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4(마틴로이드존스)

수호천사1 2016. 7. 9. 22:14

에베소서 강해 4

 

 

마틴 로이드 존스

 

 

 

 

 

 

 

성경: 엡4:20-24절(1)

 

 

 

 

4장20~24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1.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20)

사도는 “다른 이방인”, 즉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하여 묘사해 왔는데, 사실 그런 유의 삶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도 늘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여전히 불신자들의 삶의 모습은 아직도 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오직”이라는 말로 갑자기 선회하여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17~19)

 

 

 

그런 다음에 바울은 계속하여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의도적으로 특이하고 극적이며 생동적인 진술을 갑자기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직”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불신자의 삶과 생각이 그릇되다 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갈수록 악하여지며, 어두움의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고 어리석음과 방탕에 자신을 방임하여 버린다는 것으로서, 이제 성도된 우리들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위치에 있게 된 것에 대한 안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이제 그들과 다르며, 우리는 그곳으로부터의 해방감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새로운 위치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제부터 말해 나가려고 하는 변화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런 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진리를 단순히 우리의 생각으로만, 그리고 이론적으로만 주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전혀 감동시키기 못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한 묘사를 하나의 초연하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또는 사회학자가나 심리학자가 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을 이러저러한 부류로 나눈 일을 하는 일에만 만족한다면, 우리는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해방감이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 하에서 붙들려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죄에 대하여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이함과 놀라움의 해방감을 안겨줄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감정과 감성으로 반응함에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한 반응은 이전과 같은 예민함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을 인정하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새로운 사람들로 연합을 이룬 교회를 바라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택하심을 얻은 남은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모든 흑암 중에서도 소망의 빛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기독교는 그러한 의미에서 저항세력입니다. 우리는 사막에 오아시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지나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데, 그 길은 끝이 없어 보이며,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갑자기 우리 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해방감과 안도감, 그리고 감사함과 소망으로 넘쳐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과 관계가 없으며,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사고방식과 관계가 전혀 없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철학을 확장시킨 것도 아니며, 인생을 말하는 책도 아니고, 단순히 사람들이 스스로 발전시켜온 무엇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초자연적이고 이적적인 신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으로, 절망과 절대적인 낙심 속에 빛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복음이 왔다면, 모든 것은 결국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왔음을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복음은 우리를 악한 세상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에 속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어둠의 나라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임무는 세상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세상에서 밖으로 끌어내어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영역, 새로운 나라, 새로운 인간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야 하며,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정치나 어떤 사회 활동들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와 그의 본질과 사고방식에 있어서 세상에서 전적으로 구별되었으니,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구속하실 하나님의 세상이라는 것을 아는 까닭에, 그는 죄와 악이 제어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고 행동하게 됩니다. 정치와 문화 전체가 소극적으로 죄와 악을 한계 내에 머물러 두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그러한 죄와 악의 과도한 폭력으로 발전하지 아니하도록 막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는 것은 나그네로서 행하며, 다른 영역에 속하여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이라는 영역에 대하여 불쌍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악을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려고 시간과 힘을 들이지만, 그는 땅에 속한 것들에 믿음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배우지 않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들의 삶도 본받지 않으며, 그런 생각들을 오히려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압니다. 그들과 섞여서 살고, 나누고 베풀며, 기쁨으로 그들과 교재를 하며 살지만, 그들의 영역과 전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나라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배우고 그의 지시를 따릅니다.

 

 

2. 진리를 아는 지식(20~2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계 우주 전체에서 가장 심오한 역사를 겪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지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아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배움”과 “이해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너희가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이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전에는 에베소 사람들의 마음을 어두워져 있었고, 그들 안에 있는 무지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으며, 마음이 굳어짐으로 인하여도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니,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상태와 조건을 보게 됩니다. 다음에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성격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절망적이며, 도울 이가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복음의 의미를 알기 시작하며, “그리스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놀라운 지식을 배우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바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너희가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는 정의에 부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뿐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특이하고 고유한 사역으로, 마음에서 휘장을 걷어내어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은 성령님뿐입니다. 죄악과 악으로 가득한 어두운 삶을 밝히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진리를 사람 속으로 침투시키고 그리하여 그 사람을 장악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 할 수 있는 마음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무식한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얼마나 학문이 없는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얼마나 문맹자이든지 간에 그러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이해하고 생각하도록 마음을 여는 기름부음과 이 통찰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러한 일로 충만하여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가장 단순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 아니 거의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아니하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가졌음을 보여주며,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단순하고 무학의 사람이 위대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인하여 진리를 아는 지식을 갖도록 지도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 놀랍고 복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지성적인 진리를 학문적인 태도로 익힌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교리 지식은 마귀에 속한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들의 삶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닐 경우엔, 마귀도 빛의 천사를 가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교리에 관심을 가지게 할 의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거칠어지고, 굳어지며, 그러한 방식으로 관용이 적어져 가는 것을 마귀가 알면 그들이 교리나 신학에 관한 책을 읽도록 용기를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구세주로 아는 지식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구세주요, 구원하시는 자시오, 마귀의 역사를 멸하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구원하여 자신을 위하여 구별시켜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며 예수 안에 있는 진리 또한 잘 압니다.

 

 

3. 그리스도를 듣는 것과 배우는 것(20~21)

바울의 가르침은, 복음은 거룩을 전파한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파하는데, 여전히 세상의 삶의 특징이 되고 있는 이교적이고 죄악적인 삶과 대비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가를 복음은 전파합니다. 사도는 만일 그리스도를 듣고 그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는 계속하여 죄 안에 거할 수가 도저히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거룩해지는 것은 상관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든지 칭의는 받으면서도 성화는 없을 수 있다고 하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받았으니 거룩과 성화에 관해서 배우려면 어떤 집회에 가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같이 우스운 일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전의 삶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큰일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아는 이 큰 지식입니다. 우리가 알았듯 이 말은 먼저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희미하고 철학적인 구원의 개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으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되었다는 역사적인 인물이었고 그 역사적인 인물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란 독점적인 것입니다. 전체적인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도 진리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체적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 어떠한 사설로 가르치는 것이 설령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친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마귀적인 장난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는 아버지시다!” 라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선언하고, 계시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오셨으며, “진리를 증거하려고”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대하여 우리가 배운 일차적인 국면이며, 그것은 주기도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주기도문에서 가정 먼저 언급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거룩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거룩하심을 전해야 합니다.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께 부여된 임무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의 아들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도 거룩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라고 말합니다. 거룩을 전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산상설교를 대할 때 먼저 회개의 문제부터 출발합니다. 죄악을 인식하고 애통하는 자의 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시는 이러한 가르침은 주님의 사역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죄의 죄 됨 때문에 행해진 사건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한다면, 그분의 거룩하심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구원의 각 부분의 전체적인 목적은 우리를 사탄과 죄악의 삶으로부터 건져내서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거룩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죄의 삶에서 건져냄을 받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림, 그의 삶, 그의 행동들, 그의 가르침들, 그의 죽으심, 그의 부활하심, 그의 성령을 보내심 등, 그 어떤 것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삶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웠고,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들어 안다는 것과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실제적이며 심오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팔레스타인에 있은 적이 없어서 주 예수를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의 메시지를 들은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들은 것은 그를 들은 것이나 같다” 라고 말합니다. 사신은 왕을 위하여, 그 나라의 가장 우두머리를 위하여 말하는 사람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듣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메시지를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듣는 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며 생명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르침은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령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나는 말을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며 생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세움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하였는지 망각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약동하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의 결과입니다. 머리에서 각 지체로 흘러가는 영양분이 흘러가는 공급의 선을 체험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를 듣는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어떤 주어진 시점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심과 영원한 세계에서 나와서 이 땅에서 사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고, 또한 그는 그의 아버지께 완전한 복종과 아버지의 가장 거룩한 율법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셨고 자청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가 그러한 일을 하신 것은 내 죄악을 담당키 위한 것입니다.

 

 

 

내 형벌을 대신 받느라고 행하신 일이며, 이 보다 더 무한하게 중요한 것은 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죄와 사탄의 결박에서 나를 끌어내기 위하여, 나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거룩한 것을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러한 일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되돌아 가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내가 믿음을 확신하고 내 기쁨을 확실히 가지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능력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그러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는 새로운 본성을 내게 주셨고 나를 자신에게 연합시키셨으며 나는 그의 신비로운 몸의 한 지체가 되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듣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와 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이든지 옛 삶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며, 전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 엡4:20-24절(2)

 

 

 

 

4장20~24절: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4. 썩어짐 욕심 유혹들(20~24)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목적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일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죄 된 생활을 떠나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레미 테일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번안하여 지은 찬송시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서 의도하신 것을 비유와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호산나! 우리 마음에 오소서!

 

주님은 우리 마음에도 성전을 가지고 계시네.

 

사랑하는 시온과 같은 정말 시온처럼 사랑스런 성전일세.

 

그런데 죄로 가득하니

강도와 도적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거 하련가?

그 전에 들어가서 그 강도와 도적들을 몰아내고 성전의 마루를 깨끗이 하세.

그 모든 것을 다 엎어 버리고 그들이 더 이상 그 거룩한 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못하게 하세.

그곳은 주께서 선별하신 곳이오니 주의 얼굴을 세우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우리는 옛 삶에 속한 것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인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가버렸으니,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어린아이같이 되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옛 사람이 버려야 할 옛 본성에 대하여 첫 번째로 지적하고 있는 “썩어져 가고 있는” 이라는 말씀을 살펴보면, 인간의 본성이 이미 부패해졌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이 지닌 상태는 더욱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의미는 곧 “멸망으로 가는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은 더욱더 부패하고 오염되어 멸망의 길을 치달아 가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인간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논지는 불신자들인 이방 사람들의 삶은 썩어지고 와해되고 있는 삶이어서 결국에는 멸망으로 끝을 낸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벗어 버려야 할 옛 본성에 대하여 말하는 두 번째 말씀은 이 옛 사람으로 하여금 충동하고 강권하여 멸망으로 가게 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은 “욕심”이라고 합니다.

 

 

 

이 욕심은 우리가 이미 2장에서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욕심들은 우리를 몰아서 부패와 멸망으로 치닫게 합니다. 이미 배워 왔듯이 자연적인 본능들은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본능들은 그 자체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주입하여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본능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생명을 누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셔서 여러 본능들과 여러 능력들과 여러 기능들이 어찌나 질서 있고 정돈되어 있는지, 그것들이 인간의 유익과 인간이 삶을 누리는 데 도움을 주도록 주어졌다는 사실에서 그 완전함의 부분이 나타납니다. 주로 사람의 몸에 있는 본능들은 인간의 마음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뇌와 생각하는 이지를 주셔서 여러 본능들을 통제하도록 하였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양심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양심은 이지에 지시를 하고 양심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양심과 이지는 오히려 본능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본능이 주도권을 잡으면 욕심이 됩니다. 통제를 받아야 할 것이 전체 삶을 장악하고 지배하므로 인해 혼돈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욕이나 본능이 이지와 양심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소리를 묵살해 버림으로 인해 사람의 상태는 혼돈과 혼란의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사람이 짐승과 같이 본능들의 지배를 받을 때는 짐승보다 더 악합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이성과 총명이 쫓겨남으로서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생각에 없습니다.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분명하고 막을 수 없는 움직임은 욕심이 주장하고 욕심이 폭군 노릇을 한 결과입니다.

 

 

 

 

이제 사도가 이 특별한 요점에 대하여 말하는 마지막 세 번째 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부패의 방향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데,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욕심”이라면 그 욕심을 통제하는 것이 “유혹”이라는 것입니다. 유혹은 “속임수”입니다.

마귀는 교활함과 유혹으로 사람의 삶을 파멸시켰습니다. 하와를 미혹한 마귀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속임수와 유혹으로 찾아와서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 하였습니다.(고후 11:3)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언제나 마귀의 특성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버지입니다. 세상의 고통거리는 세상이 마귀로 속임을 받으며 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에게 사단이 들어갔을 때, 그는 자기 주를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그는 속임수와 교활함과 부정직함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은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사람을 가장 크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죄는 언제나 배신을 수반하고 나옵니다. 죄는 사람을 굳게 하고 유혹하고 속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죄가 기회를 따라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는 말씀으로 죄의 문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얼마나 유혹의 힘이 강한 것인지, 율법에 대하여 사람을 어리석게 합니다.

 

 

 

율법은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정당한 것으로서 사람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에서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함인데, 도리어 그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다고 미혹합니다. 그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하는 바로 그 율법이 죄를 행하고 싶은 소원을 그 안에 창조하였다고 교묘히 미혹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깨끗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마저 더러운 것이 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유혹과 속이는 본질 때문에 죄의 성질에 대하여 깨달아 지는 것은 결국 우리로 죄를 짓게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말하면 사실은 그러한 일들을 하라고 자극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성적인 문제를 다룬 책들을 읽으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책들은 전염병 같이 피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러한 책은 선보다 악을 끼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문제를 다룰 것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언제나 속임수를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을 온전히 각성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점을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사람은 그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자신에 대하여 부단하게 속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가공할 특징입니다.

 

 

 

 

그리고 죄가 행하는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생각을 약화시켜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묵상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성공할 오직 유일한 소망임을 알고 사람의 감정이나 사람의 소원 등에만 호소합니다. 만일  이지가 작용하기 시작하면 죄는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여 혈기를 부리게 합니다. 그래서 혈기가 우리를 통제하고 주도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 혈기 부리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일들도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속임수 계책 중에 하나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옳고 그른 것의 차이점들을 감춰, 그것들을 따져보고 생각해 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을 습관이 되도록 하여 속입니다. 그 예로 사람에게 술고래가 되라고 하지 않고 딱 한 잔만 들면 어때 라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첫걸음에서 다음 두 번째 걸음으로 옮기도록 유도한 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술고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죄는 줄 수 없는 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만족을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주겠다고 합니다. 죄는 어리석고 그릇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죄는 언제나 만족함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욕심을 통하여 일하는 죄는 사실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이 다만 빼앗아 갈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를 당장에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미래에 대한 꿈을 가득 안고서 집을 떠나, 그의 마음에 딱 맞는 친구들과 사귀었고 그들은 처음 얼마간은 얼마나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탕자를 칭찬하였고, 그의 건강을 부럽게 보아주며, 얼렀으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에게서 모든 시간을 빼앗고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을 취하여 갔습니다. 그는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 먹을 것마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모두 다 취하여 갑니다. 우리 것을 완전히 다 탈진시켜 버립니다. 결국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더미만 남기고 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파멸적인 것입니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 때문에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으며 썩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적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능력이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행하고 이 일을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옛 사람의 구습을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속합니다. 우리의 삶에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모든 원리들을 스스로 적용하고, 우리의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분에 맞지 않는 모순된 삶에서 벗어 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모두 벗어질 때에 우리의 복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5. 심령으로 새롭게 됨(23)

이제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사람은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전에 반드시 먼저 그의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다시 새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쇄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벗는다.”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며, 이와 유사하게 “입는다.”는 것도 우리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새롭게 되어”가야 합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일을 방해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방해 할 수 있으며,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고, 성령을 근심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행해지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에 있지만, 그 일을 촉진하고 그 일을 장려하는 일에 우리의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진술을 이러한 방식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부단하게 새로워져 가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가 바로 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심령으로도”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전 인격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지 이지의 능력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마음의 성향이 우리 안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생명의 원리가 우리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영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새로운 영이 마음을 주관하고 마음을 지시합니다.

 

 

 

전에는 마음이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갔지만 이제는 바른 방향을 향해서 나갑니다. 만일 그 전에 이런 방향으로 매진하였다면 이제는 저런 방향으로 매진합니다. 사람의 두뇌의 역량은 그 전과 하등의 차이가 없지만 사람이 마음의 영에서 새로워짐에 따라 더 이상 타락의 이치로 전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마음 안에 있는 내적인 변화로 인하여 외적인 행동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며 전체 사고방식과 전체 자세와 그들의 생각하는 정신 자체가 새로워집니다. 단순하게 전에 하던 일을 하지 않거나, 하지 않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만이 아니고, 또는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영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전체적인 사고방식,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제 그리스도인답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6. 의와 거룩과 진리(24)

우리는 계속해서 새 사람에 대한 사도의 메시지를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사람이 지음 받는 것에 대하여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를 숙고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왔듯이 우리는 중생의 차원에서 이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 부분에서 교훈을 적용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과 행실의 문제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중생의 행동, 이 형상이 새롭게 되는 과정, 우리 안에서 다시 날 때 일어나는 일은 마치 신적인 씨앗을 우리 안에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이 씨앗이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하는 말씀으로 새사람 안에 심겨진 이 새로운 본성, 새로운 생명, 새로운 원리, 이 씨앗 속에는 가장 탁월한 두 가지 특별한 특징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 ‘’와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이라고 말합니다. 의와 거룩은 “진리”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의 삶의 전체는 진리에 의하여 전적인 지배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와 거룩은 사실 진리에 의하여 산출되는 것입니다. 진리로 자극을 받고 진리로 성장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활을 좌우하는 부분이 체험임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리스도인 삶의 전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끝없는 난관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체험들을 “진리”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진리의 차원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대신 이러한 특별한 지점에만 머물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다시 진리를 아는 지식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 속아 살아왔고, 또 줄곧 속임수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진리는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의 인격 속에서 더욱 충만하게 가르쳐지고 계시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죄의 본성을 인식하게 되고 속이는 자로부터 나온 욕심들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그 진리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임을 더욱더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은 “너희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라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구원과 구속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존재를 옹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케 하실 때 자신을 옹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제일 되는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최상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습니다.

 

 

 

 

 

 

성경: 엡4:25-30절(1)

 

 

 

 

4장 25~30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1.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25)

이제까지 바울은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처하였던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고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전에 우리의 삶의 모습을 풍기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사람에게 속하고 새사람에게 해당되는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했습니다. 제 바울은 이러한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분에 그 원리들 중에 몇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진리란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도는 “그런즉”이라고 말함으로서 진리는 그저 객관적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고 이지적으로만 따지고 만족한 문제가 아니라, 적용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모든 교리와 지식의 목적은 우리를 우리가 믿는 진리에 부합한 삶으로 인도 하는 것인데, 우리 주님은 그것에 대하여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식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 이론과 학문에만 머무는 지식은 무식한 것만큼이나 나쁩니다.

