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학

[스크랩] 모라비안 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

수호천사1 2016. 9. 17. 22:18

 

 

모라비안 교도들의 부흥과 그 결과

앤드류 에이 데이비스 지음 

조 규 윤 옮김

 

 

1722년 6월 8일 모라비아로부터 온 10명의 피난민들이 색소니에 있는 베델스돌프에 도착했다. 그 땅은 진젠돌프 백작의 소유였다. 여섯 명의 어른들과 네 명의 어린이들로 구성된 이들 피난민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캐톨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왔고 진젠돌프는 개심한 모라비안 목수인 크리스챤 데이비드로부터 그들의 곤경을 잘 알고 있었다. 수개월 전 진젠돌프는 지역 공동사회의 영적인 복지를 위해 베델스돌프에 있는 땅을 구입했고 그는 이 땅을 개신교 피난민들을 위해 그들의 피난처와 거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1727년에는 적어도 200명의 모라비안 교도들이 그곳에 와 정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형제단(the Unity of Brethren)이라 부르고 그들의 영적인 시조는 ‘보헤미아의 개혁자인 존 후스’를 두었다. 1415년 후스가 처형된 후 그의 추종자들 중 몇몇 사람들은 보헤미아의 북동쪽에 있는 쿤 월드라는 마을에 교회를 이루었다.

이것은 형제교회(the Church of Brethren)의 첫 정착지였다.

16-17세기에 이르러 그 교회는 성장할 뿐만 아니라 박해도 받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보헤미아를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더러는 폴란드로 더러는 헝가리로 혹은 색소니로 혹은 화란과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고향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남아 캐톨릭의 박해속에서도 조용히 그들의 신앙을 보존하고 열심히 그것을 지켜 나갔다. 그들 중 일단의 사람들은 진젠돌프의 초청을 받고 즉시 응하여 베델스돌프에 돌아와 헤른후드(주께서 감찰하신다는 뜻) 모라비안 공동사회를 이루었다.

 

당시에 진젠돌프는 22살의 젊은 청년의 나이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귀족으로 드레스텐에서 출생하여 그로스헨너스돌프성(the castle)에 있는 외조모의 양육을 받았고 스펜너와 후랑케와 할레대학의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스펜너는 진젠돌프의 대부(god-farther)와는 친구 사이였고 할레대학은 경건주의자들의 중심지였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후랑케의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할레대학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적인 진리의 체험과 믿음과 거룩함과 생활에 의한 중생과 설교와 기도와 찬송과 헌신적인 실천을 하는 것과 교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갖는 것을 배웠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네 살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할레에 있는 6년 동안은 그 자신과 그의 동료 친구들을 위해 하나님께 관한 지식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철저한 헌신의 생활을 위해 작은 신앙적인 모임을 만들었고 외국선교에 대해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그에게 법학을 공부하기를 권했고 그는 1716-1719년 까지 스콜라적이면서 루터주의의 요새인 비텐베르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여기에서 1719년 법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유럽을 떠날 때 까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영적인 생활을 열심히 추구했다.

그가 더셀돌푸를 방문했을 때 한 장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는데 그 초상화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주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주느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그는 루터파 교회의 목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의 가족들은 그가 법조인으로 생활하기를 계속 주장하였다. 그 결과 1727년에는 드레스덴(독일 동부의 도시)에 있는 색손 지역의 법률 변호인으로 일하게 되었고 같은 해에 베델스돌프에 있는 땅을 사게 되었다.

 

진젠돌프의 관심은 지역 공동사회의 영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정착자들을 위해 성소를 마련하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 그들이 신실한 신자들의 연합된 사회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정착자들의 마음이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형제단의 회원이었지만 루터교도들과 개혁파교도들과 침례교도들이 있어 예정론과 성결론에 대해 교리적으로 서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더욱 어려운 일은 진젠돌프가 드레스덴에 없을 때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감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도 영적인 각성과 은혜의 깊은 역사도 있었다.

 

1722년 8월 30일 요한 로오드가 베델스돌프의 목사로 취임했을 때 골릿츠로부터 온 이웃교회의 쉐이퍼목사는 예언적인 말을 했다. “하나님은 이 나라를 밝게 비추기 위해서 이 언덕에 빛을 비추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고 했다. 더욱이 로오드 목사의 설교는 아주 열성적인 것이었다. 이러하므로 부흥된 형제교회의 기념적인 날들과 동시대의 부흥의 기록은 1723년에서 1727년 사이에 베델스돌프와 헤른후트에서의 설교는 가끔 하늘로 온 불과 같이 능력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진젠돌프가 드레스덴에 있을 때에는 그는 직접 체험적인 신앙을 성도들에게 가르쳤고 토비아스 후레데릭은 찬송으로 회중들을 격려하였다.

 

네 번째 지도자인 죤 왓트빌은 현명한 사람으로 개인적인 평등을 사랑하였다. 이것은 공동사회가 영적인 지도력이 인정되고 주일의 공적인 예배가 잘 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토의하고 기도하고 현명한 감독 하에 상호 격려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더욱이 1724년에 모라비아에서는 크리스챤 데이비드의 설교아래 큰 각성이 있었다. 멜카닛츠맨과 데이비드 닛츠맨이 1724에 도착했고 그들은 영적인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1727년에 진젠돌프는 베델스돌프와 헤른후트의 필요를 도와주고 완전히 헌신하기 위해서 드레스덴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진젠돌프의 첫 번째 관심은 정착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와 진리로 하나가 되고 대속적이고 희생적인 주님의 죽음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우그스버그 고백을 인정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진젠돌프의 전기 작가요 18세기의 모라비안의 지도자인 스팡겐벌그(Spangenberg)는 1727년 5월 12일의 그날에 대해서 말하기를 “백작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언약을 했다. 형제단들은 개인적으로 구세주에게 완전히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분쟁을 부끄러워했고 그것들을 잊기로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이기심과 고집과 불순종과 편견들을 포기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기를 소원했고 아무도 놀면서 소일하는 일도 없었으며 제각기 모든 일에 있어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 그들은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승리하는 생활을 했다”고 했다. 같은 날에 12명의 장로들이 임명되었고 진젠돌프는 감독이 되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오전 5시와 7시 30분과 오후 9시에 모였다. 그리고 3-5명의 소수의 사람들로 모임을 가졌는데 이것은 구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 세 개의 초등학교가 백 명의 어린이들을 위해 세워졌다.

