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3(마틴로이드존스)

수호천사1 2016. 7. 9. 22:13

성경: 엡3:18-19절(2)

 

 

 

 

3장 18~19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5.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


우리에게 이제 남아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에 도달 할 수 있을는지에 관한 건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그 영광에 이를 때 우리가 놀라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데, 이는 우리가 알고 깨닫게 될 것에 관하여 놀랄 뿐 아니라 우리가 이곳 지상에 있는 동안 무지했다는 것에 관하여 더욱 놀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에게 처했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즐거워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다른 것들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체험할 수 있는 놀랍고도 축복된 경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도록 얼마나 방치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점에 대하여 권고하기를 “그의 강림하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질 상급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으니,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에게 상급이 주어질 텐데, 영원하도록 보존될 그 상급에 대하여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지상의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들을 자랑하고, 사랑하며, 누구든지 그 자녀들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모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우리를 통하여 또한 우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기계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동판매기와 같은 기계는 영적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도들의 경험이나 체험, 혹은 어떤 깨달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텐데,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만을 고집하여 반복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기계적인 견해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가 축복을 받은 경로와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와 똑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어쩌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가 개인적인 관계를 다룰 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적인 교제의 영역에서는 기계적인 방법이 가치가 없고 오히려 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것이나 그와 같은 경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어떤 것,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때와 장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축복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면 “저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에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와 같은 사고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축복을 명령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와 은혜로서 축복을 분배하여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수는 있어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단의 시험도 함께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 마귀는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온갖 힘을 다하여 어린아이로 머물러 그리스도와 가장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단 속에서 만족하도록 하는 데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 합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할 때 마귀는 그 일을 굉장히 염려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좋은 칭찬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성장하게 되면 마귀의 나라는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마귀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를 억누르고 자기 하수인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맹렬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마귀를 대항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에베소서 마지막 장에서 표현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기를 구한다면 마귀는 그의 부하를 풀어 우리를 대적할 것이며, 이제까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마귀의 음흉한 궤계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고 전하는 즐거움의 체험과 기도회에서 찾아오는 체험, 찬송을 부르면서 느끼는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알게 되는 체험,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체험들이 위험하게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깨달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를 실망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이 다르듯, 청년시절의 문제들은 중년시절의 문제와 다르며, 중년시절의 문제들은 노년시절의 문제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다른 영역에 있게 되며 다른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초기 단계에서 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일을 그 다음 단계에서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아주 똑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집회나, 책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의존하여 어떤 좋은 감정이나 작은 행복감을 체험하는 것에 만족하여, 주님 자신을 구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6. 손님맞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영역에서 특별한 영역으로 성큼 올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 없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특수한 것에까지 도달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디매오가 행한 것처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시급하고도 명백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며, 어떤 점에서 성경의 주요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나 주님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읽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할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기계적으로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또는 그렇게 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읽는다면 아마 조금도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에 일정량을 읽었기 때문에 자기만족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능이나 소질들을 사용하여 읽어야 하되, 성령의 조명과 감동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읽기 전에 자신에게 훈계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경 읽기는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수한 말씀을 통해서 갑작스레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경책에서 나오셔서 친히 성경을 읽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 읽기에 있어서는 사색과 명상, “마음의 준비”,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마음과 갈망하는 기대, 그리고 어느 곳에서라도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원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는 어떤 면에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자유로움을 좀더 풍부하게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전에 무엇을 아뢸 것인가 미리 묵상하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무척 중요한데, 이것을 회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생한 응답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새롭고 더 받고 싶은 축복과 은혜를 원한다면 간구하기 전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것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일도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고 몹시 싫어하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붙잡고 늘어진다면, 그리고 그것들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에는 전심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고 하셨고 잠언 8:17에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시편에서는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원리로 주님의 임재하심에 대하여, 그것을 찾고,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느라, 기도하느라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든 것을 행하기에 너무 바빠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 무디고 반응이 느리며 분주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에 매우 조용하고 고요하게 오십니다. 성령은 모든 새 중에 가장 온화한 비둘기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거룩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항상 사랑의 충만하심만을 표현하시는 것은 아니며, 오직 사랑에 대한 세미한 암시만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장 세미한 표현에 대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은 한 가지 판에 박힌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해 주십니다.

사소한 날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지극히 작은 그림자나 암시를 느끼자마자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온다 하더라도 즉시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충동이나 혹은 기도의 요청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미한 사랑의 감동이나 암시를 느끼자마자 즉시 반응을 나타내고 행동하며 그에게 복종하며, 그분이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즉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분은 자주 오실 것이며, 나타내 주심은 더욱 분명하고 뚜렷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드러운 접근 중 하나라도 거절하거나 깨닫지 못해서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우리 마음속에 다른 소음이 있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시며, 주님을 밖에 세워 두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항상 준비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갈망하고 대기합시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가장 확실하게 찾아오시며 손수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7.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이제 우리는 기도와 간구의 영역에서나 또는 체험의 영역에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질 때에만 완전해집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에서 그 완전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전부를 소유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인간의 원죄였습니다.

 

 

 


누구에게도 전가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 영원성이 있고, 불변성과 편재성이 있으며, 전지성과 전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성함이 있으니,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고후 11:31) 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모든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빛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위엄과 권능에 있어서 영광스러우신 분입니다.

 

 

 


성경은 “영화로우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즉 하나님의 위엄과 광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광채와 위엄과 영광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을 때조차도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들었으며, 단지 하나님의 “”만을 보도록 허락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영을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압도되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과 위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모든 속성들은 그분의 필수불가결한 속성이며 모두 다 분명히 전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가될 수 있는 속성은 사람에게 부여 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여됩니다. 그것은 거룩함이며, 또한 의, 정의, 공의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성은 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충만하신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과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에 대하여 충만해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앎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주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순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노력으로 강건해져야 하고, 그 다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충만하심으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게 해 달라고 단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에서도 이와 똑같은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우리가 그러한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계신다면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충만하심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적인 표현은 참으로 빈약하며, 우리의 지성과 이해는 참으로 좁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바라볼 때에 참으로 진리는 존재한 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는 진실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부가 그분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내 안에 질적인 생명으로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8. 충만의 체험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의 일상생활을 돕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본질적으로 실제적이며, 확고한 실체로서 우리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상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신비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시급한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충만한 것과 능력으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활동이 증거합니다. 어떤 점에서 1738년 5월 이전의 존 웨슬리보다 더 바쁘고 더 많은 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 졌을 때 그의 전체 봉사가 변화되었고 그는 능력 있는, 그리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이야 말로 가장 실제적인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실제적인 사람은 항상 분주하고 흥분하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부흥입니다. 교회가 능력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부흥될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교를 그들의 삶의 앞면에 두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삶의 뒷면에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급할 때에나 찾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이나 혹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몹시 아프거나,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되었거나, 어떤 재해가 일어나거나,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의 필요를 충당시킬 것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예금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활용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지배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외적인 모든 행동을 지배하시며, 우리의 전 생애를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선으로 결말이 날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을 하고 이 새 생명의 원리를 우리에게 주입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순간 새로운 본능과 소망, 새로운 목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것들의 성취를 보기를 갈망하게 되며, 점차적으로 성취되어 만족하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결핍과 공허와 부족의 감정이 없으며,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떠나 지상에 오셔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대화하고 논쟁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알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엡3장20-21절