 

 

 

 

두 번째로 진리에 대한 진정하고 참된 이해는 언제나 적용하도록 합니다. 사람이 진리에 붙잡히고, 진리에 의미하는 것과 진리에 함축된 것을 알았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적용하게 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사도는 한결같이 “그런즉”, “이러므로”라는 말로 이러한 대목들을 도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적용하지 아니하면, 그는 아직도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기독교 교훈은 모든 삶의 상세한 국면에까지 적용되고 그 영향을 미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라, 부모들과 자녀들, 남편과 아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접촉하는 모든 문제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와 신앙은 그 모든 것에 응용이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주일에만 종교적이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언제나 종교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실은 교회 안에서나 상업 중심지에서나, 우리가 처한 어느 곳에서든지 동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공적이고 사회적인 행실에서만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행동분야에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공적인 행실에서는 매우 빈틈없으면서도 사적인 행실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는 같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원리는 우리의 모든 삶 전체, 우리의 상세한 모든 삶의 국면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상의 영광은 그것이 우리에게 이러한 전체성을 부여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특징이 되어온 나뉨과 분열에서 우리를 건져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뿐 아니라 자신 안에서 분열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최상의 영광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이교적인 세계 속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삶의 유형을 특징지었던 거짓되고, 기만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잘못된 행실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그러한 모든 것이 이제 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신앙의 싸움에 들어가 있게 되었고, 그들은 이러한 옛 근성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저 그러한 행실들을 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하지 말고, 잘못된 행위들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너희를 고쳐주기 까지 기다리고, 그리고 승리를 지켜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이 일은 우리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로 우리는 거짓된 이교적인 행실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① 기독교와 다른 이교적인 문화 형태나, 이교적인 덕행들은 그것을 자체로만 보며, 이론적이고 추상적입니다.

 

② 그들은 언제나 최고로 육에 속한 능력에 속해 있습니다. 이교적인 교훈은 고작 하여야 인간적인 것이며 나면서부터 가진 인간의 천성적인 것뿐입니다.

 

③ 그들의 도덕주의는 자만과 교만을 조장합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하는 것과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러한 사실로 인하여 우쭐댑니다.

 

④ 그들은 실제로 옛사람을 그대로 놔두고 옛 본성을 전혀 다치지 않도록 그 위에다 희게 색칠할 뿐입니다. 그들의 도덕성은 외모만 그럴 듯 하게 분장한 겉껍데기에 불과합니다.

 

⑤ 그들의 도덕 체계들은 단순하게 악이 밖으로 크게 빠져 나오는 것에 제동을 걸고 단지 그러한 악이 조잡하게 드러나는 것만을 막을 뿐 근본적인 것에 대하여는 어찌하지를 못합니다. 그들의 체계는 오직 “공적” 행동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⑥ 그들의 도덕성의 체계는 억압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실제로 해결하지 못하며, 그것은 소극적이며 자유스럽지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덕성은 자발성이 결여되고, 모두 같은 것을 바라보고 같은 것들을 같은 방식으로 행함으로 사람의 개성을 망가뜨립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틀 속에 눌러 넣기 때문에 자율성이 없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도덕성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⑦ 그들의 도덕성은 인위적이어서 냉담합니다. 그것은 만들어 놓은 조화와 같아서 따뜻함이 없으며, 자기중심적이어서 목적을 위한 목적을 낳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방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전에 우리가 행하였던 식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거듭났고 우리 안에 새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적인 것이며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는 것으로 이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바라 볼 때 우리가 벌레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고, 이전의 우리 자신을 돌아다 볼 때, 너무나도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안에 참 생명이 심어졌기 때문이며, 우리가 존귀한 신분 상승에 의한 각자의 처지가 분명해 짐에 따라 그 품위에 따른 자발적인 행실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이런 위치에 놓이도록 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서 그런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동기와 목적은 모두가 하나님께 고정이 되어 그분의 거룩하심에 따라 그분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짐에 따라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인하여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말하는 것을 멈추고 진리를 말하기 시작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도적질을 하지 않고 악한 다른 모든 것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이 와서 우리와 접촉할 때에 그 사람에게 자기에게도 소망이 있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할 정도로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일들을 하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우리가 우리 됨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할 정도로 해야 합니다.

 

 

 

 

2. 죄악적인 분노와 의로운 분노(26~27)

인류에 죄가 들어 온 것은 거짓말로 인하여서입니다. 사단이 거짓말로 하와를 속임으로서 시작된 것이 죄의 근원을 유발시킨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제 거짓말 외에 다른 것을 다루고 있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도 계속하여 우리에게 죄의 옛 삶을 벗어 버리고 거룩함의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그 자체가 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옛 삶의 표지가 되기 때문이며, 죄는 언제나 교제를 깨뜨리고 부수는 반면 거룩은 언제나 화목을 촉진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죄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기본적인 기초의 초석을 무너뜨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래서 그는 분노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마치 절대로 분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분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며, 세상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은 그보다 더 적극적인 명령으로서 약한 자에게 주어지는 어떤 위안이 아닙니다. 사도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의무는 어떤 국면에서 분을 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적인 방식이나 혈기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을 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분을 내라! 그러나 죄악적인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가 틈을 얻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분내라”는 말로부터 시작하는데, 다른 말로 해서 의로운 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노 자체가 죄악이 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 자체 내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넣어주신 천성적인 본능 가운데 하나인 가능성입니다.

 

 

 

악하고 나쁜 것을 향해서 분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바르고 선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도덕가들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거짓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도덕가들이 이점을 빈번하게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죄악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마가복음 3:5에서 주님이 분노하신 장면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저희 마음이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비슷한 말씀을 누가복음 13:15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율법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트집 잡아 함정에 빠뜨리게 하려고 하였을 때에 주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5에서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신 사적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의분을 터뜨리시는 우리 주님의 분노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신, 구약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수치감이나 분노감이나 의분감이 없는 것은 언제나 죄악과 깊은 방종의 표지가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들에 대하여 그 귀한 분노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사랑 가운데서 참된 것으로 해야 합니다.

 

 

 

 

분을 내는 데 악한 방식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는 즉 아무런 의미가 없이 천성적으로 하는 혈기나, 또는 악한 의도에서 하는 폭력적인 분노는 죄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아야 하며, 우리 자신을 다루어야 합니다. 악하게 혈기를 부리는 일을 금하고, 급하게 화를 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인내하고 쉽게 자비를 베풀게 하는 사랑을 찾아 구해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의롭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분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다음 단계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은 원어로 볼 때에 일반적인 분노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보다 더 강한 격앙된 것을 의미합니다. 아주 분노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 분노가 일어나 자라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미워하고 원망하는 심령의 상태, 즉 복수심을 가진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도가 정죄하고 있는 것은 이렇듯 악한 유의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느껴야 하는 분노는 우리의 복되신 주님에게서 발견되는 의분과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향한 분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악적은 분노는 옛 사람에 속해 있는데 그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통제력을 잃어서 악한 타입의 분노에 빠지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성적인 능력이나 사고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마치 짐승과 같은 본능적인 힘에 의지하게 되고 맙니다.

 

② 이것은 언제나 마귀로 틈을 허락하는 것입니다.(26~27) 바로 그 순간 마귀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기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마귀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분을 내며 적대감을 갖도록 합니다.

 

③ 이것은 불만을 기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복수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게 하며 자기의 등을 돌려대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을 경멸함으로 대적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죄악적인 분노가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에 마귀가 들어옵니다. 죄악적인 분노로 인하여 전체의 삶이 파멸 될 수도 있습니다. 분노는 언제나 개인의 삶에 있어서 뿐 아니라 개인과 삶의 업무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혼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분노로 자제력을 상실하는 것처럼 마귀에게 부단히 기회를 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④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앙심을 품는 것이나 불의한 진노는 전체 기독교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됨됨이 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대한 방식, 즉 용서로서 다른 사람에게 대해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는 우리에게 전체 성경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러운 대답 중 하나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그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즉시 분노를 처리해야 합니다. 그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잠자리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형제 중에 사람에게 실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예물을 놓아두고” 그것을 거기에 드리기 전에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목 하라 후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을 마음에 새겨 두라는 말입니다.”

 

 

 

 

 

성경: 엡4:25-30절(2)

 

 

 

 

4장 25~30절: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 도적질하지 말고 수고하여 구제하라(28)

이제 사도 바울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들이며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 강도들, 훔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영광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 없으며 복음의 능력이 미치지 못할 곳도 없습니다. 복음과 정면으로 만나서 절망적일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복음이 감당치 못할 죄가 없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떤 사람의 삶에 들어오면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자유를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즐거워해야 하는 제일 우선적인 전제입니다. 복음은 모든 종류의 죄에서 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그러한 모든 죄에서 구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듭나서 새로운 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도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라는 말을 대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로 중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어떤 투쟁의 요소를 여전히 보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중생하면 자동적으로 모든 우리의 죄에서 구원받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시험에 대하여 당연한 면역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한 어떤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술고래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경우에는 회심한 후로 술맛이 당장에 없어져버림으로 술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그와 다르게 오랫동안을 술로 인하여 어려운 시험을 여러 번 당하기도 했으며 술과 투쟁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동일하게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서신에서 발견하는 권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거듭나기 때문에, 대번에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여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체험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그것이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것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실로 강력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것들이 처리되는 일은 우리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에 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이런 방면에 대하여 해마다 더 예민하지 못하면, 우리가 자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의 입장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적질하는 일에 아주 젖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 되고 하나의 실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그들은 그것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방식으로 깨우침을 받고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니 특별하고 구체적인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가 대번에 제거되는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일은 자주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운 자세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면, 그러한 죄를 극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날 때 그 사람 안에 새 원리가 존재하게 되며, 성령이 그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교육과 능력을 통하여 그러한 죄악을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적인 성화의 방식입니다.

 

 

 

 

도적질은 사실 자기에게 속하지 아니한 것에 손을 대는 행동으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소유하고 자기의 목적과 만족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시간이 될 수도 있으며,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회사의 집기나 기물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회사에서 고용주가 요구하는 시간에 다른 개인적인 일을 하는 것도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을 속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거나, 자기 스스로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비열한 방법이나 불법적인 방법, 또는 착취하는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도적질하는 것은 불법이며, 독재적인 행동이며,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혼돈과 기이한 현상으로 나타나며, 신뢰가 사라져 더 이상 교제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사도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위대한 말씀입니다. 수고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부지런함이 성공으로 유도하는 지름길이며, 그들이 부요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일하고 돈을 허비하지 아니하면 부를 축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일하고 수고하여 부를 축적하고 이제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이 어떤 것이든지 그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부요함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리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여,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 다른 사람들의 궁핍함을 생각하고 구제하는 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주는 자가 더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복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우리의 이웃들과 교제하는 방식(29)

사도의 의견과 평가에는 이 말하는 것의 문제야 말로 아주 중차대한 것이며, 필연적으로 우리의 상세한 삶의 문제를 다룰 때에 가장 탁월한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과 짐승들을 구분하고 대조할 때에 이점은 참으로 탁월하고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될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말하고 표현하는 은사입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이러한 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가장 명백하게 뛰어난 존재였습니다. 사람은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따지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펴 볼 수 있으며 자신을 숙고할 수 있지만 짐승들은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들을 옮길 수 있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은사인 “”과 “언어”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마귀는 인간 속에 있는 가장 값진 것을 자기의 공격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악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언제나 가장 먼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먼저 오염시키고 파괴합니다.

 

 

 

야고보는 사람의 혀란 배의 키에 비교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경우에 있어서 매우 작은 것이지만 그 중요성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 일어나는 참화는 얼마나 무서운지 그것은 불의의 세계이며 무서운 세력으로 파괴해 버리는 불꽃과 화염을 일으킬 수 있는 무엇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혀와 입술을 삼가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데 더뎌서, 쉽게 말하고 그렇게 노닥거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심판 날에 사람이 “자기가 한 모든 게으른 말에 대하여 직고해야 할 것이라”고 확증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을 때, 즉 사람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에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 사람은 자신을 표현하게 되고, 그 때에 그 사람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가치한 모든 것을 자극하고 그러한 일을 조장하며, 그러한 일에 불을 붙이게 하는 것을 듣기만 하였어도 잘못되어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여 그러한 것이 너희 마음에 들어오고 너희의 입술과 혀의 모양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이 나오지 못하게 막아라! 만일 그것이 네 입에서 나오려하면 그것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아라!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것을 죽이고 없애버려라! 그것을 멈추어라!

만일 너희가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마귀가 그러한 생각들을 너희에게 주입하였다면, 너희는 그를 멈출 수는 없지만, 그는 너희를 향하여 불화살을 던질 것이다.

그는 너희 마음에 그러한 생각들을 집어넣어 죄짓게 할 것이며, 교묘한 조소를 보낼 것이다.

 

 

 

그럴지라도 나는 너희에게 더러운 말일랑 너희의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입술에서 그것을 죽여 버리라고 말하겠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하는 소극적인 권면입니다. 이제 적극적인 면에서의 권면으로 주어지는 것은 우리의 입에서 무엇이 나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① 우리의 혀는 언제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는 서로 말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서로 말을 가로채며, 순전히 도취하고 흥분하여 술 취한 것같이 된 대화는 사라지게 됩니다.

 

② 더 이상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만을 나타내서는 안 되는데, 성도는 결코 대화에서 자기가 중요한 존재가 되든지, 다른 이의 감탄을 받든지, 다른 사람에게 놀라운 사람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화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바로 그러한 원리를 일반적인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전하는 특별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의 대화는 “선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뜻은 더럽지 아니하고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선한 것”에 “덕을 세우는 것”을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 무언가 요점이 있고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선하고 깨끗하고, 어떤 의미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우에 맞게” 또는 “필요한 대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경우에 맞게”라는 말은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평가하고 있어야 하며, 내가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강한 열심이 있으면, 시간을 가지고 묵상하면서 우리의 방식을 생각하고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묵상을 하면서 우리의 방식을 생각하고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필요하고 합당한 말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큰 지혜를 요구하며, 큰 이해심을 필요로 하며, 큰 인내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에게 공정하지 못한 처사를 하지 말아야 하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은 아니겠지 하고 기대하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여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나 덕을 세우는 데 선한 말이 언제나 각 개인의 경우에, 어떤 처지가 해당되든지 경우에 맞아야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더러운 말이 하나도 나가지 못하게 합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만 합시다. 필요한 경우를 개선하고 경우에 맞아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만 합시다.

 

 

 

 

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30)

사도가 가르치는 교리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또는 어느 형태로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의 그릇된 삶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인 치신 그분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단순하게 하나의 감화력이나 일종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일은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이 한 인격임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인격이신 성령님을 근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마음이 아픔을 느끼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각성시키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소원들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땅한 바는 그분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구 행하며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모독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무가치한 말과 행동, 그리고 무가치한 생각으로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지르는 배은망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행해진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고,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서 동등하게 영원하신 삼위 중 제 3위이신 성령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을 복종시키셨으며, 심지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을 인식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분이 보시기에 기쁘지 못한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배은망덕인지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를 슬프게 한다는 것은 아주 파렴치한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에게 생명에 관련된 큰 은혜를 끼쳤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배은망덕한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표현할지를 모르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런 내 안에서 그것을 겪으시며 근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고 그의 은혜로운 감화력을 철회한다면, 그는 우리를 육체의 주도권에 잡혀 있게 내버려 두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체의 능력에 우리가 맡기어지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또한 마귀는 그러한 것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공격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마치 지옥에 살고 있으며, 지옥이 자기 안에 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한 교훈을 가르쳐 주기 위해 더 이상 육체를 대적하여 싸우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곤고해지고 환난이 임하는 것은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까지 든다고 할지라도 영원 전에 확정된 구원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그러한 조치들이 취해진다는 것이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 망하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고 계시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영광을 기억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를 근심하게 하는 일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엡4장31-32절

 

 

 

 

4장31~32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1절에서 그는 먼저 “악독”이라는 말로부터 시작하는데 우리는 25~29절에서 발견되는 권면들을 일반적으로 상기시키는 권면들을 만나게 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을 버리라” 에서 악독은 영의 한 상태, 즉 일종의 까다롭고 온후함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스럽지 못한, 실로 어느 일에도 선한 것을 보지 못하는 조건이며, 언제나 나쁜 것만 보려는 태도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에 존재하는 그것을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비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것을 좋아하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깊이 생각하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불만을 품고” 그 불만에 머물러 있어 그런 것들에 크게 주의합니다. 또한 그러한 것을 망각하기 시작하게 되면, 그것을 일부러 생각하려고 하며, 그 불만으로 다시 연결시켜 악독한 마음의 상태에 머무릅니다. 악독한 마음은 아름다운 것의 99%는 칭찬하지 않고, 1%의 결점만을 찾아 지적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언제나 고통거리들과 결점들과 실수들과 흠결 사항들을 지적하고 있는 유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악독한 마음은 실수와 흠만을 보고 선한 것은 절대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악독함은 언제나 말이나 행동을 통하여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래서 사도는 “노함과 분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행동 뒤에 자리하고 있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노함” 이 마음의 격정과 마음의 과격한 흥분, 그리고 끓어오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반면에 “분냄” 은 보다 정착된 지속적인 마음의 상태와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냄은 노함과 같이 작열하는 모습을 띄지는 않지만 보다 정착된 마음과 심령의 조건입니다.

