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학

[스크랩] 목회학이란?

수호천사1 2016. 8. 2. 16:12

목회학이란?

 

서 론

목회(牧會)란 목사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 목회학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신자의 생활에 실제로 적용하여 바른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다. 따라서 목회학은 무지와 무경험에서 오는 부작용을 막고 목회자로서의 새로운 이상을 심어주며 목양의 활동과 기능을 발전시키는데 있다. 목회학을 연구함으로 얻어지는 유익함이 있기 때문에 목회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첫째, 목회의 무경험 교역자들에게 과거 수세기동안에 걸쳐 목회의 선배들이 경험한 목회 경험과 노하우를 단 기간에 습득케 하여 목회적 무경험에서 오는 악영향의 손해를 면케 한다.

둘째, 목회에 대한 긴장과 두려운 부담이 있는 목회 후보생들에게 꿈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목회 실력과 영력을 키워주는 학문이 목회학이다.

셋째, 과거 여러 시대의 문화, 예술, 종교 목회현장,등을 연구함으로 돌발 변수가 많은 목회 현장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하며 목회에 끝까지 승자가 될 것인가 연구하는 학문이다.

1. 목사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첫째. 목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았고, 또 보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사람이 바로 되어야 하고, 성경에 능통해야 하고, 성령의 영성에 충만해야하고, 바로 전하고, 가르치고, 치유하고, 인도하는 자가 목사다.

둘째, 목사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청지기이다. 청지기는 신임을 얻은 종, 착하고 신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잘 가르치고 권면하여야 한다. 목사의 직무는 하나님께로부터 특정한 교회의 양무리를 책임 맡은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전할 의무를 부여받았으며, 죄로 병든 영혼을 일과 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가르치고 훈련시키며 교회에 예배를 주관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전도에 힘쓰는 일을 해야 한다.

목사의 권위는 희생과 책임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권위는 하나님의 양떼들을 효과적으로 돌아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명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 그리고 특별한 지도적인 직분에 봉사하도록 한 교회의 부름 등이 합쳐져서 일정한 권위와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의 인격과 신령한 식별력이 교회에 의해 인정될 때 영향력이 있게 될 것이다. 목사직 소명은 내적증거와 외적증거가 있다. 내적증거는 영혼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하고 진정한 기쁨이 있어야 하고, 진정한 감사로 충만해야 한다. 외적증거는 목사가 하는 사역에 효과가 있어야 하고, 타인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하고, 목사와 교사로서의 은사적 확증해야 한다.

2. 교회와 목회

잘 아시다시피 신학과, 신앙 교회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유기적 공동체란 사람의 몸이나 가족에서의 구성원처럼 서로 떨어져서 이해될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 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서로 모르는 관계라면 유기적이라 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듯이 몸의 모든 지체가 상호 연결되어 기능하고 있듯이 교회도 그러한 것이다(고전 12장). 이런 의미에서 신학과 신앙, 교회는 서로간 연결된 연합체라 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에클레시아’라 칭해지고 있다. 이는 정치적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있었던 특수한 정치적 대의기관이 곧 에클레시아였던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란 ‘주님의 고유한 에클레시아’이다. 그가 피로 값주고 사신, 민회와 구별되는 ‘교회’(敎會)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는 주님의 뜻 가운데 있어야만 한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그의 뜻이 반영됨이 없이 운영되는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다.

개혁교회의 가치는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 말씀에 근거할 따름이다. 인간의 경험이나 인간의 의도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교회 내에서 긍정적 가치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설령 종교적 좋은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오염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는 칼빈의 사상 가운데 ‘인간의 전적 부패’와 ‘인간의 전적 무능’의 가르침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3. 성경적 목회

목회라는 말은 목사(pastor)와 관련된 것이다. 목사는 우선 <말씀>과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한다. 여기서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교회>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의미한다. 이 말들에서 유념해야 할 점은 위의 둘 모두가 역사적 활동이 중심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이 그 기준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목사가 이에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다면 올바른 목회적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
* ‘목회’라는 말에는 과연 ‘통치적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가?
* 목회는 행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인사관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가정에는 행정이나 인사관리가 없으되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고 하는 직임을 통해 유지가 된다. 교회도 이와 흡사하다)
* 목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앞에 선포하며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쳐 지도하는 것이다.

