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 문제에 대한 기독교회의 입장
머 리 말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 일본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문화적 자원에까지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 강요했던 신사참배에 저항해서 맞서 싸운 경험을 갖고 있다. 이것은 다른 집단들이 시도할 수 없었던 기독교만의 특별한 경험이었으며, 한국교회가 민족사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항목의 하나였다.
해방 이후 단기연호 사용이 보편화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민족적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자연스럽게 한국역사의 일부로 수용하였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허구적 신화의 차원을 넘어서서 역사적 실존인물에 대한 기록, 국조(國祖)에 대한 기록으로 주장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갈등에 직면하였다. 특히 1985년 서울시가 단군성전을 건립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기독교회, 특히 개신교회 일각에서는 단군성전 건립 반대의 차원을 넘어서서 단군신화를 민족역사와 결부시키는 것마저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군 성전 건립, 단군 신격화, 단군신화의 일부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서 국정교과서에 수록하는 문제 등에 대한 한국교회의 반응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합리성이나 논리성을 결여하기도 하여 기독교계 내부에서 조차 여러 가지 우려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연구위원회는 1986년 5월과 1987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연구모임을 개최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단군신화 문제에 대한 기독교회의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론적인 성격의 문서이며,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좀더 바람직한 문서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1. 단군신화와 한국 역사
단군신화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에 편찬된 ‘삼국유사’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帝王韻記)’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여러 제왕들의 사적들을 오언, 칠언으로 정리한 시로서, 초편에는 중국 여러 제왕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후편에는 우리 나라 제왕들의 업적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 처음에 단군 관계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단군신화는 그 후 조선조에 와서 ‘세종실록 지리지’와 권람의 ‘응제시주(鷹制侍註)’에 언급되었다. 응제시(鷹制侍)는 권람의 조부인 권근이 명나라 황제 홍무제(洪武帝)에게 바친 시인데, 그 시들을 그의 손자되는 권람이 주석한 것이 바로 ‘응제시주’이다. 권람은 평양에 관한 권근의 시를 주석하면서 국조로서 단군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단군신화가 정사(正史)로서 역사책에 정착되는 것은 고대로부터 고려말까지를 하나의 체계 속에 넣은 조선조 초기의 역사서 ‘동국통감’에서이다. 그 이전에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절요’, ‘고려사’등 대부분 시대사만이 저술되었는데 ‘동국통감’에 와서는 단군으로부터 고려말에 이르는 역사를 체계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바로 이 ‘동국통감’을 토대로 해서 BC 2333년이라고 하는 단기가 계산되었다. ‘제왕운기’, ‘세종실록 지리지’, ‘응제시주’, ‘삼국유사’등은 1,2백년을 사이에 두고 기록된 것들인데, 그 출전을 살펴보면 매우 다양하다. 즉 한가지 출처를 근거로 하여 이런 기록들이 나온 것이 아니고 문헌상, 구전상 다양하게 내려오는 것을 이 시기에 정리했다고 학자들은 보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조 초에 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채용하면서 단군이 국조를 떠받들리게 된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단군을 개국의 시조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떠받드는 현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 전에도 단군에 관한 기록들이 있기는 했지만 고려말까지는 그를 정치적으로 국조로서 숭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조선조에 와서 단군을 떠받들게 된 것은 단군이 세운 나라와 이성계가 세운 나라의 국호가 다같이 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단군이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중국에서도 성군으로 꼽히는 사람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우리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써 민족적 자부심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단군을 떠받들면서 마니산과 구월산 등지에 제단을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조선은 그 시기에 기자도 떠받들었다. 기자는 중국 은(殷)나라 후예로서 조선에 와서 왕 노릇 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기자의 동래설에 대해서는 오늘날 학계에서 논란이 많지만 조선을 세운 사람들은 중국 주나라의 전통이 우리 나라로 왔다는 점을 내세우기위해서 기자를 내세웠다. 그것은 기자가 속했던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가 중국적인 문화나 전통의 총체적인 발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조는 기자를 내세움으로써, 유학이라든지 철기문화, 제자백가 사상 등이 시작된 주나라와 필적할 수 있는 문화전통을 그 이전의 은나라로부터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그를 통해 비록 정치적으로는 중국에 대해 열등한 위치에 있으나 유구한 문화나 역사에 있어서는 중국에 필적할 만하다고 자부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단군은 국가정책상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고, 사상사적으로 대외 독립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고려말기의 경우는 항몽 투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지적된다. 이것은 한국 측에서는 별로 강조하지 않는데, 일본측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 사람들은 단군신화가 처음 기록된 것이 고려말이고, 고려말은 무신정권 즉 문화적 암흑기가 계속되면서 몽고가 침입하는 시기로서 이런 시기에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몽고에 대한 저항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 고려인들이 단군신화를 조작했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조작설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사람들은 단군신화가 항몽투쟁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강조했다.