 

 

 

바꾸어 말하여 노함과 분냄은 말하는 것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떠드는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왁자지껄한 상태, 즉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쓰는 것 등이 포함된 상태입니다. 사람들이 격노하고 노한 상태에 있으면 서로 간에 말을 하지 아니하고 고함을 치고 자기들의 목소리의 어조를 드높입니다. 그러나 떠들고 고함을 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의”이며 “훼방” 인데, 어떤 일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해롭도록 고의적으로 냉정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중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더해 주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거듭 말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악하게 말하는 것은 현대인의 삶을 얼마나 잘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악들은 우리에게 단번에 버려져야 할 일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알고 영 단번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사도는 “인자하게 여기라” 는 말로 권면을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단순하게 친절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자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유의 성품과 삶을 향한 자세를 개발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집 안에 있는 마귀를 제거하고 집을 쓸고 닦고 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라” 는 말은 용어의 의미는 “유익한 사람이 되라” 는 뜻이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하게 하나의 조건이나 상태가 아니라 한 소원에 이르는 조건이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인자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사람입니다. 악독한 사람과는 정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과 불쌍히 여김과 이해와 사랑의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참조: 빌1:8, 2:1, 벧전 3:8] 그리고 계속하여 “용서하라” 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악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하여 용서하되 그들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마지막 대목으로 나가보면, 그 대목은 우리가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여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여기서 “같이” 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영광을 주는 말씀인데, 만일 우리가 용서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인자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바와 같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인자하게 되라, 인자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인자하게 되면 너희는 하나님께서 하신 행위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악인과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로우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답게 되라고 권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온전하라고 하며, 지존하신 분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행한 일이나 앞으로 행할 어떤 것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불경하고 비열한 죄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무런 죄도 흠도 없는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 담당시키시고 그에게 짊어지게 하신 후에 그 안에서 그 죄악들을 벌하심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방법입니다.

 

 

 

 

용서를 받은자들은 이제 용서를 베풀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굳어 있으며 용서를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 또한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용서를 아는 사람은 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갚을 것을 전혀 가지지 못한 곤고한 사람임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셨음을 인식합니다. 아들이 자기의 모든 죄와 불의를 다 담당하신 것 또한 인식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졌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성경: 엡5:1-2절

 

 

 

 

5장 1~2절 :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1. 하나님을 본 받는 자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말씀 그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 즉 하나님을 모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본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죄와 악과 마귀에 의하여 시험을 받으며 속에는 무가치한 것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말이 가당키나 합니까? 이 같은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을 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속에서 그러한 일을 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속성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존재에게 전달할 수 없는 속성들로 하나님께만 전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국면들에서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등등은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전달되거나 나누어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전달되거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속성들은 본질에 있어서도 도덕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성들은 “거룩” 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니 우리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공의”, “그의 선하심”, “그의 사랑”, “그의 긍휼”, “그의 불쌍하게 여기심”, “그의 인자”, “그의 오래 참으심”, “그의 인애”, “그의 성실”, “그의 용서” 등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전달 가능한 속성들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고, 보여주고 우리 삶과 생명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 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거듭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본과 형상을 따라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린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있으며, 하나님의 가정에 속하여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소속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랑을 입은 자녀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라도 다 세신 바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알되 하나하나 다 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외아들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생명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이렇듯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입은 자녀들로서,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가풍을 이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 할 수 있는 것이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본받는 자” 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당연히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 가야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의 가장 큰 소원은 자기 아버지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과 만족으로 완전히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사랑이 가장 최고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와 똑같이 적용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 가 되십시다.

 

 

 

 

2.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라고 강권한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사랑의 영역 안에서 영위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비록 말씀에 대한 놀라운 이해와 조명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비록 내가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죄의 개념을 알지 못하면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가 없으며, 오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질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그것을 인식할 때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게끔 추천 할만 하다든지, 그의 사랑을 끌어낼 만한 어떤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비열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더욱이 그의 대적자이며 원수였습니다.

 

 

 

우리가 중생하기 전의 상태, 즉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하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는 명백하게 자기의 “소유들” 을 많이 버리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이 될만한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말은 “그는 그것을 자기가 받을 권리로 주장하지 아니하셨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영원한 신성을 특권으로 주장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특권들을 사양하셨으며, 그는 자기의 영원한 영광을 보여 주는 이러한 표증들을 스스로 벗으셨습니다.

 

 

 

그는 권리로 소유하였던 것들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사양하시고 자기의 신격의 특권들을 포기하시고, 피조물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모양으로 오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목숨, 그의 자신 자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자신을 복종시키시고, 자신을 전적이고, 절대적으로 희생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물과 생축” 이라는 말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제물은 드려진 예물이며, 생축은 희생 제물로 제사장이 제단에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 모세에게 이 여러 제사들이 어떻게 집행되어야 하며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징과 모형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화해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을 지시하고 계셨습니다. 그 제사법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축이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그 짐승은 온전한 것이어야 하였으며 전혀 흠이 없어야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상징적으로 백성들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켰습니다. 그 짐승은 살해되어, 그 생명은 취함을 입고 피는 흘려집니다. 짐승이 살해 된 것은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임으로 받은 형벌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는 주발에 담아져 성전의 지성소로 들어가, 법궤 앞에 뿌려집니다. 그런 다음에 짐승의 몸은 성전 바깥뜰에 있는 제단에 옮겨져 태워집니다.

그 향기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흠향 됩니다. 바로 그것이 “생축” 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여기서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몸은 찢겨지고, 피는 흘려졌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생축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용어인 “향기로운” 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8장에서 노아의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 선택받아 자기의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은 노아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제단을 쌓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정결한 짐승들을 잡아서 그 제단에 드렸는데, 그것들을 태워서 드렸습니다.

그 냄새가 올라갔고, 그 냄새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같이 묘사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생축이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고 만족하게 하셨다는 개념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물로부터 올라오는 냄새를 맡으시고 즐거워 하셨는데, 그것은 향기로운 냄새로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하게 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좋아하셨으며 즐기셨습니다. 그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를 즐겁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사도는 여기 에베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드린 제물과 생축이 하나님의 존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갔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되어진 그 일을 진실로 온전하고 만족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와 율법이 죄인들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는데,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열납되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들에 대하여 완전하게 만족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비할 수 있는 특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삶을 영위하였듯이 그 삶을 영위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신 것과 같은 삶을 우리도 살수 있다는 말이며,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며, 얼마나 큰 영예이며, 얼마나 높은 부르심입니까!

 

 

 

 

 

성경: 엡5:3-5절

 

 

 

 

5장3~5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 그 이름이라도 불러서는 안 되는 죄악들

본문에서 지시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서는 안 되는 어떤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과는 병존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큰 체험을 통하여 받는 것이라거나 성도는 완전하니 이후부터는 많은 난제들과 어떤 시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조심하며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원수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언제나 상기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들 중에 얼마는 우리에게 붙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모든 날을 통하여 우리는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도 사도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다룹니다.

 

 

 

사도바울은 관례적인 습관대로 음행과 부정과 불법과 추함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기독교 교리의 차원에서 다룹니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을 보면 “마땅치 아니하니”, “합당하지 아니하니”, “적당하지 아니하니”, “적합하지가 아니하다” 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특별하게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권면은 우리가 성도들이니,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로서, 그 영역에 합당한 일들이 그러하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관념으로서, “세상에서처럼 학교의 명예나, 나라의 영예나, 인류의 선을 위하여 도덕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들로서 마땅한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 말은 기독교가 죄악에 관심을 가지되 그 자체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나, 그것들이 악하므로 악한 영향을 끼치고 악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죄악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됨됨이 때문에 죄악이 우리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적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세상을 향한 일반적인 충고가 아니며, 교회가 세상과 국가와 같이 사회를 정결하게 하는데 서로 하나가 되어 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음행” 을 나타내는 모든 형태와 암시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모두 다 피해야 할 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 그러한 것을 나타내거나 암시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금하여야 할 것으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과 어떤 상관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유별난 것이나 “모든” 더러움을 피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 점을 더욱 상세하게 풀어 보아야 하는데, 우리가 때때로 우리 마음으로 생각한 일들을 행동을 통하여 실제로 행한 일 만큼 악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더러움, 모든 형태와 모든 모양의 더러움은 우리 삶에서 축출되어져야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탐욕” 이라는 말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허욕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돈 자체를 사랑할 뿐 아니라 돈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할 것인데, 그것이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탐욕이란 말을 두 번이나 할 정도로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탐욕”이라는 말은 돈보다 더한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바로 이 덫과 이 위험을 피하는 길은 우리가 돈을 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번 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을 지원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나타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일로 고통을 당한다고 느끼면, 바른 일을 위하여 돈을 드림으로서 그러한 고통을 죽이십시오. 그것은 돈을 다 버리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를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청지기는 모든 것을 허비하여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바른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하고 악한 용도로는 그것을 내주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용납하고 아무렇게나 써버린다면 그는 청지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탐욕을 제어하는 길입니다.

 

 

 

 

다음의 말은 “누추함” 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추잡한 것”을 내포하는 말로서 모든 추잡함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모든 비열함과 모든 혐오스러운 일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전혀 소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다음의 말은 “어리석은 말” 인데, 이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빈 말이나, 생각 없이 던지는 쓸모없는 말로서 어리석고 죄악적인 대화와 말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실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경박하고, 쓸모없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식으로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희롱의 말”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해롭고 죄악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영리한 척하고 빤질거리며 하는 농담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어를 보면 그 말에 “돌린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이 돌려서 말하고 아는 척하면서 빤질거리는 태도로 말하는 것 또는 어떤 것을 말하되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중적인 의미를 주입하여 암시적으로 말하고 어떤 의미에서 상스럽고 비열하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말과 희롱하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러한 말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전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것들로 겹겹이 에워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음행이나 더러운 것이나 그러한 모든 것 중에 어느 것이라도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유도하기 쉬운 것은 그 모양이나 그 모습이라도 피하고 모든 전심을 다하여 아예 처음부터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음속에서부터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시험에 들게 허락하면,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서 정복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격퇴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속하지 아니한 어떤 일을 하도록 유도하기 쉬운 모든 것에 대하여 항상 조심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진리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각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이제 우리는 엡 5:5의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느니라.” 는 엄숙한 경고와 부정한 삶에 대하여 선포된 경계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등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경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표현 방식대로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이 경고가 표현되는 방식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바울은 “너희도 알거니와” 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이러한 일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논란의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것이야 말로 자증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고야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으며, 이점을 대번에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배웠다고 할 수 없으니, 그 점에 대하여 가르쳐 줄 필요조차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실패에 대하여 합리화하는데 명수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일을 발견하면 정죄하면서도 자신이 그러한 일을 하게 되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쉽게 설명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만족한 상태를 고수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데 아주 좋은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우리는 비참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죄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방호하고 우리 자신의 잘못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능란하며, 어떤 핑계나 구실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시켜 버리지만,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송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일의 배경에는 마귀의 간계가 도사리고 있으며, 마귀는 친구나 빛의 결사로 가장하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를 쉽게 설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방호하여 죄인 것을 죄가 아닌 것으로 설득당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에 대하여 관대하기를 바라는 우리는 사탄의 그 아첨에 복종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우선적이며, 가장 크고 중심적인 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로 불행하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거룩하게 되게 하려 함입니다. 그는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일을 원하며,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거룩은 가장 우선적인 일이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여 우리가 갈수록 더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의 그 관점과 태도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잠시 우리 자신을 잊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그의 면전에 나아가서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악과 악을 행하는 것과 인생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씀하시며, 무엇을 생각하시느냐가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나오는 진술이 성경에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참 고 : 고전 6:9~10, 고후 6:14~16, 계 21:27, 계 22:14~15, 마7:21]

 

 

 

이제 우리가 직면하여야 하는 가장 우선적인 질문에 대하여 5절에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열거하고 있는 죄악을 습관적인 행실을 통하여 계속하여 나타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얻을 기업이 없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죄악들 중에 어떠한 한 가지 죄에 “실족”하여 넘어진 사람은 누구든지 그 나라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가 그 사람의 특징일 때나,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거나, 그것이 그의 인격의 분위기라면, 또 그가 그러한 영역에서 행복을 느끼고, 바로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전혀 아무런 기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면서 잠깐 죄에 실족하여 넘어졌으나 습관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신약성경 자체가 그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 거하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5절에 있는 이 엄숙한 말씀에 관계되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

 

 

 

 

 

성경: 엡5:6-14절(1)

 

 

 

 

5장 6~14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1. 하나님의 진노(6)

사도 바울이 “이를 인하여”, 즉 “이러한 것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제까지 다루어온 음행과, 부정함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 탐심 등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은 성도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할 것이므로, 성도들에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영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행실과 도덕의 차원에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는 모든 행동은 위대하고 영원한 아주 중요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① 우리의 행동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②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하늘에 속하여 있는 성도로서 존재하거나, 아니면 그 나라의 밖에 있는 불순종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든지, 두 가지의 가능성만이 존재합니다.

③ 우리가 하나님과 가진 이 관계는 시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불신앙적인 세계에서는 이러한 원리들에 대하여 전혀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하등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있든지 아니면 그 나라 밖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 너머 다른 세계가 있고, 우리는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에 속하여 영원까지 계속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축복의 조건에서 영원히 살든지, 아니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뇌와 고통 중에서 지내게 되든지 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진리들을 그렇게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헛된말로 속임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 비극의 핵심이며, 세상의 비참함입니다. 모든 인류의 고통과 난제들은 사람이 처음부터 어리석게도 사탄의 말을 믿고 속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성경은 역시 “죄의 기만성”에 대하여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하여 가장 가공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눈치 채기도 전에 죄악의 기만성이 우리를 악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죄는 “헛된 말로” 우리를 속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지식과 학식과 이해력을 자랑하지만 그들은 인성에 대한 참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사탄의 속임수로 인하여 사고방식이 혼돈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어떤 학술에 근거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결론을 내리고 시행하지만 그것들로 인성이 변화되고 발전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는 것은 거짓된 심리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순종하여야 한다는 개념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모든 성경적인 관점들이 배제되고 사람은 이제 새로운 진화론적인 심리적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사회에서나, 국내적인 수준에서나 세상이 이러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직도 사탄이 제안하는 이러한 “헛된 말”에 속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세상이 이러한 상태에 있는 것은 속고 있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사실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역설되고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하며, 성경에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람의 진노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악과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이며, 죄를 불쾌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것은 죄를 향하여 가지는 고정된 혐오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형벌로 다스리겠다고 하는 선언된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토록 불변하시면서 거룩하시고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 죄와 악을 향한 자기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과 죄는 마귀에게서 기원하여, 사람에게 전수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원한 존재를 두고 죄를 미워하시는데, 그는 죄와 어떠한 흥정도 하실 수 없으며, 처음부터 죄는 징벌하시겠다고 분명하게 천명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고정된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는 시기는 언제이겠습니까? 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바로 지금, 바로 이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현재 동사를 사용하여 “임한다.”라고 합니다. 그 시제는 계속적인 현재를 함축합니다. 그것은 미래를 함축하며, 현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 짓는 순간에 즉시로 그것을 느끼며,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바로 그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이며, 양심의 후회는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입니다. 그런 다음에 죄로부터 오는 고통, 육신적인 고통을 생각해보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향하여 내리시는 진노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몸을 바로 쓰지 못하면 그것으로 고통을 당하도록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악한 일을 하고 나서 육신적으로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을 때에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났으며, 질병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모습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죄와 악은 결과를 산출하며, 그 결과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의 일부입니다. 또한 정신적인 고통, 즉 마음의 고뇌와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의 불행도 생각해 볼 때, 그 모든 것은 죄가 가져오는 것들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게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그것들과 상종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 나타날 뿐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는 모든 악과 죄를 파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여 있는 사람들은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토록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이 약속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 되며,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영광의 약속이 될 것이며, 불순종의 자녀들에게는 정죄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범 우주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헛된 말로 속고 있는 세상 사람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우리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사람들과 변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팔로 부르는 것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단하게 쉬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짐으로, 우리가 눈먼 나라들과 지도자들에게 진리를 알려줄 수 있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임박한 진노에서 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 빛의 자녀들(7~8)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논증으로 말합니다. 그는 아직도 제시할 논증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에서 성화와 거룩한 행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특별하게 기록된 가르침이 거듭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약적인 성화의 방식은 진리를 인식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자신께서 죽음을 맞으시기 전에 온전한 것을 말씀하셨는데, “만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리고 또 요 17:17에서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 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여기서 행하고 있는 일이 정확하게 그 일인데, 그것은 진리가 우리에게 임함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고 권면의 말씀을 복종하게 한 뒤에 다시 “빛 가운데 행하라” 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리”(9절)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새로운 대목을 접근함에 있어서 신약성경이 어두움과 대조하여 빛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는 것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명백한 것은 그것이 아주 강력한 논증으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빛 가운데 있는 것과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것에 대하여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 비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점은 절대적인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의중에 두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는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이전의 우리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개선된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떤 다른 것을 그 위에 뒤집어씌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거듭남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어두움”과 “”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빛과 어두움은 혼합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영원한 반대로서 존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빛과 어두움이 사귀지 못하며” 라고 말하며, 에베소 교인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고 주님 안에서 빛임을 인식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날 때에 이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캄캄한 방 안에 전기 스위치를 넣을 때 갑자기 밝은 빛으로 온 방을 비추어 주는 것과 같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한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어린 갓난아이일 자라도 우리는 새 생명으로 살아 있으며, 빛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든지, 아니면 죽어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이지 그 중간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어두움에 속하여 있었지만, 성도가 된 이 시점에서는 절대로 어두움과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두움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미 빛을 받아 밝음 가운데 있는데, 어두움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모순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빛입니다. 주님이 빛이시니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역시 빛입니다. 천성적인 마음이 어둡고 침침하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역시 빛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듯이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등불이며 우리는 등잔입니다. 빛이 우리 안에 있으니 우리는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빛 자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엡5:6-14절(2)

 

 

 

 

5장 6~14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3. 빛과 어두움의 영향(8~13)

어두움은 빛과 정 반대 방향으로 이지와 지성과 총명에 영향을 끼치며, 지식에 관련되는 모든 기능들에 다 영향을 끼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이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는 전에 어두움이었다.”고 말할 때에 그들의 이지가 어두워 있었으며 엄청나게 무지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여전히 해당되는 사실로서,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있기 때문에 생명의 문제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몇 가지의 체험적인 사실들을 가지고 증거로 제시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체험이나 어떤 현상들 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무한하게 많은 증거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아예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주 희미하게나마 의식하고 있다면, 그들은 욥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의 입을 가리고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래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몇 가지 일들은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너무나 위대하고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하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말을 감히 사용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어두움이기 때문에 빛이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원의 필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독교에 관련된 많은 서적들을 대하게 되고, 또 그것의 가치에 대하여 어렴풋하게나마 경험을 하였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구원의 방식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지하여 그 무지에 대한 비참함의 현실조차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두움을 전혀 느끼지 못할뿐더러, 빛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어두움은 사람의 이지뿐 아니라, 마음과 정서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진리에 대하여 하등의 반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굳어 있어서 진리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진리란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판단하려고 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두운 것은 이지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두워서, 빛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것이 바로 죄가 우리에게 행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에 대한 마귀의 영향력입니다.

