 소유주(owner)로 인식하며 그렇게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고전적인 고백(classic confession)이다. 사실 우리는 창조와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중(二重)으로 주님의 것이 된 존재들이다. 창조로 인해 모든 사람은 본래 주의 것이나, 그들이 주 하나님을 저버리고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그 구속을 적용해 주셔서 우리를 다시 그의 것으로 삼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금 주께 속한 자로서의 자의식을 분명히 하여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b-20)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구속된 우리의 존재 전체를 다 주의 것으로 여기면서 주님의 뜻을 이루게 위해 노력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가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주를 위한 존재로 날마다 드려 나가며 그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예배이고, 특히 그 중의 헌상 순서가 그러한 것이다. 구속함을 받은 나 자신과 나의 존재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에 의존해서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마음을 다 표해 내는 것이 우리의 헌상의 의미이다.
 
또한 나를 주께 속한 자로 여기며 사는 것은 사실 큰 은혜가 되는 일이다. 주의 소유된 존재이니 주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며, 그리하여 결국 당신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의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의 소유를 삼으셔서 우리를 이용하여 무슨 별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인간이 마땅히 나아가야 했던 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런 경계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우리는 가장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런 인간 됨의 실현을 주께서 친히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소유권이 주께 있음을 인정하고 주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 걱정을 다 주께 맡기는 것이다. 그가 우리의 소유주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2. 우리 삶의 목적이신 그리스도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바로 우리 주님의 영광과 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의 의미가 드러난다. 나의 생의 궁극적 목표를 다른 곳에 두지 아니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나의 삶에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이는 삶의 목적이 없을 수도 있어서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겠다고 살수도 있고, 어떤 이는 나름의 목표가 있어서 자신의 행복이나 가정의 행복이나, 국가와 민족의 번영이나 온 세상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살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구주로 받아들인 이들은 이런 것들로서는 실상 그 어떤 행복도, 가정의 번영도, 민족의 발전도, 세계의 평화와 발전도 온전히 이룰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면서, 이제 삶의 목적이 바뀌어 오직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그의 나라와 그 뜻을 수행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라고 여기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이기주의자(egoist)일 수도 없고, 가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혈연 이기주의자일 수도 없고, 민족을 위해 살아가는 민족지상주의자일 수도 없고, 온 세상의 평화를 지고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해동포주의자(cosmopolitanist)나 인류의 인간 됨을 지고한 가치로 여겨서 하나님조차도 이에 도움이 되면 섬길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개념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도주의자(humanist)일 수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특히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 스스로가 타락하여 나갔을 때 그들에게 구원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며 자신과 가족과 민족과 온 인류와 온 세상을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는 일에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려는 일념(一念)을 가지는 것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이요,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 사는 이요, 그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하는 이이다. 자신의 삶을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려는 노력과 헌신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종은 예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이이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3. 우리 삶의 안내자요 모범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서만 주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사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순간순간의 삶의 진행에서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사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는 열망으로 가득해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성경의 바른 뜻을 이해하려는 일에 열심이게 되고, 그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주님과 교제하는 일인 기도에 열심이게 된다. (1)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2) 그 말씀의 우리의 구체적인 정황에 주는 함의를 알기 위해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에 열심이며, (3) 기도한 자답게 주님의 뜻을 이루기에 열심인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의 하나는 신약 성경, 특히 복음서에 나타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잘 살펴보고, 바르게 해석하여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과 주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 가는 일이다.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일이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이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 그가 이루신 구속에 적용함을 받고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이가 구주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드리며 주께서 친히 보이신 모범을 쫓아가는 데서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이만이 진정한 제자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주께서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가셨으니, 이제 나는 존귀, 영광, 부요, 건강의 축복을 받겠다고 나서는 이는 자신이 주를 따라간다고 나서는 그 근본적 동기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세우셨으니 이제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다른 이를 위해 내어 주는 희생을 감수하고서 고난의 길에로 나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종이요, 제자들인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어야 한다.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 사는 제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일에서는 믿음으로 그 사실과 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은 이제 동일한 믿음으로 우리 존재 전체를 다 주께 드려 나가는 일에 열심이어야 한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께 드려 나가는 일에도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trust in God)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3)
우리는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1) 예수님을 나 자신과 온 세상의 유일한 구주(the only Saviour)로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것이고, (2)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the Lord)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표현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온 천하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음을 의식하면서, 의식적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 하나님 존전(尊前) 의식[神尊意識]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Coram Deo(1) 죄의식(Sin-Consciousness)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무엇보다 먼저 가장 깊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는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과 용서받은 죄인들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죄의식이 기독교의 현관이요, 참 기독교에 이르는 통로라는 우리 선배들의 생각은 참으로 옳은 통찰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엄위하시고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감히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죄의식을 실존적으로 깊이 있게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어 왔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유난히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느끼고, 어떻게 죄인인 내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참으로 실존적으로 고민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심각한 고뇌를 잘 아는 그의 후예들 가운데서는 기독교적 죄의식을 깊이 있게 설명한 이가 많다. 가장 깊이 있게 죄의식을 가지게 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절망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서 철두철미 절망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나 감정이나 이성을 전혀 내세우거나 의존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에 자기를 내어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도 인간적인 그 어떤 것에 의존하려고 하는 이는 아직도 철저하게 절망하지 않았고, 아직 철저한 죄의식을 갖지 못한 자이다.
 