 

 

 

 

3장 20~21절: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질 수” 있기를 원하는 간구에 대한 응답이야 말로 가장 위대합니다. 그것을 요청해 왔고 기도해 왔으므로 그것이 더 넘치도록 하여 주실 것을 믿고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으므로 사도는 이 송영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간구를 드려왔던 것에 대한 응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러한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데, 그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매우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깊이 감동되어 그러한 일을 사람들에게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소망으로 그의 영혼과 마음이 벅차 오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찬송을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이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구원의 창시자요, 부여자이신 하나님, 즉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는가? 우리는 바울과 같은 감정과 사상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는가?

바울의 기도에서 여러 가지 간구를 읽은 후에 그리고 그 정상에 이른 후에 우리는 그 송영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는가? 사도가 그랬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은혜를 찬미하고자 하는 이 억제할 수 없는 소원을 느끼고 있는가? 사도가 그랬듯이 굉장한 가능성들이 이 현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열려 있음을 깨달음으로 우리도 감동되고 전율을 느끼는가?

 

 

 

 

우리는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지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혹시 그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말에 도취되었다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 일들이 매우 예외적인 사람들, 가령 사도 자신 또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송영에 내포된 바울의 권고는 우리를 돕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신앙 수준까지 내려와서 연약하고 무지하고 불신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돕고자 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것에 더 넘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간구하되 가장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요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것들도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교회가 무엇이든지 뜨겁게 간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서게 될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무한한 능력과 사랑으로서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은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간구를 제한 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아무도 그를 구원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어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걱정하여 수년 동안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 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엡4:1-3절

 

 

 

 

4장 1~3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1.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새 장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의 새로운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처음 세 장의 전반부는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구원의 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사항을 독특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는 우리의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서 시작하는 이 말에서 신앙과 실천을 분명하게 서로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어떤 부분에 대한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공부해온 1~3장까지의 모든 말씀에 대한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부해 온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살아가야 할 생활을 안내해주는 접속사로서 기독교인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실천적인 삶을 영위할 것을 지적하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며 행해야 합니다.

 

 

 

 

2.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우리는 앞서 기독교의 교리와 체험이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어떻게 일으켜 주는가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생활의 성격에 대하여 고찰해 볼 차례입니다. 사도는 먼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음에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16절까지 하나씩 계속해서 말한 후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보다 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일반적인 해설을 하고 난 후에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 원리는 생활에 들어가서도 적용이 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곧바로 구체적인 일로 뛰어들기 때문에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대할 때에 먼저 일반적인 원리들을 찾아내고 그리고 난 뒤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일로 나가야 합니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더 중요하며, 그 부분적인 사례들을 하나씩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건들은 결코 그것을 고립시켜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잘못된 길로 빠질 우려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언제나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반적인 원칙들을 분명히 하고 난 후에야 구체적인 것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일반적인 사실에서부터 파악해 보며,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가 각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합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두 가지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 단어는 “조화의 사상” 을 말하며, “어울리는”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실생활에서 교리나 실천의 어느 한 쪽에 전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조화를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즉 그리스도인답고,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부름에 합당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름을 받은” 그것입니다. 참된 소명은 어떤 사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불려짐을 당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부름을 받은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자요, 신분이 새롭게 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의 영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있는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며, 성령께서는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알게 해 주시고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데, 결국 이 말은 우리를 믿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은 6:44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도 그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부르심이 없이는 우리가 그에게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역사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는 자로서 살아가야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항상 우리의 행동과 처신을 주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경이롭고 고귀한 부르심을 입었으므로 우리의 생활은 그 부르심에 맞고 그 부르심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실의 첫 번째 일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도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니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방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 다음 구절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인데, 단지 우리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하거나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런 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라는 말씀을 상기토록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우리 아버지의 명예와 영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된 몸의 지체로서, 참으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사실상 “여러분은 내가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지금 실제로 갇혀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할 일을 내가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는 것은 내가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이지만, 내가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그 참 뜻을 완전히 깨달아 알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문제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성도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3. 영적 연합의 길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전반부의 세 장에서 다뤄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 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제일 되는 목적으로 주어진 말씀이 통일의 문제로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모든 행위와 처신보다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는 문제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우정이나, 형제애, 동지애의 정신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진리에 토대를 둔 진리로 통일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서 “” 이란 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인간적 우정의 정신이나, 운동 경기에서 한 팀이 단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성령으로부터 창출된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서 창출해 내셔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연합된 그 통일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성령님의 고유 사역으로서,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신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세상에서 말하는 연합이나 합동과 전혀 다른 참된 통일로서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인 연합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연합이나 합동은 어떤 주어진 목적을 위해서 이질적인 분자들이 함께 모이는 외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활동하는 내적인 연합입니다.

 

 

 


그것은 꽃이나 나무나 동물의 육체에서 볼 수 있는 통일성에 견주어 볼 수 있으며, 또 본질적으로 유기적이며 생명력 있는 것으로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연합에 대해서는 이미 2장에서 다뤄 왔으므로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이 연합의 정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명의 현상에는 내적인 원리가 먼저 있고, 그런 후에 외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육체로부터 나온 생명을 가진 두개의 매우 작은 세포가 성장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육체는 각 지체가 하나씩 모여서 우연히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중심 되는 생명으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영적 연합의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 할 수 있는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근본적으로 무형의 것이면서 참으로 무어라고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나타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성령이 내주하시는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육체를 통하여 영혼과 정신이 나타나는 것은 연합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서 “힘쓰다” 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을 살펴보면 “근면하다” 입니다. 이 말은 속력을 암시하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를 서둘러야 하며 그 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하며, 열심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을 입은 이 부름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대하여 서둘러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결코 그것을 잊지 말고, 이 일이 우리 생활의 가장 주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4:4-6절(1)

 

 

 

 

