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영성,기도

[스크랩] 왜 성령에 대한 주장들이 다른가!

수호천사1 2017. 11. 5. 20:25

[문제의 제기]

/ 왜 성령에 대한 주장들이 다른가!

 

 

많은 책들 가운데서 성령론에 대한 책을 볼 때면 어떤 책을 불문하고 머리가 아프다. 고전에서부터 현대의 저술까지 성령론에 관하여 나름대로 유명하고 정평이 나있다는 책들을 보면(각주참조) 신뢰할 수 있는 저자들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결론이 없다. 각자의 해석이 다르고 결론이 달라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알 수가 없어서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성령론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이해가 된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 어느 시대에 돌입을 하면 하나님께서 던지신 주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결론을 도출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세운다. 그리고 그 체계 아래에서 바른 신앙을 찾아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교회사를 돌아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메시아에 대한 논쟁 시대였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 후 초대교회 시대는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가?”(마 22:42, 각주참조)라는 영속적인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의 실체를 정립시킨 기독론의 논쟁 시대였다. 신학에 관한 모든 논쟁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운다. 영생은 양보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의 핍박은 상상을 불허한다. 기독교의 씨를 뿌리지 못하게 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교부 시대는 삼위일체를 놓고 논쟁을 벌인 신론에 대한 논쟁 시대였다. 이 시대에서부터 이단 시비가 붙고 많은 사람들이 마녀재판으로 인하여 화형으로 죽어갔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구원론에 목숨을 걸었던 구원론의 논쟁 시대였고,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론의 시대이다. 따라서 성령론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다. 성령론은 보이지 않는 영의 실재와 그 능력을 다루는 이론인 만큼 어느 때보다도 이단시비가 많다. 각자가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을 이론으로 정립하면서 자신의 주장에서 어긋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로, 같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이해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는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는 창끝이 있다. 교회사가 증명을 하듯이 종교적인 논쟁은 지금까지 피를 불러 왔다. 영적 전쟁이라고들 말한다. 영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타협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살인을 한다면 이들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핍박한다면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교사를 보면 순교자들이 저항할 힘이 없어서 순순히 목을 내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롬 12:19, 각주참조) 하셨기 때문에 묵묵히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단 논쟁은 서로가 심판자이고 집행자이다. 성경대로 가는 사람들이 없다. 이들 속에 있는 영의 실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논쟁에서 이단 시비가 붙는 것은, 이미 사랑은 없고 원수와 마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원수는 사랑의 대상이고(마 5:44, 각주참조) 마귀는 대적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약 4:7, 각주참조)

 

성령론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은 진리의 영인데 왜 유독 성령에 관해서만 진리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각각 다른가를 묻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도 진리이다. 금은 누가 보아도 금인 것과 같이 진리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고 진리 그대로이다. 정통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십자가 사역에 대하여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사건’이라는 다 똑같은 내용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만은 성령의 사역에서 등장하는 성경의 용어에 대해서도 갖가지의 주장이 다르고,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치열하게 다툰다. 따라서 이 책의 Part Ⅰ에서는 우선 성령에 관한 용어에 대하여 고찰할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인침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각자의 주장이 상반되고,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하여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샘을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구구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인침을 성령 세례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성령의 인침이 무엇이고 성령 세례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만약 성령의 인침과 성령 세례가 동의어의 개념이라는 것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설명이 없다. 성경에서 성령의 인침이라는 용어와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고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가 같은 개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성령의 인침을 성화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고, 성령의 내주하심에 대해서도 각자가 다른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도 성령의 능력 충만, 성령의 생활 충만 등으로 나누어 구분하기도 한다. 각자 나름대로 성령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들은 엿보이지만 시원한 결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성령의 사역에 대한 용어들에 대한 해석은 모두 제각각이어서 수많은 견해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진대 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성령님은 분명히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님의 사역은 진리의 영의 사역이다. 진리의 영께서 사역을 한다면 분명 일하시는 원칙이 있을 것이고 영의 원리가 있을 것이다.(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 ‘영의 원리’를 참조하라.) 원리와 원칙이 있다면 그 틀을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알 수 있을 터인데, 영적으로 자타가 공인할 만큼 대가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주장들이 왜 다를까?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들이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여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하는 것인가? 무엇이 가려져서 원리와 원칙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인가? 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수용하지 못할까?