 

 

 

①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8~13)

성경에서는 악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밤의 자녀들”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술에 취하는 자는 밤에 취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자녀들, 밤의 아들들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들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어두움에 있지 않는 “낮의 자녀들”로서 “빛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의 밤거리를 들여다보십시오. 밤에 일어나는 일, 어두움 가운데서 은밀히 행하는 일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대하여 설명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열매 없는 어두움에 속한 모든 제국들은 결국 몰락하고 붕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향락에 취하게 되고 쾌락을 사랑할 때에 붕괴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어둠가운데서 행해지는 “열매 없는” 일들입니다. 그들이 어둠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은밀하게 저지르는 모든 것들은 그들 스스로 수치스러움을 감추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밝은 빛을 싫어합니다. 자신들을 드러낼 그 빛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이 그처럼 무지와 어두움과 수치로 덮여 있음을 아시고도 독생자를 보내사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고, 십자가에 죽으사 우리를 그 악한 세상에서 구원하시고,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지사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빛 가운데 놓여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② 빛의 열매(9~10)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는 말씀처럼 이제 참된 그리스도인, 곧 “주 안에서 빛” 인 사람들에게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있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선하게 보이고, 의로워 보이며, 진리와 진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한 이교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과 그리스도인과의 차이를 구분하려면, 우리가 빛의 특징을 알게 될 때만이 그 차이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하게 얼마간 계몽을 받아 변화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즉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빛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전에 가지고 있지 못하던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어둠은 무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빛의 특성은 지식과 이해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저 하나님에 대하여 몇 가지의 사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지식보다 더 나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며 깨닫지도 못하는 것으로, 영적으로 밖에 분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위대한 지성적인 능력과 합리적은 사고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데, 그러나 만일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는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전혀 무식하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영적인 기능이 모든 다른 사람들과 그리스도인을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지를 가지고 있으며 지성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인 상황이나 기타, 다른 것들을 이해하고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전개하지만 영적 진리의 영역을 제시하면 그것들을 이해 할만한 기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 안에 있는 빛을 모릅니다. 그들은 철학적이거나 이지적이거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어두움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무지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어리석은 마음들이 어두움에 갇혀 있고, 그들의 생각은 이 세상의 신에 의하여 눈이 멀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 있는 빛”이기 때문에 죄의 진상도 이해하고 알아차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죄가 죄인에게 어떤 것이지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라는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우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행실의 문제를 전부 자라난 환경, 유전등과 같은 것의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하지만 인간에게 있는 악의 원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바로 그 악의 원리가 모든 판단력을 손상시킨 결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영적 갈등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9절에서 전하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는 말씀을 이지의 측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위대한 특징은 열매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마다 자연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바로 알고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입니다. 사람이 처음 창조 될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셨던 의도를 다시 되찾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성장과 발전의 견고한 요소가 있습니다. 씨가 심겨지고 싹이 나서 그것이 자라나 가꾼 다음에 꽃을 보고, 그런 다음에는 열매들이 성숙하게 열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가 생겨나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나무에 성숙한 열매가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억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임의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열매를 맺는 데는 언제나 성장과 발전, 그리하여 끝내 성숙하게 되는 그러한 요소가 존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열매는 나무의 생명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성격, 즉 나무가 가진 성질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며, 그 생명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주 안에서 빛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그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어야 되게끔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인지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주께서 기쁘시게 할 것(8~14)

이제 바울은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라.” 고 하고 그러나 그들이 빛의 성격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모든 착함”, “모든 의로움”, “모든 진실함” 으로 세분화하고 있습니다.

 

 

 

① 착함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들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십니다.

선함은 관용을 의미하며 언제나 여러 부분들 안에서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한 사람은 균형 잡힌 사람입니다. 하는 일마다 고상하고 탁월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모두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성품의 여러 속성들이 서로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 결과로 자기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촉진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위대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행과 죄의 결과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모든 것을 다 선하심을 가지고 바라보시며,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신데, 그는 해를 악인과 의인에게 골고루 비추시며, 비를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다 내려 주십니다. 사람들이 악하고 불의하지만 그는 그들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회개케 합니다.

 

 

 

 

사람에게서는 이 선함에 대한 매우 희미한 그림자를 보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에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고 악한 것을 막아 주려고 하고, 언제나 이렇게 선한 일을 할 기회를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선해야 합니다.

 

 

 

 

② 의로움

이 말은 법적인 개념과 생각을 가지게 하여 준다는 의미에서 선함과 다르며, 의란 법을 준행하는 것의 문제, 즉 공의를 나타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정직하고 의로우며, 스스로의 손으로 무엇을 행하든지, 다른 사람들의 일을 하든지 공정합니다. 그는 결코 법칙이나 법률을 억지로 파괴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악도 행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와 소유도 존중합니다.

 

 

 

 

다른 말로 하여 우리는 십계명의 차원에서 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정직하고 무엇이 바르며,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합니다. 의는 완전하게 법을 준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자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대하여도 철저한 준행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인은 이 모든 것을 모든 삶의 국면에 적용시켜 나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주의 법이 완전하고 바르고 영혼을 바꾸는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③ 진실함

빛은 모든 것을 다 드러냅니다. 인격 속에 있는 진실의 효력은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열려진 사람이며 감춘 것이나 숨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기 자신 그대로를 내어 놓습니다. 언제나 빛은 악한 것을 드러나게 하며 악한 것을 보고 정죄하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말하자면 빛은 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그것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하여 줍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악하다는 평을 할까 두려워서 선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창피를 당하거나 정죄를 당하고 비판 받기를 두려워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필요성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최종적인 동기는 주를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주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고, 알려고 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지만 그러한 덕행들을 추상적인 관점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주님께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5. 빛으로 나타나는 것(7~14)

이미 우리는 “주 안에 빛”인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며 어떠한 처신을 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관념이나, 어떤 거짓된 금욕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며, 또는 그것들로부터 피하여 운둔하는 것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 밖으로 도망가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안에서, 즉 바로 우리가 믿지 않았을 때 머물러 있던 그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주 안에서 빛이니 그들의 죄악적인 일에 동참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동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그 안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들과의 관계는 이미 끊어진 상태에서, 전혀 다른 영역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그 일을 책망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사회에 남아 있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 받을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을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삶과 행실과 행동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교제를 전적으로 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 된 삶의 방식을 들여오고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복되신 주님이 친히 본을 보여 주신 대로 죄인을 접촉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열매 없는 어떤 어두움의 일과도 관계를 맺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그들과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인간과 인격들로서의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들의 삶 속에 있는 죄악적이고 혐오스러운 일들에 대하여는 하등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가르침은 이런 소극적인 태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라는 말은 단순하게 꾸짖고 정죄하고 비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책망한다는 것을 어떠한 불쾌감을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일들을 기각하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엄하게 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지점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 뜻은 조명과 이해를 제공함으로서 납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빛을 던져서 우리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에게 그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과 그 일이 자기의 불멸하는 영원한 영혼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그 본질을 말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저 악한 일 자체만 가지고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빛 전체에 그러한 일들을 비추어 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그 악한 결과들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과 가진 관계에서 잘못되어 있는 것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일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하여 그들로 알게 하고 구원에 이르는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성경: 엡5:15-17절

 

 

 

 

5장15~17절: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본문에서 서두에 시작하는 말로 사용한 “그런즉”이란 말은 앞에서 말하여 온 14절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빛의 주제에 대하여 사도가 다루어 온 모든 문단 전체와도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에는 “그런즉”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그런즉 알라”로 되어 있고 그 말의 뜻은 그것을 주의하라, 네가 그것을 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라,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라, 온전하게 정신을 집중시켜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어떤 방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의 이러한 행함에 대하여 자세히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이 “행함”이라는 것은 신약의 특징적인 말로서, 우리의 행실, 품행 전체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어휘로 쓰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여기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개인 적인 사사로운 품행이나 행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서나 빛처럼 행동할 그러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할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같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할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데, 그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그런 일을 하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지혜를 나타내고 지혜를 행사함으로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 지혜는 무엇입니까?

지혜는 지식이나 능력이나 재능이나 심지어 선함과 빛과도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은 오히려 판단력과 매우 유사합니다. 단순하게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판단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판단력이 없는 사람은 지식을 잘 적용하거나 응용하지 못하므로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모든 지식과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적용하고 이용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지혜 있는 사람으로 불려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나타내지 아니하고서는 빛들 같이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먼저 “지혜 없는 자같이 되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된 사람에 대하여 지혜와 대조하기 위하여 몇 가지 특징을 알아보겠습니다.

① 그들은 감정에 지배를 받습니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대신 감정의 차원에서 평가하고 대조합니다.

② 욕망에 의하여 지배를 받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가져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옳다고 하는 식입니다.

③ 충동과 본능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통제나 금지 사항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충동에 따라서 행동을 하며, 이치와 이해를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보다 본능적인 판단이 더 낫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④ 열심에 의해 지배를 당합니다. 열심은 참으로 바른 일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모두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열심에 의하여 좌우된다면 큰 위험이 있습니다.

열심과 진지함은 놀라운 것이나 그러한 것들은 통제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요소를 통제하지 못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재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은 열심이 있으니 옳을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지만, 열심만을 위해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지 않고 돌진하는 것은 심각하게 그릇될 수 있습니다.

 

불은 선한 종이지만 악한 주인도 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열심에도 그 말이 적용됩니다.

열심이 환상주의를 낳을 수 있고, 잔인과 핍박을 불러 올 수도 있으며 무서운 참화를 불러오는 영향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혜와 이해로 인도되지 아니하고 지배되지 아니하는 열심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⑤ 어리석은 사람은 적당(알맞게)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의 문제를 놓고 여러 각도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보다는 특별한 순간에 대하여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이 순간만이 중요하고 그 외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현제의 시점, 자신이 처해 있는 입장, 지금 이 순간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앞에 있는 것 외에는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단지 직관에만 절대적으로 관심을 두며, 결과들을 숙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다루는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다 살펴보고, 직접적으로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 뿐 아니라 먼 장래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 가능한 귀추를 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지금 당장 원한다고 야단입니다. 이것은 순간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생각들 때문에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할 것이다.”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순간을 위해서 살아가고, 실제 있는 순간을 위하여 삶을 살고, 진정한 양심과 그들 안에 있는 지혜가 이러한 귀추들에 대하여 강권하는 것을 생각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극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한 이유로뿐만 아니라 선한 이유로도 참을성이 없을 수가 있으며, 자기가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어떤 목적에 대하여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근본적인 원리들에 연관시켜 보는 사람입니다.

 

 

 

시간을 들이고 인내하고서라도 그 모든 경우들을 수집하고 그 모든 증거들을 집결하여 살펴보고 분석하여 대조하고 비추어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적당하게 여러 항목으로 나누고 그런 다음에 근본적인 원리들과 비추어 보고 시험하여 봅니다. 그들은 주관적이지 않고 언제나 객관적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일단 생각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그는 계속하여 자기가 발견하고 얻은 것을 근본적인 확실한 원리들에 관계시켜 비추어 보고 결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 된 것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일을 추진하여 나갑니다.

 

 

 

주인으로서가 아니고 고용된 종들로서 열심을 부리며 진지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흥분이나, 열심이나, 열성이나, 참을성이 없는 마음으로 지배를 당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섬기고 그 진리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하여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바로 그것이 궁극적인 요소입니다.

 

 

 

 

  3)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지혜가 그 모습을 어떻게 드러냅니까?

최근에 철학자들은 계속해서 말을 바로 사용하기 위하여 언어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썼습니다. 지혜를 위한 이러한 큰 요구는 언제나 계속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는 여기서 세상이 아무리 명석하고 재주를 다 부린다고 하여도 성취할 수 없고 성공할 수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수중에 소유되어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들은 이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안에서 이 최종적인 지혜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참된 의미에서 우리는 이러한 궁극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인생과 세상이 발견하려고 헛되이 애쓰고 있는 인생의 모든 부대되는 상황들을 아는 지식과 그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이 그 모든 지혜를 다 짜내어도 실패한 일이 우리에게는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에도 눈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생각과 삶 전체를 다 관장하는 큰 원리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지혜가 그리스도인에게 들어오는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① 그는 자신 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지혜에 대하여 눈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새 생명의 원리가 동시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 우리 안에 본능과 충동과 격렬한 감정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러한 우리의 의지나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심보다 훨씬 더 강한 새 생명에 의한 새 능력과 새 원리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내 자신 안에 역사하는 그리스도로 인함이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② 이제 우리 안에는 진리와 지혜의 방향으로 역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으로 역사하는 적극적인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면서부터 가진 이른 바 죄와 타락의 결과로 존재하는 다른 세력들과 힘들을 저지하는 일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능력과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함께 작용합니다.

③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내주하여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혜의 문제에서 도움을 입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충돌, 감정,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싶은 성향들, 이러한 세력들과 그 욕구들을 제어하는 능력을 성령님께서 주십니다. 그는 근신하는 마음, 지혜의 마음, 절제, 질서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사람은 전혀 그러한 기회를 가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제 다음의 문제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지혜를 어떻게 하면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① 신중하게 행합니다. 그들은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방식으로 하지 않고 언제나 주의 깊고 신중하게, 그리고 면밀하게 둘러봅니다. 확실한 근본 원리들에 비추어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행동하기 전에 많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지는 가를 생각해야합니다.

③ 큰 재치를 가지고 큰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매우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직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를 다른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되 그 진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 되게 전하여야 합니다.

④ 지혜란 지식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적당한 방식으로 적용되지 못하면 그것이 선보다는 악을 더 많이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3. 세월을 아끼라.

바울은 단순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치 않은 악하고 죄 된 길에서 서성거리지 말고 그러한 일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이제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왔던 방식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빛 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에 시간을 쏟아 부으란 말입니다.

 

 

 

세상의 음란한 잡지나, 그런 유의 책들을 접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보내라는 것이며, 세상의 많은 옳지 못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그것들을 적용하는데 시간을 보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어리석은 자들의 행실과 같은 삶을 살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서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나 주의 종을 통해서 경건 서적들을 통해서 나무나 많이 접해 왔으며,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능력 없는 삶을 살 때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분을 알고, 우리의 영광이 어떠한지 알고, 그 신분에 따른 우리의 행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서 행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행실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맞는 삶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경: 엡5:18-21절

 

 

 

 

5장18~21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 성령의 각성(18)

그리스도인은 결혼이나 가정생활, 그리고 노동의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먼저 그리스도인의 생이란 “성령 안에서 사는 것” 이라고 상기시키는 것으로부터 다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는 그 점을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단지 음주나 과음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다루어 왔던 새 생명에 속하지 않은 생활의 방식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생활에 대한 적극적인 가르침을 직설적인 투로 계속해 나가지 않고 음주나 방탕의 요소를 도입하는지에 대하여 두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는 이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신앙 밖에 있는 외인들이 아직도 계속하고 있는 옛 생활의 특징을 보면, 음주나 방탕보다 더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들의 지난 삶은 주로 음주나 악이나 과음에 따르는 모든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바로 이점이 에베소 교인들의 일반적인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사람들은 변화 되었고,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이제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새 생명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새 생명과 옛 생명에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는 것을 보여 주기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로 그는 두 신분과 두 생활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2;12~16에 기록 되어 있는 오순절 날에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하였느니라.” 여기에는 갑자기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두 상태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유사점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대조 점과 유사점의 두 가지 요소를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술 취하지 말라” 는 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술 취한” 과 동반어라고 할 수 있는 말은 “방탕” 이란 말입니다. 사도는 술 취하는 것이 방탕으로 이끌어 주어 방탕에 빠진다는 것을 진술한 것입니다.

 

 

 

이 말은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말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에서 “방탕한” 으로 번역된 말이 원어 상으로 정확히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절약(저축)하다” 는 말의 부정 접두어를 뺀 말로서 절약의 반대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방탕하게 될 때 저축하지 않게 되고 간직하거나 고수하지 않게 됩니다.

어리석고 허랑방탕하게 제멋대로 뿌려 버려 결국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는데,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 말은 파괴의 개념을 전달해 줍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말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자유분방과 낭비와 결국에는 파멸로 인도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 라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상의 것들을 비추어서 사도가 여기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적극적인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제하는 생활이요, 질서 있는 생활이란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낭비하는 생활이 아니라 생산적인 생활입니다.

③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정적인 생활만도 아니고 단순히 악과 죄를 피하는 것만의 삶이 아니라, 구속에 대한 감사로 이 모든 것들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하는 승리의 생활입니다.

