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스크랩] 예화의 몰락

수호천사1 2016. 8. 8. 17:33

예화의 몰락


설교에 등장하는 예화는 주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많은 비유를 활용하셨고, 서로의 간증을 통해 본받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예화가 말씀 이해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은 문제이다. 헌금을 독려하기 위해서라든지 세상적 성공 등등을 위해 '이용'되면 결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다.


여기 유명한 일화를 제공하는 인물 다섯이 있다. 이들에 관해 간단하게 특징을 쓰고 문제점을 논했다. 이들의 특징을 쓸 때는 하도 들어서 외워진 이야기가 많다. 여러분도 아마 이들에 대해 설교 시간에 여러 번 들어 보았으리라 믿는다. 공교롭게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아 보니 모두 미국인이다. 한국인들의 미국 사랑, 아니 신봉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 아닐까 싶다.


이들에 대해 들려주는 설교를 하신 분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이들 중 대부분에 대해 감동한 적이 있고, 잘 몰라서 호의적이었던 적도 있다. 다만 사람을 예화로 소개할 때는 신중해야 하고, 공과 과를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크리스천이 아닌데 미화를 덧입혀 책으로 출간하는 일은 더욱 자제되었으면 한다.


1. 록펠러(John D. Rockefeller)


록펠러는 다음과 같이 자주 소개된다. 세계 최고의 억만장자, 십일조 계산원 40여 명, 예배 시간에는 늘 앞자리, 어머니의 기도로 뒷받침, 10가지 신조, 불치병 극복, 엄청난 기부금 희사, 100세에 육박하는 장수... 이걸 알고 싶어 안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이 설교 시간에 하도 재탕을 해서 저절로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석유 재벌이었던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업의 독과점 문화를 만든 사람으로 국가가 강제로 기업 분리를 명령했을 정도로 자신의 부를 나눌 줄 몰랐던 사람이다. 정경유착을 통해 성장하면서 인수합병으로 중소기업을 무차별로 빨아들이고, 노동자를 탄압해 이루어 낸 엄청난 부의 축적 방법은 오늘날 대기업과 재벌의 잘못된 전통처럼 남아 있기 때문에 미화된 칭찬만큼이나 추악한 기업인으로 크게 비난을 받기도 하는 논란의 인물이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고 누구나 허물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은 크리스천으로서 바른 길이 아니다. 또한 그의 많은 기부금은 세금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돈으로 자기 회사에 이득이 되는 집단에 간접 투자해 이미지를 제고하고 재차 수익으로 유도하곤 했다고 한다.


그가 가진 돈은 가치상 빌 게이츠보다 세 배가 많았고, 아담이 살아서 지금까지 매일 500달러를 저축해도 록펠러의 재산만큼이 안 된다고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그 정도의 돈을 모으려면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축복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물론 미국이 돈이 많으면 기부를 할 수밖에 없는 문화이긴 해도 록펠러의 기부와 선행은 대단히 많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단정적 평가는 어려울 수 있다. 다만 그의 부를 축적하는 방식은 크리스천에게 권장될 만한 것이 아니다. 천 명의 교인이 앉아 있는데 모두 다 록펠러 같이 되라고 한다면 가능한 것인가? 그게 안 되면 그들은 어머니의 기도가 없고, 예배시간에 뒷자리에서만 맴돌아서 패배자가 되는 것인가?

록펠러가 가장 쓰임새가 좋은 이유는 십일조이다. 그를 미화한 전기의 제목 자체가 십일조를 말하고 있다. 이제 신자들도 수준이 높아져서 십일조가 성경적으로 신약 성도에게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자 이제는 거부가 되고 싶으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서, 안 하면 당신들 손해다, 록펠러를 보라고 말한다.