 

베드로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이 다른가? 아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마가의 가르침과 다른가? 이것도 아니다. 주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의 가르침이 다른가? 아니다. 열두 제자의 가르침이 나중에 사도의 반열에 합류한 바울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경험한 주님이 같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에 기록된 서신서들이 합해서 정경으로 완성되었지만 그 내용이 상충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모두 동일한 주님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공생애 기간 동안 지상 사역을 하신 주님께 배웠고, 바울은 승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서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배웠다.(갈 1:12, 각주참조)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배웠든지 승천하신 후에 배웠든지 간에 주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영의 실재를 만나서 배운 사람들은 그 내용이 다를 수가 없다. 이것이 제자들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이 다르지 않은 이유이다.

 

경험이 없는 자들은 이론을 말한다. 저들이 성령에 대하여 각자가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경험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경험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바울과 같이 직접 주님으로부터 배웠다면 각자가 다른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설령,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체험에 대해 주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체계를 세우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유추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잘못 적용시킨 것이다. 잘못된 적용에 의해서 성령을 소멸케 하였다는 것이다. 잘못된 적용으로 성령을 소멸케 하여 성령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없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이렇게 성령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 즉 성령님이 일하신 흔적을 기술할 수 없게 된다. 성령님의 일하심은 실재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일하신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데, 만약 성령님의 일하심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면 그것은 허구이고 거짓이라는 것이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성령님이 일하신 결과를 놓고, 각자가 체험한 성령의 능력을 놓고 성령님의 일하심을 논한다면 결코 다르게 나올 수가 없다. 성령님이 일하신 결과를 놓고 말하지 않는 그들의 주장을 공허한 이론에 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쓸데없는 논쟁만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다면 은사 부분에 있어서도 은사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논쟁할 필요가 없다. 방언을 하고 통변을 하게 되면 방언이 있네, 없네 말할 필요가 없다. 방언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성령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놓고 다투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도 하고 통변도 하였다. 또한 예언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한다면 통변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권면하였고,(고전 14:13, 각주참조) 특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면한 것이다.(고전 14:5, 外 각주참조) 방언을 하고 통변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언을 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그 방언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한 적도 없고, 예언을 하는 성도들에게 예언을 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그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제재할 권한도 없을뿐더러 제재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경험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세 때의 하나님이나 다윗 때의 하나님이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사람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히 13:8, 각주참조)이라는 말씀의 구절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성령의 은사가 초대교회에만 있었고 지금은 사라졌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청교도 시대 이후의 신앙의 선각자라고 불리는 분들에게 대단히 유감스러운 표현이지만, 한마디로 이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에 대해 주장하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조정기간 동안 바울과 같이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갈 1:12, 각주참조)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하여 성령님의 일하심을 경험하였다면 진리인 말씀이 다르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성령에 대해서 논하고, 바울과 같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성령을 논한다면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진리의 영을 놓고 말하는데, 그 영이 일하신 결과를 놓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 내용이 다를 수 있겠는가?

 

같은 성령님의 일하심을 놓고 논하면서 그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것은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고 각자 만진 부분만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이 도출되는 이유는 한 번도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경험이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 성령을 해석하다보니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싸한 이론을 만들어, 의도는 미혹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영적인 분별이 없는 약한 자들을 미혹케 하여 진리를 발견할 수 없도록 올무를 쳐놓은 것이다. 이들이 주장한 잘못된 내용을 옳은 줄로 알고 따라간 결과로써 성령이 소멸되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대부분 죽어 있는 거짓신앙을 참으로 알고 생활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을 문제로 제기한다.

 

성령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법은 그 일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활하면서 얻어지는 경험에 의해서만 성령님의 일하심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지식은 성령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성령에 관해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을 통해서 성령 강림, 성령의 인침, 성령으로 거듭남,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을 이해하여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성령론을 이해하는 방법론이다.

 

[회복시리즈 04.그리스도의 영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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