④ 기독교란 힘을 북돋아 주는 가슴 벅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격과 격려와 새 힘을 원하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을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과 지성을 향한 직접적인 각성제로 이지의 기능들을 일깨우고 개발시키십니다. 그러나 알코올이나 다른 약품은 이러한 기능을 나타낼 수도 없고 성령처럼 심정의 가장 깊은 곳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⑤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한 삶이며 기쁨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행복해 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하고 정신을 피폐하게 하여 긴장이 풀리면 오히려 더욱 깊은 불행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⑥ 그리스도인의 삶은 명랑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스러운 심령들이 함께 모이고, 큰 구원에 관하여 함께 얘기를 나누고, 새 생활과 그들에게 있는 복된 소망과 장차 올 영광과 행복 등에 관하여 얘기를 나누고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사로 도와주고, 서로 강하게 해 주고, 서로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최선을 다한다 해도 그런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 즉 교우들 간의 교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⑦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육신적인 것에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육신과 혼과 영혼이 모두가 만족하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의 원천도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성도는 한 순간도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는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2. 성령의 지배(18)

우리는 이미 본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생활의 진수가 되는 특징을 연상시켜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능력과 생기와 기쁨과 평강의 삶이요, 즐거움의 삶이란 것입니다. 또한 그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한 삶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좀더 직접적으로 본문을 살펴봐야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가 의미하는 바를 발견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성령에 충만해질 수 있는가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우선적으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 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 는 것이나 “성령의 인침” 을 받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는 권면을 받고 있는 대상들이 성령의 인침을 이미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엡1:13, 4:30)

 

 

 

 

성령의 “세례” 와 “인침” 은 하나의 요지부동한 체험이며, 주로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확실성 문제와 관련이 되는 아주 고정된 체험으로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는지 어떤지를 스스로 분명하고 확고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사도행전 2장)  성령의 인침을 알지 못하고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성령 세례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증거토록 하는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은 “성령의 세례” 입니다. 여기서는 “성령의 세례” 가 “성령의 충만함” 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러나 거기에 가장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성령의 세례” 를 받지 못합니다.

세례란 독특하고 유별난 체험으로 사람에게 지속적이고 고정적인 조건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은 유동적이고, 끊겨졌다가 다시 계속되는 상황으로 심지어 소멸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세례” 나 “인침” 과 구별되는 “충만” 이란 낱말에 이르게 될 때 그 말 자체도 두 가지 다른 방면에서 쓰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실례를 든다면, 출애굽기 31:2~3 에서 성전을 짓는데 쓰임을 받는 “브살렐”이란 사람은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15 에서 세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었고, 누가복은 1:41 에서는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은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으며, 누가복음 1:67 에서 세례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을 입어 예언하는 것 등, 이상의 매 경우들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말하거나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특수한 목적을 위해 입은 권능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에서 사도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상태에서, 어떠한 사역을 할 때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행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고유의 어떠한 사역을 행할 때마다, 다시 성령의 충만을 받아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해 왔음을 알게 합니다. (행4:8, 4:31, 9장, 13장) 우리 주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계셨고, 사역을 시작 하실 때에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눅4:1, 요3:34)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어떤 특별한 사역 때문에 권능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은 아닙니다. 단지 표현의 유사성 때문에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의 상태나 조건을 묘사한 것으로 성령의 감화를 의미합니다. 이제 본문에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는 말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철저하게 인격적인 차원에서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정뱅이를 보고 술기운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와 같이 사도도 어떤 의미에서 “술기운으로 살지 말고 성령의 기운으로 살아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기운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전체 인격이 다른 영향과 다른 세력에 의해서 조종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술기운으로 사는 사람은 전적으로 그 영향 아래 있는 것이며, 그의 지, 정, 의가 다 함께 그것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할 것은 사람의 이성과 감정과 의지가 술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서 지, 정, 의에 감화와 영향을 받는다는 것, 즉 성령이 우리를 조종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술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케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모든 지시하심에 극히 유의해야 하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지시에 예민해지는 것이 성령에 더욱더 충만해지는 비결입니다.

 

 

 

그에게 복종하면 할수록 성령은 그의 소원을 더욱더 지시하실 것이며 더욱 북돋우실 것이므로 우리에게 오는 그의 모든 깨우침과 소원과 요구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복종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우리 안에 확증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안에 거하시고 계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받을 수가 있습니다.

 

 

 

 

3. 성령 안에서의 복종(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는 말씀은 18절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권면에 비추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지 않고서는 이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행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다 대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보아야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도 할 수  없이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자기를 과장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피차 복종하려면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과 전적으로 달라야 하며, 다른 위치에서 성령에 충만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을 다하여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 있다면 행복과 기쁨이 있는 유쾌한 만남 교제를 이룰 것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다 하나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같은 정신은 피차간의 교제에서, 순전히 인간적이고 땅의 차원에서 피차간 갖는 교제에서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피차 복종하라.” 는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일은 자발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와 원리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로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뛰기 전에 살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사람이며, 사상과 이해, 명상과 사려 깊은 정신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만 아는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나,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신의 외적인 어떤 모습들이나, 조건들을 내세워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어떠한 상태에 대하여 멸시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겸손과 자비와 이해심과 소망감을 가지면서 공격적이거나 불쾌하게 하지 않고,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으며 “피차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머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함” 속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①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② 주님께 대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③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그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④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며, 하나님의 밭이고 하나님의 집이니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 라는 말씀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는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이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되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구원받고 회심한 자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이기 때문에도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를 경외함” 때문입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고 충분 그 이상입니다. 우리 안에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성경: 엡5:22-33절

 

 

 

 

5장 22~33절: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1. 기초적인 원리들

이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21절의 원리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아내들아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에서 사도는 또 다시 “복종”의 문제를 제시합니다.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복종하는 일반적인 원리를 “피자 복종하라”고 전재해 놓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보편적으로 피차에 복종한다면, 부부관계에서는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가장 먼저 부부의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는 주제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첫 번째 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 사실이 자동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소속과 새로운 생명을 받고 조명된 진리 가운데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여전히 같은 조건일 수 있으며, 오히려 더 악화된 환경에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모습과 다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서 이전에 당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에는 사실 그대로를 생각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제 그가 자신에게 직면하는 일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생소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초대 교회에 아주 많았는데, 그리스도인이 된 여자가 남편을 향하여 나는 이제 자유라고 외치고, 나는 내 남편이 알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종이었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자신의 주인에게 나는 자유인이라고 외치는 등 사회 질서를 무시하는 행동들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다가온 상황을 오판하여 그것을 오용하도록 함으로서 모독하게 하는 마귀의 꾐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에서 무엇이 옳고 우리 자신들이 처한 새로운 상황에 이 새 교훈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극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로는 기독교란 우리 삶 전체와 그 관계들을 간섭하고 통치합니다. 기독교적인 삶에 있어서 별실이란 것은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험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들이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그들은 자신의 결혼 생활이나 자신의 직장 생활, 그리고 부모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일이 오면 신앙인으로 살고, 월요일 아침이 오면 사업가로서 살았습니다. 기독교란 인간 삶의 일부분뿐만이 아닌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네 번째 로 기독교 교훈은 삶과 생활에서 근본적으로 성경의 교훈과 상반되거나 모순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신약시대 사람이니까,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 구약에서 말한 것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서, 스스로 구약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논증은 부분적으로 구약에서 심지어 창세기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가족에 관해서나 삶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질서들에 관해서도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그것들을 전혀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사실 신약은 구약을 보충해 주고, 열어 보이고, 그것에 대하여 더 넓은 전망을 주며, 근본적인 계명 뒤에 숨은 영을 아는데 도움을 줍니다.

 

 

다섯 번째 로 신약은 항상 그 교훈의 이유들을 제시하며 논증을 제공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래야만 된다.”고 하며 그 이유들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어떠한 모순도 없어야 하고 “가시 채를 뒷발질 하는 일”과 성경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 성경에는 보화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신비로운 것들이 우리에게는 이지적인 이해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의 상황과 모습들을 볼 수가 있고 우리의 미래까지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더 놀라게 되며, 이 놀라움은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로 우리는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에, 그 일 자체를 개별적으로 떼어서 생각하거나, 그것을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문제는 고립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밀려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원리가 있고, 어떤 교리가 있는가를 자문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다루기 전에 좀더 넓게 어떤 가계에 속하였는지, 더 넓게 어떤 민족에 속한 사람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큰 덩어리를 붙잡고 그런 다음에 그룹이나 계층이나 큰 덩어리에 관한 진리를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함” 속에 있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에 복종하라” 그런 다음에 사도는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반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논쟁을 할 때도 냉정을 잃고 혈기를 내는 말을 하지 말고, 언제나 이 원리, 즉 “그리스도를 경외함”의 원리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2. 창조의 질서(22~24)

결혼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이성 간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 간에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기독교의 교훈은 결코 자연적인 것을 떠나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던 방식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면, 사도 바울은 결혼에 대한 전체 문제에 관한 교훈에서 복종에 대한 큰 동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말씀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절대적으로 주님께 복종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너무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아내들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먼저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주께 대한 너희 의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주께 대한 너희 복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는 남편만을 위하여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주님 자신을 위해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21절에서 지적된 일반적인 요점의 반복으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의 연속입니다.

 

 

 

그러므로 복종에 대한 궁극적인 이유는 주께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주님 보시기에 기쁘신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아내들의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의 일부이며, 지킬 규칙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은 그리스도인 아내는 누구나 이 문단에서 어떤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로 그리스도인 된 아내들이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사도 바울은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① 창조의 질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할 것은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경륜과 뜻의 일부로서 하나님께서 남녀 사이의 관계에 관해 건설하신 바에서 나오신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여자는 남자만큼 강하게 지음 받지 못하였으며 남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여자를 “더 약한 그릇”이라고 말할 때 가치를 손상시키는 의미로서 말한 것이 아니라 여자란 본질적으로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그리고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가족의 머리라고 하는 기본적인 근본 교훈입니다. 또한 여자는 남자의 “보조자”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여자의 주요 역할은 남자 안에 있는 부족분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창조계의 주(主)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남편을 도와주고 보좌하여 그가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즉 영광스럽고 놀랍고 위대한 임무를 수행해 낼 수 있도록 보좌해 주기 위해서 창조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남자 혼자는 부족하며,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로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칙입니다.

 

 

 

 

②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은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이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삶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뿐 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사물을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놀라움과 다양함 또한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더욱 큰 깊은 통찰력으로 부요케 되고 새로운 자질이 주어져, 이미 설정된 자연 질서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으니 그는 몸의 구주시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결혼관에 대해서 첫째 로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비 그리스도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고후6:14) 그건 둘이서 다른 체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로는 결혼과 관련된 기독교의 예배는 그리스도인에게만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 참석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하는 이 진술이 읽혀지는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로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신비적 연합과 비교될 수 있는 것, 즉 그리스도와 관계해서 교회의 생명과 같은 식으로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예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따른 진정한 기독교 예배의식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로 아내는 남편이 자기와 하나님, 자기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저해하도록 까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음행은 결혼 관계를 끊기 때문에, 만일 남편이 음행의 연고가 있으면 아내는 더 이상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허락하는 것이며, 그녀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음행이란 연합과 관계를 끊어 버려, 그들은 이제 나뉘어 있으며 이 이상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남편은 연합을 깨고 연합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다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왜 이 사람과 결혼 했으며, 그 결혼은 무엇이며, 다시 회복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정신과 복음의 정신 안에서 그 점을 재 포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사도 베드로의 교훈을, 베드로 전서 3장에 있는 교훈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고통을 당하든지 간에 하늘에서 우리의 상이 매우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참된 사랑(25~33)

이제 “남편들아 너희 아내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일반적인 권고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다른 말로 해서 남편에 관해서 주도적인 사상은 사랑이며, 이미 다뤄 왔던 아내들에 관해서의 주도적인 사상은 복종입니다. 물론 이것은 남편만이 사랑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도 남편을 사랑함으로서 복종을 하게 되는 것이고, 남편 또한 아내를 사랑함으로서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고 더 나아가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관계와 가정에서 펼쳐지는 화평과 조화와 연합에 관심을 두고 양편에서 가장 강조 될 필요가 있는 요소를 지적하여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들을 향한 “너희 아내들을 사랑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내의 입장에서 머리가 되고, 결혼 관계에서 “”가 되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으로 보살피되, 절대로 폭군 같이 되지 말라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딤후 1:7)

 

 

 

능력은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권리만 주장한다거나 아내의 감정을 무시해 버려도 된다든지, 가정에 앉아서 호령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남편의 다스림은 사람의 다스림이며 통치로서 그것이 사랑의 지도력인 것이지 독재자나 독단적인 자의 경우가 아닙니다. 남편은 결코 독립적인 사람이 아니며, 그와 같이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 결혼의 관계를 스스로 파기한 것과 같습니다. 남편은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진 것처럼 자신의 일부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① 남편은 아내를 모욕하지 않는데, 그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② 남편은 아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을 멸시하는 것은 나쁘고 어리석고 그릇된 행동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독립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거나 행동하는 일들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③ 아내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되며, 아내를 아주 완벽한 무엇으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남편의 경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아내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야 하며, 남편이 싫어하는 어떠한 것들은 아내도 싫어 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자신이 힘들다고 아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④ 아내를 자신의 몸을 보호하듯이 보호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인 아내는 더욱 연약한 그릇임을 알고 매우 조심하여 사랑으로서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⑤ 아내를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지 말고, 아내를 견고케 하여 주면 그녀도 역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어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그녀는 궁지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밀한 면에 이르기까지 몸을 돌보는 것같이 우리의 아내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성도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하나의 교회로 볼 수가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를 신부로 생각하십니다. 교회가 보잘 것 없고 부족함에도, 더욱이 비열하고 파렴치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두 번째 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교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희생의 사랑이며, 언제나 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자신의 신부들을 위해서 하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남편들아 너희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결혼관입니다.

 

 

 

 

4. 신부의 특권(23~33)

신랑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부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되는 우리들은 그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이와 같이 신부는 신랑의 모든 것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독점적으로 차지하지 않고 삶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과 행동과 기타 남편에게 관련된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새롭게 형성된 가정의 틀에서 이제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하던 일들을 자기 아내에게도 얼마나 큰 기쁨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삶을 함께 누리는 자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정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되며, 아내의 견해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은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일이 주어졌을 때에 아내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에도 그 일은 적용이 됩니다. 아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는 성령님께서 아내의 마음까지 움직여 주실 것을 놓고 기도하면서, 아내를 설득시켜 그 길을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한 여자가 결혼하게 될 때 자기의 성을 버리고 그녀의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는데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이제는 남편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게 될 때, 우리의 이름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우리의 이름 앞에 주어집니다.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은 남편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온전히 자기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특권들도 함께 누릴 수 있는 신부로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23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셨습니다.사실상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독생자를 사랑하심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런 관계 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런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주지 않는 특권을 그 아들에게 주려고 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와 한 몸을 이룬 신부에게도 그와 똑같은 특권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신부로서 이 고귀한 특권들을 스스로 이용하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우주의 통치자이신 아버지께서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가지고 그의 존전에 나갈 때에 그분이 그의 아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미 이루어진 소원들과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과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특권들을 감사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그 하나님 되심을 송축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우리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와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들과 특권들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소유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기의 신부로 맞아들이고 교회에게 모든 것을 부여 하셨습니다. 그의 전망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의 영광이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전 우주를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들을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주어진 특권과 영광이 바로 그것입니다.

 

 

 

 

5. 바뀐 관계들(25~33)

이 둘이 한 몸을 이룰지라.”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이미 공부해왔던 교회의 신비적인 연합과 비교 될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생명적인 연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연합은 결혼에 있어서 중심 원리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와가 아담의 “돕는 배필”이 되기 위해서 아담에게서 취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상태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신 순간 남자는 자기의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되리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사도는 31절에서 바로 그 말씀을 인용하여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남편이 될 남자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는 그의 부모를 왜 떠나야 합니까? 남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케 될 이 새로운 연합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이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새로운 연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예전에 있던 자리에서 나와서 새로운 단위를 구성하는 새 가정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후부터는 자신을 한낱 부모의 아이가 아니라, 한 아내의 남편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며 지난 모든 생애 동안 자신을 부모에게 속한 아이로 여겨왔던 것에서 떠나 한 가정의 머리로서 새로운 책임을 떠맡는 자리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떠나야 하며, 이전의 삶의 방식에서 떠나야 합니다. 새로운 가정의 머리가 되는 남편을 존경하며, 복종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접해야 합니다. 결혼에서의 성공 원리는 “곧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남편들아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새 생명을 받았고, 새 능력을 받아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관계들은 변모되고 바뀌어졌으며, 차원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의 본과 모범을 따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 엡6:1-4절

 

 

 

 

6장1~4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1. 순종하는 자녀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장에 이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주제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 또한 사도 바울이 전장에서 전제한 위대한 원리에 대한 또 하나의 실례로서 다양한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다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의 원리를 남편과 아내의 차원에서 파헤쳐 보았고, 이제 가족간의 관계들, 특히 부모와 자녀들, 자녀들과 부모간의 관계의 차원에서 그 원리를 적용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순종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말은 청종한다는 말뿐 아니라, 자녀들 된 자들은 권위 아래 있으며, “아래서” 듣는 자라는 사실을 듣고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계명을 들을 뿐 아니라 도움을 받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가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계명이 함께 수반하는 사상인 “공경한다.”는 사상의 통제를 받고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경외하라.”, “존경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은 기계적이고 마지못해 하는 복종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미암아서 바리새인들은 우리 주님께 크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존경해야 하고 경외해야 합니다. 그들은 부모와 자녀간의 사이에서 얻은 입장과 처지를 커다란 특권으로 여겨야 하고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부모를 경외해야 합니까? 첫 번째 로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는 이것이 옳을 뿐 아니라,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 그렇습니다. 어떤 면에서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 자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이 전체적인 관계에 대한 하나의 모형과 그림자, 그리고 초상화 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전체 관계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연상케 하고, 그런 의미에서 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고 우리 자신이 자녀로 생각게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십계명 안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고 이 계명 위에 한 약속으로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일반화시키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는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2. 균형 있는 훈육

우리는 이제 훈육을 실행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특별히 4절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는데, 훈육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그것은 반드시 강화되어야 합니다. 먼저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말라.”, “너희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 “너희 자녀들이 원망하지 않도록 하라.”고 번역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녀를 훈육시킬 때면 언제나 존재하는 위험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자녀들을 노엽게 한다면 유익보다는 해를 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 성공할 수 없고, 오히려 자녀의 마음에 격한 반발만 일어나게 하고 분노와 원망만 일어나게 하여 처지가 난처하게 될 것이고, 훈육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노하거나 죄스런 원망을 일으키지 않을 그런 방식으로 훈육을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어떻게 해서 이룰 수 있으며, 부모들이나, 학교 선생님, 그리고 자기들보다 나이 어린 자들을 담당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에 의해서 행해지는 그런 훈련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에베소서 5:18의 말씀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은 언제나 열쇠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다룰 때 성령 안에서 영위되는 삶과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삶의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능력”과 “자제”, 즉 절제 있는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훈육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조절하며 절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초 의 징계는 언제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절제하며 냉정을 기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성을 잃고 격동하여서는 안 되며, 그런 상황에서라 할지라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격적인 절제와 자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로 반드시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며, 반드시 부모들은 생활에 있어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언제나 지켜보고 있기 때문인데, 만일 그 아이가 부모들의 행동이 일관성이 없고 아이에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부모 자신이 하게 된다면 그런 부모 밑에서 훈육을 받은 아이는 어떤 유익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또 하나의 원리는 부모들은 결코 아이들의 이유를 듣는 것을 싫어하거나 비합리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훈육을 받는 입장에선 전반적인 진행과정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환경도 전혀 고려하지 않거나 어떤 이치에 맞는 얘기를 결코 들으려 하지 않는 철저하게 잘못된 부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로 부모들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의 인격과 아이도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노리갯감으로만 생각하여, 그저 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이의 인생에 좋은 것이라 하여 그 아이의 재능과 의사는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교육에 열성적인 것도 아이의 미래에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녀들의 소유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그런 유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의 인격성이란 것이 전혀 인식되지 않아서 권력을 남용하여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무기력한 아이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훈육은 결코 기계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됩니다. 훈육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언제나 이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길들이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훈육의 중심부에는 지성적 이해의 요소가 있어야합니다.

