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2

[스크랩] 새 번역 사도신경, 검토가 필요하다

수호천사1 2017. 7. 30. 21:31

새 번역 사도신경, 검토가 필요하다

 

 

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어느 원본을 가지고 번역했는지 나와 있지 않아서 정확한 검토가 불가능하다. 라틴어 본을 대본으로 삼았는지 헬라어 본을 대본으로 삼았는지도 알 수 없고, 또 어느 시대에 누가 작성하거나 받아들인 것을 대본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대의 여러 대본들을 참조해서 새 번역 사도신경을 살펴볼 때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1.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란 표현은 어색하며 성경상의 용법에 맞지 않다. 헬라어본에는 ‘떼온 파테라 판토크라토라’라고 되어 있으며, 라틴어본에는 ‘데움 파트렘 옴니포텐뎀’(deum patrem omnipotentem)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에 ‘전능한’이란 뜻의 ‘판토크라토라’ 또는 ‘옴니포텐템’이란 형용사는 문법상 ‘하나님 아버지’(떼온 파테라, 데움 파트렘) 전체를 수식한다고 볼 수 있다(전부 다 ‘대격’임). 이 중에서 한 단어를 지적하라면 ‘하나님’(떼온, 데움)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아주 많이 나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엘 샤다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으며(창 17:1, 35:11, 출 6:3), 이삭도 그렇게 불렀다(창 28:3). 때로는 간단히 ‘샤다이’(전능자)라고 말하기도 했다(창 49:25, 룻 1:20,21, 욥 5:17, 6:4, 8:3, 13:3). 신약 성경에서는 ‘호 떼오스 호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기도 하고(계 4:8, 11:17, 15:3, 16:7,14, 19:6,15, 21:22), 또는 ‘호 판토크라토르’(전능한 자)로(계 1:8) 또는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전능하신 주)로 불리기도 한다(고후 6:18).

  이상의 용례를 볼 때 ‘전능하신’이란 말은 단 한 번만 ‘주’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그 외의 경우에는 모두 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사용하는 관용화 된 표현이다. 어떤 경우에도 ‘전능하신’과 ‘아버지’가 바로 연결되어 사용된 예는 없다. 따라서 새 번역의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문법적으로나 성경의 용례로나 잘못된 번역이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옳다.

 






2. 유일하신 아들

 



  ‘유일하신 아들’이란 번역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헬라어로는 (대격으로) ‘모노게네’이고 라틴어로는 ‘우니쿰’이다. 헬라어 ‘모노게네스’(주격형)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첫째로 ‘하나뿐인, 유일한’(one and only, only)으로 볼 수도 있고, 둘째로 ‘독특한’(unique)으로 볼 수도 있다(Bauer 사전). 두 번째의 경우엔 ‘독생하신’(only-begotten)으로 번역할 수 있다. KJV에서는 “only-begotten”으로 번역했으나 NIV에서는 “one and only”로 번역했다. 그런데 루터역에는 “eingebornen”(독생하신)으로 번역했으며, 화란국역에서도 “eeniggeborenen”(독생하신)으로 번역했다. 따라서 이 단어(모노게네스)의 번역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단지 숫자적으로 하나뿐이라는 의미(독자, 외아들)가 아니라, 물론 당연히 이 의미도 포함되지만, 좀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독특성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다른 표현인 ‘먼저 나신 자’(프로토토코스)란 단어가 단지 출생 순서상 먼저 난 자란 의미만이 아니라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것(롬 8:28, 골 1:15,18, 계 1:5 등)과 같은 맥락이다(cf. Bauer 사전). 그래서 바우어 사전에 보면 이 두 번째 의미에 무게를 두고 많은 문헌을 소개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라틴어 사도신경에도 보면 ‘모노게네스’를 그냥 ‘우누스’(하나의)로 번역하지 않고 ‘우니쿠스’(독특한)로 번역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며 신중을 기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이 밝혀질 때까지는 ‘독생하신 아들’ 곧 ‘독생자’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여기에는 또한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이미 ‘독생자’란 표현에 익숙해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한국어 사도신경의 대표적인 오역인데 새 번역에서 개정되지 않고 이전의 오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에피 폰티우 필라투”이며 라틴어 원문은 “숩 폰티오 필라토”(sub Pontio Pilato)이다. 여기서 헬라어 ‘에피’(+ 속격)는 ‘... 때에, ... 의 치하에’란 뜻이다(Bauer, s.v. epi, no. 18). 라틴어 ‘숩’(sub)도 마찬가지로 ‘... 의 치하에’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곧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 말은 본디오 빌라도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최종 판결한 사람은 빌라도이니 그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아니라 예수님이 ‘언제’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곧 ‘본디오 빌라도 때에’,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오역이 고쳐지지 않은 것은 새 번역의 의미를 크게 퇴색시키는 것이라 하겠다.

 






4. 국어학적 문제들




 



  그 외에도 생각해 볼만한 작은 문제들이 있다. ‘거룩한 공교회’에 대해서는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한국의 성도들이 ‘공교회’란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볼만하다. 화란개혁교회에서는 ‘보편적 교회’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더 쉽고 분명한 말이 아닌지 검토해 볼만하다고 생각된다.

  그 외에는 문체 문제와 국어학적 문제들이 있는데, 여기서 길게 논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문제이다. 위 새 번역은 딱딱한 문어체로 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말하자면, 중학교 영어 시간에 영어 문장을 우리말로 옮겨 놓은 듯한 감이 든다. 즉,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 번역체 어투가 너무 많이 묻어 있다. 이것은 예전의 사도신경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문장과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문장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사도신경은 예배 시에 사용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단지 정확한 번역뿐만 아니라 순수한 우리말 문체로 다듬어져야 하고 순화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암송하고 고백하기에 좋도록 최대한 간결하고도 시적이어야 하고 감칠맛이 나야 한다.

예를 들면 위 새 번역에서는 인칭대명사 ‘나’와 ‘그’, ‘그의’를 많이 사용했는데, 가능한 한 이런 인칭대명사를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이다. 따라서 사도신경에서도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가능한 한 생략하는 것이 우리말 어법에 맞다고 하겠다. ‘오르시어’도 껄끄러운 문어체이며, ‘믿습니다’와 ‘오십니다’도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된다. ‘살아있는 자’도 ‘산 자’에 비해 간결하지 못한 표현이며, ‘죄를 용서받는 것’도 좀 생각해 볼만한 표현이다. ‘믿으며’와 ‘믿사오며’ 사이의 어감의 차이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국어학적 문제와 문체 문제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저 일반 국어학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믿음 좋은 국어학자로서 성경의 용어와 교회의 언어생활에 익숙하면서도 우리말에 정통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몇 개의 번역 시안을 만들어서 각 교회에 돌려서 어떤 문체의 것을 더 선호하는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되면 좋을 것이다.

 






  사도신경은 단지 우리 교단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성도 전체가 사용하는 공통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서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사람들과 교포들 모두가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내용상 올바를 뿐만 아니라 암송하기 좋고 사랑받는 고백이어야 한다. 

 

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