4. 목회에는 성공/실패라는 말이 없다

목회에 성공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종교적 자기 욕심이다. 목회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 유명인사이거나 대형교회에서 목회를 하므로 성공적이며, 다른 어떤 사람은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평생동안 소수의 성도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해서 그것을 실패라 할 수 없다. 나아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성도들은 덜 일한 사람이거나 실패한 것이고 오래 살아서 주님의 직분을 감당한 사람은 더욱 성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이나 스데반 같은 성도는 불행한 방법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사도바울이나 베드로 등은 적당하게 세상을 살았으나 교회사적 전승에 의하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아 말로가 좋지 않았다. 사도요한은 아흔살이 넘는 오랜 세월을 살며 주님의 사역에 참여 했으나 그 또한 고통스런 말년을 보냈다. 이렇듯이 성경에 나타나는 신앙의 선배들은 이 세상에서 주의 직분을 감당한 해의 길이가 상이하고 생애동안 다같이 화려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누구는 누구보다 더 성공적으로 일했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목회에 있어서도 참된 목회냐 아니면 그릇된 목회냐 하는 것만 있을 따름이다.

5. 목회의 모든 원리는 성경에서 찾아져야 한다

우리에게는 신약성경 중 특히 목회서신이라 불리우는 서신(디모데전후서)이 있어서 그 서신을 목회의 근본으로 삼는다. 목회학이란 목회를 잘하기 위해 여러 목회현장들을 분석해 본을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학이란 도리어 목회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을 성경말씀을 통해 비평을 함으로써 참된 목회를 추구해 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시류를 탄 교회성장이나 방법론이 목회학의 모델이 되어있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형편이다. 목회는 인간의 아이디어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며, 목회적 경험이나 축적된 목회전통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런 것은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모든 목회는 성경말씀, 더욱 구체적으로는 목회서신의 가르침과 충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서 벗어나면 잘못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목회적 실천들을 찾아내 버림으로써 참된 개혁주의적 목회를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목회자로서의 목사의 직분이행은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장로, 집사의 직분이 행해지는 범주가 교회안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밖을 향안 구제사업이나 선교활동 등도 역시 교회 안의 활동이 밖으로 넘쳐나는 것일 뿐 교회 밖에서의 사역은 아니다.
이는 아버지의 역할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이지만 집밖에 나가면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인이다. 이처럼 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직분이며 교회 밖에서는 그 직분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즉 목사의 직분 혹은 목회자로서의 기능을 교회 밖에서 행사하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6. 목사는 하나님의 종(doulos)

목사의 신분은 하나님의 종이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설명을 하여 둘로스(doulos), 즉 하나님의 노예이다. 그는 주인인 하나님이 시키는 일 이외에 어떠한 독립된 자의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노예, 즉 종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종’은 결코 아니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 파이스(pais)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만 온전하게 사용될 수 있는 ‘종’일 따름이다. 만일 목사가 자신의 ‘종’(doulos)의 위치를 자칫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서 파이스(pais)를 자칭하고 나선다면 엄청난 이단적 발상일 수밖에 없다.