4장4~6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 그리스도의 몸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왜 우리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만 하는가에 대하여 충분하고도 저항할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데만 자기의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의 놀라운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가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서 우리들을 바로 잡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라고만 생각하여 몇 사람씩 작은 파당을 조성하고 나누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헤치는 행동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교회가 하나의 연합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이런 일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세 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면서 “하나”라는 낱말을 7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수로서, 완전의 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신성의 완전함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세 개씩 짝지어져 있는 각각의 모임들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안에 있는 각 위를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처음 세 개는 성령께 대한 것이며, 그 다음 세 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아는 것은 우리가 이 통일의 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우리들의 매일의 실생활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6절에 나와 있는데 마지막 말씀을 잘 관찰해 보면 그 말씀 속에는 통일의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소심하고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먼저 우리의 신분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에 위치하도록 하셨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이 해석의 문제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순서입니다. 먼저 성령을 말하고 그 다음에 성자, 그리고 맨 나중에 성부 하나님을 말함으로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단체요 공동체인데, 그는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위치였는가 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좀더 차원 높은 단계, 즉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우리가 유일하신 중보자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자께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성자는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4절의 주제가 되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통일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를 “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교회인,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다수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은 많은 몸을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이같이 교회는 오직 하나의 완전하고 신비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이 교회는 여러 대륙과 여러 지방 출신의 모든 종족과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구성 되어 있고, 이러한 다양성이 있을 지라도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교회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와 전 지상의 모든 종족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이 전 세대를 통한 교회로 존재합니다. 신분이 어떻든지, 얼마나 탁월하고, 얼마나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하든, 부자이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충만함으로 이 몸 하나에 다 들어있습니다.

 

 

 

 

몸의 각 부분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매우 다르게 보입니다. 외관상으로도 다르고 기능이 다르지만 그것들이 모두 함께 소속되어 있으며 모두 다 몸의 필수적인 부분들이라는 이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한 몸 안에는 여러 다양성들이 있지만 서로 이질감이 없이 조화롭게 통일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데, 만일 몸의 한 부분이라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면, 그 몸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떨어질 수 없고 나누어질 수 없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 한 성령


우리는 이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두 번째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만일 교회가 몸과 같다면 그 몸은 어디서 온 것이며, 어째서 그 몸이 형성되었으며 생기게 되었는가? 그 몸의 생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 몸을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유기적인 조직체가 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말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 자신의 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몸의 한 중심에 계셔서 전 유기체에 생명과 삶을 부여 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의 통일에 대한 이 교리가 참으로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그리고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령은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악령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 삼위이시며 거룩한 인격으로 교회의 통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으로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 또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3인칭의 “그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이시며, 성자 하나님과도 동등한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본질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계적이지 않은 것은 생명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2:21~22에서 성전 건물의 건축에 쓰일 돌들이 모아져서 건물로 지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 되어졌다는 것을 읽어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채석장에 있는 돌들과 같아서 그것을 실제 건물을 지을 때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연석 그대로의 돌은 사용할 수가 없어서, 사용처에 적당하게 다듬어진 후에 건물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부분들이 될 수 있기 전에 준비하는 일이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될 수 있기 전에, 혹은 하나님의 성전의 이 영광스러운 건물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사역을 생각해 보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기 전에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 필수적인 이 예비적 사역을 확인해 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① 성령님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망과 동시에 자신을 반성하도록 합니다.

② 살리심과 중생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갖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③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빈천한 자리에 있다가 이 동일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니 서로 를 비교하거나 대조해 보아서는 안 되며 우리는 주 안에서 연합되어 한 소원을 가진 자로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하나가 되어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④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시키는 일을 하시니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12:13)

⑤ 성령께서는 친히 온 몸에 생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3:16~17), 또 “성령의 전”(고전6장)입니다. 성령께서는 몸의 유기적인 통일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시는 동시에 그 통일을 유지하시는 행위자이십니다. 그렇게 볼 때 성령은 우리 육체의 생명이나, 육체의 혈액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모든 지체를 함께 연결시키며 하나로 만드는 연합하는 영이십니다.

⑥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서 같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를 지배하심으로서 성령은 우리 속에서 그 자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성령의 열매들을 살펴보면 사랑은 언제나 연합을 하고, 희락 역시 즐거움으로 연합합니다. 또 화평은 싸움과 분열의 반대로 작용하여, 그것으로부터 오래참게 합니다. 그리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그 하나하나가 통일을 증진시킵니다. 성령께서 이 열매를 맺게 하실 때에 분열과 불화가 일어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연합하게 하여 통일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신앙의 부흥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반사역 위에 특별한 은사를 더하시는 성령의 특별 사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가르치는 능력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또 다른 은사를 성령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이 다 성령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만 진정한 통일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날에 임했던 성령의 강림 사건은 이 교리의 축제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령의 일반 사역 안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자기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고, 기도하게 하시며, 또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성화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령의 특별 사역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하여서나, 체험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사역을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성령의 보편적인 특별 사역은 일반적인 교회생활 가운데서 볼 수 있으며, 특수한 예는 교회 안에 있는 개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보편적인 특별 사역은 신앙의 부흥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해 볼 때 이 신앙부흥의 주제보다도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고 있고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를 위하여 유일한 소망은 신앙부흥에 달려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계획하고 어떤 운동이나 기구나 노력에는 전혀 소망이 없고, 그것은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성령님께 달려 있습니다.

 

 

 

 

신앙의 부흥에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조금이라도 재현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서 때로는 한 교회에, 때로는 한 지역이나 그 인근지역까지, 때로는 온 나라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인 성령의 특별사역의 효과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교회에 이름만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오늘날 이 신앙 부흥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시고 충만하심이 오순절 날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은 오순절 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31의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분명히 오순절 날에 일어난 사건의 재현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과 세례를 받고 믿는 자들과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 밖에 신약성경에 기록된 외에도 교회사를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신앙부흥만큼 교회의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성격을 그토록 분명하게 입증하고, 성령의 사역을 그토록 명확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적 부흥과 각성만큼 교회 내의 통일을 증진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부흥의 형태와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사도행전 2장의 서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신앙부흥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 후 계속되는 교회사에서도 “홀연히” 또는 “예기치 않은 때에”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일을 부흥시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신앙부흥은 인간이 이룩한 어떤 일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부흥의 시기에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도 어떤 특정한 인물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시는 사람은 인간이 선택하는 기준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위대하고 은사가 있고 특별한 어떤 사람만을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매우 겸손하고 별로 눈에도 띄지 않는 사람을 쓰시기도 하는데, 그들의 재능에 의해서나 어떤 개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는 조건에서 사용하셔서, 누가 보아도 그것이 성령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심으로 명예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신앙의 부흥은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자기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영광을 깨닫게 되고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복음을 믿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엄위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갑자기 새롭게 직통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셔서 그 온 집에 충만하시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상상을 초월한 일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며, 필설로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부흥의 큰 특징을 구분지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① 사람들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교리와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전에 체험해 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고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너무나 기쁨이 충만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이 자기들을 감동시키고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④ 그들의 성령의 충만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게 되었으며, 그 때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그들은 울며 통회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자들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갑자기 회개하고 회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열흘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깨닫고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으며 성령 충만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오순절의 사건이 재현될 것을 기도하며, 성령의 부흥과 하나님께서 또다시 권위와 능력과 권세로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모든 능력으로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도 놀라고, 교회 밖에서 비웃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깜짝 놀란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4:4-6절(2)