그후 조선 중기에는 항왜투쟁에, 한말에는 독립투쟁의 정신적 기반으로서 단군이 강조되었다. 일제하에서는 독립군이 만주를 자신들의 기지를 만들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만주가 단군의 성지요 단군으로부터 내려온 우리의 땅이라고 하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 일제하의 임시정부가 그 본부를 만주에 두지 않고 상해에 두었던 것은 잘못이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처럼 고려 이후 단군신화는 국가적 위기 때마다 역사 속에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곤 하였다.
2. 단군신화의 내용
단군 관계 기록으로서 현존하는 최고의 기록은 ‘삼국유사’ 1권 기이편 고조선조 부분이며, 그 외에도 ‘제왕운기’‘여지승람(與址勝覽)’‘조선사략(朝鮮史略)’‘응제시주’등에 다양한 형태로 단군 관계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나, 그중 흔히 인용되고 연구되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서(魏書)에 말하기를 ‘2천년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는데, 도읍을 아사달에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했는데 고(高;당시에는 사적인 문서에서는 해당 왕조의 왕명을 그대로 쓸 수 없어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를 써서 지칭하곤 하였는데 이를 피휘(避諱)라 하며, 여기에서 고는 중국의 요(堯) 임금을 지칭한다)와 같은 때였다’라고 하였다.” 이 부분은 신화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의 부분은 신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옛날 환인이 있었는데, 아들 환웅이 있어 자주 하늘 아래에 뜻을 두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을 내려다 보니 널리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내려주고 보내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자리를 정했는데, 이곳을 신시라 말한다. 이분은 환웅천왕이라 부른다. 환웅천왕은(바람을 주관하는)풍백과 (비를 주관하는)우사와 (구름을 주관하는)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목숨, 병, 형벌, 선악을 주관하는 등 무릇 인간의 360여가지의 일들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환웅에게 기원하기를 변화하여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환웅이 영험스러운 쑥 한주와 마늘 20매를 남기면서 말하기를 ‘너의 무리가 이걸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문득 사람의 형제를 입을 것이다’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를 얻어 먹고 삼칠일(21일)동안 있었다. 곰은 여자의 몸을 입었으나 호랑이는 기(忌)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입지 못했다. 여자로 변한 곰은 더불어 혼인할 자를 얻지 못해 매양 신단수 밑에서 주술하고 기도하며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화하여 이와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하여 단군왕검이라 한다.
당(唐:요임금이 다스린 지역의 이름)의 고(=요임금)가 즉위한지 오십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했다. 또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이곳을 긍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린지 1천5백년, 주나라 호(虎:무왕을 가리킨다)가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이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고, 뒤에 돌이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수명이 1908세나 되었다.”
3. 단군신화에 대한 몇가지 견해들
첫째는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는 주로 일본측의 견해이고 식민주의 사관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금서룡(今西龍)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단군고’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현존하는 위서들을 조사해 본 결과 삼국유사에 나타난 것과 같은 기록이 없으므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서를 빙자해서 후기에 조작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최남선, 정인보, 같은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했다. 중국에는 주나라시대,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등 여러 시기에 걸쳐 위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상당히 많았고, 현존하는 위서는 수십종의 위서들 가운데 절반도 되지 않으며 따라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에는 현존하지 않는 다른 위서가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소전성오(小田省吾), 임태보(林泰輔)같은 사람들도 단군신화가 독립군 등의 정신적인 지주로 역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군을 제거하고 기자, 위만을 집어 넣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국사의 상한선을 상당히 낮출 수가 있다. 단군을 집어 넣으면 주선의 기원이 BC 23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걸 신화로서 제거하면 기자, 위만, 한사군은 한국인이 세운 국가로 간주할 수 없으므로 고구려, 신라, 배게 등 3국이 한사군을 물리치는 시기가 국가의 기원이 되고, 따라서 낙랑군이 제거되는 AD 313년부터 조선인의 역사로 치게 된다. 이렇게 한국사의 상한선을 낮추기 위해서라도 일본사학자들은 단군을 제거시켜야만 했다.
