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11강~20강)
제 11강 성실한 준비가 설교를 풍요롭게 한다
읽고, 쓰고, 경청하는 모든 습관이 설교를 위한 준비다
“나는 설교본문과 세 개의 예화만 있으면 설교준비는 끝난다.” 어느 목사가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설교를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우리 한국교회 강단에서 자신의 설교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참으로 암담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캄캄할 것이라.”(미 3:4,6)
이 예언의 말씀은 설교를 가볍게 생각하고 성실한 준비를 하지 않는 설교자들에게 주신 준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설교자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설교준비에 몰입하면, 전해야 할 메시지가 한줄기 빛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설교 준비를 가볍게 여기는 설교자는 그 시야가 어두워져 올바른 메시지를 볼 수가 없다. 더욱 두려운 것은 아무리 간구해도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얼굴을 돌리신다는 점이다. 이것이 예언의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메시지이다.
설교의 준비는 일상적인 준비와 직접적인 준비로 분류해서 생각해야 한다. 본 강의가 지금까지 언급해 온 것의 대부분은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준비에 해당한다. 설교자의 정체성 확립과 거기에 적합한 인성, 영성, 지성의 구비와 성령님의 섭시(讘示)를 간구하는 것까지 이 모두는 설교자의 자격을 갖추는데 필요한 준비의 첫 단계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설교라는 특수한 사명을 위한 일반적인 준비와 본문을 가지고 깊은 대화를 하면서 메시지를 받은 직접적인 준비가 기다리고 있다. 본문과의 대화는 다음 강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고 본 강의에서는 일반적인 준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찾아본다.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설교자들이 공부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의 언어구조와 표현의 기법과 전달의 방법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을 통해서 위력을 나타내지만 그것은 모두 시간을 두고 진행되는 영역이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언어의 사용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국어 실력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다.
그 부족함이 정확한 전달과 표현을 해야 함에 있어 오류와 미숙함으로 나타날 때가 적지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말 바로쓰기’에 관한 전문 안내서들을 읽으며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수준 높은 인문학과 논리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메시지의 전개를 논리 정연하게 이어나
가야 한다. 국문학자들 중 ‘한국의 설교자가 우리의 한글문화를 흩트려 놓은 장본인이다’라는 식의 말을 할 때마다 부끄러움과 심각한 책임을 느낀다.
둘째는, 좋은 서적들을 수시로 새롭게 갖추고 독서를 생활화하며 사는 것은 설교의 일반적 준비에 있어 으뜸 요소 중 하나이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목양실을 들릴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서재의 책장마다 각종 전집들이 가득하다는 점이다. 책으로 둘러싸인 설교자의 책상은 아름답지만 “목사님은 저 책들을 읽으셨습니까?”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가 많다.
이러한 질문은 필자만이 아니고 그곳을 보는 교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는 질문일 것이다. 양서를 모으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값비싼 각종 전집의 수집보다 단행본의 명작을 깊이 있게 읽는 생활이다. 목사가 사람들을 분주히 대하고 있는 모습보다 책을 가까이 두고 읽는 모습을 보게 될 때 신뢰와 경외감이 든다는 것이 평신도들의 평가이다. 현대인들은 첨단의 전자기기와 밀착되어 손에 책을 잡는 대신, 틈만 있으면 스마트폰을 잡고 손과 눈을 떼지 못한다. 하지만 설교자만은 내가 읽고 소화해야 할 양서들을 읽고 설교에 활용해주기를 기대한다.
셋째는, 역사적인 설교가들의 설교를 찾아 읽은 것은 분주히 사는 설교자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필자는 스펄젼을 비롯한 역사적인 설교의 거성들이 남긴 설교를 읽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낀다. 이들의 설교가 옮겨준 메시지는 확실히 오늘의 설교와는 차이가 많음을 느낀다. 잔잔한 은혜의 물결이 스며든다. 그 본문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때마다 읽기를 멈추고 중얼거린다.
‘왜 스펄젼 목사에게는 이러한 메시지가 보였는데 나의 뇌리, 나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아니할까?’ 늦게야 그 대답을 찾았다. 그들은 일차산업 시대에 살았던 단순한 삶의 주인들이었다. 맑은 하늘을 쳐다보고 비옥한 땅만을 밟으면서 하나님을 찾았던 순수성이 가득했던 삶의 무대였다. 정직한 말씀의 종으로 순진한 사람들에게 심오한 진리를 외쳤던 때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들의 설교는 만나였고 깊은 감동이 있었다.
그 때를 그려보며 푸른 창공을 보지 못한 채 호흡을 하고, 오염으로 가득한 아스팔트 위를 걸어야 하는 지금을 비교해본다. 혼탁한 바다를 노저어 가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역사적인 설교가들의 설교를 읽는다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설교의 맑은 우물’에 몸을 적시는 일이기에 권하고 싶은 큰 항목이다.
넷째는, 경청하고 통찰한 것들을 기록하는 습관이다. 틸리케는 “내가 참여하는모든 대화는 실제로는 설교를 위한 명상과 준비와 자료를 수집하는 시간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극장에서의 영화나 연극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자신의 설교 자료로 연관을 짓는다고 말하였다. 그렇다. 설교자는 모든 사건과 사물을 설교적 안목으로 보고 메모를 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총명함 이라도 둔한 펜만 못하다는 ‘총명이불여둔필(聰明以不如鈍筆)’이라는 어른들의 말은 역시 명언이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설교자들은 ‘메모의 생활화’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 메모는 단순한 자료의 모음에 멈추지 않고, 설교자의 온 정신이 언제 어디서나 설교를 위한 준비로 가득해져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제 12강 설교준비의 첫 단계는 본문과 주제를 정하는 것이다
주님! 어떤 말씀으로, 무엇에 관하여, 어떻게 선포해야 합니까?
설교자는 평생 동안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존재이다. 정성을 다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여 외친 후라도 흐뭇한 마음으로 해방감을 느낄 여유가 설교자에게는 없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며 줄곧 이어지는 다음 설교를 구상하고 준비해야 하는 ‘설교에 대한 중압감’이 마음을 누르고 있다.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주일예배 설교뿐 만이 아니라 그 외의 저녁예배와 각종 기도회의 설교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목사는 평생 동안 ‘설교의 멍에’를 매고 살아야 하는 말씀의 종들이다.
