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에 대한 이해
◈목회는 신학과 목회의 과업을 가장 충실히 이행하는 복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는 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하는 신학과 해석으로는 교회가 자랄 수 없어
◈신학은 목회에 그대로 반영되므로 목회와 신학은 불가분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믿어야 하고 가감 없이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될 뿐
시작하는 말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목회해서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등등의 말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 신학교 안에서도 들렸는데, 그런 소리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커지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 말은 신학 교육이 실제 목회와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신학 교육이 목회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목회와 신학’ 잡지에 한동안 ‘목회와 신학의 가교’라는 난이 있었다. 목회와 신학의 가교라는 말은 목회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이 별개이거나, 아니면 양자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괴리 상태에 있게 된 현실에서 둘의 연결을 시도하자는 뜻에서, 혹은 둘의 관계를 규명하자는 뜻에서 두게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목회와 신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혹은 ‘둘을 연결한다’고 할 정도로 둘이 별개의 것일까?
1. 신학과 목회는 하나
목회와 신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이다. 하나이면서 구분될 따름이다. 양자는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괴리가 있게 되고 그것이 심화될 뿐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도하러 보내셨다.
먼저 충분히 가르치고 훈련을 시키신 후에 내보내신 것이 아니고 아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내보내셨다. 복음을 가르치시면서 바로 전도함으로 실천하게 하시고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가르치신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제자 교육, 다시 말하면 신학교육의 원리이다.
예수님의 제자 교육은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의 것과는 달랐다. 그것이 복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사람을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므로 시급히 전달해야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일반 학문과 같지 않다. 신학이 우주와 인생의 본질에 관하여 말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유사한 것 같으나 실은 판이하다. 철학에서는 질의응답과 논리 전개에 끝없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신학은 그렇지 않다. 신학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며 역동적이다.
신학은 먼저 독서를 많이 하고 명상하고 사색한 결과 진리를 터득하고서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학은 신을 찾거나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신학은 우리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하고 설교하는 것이다.
선지자와 사도에게는 신학과 목회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신학자와 목회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설교하는 것, 즉 말씀을 선포하며 가르치는 것이 신학이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말씀을 따라 살게 하며,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 목회이다.
그런 뜻에서 목회는 신학과 목회의 과업을 가장 충실히 이행하는 복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는 길이다.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에 대한 관심 없이 그냥 신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이 끌려서 신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신학을 시작하는 것, 즉 소명 없이 신학을 하는 것은 옳은 신학이 아니다.
2. 스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보이심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려고 하거나 그냥 대화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가운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오셨다. 모세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백성을 의식하는 데서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다.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알리시는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실 때는 당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다. 야곱이 얍복 강변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이름을 물었을 때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고만 대꾸하시고 그냥 복을 내리셨다.
자녀가 아버지를 그냥 아버지로 알면 그만이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면 그만이다. 대문 앞에 선 이더러 “누구세요?” 묻는 말에 아버지가 “나야, 나” 하면 그만인 것이나 같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말씀하시고 함께 하시고자 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자신들의 정체성도 잃고 노예로서 매일 힘든 노동을 하느라 심신이 지치고 절망적인 상황을 겪으면서 불신으로 억세어지고 거칠어진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마음을 두고 계신 대상이었다. 모세는 단지 전달자일 뿐이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 지 알려야 했으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임을 알려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어 ‘에웨 아쉐르 에웨’는 “나는 나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이름이 여호와(야웨)이다. 영원 자존자, 창조자이시며 만물을 초월해 계시는, 불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초월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내재하시는 하나님(사실 내재라는 말도 추상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말이다), 내재하시되 사람을 사랑하시고, 아브라함을 불러 택하시고, 복 주시며 자손에게까지 복 주실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다.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찾아 주시되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상대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도 같은 관계를 맺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재확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을 아는 것이 신학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만으로는 신학은 아직 시작되지 않는다. 신학, 즉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 하나님을 객관화하여 3인칭으로 지칭하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신학이 시작되고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이 신학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신학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므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고 아는 것이 그리고 전달하는 것이 신학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심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며, 우리를 전도자로 부르셨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선지자를 부르시지만,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출 3:13-15)은 가장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그들에게 소명을 주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그 말씀은 우리 모든 말씀의 사역자, 목회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신학은 목회를 전제함으로써 성립하며, 교회가 있어서 존재하고, 목회는 신학이 있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즉 설교가 곧 신학이다. 설교로 표현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신학은 신학일 수 없다. 신약의 서신들이 곧 신학이요 목회를 위한 설교이다.