두번째는 일반적으로 신화로 간주되고 있는 부분까지도 역사적 기록으로 보려는 견해이다. 이것은 주로 대종교 계통의 사람들에 의한 주장인데, 이들의 주장은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볼 때 민족정신이 상당히 충일한 사람들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의 입장은 종교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인 관점에서는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세번째는 신화적인 부분을 비신화화하여 이해하려는 견해들로서, 민속학, 국문학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신화가 고대인의 사유방식의 표현이며, 신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실의 반영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신화는 전적으로 허구인 것은 아니며, 우리에게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어떤 사실들, 오늘날의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는 어떤 실체를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비신화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학설들이 도입되고 있는데, 그 하나로서 이부체제(dual organization) 이론을 들 수 있다. 고대사회는 왕족과 왕비족, 이 두 족속이 이부체제를 형성하여 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그것이 전형적으로 단군신화에서 보인다는 것이다. 왕족은 하늘에서 자기 족속이 내려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왕비를 낸 족이 우리 신화에서는 웅녀족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에 여기 나타난 태양이니 범이니 곰이니 하는 것과 관련해서 신석기 시대의 저급한 종교라 할 수 있는 토템이즘과 관련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다시 말하면 단군신화가 형성된 시기는 신석기 말이나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시기일 것이라고 보고, 환웅족은 태양을 자신들의 토템으로 보는 족속을 의미하며, 곰이 나오는 것은 곰을 토템으로 보는 족속을 의미하며 이 두 족속이 결합하여, 한 사회를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 환웅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민족대이동으로 해석한다. 어떤 사회를 지배하는 부족은 고유의 토착적인 부족이라기보다 다른 데서 활동적인 문화를 가지고 들어와서 지배하는 경우가 고대에는 많다. 일본 개국신화에 나오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같은 신도 하늘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학계의 입장에서는 가야계통의 족속이 건너간 것을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방식으로 단군신화를 해석해보면 이 민족이동이 있기 전에 그 지역에는 곰토템과 범토템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태양토템 족속이 들어와서 이부체제를 형성할 때 곰족과 이부체제를 형성하였고, 이것이 단군신화에 반영된 것으로 설명이 된다.
그리고 그가 내려오면서 거느리고 온 것이 풍백, 우사, 운사인데 바람, 비, 구름은 모두 농경문화와 관계된다는 점에 착안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곡식을 주관했다는 표현도 있고, 환웅이 곰과 범에게 준 것이 마늘과 쑥인데, 이것은 사막지방의 중요한 식물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신화는 우리 나라 농경단계의 초기를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학자들간에는 토템적인 요소는 중석기 시대의 것이지만 농경문화, 국가건설은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오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가 우리 역사에서는 무문토기 시대에 해당한다.