Coram Deo(2) 칭의 의식(Justification-Consciousness)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代理 贖罪] 사역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에게 선언하시는 죄용서, 즉 칭의(稱義)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참으로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절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선언하신 것을 그대로 수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행위로 하지 않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그대로 믿는[, 받아들이고 의존하는] 것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칭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참된 죄의식을 가진 이는 칭의 의식을 가지며, 또한 참된 칭의 의식을 가진 이는 참된 죄의식을 가진다. 이는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설이 바로 기독교적 진리이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면서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보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를 온전한 의인으로 보시고 받아 주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끝임 없이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죄를 지어 나가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를 의인으로 보신다는 뜻이 아니다. 루터의 천재적이고 선언적인 표현은 때로 그런 오해의 소지를 던져 주지만, 그가 성경으로부터 발견하고 표현하려고 하는 바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무리 완벽히 노력해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철저하고 완벽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죄인일 뿐이지만(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절망), 그런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온전하신 삶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 즉 우리에게 전가된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의인(義人)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다 떨어진 누더기 같은 의만을 내는 우리들로서는 죄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이라는 것이다.
 
Coram Deo(3) 성화의 삶(The Life of Sanctification)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동시에 의인이요 죄인으로 보는 이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성화의 삶을 살아 나갈 수밖에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다른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 전체(Tota Scriptura), 즉 온전하게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규범으로 하고(Sola Scriptura), 성령님을 의존하여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삶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성자의 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그 사역을 적용시켜 주시는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삶이 된다. 그는 십자가의 빛에서 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사는 성령의 사람이요,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이다. 바로 여기에 성화의 삶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일상성과 현실 전체를 성경과 성령님의 가르침 아래서 살아가는 삶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인간의 삶의 모든 부분과 영역이 다 이런 성화의 삶, 성령님과의 교제의 삶,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려는 삶의 영역인 것이다. 이런 영역 밖이나 주변의 작은 소위 종교성의 영역에 성화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이원론적인 것으로 지칭되기도 하는 그런 소아병적인 사고와 삶의 분과화(departmentalization)는 성경적 기독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성(everyday life)과 공적인 영역(public arena)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성화의 삶이 있어야 한다. 성화는 일상성과 공적인 삶의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세속의 한 가운데 우리의 거룩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있는 이는 세속 속의 성자(the secular saint)이다.


Coram Deo(4) 사랑의 삶(The Life of Love)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은 같이 하나님 앞에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겨 나간다는 의식을 나누는 사랑 의식(agape-consciousness)일 수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홀로 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정죄 된다(따라서 여기서는 아무런 비교 의식도, 우열 의식도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죄의식을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믿음으로 칭의함을 받는다(여기서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이들은 자신들만이 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홀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고 칭의함을 받은 다른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참으로 냉정하게 홀로 서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사랑할 많은 이들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함께 살아가도록 새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공동체 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실천을 연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탄생된 이 공동체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고 연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인 현실(可視的 現實)로 이 세상에 드러내야만 한다.
이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함께 그는 동시에 그 공동체 안에서 연습한 그 사랑을 온 세상 안에 가서 실천해야 한다. 이 세상은 그의 사랑이 표현되어야 하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가 나타나야 하는 무대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피하여 가야 할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사랑의 실천의 장()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님 사랑의 도관(channel of the love of God)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사랑의 삶일 수밖에 없다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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