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비안(Moravian)운동에 대한 고찰
모라비안(Moravian)은 18세기 보헤미아(현 체코)의 개신교 신도들을 말한다. 1725년에 로마 가톨릭의 탄압을 피해,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이주하였다. 복음주의자들인 모라비안은 활발한 해외선교를 벌였고, 성공회 사제인 존 웨슬리 신부의 감리교 창시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가공품 제조 등의 노동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직업윤리를 실천하였다.
모라비안(Moravian)운동에 대한 고찰
모라비안(Moravian)운동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잘 알려진 운동이다. 상식으로 아는 바로는 그들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는 점과, 현대 선교운동의 최초의 전주라는 점과, 교회연합을 강조하였다는 점등 이다. 특히 그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의 신앙과 열심, 그리고 헌신은 크리스챤 지도자의 훌륭한 모델로서 비쳐지고 있다. 그 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그 운동의 그러한 점을 가리켜 "유럽선교에 활력있는 누룩"이라 하였고, 비숍 하세(Bishop Hasse)는 말하기를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의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평가되고 있는 이 운동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
1. 모라비아와 그 선교역사
비쟌틴 제국이 르네상스를 지내던 10세기 동안에 동방교회는 비기독교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민족은 슬라브족이었으며, 그들에게 처음으로 파송된 선교사는 콘스탄틴과 메도디우스(Methodius)였다.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화가인 이 형제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 의해 모라비아의 황태자인(모라비아는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행정구역에 속하는 곳이다) 라티스라브(Ratislav)의 요청을 받고 모라비아로 파송되었다. ...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요청은 처녀지역에 기독교 신앙을 확대시키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훈련에 의해 선생이 된 콘스탄틴은 복음서와 기도문을 작성하고 번역하는 언어 정리 작업을 함으로써 슬라브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예배에서 지방어를 사용하게 되어, 로마는 정죄하여도 콘스탄티노플에 의해서는 더 격려를 받아, 결국 19세기와 20세기의 근대 선교 사업의 융성을 가져온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고 하나의 전초 작업이 된 것이다.
로마의 교황은 그들의 사업을 자기 관할 하에 두려고 시도하였다. 콘스탄틴은 로마를 두 차례 방문하였고 896년에 사망하였다. 혼자 북쪽으로 돌아와 메도디우스는 성경 전서를 슬라브족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하였다. 그 기간 중에 그는 교황과 접촉을 계속하였으며 처음에는 지방어 사용을 정죄하더니 나중에는 허용하게 되었다. 설상 가상으로 독일 성직자는 그를 교회 영역이라고 하는 것에 침입자라고 간주하여 비쟌틴 선교와 슬라브 문학에 무자비하리만큼 반대하였다. 한때 그들은 메도디우스를 스와비아(Swabia)의 한 수도원에서 3년이나 감금한 적도 있었다. 885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라비아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대단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모라비아에서 축출되어 그의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불가리아로 갔는데, 그 곳 상황은 토착 기독교 문화발전에 보다 긍정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1029년에 하나의 주였던 그곳(모라비아)이 보헤미아에 즉, 독일황제의 깃발 아래 병합되었다.