이러한 삶을 이어가는 설교자들이 월요일 새벽 성령님께 간구하는 첫 기도의 첫 항목은 일반회중과는 다른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주님! 이 종이 다음 주일에 어떤 말씀으로, 무엇에 관해, 어떻게 선포해야 합니까?’이다. 즉, 다음 설교의 본문과 주제와 명제를 찾는 작업이다. 이제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는 첫 단계인 본문과 주제를 확정하는 과정을 보자. 본문과 주제 가운데 무엇이 먼저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제를 선정하고 본문을 찾을 수 있고, 본문을 정하고 주제를 정할 수도 있다.
첫째, 본문(text)을 선정하는 과정에는 몇 가지의 길이 있다. 맑은 심령으로 성경을 읽는 중에 눈길을 멈추게 하는 말씀과의 만남이다. 그 순간 설교자는 지체없이 기도한다.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인지를 묻는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양들에게 들려져야 할 메시지가 보이는지 찾아야 한다. 난해한 말씀을 가지고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는 시도는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설교자의 높은 석의 실력 과시는 결코 좋은 설교로 이어지기 어렵다.
어떤 설교자는 한번 설교했던 본문이나 친숙한 본문은 피하려는 경향이 종종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리 친숙한 본문이라도 때와 환경에 따라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각각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문의 길이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 말씀의 문맥이 이어진다면 인위적으로 앞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본문을 시간이 임박하여 쫓기듯 찾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국내외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52주의 본문을 미리 정하고 거기에 따른 주제까지 확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최근에는 교회력을 따른 성서정과(Lectionary)를 세계교회가 사용하여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말씀을 외치고 있다. 여기에는 구약과 복음서와 서신서 그리고 시편까지 해당 주일의 본문을 제시함으로서 설교자들의 부담을 크게 줄어들게 하고 있다.
둘째는, 주제를 확정하는 과정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서는 주제설교를 ‘제목설교’라고 잘못 번역하여 많이 사용해왔다. 제목(Title)이라는 것은 주보나 게시판에 설교의 이름을 광고하는데 필요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제목의 역할은 회중들이 호기심을 갖고 경청하도록 하는 것 이상의 뜻은 없다. 주제(Subject, Theme, Topic)란 무엇에 관하여 설교할것인가를 뜻한다.
설교자는 그 날의 설교에서 ‘오늘의 메시지가 무엇에 관하여’ 말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한 설교에서 여러 주제를 말하려는 의욕은 메시지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초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를 가리켜 ‘초점을 잃은 설교’라고 한다. 회중들은 선명한 주제를 부각시키고 거기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설교를 들은 다음에는 “오늘 저 설교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느낌과 함께 심한 허탈감에 빠지게 된다.
주제의 선정은 본문에서 찾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메시지의 핵심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길은 회중들의 삶을 세심하게 살피는 가운데 그들에게 어떤 메시지가 필요한지 영적 감각으로 거기에 맞는 주제를 결정하는 방법이다. 설교자는 두 세계의 중간에 서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회중들의 삶, 이 중간 지대에서 메시지를 찾고 전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필요한 주제를 찾게 되고, 때로는 회중들의 삶에서 설교의 주제를 만나게 된다. 어떤 과정에서 주제가 발견되었을 지라도 그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적절한 본문을 찾는 것은 필수작업이다.
즉, 자신이 찾은 주제에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찾아서 전해야 한다. 주제의 선정에 있어 또 하나 유의할 것은 넓은 의미를 포함하는 것 보다는 구체적인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포괄적인 큰 주제보다는 ‘사랑의 회복’ 또는 ‘사랑의 필요성’과 같은 좁은 의미의 것이 그 효력이 크다.
셋째, 명제(proposition)이다. 명제는 자신이 전개하고자 하는 설교의 전체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설교의 구상을 하면서 설교의 방향과 범위를 정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설교의 명제가 없을 때는 설교의 전개가 종횡무진 하는 현상을 쉽게 가져온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의 선정과 주제가 끝났을 때 본문과 주제의 연결성을 잘 관찰한 후에 설교의 줄기를 설정하고 그 목적과 전개의 범위를 정리한다. 압축된 설교로 간결하고 명료하도록 한다.
그러나 본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메시지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고, 원래 의도보다 다른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설교자는 자신의 구상으로 엮어진 명제보다 본문의 메시지를 따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 이유는 메시지는 설교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13강 설교의 성패는 회중의 반응이 아닌, 말씀의 정확한 해석
주신 말씀의 깊은 뜻을 알려 주소서!
설교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이 많다. 그 대답 또한 다양하다. 어떤 설교자는 ‘아멘’의 함성으로 나타나는 회중들의 반응을 보고 설교의 성패를 말한다. 어떤 설교자는 회중들이 자신의 말에서 웃음을 자아내고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 표현을 보는 것에 설교의 성패를 말한다.
한국교회의 많은 설교자들과 회중들은 설교에 대한 이러한 반응을 설교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기에 매우 심각한 문제성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반응들이 설교의 성패를 나타내는 표준이 된다면 설교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설교자들이 우선적으로 어떻게 하면 회중들의 입에서 ‘아멘’을 많이 나오게 하고, 어떻게 하면 많이 울리고 웃길 것인가에 보다 많은 관심이 모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설교자가 설교의 성패를 이러한 반응을 기준으로 삼게 된다면 설교는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역사적으로 설교가 인간의 감성에 초점을 두었을 때 힘을 잃었고 암흑의 세계에 진입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가 눈 앞에 보이는 회중들의 반응을 외면하고 민감하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설교자가 기본적으로 어디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조심스레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설교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눈앞에 보이는 회중들의 반응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설교사역을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설교의 최우선적인 의무는 설교의 본문을 충실히 연구하고 분석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이해하고 깨닫는데 있어야한다 것에 일치하고 있다. 바우만은 그의 ‘성공적인 설교자를 위한 길잡이’에서 그날의 설교가 “성경에 얼마나 충실 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의 거성이며 최초의 설교학 교재를 펴내었던 성 어거스틴은 성경말씀의 깊은 뜻을 알고 싶지만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실력이 모자라 라틴어 성경만을 의존할 수 없었다. 사전이나 주석서가 없던 시절 번역본만 의지해야 했던 그 환경에서, 그는 설교 본문의 깊은 뜻을 알고 싶어 남달리 몸부림치고 있었다. 다음은 그의 ‘고백록’에서 보여준 부르짖음이다. “당신 말씀의 깊은 뜻이 두드리는 내 앞에 열리게 하소서…진리시여! 당신께 비나이다. 이 종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를 나로 하여금 알아듣게 해주시옵소서.”
