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건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랑의교회 건축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예배와 하나님나라’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사랑의교회 건축이 던지는 질문 하나만은 꼭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예배와 공간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공간은 예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보자.
‘교회하는 방식’에 대하여
함께 사역하던 어느 간사님이 국내의 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교회 사역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준비하는 사역의 독특한 점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가정 교회에 속해서 훈련받으며 자라 가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가정 교회라는 전략적 선택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유학생 대부분이 모국으로 돌아갔을 때 한국에서처럼 자기 건물을 가지고 있거나 잘 준비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교회를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집에서 모이는 작은 단위 모임을 통해 친밀한 사귐이 가능한 공동체를 경험하며 훈련받는 것은 훗날 그들이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그곳에서도 그런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장기적인 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가정 교회의 사역 모습은 교회 역사 속 처음 300년 동안의 교회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역사적으로 313년의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기 전까지 로마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적대적인 박해의 상황 가운데 있었다.
서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동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와 밀라노에서 맺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제국의 박해는 중단되었고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 중 하나로 공인되었다. 박해 아래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 교회를 조직할 권리 등 법적인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박해 기간 동안 몰수되었던 재산을 돌려주는 등 재정 지원과 제도적인 보호도 받게 되었다. 역사에서 이런 극적인 반전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널리 알려진 대로 기독교의 모습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등장 이전과 이후에 큰 차이가 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가 주도한 변화가,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예배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이 독립된 큰 건물에서 수천 명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의 모습은 적어도 313년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대형 교회의 등장은 '국가-교회(State-Church)'라는 역사적 결합과 '기독교 국가'(Christendom)라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정 교회 모델을 통해 외국인 유학생 사역을 준비하는 사례나 공개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기 불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 이야기들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교회라는 공간과 그곳에서의 예배는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나름의 역사적·사회적인 기원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건물로 대변되는 공간에 주목하는 것은 그 공간을 가능케 하는 구조물이 문화 인공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 시대의 문화와 규범을 때론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1900년 평양에 'ㄱ'자 모양으로 지어진 장대현교회의 예배당은 남녀의 구별이 엄격했던 19세기 말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그 건축물과 공간 운영에 반영한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세례(침례)를 위해 물을 담아 두는 세례반(baptismal font)의 변화는 물리적 공간이 신학의 재구성에 미치는 영향을 훨씬 극적으로 보여 준다. 세례반은 교회 건축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지표면보다 아래에 위치한 가정집의 평범한 욕조로 시작한 세례반은 정교한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져서 몸 전체가 충분히 물에 잠길 수 있는 형태로 교회 건물 안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례반은 지면 아래에서 지면 위로 올라오며 그 크기도 사람이 다 잠길 수 있는 형태가 아니라 성수를 담아 둔 큰 그릇과 제단의 모양으로 변화한다. 침례에서 세례로 변화한 교회의 신학적 입장이 구조와 공간 배치에 반영된 것이다. 세례반을 둘러싼 이런 공간의 변화는 그 공간 안에서 성장하며 자신의 신앙을 형성하는 이들에게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세례(침례)에 대한 이해를 강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건물을 짓고 공간을 만들지만, 거꾸로 우리가 만든 그 공간이 우리의 신학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콘서트가 아니다?
예배와 공간에 대한 내 질문은 그 공간이 예배에 참석한 이들을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자 모드로 이끄는가 아니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도록 돕는가다. 무대와 의자가 배치된 방식·음향·영상·조명이 제공되는 방식과 같이 공간을 묵묵하게 채우고 있는 하드웨어들은 이미 사람들이 그 의자에 앉기 전에,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기 전에, 스크린에 누군가의 얼굴이 비치기 전에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와 공간은 그래서 분리될 수 없다. 예배는 육체를 지닌 성도들이 일정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초월하시는 성삼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공동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앉은 그 자리는 예배당이라는 문화 인공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어느 쪽에 설 것인지는 당신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에 의해 좌우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역 수가성에서 사연 많은 여인과 만나 나눈 대화에는 흥미롭게도 예배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난 아직도 왜 이 여인이 뜬금없이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지 잘 모르겠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아주 오래된 불편한 민족 감정의 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께서는 지혜로운 선생님답게 친절하게 답을 주신다.
그 답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고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것이다.
'장소'(공간)를 묻는 여인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때'(시간)로 답하신다. 뭐 이런 식이면 참 대책 없다. 예수께서도 때만 이야기하셨으니 공간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특별히 이야기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예수께서 성전으로 대표되는 제도화된 종교 전통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셨다는 점과 공간과 장소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신다"고 대답하심으로 하나님의 관심이 공간과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는 점은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님의 관심은 늘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며 건물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었다. 건물로 구체화될 그 문화 인공물이 매주 그 공간을 점유할 성도들에게 어떤 신학을 재구성하며 형성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프로그램으로 제공되는 제자 훈련보다 더 강력한 제자 훈련은 바로 예배 그 자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김성한 / 한국 IVF 미디어 총무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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