설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선포하고 가르치는 데서 성립한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는 신학이 없을 뿐 아니라, 설교도 없고 목회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이지 않은 중세의 교황주의 교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목회가 없었다.
4. 설교 안에 있는 신학과 목회
말씀의 권위를 높였던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그들의 신학이 곧 설교였으며, 설교가 곧 신학이었다. 종교개혁에 활력소가 되었던 루터의 신학적인 짧은 글들이 다 그가 한 설교였다. 루터와 칼빈의 강해 설교가 곧 그들이 남긴 성경주석 또는 성경강해이다.
설교는 독백이 아니고 교회의 회중을 앞에 두고 전달하는 말씀의 선포요 가르침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의 권위를 높이며, 말씀에 굴종하고,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말씀을 따라 설교함으로써 목회를 회복하였다. 그들은 목회자임과 동시에 신학자였다. 그들에게는 목회와 신학이 하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다음 시대, 즉 정통주의 시대에 오면 목회와 신학에 괴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신학자와 목회자가 성경의 권위를 높인다고 하면서도 지나치게 교리 논쟁에 몰두하는 나머지 그들의 설교가 사변적이며 추상적이 되었다. 그러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이해에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설교 말씀이 어려워졌다. 사람들의 현실 생활과 그들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설교가 되었다. 사람들은 설교에서 충족함을 얻지 못했으며, 교회는 생동성을 상실해 갔다.
교회 역사에서 초기의 신학 교육은 교회 안에서 제자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신학교가 교회의 학교로 독립된 기관이 되면서도 역시 신학교는 여전히 교회에 속한 학교로 존재해 왔다. 교회학교가 혹은 수도원의 학교가 대학으로 발전하고 새로 조직된 대학 안에 신학과가 개설되면서 신학은 점점 더 일반 학문처럼 되어 갔다.
17세기 계몽 사조 이후 합리주의를 따르고 성경을 한갓 문서로 취급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신학은 목회와는 무관한 학문으로, 다시 말하면 교회와는 별개의 독자적인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신학이 성경신학, 조직신학, 교회사 등으로 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그런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 19세기에 합리주의가 팽배하게 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회의하며 비판하는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은 더 이상 참된 의미의 설교는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신학을 따르는 목회자에게는 목회의 상실과 함께 설교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구약의 자료비평으로 유명한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자신의 학설을 발표한 이후 설교하기를 중지했다고 한다. 그의 처신은 학자적인 양심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처신이었다.
5. 성경 권위 아래 있는 신학과 목회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설교하고 신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상황에서 출발하는 신학을 한다. 철학을 하고 사회학을 하듯이 신학을 한다. 그래서 많은 주제 신학을 쏟아내고 있다.
정치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세속화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심지어는 사신신학(死神神學) 등을 쏟아낸다. 그들은 관심을 두는 주제에 신학이란 말을 함부로 갖다 붙인다. 그들에게 성경은 다른 문서들과 마찬가지의 참고 문헌일 뿐이다.
이런 주제 신학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나 반성도 없이, 오늘 우리 주변의 보수적인 신학자들까지 덩달아 영성신학, 생명신학, 새벽기도신학, 삼천리반도금수강산신학 하면서 주제 신학 양산에 가세한다.
교회사를 영미에서는 chrurch history, 독일어 권에서는 Kirchengeschichte라고 할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교회사를 ‘역사신학’이라고 하면서 그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역사신학’이란 ‘역사철학’이라는 합성어와 형식이 같으므로 ‘역사’를 주제로 한다는 신학이란 말이 된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란 말과는 뜻이 다르다. 아마도 이런 말에 익숙하다 보니까 보수 신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주제 신학을 별 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20세기에 이르러 자유주의 신학이 만연했던 독일어권 교회에서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앙의 상실로 말미암아 목회자들은 설교를 할 수 없는 곤경에 빠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교회의 청중들을 앞에 두고 목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목회자들에게 희망을 준 신학이 한 목회자에게서 나왔다. 역사 비판을 접어둔 채 말씀을 강조한 바르트의 소위 말씀의 신학은 비록 정통신학과는 달랐으나 무엇을 설교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하던 설교자들에게 그나마도 설교할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해 주지 못하는 바르트의 신학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 주님의 양 무리들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할 수 없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반대한다고 하나, 한편 역사주의 관점에서 역사에 근거한다는 성경 비평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영감설을 지지하느라 원역사 또는 초역사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느라 그는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 논리로 역사와 원역사 또는 초역사를 넘나들며 성경을 해석한다. 유럽에는 그의 신학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학들이 부정적이어서 교회는 침체되어 가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하는 신학과 해석으로는 교회가 자랄 수가 없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아론이 대변자요, 동역자로 동참하였다. 우리 설교자들이 아론과 같은 대변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해야 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출 4:1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어떤 것임을 잘 나타내시는 말씀이다.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모세가 든 구리 뱀을 쳐다보면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 사건을 합리적인 타당성을 들어 설명할 수도 없고, 어떤 개연성을 댈 수도 없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응답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 2).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 5).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이요, 바울과 제자들의 선포요, 개혁주의 정통 신학이다.