십일조 계산원이 40명이면 행복할까? 나는 돈이 없어서 그런지 40명의 연봉, 지금 시세로 일 인당 3천만 원만 해도 연 12억인데 그 인건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복음 전파에 쓸 것 같은데... 돈을 너무 벌어서 십일조를 계산할 경리 직원이 필요하다? 이건 좀 위선이 아닌가 싶다. 돼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교회들이 신자들의 헌금으로 운영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십일조는 바로잡아야 한다. 비성경적 율법이나 부자가 되는 투자로서, 하나님을 시험해보는 용도, 그리고 노후나 천국에서의 상급에 대한 보험 차원에서 십일조를 활용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돈이 아무리 좋다지만 록펠러처럼 되는 것이 축복일까? 록펠러 자리를 시켜준대도 안 할 사람이 많은데 교회가 자꾸 없는 욕심까지 심어주고, 안 되면 바보 되는 느낌을 준다.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말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자족하고 감사하며 나보다 없는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솔직히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도 휴거가 늦춰져 록펠러처럼 97세까지 살아야 한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2. 오프라 윈프리(Oprah G. Winfrey)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14살에는 미혼모가 되었다가 2주 만에 아이를 잃는 등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자수성가한 미국의 여성 방송인. 흑인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역경을 이긴 인간 승리의 드라마.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여성... 그리고 독실한 크리스천. 이것이 오프라 윈프리에 관한 단골 수식어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고 다 같은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녀는 '크리스천'이라는 말 앞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자신은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크리스천이라는 것이다. '뉴에이지' 부분에서 다뤘듯이 오프라 윈프리의 주요 발언은 이렇다. 자유롭다 못해 크리스천의 영역을 벗어났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신에게 도달하는 과정은 기독교 외에도 많은 길이 있다."


이로써 그녀는 종교다원주의자이며 전혀 크리스천이 아님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예화 사냥꾼들은 그저 성공사례만 포장해 무분별하게 오프라 윈프리를 즐겨 인용한다. 그녀는 뉴에이저라고 스스로 선포했고, 뉴에이지 운동에 큰 지원을 하고 있으며 직접 홍보용 웹사이트도 운영한다. 이곳을 통해 이런 발언도 했다.


"하나님은 느낌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존재이지,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만약 당신의 하나님이 믿음으로 경험한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다."


이쯤 되면 종교다원주의를 넘어 불신자이다.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씀은 세속적 노래 가사에는 나와도 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구원도 받는 것이다.


인생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용기와 노력은 가상하다. 그녀 역시 자선 활동을 통해 많이 베풀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본받을 인물로 소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가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 신념과 뉴에이지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무한대로 자유로운 사람은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 자유는 말로 얻는 것이 아니다. 좁은 길처럼 보이는 배타적이고 다소 편협한 논리가 구원의 길이며, 그것을 택해 진리를 알았을 때 비로소 참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성도가 이런 인물을 본받는 것은 세상적 성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인물이 예화로 자주 등장해 멘토가 되는 교회는 정보에 둔하거나 입맛이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오프라 윈프리 같은 사람이 이용되고 대접받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다.


3.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도 책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대통령 재직 당시 그는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미군의 철수를 말하면서 큰 비난에 휩싸였고, 다른 대통령들에 비해 그다지 존재감이나 카리스마도 없는 대통령으로 인식되곤 했다.

 
그런데 그는 은퇴 이후의 활동에서 더 주목을 받았다. 북한에 억류된 사람을 위한 협상가로도 활동했고, 인권 분야의 유명인사로 평화적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알려진 것이 그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한다는 이야기였고, 대통령 재직 시절에조차 그 일을 감당하고 싶어 했다고도 하는 이야기들이다. 아무튼 말년에 덕망 있는 크리스천 원로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그였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다. 그러면 그는 정말 바른 크리스천일까?


얼마 전 미연방 대법원의 동성애 합법화 판결을 두고 카터가 허핑턴포스트 라이브와 인터뷰를 한 것이 보도되었다. "예수가 동성 결혼을 인정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는 것.