15세기 초 로마교회가 보헤미아교회를 병합하려 하였을 때 거기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지도자 요한 후스(John Huss)의 활동에 의한 영향과 지도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413년 드디어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두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온건파였는데, 1437년 보헤미아 국가교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강경파였는데, 쿤발드(Kunwald)에서 처음에는 신약단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다가 1457년에 그것을 "형제의 교회"(the Church of the Brotherhood)라고 개칭하였다. 그것은 완델파와 같은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포함시켜 다시 "형제의 연합"(Unitas Fratrum)이라는 것으로 되어었다. 그들은 퓨리탄(청교도)처럼 엄격한 교리와 훈련, 예배의 개혁 그리고 형제애들을 강조함이 그 특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적인 신앙에로 돌아가는 운동에 역점을 두었는데, 그들의 초기 지도자들은 완델파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사도직의 계승을 주장하였다. 성경을 강조하는 믿음과 평화주의의 표방이 그들 신앙의 특색이었다. 로마교회가 그들로부터 분리된 이 그룹들을 잘 볼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교회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2. 핍박과 디아스포라
1609년 보헤미아 황제 루돌프(Rudolph)는 형제 연합단에게 자유를 인정하는 서한을 주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신교회 중 반 이상이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누린 평화와 번영의 시기도 잠깐이었다. 그 황제의 죽음 후 로마교회는 트랜트(Trent)대회의 결의들을 가지고 그들에게 압박을 가해왔다. 그들은 맹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보헤미아는 그들의 새 황제에 대항하여 30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1620년 바이센버그에서 대패하였다. 그들 중 3600명이나 되는 가족이 피난의 길을 떠났고, 그들은 유럽 여러지역에 흩어졌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였지만 남은 자들이 또한 있었다.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진 그들의 단체에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가 지도자로 그들을 돌보았다.
3. 모라비안의 재기
모라비안이 그같이 추방에 의하여 흩어진 후, 즉 흑암의 때에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기도는 놀라운 방법에 의하여 응답을 받았다. 1715년 부흥의 불길이 보헤미아의 풀네크(Fulneck)와 리티즈(Lititz)에서 붙게 되었다. 그 때 지도자는 크리스챤 데이비드(Christian David)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로마 카톨릭으로 부터 개종하여 삭소니(Saxony)에 정착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를 중심한 모라비안들은 그 당시 중요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백작 진젠도르프(Count Nicolas Zizendorf)를 그들의 단체에 영입하였다. 그는 본래 루터교회의 교인었고, 그의 아버지는 삭소니 정부의 한 장관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경건파에 속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찌기 경건주의의 영향을 부모를 통하여 받았던 분이었다. 그는 프랑케(Franke)가 경영하는 귀족들을 위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법을 연구하여 1721-1727년까지 드레스덴(Dresden)에서 법정변호사로서 그리고 상담자로서 일하였다. 그는 여가에는 기독교인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침 그들 모라비아인들이 그를 통하여 그의 부동산을 얻게 되었고, 거기에 그들의 본부를 짓게 되었다. 그 땅은 벧센돌프(Berthelsdorf)에 있었는데, 거기에 그는 모라비안과 접촉하기 이전에 교구목사 안드류 롯(Andrew Roth)이라는 목사를 초빙하여 목회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 땅을 모라비안 본부 설립을 위한 기지로 얻은 것은 그들이 박해로 말미암아 이산된 후 다시 기독교의 단체로서의 새 출발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들의 부흥의 지도자 크리스챤 데이비드(Christian David)는 기공식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제 거처를 찾는다"는 시편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 때가 1722년 6월 17일 이었다. 그들은 헤른후트(Herrnhut) 즉 "주의 지키심"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곳은 흩어진 형제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쿤발트 가까이 자우헨달(Zauchenthal)로 부터 온 다섯 개의 고대교회의 자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하였다. 진젠도르프가 그런 것처럼 경건파의 자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하였고, 경건파의 삶들이 또한 영입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중심지로서 뿐 아니라, 산업과 무역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얻은 이익은 바로 선교사업에 사용되었다. 그곳이 자연적으로 선교운동의 기지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루터교회의 교인으로 루터교회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루터교회의 예배에 함께하였고, 루터교회는 진젠도르프가 이끄는 형제단을 교회 내의 특수한 단체로 인정하고 허락하였다. 