 

 

 

 

4장4~6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 한 소망


이제 우리는 사도가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강조한 세 번째 면인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은 하나이다.”라는 말에서 “몸이 하나이다.” 그리고 그 몸을 살아 있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몸의 생명은 “한 성령”이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 그 이치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는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필연적인 두 가지 이유 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께서 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일에 대한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가 최후의 목표가 아니며, 교회는 몸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인류를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백성으로 불러내셔서 완전하게 하시고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난 회복된 영광스러운 세계에서 살게 하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모든 것은 그 최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최종적 임재와 그의 영원한 왕국을 건설 하는 일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 한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의 그 몸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큰 날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 몸에 결합시키는 일, 즉 우리를 소생시키는 일 외에 개별적으로 또 다른 특별한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신 후에, 성령은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에게 보증해 주십니다. 또한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그 모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앞으로 다가올 큰 기업의 상속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거의 신분과 상관없이 새로운 신분이 주어지는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며, 현재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서도 안 되며, 다른 것들을 바라보거나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우리는 모두 한 가지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하나이며 언제나 동일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소망입니다.

 

 

 

 

5. 한 분 주님


이제 우리는 “주도 하나이요” 라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는데, 그 말씀에는 주님의 위격에는 유일성이 있다는 것으로,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와 같으신 분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절대적 유일성의 모든 영광 가운데서 오직 혼자이실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의 현상”이며, “충만한 광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인성과 신성의 두 본질을 동시에 가지신 오직 한 분, 곧 “한분 주님”으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신비로운 진리로서 존재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곧 이 한분 주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주께서 기독교를 만드시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로서 주님이 전부입니다. 기독교는 놀랍고도 유일한 성육신과 주께서 행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꼭 유의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분리하여 나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유일하며, 그리스도의 죽음도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든지 다른 어떠한 것도 첨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무 편협하다고 말할 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고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있을 수 없으며, 그와 비슷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면에서 적극적으로 편협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주께서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우리를 소유 할 수도 없습니다.

한분 주님만 있을 뿐입니다. 그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내가 주인이고 너희는 종일뿐이다. 그런데 내가 주인으로서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한 주인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형제로서 서로를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우리는 주인을 섬기는 자로서, 또 형제를 섬기는 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과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6. 믿음도 하나


사도의 두 번째 표현인 “한 믿음”은 “한 주”와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특별하게 분류한 어구 속에 같이 들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믿음”이 가리키는 뜻은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의 위대한 말씀으로서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유일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이 외에 다른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서 “한 믿음”에서 벗어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믿음”을 가지고 그 안에서 안식하며,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신 성령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7. 한 세례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첫 번째 설명의 말씀 중 세 번째 단어인 “한 세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는 이 요점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아무런 생각이 없이 우연하게 이런 식으로 단어의 배열을 하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말씀을 부연해서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주도 하나이요”에서는 주님의 위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믿음도 하나이요”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방법인 칭의와 관련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도 하나이요”라는 부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 되게 하는 일을 촉진시킬 수 있는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세례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로 인해서 자주 토론과 분열과 분리가 일어났던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세례가 중생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나, 세례의 형식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례의식에 관한 말씀이라고만 해석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배격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믿는 자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에 대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질문하였을 때, 베드로의 대답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여진 일이었습니다. 뒤에 가보면 빌립보 간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믿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더라.” 세례와 성찬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할 일이며, 우리가 지키는 성례는 그 두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두 가지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성례란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은혜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세례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 의미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유아 세례를 받았거나 성인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거나, 침례를 받았거나, 물 뿌림의 세례를 받았거나 간에 이 통일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례 행위의 자체가 무엇을 이룬다든지, 세례를 받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어떤 의미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통일의 요소가 됩니다. 우리가 강조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세례는 한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①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죄를 용서받고, 죄 씻음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②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왕국, 곧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속해 있으며 전혀 새로운 영향권 하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③ 그뿐 아니라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발표하는 것입니다.

④ 아담 안에서 아담과 연합하여 있던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죄를 벌하시고, 그의 의를 전가시키셔서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칭의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속하게 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⑥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영역에 대하여 죄의 권세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각기 살아계시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실체 속에 스며들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가 말한 “한 세례”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는 의식이나 어떤 마술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이름과 한 주님이 있을 뿐이며, 오직 한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늘에 오르신 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결합되어 있고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옛 사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살아계시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8. 한 하나님


이제 사도는 최고 절정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는 성령과 성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성부 하나님까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으로서 당연히 성령의 사역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자에게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주된 목적과 소원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이 진리를 경험적 순서에 입각하여 배열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진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분 하나님만 존재하실 뿐입니다. 그러나 신성 안에는 삼위가 있지만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한 신성 안에 삼위가 계신 것입니다.그것은 통일된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실제적인 결론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려고”,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모든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보다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옵니다. 즉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짐승들과 장로들과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여 경배하며 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얼굴을 가립니다.

 

 

 


하늘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하늘나라이며 거기에는 불화와 분열이 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절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은 행복하고 기쁘고 완전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땅 위에서도 우리가 이 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모든 차별과 분열은 즉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기타 모든 것은 빛을 잃게 되며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경이와 사랑과 찬양에 몰두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 함께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

통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만유는 “한 몸”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의 아버지이시며 믿는 이들만의 아버지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가 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로서 일반적 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부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인간의 우주적 형제성을 믿지 않는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아버지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은 이미 배웠던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질 성전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성전에 거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천사들도 이것을 알기를 열망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 엡4:7-10절

 

 

 

 

