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대한 조명
성령님의 조명이 있으면 십자가의 사건이 나 자신의 죄를 위해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가를 이해시키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의에 대한 조명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지식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조명으로 십자가의 도를 알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하고 인식할 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복원된다. 회복은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하여 죄의 부패함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죄악에 파묻혀 옳고 그름을 모르고 망가져가고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바라보시며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그 잘못 때문에 죽어가는 자식이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그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영혼이 마비되어 죄악 속에서 죽어가는 자식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다.
“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한글킹]
그렇다면, 독생자는 어떤 분인가?
“6 그는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탈취라 생각지 아니하셨으니 7 오히려 자신의 영예를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어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셨느니라. 8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 까지라”(빌 2:6-8) [한글킹]
본문의 말씀을 보면 독생자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아버지가 죄악으로 죽어가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삼위 가운데 한 분이신 성자 하나님을 보내신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셨으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셨다.(골 1:15, 각주참조)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에게 우리를 대신 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고후 5:21, 각주참조)
독생자 예수는 죄를 알지 못한 분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에게 우리의 죄를 모두 덮어씌우고 그 죄의 대가를 물어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우리를 깨끗한 의인이라 하시며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켜 천국을 소유하고 영생을 얻게 하신 과정 속에 하나님의 본체이신 독생자의 죽음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은혜이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46 제구시경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 질러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라“(마 27:46) [한글킹]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마지막 운명하실 때 하신 말씀으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예수님과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으셨다. 하나님과 단절된 곳, 그곳은 지옥이다. 우리가 지옥의 형벌을 피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옥의 형벌을 감당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조명되어야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의 처절한 부르짖음은 지옥의 형벌을 받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루기 위하여 우리 대신 지옥을 가신 것이다.
“9 따라서 그가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먼저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엡 4:9) [한글킹]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으로 내려갔었다.(영문 사도신경)
본문의 내용은 주님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셔서 지옥의 형벌을 담당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지옥의 형벌까지 주님께서 담당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주님의 죽음은 순교자의 죽음과 다른 것이다. 순교자의 죽음은 지옥의 형벌이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은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비싼 대가가 치러져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베풀어주신 것이다. 십자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항상 십자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첫째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때문에 성령님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의가 드러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부패함과 교만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행위에 터 잡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사람의 행위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겸손 하라는 것이다.
“8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시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한글킹]
셋째는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기 위이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엡 2:10, 각주참조) 아울러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엡 1:7-10, 각주참조) 결국은 하나님과 동행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심이 목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삶 속에의 풍요를 누리라는 것이다. 사탄에게 내어준 모든 것들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세상 신은 사탄이고 세상은 돈이 지배하지만 인간 중에 솔로몬만큼 부를 누린 사람이 있는가 하나님은 이것을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는 비교될 수 없는 풍성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그의 자녀들이 알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왕의 자녀로서 그 지위를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삶을 영위할 것을 촉구하신다.
그동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시어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궁극의 목적은 영생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영생이 강조가 되어야 함은 옳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축복이 죽음 이후의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 신앙의 대부분이 형식적인 신앙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과저에서의 고통과 멸시, 천대가 우리 삶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사실이 우리 삶 속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4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는데도 우리는 그가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 줄로 생각하였도다. 5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사 53:4-5) [한글킹]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셨으며, 찔림과 상함을 당하시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벗겨주셨고, 주님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채찍을 맞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실이고 이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주님께서 찔림과 상함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벗겨주셔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삶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채찍을 맞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9 너희가 우리 주 예구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고후 8:9) [한글킹]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극한 가난에서 연보를 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하는 내용으로, 믿는 자들이 물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머리 둘 곳이 없이 가난하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대목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러하셨다. 태어나실 때에도 극한 가난의 삶을 사셨고 공생애 사역 중에도 마찬가지셨다. 제자들이 다 각자 집으로 돌아갈 때 주님께서 올리브 산으로 가신 것은(요 7:53, 外 각주참조) 갈 집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주님의 삶의 모든 것은 모두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 ⌜성경적 생활⌟을 참조하라.)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 속에 대속의 사역을 비롯하여, 상천하지上天下地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시키고 그 발아래에 두는 모든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직면한 우리 삶의 모든 문제 역시 주님의 발아래에 놓여 있고 이미 해결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주님과 연합되지 못함의 문제, 즉 거듭나지 못하여 신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것이 문제이고 둘째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능력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으신 주님을 의지하고 그 해결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주님을 만나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말씀은 움직이게 된다.
재정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가 가난하게 되신 것은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각주참조)는 말씀을 붙들고 명령함으로써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명령함으로써 고통 속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삶에서 평화가 없는 사람들은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을 붙들고 명령함으로써 불안과 걱정 속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결코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도 아니고,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활 속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이루어지는 현실의 실질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악 속에서 죽어가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생과 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그분을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마 22:37, 각주참조)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회복시리즈 01. 회복의 개요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복음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율법주의 (0) | 2018.01.08 |
---|---|
[스크랩] 당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0) | 2018.01.08 |
[스크랩] 예수님 이전에는 ‘양심’으로 구원을 받는가? (0) | 2018.01.03 |
[스크랩] 바울의 구원론 (0) | 2017.12.30 |
[스크랩]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에 대한 이해 (0) | 2017.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