설교자가 외쳐야 할 본문을 앞에 놓고, 그 말씀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도구를 자유롭게 갖출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여건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성서원어를 비롯하여 각종 주석 책을 pc화면에서 자유롭게 펼치면서 본문을 연구하고 깨달을 수 있는 시대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성경사전과 인명 지명 사전을 비롯하여 설교세계의 거성들이 남긴 설교를 마음껏 읽을 수 있다. 「디럭스 바이블」이나 「바이블렉스」를 사용하면서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활용하며 고마워하는 설교자들을 볼 때마다, 오늘의 IT 기술은 모두가 설교자들을 위하여 개발된 도구들로 보인다. 생각하면 설교자들에게는 은혜 중에 은혜의 시대이다.
이러한 도구들이 없을 때는 본문과는 동떨어진 은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이나 신비적 해석(Mystical Interpretation)들이 많았다. 설교자의 주관적 해석이 많아 숱한 해석의 오류들이 많아 부작용이 적지 아니하였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하더라도 계시록의 ‘붉은 용은 공산당’을 가리킨 것이라는 강의와 설교가 허다하였다. 그것만은 아니다. 남의 설교도 내 설
교인양 표절을 해도 회중들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을 통하여 설교자의 부도덕한 표절행위까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말씀의 바른 해석과 정직한 설교자의 길을 걷도록 하는데 오늘의 IT 기술은 설교자들에게 지대한 도움을 주고 있다.
이제는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해석의 방법론을 깊이 생각해야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은유적인 방법이나 신비적인 해석방법 외에도 교리적인 해석, 합리주의적 해석, 양식비평적인 해석, 신정통주의적 해석과 반신화적이고 실존적인 성경해석 방법 등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성경 해석의 차이는 교단을 갈라서게 만드는 결과까지 초래한 바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성경의 어떤 오류도 인정하지 않고 성경을 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관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경관을 가지고 살았던 종교개혁가들이 사용했던 성경해석 방법은 본문을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핵심단어의 분석과 더불어 당시의 역사적인 맥락을 연구하면서 메시지를 터득하는 성경해석 방법이었다. 지금도 이 해석방법은 설교자들 사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여기서 우리의 설교자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특유한 해석을 들어내며 ‘신조어’들을 만들어 전통적인 성경해석에 혼돈을 가져와 교회를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해석으로 주목을 받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는 언제나 철저히 자제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말씀과 뜻을 회중들에게 운반해주겠다는 일념만을 품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두뇌만으로 말씀을 풀려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이 순간이야 말로 ‘말씀의 깊은 뜻을 알려 주소서’하는 절실한 성령님의 섭시(讘示)를 구하면서 철저한 석의 작업을 이어가야한다.
제 14강 설교자는 본문의 지배자 아닌 ‘봉사자’…하나님 음성 구해야
지금 여기에 (Here and Now) 주시는 메시지를 묻나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을 성경말씀에 복종시키려고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사용하려고 하는가?” 이는 로빈슨(Haddon W. Robinson)이 그의 저서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에서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방
향과 목적과 표현이 달라진다. 설교자는 본문을 정한 후 기본적으로 통과해야 할 세 단계의 관문이 있다. 첫째는 지난 강의에서 설명한 석의(Exegesis)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본문의 핵심 단어와 문맥을 비롯하여 그 본분이 있게 된 배경과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 등을 상세하게 연구 분석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주해(Exposition) 곧 강해의 과정이다. 이 단계에서 설교자는 석의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들을 종합하여, 하나님께서 이 본문 전체를 통하여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찾아야 한다.
셋째는, 다음 강의에서 설명하게 될 말씀의 현장화를 위한 적용(Application)이다. 이번 강의에서 다루게 되는 주해는 설교자가 매우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설교자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설교의 내용과 메시지가 달라진다. 로빈슨 교수의 질문에서처럼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본문 석의 결과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이 설정한 주장을 펴기 위하여 성경말씀이 이용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범하는 설교이다. 여기서는 설교자가 온전히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온전히 순종하고 그 말씀의 뜻만을 전하려는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설교자가 들어야 할 메시지는 다음의 세 가지 분야이다. 첫째, 오늘의 본문이 오늘 여기(Here and Now)의 이 회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는, 그 사실의 진실성과 정당성,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는, 이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과 나는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만남을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지적인 기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서는 어느 때보다도 설교자가 긴장하고 마음을 비워야한다. 그리고 무슨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하시는 지를 듣기 위해 신령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한 진리이기에 오늘 여기에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말씀의 주인은 과거의 하나님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 여기의 하나님으로 말씀을 주고 계신다. 때문에, 그 말씀을 듣기 위한 설교자의 진지한 노력이 주해의 과정에서 절대로 필요하다. 흔히들 주해 또는 강해는 단순히 본문을 풀어 설명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 한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말씀과 회중의 사이에 서 있다.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찾아 회중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에 결코 단순한 강해가 아니다.
여기서 설교자의 영성이 맑은 경우는 쉽게 메시지를 찾고, 듣게 된다. 그러나 혼탁한 영성으로 경건한 삶을 이어가지 못한 설교자는 좀처럼 올바른 메시지를 찾지 못해 몸부림을 치게 된다. 그래서 주해 단계는 설교준비의 전 과정 중에 설교자가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이라고 한다. 설교사역을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하면, 정확한 석의과정을 지나고 주해의 단계를 거쳐, 은혜의 진리를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설교자의 최대 의무이며 특권이다. 이 중차대한 의무의 핵심이 바로 이 주해의 과정에 담겨있다. 이러한 주해의 과정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다음 몇 가지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첫째는, 메시지가 본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설교자가 우선적으로 이해야 할 것은 설교의 메시지는 설교자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본문의 지배자가 아니라 겸손한 봉사자로서 그 기본자세를 갖추어야한다.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알려주시옵소서. 들려주시옵소서”라며 쉼 없이 애원하는 갈급한 호소가 필요하다. 그러한 자세로 살았던 설교의 거성들이 주해과정에서 발굴한 메시지들은 큰 참고가 될 수 있다.