4장7~10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 그리스도의 선물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 는 권유로 교회의 통일에 대한 주제를 계속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권유합니다. 우리가 “통일”을 “일률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활기가 없는 일률적인 것은 참된 통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통일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장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6절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사도가 “하나”라는 단어를 7회나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그 말씀들을 통하여 통일의 위대한 원리를 정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7절에 와서 “우리 각 사람에게” 라고 표현을 다르게 합니다. 사도가 갑자기 하고 있는 이 말이 통일을 와해시켜 버릴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것은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이 우리 자신의 위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나, 구별할 수 없는 단단한 덩어리의 일부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통해서 하나됨의 위치에 있는 우리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자아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단위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들로서는 모두 하나이며, 모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데,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도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회심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특별하고 독특한 환경이나 특수한 구원은 결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이 똑같이 동일하며,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것은 우리의 통일은 모든 사소한 점에서까지 우리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같을 수가 없는 우리 모두는 각각 개인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개인적인 특성이 통일을 깨트릴 수 없고, 또한 통일도 개인들의 특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속의 은혜의 특별한 영광이며, 구속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나타내고 시사하는 특별한 현상이며 그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에 있어서 언제나 이 두 가지 원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 라고 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전체의 교회와 각각의 지체들이 향유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의 제공자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며, 또 이것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보증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라는 말씀은 오랫동안 인류를 대적하여 왔고, 인류를 속박하여 왔던 큰 원수들, 곧 마귀와 지옥과 죄악의 죽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오는 광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포로들을 통치하던 왕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포로가 되어서 끌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정복하려고 세상에 오셔서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전쟁을 마치신 후, 이 모든 포로들을 이끌고 하늘로 돌아오셔서 그의 환호하는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선물들을 부어 주시는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의 선물들을 나누어 주시는데, 이 모든 선물들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2. 구속의 드라마


에베소 4:9~10의 말씀은 시편 68:18의 말씀을 인용 한 것으로 그것은 거룩하신 우리 구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위대한 찬송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와 그의 군대로부터 건져 내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던 그런 놀라운 승리를 안겨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서 “올라 가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올라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올라갔다는 말은 그 전에 내려왔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에 관한 말씀으로밖에는 풀이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던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석상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다.”는 구절을 대할 때에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땅 아래 어느 곳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며, 지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지상으로 오신 방법을 사실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3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라는 이 말씀과 여기에서 올라간 자와 내려온 자에 대한 이 말씀은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씀이 아니고 땅에서 살기 위해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계셨으며, 바로 이 땅 위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며 그의 가르침에는 독특한 권위가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23에 보면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땅 아래 구덩이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땅 위에 있었습니다. 단지 주님은 “위에서” 났고, 그들은 “아래서” 났다는 것을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우리가 “아래”나 “아랫 곳”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분명히 위에 있는 하늘과 아래 있는 땅을 비교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사도는 이 여호와에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모든 하늘 위에” 라고 하는 사실적인 표현은 가장 높은 하늘이라는 뜻이며 지극히 높은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지극히 높은 장소”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하늘 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으로서, 하늘이 높은 곳인 것과 같이 땅은 낮은 곳이라는 비교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하늘 위”라는 곳은 없는데, 그것은 하늘은 하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어째서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이 모든 선물들을 주는 자의 위에 계시며,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교회의 주가 되시며, 주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 행하신 그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올라가셨고 선물들을 나누어 주는 위치에 계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먼저 땅 위에서 거주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이 땅 위에서 어떤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전체적 내용에 대한 서술로서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에 대하여 좀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한 참된 뜻은 주께서 어떻게 그 놀라운 승리를 쟁취하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선물을 나누어 주고 계시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인간들에게 친구처럼 행세해 온 마귀는 사실상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정복해 버렸고, 그때 이후로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서 속박의 상태로 붙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의 공포 아래로 떨어져,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노예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속박하는 우리를 정복한 원수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원수들을 정복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구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이 속박에서, 이 사로잡힘에서, 이 포악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내려오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아래 꿇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에 대한 말씀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전에는 땅에 계셨으며, 그 땅에서 살았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내버려 두고 오신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신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주께서 먼저 세상에 내려오셔서 원수들을 정복하시기 전에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순종하셨으며, 그 순종은 전쟁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죄가 없었고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셨으며, 40주야를 광야에서 혼자 원수의 우두머리와 치열한 싸움도 벌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율법사들의 적대 행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이었고 구속의 드라마를 이루고 있는 모든 내용입니다. 그는 한 번도 실패하시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셨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던 일입니다. 그는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갈보리에서는 사단의 최후의 수단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마귀는 그를 죽임으로서 제거해 버린다고 생각했으나 그를 패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파멸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마귀와 그의 모든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신 것은 바로 그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사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율법도 처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시느라고 주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매장되셨으며, 마침내 부활로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원수를 정복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인간적 본질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이끄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그는 그의 인간적 본성, 그리고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그와 함께 영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그곳에 주님과 함께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되는 교회”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은혜와 선물들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3. 여러 가지 은사


사도는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선물을 나누어 주셨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사도는 이 두 구절에서 우리가 교회의 생활과 활동 속에서 우리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풀이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두 가지의 원리로 나누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므로 그 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② 교회는 머리 아래에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 라고 한 내용입니다. 사도가 “주어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사도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아서 교회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혹은 사도로” 라고 표현한 것은 개개의 모든 회원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그 주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데 몸의 모든 지체는 각각 수행해야 할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하게 설명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들인 우리 모두에게 교회 안에서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는 각각의 특별한 기능을 발휘하여 온 지체가 각각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될 때,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형성해 가고 있는 이 몸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한 부분 한 부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지위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교회 안에서 점유하고 일하도록 부름 받은 어떤 특별한 위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교회에 속한 자로서, 이 가공할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의 관리자요 수호자라는 것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는 그 기능을 발견해 내는 일입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에게 이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7,11절에서 강조하듯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가 친히” 라고 함으로서 이 모든 여러 가지 선물들을 주신 자는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게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이것을 해야겠다, 혹은 저것을 해야겠다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시며,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재능을 발휘하고 있든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되는 것은, 주께서 친히 전 영역을 총찰하고 계시며, 그가 친히 온 몸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어떤 곳에 어떤 필요를 보았다고 해서 그것은 내가 완수해야 할 책임이라고 즉석에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책임을 맡겨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책임을 떠맡으려고 어리석게 달려들던 그 일을 어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④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혜는 다양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특별한 직책들을 두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며, 모두 주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내려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여러 직책과 기능들을 지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성격과 다양성까지도 확정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어떤 직책들은 다른 직책들에 비하여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직책들도 각각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몸에서처럼 어떤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만큼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이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더욱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기능들이 각기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전체로서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이 직책들 위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그 밖의 다른 직책에 종사할 자들을 선택하신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께서 이 여러 가지 다른 직책들을 세우시고 그 직책을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시고 여러 가지 기능들을 행사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그 특별한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기에 분명한 불평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직책들은 분명히 등급이 정해져 있어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 직책들은 모두 필수적이며,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계급제도와는 다른 것은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는 말씀에 따라 그들과 같은 지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자가 높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들을 주인이나 임금처럼 군주적인 권위를 가진 자처럼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뽐낼 것이 없고 낮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4.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


사도가 말하고 있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이 직책들에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직책에 속하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가 있고, 영구히 존속하는 집단에 속하는 직책으로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이 상이한 직책들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합니다.