6. 교회 위해 존재하는 신학과 목회
신학은 목회에 그대로 반영되므로 목회와 신학은 불가분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회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고히 믿어야 하고 가감 없이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가 될 뿐이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은 살피기를 게을리 하고 백성들의 기복신앙이나 부추기며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로만 설교하는 목회자는 예레미야 주변에 있던 선지자들처럼 거짓 선지자임을 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그들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목회자나 신학교육을 전담하는 신학자가 함께 모색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하신다는 바울의 말씀을 늘 상기해야 한다. 아론의 화술보다는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실과 말씀 앞에 진실했던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목회자에게 맡기시는 하나님의 백성, 즉 주님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무한한 관심을 두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므로 사역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목회하는 종으로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신다.
설교자는 설교에서 하나님을 삼인칭으로 지칭하며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일인칭으로 지칭하시며 직접 설교자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설교하고 목회하는 전도자요, 목회자로서 당신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며,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시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이심을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 즉 교회를 주님께서 사랑하시듯이 사랑하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로 깨우쳐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하여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7. 신학과 목회의 덕목은 ‘겸손’
사역자는 소명을 받아 목회와 신학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요건을 갖춘 사람을 사역자로 부르시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어떤 요건을 갖추고 어떤 마음 자세를 갖기를 바라시는 것일까? 여러 가지 덕목을 말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은 장면에서 모세를 소명을 받는 사역자들의 모델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을 보내 주소서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으므로 구원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서는 수많은 모세와 베드로와 바울과 제자들을 필요로 하신다. 역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 사역을 위해서 몸 바쳐 일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역자들은 모세를 모델로 삼을 자격이 충분하다.
모세는 동족을 구하려다가 동족의 오해와 배은망덕으로 크게 좌절하여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양치기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좌절을 겪고 자신감을 잃고 있었던 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명을 말씀해 주셨으나 모세는 자신감을 잃은 상태에서 얼른 벗어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기적을 보여 주셨으나 소명에 대하여 막무가내로 사양하였다. 모세는 전도자로서 가장 치명적인 결격 사유를 들어 말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출 4:10) 하면서 사양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또 말하였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며 말씀하셨다. ‘말 잘하는 네 형 아론이 네 입노릇을 할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쓰실 자를 어떻게든 쓰신다.
모세도 그렇지만, 예수님께로부터 재차 부름을 받는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 자신을 자학할 정도로 의기소침한 가운데 있었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학문을 쌓은 바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론에 밝고 논리 정연한 바울,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죽음에 넘기던 기고만장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안 보이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울의 기를 꺾으시고 사도로 사용하셨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은 겸손히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타기를 바라며, 그렇게 살며 사역하였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사역자의 요건은 겸손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철저하게 자각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겸손이다. 자신은 무능함을 알고 늘 함께 해 주시기를 애걸하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한 모세에게 들려주신 지팡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필요할 때 하나님의 기적과 도우심을 청하는 데 사용하라는 지팡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물증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단 한 번 백성들의 성화에 화를 내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쓰라린 징벌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 청전벽력 같은 경고요, 선언이었다.
마치는 말
사역자는 목회와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해서도 겸손하게 하나님께 도우심을 간구하며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일이 잘 되어 갈 때도 여전히 겸손해야 한다.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고개를 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징계하신다. 하나님을 뵙고 말씀에 겸손히 귀 기울이고 배우며 실천하는 신학이 없어지면, 우리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의 빛을 가리는 존재가 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는 말씀은 바울이 이미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한 말씀이다. 목회와 신학은 하나라는 깨달음은 말씀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역자들이 평생 지녀야 하는 각성이요, 과제이다.
김영재 목사/전 합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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