둘째는, 주해는 본문 전체의 흐름 속에서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현대의 지성적인 설교자들은 흔히 핵심단어들을 파고들어 분석하고 거기에 자신의 관심을 결합시키는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참된 주해는 하나님이 본문 전체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설정하고 그 개념을 중심하여 본문의 주해를 이어가야 한다. 셋째는, 주해는 본문이 오늘의 말씀으로 임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가 주해하고 있는 말씀은 분명히 수천 년 전에 있었던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지금의 여기가 아니다. 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오늘, 여기의 회중들의 한 복판에서
들려주신다. 그래서 메시지는 언제나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설교에서 말씀은 과거로 표현하지 않고 언제나 현재로 표현한다. 넷째는, 설교자가 기본 메시지를 본문으로부터 먼저 접하고 소화하여야한다.
발견된 메시지가 설교자의 가슴을 먼저 감동시키지 못한 체 회중들 앞에 나아가는 것은 설교자의 불충한 자세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 자신의 심령에 은혜를 먼저 받고 나아가는 것이 설교자의 바른 절차이다. 정직한 설교자는 자신이 은혜에 접하지 못한 부분은 설교하지 않은 원칙을 지킨다.
제 15강 주해를 통해 깨달은 진리, 설교자의 삶에 먼저 적용돼야
설교의 적용(Application)이란 말씀의 현장화(現場化)이다
말씀의 꽃이 피는 곳은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삶이 전개되는 현장이다. 설교자가 본문을 앞에 놓고 철저한 주석과 주해를 한 목적은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회중들이 선포된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 진리를 그들의 삶에 실천하여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다. 그것을 곧 말씀의 적용 또는 말씀의 현장화라고 한다. 그래서 스펄젼은 “적용이 시작되는 곳에서 설교도 시작된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주석과 주해가 아무리 뛰어나게 잘 되었다고 해도 거기서 나오는 메시지가 회중들의 삶과 무관하게 이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강의나 학문적 접근에 끝나게 된다.
어떤 설교자들은 본문을 읽고 지루한 주석과 주해만을 계속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사건들만을 흥미진진하게 설명을 한다. 그러나 막상 기대했던 적용, 곧 오늘의 삶과 연결되어지는 부분은 거의 보이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현장과 무관한 설교’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말씀을 해석하고 전해야 할 진리를 찾았을 때, 우선적인 과제는 내가 먹이고 섬기는 회중들의 어느 부분에 이 진리를 적용시킬 것인지를 찾아야 한다. 이 소중한 적용의 단계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 본문의 진리는 결실
을 맺게 된다. 그 만큼 적용이란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은 효과적인 적용을 원하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을 주리라 본다.
첫째, 적용은 설교자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한다. 주석과 주해를 통하여 깨닫게 된 진리는 설교자에게 먼저 적용되어 승화되는 경험을 요구한다. 설교자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는 진리를 회중들에게 적용하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시도이다. 자신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일 때 회중들의 삶에 적용을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소리만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청빈하지 못한 인격체로 알려진 설교자가 회중들에게 청빈의 메시지를 수용하라며 소리치는 것은 아무런 반향을 일으킬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설교자를 향한 최상의 설교자이다”라는 말을 새롭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적용을 시도하지 말아야 한다. 시대의 흐름은 날이 갈수록 성(聖)과 속(俗)이 혼돈스러워진다. 그동안 우리의 교회는 순종 일변도의 교회였다. 그러나 지적인 수준과 비판의식이 높아지면서 저마다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환언하면, 오늘의 설교자들은 초기의 교회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회중을 이끌고 가는데 한계를 느끼고 지친다. 그럴 때면 자신의 지도력에 맞춰 따라오지 않는 무리들의 인상이 줄곧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 결과 적용의 대상이 자칫 보편적이 아닌 특수한 인물들이 되기 쉽다. 설교는 어떤 경우도 개인을 대상으로 하여 그 날의 메시지를 적용시킬 수 없다.
셋째, 설교자가 적용에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적용이 설교의 최종적인 목표라고 하더라도 설교자의 기본임무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설교자의 기본임무는 말씀을 들려주고, 그 말씀을 풀어 이해를 시키며,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삶의 장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의 시간을 다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며, 그 뜻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시간은 지극히 짧고 요식적이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적용을 위한 예화나 경험담을 비롯하여 자기지식의 나열과 주장을 펼치는데 소비하고 있다. 지혜 있는 설교자는 설교원고를 점검하면서 그 균형을 유지하는데 깊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
넷째, 적용은 설교자의 주장을 관철하는 도구가 아니다. 제7 강의에서 설교의 위기 중에 하나가 오늘의 설교자들이 설교를 ‘목회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적용의 과정에서 설교자는 흔히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감정의 정화, 곧 카타르시스는 마음 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것을 말한다. 만에 하나 설교자가 적용을 정화의 방편으로 오용하면, 그의 설교사역에 적신호가 켜지게 된다. 그 이유는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언어를 비롯한 각종 실수가 상식과 교양의 범위를 벗어나 노출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오직 설교자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설교를 통하여 자신의 불편한 감정의 응어리를 뿜어내는데 맛을 들이면 두려움을 모르고 상습화된다. 사탄은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선악과로 만들어 설교자들이 적용과정에서 쉽게 입에 넣을 수 있도록 언제나 가까이에 내 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다섯째로, 메시지가 누구에게나 이해와 공감을 불러 일으켜 효과적인 적용을 가져오기 위해 다음 네 가지의 방법을 권하다. 첫째는, 진지하고 부드럽게 회중들의 가슴에 스며들도록 하는 질서있는 설명이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설교자의 일방적인 설명이 아니라 보편타당성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는, 말씀과 삶의 장과 쉽게 연결할 수 있는 예화의 활용이다. 예화의 사용은 설교자의 특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다음 강의에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셋째는, 회중이 타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의로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적용의 길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이 적용은 명령적이었다. 제시한대로 하면 복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적용은 효력이 없다. 넷째는, 감동적인 간증 등을 통하여 생생한 예증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는 방법이다.