 

 

 


  1) 사도


① 사람에게 부름을 받거나 임명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명 하신 일입니다.(갈 1:1, 고전 9:1)

② 교회나 교회의 대표자에게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사도직에 임명받은 자라야 합니다.

③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 계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④ 사도는 권위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자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들이며, 그들에게는 특별한 권위가 부여 되었습니다.

⑤ 또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계승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증거로 가룟 유다를 계승할 자로 맛디아를 임명하였지만, 그러나 그 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도의 직을 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의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2) 선지자


선지자 직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진리를 알려준 사람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실로 그는 진리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고, 또한 이 진리를 얼마간 무아의 경지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복음전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라는 그 당시의 용어는 현대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 전하는 자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사도행전 8장과 21장에 나오는 빌립이 복음 전하는 자였으며, 디모데와 디도도 복음 전하는 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전하는 자의 일을 하라고 일깨워 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 전하는 자는 분명히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깨닫고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과 힘을 받았던 자들로서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직접 임명한 자이고 일종의 사도들의 대역을 했으며, 어떤 임무를 주어서 파송한 자였습니다. 어떤 때는 빌립이 사마리아로 보냄을 받은 것처럼, 사도들 앞에 보냄을 받기도 했지만 보통은 사도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순회하며, 두루 여행하면서 교회들을 설립하였고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설립된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고, 진리를 보다 더 충분하게 설명하고 해석하게 하려고 사도가 전도자를 남겨 놓았던 경우를 자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설립되고 자리를 잡게 되면 이 직책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8세기 복음적 각성의 시대에는 이들을 “권위 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4) 목사와 교사


우리는 지금까지 특별하면서도 일시적인 세 가지 직책에 대하여 고찰하였습니다. 이제 영구적인 직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목사와 교사”의 직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직책은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직책들은 교회가 보다 더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 시작하여 그 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목사직은 일반적으로 다스리며 가르치고 지도하는 직책입니다. 그것은 양치는 목자에서 연유된 직책입니다. 목자는 그의 양떼를 치며 보살펴 주고,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서 꼴을 먹을 것인가를 지시하며, 다시 양 우리로 인도해 오며, 그들의 안전을 보살피며 이리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그 품격이 저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사는 영혼들을 책임 맡은 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주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는 양떼의 보호자, 관리자, 조직하는 자, 지도자, 다스리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실제로 교리를 가르치는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직책은 병행되는 것이며 또한 기나긴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보다는 목양의 은사가 더 많이 있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목양의 은사보다는 가르치는 은사가 더 많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따라 개인마다 다양합니다.

 

 

 


교회 안에는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며 동시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책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머리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있으며 그가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것입니다.(엡2:20) 그들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부르신 자들입니다. 주님은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사도로 부르셨으며, 자신을 핍박하던 자를 부르셔서 교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우리 주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4:11-16절

 

 

 

 

4장11~16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히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과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니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책들을 두시고 사람들을 그 직책에 임명하셨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목적 때문에 이 모든 직책들을 주셨고, 또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일로 분담되어 있는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어지는 길은 봉사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기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묘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회원은 성도입니다. 성도란 세상과 분리된 사람들을 의미하며, 실제의 의미는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자”는 그가 전에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 선택되어 구분되어진 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고 어떤 산을 거룩하게 하여 구별하셨던 것과, 성전의 성구들에 피를 뿌려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처럼 성도들을 세상과 거룩하게 구분하여 놓았습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개인적 소유물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부르시고 구분하시고 분리시키는 모든 과정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사실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부르신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제 “온전케 한다.”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근본적으로 이 말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적과 목표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직 온전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고 조정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글의 원 뜻은 “합하여 한 몸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말은 위골된 뼈를 맞춘다고 할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뼈가 위골될 때는 그 뼈가 붙어 있는 수족은 온전치 못합니다. 사도가 이 단어를 사용한 뜻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올바르게 맞추어져야 하고 알맞게 조정되어 각 지체가 완전한 상태로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각각 완전하게 될 때 전체가 완전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해 지는 역사가 모두에게서 진행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에 부합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전체의 몸이 조화 있고 안전하게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구절인 “봉사의 일”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운다.”는 단어는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건물을 건설하는 일과 몸의 성장을 서로 결부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봉사의 일은 신체를 건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봉사의 일은 영적 성장과 발전을 시키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봉사의 목적과 기능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지 못하고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회중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용기 없는 목사가 그들에게 속박 당하게 될 때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회중들이 목사가 해야 할 일을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께서 친히 결정하시고,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교인들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주께서 그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두려움이나 편벽됨이 없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봉사는 자기 자신들을 세우는 일이 되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 봉사의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며, 교회를 세우는 일이 목사들의 임무입니다.

 

 

 

 

2. 믿는 것과 아는 일


13절에서는 봉사의 여러 가지 직책과 그 봉사의 사역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이 되어지기 위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책이 주어졌고 그 직책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비유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여러 가지 직책들과 교회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하나가 된다는 말로서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이 일들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온전한”이라는 말은 “순수한, 성숙한, 완전히 발전한, 완전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 몸의 지체들로서 이루어진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완전한 상태에 있는 교회, 즉 머리의 온전하심에 부응하는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몸인 교회가 온전하여지고 성숙하여지고 장성하게 될 날이 앞으로 반드시 오게 됩니다. 온전한 사람은 언제나 온전하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그 몸의 손과 발과 지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로서 구성되어져 있으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 뜻은 온전한 몸은 몸의 지체가 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정하신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동일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의 모습을 보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가락과 손가락이 다르고 손가락과 손이 다르며, 기능과 능력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지체는 성장되어져야 할 크기와 발휘해야 할 기능에 장차 완전히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완전해 질 때 다시 말해 이 “온전한 사람”에 이르게 될 때 어떤 성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모든 성도가 안전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와 완성과 충만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자기 백성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는 몸의 어떤 지체도 빠짐이 없을 것이며, 어떤 지체도 은혜가 부족 됨이 없이 몸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충만하고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 속에 포함되어 있는 특권과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적당히 속해 있기만 해도 교회에 영예를 주는 것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따금씩 교회에 출석만 해도 교회가 영광스럽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주님의 충만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소요 되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이 충만함에 도달 할 수 있도록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과 은혜 가운데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목표는 “믿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 되는 일은 4장 5절에서 말한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는 구절과 조화가 됩니다. 이것은 나누어 질 수 없는 최소 단위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일에 하나 되는 일”에 도달 하게 될 때에 모두 그것을 확실하고 올바르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서둘러야만 합니다.