 

 

 

여섯 번째 로 훈육은 결코 너무 지나치거나 혹독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근본적인 법칙에 의해서 “죄 지은 것에 맞게 벌을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기계적인 원칙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은 금물입니다. 징계가 너무 지나치면 “노여움”을 조장하게 되어, 아이는 화가 나서 그것은 합당치 않다고 느끼며 비록 그가 어느 정도까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려 들다가도, 자기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확신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아이를 결코 얕잡아 보거나, 굴욕감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벌을 필요하다면 따끔하게 벌을 주어야 하겠지만 이해에 기초한 합당한 벌을 주되, 아이가 부모 앞에서 무시를 당하거나 굴욕을 당하고 있다거나 사람 앞에서 창피를 받고 있다고 할 정도로 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일곱 번째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아이의 성장과 발전에 따른 체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성장하고 발전하였는데, 여전히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다룬다면, 오히려 반발심만 커지게 만들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껏 알아보았던 부정적인 관점들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랑 가운데서 행해져야 합니다. 만일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혀 그 일을 하려고 덤벼들지 말아야 합니다.

훈육은 언제나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를 존경하기에 이를 그런 방식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다 지켜가면서 훈육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 있고” 성경의 원리대로 하나씩 적용해 나간다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 같은 사랑이 우리 안에도 있게 하여 우리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게”하십시오. 우리의 그 실수로 인해 그들과 우리 자신들을 모든 악함으로 휘말려 들게 하지 마십시오.

 

 

 

 

3. 경건한 양육

이제 사도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양육”이라는 단어는 도덕적인 행실과 이론의 전반적인 품격을 포함한 자녀들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에서 그들을 돌보고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부모들의 임무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 받아야”한다고 합니다. 고유하고 특별한 기독교적 사상과 교훈이 개입하는 것은 바로 이점에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모들 마음의 맨 상층부에는 자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로 아는 지식 가운데서 양육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이 예수 믿는 부모들이 소명 받은 고유한 임무입니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 대해서 바라는 주되고 맨 처음에 오는 욕망이 그것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소망입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세주로 알고 따라가게 되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제일 되는 소망입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은 그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성경: 엡6:5-9절

 

 

 

 

6장 5~9절: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1. 하나님의 것들

본문은 5:18과 20절에서 사도가 설정한 원리를 또 다르게 적용시킨 것으로, 그 중심 사상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제로 행하는 원리로 21절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충만해 있는 우리가 어떻게 피차 복종하는가에 대한 실례들 중에 세 번째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세상을 향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세상은 이 교훈을 행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경건한 순종은 “성령에 충만한 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다루게 될 세 번째 관계는 상전과 종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결혼 관계와 가족 관계 다음으로 긴장과 압박감과 오해가 느껴지기 쉬운 영역입니다.

 

 

 

사람이 죄에 빠져 있고 그 결과로 언제나 제 1차적으로 자기의 유익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일관해 나가는 한, 이 상전과 종의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긴장 상태가 늘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의 주제는 노예제도이고 한 그리스도인인 노예 자신을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야기되는데, 스스로 자유를 찾아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그 노예제도를 폐지하려고 애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와 현재의 그리스도인과 노동, 작업과의 관계 등 전반적인 문제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국가에 대해 복종적이고 사회 법률과 사회 조건들에 대해 복종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주제를 참되고 철저하게 살펴보려고 한다면, 이 주제는 우리를 여러 영역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① 바리새인들과 헤롯당들이 주님께 몰려와서 트집을 잡기 위하여 “우리가 국세를 가이사에게 바칠까? 바치지 말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전혀 예기치 못한 교훈을 듣고 기이하게 여기며 돌아갔습니다.(마 22:15~21)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의 권리나, 사람과 사람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인간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에 관심을 둡니다.

② 마 17:24, 27에서 발견되는 “시몬아 네 생각에는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아들 에게냐? 타인 에게냐?” “아들들은 세금을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나와 너를 위하여 세를 내라.”

③ 롬 13장 처음에 나오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그 다음 빌레몬서에서 바로 이 노예제도 문제를 아주 직접적이고 특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④ 벧전 2:13 이하에 역시 같은 문제, 같은 원리를 언급하고 있는데,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이라 하라.” 그런 다음에 그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윗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이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교훈은 잔인한 폭군 네로가 황제로 있을 때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⑤ 단 3:6의 다니엘의 행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⑥ 사도행전 16장에서 아주 흥미 있는 응용적인 교훈을 대하게 되는데, 부당하게 투옥되는 그 행위 자체가 불법임에도 복종하였고, 나중에 기회가 될 때에 가서 로마 시민으로서의 누릴 수 있는 시민권을 행사하여 정당한 처우를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⑦ 사도행전 25장에는 더 좋은 실례가 있는데,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으로서 시민권을 행사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장면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들고,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사람의 영역에서 생각하고, 인간중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문제를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사실 이 땅에서의 삶은 순례자, 또는 여행자에 불과한 여행자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그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땅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언제나 위엣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부딪치게 되는 이 노예제도와 같은 문제, 혹은 다른 문제일 지라도 모든 문제들에 관한 해결 방법에 대한 성경의 교훈은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그 중심 원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삶이 무시되고 묵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이 세상을 피하여 은둔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또 다른 세계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이 모든 일에 접하게 될 때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하늘의 시민으로, 이 땅에 대하여는 영원한 순례자로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참된 본향은 저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과 사람은 2차적인 문제이지 우선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째 되고 주요한 관심은 언제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교훈하는 방식으로 행하며, 문제들을 대처해 나갑니다.

 

 

 

 

2. 그리스도인에게 우선적인 것

우리는 한 그리스도인이 그의 상전이나 고용주나 정부나 그 밖에 어떤 것에 복종함에 있어서 관계되는 성경의 원리들의 요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임무란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그러한 조건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원리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를 살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을 반대하며, 구약의 선지자들은 정치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여 실제적인 문제들과 조건들을 다루어 왔다고 말합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한데, 그것은 이스라엘 국가는 곧 교회였으므로 국가와 교회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임무란 언제나 교회 안의 조건들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으로 넘어오는 순간 우리는 철저하게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교회가 세상에서 분리되고 세상에서 불러내어진 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로부터 미루어 생각되는 것은 교회의 첫 번째 임무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 아래서 자기들의 삶을 어떻게 영위하느냐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을 개혁하는 것을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닌데, 그것은 세상은 결코 개혁될 만한 소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란 분명히 현존하는 사회, 정치, 경제조건과의 관계를 폐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수를 하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세상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아내에게 마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고, 부모로부터도 더 이상 어떤 통제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역시 종들에게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서 옛날의 관계들이 폐지된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회 질서를 무시하시지 않으며, 자연적인 질서들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국가와의 관계를 끊고, 사회, 정치, 경제의 모든 환경과 관계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주어진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으므로 그것들을 존중합니다.

 

 

 

기독교인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지, 결코 그 환경을 피하거나 폐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노예제도나 전쟁과 같은 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에도 기독교는 이러한 상황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을뿐더러, 직접적으로 정죄하기조차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좋게 여겨 찬성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인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성경과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일들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대하게 되는데, 바울은 “종들과 상전들”에 대해서 얘기하게 되었을 때 바울은 노예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지 말고.......” 다시 말해서 그의 하나의 관심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상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는 노예를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경과 기독교가 이러한 일에 대하여 대처하는 방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찌할 지라도 그들의 방식대로 해결하려고 들지만 결코 그것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일에 대하여 교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방관자라고 하지만, 실제로 해결 방법은 기독교에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교훈을 그들에게 적용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허사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게 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행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조차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상황에 대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입장에 놓여져 있을 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이며,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그것을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사회 안에서의 성도들

하나님의 교회의 임무는 정치와 사회 조건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조건들이 개선되고 개개 그리스도인이 그런 일에 참여하는 것은 옳고 합법적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최선을 다하여 계획된 모든 조건에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일익을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정당에 들어가고,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정당하게 우리의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투표의 방식으로 행할 수가 있을 것이며, 어떤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 합법적으로 주어진 어떠한 일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분명히 성경적인 본을 따르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상태에서 주일마다 구원의 복음을 설교했던 목회자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수를 더하고 성도를 세워주고 그들이 그런 폭군에 대하여 참으며 그것에 대해 자신을 정비하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었고 참된 기독교적인 일을 하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나라들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겸손한 목회자들을 주신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 순전히 정치적이고 자연적인 것을 배제해야 하고, 성경적 교훈을 비추어서 스스로의 행동을 확실하게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그 임무가 사회를 개혁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고 착수를 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누룩”에 비유되는 것과 “땅에 심은 씨”, 또는 “자라나는 나무”등으로 비유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침투와 성장과 발전의 매우 늦은 과정을 통해서 넓혀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아 시간을 요하고 매우 더디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연에서의 하나님의 방식도 역시 같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진전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내 우리가 2천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작동하는 이 진리를 보게 됩니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고, 언제나 간접적으로 많은 시간에 걸쳐서 착수하여 그 열매를 맺게 합니다. 문명이란 언제나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졌으며, 많은 개종자들을 통해서 모든 생활이 변화가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방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노예제도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한 것은 기독교였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의 메시지에서 이런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돌려보낼 때에, 이전의 모습 그대로 돌려보내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는 것은, 이제 그는 사랑받는 형제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관계는 여전히 종과 상전으로 존재하지만, 그들의 관계의 내면을 살펴보면, 사랑받는 형제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방식입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복음이 들어가는 속도에 따라서 변화되어집니다. 우리는 단번에 세상을 개혁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어가고 그 복음이 확산될 때에 다른 모든 문제들은 자연적으로 해결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신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자들이 되어, 이 영광스러운 복음진리를 알게 하는 수단으로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이며, 사명인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노예들

① 그리스도인들로서 많은 원치 않는 일을 요청 받았을 때, 심지어 분명히 나쁘게 여겨지는 일을 하도록 요구되었을 때, 그것이 그 체계에 속해 있다면, 그 체계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 일에 복종해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과 상관이 없을 때, 체계상 어쩔 수 없을 때라면 주일날 일을 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며, 심지어 한 체계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체계에서 파업을 단행 하게 되었을 때에 동참 할 수도 있으며, 그 체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과 최선을 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반자로서 행동하지 않아야 하며, 체제를 역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②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라는 요청을 받은 것에 대하여는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요점은 두 번째 요점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③ 자기의 맡은 임무에 전력을 다하고, 일하고 있는 동안 상전이나 주인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에 주인의 일만을 해야 하고, 사적인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심지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내 고용주의 시간을 사용할 권리가 없습니다.)

④ “눈가림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 내포 되어 있으니, 상전에게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⑤ 전적으로 온 시간을 기독교적인 봉사에 바치라는 소명을 받을 때는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재의 직업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②번의 요점에 저촉되지 않는다면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5. 하늘에 있는 우리의 상전

이제 사도가 상전들에게 그들의 책임과 몫을 상기시키는 방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다시 한번 우리는 성경의 완벽한 균형과 완전한 공정에 감탄하게 됩니다. 성경의 균형과 공평과 공정은 성경의 가장 두드러지고 영광스런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이제 상전들에게 시선을 돌려 “너희들도 같은 식으로 행하라.”고 말하는데, 세상이 결코 이와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분들과 차별들을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종들에게 호소를 하지만, 상전들에게는 다른 호소를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같은 식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도 종들이 그들의 일을 하는 것과 정확히 같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비록 상전들이긴 하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소심하게 겁을 먹는 것을 뜻하지 않고, 하늘에 있는 상전을 불쾌하게 할까봐 걱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해를 끼칠까봐 두려워하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이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하는 것처럼 상전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 사도는 노예들의 경우에서 “눈가림만 하지 말라.”고 말했듯이 상전들에게는 “공갈(위협)”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노예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것이 눈가림이라면, 상전들이 범하기 가장 쉬운 것이 공갈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치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효력은 우리가 육체 안에 있을 동안만 있습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잠깐 동안의 삶이요, 이 세상은 영구한 세계가 아닙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육체를 따라”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상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간 동안 있을 고통이나, 영화가 하늘에 계시는 상전의 눈 밖에 나는 행실이 되지 않도록 늘 이 말씀을 새기며, 적용하는 삶을 영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6:10-13절(1)

 

 

 

 

6장10~13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 서   론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한 형태여야 하느냐라는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이 울리는 하나의 경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종말로”라는 이 말이 서신의 끝부분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사도 바울 자신이 이제까지 말하여 왔던 그 논제와 직접적으로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 그 주제가 더 확장된 것이므로 이제 그 참된 맥락과 전경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현재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상기시켜 왔으며, 나아가서는 우리의 새로운 처지에 속한 가능성들을 보여 주었으며, 더 나아가서 그것들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끝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삶에 대항하고, 역사하는 어마어마한 힘이 존재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살아 나가야만 하는 성도들의 입장과, 또한 마귀와 그의 모든 능력들과 더불어 싸우게 될 것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였으며, 만일 성도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 그것에 대하여 세목별로 적절히 적용하고,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의심할 것 없이 그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상황으로 주어질 것이기에, 바울은 이 주제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성과 변덕과 끝없는 방황 속에 깊숙이 빠져 우리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연민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나 상황에 대하여 투덜거리며 불평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두 발로 굳세게 서서, 남자답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의 일원임을 깨닫고, 주님의 전투에 참가하여 싸우고 장차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속의 영원을 통하여 그토록 영광스러운 승리의 열매들을 누리도록 택하심을 입은 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2. 오직 한 길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의 결과로서 불가피하게 연루하게 되어 싸우게 될 그 싸움의 성격 가운데 일부를 깨달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싸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존재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째서 이 세계가 이러한지, 그리고 어째서 이토록 많은 사건들이 발생하는지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전쟁 마당이며, 그곳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복지를 위하여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엄청난 영적 싸움에서 전투를 치를 방법에 대하여, 성공적으로 싸워 나갈 수 있는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주목하여야합니다.

 

 

 

사도가 제시하는 그 방법이란 “너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싸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모임과, 기관들을 증설하며, 꾸준히 노력하며 투자하지만 점점 더 해결될 전망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세계는 지금 도덕적인 문제가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고, 기독교는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적인 방법으로 보더라도 기독교가 하향세로 나타날 때면 언제나 세상의 도덕적인 문제와 같은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은 상승 추세를 보입니다.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이나 국제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전쟁을 추방하려는 어떤 세계적인 기구에 대한 모든 낙관론적인 언급을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현실에서,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들 역시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의존한 상식에 의해서 세상이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만일 세계가 상식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면 전쟁이란 없어야만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란 모든 관점에서 볼 때, 돈의 낭비요, 생명의 낭비이며, 모든 논쟁을 중단시키는 가장 유치한 방법입니다. 실로 이러한 상황을 치료할 어떠한 치료법도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만이 홀로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접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선하고 온전하며, 깨끗하고 도덕적인 존재가 되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저 존경을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인 사람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심령이 깨끗하며”,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온전하도록 되게끔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이며, 기독교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와 같이 되며, 그가 사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이루어 가는 삶을 자랑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신의 부족과 무능함을 잘 알고 있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부족을 자기의 부족으로 알고, 서로를 세워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기를 원하며, 서로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며, 서로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인 것처럼 마음 깊이 아파하고 위로합니다. 그들은 한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어떠한 방식으로 좀처럼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알기 때문에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존하여 그의 지시에 따라서 모든 일을 해결해 나가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하여 성령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이 강하여 진 것으로 착각함으로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는 시도를 함으로서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정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게 될 때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어떤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처지와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 잘 알기 때문에 그런 품격에 맞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소속된 나라는 천국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장소가 어디이든지,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그것이 도덕적으로, 혹은 신비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지, 어떠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성품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며, 그것은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서 주어진 신적인 것이라고 까지 할 수 있습니다.