7.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청지기

목사는 성도들을 통치하는 자가 아니며 교회의 상층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따라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 특별한 위치에서 존경받을 자가 아니다. 물론 일반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으며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존경과는 다른 하나님의 종의 위치에서 받는 존경은 아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교회의 허락을 받은 자이다. 이는 자기 열심으로 인한 쟁취나 취득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회가 맡긴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함으로써 얻게되는 존경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그가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말씀처럼 이 세상의 것을 ‘배설물’ 처럼 여기고 오로지 천국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8. 목사에게 주어진 권한과 의무

개혁교회에서 목사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목사 한사람이 전체 회중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목사는 교회 가운데서 교사로서의 거룩한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목사의 가르침이 전 교회에 그대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목사의 통치권이나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포하며 가르칠 권한이 있으며, 자기 경험적 판단이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아닌 목사 자신의 말을 듣도록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성경에 근거한 절대 진리의 말씀에 충실한 목회자로, 또는 하나님의 권위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9. 목사와 축복권

목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은 있다. 일찍이 구약의 족장시대부터 축복의 권한을 부여받은 자가 있 있었고, 이삭이 야곱에게,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권한이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 첫 부분과 끝 부분에서 늘 교회와 성도들에게 축복을 빌고 선포했다. 그러나 축복 그 자체를 목사가 주는 것은 아니다. 복을 주신이는 오직 하나님이시고 목사가 축도를 하는 것은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 말씀이 언약한 바 ‘복’을 주의 몸된 교회 가운데 선포하는 것이다. 마치 축도하는 목사에게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 처럼 인식되고 있다면 이는 잘못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목사는 하나님을 대행하는 듯한 잘못된 권위를 소유하게 될 위험에 빠질 따름이다.

10, 성도들에 대한 목사의 자세

목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각 성도들을 편리와 필요 효용에 따른 평가의 대상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교회 내에는 많이 배운자와 그렇지 못한자,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자, 재능이 있는자와 그렇지 못한자,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 젊고 유능한 청년과 늙어 힘이 없는 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사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교회를 위해 더 필요한 자이며 다른 어떤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이라는 생각을 조금도 가져서는 안된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그러한 사고를 하면서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 때문이라고 둘러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람’ 보다 ‘일’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기독교적 ‘일’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이용하고자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한 영혼, 오직 한 생명이라는 그 자체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목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11. 초대 교회에서의 목회

목회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diakonia)라고 한다. 이 디아코니아와 어원이 같은 ‘디아코노스’(diakonos)는 후에 집사를 가리키지만 고대 어법에서는 ‘웨이터’를 의미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의 기원을 공동 식사의 업무에서 찾기도 한다. 집사들은 웨이터들이었으며, ‘감독’은 반장 웨이터였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교회의 사역자를 종종 ‘종’(doulos)이라고 했다.
초대 교회에서 목사가 반장 웨이터였다는 사실은 목회는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21세기에서도 여전히 교회는 웨이터 목사를 필요로 한다. 또한 요한 3서에서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베레에 대한 비판은 노회장, 총회장, 감독 등등의 자리에 연연하고, 그것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는 한국 교회 일부 목사들에 대한 경고가 될 것이다. 이런 자리는 추대돼야 하지 운동을 하고 상대방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12. 중세 교회에 있어서의 목회


초대 교회에서 목회자는 상인, 관리, 군인이 돼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중세 성직자들은 우선 여러 가지 사업을 맡게 됐다. 특히 로마 감독은 대사업가가 됐다. 성직자들이 이렇게 사업과 정치에 개입하게 되자 타락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교구에서 일하는 하위 성직자들은 고위 성직자들처럼 사치스럽게 살 여유가 전혀 없었으며 극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다른 한편 그들은 예배 때 사용하는 라틴어를 뜻도 모르고 주문처럼 외우는 등 무지해 민중들의 경멸을 받았다. 중세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사업과 정치에 관여함으로써 타락한 일은 숙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성적으로 문란함으로써 지탄을 받은 일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성직자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철저한 연구, 특히 인간 영혼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은 지금은 더 타당한 가르침이다. 후스의 성직 매매에 대한 비판은 항상 우리가 유념해야 할 가르침이다.