 

 

 

 

3.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


우리는 지금까지 봉사의 기능인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의 직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주께서 정하신 것이며,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온전한 사람”에 이르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또한 그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충만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우리의 장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의 “이제부터”라는 단어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종적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의 현재의 위치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을 잊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도가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라고 말한 것도 우리가 모두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새 생활이라는 사실을 다른 방법으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존재에서 교회에 속한 존재로 거듭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성장과 발전의 모든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린아이로 시작하여 거기서부터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요일 2:12~13에서 요한은 “자녀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라고 하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단계들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옛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게 되어 일생 동안 시작하였던 상태, 즉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끝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여러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불안전성인데, 그것은 물결에 밀려 요동하는 것과 같이 이리 저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금방 웃다가 금방 우는 것처럼 참으로 변덕스러우며, 참을성이 없어서 자기의 반응을 억제하지 못하며,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너무 지나치고, 때로는 사납게 반응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격렬하고 지나치게 행동하며 어떤 것은 아주 좋아하고 다른 것은 아주 싫어합니다. 두 번째로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속기 쉽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아이는 무식하기도 하지만 천성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훈련 받기를 싫어하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어린아이들은 천천히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참을성이 없으며 빨리 진보하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로 어린아이들은 신기하고 변화 있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여 본질적인 가치와는 상관없이 새것을 주면 이전의 것은 잊어버리고 손에서 팽개쳐 버립니다. 다섯 번째는 어린 아이는 오락과 흥분을 좋아하여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당장에 자기의 편이 되어주고 자기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 친척들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모든 어린아이와 같은 성향이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계속하여 온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모든 교훈의 풍조에 빌려 요동하는” 어린아이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4. 마귀의 궤계


우리는 영적인 어린 아이들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위험들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마귀의 궤술에 너무나도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들은 대응할 만한 힘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그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 일서도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교사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도 특히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에게 주는 하나의 큰 경고를 대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이것에 대한 권면과 경고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성도들을 삼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간사한 유혹으로 때로는 궤변과 술수로, 또는 세상의 풍습과 교훈으로,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으로 “뱀이 하와를 속인 것과 같이”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 교훈을 배격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교훈을 배우고 훈련함으로서 진리의 전신 갑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적 이해와 분별력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세대에 역사하는 마귀의 모든 궤계를 물리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몸 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를 그의 지체가 되는 무한한 영예를 누리게 해 주신 우리의 거룩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5.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이제 사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는 이 말씀으로 우리를 권고합니다. 여기서 “말하여”라는 번역은 옳은 번역이기는 하지만, 그 번역 보다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으라.”는 번역이 더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요동하지 말아야 하고, 그 밖에 어린아이와 같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고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항상 문맥 안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그리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단지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잡으라고 하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지가 견고해야 하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행동하여야 합니다. 진리를 붙잡는다는 것은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것을 붙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에 속한 것들이며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을 들여와서 그것들을 강론하고 그 사상을 따르거나 그것을 진리로 오인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애매한 것들로 인해 미혹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 안에서 연합하고, 중립적인 것들, 즉 본질이 아닌 확실성이 없는 것들 속에서 자유하고, 범사에 사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6. 자라나다


15~16절 말씀은 4:1에서부터 시작된 교회 안에 있는 통일성에 관한 사도의 말씀의 결론이며 최고의 정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말씀들을 고찰 할 때 우리는 전체의 문맥에 유의하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아야 하며 자라야 할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전체의 몸이 더욱 성숙하여져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조화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쪽만 성장하고 다른 쪽은 발달하지 못하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추한 모습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즉 모든 점에서 균형 있게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성과 이해력에서뿐만 아니라 감성과 느낌과 감수성도 성장하고 발전해야하며, 일년 전보다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서의 곤란과 어려움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어떤 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이 강의를 열심히 듣는데, 처음에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혼란스럽기까지 하여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계속하라는 충고를 받고 그렇게 합니다. 그는 앉아서 강의를 듣지만 아직 그다지 많이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갑자기 그는 자기가 그 과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며, 그때로부터 그 과목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과목에 숙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운 진리가 전보다 더 많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시키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냉랭한 상태 그대로 라면 우리는 심각한 결핍의 상태에서 정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주님에 대한 진리를 알면 알수록 그것은 더욱 우리를 깊이 감동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처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식으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함께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같은 비율로 같은 성숙도로 성장해야 몸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완전한 형태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머리와 몸의 각 지체가 충돌이 없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몸의 모든 지체가 언제나 주님께 기꺼이 순응할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지체는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것이 아니고 관절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여러 지체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상합한다.”라는 다른 용어를 추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위치를 고정하기 위해 밀착시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결국 “결합한다.”는 뜻으로 흔히 정신적 통일, 이해의 공감, 일치 등을 나타낼 때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는 “함께 연락한다.”라는 순전히 기계적인 용어에서 그의 강조점을 “일치한다.” 상합한다.” “밀착한다.”는 정신적 개념으로 약간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유기적 통일에 그리고 알맞게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 몸의 지체로서 우리는 연락하고 상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며 어떻게 유지 되어야 하는가가 문제인데, 그 대답은 사도의 기록 중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인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디”라는 말은 사람의 관절을 연상케 하고, “” 또는 “연결하는 고리”는 단지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과 에너지의 공급이 몸의 모든 지체로 흘러가게 되는 연결의 통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몸이 각 끈을 통하여 전달되는 공급에 의하여 연락하고 상합한다.”

 

 

 


그 다음 “공급한다.”라고 하는 용어를 살펴보면 그 말은 “풍성한 공급”, “과잉”이라는 뜻을 전달해 줍니다. 그러니 그것은 “풍성한 공급‘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것은 공급의 통로의 끈을 통해서 몸의 여러 지체에 효과적인 힘으로 도달하게 됩니다. 큰 지체이든 작은 지체이든 모든 지체는 각각 완전하게 충족됩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므로 더 이상 결핍이 없으나, 각 지체는 동일하지 않고 똑 같지 않아 그의 수용력에 따라 충족되어집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가 주어짐으로 공급받는 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 전체가 고르게 자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체는 머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공급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어떤 지체에 결함이 있다면, 전체의 발전이 방해를 받으며 완전하게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발전은 놀라운 상호관계의 결과이며 몸이 여러 지체 사이에 있는 유기적 연합의 결과입니다. 지체들은 모두 머리에 소속되어 있고 그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또한 몸의 지체로서의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병들거나 죄를 범하거나 무기력한 다른 지체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도 있으며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위적인 어떠한 방법으로 유지하려고 한다든지 부흥시키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 교회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니 인위적인 어떠한 것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엡4:17-19절(1)