 

 

 

 

3. 마   귀

기독교는 다른 어떠한 종교와도 섞일 수 없는 배타적인 종교이며, 오직 홀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어떠한 도움이나 조력도 필요하지 않는 오직 유일한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길이며, 완전하여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싸움이 격렬할 것과 치열하고 무시무시한 성격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엄청난 싸움에 참가하여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마귀와 더불어 씨름하고, 맞서 싸우고 대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맨 처음으로 해야만 하는 일은 공격들을 격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적대하는 원수 노릇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공격을 계속적으로 물리쳐야만 합니다. 비록 일시적인 승리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젠 끝났으니 좀 편하게 쉬면서 휴일을 즐겨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바는 이것이 인정사정 없는 냉혹한 전쟁이며, 이 전쟁에서 모면할 자가 없기 때문이 우리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이 싸움과 투쟁과 전쟁에 휘말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대적하고, 계속하여 공격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우리가 승리하였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계속하여 그와 같이 서기 위하여 노력하며 애쓰고, 든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하는 원수 마귀가 우리 주변에서 항상 도사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마귀와 정사와 권세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으며 지옥의 무리들과 더불어 씨름하고 있지만,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수가 있으며, 우리는 버티어 나갈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도 여전히 굳건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 안에서 내가 안전할 수 있다는 것과 주님의 최후의 궁극적인 승리가 항상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으로서 자신 있게 싸움에 임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위경에서도 굳건하게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마귀에 대한 설명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왕에 대한 비유를 하셨는데, 그 왕은 자신의 적이 가진 힘을 참으로 이해함이 없이 싸우러 나갔으며, 따라서 충분한 지원도 없이 싸우러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왕은 패주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눅14:31~33)

 

 

 

우리 주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준비 없음이야 말로 극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인데, 그 말씀은 지금도 동일한 원칙으로 우리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우리를 대적하여 맞서고 있는 우리의 대적이 가진 힘과 세력에 대해 알아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체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 일을 함에 있어서 마귀는 우리들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를 먼저 생각하며 시작해야만 합니다. 마귀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개체이며, 초인간적인 인격체로서, 인간보다 훨씬 거대하고, 인간보다 훨씬 강하며, 인간보다는 훨씬 막강하다는 사실도 매우 분명하게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천사의 한 부류였으며,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서 천상에서 쫓겨난 존재로,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서 두목이며, 우두머리로서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으로서, 강력하고 엄청난 힘과 능력을 갖추고 있어 그가 울부짖으면 모든 피조물들이 몸서리 칠정도로 잠재력이 큰 세력입니다. 이들은 교활할 뿐만 아니라 힘과 큰 권세에 있는데, 실제로 마귀의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에 다음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가 이런 큰 권세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①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것이 그들의 주된 활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② 적대자로서 “너의 대적 마귀”라고 불려집니다.

③ 유혹자로서 우리를 유혹하고 오도하게 합니다.

④ 성도들과 싸우는 자입니다.(계13:7)

⑤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⑥ 강력한 인격체로서(엡6:13) 왕국을 형성하여 왕가를 이루고 있습니다.(눅11:17~22)

⑦ “공중의 권세를 잡은” 강력한 자요, 왕국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종들의 무리를 거느린 강력한 권세의 실제적인 왕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고립된 세력이 아니며, 자신의 대리인과 그를 대리하고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그 마귀와 그의 명령을 기꺼이 수행하는 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대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지배 밖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 세계, 또는 하나님께 반역한 세계, 즉 하나님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가 조직된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세상,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 밖에 있는 세상을 실제로 다스리고 통제하는 권세와 대적하여 맞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는 마음을 굳게 하여 마귀와 그 세력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휴일이 없습니다. 일어서고, 기도하고, 확신 가운데 든든히 붙들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성경: 엡6:10-13절(2)

 

 

 

 

6장10~13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 마귀의 궤계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인간의 타락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이 영적인 역사에서뿐 아니라, 어떤 역사이든지, 곧 이 세상의 모든 역사에 대한 유일한 열쇠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과 그의 군대에 대적하는 세력으로 존재하는 마귀와 그의 군대와의 싸움의 기록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알아 볼 것은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는 일을 유일하고 주된 목적으로 삼는 마귀의 그 명령과 통제와 권세에 따라 움직이는 이 모든 종속적인 권세와 군대들에 대한 것입니다.

 

 

 

마귀는 스스로 교만하여 져서 자기를 만드시고 생명과 존재와 권위와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투기하게 되어 타락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형벌을 받게 되어, 어떤 범위 안에 갇히게 되자, 이것은 그의 증오를 자극하여 하나님께 대한 원한을 품고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안에 혼란을 야기 하고자 하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최고의 야망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하도록 그의 능력이 미치는 한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사역 가운데서 최고 정점인 사람보다 더 우수한 것은 없습니다. 원래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아 지상에서는 하나님 아래 있는 최고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귀의 매우 특별한 공격 목표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와 성경에 있는 교훈을 통해서 볼 때 마귀가 인간에게 그의 주의를 집중하고 있으며, 마귀의 목적은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켜 인간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마귀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욥기 1:7에서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모든 곳에 있지 못하고 편재해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할 수 없으므로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의 졸개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귀신들에 의해서 마귀의 일이 수행되어 지며, 어떤 때에는 그 일을 직접 수행하기도 합니다. 또한 마귀의 권세는 제한된 권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그의 큰 권위와 권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최고 권위 아래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것은 신비이며, 아무도 그것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목적 가운데 한 부분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불가해하신 지혜 가운데서 마귀를 들어오도록 허용하셨으며, 어느 정도의 권세를 행사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에 마귀를 멸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마귀의 권세는 하나님에 의해서 언제라도 제압당할 수 있는 제한된 권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귀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상태를 보면서 이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어떤 일에 대하여는, 하도록 허용하시는데, 실제로 가끔 어리석은 인간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신다고 성경에 아주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으시며, 가끔 사용하시어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시고 또한 하나님 자신에게 완강하게 반대하는 백성들을 벌하시기도 하십니다.

 

 

 

이제 마귀가 어떻게 이 능력을 행사하고, 그의 전략과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마귀는 어느 정도 자연까지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욥기서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마귀는 태풍도 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동물들에게도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거라사 지방에서 돼지 떼에 대한 행위로서 알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우리에게 훨씬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마귀의 이 교활하고 무서운 권세의 나타남입니다. 마귀는 인간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하여 교활함을 이용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더욱 교활함을 이용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은 정신인데, 정신은 인간이 본래부터 타고난 성품의 한 부분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주로 본능에 의하여 행동하지만 인간은 사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추리하고, 증명하고 연구하고 논리적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본래부터 타고난 성품의 일부분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여러 가지 면에서 고귀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에게는 여전히 정신과 능력이 있는, 인간이 받은 가장 고귀한 선물이므로 마귀는 인간의 정신에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① 마음을 혼미케 하여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도 변장하여 우리에게 나타날 수가 있으며, 또는 직접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넌지시 비춰주고 슬며시 들어와 교묘히 환심을 사는 방법도 사용합니다.

② 마음에 적의와 증오와 신랄함이 있게 하여 진리를 믿을 수 없게 하고 반대하게 합니다.

③ 하나님의 일과 명령을 의심을 갖게 합니다.

④ 공포의 영으로서 우리를 억누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그리스도를 부인 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는 생명을 잃게 될 것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⑤ 충동적인 거짓 교훈을 합니다. 그는 미혹하게 하는 영,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데, 이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많은 영들을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⑥ 마귀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비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낙심시킵니다.

우리를 과거를 회상케 하여 이미 용서 받은 사실을 들추어내어 반성하게 하는 등, 우리가 용서 받은 사실을 의심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의심하게 하며, 우리가 무가치하고 부정하여 우리의 삶이 실패라는 것을 느끼게 하여, 비참하고 불행하게 느끼도록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모든 사실들로 인하여 비참하고 불행하다는 생각으로 낙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악한 자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일 뿐이며, 의기소침, 낙심, 패배감 그리고 완전한 절망감은 일반적으로 마귀의 활동의 결과로서, 마귀를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됩니다.

⑦ 그러나 마귀는 그 정 반대되는 활동의 또 다른 출현도 합니다.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하는 방식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분을 우쭐하게 해주는 영예심을 주기도 합니다. 마귀는 어떤 일에 대한 공로를 부각시켜서 교만하게 하여 타락으로 유도합니다. 하와에게 그렇게 했던 마귀는 다윗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3) 정욕과 악한 욕망으로 인간을 유혹하여 그의 도덕적 본질 위에 역사하기도 합니다.

  4) 그 밖에도 다른 많은 계책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육체에도 역사할 수 있음을 욥기서 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다양한 것들은 마귀가 그의 궤계를 발휘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혼란과 혼동을 일으키고 인간들을 사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려고 준비하신 축복으로부터 그들을 떼어 놓으려는 그의 사악한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주 안에서와 그 힘으로 능력으로 강건해 지는 일”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매우 냉혹하고, 간교하고, 지적이고, 능력 있는 원수와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이는 악한 날에 우리들이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함입니다.

 

 

 

 

2. 간교한 원수

그런데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비추어 보나 또 주께서 마침내 마귀를 멸망의 못에 집어 던지실 것을 분명한 사실로 알고 있는데, 왜 아직도 흑암의 권세가 그렇게 완강하며 적극적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 대답은 마귀의 본질적인 취약점이 그가 굉장히 현명하고 간교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패배한 장본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굉장한 지혜와 위대한 힘을 가졌지만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기에 아직도 자신의 노력을 고수하고 있으며, 여전히 하나님을 공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알고 있는 자신들이 최후를 맞이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되기를 바라며, 혹은 그 일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최후까지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할 때 내어 쫓겨났지만 우리 주님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항했고 비록 물러섰다 하더라도 최후에까지 습격을 되풀이 하고 있으며 오늘날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어그러뜨리고 파괴하는 데 그의 정열과 야망을 불태웁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님을 공격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마귀는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를 결박하고그의 군대를 가두시며 욕을 보이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던 ”입니다.

 

 

 

사단은 거기서 실패한 후 심지어 부활의 영광이 있는 시간에도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남은 일이라고는 우리 주님의 구원 사역을 파괴하는 것임을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은 교회가 설립되고 유지되는 가운데 잘 나타납니다. 교회는 형성되어져 가고 있는 새로운 강국이며, 하나님께서 마귀를 공격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준비하신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뒤따라 올 분명한 사실은 이제 마귀의 특별한 관심거리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모든 개개의 지체들을 파멸시키고 침해하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러운 사역으로 탄생한 물과 말씀으로 이루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고 있는 놀라운 실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은 최초의 창조보다 더욱 경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교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만일 그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릴 수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을 공략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마귀가 매우 특유한 방법으로 공격하는 가장 중대한 목표물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마귀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또 하나님께 속한 “택하신 족속”들을 구속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역이 실패로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할 기본적인 명제인데, 우리가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될 수록 더욱 많은 사단의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리가 임종의 자리에 있을 때까지일지라도 사단이 공격을 한다고 하니,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합니다.

 

 

 

 

 

성경: 엡6:10-13절(3)

 

 

 

 

6장10~13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 깨어 있으라.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 자체가 다소 건전할지라도 교회에 소속된 개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 즉 마귀의 독특하고 단독적인 활동에 대하여 고찰해 보겠습니다. 마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려는 욕망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데는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대규모로 공격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공격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어느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나 그리스도인 집단을 속박과 불행한 상태로 빠뜨리는 데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풍요하신 은혜에 대한 증거를 훼손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귀의 궤계”에 대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인의 진리위에 굳게 서야 하며, 그리고 진리의 이면에서 교활하고 음흉함으로 성도들을 여러 가지 경로로 공격하는 마귀의 궤계를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 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어 있어서”(고전16:13) 낮과 밤 간단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로는 권고의 말씀을 “읽기에 힘써야”합니다.(딤후3:15)

세 번째 로 우리는 “범사에 헤아리고”, 모든 영을 믿지 말고, “영들을 시험”해야 합니다.

네 번째 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기도에 관한 것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눅18:1)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결코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고 항상 기도함으로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빛과 교훈을 받기 위해서, 자신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영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속적인 훈령과 권고를 끊임없이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기도를 게을리 하면 우리는 즉시 마귀의 궤계에 빠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자신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의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는 기도로 깨어 있는가?”, “우리는 성경 읽기를 힘쓰는가?”, “우리는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형식적으로 수행하게 하는 것도 마귀의 궤계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공격하는 경로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에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정상적으로 좇는 확실한 경로를 가지고 있는데, 그가 비록 영리할 지라도 이러한 면에서는 독창력이 없습니다.

 

 

 

첫 번째 로 지성이 그의 중요한 길입니다. 만약 거기에서 우리를 속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나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고귀한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경로는 경험을 따라옵니다. 경험의 세계는 감정, 감동, 감수성, 욕망, 심상, 의식들로 이런 것들이 우리 생활의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며 이것은 마음보다 더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생활하는 가운데, 지적인 요소보다는 다소 경험적인 면에 더 큰 관심과 비중을 많이 두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경로는 실천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처신, 우리의 행위, 우리가 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하기를 삼가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실천하는데 있어서는 지성과 경험에 아주 많이 의존하게 되는데, 마귀가 이런 세 가지 경로를 따라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는 하나의 경로로만 들어오지 않고, 또한 항상 같은 경로로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가 항상 같은 경로로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한 방면에서만 그를 저지할 준비를 한다면 그는 분명히 어떤 다른 경로로 올 것입니다.

말하자면 앞문을 지키고 있다면 뒷문으로, 두문을 다 지키고 있다면, 창문으로, 그것마저 제거했다면 뒷 창문, 다음은 굴뚝, 또 다음은 어떠한 틈만 있다고 해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입니다.

 

 

 

모든 문을 다 잠가 버렸다고 생각하여, 방심하고 아주 잠깐이지만 창문을 열고, 혹은 앞문을 열고 바람을 쐬고자 하는 그 틈에도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한 마귀의 주요한 세 가지 경로는 거의 무한히 세분될 수 있다는 것, 즉 한 가지의 근본적인 원리가 있는 반면에 그 원리 안에 있는 변화는 거의 무한대일 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성경: 엡6:10-13절(4)

 

 

 

 

6장10~13절: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 군사로 부르심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용이한 것이 아니라 투쟁의 연속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궤계로서 그리스도인을 올무로 빠뜨리려 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상세히 보아왔습니다. 원수의 특성과 계략에 대해서 미리 경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위해서는 필요합니다. 복음은 진리의 어떤 부분도 숨기지 않으며 그릇된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늘 실제적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칩니다.

 

 

 

성경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지적할 때에 참으로 놀라운 경고를 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말씀을 계속하여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경은 그것이 싸움에 관한 진리일지라도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며 그것을 감당할 뿐 아니라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사도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대항하는 모든 악의 권세가 이 세상에 있거나 혹은 공중에 있거나 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고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승리가 확실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2) 우리 자신이 약하다는 것과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마귀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는 그를 결코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 되었던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 스스로 마귀를 대적하여 이긴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안에 있게 되면, 그 입장을 달라집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를 능히 당해 낼 수 있는 것이며, 마귀는 우리를 손가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강건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육체 속에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내 속 사람은 본질적으로 약하며,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르시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사실이라는 것과 내가 무서운 능력과 대항한 싸움에 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알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는 강하시고, 능하시며,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능력의 위대함을 먼저 알고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는 말씀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의 힘의 능력에 의해서”라는 말씀에서 “”이란 말은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것, 즉 타고난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능력”은 그 힘의 표현을 의미합니다.

 

 

 

힘은 날 때부터 잠재해 있던 것이지만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효능을 과시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비축되어진 큰 체력과 재능이 어떤 일을 함으로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부적 능력 그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천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체로서는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이지만, 우리가 새 사람을 입고 주 안에 있게 됨으로서 주 안에서 이런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 힘을 발휘하여 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이런 승리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 속한 전쟁

구원은 하나님의 위대한 설계이며 계획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일로서 우리는 단순히 부르심을 받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위치는 하나님의 큰 군대 속의 한 개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사실상 나와 사단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대한 전쟁 속의 한 개체로서 하나님의 병사로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전을 세우지도 않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싸울 수도 없으며 단지 지휘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의 방법에 따라서 그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전체의 형세가 급변하게 됩니다. 만일 자신을 위해서 싸우는 자신의 전쟁이라면, 그 전쟁은 언제나 참혹한 패배만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크고 강한 군대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지도자이신 주님이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상황은 완전히 급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육과 악마의 공격에 직면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 있으므로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며, 그것은 그분의 크고 거룩한 이름의 명예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는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사단을 꺾고 결박시키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은 언제나 승리하시는 분이고 실패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예수님의 품안에서 안전한 자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기에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사단은 우리의 털 끝 하나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대적하여 싸워서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힘으로써 설 수가 있습니다.”

 

 

 

 

3. 누가 싸우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세상과 육과 마귀에 대적하는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와 어떻게 관련 되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과 혈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자리에 서서 권력과 이 세상의 어둠을 지배하는 자와 정신의 나약함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견하여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한마디의 말에도 주의해서 해야 합니다. 싸움은 우리를 위해 저절로 행해지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직접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시작할 때에 주께서 그 힘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과 나의 활동의 완전한 결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주께서 내게 주신 능력 안에서와 그 능력을 통한 나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 있어야 하며,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성경 구절 히2:18, 롬8:26~27, 고후12:1~12, 빌2:12~13, 갈2:20, 빌4:11~13, 행18:9~10, 행23:11, 딤후4:16, 계12:11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두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싸움에 임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싸움에 임할 때에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힘을 받아서 싸워서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결단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그분이 주시는 힘의 능력으로 싸울 때에라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다니엘 11:32에 보면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 업적이 이루어지는 동안 팔짱을 끼고 방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북돋우고 자신을 분기시키며, “내가 할 일”에 대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계시록 2~3장에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 주님은 한결같이 “이기는 그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진다고 하셨으며, 첫 번째의 경우에는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은 일곱 교회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겨야 한다는 교훈이며,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대에 평안히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대신 오직 승리의 열매를 거둬들이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양육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훈련하고 실천함으로서 우리는 마귀와 대항해서 싸우는 이 싸움에서 그와 같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필요에 따라 주시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과 보증과 평화와 확신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 도움을 주시는 은혜를 받으며,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편에 계신다는 지식에 대하여 풍부하게 경험하게 될 뿐 아니라,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주어진 일, 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주님이 명령 하신 것에 대하여 우리가 순종함으로서 그 일을 행하고자 하는 그 순간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실 때, 그에게 요구하는 명령을 순종함으로서 바로 고침을 받는 장면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그 명령에 따를 조건이 아니었지만, 주님의 명령이 있을 때에 순종함으로서 힘이 주어져 그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그 때에 능력의 힘이 주어져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피해야 할 일들

① 힘의 낭비를 피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못 사용하고 낭비하여 버린다면 그 결과로 우리에게는 힘이 없게 될 뿐 아니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열심만을 가지고 있는 일 또한 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논쟁과 말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②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한 가지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다른 영적인 일들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문을 읽는데 소모하는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거나, 어떤 대화나 사람과의 교제, 자신의 칭찬을 들을 만한 어떠한 일에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영적인 일에 몰두할 시간이 없어지고, 독서할 시간이 없게 됨으로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우리의 성격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절대적인 법칙임을 알고 어떤 세상적인 분위기에서, 가령 TV를 시청하거나 라디오를 듣는 시간들을 너무 많이 허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실천하여 왔던 것과 같은 그런 일을 즐기지 않고 있거나 영적 예민성이 상실된 것과 같은 영적 결핍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며, 생명력과 원기와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 말씀과, 독서와, 기도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③ 질병과 나쁜 영향력을 피해야 합니다.