1727년 8월 12일 모라비안 형제단의 그런 독특한 입장을 내용으로 한 헌장, 훈령, 금지조항을 내포하는 법칙들이 헤른후트의 단체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그들의 단체는 베셀돌프 교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다음날 그들이 가진 성례식에 오순절적인 성령의 체험을 가졌었다. 성령의 불이 그들 위에 임하여 놀라움과 사랑의 충만함과 찬양으로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 목격자는 전하였다. 진젠도르프는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모라비안에로 연합해서 그 단체의 성격이 규정되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 "자기를 위하여 생을 준 분을 위하여 살고, 다른 사람을 예수에게 인도하는 것"을 결심하였다. 그가 윗덴벨그에서 공부하던시절 기독인의 단체라는 것을 조직하였는데, 복음을 전하여 세계를 변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다시 "겨자씨의 제도"(Order fo the Mustard Seed)라는 단체로 개명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가 드레스덴에서 법원에 상담역으로 있을 때, 매 주일 오후 공중집회를 가졌었는데, 거기에 모인 기독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벧셀돌프에서 매일저녁 묵상을 하였고, 주일 날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하였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을 포함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네 형제의 동맹(Alliance of the Four Brothers)'이라는 단체를 구성하였다. 두 사람은 목사였고, 한 사람은 젊은 친구였다. 그룹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서신으로, 책을 분배함으로, 개인접촉으로 추진되었다. 그의 유명한 말은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이다"(I have only one passion, and that is Christ)는 말이다. 그는 "기독인의 우의(友誼)외에 기독교를 알지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 받은 바의 축복을 나누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호혜적인 활동을 보이게끔 함이 그의 운동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들 회원들은 모두 방문을 통하여 우의를 서로 나누는데 힘썼다.
모라비안의 단체는 그들을 이끄는 두 가지 철학을 두고 있었다.
하나는 회원들이 단처럼 하나의 묶음이 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전투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그의 지도이념은 모든 단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는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끔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선교사업을 실천하였는데, 1732년 암스텔담에서 활약하였고, 그 후 24년간 유럽, 미국을 통하여 선교사업을 지휘하였다. 말기에 그는 발틱의 국가들 가운데 한 달 동안 설교하였다. 즉 에스토니안 가운데 부흥의 분위기를 고취하였다. 1738년에는 베를린의 한 창고에서 집회를 하였는데 성황을 이루었고, 1941년에는 제네바에서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미쳤다.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그는 성직자와 교인간의 장벽의 담을 헐어버림과 평신도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제도적인 교회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향을 강화하였고, 교회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4.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
헤른후트에서 일어난 놀라운 오순절적 성령 체험이 영국에서도 일어나기를 진젠도르프와 그의 동료들을 원하였다. 부흥의 사절이라 할 수 있는 요한 텔츠만(Johann Toltschmann)과 다른 두 사람이 진젤돌프의 서한을 지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 편지는 헤른 후트의 경험을 알리는 내용이었는데, 옥스포드대학 "기독교 지식 촉진회"(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와 죠지Ⅰ세의 궁정목사에게와 리프(Schoumberg Lippe)라는 왕후를 시중드는 백작의 직책을 가진 여성도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 대한 백작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던 반면, 그 궁정목사는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임금에게도 옥스포드대학에도 잘 전달되지 못하였다. 진젠도르프의 첫번째 시도는 그 처럼 결과를 낳지 못하였지만, 그의 노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735년 봅 틸칙(Toltschig)의 인솔로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미국 죠지아로 가던 도중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그들에 앞서 선교사로 미국에 건너간 그들 그룹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나 대학의 교수였던 슈판겐버그(Spangenberg)교수였다. 훗날 모라비안의 단체의 감독이 되었다. 그에 대하여 이런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슈방켈펠드(Schwenckfeldters)의 재침례파 그룹이 추방을 받아 할 수 없이 삭소니 지역을 떠나 죠지아 주로 그들의 거주지를 바꾸려 하였다. 그들은 먼저 홀랜드에 도착하였는데, 미국의 이주지를 죠지아가 아닌 펜실베니아 정착지에 대한 계획을 수정하였다.
