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학2

[스크랩]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수호천사1 2017. 7. 30. 21:28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도 개요서의 소요리 문답의 제1문에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마치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여행을 하는 사람이 방향을 잃어버리고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를 몰라서 헤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주제는 신자나 불신자나 막론하고 심각하게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인데 특히 이 주제는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신자다. 구원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고 하면서 실제적 삶 속에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인생의 목적이 돈을 벌고, 권세를 얻고, 명예를 얻기 위해 산다면 그 생애는 빗나간, 잘못된 인생인 것입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비록 세상을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지만 “만족한다”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말함인지 여러분들은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상대방과 비교해서 더 낫고, 더 높은 생활을 하고 싶은, 채워지지 않는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라면 무엇인가 상당히 잘못되어 있으며 빗나가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를 향하여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고 하였습니다. 북쪽으로부터 끓는 가마가 이스라엘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데 유다 백성들은 알지도 못하고 안일하게 자기 일상적인 생활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을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고,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이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으로서 삶의 참된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과 편리만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것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한 문제의 요소가 가득함에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로 하여금 눈물나게 한 요인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 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어찌하여 내 머리는 물이 되며 내 눈은 눈물근원이 될꼬 이는 살육 당할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남쪽 유다는 곧 엄청난 환란이 닥쳐올 것인데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있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조금의 유익도 되지 않는 터진 웅덩이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인생으로서 살아가야 할 참된 생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소경이며 우맹이었습니다.

오늘날 영적 실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가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젊음과 건강과 재물과 그리고 장래 꿈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부족과 내면의 거짓과 부패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선하고 의롭고 우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만과 교만이 극치를 달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하면서 경건하게 살아야 함을 증거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교훈을 멸시합니다.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에만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알지를 못하고 있다면 과연 이 생애는 엄청난 착각 속에서 잘못된, 그리고 빗나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 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1-44)고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은 “평화에 관한 일”과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결국은 참담하기만 한 지경에 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잃어버린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지?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날 동안 항상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지어졌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풀 한 포기, 기어다니는 벌레 한 마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스스로가 그 목적을 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조물주가 그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만일 피조물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목적을 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목적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만들어진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시계, 의자, 집, 등…. 이와 같이 우리들 인간도 조물주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지으셨을까? 그 목적이 무엇일까? 또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신 은혜의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인생은 빗나간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활시위에서 벗어난 활이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 꽂혀야 하는데 그만 빗나간 것과 같이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린 삶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증거 합니까?

사람들은 보통 성경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 죄 짓지 않는 것.”을 기록하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이 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말함이 성경의 본 주제는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성경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마는 그것이 성경의 핵심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요 5:39)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니니라”(요 20:31)



성경의 핵심 주제는 영생이라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를 통해서 영생을 얻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아가는 삶을 증거 하는데 이것이 곧 영생입니다. 또한 요일 5:11에서도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시는 인생의 근본 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에 있는데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생에 대한 창조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기에 누구든지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하는 삶이 아니면 그 인생은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고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2. 참된 인생의 목적에서 벗어난 삶