제 16강 메시지 구체화시키는 설교예화, 잘못 쓰면 설교 전체 손상
이것이 예화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한 지름길이다
예화가 없으면 설교가 안 된다는 설교자들이 많다. 이들은 적절한 예화만 있으면 설교는 아무 문제없이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문에 대한 구보다 예화의 발굴에 훨씬 노력을 기울인다. 설교를 온통 ‘예화의 진열장’으로 만들고 있다. 설교자가 ‘이야기꾼’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결과 회중은 진리의 내용보다는 구수한 예화에 관심을 더 보인다. 귀가하는 교인들을 붙들고 그들이 들었던 설교에 대한 질문을 하면 본문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귀를 즐겁게 해주었던 예화만을 기억한다. 이때마다 하게 되는 질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화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아니한 설교가 과연 참된 설교인가?’ 한국교회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낮았을 때는 진리를 심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예화의 활용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설교를 경청하는 수준이 예전과 다르다. 설교분야를 연구하는 어느 조사에서는 지식수준이 높고 신앙의 연조가 높을수록 예화 위주의 설교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비유를 즐겨 쓰셨던 예수님의 말씀사역을 들추며 말한다.
사실 예화는 진리를 밝히 보여주기 위한 한 폭의 그림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필요성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화는 메시지를 구체화시키는 도구이다. 둘째, 회중에게 메시지를 각인 시키고 흥미를 유발시킨다. 셋째, 회중들이 메시지를 기억하는데 도움을 준다. 넷째, 예화는 실천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예화이기에 우리의 설교자는 예화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화가 성공적으로 사용될 때는 대단한 효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설교 전체가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유용하고 효과적인 예화의 활용을 위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1)외국에서 번역한 예화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야 한다. 한국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이야기들이 예화로 사용되어야 공감대 형성이 빠르다. 인도의 간디, 아브라함 링컨이니 하는 식의 이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적절한 예화를 찾아 적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다. (2)설교자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이야기는 최대한 삼가는 것이 정상이다. 설교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질 때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훨씬 많다. 설교자가 보이지 않아야 하나님이 보인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설교자는 어떤 경우도 자신의 나타남을 억제한다. (3)남이 사용하지 않는 예화를 수집함이 유용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예화를 사용한다면 진부함으로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읽은 책에서 발굴한 예화의 활용을 권장한다.
(4)예화의 길이는 짧을수록 좋다. 2분을 넘기지 않도록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고 사용함이 좋다. 필자는 어느 설교자가 한 예화를 가지고 12분을 넘기고 있음을 보면서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그날 그 설교자는 4개의 예화를 사용하였는데 30분 설교에서 예화가 차지한 시간이 25분이었다. 그 설교자는 시간을 메꾸기 위한 방편으로서 예화를 늘려 사용하고 있다는 오해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5)예화의 출처를 밝히는 데 유의해야 한다. 예화의 확실성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좋으나 그 부작용 또한 크다. 예를 들어 어느 특정한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라고 말했을 때, 그 신문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설교자가 정치적으로 자신
과 다른 노선의 지도자라고 판단한다. 생존한 인물의 실명을 대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사람과 견원지간인 사람이 있다면 그 예화는 실패한 경우가 된다. 따라서 “오늘 어느 조간신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겪은 이야기입니다”와 같은 표현을 권장한다. (6)예화를 과장하여 들려주는 일은 삼가야한다. 사람이 말을 하다 보면 열이 나고 열이 나게 되면 감정이 움직인다. 이 과정에서 설교자는 사실의 선을 넘어 과장을 거듭한다. 회중들은 과장된 예화를 계속 듣다가 종국에는 설교자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7)설교의 주안점마다 예화를 사용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예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한하여 사용함이 훨씬 효과적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고 설득이 됨에도 예화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버려야 한다.
(8)육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예화는 금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다. 이 죄성이 움직이는 예화의 사용은 그 날의 설교를 실패로 몰고 가는 도구가 된다. 실질적으로 어느 설교자는 ‘죄의 은신처’를 말하면서 어느 퇴폐영업소의 이야기를 아주 실감나게 10분이 넘도록 설명하였다. 그 결과 그곳을 출입한 목사로 오해를 받고 교회를 떠나야 했던 일이 있었다. (9)예화는 원고화 하되 원고를 보면서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예화를 원고화 하는 것은 불필요한 수식어를 줄이고 시간의 조절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예화의 전달을 원고에 시선을 두고 해서는 안 된다. 예화를 말하는 것까지 원고에 의존하는 것은 설교자의 능력 평가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10)예화는 가급적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성향의 것들이어야 한다. 설교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는 예화들이 긍정적이고 우러러볼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설교자가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로 실패한 예화를 사용함으로 고단한 교인들에게 제2의 상처를 안겨주기 쉽다. 그러나 절망을 딛고 굳건히 일어선 인물들, 묵묵히 헌신적 사랑을 실천하는 얘기,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예화들은 그대로 감동으로 전해지며 회중이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예화는 이상과 같은 주의 점들을 유의하여 잘 사용했을 때는 메시지를 가슴에 와 닿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설교 자체를 무너뜨리는 해독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설교가 ‘예화의 진열장’으로 꾸려지면 그 설교자는 삯군의 불명예를 얻게 된다.
제 17강 간증은 설교말씀을 위한 예증으로만 활용돼야
설교와 신앙 간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바르게 존재하는 비결은 교회가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것에 있다. 이 원칙이 무너질 때 교회는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최근에 한국교회의 강단이 서서히 변질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것은 특정인들의 신앙 경험을 들려주는 간증을 설교보다 우위에 두는 현상이다. 신앙 간증은 메시지를 회중들의 삶에 보다 더 효율적으로 적용시키는데 필요한 하나의 방편이다.