슈판겐버그는 바로 그들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진첸돌프의 오그네돌프의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슈판겐버그는 진젠도르프의 그룹의 대표로 이제는 미국 죠지아주에 모라비안의 식민지 건립을 위해 오그너 돌프(Oglethorpe) 총독의 인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오그네돌프는 그들의 교리와 입장을 심사한 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슈판겐버그는 다른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함께 1735년 2월 영국을 떠나 사바나 가까이에 도착하여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것은 헤른후트의 모형을 따라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슈판겐버그와 그의 그룹은 그곳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거주하는 인디안족 크릭(Creek)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상의 두 차례의 모라비안의 영국과의 관계는 미미한 것이었으나, 모라비안 부흥과 선교진출에 계기가 되었다.
죠지아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좋은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더 많은 선교사들을 거기에로 파송하게끔 결정하였다. 1737년 8월, 26명이 헤른후트를 떠나 런던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기에서 선편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몬드(Simmonds)라는 선편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었다. 그 배에는 미국으로 가는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도 동승을 하였는데, 그것은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배에는 영국인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과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후에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우연한 만님인 것 같은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택된 축복의 도구로 삼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웨슬레가 그 후 모라비안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부흥운동에 연결되는 것으로 고려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3개월이란 긴 항해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였다. 잉함 목사는 후에 미국에 돌아와서 형제단의 능력있는 전도자가되어 활약하였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의 시작은 제임스 허톤(James Hutton)이라는 매서인(賣書人)과 연관이 있다. 그는 또한 요한 웨슬레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사란이었다. 웨슬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후톤의 주선으로 그의 부친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는 요한 웨슬레 일행의 미국행 전송을 위하여 시몬드선(船)에 왔다가 거기서 모라비안의 일행을 만났다. 그때 거기서 그들을 만남이 영국에 있어서 모라비아 교회의 첫 교인이 되게 한 것이었다. 그는 그후 웨슬리와도 계속 연락과 접촉을 하였다. 특히 모라비안의 인디안의 선교에 대한 소식에 큰 감동을 받았고 성경공부와 기도에 열중하는 작은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단체를 명명하여 "평신도 단체"(Vestry Society)라 하였다. 거기에는 성이 있는 기성교회 교인들인 회원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웨슬레를 후원하였는데, 그에게로부터 전하여 온 편지를 읽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허톤의 단체는 후에 "페테 골목의 단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허톤의 이 단체 이외에도 독일에서 추방받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단체들이 생기게 되었다.
1737년 진젠도르프의 동료와 함께 영국 방문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식민지 지역의 일에 관하여 영국의 관리국과 의논하기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를 안드류 도버(Andrew Dober)로 부터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들의 런던 내방의 다른 하나의 목적은 영국에 있는 모라비안 형제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인 거주자들의 가정 중심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는 켄트버리 대 감독과 챨스 웨슬레를 만났고, 그의 "겨자씨 회"(Order of the mustard Seed)에 대 주교와 감독 윌손을 영입하였다. "페테골목의 단체"와 그의 일을 돕는 10인의 젊은 사람들의 한 그룹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런던 체류기간 동안 안드류 오스트램(Adrew Ostroem)과 요한 프레디렉 이틴즈(Frederick Itintz)를 지도자로 최초의 교회를 영국에서 조직하였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의 발전과 밀접히 관계되는 또 한 사람은 피터 보러(Peter Bohler)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나대학에서 갑작스런 회심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 후 헤른후트의 모라비안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진젠도르프에 의하여 남 케로나이에 파송할 선교사로 내정되었고, 그 선교지로 가는 도중에 영국에 들러 선편을 기다리면서 머물게 되었다. 테일러 하밀턴(Taylor Hamilton)은 말하기를, 그의 영국 도착은 영국 교회에 모라비안의 결정적 영향을 가져다 준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때 마침 죠지아에서 되돌아온 웨슬레와 해후하게 되었다. 맥이 빠지고 기진이 쇠하여진 웨슬레와 만난것은 독일 사람의 집에서 였다. 웨슬레는 톨칙(Toltschng)의 편지를 지참하고 왔었다. 그들의 만남은 훗날 부흥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모라비안은 웨슬레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한 웨슬레는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 설립에 거꾸로 영향을 주었다. 뵐레의 런던 체류기간 동안 그는 후톤이 이끄는 단체들과 독일 거류민들의 신앙 단체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였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페라기안주의에 의한 팽배한 도덕주의 때문에 무척 사람들은 굳어져 있었는데, 그의 설교는 크게 환영을 받았고,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4일 전에 웨슬레를 만났고 "페터골목의 단체"의 미래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후톤의 앨글리칸과 휫필더의 회심자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 단체는 뵐러와 메도디스트 형제들에 의하여 그렇게 인정받은 단체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의 출발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영국교회의 교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주 중의 날에 모여서 고백과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지도자를 선정하고, 정기적인 금식과 "사랑의 잔치"(Love Feast)를 가졌으며, 선교에 힘썼다. 그들은 단체의 질서를 존중하였고, 단체를 이탈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즉 모든 형제의 결정된 사항을 존중하였다.