 선지자 예례미야는 이렇게 한탄을 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예레미야가 본 심각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없이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고, 자기 마음의 정욕대로 살아가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그리고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가는데 그것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가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터진 웅덩이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본 대단히 비참해진 유다의 영적 실상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도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첫째, 이것은 보통 모든 사람들에게서 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죄의 바다에 빠져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을 좇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나비들이 불을 보고 뛰어들어 타죽듯이 죄악이 타는 이 세상에 뛰어들어 스스로 멸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면 어떠하냐’ 하면서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양심 운운하는 것은 먹고 할 것이 없는 배부른 부자들이나 하는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농담으로 듣습니다. 이러한 것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아!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를 그 가운데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 세상 정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의 목적에서 한참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과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매우 가정적이고 선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선한 사업도 합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종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교리에 따라서 소신껏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내면을 움직이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믿음과 기쁨과 감사함.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헌신이 아니라 그 동기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이기적인데 있습니다. 이들은 오직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사로 잡혀있어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가는가? 라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되면 삶에 방향과 목적을 잃은 나머지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헛된 것뿐일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온 모든 날을 한번 뒤를 돌아다보십시오. 과연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그리고 만족하십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헛된 것뿐 아닙니까? 자신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열심히 살아 오셨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모든 것이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살아온 모든 일들이 해 아래서 바람잡이 뿐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셋째,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았고 죄사함을 받았고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이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죄 사함과 칭의만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주제가 마치 죄 사함만 인 것으로 생각하고 구원받았다, 죄사함 받았다, 하면서 마치 다 된 것처럼 살아가는데 이것은 대단한 모순입니다. 물론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죄사함을 얻었다.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목적을 완성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치명적인 착각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죽으시므로 죄 사함을 얻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주님의 거룩한 사역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거듭 생각해 봅니다. 영생은 무엇이냐? 요한 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원어의 뜻으로 보면 ‘남자가 여자를 안다’는 것입니다. 오며 가며 한 번 통성명하면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와 결혼생활 속에서 깊은 관계를 갖음으로 서로를 구체적으로, 마음으로, 실제적으로 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무엇이냐?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특히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통해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2-3)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보고 들은 바”를 증거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을 사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귐을 갖는 것. 이것이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인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어떠한 반응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억지나 부득이 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리고 고마움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특이한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참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근본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받았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하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근본된 목적에 비로소 진입한 것입니다. 전에는 나만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만이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제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이러한 삶이 중생하지 아니한 어떠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삶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진리를 알게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은 가장 값지고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소중한 삶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져야 합니다. 행위를 보아서 그 신앙을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참된 계시의 믿음이 왔을 때 그 삶은 분명히 달라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승리할 수 없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뛰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가관일 것이며 미친 사람과 같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닮은꼴로 지어진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의지와 함께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28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땅에 충만 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시면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대단히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준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사람의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사람이 성실과 진정으로 공경하고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근본 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계를 보면 모든 별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지요? 과거에는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고 있어서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별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초등학생을 보고 물어봐도 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태양이 돌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 이것을 알았던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많은 핍박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실 때에 되는대로 무질서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듯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성령의 법으로 살아갈 때 행복하고 안전하며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진리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부어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어려울 때면 하나님을 찾으면서 부르짖고, 자기의 소원을 성취시켜 달라고 명령이라도 하듯이 구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 피조물의 본분이며 모든 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때 비로소 인간도 그 안에서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도 평안하고 자녀들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칭찬을 받으며 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며 그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 때 결국 인간은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빗나간 삶을 살게 되면 이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이 인간의 가장 근본 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근본 된 의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2)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위의 말씀에 사도 바울의 삶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라 하면서도 살아가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곧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뜻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계획을 세우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인생의 삶의 목적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목적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자들이 계속해서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의대로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방법을 쓰십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가는 길목에 서서 두 팔 벌리고 가로막기도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계획을 무너지게도 하시고 꺾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의 빗나가 있고 잘못된 계획을 뒤집어 버리는 일을 불가피하게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코 자기의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이 세상에 빼앗기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스스로의 목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만든 이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의 뜻과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에 주인이 기뻐하고 또한 피조물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편치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며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피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생각하고, 예수님 없이 계획하고, 예수님 없이 결정하고, 자신의 만족이나 행복만을 위하여 산다면 이것은 우리들 본연의 창조 목적에서 분명히 빗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토기는 토기장이가 만든 대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용도에 맞게, 크기에 맞게, 토기장이의 목적에 따라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이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힐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어볼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 권리는 만든 이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삶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알고 그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삶은 비뚤어진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고. 내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니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피조물 된 인간의 본분이며 진정한 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구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외에 그 어떠한 것도 그 안에서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잔느 귀용 부인(1648-1717/프랑스)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모든 것은 모두 남에게 주십시오. 나는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을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고 우리의 목적이 이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했습니다. 또한 병을 고치기 위해서도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술을 끊기 위해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서 주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어렸을 때의 생각이고 성장하고 나서보니 이제 주님은 나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주님을 얻는 것이 내 생애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모든 것을 다 얻었을지라도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얻는 것이 나의 최고의 목적이 되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문둥병자가 다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리나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에게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다 어디 갔느냐? 하고, 그들은 깨끗함을 받고 다 자기의 좋은 대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병 고치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수단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는 첫 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서 아내가 살림을 잘 못하는 것은 봐줄 수 있습니다. 잠을 많이 자는 것도 봐줄 수 있습니다. 반찬을 잘 못하는 것도 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 외에 다른 남편을 두는 것을 결코 봐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제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23).



우리가 결혼을 하였을 때 아내가 사랑의 대상으로 결혼한 것이지 집안에서 빨래나 하고 밥이나 짓고 아기나 기르는 그러한 사람으로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일이 가정을 갖고 살아갈 때에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일이 목적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럴 바에야 일 잘하는, 튼튼한 식모를 구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것은 사랑하는 아내와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결혼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 연합하여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은 관계로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거룩한 목적이며 또한 인간의 삶의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함이니라”(고후5:15)



여러분들은 이 글을 읽고 과연 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성도로서, 삶의 방향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스스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치 아니한 유대인들과 같이 구원을 받았다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둔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는지… 그렇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생애의 목적이 되십니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길 바랍니다.



가재기 목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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