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주어졌다.(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책⌜성경적 구원⌟03. 율법과 구원을 참조하라.)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 주어졌다는 것은, 율법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져야 할 규범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주님께서는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시며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하셨는가?(마 23:27-28, 각주참조) 그들 속에도 예배가 있었고 십일조가 있었고, 절기헌금이 있었다. 즉, 계명과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 속에 주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되는 방법을 몰랐고 하나님과의 동행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내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려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보면서 성경의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경우에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질되어지는가를 보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율법과 의식으로 채운 자들이다. 누누이 강조되지만 신앙생활은 성경 말씀을 따르며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듣고 그 지시에 따라 순종하여 나가는 생활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을 분석해 보면 율법주의의 시작은 배부름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율법주의는 영적, 물적 여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 안일함과,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훈련과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의 이수 등에 의한 영적 우월감이 자리를 잡을 때 율법주의가 비롯된다는 것이다. 영적, 물적 여유가 있고,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것을 느긋하게 즐기는 순간, 세상을 의식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의식에 치중하게 된 것이다. 신앙적인 열심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열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4 나도 육신을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군가가 육신을 신뢰할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라. 5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인이며,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의하면 바리새인이라. 6 열성으로 말한다면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 말한다면 흠이 없음이라”(빌 3:4-6) [한글킹]
본문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신뢰할 만한 육체, 즉 세상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말한다. 요즘으로 말하면 모태신앙이라는 자부심, 교단에 대한 자부심, 학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태신앙이나 교단, 학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와 있다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자부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낫게 보인다는 영적 우월감이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에서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것 등 자신에게 자랑스럽고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것이다.(빌 3:70-9, 각주참조)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갈 때 불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룬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에 타서 없어진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고전 3:10-15, 각주참조)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말고는 없다. 십자가의 공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에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주의의 특징
율법주의의 특징 가운데 첫 번째는 생명이 없는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을 통한 부활과 생명이 핵심이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의식과 절차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주님과 연합할 수 없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생명이 없다. 따라서 율법주의 신앙은 생활 속에 일하시는 주님을 경험할 수도 없고 경건의 능력도 없고 믿는 자의 표적도 나타낼 수 없다. 즉, 생명이 없는 것이다.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생명이 삶 가운데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에 의해서 전적인 부패함이 보이고,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이때 경건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거듭남이 없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는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몰라도 경건의 실질이 없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릴 수가 없다. 율법주의자들은 교회에서는 천사와 같은 모양으로 거룩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속은 음란과 시기, 질투, 욕심과 정욕으로 들끓는다.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들 속의 죄를 이길 힘이 없는 것이다. 율법주의 신앙은 생명이 없는 죽은 신앙인 것이다.
율법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자기중심적인 삶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고 그 변화된 모습으로 인하여 주님 앞에 인도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의중은,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방법으로 세상을 사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을 보여주면서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여 그들을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그러한 하나님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종교인 것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은 하나님과의 교재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삶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이 방법대로 살았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가 계획할 필요가 없고 자원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은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취하지 않고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하나님께 이루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자기 방법으로 계획한 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힘들어 한다. 출애굽을 모세가 계획하지 않았다.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을 여호수아가 계획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이 때문에 출애굽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성경은 사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이에 대해서 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 ⌜영의 원리⌟ 영의 원리 14. 주권의 원리를 참조하라.)
율법주의의 세 번째 특징은 자기 의義이다. 자기 의의 논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매개체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예수님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자기의 행실을 의지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기 열심과 행실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기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자기 의義이다.
금식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금식을 통해서 자신이 바라는 은사를 받기 원하는 것, 즉 성령님의 은사를 받는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율법주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그 능력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주신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와 은사를 자신의 열심과 하나님께 드리는 고행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형적인 율법주의이고 자기 의義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은 십자가에서 흘린 피의 공로 외에 그 어떤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제외한 다른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의이다.
율법주의의 네 번째 특징은 영적 우월감이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사람들의 기준을 성경에서 살펴보면 마음에 순수함과 정직함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실험실에서 키운 풍뎅이 한 마리가 있었고 서울대학교 실험실에서 키운 풍뎅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골 교회에서 키운 풍뎅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각 장소에서 10년 이상을 키워서 어느 날 한 곳에서 만나 한 곳에 넣어놨는데, 아무도 하버드대학의 실험실에서 키운 풍뎅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시골 교회에서 키운 풍뎅이를 구별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풍뎅이는 그저 풍뎅이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보기에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져 있지 않으면서 좋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훈련을 받고 훌륭한 성경공부 코스를 마쳤다는 것으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 신앙의 규칙에 충실함을 자랑하는 것, 즉 새벽기도에 충실하고 봉사에 충실하여 다른 사람보다는 나의 신앙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영적 우월감이다. 새벽기도와 교회의 봉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나 자신에게 만족감이 있다거나 스스로 위로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영적 우월감인 것이다.
“26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니라”(고전 1:26) [한글킹]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세상의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고 세상에 능력 있는 자도 많지 않았으며, 문벌 좋은 자도 많지 않았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것이지 세상의 능력과 세상의 배경, 학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바리새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열두 제자들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었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다 리더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것도 형편없는 나사렛이라는 동네 출신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시각으로 볼 때 그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너희들이 해보니 뭘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고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순수함과 정직함이 있었다.
주님께서 이런 자들을 제자로 세우신 것은 참으로 절묘함이 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해 보아도 바리새인들의 학식을 따라갈 수 없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내놓을 것이 없었다. 지식도 없고, 사회적 배경도 없고, 학벌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서로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부족하지만 필요한 지체라는 것을 각인시키신 것이다. 하나씩 떼어 놓으면 부족하지만 다 모아놓으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연합이 무엇인가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시는 이유와 순수함과 정직함을 높이시는 이유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영적 우월감을 가진 자들의 특징은 말씀 앞에 두려워하는 자세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가치로 여기시는 것을 가치로 여긴다면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여 보면 율법주의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생명이 없는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복시리즈 01. 회복의 개요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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