뵐러가 드디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 웨슬레는 그 단체의 감독과 설교를 맡았다. 후톤은 진젠도르프에게 구하기를, 뵐러가 돌아와 그들의 감독직을 맡게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페터골목의 사랑의 잔치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웨슬레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아침 3시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땅에 엎드리어 주의 같이 하심과 기쁨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감격과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고, 하나님의 찬양과 주님을 주(主)로 시인하는 소리를 발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오순절적인 체험은 모라비안의 각성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에서 모라비안운동은 진젠도르프와 웨슬레 사이의 성격적 차이로 마침내 불화를 가져왔고 거기에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페터골목 단체"의 1739년 1월 1일의 사랑의 잔치를 메도디스트와 모라비안의 교제의 절정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교제는 급(急)강하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라비안의 "고요의 교리" 때문이었다. "고요의 교리"는 필립 헨리 몰더(Philip Henry Molther)라는 사람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는 알사스 사람으로 진젠도르프의 영향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바니아에 가는 도중에 선편 사정 때문에 영국 런던에 와었는데, 런던 체류 기간동안 "페터골목 단체"에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 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차고 넘쳤고, 낮에는 가정을 방문하여 권고하였고 밤에는 그룹 집회를 가졌다. 그의 은혜의 강조의 설교에 청중은 큰 축복을 받았다. 몰더의, 루터가 말한 칭의 교리의 강조와 히스테릭한 청중의 감정의 표현에 대한 반대는 웨슬레의 찬성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드디어 1740년 웨슬레는 "사랑의 잔치"에서 그를 좇는 18,9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거기에서 나왔고, 웨슬레와 모라비안은 그렇게 이별하게 되었다. "페터골목의 단체"가 원래는 앵글리칸이 주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모라비안의 완전한 단체가 되었다. 그로써 사람들은 그들을 분리주의자로 낙인을 찍게 되었다.