또 단군의 어휘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단군이라는 말은 ‘당굴’이라는 말의 표기로서 당굴은 무당을 지칭하며, 따라서 단군은 당시의 제사장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몽고어에서 tengri라는 말도 배천자(排天者)라는 말로서 역시 제천과 관계를 맺고 있다. 왕검이라는 말도 ‘엉큼’ 등의 우리말의 표기인데 이는 대인, 정치적 대인을 지칭한다고 한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을 시기의 정치적 군장이면서 제사장적 성격을 지닌 존재의 표현이며, 어떤 특정인을 가리킨 것이라기보다 그 시대의 일반명사로서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신화를 어떤 사실의 반영으로 보고 단군 조선이라고 하는 국가의 건립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건립이라고 하는 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형성으로 이해되며, 이것은 문화사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와 관련지어지고 있다. 단군신화에는 농경 문화적인 요소가 보이고, 국가건립이라는 요소가 나타나 있다고 할 때 이 신화는 청동기 시대와 관련하여 이야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한반도에 있어서 청동기시대는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면 BC 10세기부터이고, 개인적으로 높이 올리는 학자는 BC 13세기까지 올리고 있고, 북한 학자들의 경우에는 BC 20세기까지 올리기도 한다. 이런 정도인데, 우리 나라 청동기의 원류로 간주되는 만주지역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요녕성 청동기가 우리 청동기의 기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최근 중공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요녕성의 청동기는 BC 2,500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이 시기는 BC 2,333년과도 상응하며, 이에 착안하여 단군 조선을 청동기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단군신화의 무대는 만주나 오녕성 부근으로 추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발해만 연안에는 조선이라는 지명이 있기도 한데, 이런 몇가지 이유에서 단군 조선의 기원을 요녕성과 관련시켜 보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해방 이후 동이족에 관한 이야기가 부각되면서 동이족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김상기(金庠基)는 1948년 “한.예.맥 이동고”라는 논문에서 한족의 기원을 중국 서북지역으로 보고 어떻게 이동해 왔는가를 중국고전 검토를 통해 조사하고 있다. 1950년대 초에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해서”에서 동이족의 분포는 산동반도로부터 좀더 아래로는 양자강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만주지역까지 분포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이미 갑골문에 이(夷)자가 나타나고 있어 은나라와 동이가 싸웠음을 추정할 수 있고, 주나라에 이르면 주나라를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던 강태공이 산동반도 지역에 봉지를 받았는데, 그 봉지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지역의 동이족과 1년 반이나 싸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BC 8세기의 문헌에는 서언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의 탄생설화는 고주몽 설화와 유사하다. 난생이고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난생이 없는데, 동이에서는 자주 발견된다고 한다. 토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은 ‘단군신화의 신연구’라는 저술에서 산동반도의 무씨사당 그림이 단군신화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다만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아기를 낳는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산동반도지역과 한반도 지역에서 똑같이 지석묘 문화가 발견되고 있는 점을 들어서 학자들은 동이 문화권이 한반도에까지 퍼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현재까지의 사학계의 연구결과를 놓고 보더라도 단군신화는 단순히 허무맹랑하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한 기록인 것일까? 다음에 단군신화와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제기해 온 몇가지 문제점들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하여 나름대로 그 방향을 제시해 보도록 한다.
4. 단군신화와 한국교회(초안)
(1) ‘신화’라는 부분에 대하여
신화가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요 허구하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주의 젖은 현대인들이 갖기 쉬운 편견이다. 과학문명 시대 이전에 신화를 형성한 사람들은 현대인들과는 달리 단순히 오락을 위해서 허구를 지어내지는 않았었다. 신화는 그들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들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신념에 입각하여 표출해 본 표현의 한 양식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신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었다. 따라서 현대의 과학적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화를 단순한 허구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협한 인식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신화의 구체적인 내용 그대로가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최소한의 구체적인 역사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으며, 정신적 흐름으로서 역사에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화는 역사속에서 역동적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의 유효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2) 단군신화의 사실성(事實性) 규명문제에 대하여
단군신화의 역사성 문제는 기본적으로 학문적 연구의 결과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성질의 문제이다.단군신화의 내용이 과연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반영하고 있다면 어떤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의 여부는 역사학자들의 전문적이고도 객관적인 연구 결과에 의해 판단되어질 문제이지 어떤 종교적 전제에 따라 결정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당연히 격려되어져야 하며, 우리는 그 연구 결과를 전제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3) 단군신화의 교과서 수록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학문적 연구에 판단을 맡긴다고 할 때 그것은 물론 구체적이고 납득할 만한 증거들에 토대를 두며 객관성을 견지하려고 하는 학자적 양식에 입각하여 진행되는 학문적 연구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 있어서의 학문적 연구 결과가 여하한 형태로든 교과서에 실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우리가 단군신화 문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것이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기 때문이다. 국정교과서는 한 국가 혹은 한 체제의 이념이나 목표의 지배를 받으며, 특히 독점적 지위를 점유함으로써 은연중에 절대적인 권위를 강요하게 된다.