간증은 단순히 어떤 얘기의 전달이 아니라, 그 날의 메시지와 연관된 사실을 직접 체험한 바 있는 사람이 스스로 증언하는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간증은 가끔씩 예화의 차원에서 들려주는 것이 그 출발이었다. 미국에 한 때 급부상했던 로버트 슐러 같은 목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생생한 적용을 위해 설교시간에 간증자를 자주 세운 것을 보았다. 보통 5분 이내로 그 날의 메시지와 연관된 신앙경험이 있는 사람을 세워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하였다. 그 결과 메시지의 생생한 적용에 큰 효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TV 중계를 통하여 전 세계에 방영된 이러한 간증의 활용은 한국교회에도 매우 큰 영향을 준 바 있다. 한국교회는 간증을 설교 도중에 하는 것 보다 별도의 ‘간증집회’를 갖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예배에서의 설교시간을 간증으로 대체하는 ‘간증설교’까지 등장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간증에 큰 비중을 두는 목사들은 설교나 간증이나 무엇이든지 은혜만 끼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한다. 물론 신앙간증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면, 경험적인 신앙의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수 있다.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임을 알게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하여 신앙간증은 동일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시켜 새로운 비전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신비한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말씀의 적용에 생동감을 주어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특수한 영적인 경험의 간증을 통하여 인간지성을 초월하여 초자연적으로 발생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 신앙간증이지만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로 그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 첫째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부분은 개인의 영적 경험을 보편타당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데에 있다.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특수한 경험을 증언했지만 교회는 그 어떤 기사이적도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으로 국한시켰다. 이러한 결정에 불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특수계시라는 이름 아래 추종자들을 모으고 이단의 길을 걸어 기독교의 진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둘째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말씀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그 말씀 해석하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우리의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간증은 자신이 받은 계시나 경험이 기본이 되어 거기에 해당하는 성경말씀을 인용한다. 다시 말하면, 66권의 성경보다 개인인 자신이 받은 계시와 경험을 우선한다. 한 실례가 2014년 12월 제2차 한국전쟁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던 홍00의 경우이다. 그녀는 천국과 지옥을 보는 체험을 1500회 이상 하고 주님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미래사를 듣는 간증을 하면서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적이 있다.
셋째로, 설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의 주인은 어떤 경우도 인간이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는 부름받은 몸으로 끝나지 않고, 말씀의 종들로 최소한 3년 과정 이상의 신학교에서 성경의 진리와 신학을 연구하고 습득하며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러나 간증자는 단시간의 어떤 사건이나 신비한 경지에서 얻어진 경험의 소유자들이다. 말씀의 적용을 위하여 신학을 깊이 연구하고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아니다. 필요한 성구만을 외우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넷째로, 신앙간증을 남용할 때 간증자들은 자신이 보냄을 받은 ‘말씀의 종’으로 착각을 한다. 전통적인 설교사역자들에게는 ‘직통계시를 받은 몸’으로서 신령한 존재로 행세를 한다. 중들에게는 ‘이 시대에 보내주신 능력의 종, 신유의 종’으로 군림을 한다. 매우 위험한 현상들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신비한 경험의 간증이더라도 성경말씀을 억지로 연관시켜 합리화시키는 신앙의 체험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간증이 설교를 대체할 수 없다. 간증은 개인적 차원의 영적 체험으로서 언제나 설교말씀을 위한 예증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 질서가 무너지는 날, 설교사역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은 개인의 체험적인 신앙을 통하여 모두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성경 66권을 통하여 말씀하심을 오늘의 설교자들은 명심해야 한다.
제 18강 설교의 유형엔 ‘본문설교·강해설교·주제설교’가 있다
이것이 설교의 기본유형이다
사람은 어릴 적부터 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서 단어와 표현을 배우면서 언어의 소통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건강한 신체 기능을 가진 사람은 언어의 소통 능력에 대해 특별한 관심 없이 발전하고 성장하며 사회생활을 영위해 간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특별한 주의를 필요로 할 때가 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펼 때나, 언어를 통한 교육을 해야 할 때는 효과적인 논리의 방법이 필요하다. 고대의 수사학은 유창한 말솜씨와 관련된 이론과 규칙을 개발하고, 그것을 설득의 중요한 무기로 사용하였다.
이 수사학은 많은 지성인들의 환영을 받았고 중요한 교육의 과정으로 정착한 바 있었다. 유명한 수사학자였던 어거스틴이 말씀의 종으로 변화되어 펴낸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는 최초의 설교학 교재였다. 그 책에서 설교이론이 수사학적으로 접근하였음을 보게 된다. 실질적으로 설교는 어떤 수사학적 이론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4세기의 크리소스톰, 13세기의 아시스의 프란시스, 그리고 16세기의 루터, 칼빈, 츠빙글리와 같은 설교가들을 비롯하여 그 이후의 설교의 거성들이 수사학적 이론이나 규칙을 가지고 설교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설교학이 발전을 하면서 역사적인 설교들을 모아 연구 분석을 거듭한 결과 설교 유형들을 본문설교, 강해설교, 주제설교 등으로 구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교자들이 이러한 설교의 기본유형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면, 메시지의 전달에 매우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먼저, 본문설교에 대하여 알아본다. 본문설교(Textual Sermon)는 어떤 유형의 설교보다도 본문의 정황(context)을 비롯하여 핵심단어와 문맥의 분석을 철저히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길이를 5절 이내로 한다. 이러한 본문연구 과정을 거쳐 설교의 주제와 주안점(대지)들이 본문에서 발췌되도록 한
다. 따라서 메시지의 핵심이 본문에서 나와 회중들이 본문과의 만남을 가져오도록 한다. 이 유형의 설교가 가져온 장점은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사상이나 경험 위주를 벗어나 본문 위주로 설교를 구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산만하고 잡다한 수식들이 대폭 줄어들게 된다. 회중은 정확한 메시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추게 된다.