1741년 슈판겐버그(Spangenberg) 도착 후 모라비안의 독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리엔본(Marienborn)의 대회의 소식을 가지고 왔었다. 그 대회는 1741년 8월 진젠도르프의 주재하에 영국, 독일의 대표가 참석한 대회였다. 거기에서 그들 운명의 두 가지 방향이 결정되었는데, 우선적으로 관심의 분야는 해외선교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그들의 본부를 요크샤의 풀네크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1742년 10월 페터골목의 단체는 "형제단의 회중"(a Congregation of 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교회로 부터 분리를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하나의 분파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진젠도르프와 다비드 니춰만(David Nitschman)은 켄터버리의 대주교에게 그들의 입장을 밝혔는데, 그들은 모라비안이라는 말과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1742년 그들이 그렇게 하나의 단체를 형성함으로써 부흥은 일단 정지하였다. 그러나 웨슬레가 떠난후 그들의 운동이 약화되지 않고 "봉사의 정신"(the sprit of service)을 보임에 아낌이 없었다. 런던에서 그들은 비상한 영적 능력을 힘입었고, 회중은 항상 차고 넘쳤으며, 비숫한 단체들의 생성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은 편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후원과 찬사를 보내었다. 그들의 인원들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고 위로를 줌에 인색하지 않았다. 방랑자와 타락한 자들을 위하여 구제의 손길을 폈다. 공장 노동자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걸인에게 음식을 주었다. 그들의 본부인 요크샤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거칠고 타락하고 잔인하였다. 닭싸움, 소를 괴롭히는 일 등을 즐겼고, 특별히 다른 군들의 사람들보다 더 그것이 심한 상태였다. 모라비안의 기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일으킬 부흥을 준비하셨다.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은 1737년 웨슬레 사람으로 옥스포드의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어 미국으로 갈 때 시몬드(Simmonds) 선상에서 모라비안을 본 것이 처음이었고, 미국 사바놀라에서 또한 그들을 인상깊게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들을 경건하고 평온한 천국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다시 돌아왔고, 자기 고향 요크샤 지역에서 순회전도를 하였다. 그는 다시 죠지아에 가기 이전에 인디안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인디안 언어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본국에서나 해외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일하였다. 그가 웨이커필더(Wakefield)에서 설교하였을 때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그는 그처럼 옥스포드의 메도디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모라비안에게 영향을 입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39년 모라비안의 새해의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자기 고향 요크샤로 돌아가 사도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그의 설교가 있은 후 그해 1월 6일 요크샤 교구에서 더 이상 설교하는 것은 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그에게 내린 금지령이 그를 막지 못하였다. 그는 거리에서, 시장에서, 동네 어귀에서 어디서나 설교를 하였다. 그는 결국 50개의 우의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는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런던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런던의 슈판겐버그가 26명의 남녀 순례자들을 보내어 그를 보조하게 하였다. 그는 풀네크(Fulneck)에 본부를 정하였다. 10여 곳에서 정구적인 설교의 장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락에서 영적 조직을 가졌다.
요크샤에서 그들의 전도는 순전하고 간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형제단으로 만들려는 것보다 기독교인으로 만들려 하였다. 요크샤에서 그들의 노력의 열매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지만 형제단에 가입한 사람은 단지 62명 뿐이었다. 만약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2년의 시험기간을 주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양을 얻으려는 것보다 될 수 있는 대로 교인들을 자기교회로 돌려보내는 일을 한 것이다. 만약 기어코 자기의 본 교회를 떠나기를 거절하는 자만이 엄격한 시험을 통한 후 회원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들의 그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크샤의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게 되었다. 1749년 공식적인 인정을 얻을 때까지 그들은 분리주의자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흔히 "독일인", "헤른후트인", "반 명목론자"들이라고 불려졌다. 그들에 대한 반대는 1742년에서 1745녀 까지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러한 반대에는 다섯가지 원인이 있음을 훌튼(J.E. Hulton)이 지적하였다.
① 그들의 운동이 독일인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
② 그들의 훈련이 너무 엄격하였다는 점,
③ 그들이 감각적인것을 피하고, 주를 조용히 기다림을 강조하는 고요의 교리에 원인이 있다는 점
④ 불완전한 교리와 실천이라는 오해,
⑤ 그들이 비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었다. (예 : "피와 상처의 신학")
노담톤(Northampton)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 오컬리(Francis Okeiy)가 설교하는데 찾아왔다. 랑크샤와 체샤에서 헌틴턴 후작의 종이었던 데이비드 테일러(David Taylor)를 찾았다. 쟌 카드웰(John Caidwell)은 스코틀랜드를 복음화하였는데, 아일(Ayr)을 본부로 삼고 거기에서 40여개의 도시에로 전도를 위해 순회하였다. 에딘버러와 글라스고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 이들 모든 지역이 나중 장로교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형제단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쟌 게닉(John Connick)은 "월트샤의 사도"(Apostle of Wiltshire)로 불리었는데,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17년간 축복의 전도를 하였던 사람이다. 대영국에서 그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어떤 곳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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