 

이러한 제반 활동은 형제단에서 역사하는 기도의 영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것은 1727년 7월 16일에 있었던 진젠돌프의 공적인 기도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기념의 날들(The Memorial Days)에 의하면 “그는 뜨거운 눈물과 넘치는 사랑으로 기도했다. 이 기도는 이상한 영향을 가져왔다. 그리고 생명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초가 되엇다” 7월 22일에는 10명의 형제들이 기도와 찬송을 부르기 위해 모였고 그들은 큰 각성을 경험했다.

 

8월 5일에는 진젠돌프와 12명의 사람들이 철야하며 기도했다. 다음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철야기도에 참여했고 큰 회개의 역사가 있었다. 그 다음 수일 동안에는 하나님의 이상하고 특별한 능력이 밤에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그들 가운데 임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8월 10일 정오 즈음에 로오드 목사가 헤른후드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주님의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스스로 체험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함께 한 사람들도 이상한 능력에 압도되어 땅에 엎드렸다. 이러한 상태로 그들은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며 울며 간구했다. 그 다음날 8월 13일 수요일에 그는 온 회중과 더불어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그 전날 그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성도 상호간의 불신과 불일치들이 제거 되도록 했고 각 사람들은 성찬식을 위해 마음이 준비된 상태였다.

 

“기념의 날”(The Memorial Days)이라고 일컫는 8월 13일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이 교회로 나아가기 전 헤론후트에서 발행된 “거룩한 성찬식”이라는 제목의 짧은 설교의 글이 전달되었다. 베델스돌프에 이르는 길에서 사람들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무리들이 서로 함께 가면서 진실한 대화들을 나누었다. 전에는 소원하고 떨어진 관계였으나 사랑과 우정으로 함께한 모습들이었다. 예배가 시작되어 찬송이 불러졌는데 찬송 중에 한 사람은 그저 구경하러 왔던 사람이요 대단히 악한 사람이었지만 회개하며 부르짖게 되엇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죄와 속박에서부터 구원하소서.” 그때 로오드 목사는 침(세)례 받는 두 자매에게 진실한 축복을 선언하고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그 이후 갑자기 회중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졌고 그들은 눈물로 마음이 녹아지게 되었으며 찬송이 불려졌다. 그들이 울고 있는지 찬송을 부르는지 분간하기란 어려웠지만 큰 눈물과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뒤이어 기도시간이 되었는데 기도에는 믿음과 확신으로 하나님께 기뻐하셔서 두 장로인 크리스챤 데이비드와 멜콰르 닛츠만이 그들과 똑같은 은혜를 받게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 두 장로들은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가까운 교구지역에 있어 그날의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2주 후에 돌아오자 사람들은 즉시 8월 13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다. 두 장로들은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 날 10시에 사브랏에 있는 한 고아의 집에 있었는데 기도하고픈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한 작은방에 들어가 거기에서 주님께 무릎을 꿇고 집회를 위해 기쁘게 기도하고 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다.

그들이 그 이전에는 이와 같은 눈물을 흘린적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들의 마음에는 우리성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지금과 같은 마음을 알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예배를 마친 후 성도들은 거룩하고 황홀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진젠돌프는 27년 후 영국에서 설교하는 가운데 그날에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하기를 “27년 전 그날에 헤른후드의 성도들은 베델스돌프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모였다. 그들은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비판을 삼갔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였고 성찬식은 구주의 고상한 얼굴 앞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슬픔의 사람이요 고난을 아시는 분이시오 주님께서 그들의 후원자요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그들의 눈물을 기쁨의 기름으로 그리고 그들의 고난을 행복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짧은 순간에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도 살아있고 행복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졌던 그날의 은혜와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고 했다 진젠돌프는 그날을 가리켜 교회의 오순절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경험하거나 알지 못했던 그 분의 성령을 그들에게 부어주셨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지도자와 돕는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성령께서 친히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사람을 완전히 통제하셨다.

스팡겐벌그는 말하기를 “주님께서 그날로부터 그해 겨울까지 헤론후트를 위하여 행하신 일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전 지역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임하여 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날의 대 부흥은 어른들에게만 임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은 성령께서 8월 13일 이전에 어린이들 가운데 이미 역사하고 있었다. 진젠돌프는 여름이 되기 전 열 살에서 열세 살로 구성된 아홉 명의 소녀들로 반을 만들어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을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일날에는 그들에게 진실한 회개와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 결과 그들 중 몇몇은 깨닫고 회개하였는데 그 중에 수산나 퀸넬양은 5월 2일 어머니를 잃은 후 8월 6일에 구원을 확신하고 기쁨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였다. 8월 18일에는 어린이들에게도 똑같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로 충만하였고 그 이후로 소년 소녀들에게 많은 은혜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는 두 번째 부분에서 그날의 부흥의 결과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나누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물론 간접적인 결과도 있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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