본문설교는 이러한 좋은 장점들이 풍부하지만 주의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것은 설교자가 임의로 취향에 맞는 본문만을 찾게 됨으로 인해 66권의 말씀을 골고루 먹도록 해야 하는 균형을 지키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때로는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펼치는데 적당한 본문만을 찾아 자기 합리화를 위한 설교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나 설교자가 이러한 모순을 범하지 않고 본문설교를 활용한다면 설교는 더욱 분명한 하나님 말씀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설교자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을 축적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로, 강해설교에 대하여 알아본다. 주해설교라고도 일컫는 본 설교는 많은 설교자들에 의하여 이어진 설교의 유형이다. 밀러(D. Miller)는 “모든 참된 설교는 강해설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마이어(F. B. Meyer)는 강해설교를 “성경 가운데서 한권이나 또는 어느 일정한 부분을 본문으로 하여 그것을 연속적으로 주석해 나가는 설교”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유형은 많은 분량의 본문을 가지고 석의적 접근보다 주해적 접근을 더 강조한다. 여기서 진리의 현재성을 밝히고 그 진리를 회중들의 삶에 조명해준다. 이 설교는 어떤 유형의 설교보다 설교자의 맑은 영성이 요구되며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 앞에 있는 설교자 자신이 주어진 메시지와 우선적으로 깊은 만남을 가져와야 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
교자의 단순한 감성으로 진리를 받아드려 말씀의 본뜻과 상반된 설교를 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강해설교의 원리와 실제’를 펴낸 로빈슨(Haddon Robinson)은 강해설교는 본문설교에서 요구하는 역사적, 문법적, 문학적 연구들을 철저히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강해설교 또한 안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일정한 성경을 택하여 한 장씩 강해하는 경우 사회가 직면한 현장의 문제들을 외면하기 쉬운 함정이 있다.
셋째로, 주제설교에 대하여 알아본다. 주제설교는 주제와 본문의 선정을 설교자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형이다. 현장이 필요로 하는 주제를 가지고 자료를 수집하여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설교이다. 주로 인간 세상의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회중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현대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설교의 유형이다. 그러나 이 설교에는 설교자의 특별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전달하여 말씀의 주인이 보이도록 해야 하는 설교의 원칙이 흔들린다. 설교자의 경험과 세상의 예화와 지식과 판단, 주장이 주종을 이루어 설교자가 말씀의 주인자리에 앉게 되는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 결과 비성경적인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자칫 본문이 자신의 말을 입증시키는 하나의 각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설교자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게 설교가 ‘종교수필’로 전락하기 쉽다. 주제설교의 진정한 성공은 설교자가 본문의 봉사자로서 본문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앞에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설교자는 자신의 주관적 주제와 자료는 그 말씀을 돋보이게 하는 부수적 자료가 되도록 하는 기본 수칙을 지켜야 한다.
제 19강 “설교의 전개형태는 메시지의 전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설교의 전개형태, 3대지 설교가 전부인가요?
종교개혁의 샛별들이었던 타울러나 위클리프와 같은 설교자들이 등장하였던 시기인 1322년, 지금도 미지의 인물로 알려진 베이스본의 로베르토(Robertof Basevorn)에 의해 최초로 『설교의 형식』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230년경 파리대학에서 있었던 설교의 전개형태에
대한 기록들을 참고 하여 설교의 구성형식을 다루었다. 이 책은 설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설교의 형식을 연구하는데 원조의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책에서는 설교의 전개 방식은 주제를 세 가지의 주안점(대지)을 설정하고 진행함이 유익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유는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메시지를 조명할 수 있으며 세 겹으로 된 줄이 가장 끊기 어렵다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정해진 설교시간에 3개의 주안점이 전달이나 기억에 적절하다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후대의 설교가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3대지 설교’라는 틀이 고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출발한 설교의 형식은 3개의 주안점(대지)을 만들고 거기에 적절한 자료와 예화를 첨가하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설교의 전개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그 형태마다 각각 다른 이름을 붙여 설교자들이 혼돈을 가져오기도 한다. 설교학의 발전이 가장 활발한 북미설교학회에서는 새로운 전개형태의 개발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누구인가 새로운 전개형태를 연구 발표하면 그것
이 새로운 이슈가 되어서 귀를 기울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어떤 전개형태는 메시지의 발굴과 전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는 비성경적인 설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는 지난 강의에서 살펴본 기본유형에 따라 그 전개형태를 각각 달리하게 된다. 기본유형에서 강조했던 본문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한 후에 깨달은 메시지를 어떻게 전개하여 회중들의 가슴에 심어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설교자의 당연한 과정이다.
본 강의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설교의 기본유형에 따라 본문을 떠나지 않고 전개할 수 있는 설교형태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하고자 하는 8가지 전개형태는 대지설교, 분석설교, 상관설교, 서사체설교, 예화설교, 인물설교, 대화설교, 독백설교 등이다.
1) 대지설교에 대하여
설교의 역사에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대지설교는 설교의 기본유형 중에 본문 설교나 주제설교를 전개하는데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는 전개형태이다. 이 형태를 빌려 전개하는 설교의 대지는 설교의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는, 본문설교의 유형에 따라 대지설교로 전개를 하는 경우에 설교의 대지는 본문에서 제시되어야 한다. 이 때 유의해야 할 것은 대지의 문장이 일반적으로 설교자가 제시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의 핵심이 되는 대지의 표현은 성삼위 하나님이 주어로 등장하는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전 13장 4절의 ‘사랑의 실상’을 본문으로 했을 경우를 본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라는 본문을 그대로 옮겨왔지만 설교자의 주장처럼 보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첫째,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함을 가르치십니다”로 표현을 정확하게 함으로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된다. 둘째는, 대지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본문을 제시해야 한다. 본문이 없는 대지는 자칫 설교자의 이론과 지식으로 일관하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오래 참음’의 근거를 본문으로 제시함이 바른 절차이다. 흔히들 설교자가 ‘오래 참음’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한 다음에 성경으로 보충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은 실은 자신의 말을 입증시키는 ‘각주-footnote’로 본문을 이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대지에 해당되는 ‘오래참음’의 핵심단어를 제시함이 마땅하다.