또한 하나의 학설이나 주장이 충분한 단서를 달지 않고 국정교과서에 수록될 경우 이는 현상적으로 다른 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위축시켜 학문의 자유나 자유로운 사고를 감소시킨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국정교과서 제도 자체가 재검토되어야 하겠거니와, 단군신화 문제처럼 사학계 내외에서 아직 격렬하게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사항의 경우에는 그것을 국정교과서에서 다루고자 할 경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4) 단군신화 연구와 정치에 대하여
단군신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민족적 견지에서 장려되어야 할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연구가 정치적으로 오용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 학문적 연구라는 이름아래 불순한 음모와 비진리가 횡행하곤 하였던 것을 역사를 통해 보아오고 있으며, ‘민족을 위하여’라는 기치 아래 학문이 정치에 동원된 결과 민족을 오히려 불행속으로 몰아넣곤 하였던 사실도 목격한 바 있기 때문이다.
(5) 단군신화 연구와 종교에 대하여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에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의도가 전면에 나서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는 단군과 관련된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혹은 그와 관련한 소위 ‘재야 사학자’들이 아직 납득할만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채 사료 비판도 거치지 않은 문헌들을 근거로 하여 “한국의 시조는 환인으로서 그는 파밀고원 아래에 BC 7199년경에 환국을 세웠다.”,“환인은 7대에 결쳐 3301년을 다스렸고, 환웅은 18대에 걸쳐 1565년을, 단군은 47대에 걸쳐 2096년을 다스렸다”는 등의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분명히 학문적인 주장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신념 혹은 민족적 열정의 표출에 가깝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아담 이래의 족보를 그대로 역사 사실로 받아들여 이를 토대로 단군의 위치를 설정해 보려고 하다든지, 혹은 그를 토대로 하여 단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는 기독교계 일각의 주장 역시도 학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성서가 과연 기원전 4천년경에 타락을 했던 실존 인물로서 아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6천년으로 계산되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를 생각할 볼 때, 이 문제는 실증적인 검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종교적 해석의 차원에 속한다고 보아진다.
종교적인 교리나 신념을 전제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종교 사이에 불필요한 논쟁과 감정대립만을 유발할 뿐 구체적인 역사의 탐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6) 단군신화 연구와 한국교회에 대하여
단군신화의 오용 문제에 한국 기독교회가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은 한국교회가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한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군신화의 오용 가능성은 단군신화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기록이라는 점이 확증되고 안되고의 여부에 관계없이 상존한다. 가령, 단군신화의 많은 부분이 역사적 사실로서 밝혀질 경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토대로 단군을 역사적 존재 이상의 인물로 부각시켜 특정의 이념 확산에 이용하고자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 존재임을 이유로 지금까지 단군에게 부여되어 왔던 신비적인 의미를 거부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단군신화의 역사성이 계속 입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경우, 어떤 사람들은 단군의 신비성을 마음껏 확대하고자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입증되지 않았음을 내세워 그 존재를 무시하고자 할 것이다. 이처럼 그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이용은 가능해진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검증하는 작업과 단군신화의 정치적 오용을 견제하는 작업은 별개의 것일 수 있으며, 따라서 신사참배 거부의 경험이 단군신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이는 민족적 근원을 추적하고 민족이 서야 할 바른 자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세력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반민족적 집단으로 비난하게 만드는 구실을 제공할 뿐이다.
결 론
한국교회가 신앙적, 성서적 입장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은 단군의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한 검증 자체는 아니며, 단군신화가 역사의 반영으로서 국정교과서에 실리는 것 자체도 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교회가 경계하여야 할 것은 비학문적 입장에서 혹은 정치적 의도에서 단군신화가 오용되어지고, 그 한 방편으로서 아직 학문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내용까지 국정교과서에 실리는 일이다.
이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문제를 분명히 구별하지 못할 때, 즉 한국교회가 단군의 신격화, 우상화에 과민한 반응들을 보인 나머지 단군 신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 및 단군신화가 갖고 있는 민족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조차 거부하게 될 때 한국교회의 신앙적, 신학적 주장들은 비기독교인 사회 혹은 기독교계 내부에서조차도 호소력을 결여하게 됨은 물론 단군의 신격화, 우상화에 대한 반대조차 반민족적, 비이성적 행위로 매도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사학계로 하여금 사심없이 한민족의 상고사 연구에 정진하도록 격려 하는 동시에 그 연구과정에 외부적인 압력이 작용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단군신화 문제와 관련하여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라고 보아지는 것이다
이만열 교수( 숙대 / 역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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