 

나쁜 교제를 피해야 하며, 전염이 활발한 장소, 병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쁜 영향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④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적 힘을 소멸시킬 것이고 그 결과로 우리는 병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그릇된 태도만큼 영적 원기와 능력에 치명적인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11. 그런즉 일어서라.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없는 세상 사람은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이 마귀와 그의 군대의 공격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마귀가 우리에게 유별나게 극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우리는 결코 놀라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놀라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무서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적대하는 마귀의 능력이 너무 크고, 무섭고 너무 강력하고,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놀라지 말라는 권고를 받게 되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메시지 중의 경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도 약하여 그들을 당해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과 그 힘의 능력 안에서 우리를 무섭게 하는 그들을 대항하여 일어설 수가 있고, 더 나아가서 승리를 쟁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를 무서워 할 필요가 없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무섭게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피와 주님과의 관계의 결과로서 우리 속에 있는 능력을 마귀가 인식하게 된다면 마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가 유혹하고 괴롭힐지라도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로는 우리가 악에서 떠나야 하며, 철저하게 순종하며, 주님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 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후퇴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결코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에는 뒷문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원수에게 결코 등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 는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그곳에서 항상 빈틈없이 행동해야 합니다. 자기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는 근신해야 할 것이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귀에게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단 한 마디라도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우리는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이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로 이와 같은 싸움에 참가한다는 것이 특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 있을 뿐 아니라,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토록 놀라운 우리들에게 주어진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견디어 낼만한 가치가 있는 “선한 싸움”이 될 것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왕국과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영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해 볼 때에 그 전쟁이 지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 지어다.”라는 말씀과 함께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씌워 주실 것이기 때문인데, 그 면류관과 왕관은 싸움에 이긴 모든 승리자와 그들이 주님의 전쟁에 참가할 특전을 부여받고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영광스런 군대 안에서 싸움을 계속하고, 계속해서 서 있다고 깨닫고 있는 모든 남녀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싸움에 임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서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원수의 교활한 공격에 대한 방어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전신갑주를 입으려면 갑옷을 입고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체력과 힘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기 전에 반드시 주안에서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져야만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갑옷”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단순해 보이는 다른 사람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문젯거리가 우리에게 부딪혀 오면 우리는 다소 그 해결책을 알지 못하여 패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만이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 전신갑주는 “진리”, “”, “믿음”, “구원”이라는 말에서처럼 이것이 특수한 유형의 갑옷이라는 것이며, 이 갑옷을 입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인뿐이라는 특수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전신갑주를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입고 우리의 영혼이 조금도 방심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의 크고 영광스러운 구원으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장비를 완전히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6:14-17절

 

 

 

 

6장 14~17절: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 진리로 허리띠를 띠라.

허리띠의 용도는 헐렁한 옷을 한데 모아 결합시켜서 단정하게 허리에 맴으로서 축 늘어진 옷을 고정 시킴으로서 옷이 그의 행동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군인은 모든 행동과 활동에 방해를 받지 않게 되며 한 손으로는 방패를 잡을 수도 있고 또 한 손으로는 검을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띠는 군인에게 안정감을 주고, 그가 준비가 되었고 긴장 되었으며 정신을 바짝 차려서 행동을 위한 힘을 얻었고 모든 것이 순서대로 제 위치에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가 진리로 허리띠를 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말씀으로 굳건히 하며, 그 말씀 가운데서 질서 있게 행동하라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으며 어떤 권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이성도 감성도 아니며, 그것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우리의 이성도 감성도 모두가 실패했으며, 그것은 완전한 사람이었던 사람이 실패함으로서 증명 되었습니다.

 

 

 

 

2. 의의 흉배

흉배는 그 당시 로마의 병사가 일반적으로 목 밑에서부터 허벅다리 윗부분까지 길게 늘어지게 착용하는 것으로서 흉부와 복부를 덮는 가슴에 대는 방패로서 사용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몸을 보호하는 갑옷 위에 착용함으로서 몸의 여러 기관들을 보호하도록 하는 갑옷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흉배는 영적으로 양심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도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제거할 수 없으며, 항상 그곳에 있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도 물론 이것을 알고서 우리가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양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공격하는데 매우 신속합니다. 우리는 의의 흉배를 붙이고 양심을 보호해야 하며, 선한 욕구와 의지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의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칭의입니다.

 

 

 

 

마귀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우리의 죄 된 상태로서는 도저히 의인이 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에 그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어떠한 세력도 그리스도의 의에는 결단코 침범할 수 없으니 그의 의를 입어야 합니다.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의의 흉배는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마귀의 참소에 대한 보호물로서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께 참소할 뿐 아니라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도 고발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그의 공격에 대항하여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에는 다가와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말을 할 것입니다. 너는 기도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너의 악한 행실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갈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런 죄를 짓고 그런 실패를 하고, 그렇게 불순종하고서 용서를 빌러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야비한 짓이다. 그리고 우리를 철저한 범죄 의식을 주어 전혀 소망이 없는 것처럼 하여 절망과 자포자기의 의식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안간 힘을 다 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법을 따라서 행동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또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로우며, 거룩하시며, 합법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 놓으셨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탄원하면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며 회개하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사랑하는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절하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합법적인 의의 흉배입니다.

 

 

 

 

3. 믿음에 굳게 서라.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한 부분으로서 이제 세 번째 부분인 발의 부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데, 많은 지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며, 그 가운데 발의 역할 또한 어느 부분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일 수 없는, 우리의 믿음은 전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부분들이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발은 다른 지체들보다 초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발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너무 중요하며, 우리의 가슴이 아무리 강력하고 허리가 아무리 훌륭하며, 손과 팔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균형을 잡아주고 전신의 안전을 위해 순발력 있게 움직일 수가 있으며, 그 모든 지체들이 다른 위치로 옮겨 갈 때에 그 필요성은 더욱 실감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발은 보호되어야 하며, 튼튼하게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합니다.

 

 

 

당시의 로마 병사들은 일종의 샌들을 신었는데, 이 샌들 밑바닥에 징이나 못이 박혀 있어서,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고 든든히 설 수 있도록 해 주며, 또한 그 당시 전쟁에 아주 흔히 있었던 장치로서 나무 조각이나 막대기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거의 보이지 않게 똑바로 세워서 땅 속에 박아놓는 올가미나 덫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샌들을 준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동성입니다. 군대와 전쟁의 가장 위대한 대장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더는 BC 4세기 경에 살았는데 그는 자기의 적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거나 둔하고 느린 방법으로 이동하고 있는 동안 재빠르고 갑작스럽게 그의 군대를 이동시킴으로서 크게 승리하였는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여 서서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중하고도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각오가 있어야 하며, 우리의 결심이 굳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신발”을 신고 굳건히 서서 원수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냉담한 채로 양다리를 걸친 상태에서, 은혜는 갈망하면서 의무는 싫어하고, 특전은 원하지만 책임은 회피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해서도 안 되고, 계속해서도 안 됩니다.

 

 

 

확고하고, 굳건하고, 단호하고, 확신 있게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서기를 원한다면, 맨발로 달려 나가지 말고 징이 박힌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궤계”와 “정사와 권세”들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의 악마 같은 교묘함, 즉 위장, 꾸밈, 치장, 겉모양, 가면, 재빠른 변화, 등등과 싸우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는 단 하나의 안전한 방어물이 있으니 그것은 항상 준비하고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는 것이며, 그것에 더해 “평안의 복음의 신”을 장비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신을 신는다.”는 것은 확신과 신념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방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안일한 생활이 되어서도 안 되며, 결코 명목뿐이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강하고’, ‘서고’, 남자답게 처신하기 위하여 불렸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영적으로 느릿느릿 하거나 발이 무거워서도 안 되며, 발을 질질 끌어서도 안 됩니다. 성공적인 전진을 함에 대하여 게으르고 활기 없는 그리스도인의 행실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에 임함에 있어서 이와 같지 않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생명력이 없고 활력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인 싸움에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지 않은 모습과 비교가 되는 사항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스포츠나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 적극적이며 열광하는 모습들을 흔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 예배드리러 가는 그 걸음이 그렇듯 가볍고 열광적이며, 기쁨과 활기로 가득 차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전반적인 삶에도 적용을 해 본다면, 그들의 삶이 이렇듯 무겁고 힘에 겹고, 느릿느릿 할게 아니라, 생기로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용사처럼 가볍고, 날렵해야 하며, 생기가 넘쳐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를 향해 돌진하는 군사들의 모습입니다.

 

 

 

 

4. 믿음의 방패

우리는 이제 여기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에서 다른 부분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 와서는 새로운 전환점으로서 대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모든 것 위에 또”라는 말은 “이미 언급된 갑주의 세 부분들 위에 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모든 것 위에”는 뒤따라 나오는 모든 것, 즉 믿음의 방패뿐 아니라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을 의미합니다.

 

 

 

갑주의 세 부분은 움직이지 않도록 몸에 고정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러나 다음 세 부분은 그것들을 몸에 고정시키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필요로 할 때에 취하여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방패는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상대의 일차적인 공격을 막아 내는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서 그들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 필요한데, 그 곳에서 우리는 적들에게 화전을 사용할 수가 있는데, 화살을 쏠 수도 있고, 창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사용하는 화전은 돌발적인 습격이 될 수도 있는데, 특히 우리의 생각을 타고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대한 악한 생각이나, 불경한 생각들, 예기치 않았던 자신의 의지와 전혀 다른 어떠한 생각으로 타고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만 집중하려고 할 때나, 경배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데만 집중하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게 합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마귀들이 던지는 화전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마귀들은 종종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모독적인 생각을 자지게 함으로서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우리는 이러한 화전의 공격들을 막아내기 위해서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들고 그것들을 막아 내야 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들은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용할 수가 있어야 하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에 대하여 결코 의심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 될 것이며,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으로 인하여 모든 것에서 건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손에 잡고 마귀의 화전들을 막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방패를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게 되고, 그 은혜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그의 능력으로 인하여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5. 구원의 투구를 쓰라.

이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군사들이 착용한 도구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의 머리, 곧 지성과 두뇌와 지혜와 사고를 보호해 줌으로서 우리의 감정과 감각과 정서와 욕망을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이 싸움 전체를 포기하고 싶어 하도록 할 만큼 피로와 권태감을 일으킴으로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는 끝이 없는 이 싸움에서 아무런 보람도 없고 아무 소용이 없으며, 노력과 상처는 헛되다고 생각하고 절망하거나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투구로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으며, 그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활력이 넘치는 삶 가운데,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으로 인하여, 이 모든 악한 세력들과 대적하고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악한 세력들과 싸울 수 있으며,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7. 성령의 검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갑주들 중에 “성령의 검”이라는 대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다른 갑주들은 몸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해 주는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방어하는 목적이 아니라 적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적극적인 방법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의 검을 휘둘러 적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는 공격용 무기로 “성령의 검”을 착용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귀를 얕잡아 보거나 무시해서도 안 되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드로 후서 2장 11절과 유다서 1장 9절에 있는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해서는 안 되는데, 미가엘 천사장도 모세의 시신을 놓고 마귀를 상대할 때에 그를 거스르는 훼방하는 송사하거나 판결 하지 않고 주께서 꾸짖으실 것이라고만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대적하고 있는 이 큰 원수의 힘과 능력과 세력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을 유념하여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는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마귀를 두려워하거나 그들의 거대한 능력과 권세 때문에 완전히 무력감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서서 대적하되 “성령의 검”을 사용하여 마귀가 우리로부터 도망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의 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서, 기록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것은 성령이시니,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에 성경의 말씀으로 그들을 대적하여 승리를 쟁취하셨던 것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제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며, 그 말씀을 해석하게 하셔서 마귀의 간교한 계책들을 깨뜨려 버릴 수가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를 찬양하기 위하여 성령의 검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 엡6:18-20절

 

 

 

 

6장 18~20절: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귀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며 투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마지막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실 때 이와 똑같은 투쟁을 하셨습니다. 마귀는 우리 주님을 공격했고 모든 힘을 다하여 주님을 대항했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이 싸움과 투쟁에 필연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모든 어려움과 문제들은 끝이 나고 좋은 날만 계속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출발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리와 거의 반대의 생각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전에는 알지도 못했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이런 식으로의 씨름과 싸움을 해야 하며, 우리가 어떻게 성공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마지막 권고인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이제까지 다루어 온 것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서 갑옷의 한 부분은 아닌데,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전신갑주를 사용할 때나 싸울 때, 마귀와 육체와 이 세상과 투쟁함에 우리의 모든 처지에서 실제로 해야 할 어떤 것입니다.

 

 

 

 

갑옷의 여러 부분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착용하고, 기록된 방법에 따라 사용하고, 그 모든 것 위에 더하여 항상, 언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쉽게 미혹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있으면, 어떠한 세력들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여, 그것을 착용만 하고 있으면 방심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것인데, 마귀들은 그 전신갑주들을 하나씩, 하나씩 우리에게서 벗겨낼 것이고 무장 해제 된 상태가 되었을 때에 우리를 점령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상태에서라도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은 전신갑주를 사용하여 대적하는 무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그들을 상대하여 물리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과 생생한 관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지 못한다면 이 모든 조각이 그 자체로서는 우리에게 전혀 만족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사용할 줄도 모르고, 그것을 착용하고 있음에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진리의 허리띠 =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에 대한 크고 영광스런 진리

② 의의 흉배 =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교리

③ 평안의 복음의 신 = 정열적인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경이적인 사실들

④ 믿음의 방패 = 마귀의 화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⑤ 구원의 투구 = 복된 소망

⑥ 성령의 검 =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지고도 우리는 실패하며,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말이며, 그러한 것들을 모두 다 갖추고서라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운영하여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기도로서 주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최종적인 위치는 기도의 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 한다는 것은 참된 기도의 진수이자 생명이며 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한 습관에 젖어 의식적으로 기도하거나, 말만 내 뱉는 중언부언 하는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롬8:26,27)

 

 

 

이 말씀과 같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기도를 주장하시고 조성하시며, 기도드릴 수 있고 빌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시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이렇게 행하시며 소원을 주시고 생각을 명하시며 기도케 하시고 지도하시며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부여 하십니다. 이것이 늘 참경배가 되게 하고 기도와 찬양이 되도록 하며 우리 안에서는 온화한 심정과 자유스러운 특징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주어질 때 기쁨과 환희로 충만해 집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자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정돈하고 간구할 것들을 헤아려 기도하지만, 그것은 단지 골격과 발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갑자기 성령이 임하시면 자아가 사라지고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오며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고 계심도 알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영역 속에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와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참된 기도가 있을 때 우리는 원수 마귀와 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기고도 남게” 될 것입니다.

 

 

 

 

2.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

우리는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권고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21~24까지는 사적인 문안이며, 이 서신의 위대한 교훈은 20절에서 끝이 납니다. 사도 바울이 특별히 기도에 대해 지적하면서 끝을 맺는 것에 대하여,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기도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무 이상의 의미가 있어서, 성도들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삶의 궁극적인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하여 너무 많은 교훈들을 접해 왔었고, 에베소서를 강해하면서도 기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여러 번 다루어 왔음을 기억합니다.

또한 바로 전의 단락에서도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우리가 필요한 힘과 능력과 여러 가지 것으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즉, “중보의 기도”를 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모두는 동일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 즉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모든 성도와 함께 차지한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적과 대항하고 있으며, 똑 같은 문제들과 어려움에 처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기독교는 절대로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나 혼자만 몰두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직면하고 있는 이 싸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며 여기에 우리가 가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의 문제들, 나의 어려움들, 나의 두려움들, 나의 희망들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스스로 좌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나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것이라기보다 아주 거대한 왕국의 전투에서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전쟁을 생각할 때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처지나 자신들에 대해서 적게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를 훨씬 더 유익하게 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싸움에 가담한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 깨닫는 것만큼, 우리가 강해질 수 있는 척도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병적인 자기 본위를 인정하고,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을 정확하게 분별해서 새로운 영혼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대항해서 싸우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주님의 군사로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성도들도 분명히 이와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옥을 대항해서 하늘이 요동하는 거대하고 신령한 십자군으로, 하나님의 거대한 군대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관점에서도 드러나는 것은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되기 때문에 우리 중에 한 사람의 실수가 그 효과를 전 대원에게 미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더욱 의미심장한 말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약함과 성향과 넘어지기 쉬운 인간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기도해 주기를 겸손하게 당부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지금 이 순간 복음전도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성령 안에서 온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할 뿐 아니라, 전도자들이 그들의 환경과 여건이 어떻든 간에 해야 할 일인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간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다음에 바울의 순수한 개인적인 추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최종적인 축도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심이 없고 티 없는 진실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했고 가장 귀히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언제나 주님만이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모든 사람 위에 은혜가 있기를” 축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오직 “아멘, 아멘” 할 뿐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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