셋째는, 핵심단어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원어를 중심하여 정확히 밝히는데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오래참음의 원어를 찾아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기본 의미를 설명해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회중들이 더 정확하게 접근하게 된다. 이 단어가 사용되었던 그 시대의 환경과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까지 설명해 줄 수 있다면, 말씀의 이해는 훨씬 더 정확하게 이어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의 설교자들이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능숙하지 못하더라도, PC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많은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지식과 유익한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넷째는, 해석된 말씀을 가지고 회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단계이다. 말씀을 풀어주는 것으로 설교가 끝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회중들의 삶에 그 말씀이 현장화 되도록 설교자가 효율적인 적용을 할 때에 설교가 발생된다. 설교자가 가장 손쉽게 진리의 적용을 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로 예화나 간증을 생생한 예증으로 활용할 수 있다. 회중은 말씀의 선포와 해석의 단계 보다는 예화로 엮어진 적용의 단계에서 훨씬 더 흥미를 보인다.
여기에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것은 설교자가 회중들의 흥미를 위주로 예화를 남발할 때이다. 예화의 나열은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지고 인간의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회중들이 본문을 통하여 주신 메시지보다 흥미로운 예화만을 가슴에 안고 돌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설교자가 깊이 성찰해 보아야할 심각한 문제이다.
제 20강 설교의 전개형태, 분석설교를 알고 싶다
분석설교, 현대인들의 사고 구조 활용하는 형태
2) 분석설교에 대하여
▲ 정장복 교수(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
지난 강의에서 살펴본 대지설교가 기독교 설교의 전개형태로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가 전성기를 누리던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많은 설교자들이 대지설교의 발전적인 형태를 찾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반스(W. Evance)는 『설교의 구성론』에서 현대인의 사고구조에 접근하기 쉬운 전개형태를 내 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이 형태가 본문의 말씀보다는 인간 지성과 논리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설교자에 따라 비성경적 설교로 탈선하는 부작용을 수반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반스의 책을 번역출판하면서 이 형태에 보완을 한다면 우리 한국교회에 매우 유익한 설교형태로 수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전개형태가 성경적 설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추가하면서 ‘분석설교’라는 이름으로 1980년부터 강의를 계속해오고 있다. 분석설교가 말씀 중심의 설교(Biblical Preaching)가 되기 위하여 다음의 몇 단계를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1) 본 설교의 주제는 설교자의 지식이나 생각에서보다는 봉독한 본문이 가지
고 있는 기본 메시지에서 주제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언제나 본문을 벗어난 주제의 선정은 설교자의 견해가 중심이 되기에 종교수필로 변질할 위험성이 있게 된다.
(2) 전하고자 하는 말씀에 회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본문의 정황(context)’을 이야기체로 쉽게 알려준다. 여기서 그 말씀이 있게 된 시대적인 환경이나 동기와 반응 등을 알게 된다면 본문과의 대화가 쉽게 이어질 수 있다. 나아가 다음에 이어질 본문의 해석 역시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3) 본문을 설교자가 쉽게 풀어 쓰거나 또는 현대어로 쉽게 번역한 것을 다듬어 다시 읽어준다. 그 이유는 회중들의 언어로 본문을 ‘재경청’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회중들이 어느 부분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대지설교에서도 서론 다음에 본문 접근과 본문의 재경청의 부분은 필히 제시해야 할 단계로 본다.
(4) 주제에 대한 정의를 정확히 내린다. 여기서 정의는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내리지 않는다. “사랑은 단순한 눈물의 씨앗이 ‘아닙니다’”와 같은 부정적 표현을 세 번 정도하면서 회중의 관심을 먼저 끌도록 한다. 그런 후에 문학이나 철학 또는 사전에서의 정의를 나열하고 성경으로 최종적인 정의를 맺는다.
(5) 자극과 동기유발을 시도한다. 사랑이 주제라면 사랑이 결핍되거나 없어서 당하게 되는 비극적인 사례를 들려준다. 이 단계가 필요한 이유는 회중들이 오늘의 주제를 수용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동일한 불행을 당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6) 설교의 본론으로서 주제실천 방안의 제시이다. 분석설교는 앞에서 제시한 주제와 그 필요성을 인식시키는데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랑이 필요함을 느낀 회중들이 그 사랑의 ‘실천 방안’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고 찾는 단계까지 회중을 이끌고 왔다면, 이제는 사랑의 실천 방안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여기서는 지난 강의에서 제시한 대지설교의 주안점 전개와 동일한 표현과 방법을 적용한다. 주안점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또는 ‘주님’이 주어로 등장되도록 함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주안점마다 해당된 본문과 그 말씀의 해석, 그리고 적용이 제시되어야 함은 기본이다. 특별히 적용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흔히들 설교자들이 자신의 견해로 적용을 이어간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여러분이……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가 ……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는 하나님이 원하고 계심을 알리는 적용의 표현이다. 설교자가 조금만 주의하면 앞 문장의 주어는 설교자이고, 뒷 문장은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있음을 바로 알게 된다. 설교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만 메시지의 주인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을 설교자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7) 분석설교의 또 하나 특징은 주제의 실천방안을 따랐을 때에 경험하게 되는 ‘주제실천의 결과’이다. 회중들은 설교의 전개가 이어지는 가운데 제시된 말씀대로 실천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매우 민감하다. 이 부분은 그날의 메시지가 주는 ‘복된소식-goodnews’이다. 이 복된 소식은 어떤 이론적인 전개보다 모두가 공감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앞에서 본 주제의 필요성에서는 주제를 실천하지 않아 당하게 되는 부정적 사례였다면, 여기서는 제시된 주안점대로 실천했을 때 얻게 되는 긍정적 사례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 가득하여 문제가 해결되고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 개인이나 가정의 실례들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본 설교의 샘플은 졸저 『설교학개론』에 제시한 바 있다.
분석설교는 메시지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하여 현대인들의 사고 구조를 십분 활용하는 전개형태이다. 이 설교는 다른 설교 형태보다도 설교자의 준비와 자료와 전개에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의 노력이 조금만 부족해도 비성경적 설교로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설교자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기 설교의 기본 틀로 분석설교를 갖추고 있다면 설교의 작성이나 메시지의 전달에 큰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계속>
정장복 교수(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기대하시는 것 (0) | 2016.08.10 |
---|---|
[스크랩] 새로운 대지설교 작성법 (0) | 2016.08.08 |
[스크랩] 예화의 몰락 (0) | 2016.08.08 |
[스크랩] 한국 교회, 예배가 사라지고 있다 (0) | 2016.08.08 |
[스크랩]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예배 (0) | 201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