"성경에 이에 관한 구절은 없지만 내 개인적인 신앙과 생각으로는, 예수께서는 어떠한 사랑이라도 그것이 정직하고 신실하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격려했을 것이다. 나는 동성 결혼이 누구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보지 못 했다. 모든 사람이 결혼할 권리가 있다. 동성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은 지역의 법원이나 교회에 가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하는 결혼할 권리란 무엇인가... 동성 결혼도 결혼이라는 것 아닌가? 이쯤 되면 명망 있는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의 인격과 신앙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동성애는 죄악의 결과로 드러난 일종의 '상태'이다. 이런 사람들의 단순한 인권을 이야기한다면 모르지만 성경에 없는 그들만의 결혼 자격까지 그가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그간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밝혀왔고, 실제로 조지아 주의 마라나타침례교회에 출석하면서 수십 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해 온 침례교 신자 지미 카터... 성경에 근거가 없는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경보다 개인의 취향이 앞선다는 것이다.


그런데 표현이 잘못됐다. 성경에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예수님이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동성 결혼은 하지 말라는 예수님이 나온다. 말장난을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들 간에만 결혼을 하도록 허용하셨다. 예수님의 성품이 온유하고 완전하다 해서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가? 좋은 말을 잔뜩 끌어다 쓴다고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예화로 쓰려면, 특히 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려면 그가 어떤 상태인지 늘 살펴야 한다. 동성애는 죽어라고 반대하면서 설교 때는 지미 카터를 본받으라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4.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링컨은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미국의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가난했지만 정직했고 책을 사랑하는 젊은이였다. 나도 어릴 때 링컨의 전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 정치에 입문한 후 못생긴 얼굴이지만 위트와 여유를 가지고 정적을 물리친 일화도 유명하고, 무엇보다도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는 연설로 유명하다.


에이브러햄, 즉 '아브라함' 링컨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기독교적 느낌이 따라다니는 인물이다. 이젠 인류 역사의 위인으로 남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노예를 해방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 모든 것을 했다는 사실이 단지 음모설이 아닌 역사적 정황으로 많이 드러난다. 경제적인 이유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자 했던 남부연합을 상대로 싸우는 과정에서 노예 해방으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점이 많았고, 분위기가 그렇게 흘렀기 때문이다. 노예 해방에 대해서도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었다는 사실이 정치적 목적이었음을 드러낸다.


물론 그가 노예 이슈를 악용해 대단한 음모를 꾸몄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는 늘 흑인을 비하하는 니그로(negro, 깜둥이)라는 말로 그들을 거리낌 없이 지칭했으며, 놀랍게도 그 자신의 개인 노예는 암살 당해 죽을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1862년〈뉴욕 트리뷴〉기고문은 그의 목표와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내가 단 한 사람의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고도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한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킴으로써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역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 중 몇 명만 풀어주고 미국을 구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고 한다. 이긴 자가 역사를 자신에 유리하게 기록하기 때문이다. 야사가 아닌 한 나라의 공식 역사물을 보면 통치자에 대한 찬양과 반대자들에 대한 폄하가 고르게 나타난다. 역사를 보면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다.


링컨은 승자로서 영웅시된 것이다. 한 사람을 위인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대중을 속이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이런 일에 책 판매에 눈이 먼 저자들과 예화에 목마른 사람들, 그리고 성경보다 감동적인 신화가 필요한 사람들의 요구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한 사람의 성공한 정치인이 위대한 기독교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화들의 소비자가 있는 한 끝까지 그에 관한 신화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5. 헬렌 켈러(Helen Keller)


역시 세계적인 위인인 헬렌 켈러도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자주 소개된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딛고 사회운동가로 일어선 그녀의 일대기는 놀라운 극복기만으로도 귀감이 될 만하다. 그리고 그녀를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애니 설리번 선생의 끈기와 가르침도 놀라운 것이다.


언젠가 한 스마트폰 광고 카피로 쓰인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문구는 헬렌 켈러의 열망을 담은 에세이집의 제목이다. 인도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의 삶을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장애를 안고 태어나 암흑 속을 살아가는 한 아이가 지도해줄 선생님을 만나 처음으로 water라는 단어를 느끼고 표현하고 마음으로 보는 이야기가 나온다. 윤회와 뉴에이지적인 메시지가 교묘히 숨어 있는 이 영화가 바로 헬렌 켈러와 설리번의 이야기였다.