 

 

 

 

4장17~19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1. 교리에 뿌리박은 실제 생활


우리는 여기서 이 서신의 새로운 대목을 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4:17에서 그가 앞에서 가르친 모든 것에 대한 실제적인 작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러므로”라는 말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를 다른 말로 하자면 “전에 말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전반부에서 배워왔던 그 말씀들을 언제나 적용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해한 것을 적용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의 말씀을 삶에 적용한다면 승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데, 만일 아는 것에 대하여 적용하지 못하여 실패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이 찾으실 것이라고 하셨고, 많이 아는 자에게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언제나 교회 안이나 밖에서 동일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경건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어야 하며 언제나 상호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어떤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이며,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교회와 구속의 계획과 구원의 전 체계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행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행실 자체가 아니라 이 방대한 체계의 차원에서 행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효력들을 무색케 하고 계시며 악한 마귀의 하는 일들을 멸하고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실패하는 것은 어디엔가 잘못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온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가져야 하는 관심은 단순히 선해지고 싶다든지, 어떤 죄악들을 제거하고 그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해지고 싶고, 심지어 승리하고 싶어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온전하고 완벽하게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실패한다든지, 내가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실패하고 있으며, “교회”에 대하여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실패하고 있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위대한 그리고 놀라운 목적을 실패하고 있다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끌어내리고 있고, 교회가 끌어 내려뜨림을 당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리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고 완전하고 전체적인 존재로 만드시고자 하여 “죽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실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삶의 허망함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가 전에 처하여 있던 상태보다 조금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든지, 교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저것을 행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가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새로운 본성을 받았으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것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할 때에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내가 이것에 대하여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안에서 증거”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말이 아니라 사도적 권위, 즉 신적인 권위로서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이렇게 엄숙한 방식으로 명령하는 것은 “다른 이방인들이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이라는 말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거듭나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부터 옛 것들은 지나갔고 새것을 맞이하였으니, 이제부터 성도들은 이방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이상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마음의 허망함으로”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가 여기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삶과 언제나 세상에 살고 있는 이교도들의 삶에 대한 무서운 묘사를 시작하는 어구입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고, 언제나 죽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르며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진노의 자녀로 영원한 미래에 대한 목적이나 목표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텅 비어 있어서 마음이 굳어지고, 그 마음의 눈이 멀어 총명이 없고, 무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기의 노예들을 너무나도 바쁘게 하여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이 멈추어 서서 생각할 때 사단은 그들이 올바르고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인해 그들은 그런 삶이 옳은 삶 인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현대인들이 사는 것의 모습을 보십시오. 텔레비전 인생, 시네마 인생, 마시고 뒹굴고 하는 인생, 낮고 천한 모든 사람의 삶, 찬란하게 비치는 조명들, 놀랍고 기이한 모습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관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때가 차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러한 유의 정신구조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고, 그러한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며, 그와 같은 정신 구조의 감화를 받아서도 안 된다.” 너희는 거듭난 사람으로서 다시 그러한 데로 되돌아가서 그러한 유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세상이 주는 흥미로운 것에 관심을 주지 마라. 그러한 것은 생각만 하여도 전적으로 텅 빈 것이고, 무모한 것이고,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함으로 행하며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 있습니다.” 가련하고 어둡고 미련한 사람들이 아무리 명석한 척하나, 그들의 논리나 토론이나 그들의 논문이나 그들이 써내는 책들이 어떠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명석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물거품이 반짝거림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어두움을 제거시키시고 그리하여 그들의 눈이 열려지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과 세상과 세상이 자랑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 엡4:17-19절(2)

 

 

 

 

4장17~19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3.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두 번째 요점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다른 이방인들”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다면 이 말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진술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생물학적인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선한 삶과 경건한 삶과 덕행 있는 삶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생명을 가리키는 다른 말 “조에”라는 고차원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말은 진정으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한 원리로서의 신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 있도다.”라고 말할 때, 그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생명,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생명의 원리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라고 증거했습니다. 거기서 사도 베드로는 정확히 자기의 방식을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비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생명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의 상실로 인하여 광야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참된 생명에서 떠나, 그의 존재의 원천에서 떠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라 단순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저 안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없이 그저 동물들과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스스로 사람의 생명을 다른 동물로 전락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는 잘 어울린다.)

 

 

 


그들은 낙원에 있지 못하고 광야에서 쉼이 없고 고통만 있는 만족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안에 그가 무엇인가 더 큰 것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어렴풋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기억을 제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의 불편함을 의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에서는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허망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 되는 고통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다른 모든 것에서 돌아서서 자신들의 시간을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온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더 알기 위하여 그들의 온전한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니 그들은 무지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들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시작하게 하신 것 같이 끝나게 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세상은 완전하게 창조를 받았으나 마귀가 와서 그것을 어지럽히고 손괴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그 마귀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모두 불 못에 던져버리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시는 면전에서 완전하게 멸망을 받을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임무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는 것이며, “깨어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고의 소리를 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알리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4. 이교 세계의 죄


우리는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불경건한 삶의 묘사에 대하여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묘사는 어찌나 날카로운지 경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의 관심은 그의 편지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에베소 사람들이 이교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그러한 유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어떤 면에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피하는, 즉 말이 무엇에 놀라면 펄쩍 뛰는 것과 같이 그러한 것을 보고는 펄쩍 뛰면서 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다루고 있는 큰 제목입니다.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전적으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도록 하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지함은 사람이 타락함과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함이라고 말하는 그것을 단순한 지식적인 앎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지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를 제공하여 줌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것을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이 무지함은 그들 “안에”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전체적인 삶과 사고방식의 전 체계를 주름잡고 있는 정복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발바닥의 굳은살처럼 마음이 그렇게 굳어져서 무감각해졌다는 뜻입니다. 처음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문제 되었던 것은 그들의 머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그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그들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이지의 영역을 떠나서 감정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입니다. 마귀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이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쉬운 요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의 굳어짐을 가져온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행하는 모습을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할 때마다 우리는 그 전보다 양심의 고통을 덜 느끼게 되며 감각이 무뎌져, 처음 죄를 지을 때의 그 고뇌가 다음에는 위기감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후회감과 반성하는 일로, 그리고 난 뒤에는 수치감으로, 그러나 같은 죄를 계속하여 범하게 되면 수치감은 점점 줄어들고 후회하는 것도 점점 옅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굳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삶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굳어진 생명은 무감각하게 되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러한 자리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삶을 지향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합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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