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스크랩] 외식하는 목사의 설교

수호천사1 2016. 10. 15. 23:06

듣기싫은 설교(3)

            목사 자신을 말하는 설교. 착각적 과신의 설교

 

1. 목사 자신을 말하는 설교.

 

설교를 듣기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역동적인 복음을 듣기 원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한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자기 이야기를 싫어한다.

 

목사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선전을 하지 말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는 '말씀의 사자'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대사’라고 했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한다.

 

한국의 신학 교육의 초창기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목사는 성도에게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의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어떤 목사들은 이런 설교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기 이야기를 마치 하나님의 복음 인양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이야기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설교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 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고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단순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만일 어느 누구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설교의 주체로 한다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게 자기 이야기를 복음처럼 말하는 목사들을 보면 사실상 별 볼일이 없는 일들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말하고 그것을 본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자기가 빈곤한 가정의 출신이라든지 아니면 청년 떼에 엄청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든지 하는 따위의 유치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 성공담을 말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어느 누가 그런 설교 아닌 이야기를 듣고 있겠는가?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수 없이 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하자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착각 잘하는 목사는 이 말씀을 “제가 길을 가는데 어떤 노인이 짐을 지고 가셔서 그 짐을 대신 져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서 복음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한다.

 

2. 착각적 과신의 설교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일의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오랫동안 계속하면 그 분야에 전문인이 되어 스스로 진전시킬 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된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가진 도사(道士)의 경지에 이른다. 설교 사역도 같은 맥락에서 설교에 도사가 된 목사가 있다. 이렇게 설교 도사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목사는 강단에 설 때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 나아간다. 그 자연스러운 몸놀림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성도들은 목사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된다. 실제로 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국에 부흥회를 다니는 어떤 목사가 설교에 넘치는 자신감을 보인 일을 보았다. 그는 우리 교회에 부흥 목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에 “김 목사 이번 부흥회에 어떤 점을 강조했으면 좋을 것 같아.”라고 질문했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 받게만 해 주세요”라는 주문 대로 그렇게 설교를 했다. 물론 원고는 한 장도 없었다. 그 목사는 건축이면 건축, 전도면 전도, 기도면 기도, 헌신이면 헌신, 모든 우리 기독교의 전문 설교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무엇을 알지 못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에 자신이 넘치는 목사도 자기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 스스로 볼 필요가 있다. 나도 남 못지 않게 설교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내 설교에 아주 실망한 일이 있었다. 친구 교회에서 장로, 집사, 권사의 임직식에서 설교를 맡아 하게 되었는데 모든 예식을 비디오로 찍었다. 며칠 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왔다. 나는 무척 반가워하며 그 테이프를 보게 되었는데 얼마 후 크게 실망해서 끄고 말았다. 내가 설교한 장면 대문이다. 25년도 더 넘게 설교한 내 모습이 겨우 저 정도인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신경을 건드리는 놓은 목소리였다. 밀을 할 때마다 너무 많이 노출되는 아랫 이(耳)도 그랬다. 잘 한다고 며칠씩 준비한 설교 내용도 혼란스러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가지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잘하고 있다고 했다. 100%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의 설교를 잘하는 설교로 듣고 있는 아내와 성도들은 그 동안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정말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참담했다.

 

자신의 설교가 나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목사가 많을 것이다. 반대로 만족한 목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내 설교의 모습을 다시 보기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설교 모습을 보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노력이 있어야 발전한다. 이런 자각과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없는 목사들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만족하며 설교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설교의 교조적(敎條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교만의 자리에 둥우리를 틀고 안주해 버린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자신은 초보 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본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목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성도들은 이런 교만한 자의 거만한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듣기싫은 설교(4) 

                             외식하는 설교. 주님과 선지자로 말하는 설교.

 

 

1. 외식하는 목사의 설교

 

우리 한국적 상황과 인식에서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아직까지 목사에 대한 어떤 기대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실한 양심이며, 정(正)의 척도며, 죄인이 찾아 갈 마지막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목사에 대하여 그런 기대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기대대로 목사가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들어 이런 의문과 회의(懷疑)는 더욱 더 깊어져서 과연 우리 사회가 목사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잇는가를 의심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목사가 한국 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 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얻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 교회와 비교해서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한 목사는 이런 현상은 “이 땅이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고 방식에 의한 답이지 설교하는 목사가 실제로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한 대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설교하는 목사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그렇다고 해도 목사 스스로가 하나님 앞과 자기 양심 앞에서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해 보아야 한다. 정말 가장 고결한 성직자인 목사가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최근 들어 이런 자책(自責) 섞인 대답이 나오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목사들이 각종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에서 기인된다. 성전에서의 살인 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 낭비에 선두 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 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 출처를 알 수 없는 박사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간음과 모략 중상들의 사건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 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사건들이다.

 

설교자가 가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과거 우리 한국 교회가 인구 비례 3%의 성도들이 나머지 97%의 국민을 선도했던 대의 목사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원수를 용서하고, 밤을 세워 나라와 민족의 죄 짐을 지고 통곡하며, 생명을 바쳐 애국 애족을 실천했다.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목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 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그러치 못한 몇몇의 목사들은 그 계층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작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목사는 자기는 죄인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바로 전한다 하면서 자기가 선포한 설교와 자기의 생활의 이질 현상(異質 現狀)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미화(美化)하고 있다. 어떤 부흥 목사의 부인이 하루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남편에게 찾아 와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집에 가면 마귀가 되고, 교회에 오면 천사가 되니 나는 천사와 같이 살고 싶다’면서 강단에 이불을 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설교는 천사처럼 하면서 살기는 마귀처럼 사는 목사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기는 우리 한국 교회의 비극이 얼마나 클지도 헤아려 보자. 주님의 경고처럼 우리는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2. 자기를 주님과 선지자로 말하는 설교.

 

내가 만난 다른 목사는 엄청난 비교를 했다. 그날의 설교는 본문이 엘리야가 아합에게 쫓겨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소원하는 말씀(왕상 19:4)이었다. 목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낙심된 일을 당했다고 하면서 엘리야가 죽을 고통에서 하나님을 믿고 승리한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승리했다고 했다.

 

물론 목사와 성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자는 말은 정말 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목사는 자기도 몇 번씩이나 엘리야와 같은 낙심을 했다고 몇 번씩 강조해서 말했다. 그 목사는 인제 겨우 40대 중반이 이었는데 어떻게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어느 누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고통을 당하자고 해도 그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없다. 그런데 그는 자꾸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을 주님과 비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과도 비교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령된 이야기를 아주 거리낌없이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설교하는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만큼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지는 무의식적인 망말인 것이다.

 

이런 설교는 듣는 사람들, 특히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듣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역겨울 정도다. 나이가 40인 사람이 60인 사람에게 자기를 본 받아 세상을 살라고 해서는 좀 이상하다.

 

가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목사는 자기를 낮추고 드러내서는 안된다. 어디 설교가 목사를 본 받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본 받아 살아야 한다고만 말해야 한다.

 

혹 성도들이 목사를 본받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과 주님과 엘리야는 모두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분들이다. 목사가 강단에 선다고 하나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도가 되고 선지자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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