사실 그녀는 연약한 장애인이 아니라 사회당 소속의 열혈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나의 생애>라는 자서전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아보며 빈곤 해결과 장애인 차별 등 인권 문제로 많은 투쟁을 했다. 레드 콤플렉스를 지닌 채 그녀를 제도권의 위인으로 두고자 하는 이들의 전기는 이 부분을 빼고 바로 노년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지든 인권운동가로 알려지든, 혹은 장애를 딛고 일어선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알려지든 거기에는 다 의미가 있고 빛과 그림자가 있으므로 각자 판단할 일이지만, 그녀에게서 패니 크로스비와 같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천국 지옥 간증의 폐해에서 지적했듯이 그녀는 장로교 집안 출신이었지만 신비주의자이며 뉴에이지적 신지학에 빠졌던 사람이다. 다만 그 매개를 기독교로 했다는 것뿐이다. 헬렌 켈러는 성경의 천국이 아닌 예루살렘교의 창시자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나는 스베덴보리의 영계 탐방기를 읽고 더 이상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았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천국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천국에서 나는 장애인이 아님을 알았고, 다시 젊음을 되찾을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젠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헬렌 켈러는 스베덴보리의 황당한 교리를 평생 신봉했으며, 그를 소개하는 책자도 썼는데, <나는 신비주의자입니다>라는 책이다. 스베덴보리는 뉴에이지의 산파로 고대 신비주의의 현대화를 이루어 낸 신지학회의 창설자 헬레나 블라바츠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 과학자이다. 신약성경을 난도질해 오늘날의 현대 역본을 탄생시킨 신비주의 신학자 웨스트코트도 그녀와 연관이 있다.


기-승-전-성경...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일의 척도이다. 모든 생명과 구원과 진리에 성경이 있듯이 모든 악행과 타락의 뒤에는 성경의 타락이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이 묻힌 채 좋은 점만 인용되는 인물은 이 밖에도 많다. 실체를 알면 놀랄 만한 인물들이 훌륭한 인물, 나아가서 존경할 크리스천으로 둔갑하곤 한다. 어쩌다 인물을 소개한다 해도 그렇게 미화시키고 떠받드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가 솔로몬을 말할 때 그의 지혜를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솔로몬을 우상화할 의도가 없다면 그가 이방 왕비들의 잡신을 섬긴 어리석음도 함께 논해야 한다.


예화만 있으면 그들의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판에 박힌 예화를 되풀이하는 목회자는 이제 없어야 할 것이다. 이 모두가 이미지 설교, 에세이 설교, 감동으로 은혜를 혼동하게 만드는 설교 때문이다. 설교는 기본적으로 성경 안에서 강해로 이루어져야 하고, 성경이 성경을 말하게 해야 하며, 예화는 이해를 돕는 목적으로 최소한만 사용해야 한다. 심지어 예화를 사용하기 위해 성경을 보조로 가져와 한 편의 설교를 만드는 것도 범하기 쉬운 오류이며 유혹이다.


설교는 물론 쉽지 않아서 매번 신중하게 준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매 주일뿐 아니라 너무 많은 집회가 교회에서 365일 돌아가기 때문에 이 문제는 설교자들의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교회 행정이 너무 많아 연구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주객을 전도시키면서까지 참된 설교 방식을 포기할 순 없다. 성경은 퍼낼수록 진국이 우러나는 예화의 창고이다. 이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직접 여러 책을 읽으며 적절히 자기만의 비유를 소개해야 한다.


예화는 '9시 메인뉴스'의 건강생활 정보 같은 것이다. 이것이 너무 많아지고 주목을 받으면 진짜 뉴스는 뒤로 감추어지고, 메인뉴스의 권위는 추락한다. 설교는 이야기 시간이 아니다. 성경을 열어 사람의 혼을 건지는 결정적 순간이다. 예화가 아닌 설교가 살아나는 교회, 성경이 꿈틀대는 교회가 하나 둘 늘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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