13. 종교 개혁시대의 목회

종교 개혁에 있어서의 큰 특징은 설교에 중요성을 둔 것이었다. 교회사에 있어서 설교가 무시되지는 않았지만 설교를 교회생활의 중심에 둔 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공헌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목사의 직임은 공적·사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례를 집례하는 것과 장로들 및 동역자들과 함께 형제로서의 교정을 하는 것이다.
목사의 직임 가운데 첫째 가는 것은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삶은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삶이며 그래서 가난한 삶이 돼야 한다. 또한 목회자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목사는 무엇보다 학자가 돼야 한다는 가르침을 깊이 유념해 볼만한 것이다. 목사는 다른 사람들의 성경 주석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14. 근대 교회에 있어서의 목회

종교 개혁자들이 일으킨 복음주의운동은 영국의 청교도운동과 복음주의운동, 독일의 경건주의운동, 미국의 대각성운동 등과 목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많은 목회자들의 정신 속에는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는 사회와 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연구, 개인적인 죄뿐만 아니라 사회적 악에 대한 인식, 개인의 구속뿐만 아니라 사회적 구원의 방편에 대한 어떤 지식이 있게 됐다. 목회자는 교회의 울타리를 훨씬 넘어서 있는 전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됐다. 그는 교회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에 대한 봉사에 참여하게 됐다.

근대 교회에서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나면서 성경읽기를 강조한 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읽기를 얼마나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고 우리 목사들 자신들이 얼마나 성경을 읽고 있는가? 그러며서도 우리는 죽은 과거의 사도가 돼서는 안된다는 비처의 가라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새로운 과학과 사상에 무지한 것은 결코 자랑일 수 없다.

15. 최근의 교회에 있어서의 목회

20세기에서 강조되던 교회의 이미지는 ‘종’이라고 하는 이미지다. 1966년 강림절에 보스턴의 쿠싱(Cushing) 추기경은 목회서신 ‘종으로서의 교회’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고난받는 종이어야 하며 따라서 종된 교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는 화해시키는 일과 상처받은 자를 싸매는 일과 고난당하는 봉사와 치유 등과 같은 사역에 의해서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린다. 그리고 주께서 ‘타자를 위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교회도 역시 ‘타자를 위한 공동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돌프스(Robert Adolfs)는 ‘하나님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교회가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권력, 명예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모든 요구를 포기해야만 한다. 교회는 권력으로 지배해서는 안되고 사랑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1세기에 와서 성경에 나오는 종의 이미지를 재발견한 것은 큰 업적이었다. 목회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다. 나아가 앞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세상 사람들까지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 중에 제일 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스바냐 3:17에는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보시고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을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서도 인정받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될 것이다.

16. 최근의 목회적 관심사항

목회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우선이고 중요한가?

거룩이다.
진실이다.
성령(영성)으로 길들어져야 한다.

목회에 있어서 교회를 부흥케 하는 대부분의 교육은 예배, 전도, 심방, 설교, 기도, 구역관리(셀) 제자훈련, 구제, 지역봉사, 등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같은 프로그램을 잘 운영해서 교회를 부흥케 할 것인가? 연구하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교회 외적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모임이나 세미나도 위에서 지적한 부분의 틀 안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위에서 거론되고 있는 목회 분야별 프로그램들은 교회 부흥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큰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분야에 대한 연구와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으로 부흥된 교회의 뒤편에 어두운 그늘이 있음을 과소평가 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일들이 있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갑자기 교회에 혼란이 오고 심지어 수십년 뿌리내려온 교회가 통째로 흔들리고, 갈라지는 아픔과 상처로 성도들이 치유받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는 일들이 흔한 일로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목회학에서는 지난 교회사의 역사와 오늘날의 교회에서 일어난 어두운 부분들을 살피고 교회에 혼란과 시험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연구하기로 하자.

1. 교회 행정의 실패로 혼란이 온다.

2. 목회자와 중직들의 교만이 실패를 불러온다.

3. 음란성 부정이 실패를 불러온다.

4. 돈 욕심 때문에 실패를 불러온다.

5. 명예와 권력욕이 실패를 불러온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목회학을 공부하고 부족한 부분들은 별도의 보충 교제와 주제를 설정해서 보다 깊이 연구하기로 하겠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거리.천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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