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2(마틴로이드존스)

수호천사1 2016. 7. 9. 22:12

에베소서 강해 2

 

 

마틴 로이드 존스

 

 

 

 

 

 

성경: 엡2:8-10절

 

 

 

 

2장 8~10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1~3절까지는 죄의 결과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행동과 행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모든 태도로도 그러한데, 사도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로서 죄와 허물로 죽은 육체의 원하는 것들과 마음의 원하는 것들을 체우며, 욕심껏 살아가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보다 더 악한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4~7절에서는 앞 절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조건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직 형벌 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조건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값없이 주시되 풍성히 부어 주신 사실을 증거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에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자신의 의지나 어떤 구원의 조건에 부합하는 합당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기독교회를 혐오하며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살기 등등 하였던 다소 사람 사울이었던 때를 뒤돌아보며, 옛날의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때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자신의 옛 모습을 살펴보면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또 어떤 구실로도 그것을 자랑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자랑하고, 자신의 출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선한 삶을 자랑하며, 선한 행실을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이 “내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눅 18:9)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실수들을 합니다. 그것이 무슨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그것들을 자랑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시험하는데, 그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결코 행위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한 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2. 그의 만드신 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어떤 사람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본문의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바울의 정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참되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이 말씀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착해지는 것이나, 착한 일을 하는 것쯤으로만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되라고 하지도 않고 그것만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이 자기들 각자에게 주어질 지위와 특권을 깨닫고, 그 놀라운 장래의 일에 대하여 즐거워하라고 권면을 하며, 자기들이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살라고 권고 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자신의 품격에 맞는 생활을 하게 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착한 행실과 같은 것들이지 결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만드신바”라는 말씀에서 우리들 자신에 관해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의 결과나 그것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솜씨로 만드신 작품입니다.

그 사실이 개인적으로 나의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그를 찾아 가셔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도, 왕들을 지으신 분도, 선지자들을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을 주신 분도, 성전을 짓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도, 때가 찼을 때에 아들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위대한 작가이시며, 위대한 공예가시며, 위대한 예술가 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창조자시요, 위대한 토기장이시요, 위대한 공예가시요, 위대한 조각가이시며, 위대한 조물주이십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분이 나의 생명 속에 전에 없던 것을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동등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치셨습니다.”(고후 4:6)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실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고 전달하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인격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생산 공장에 가서 견학해 볼 때에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점에 가면 팔기 위해서 내다 놓은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처음 과정부터 놀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된 작품인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생산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정확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을 보내셔서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것을 적용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일을 성령님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에 따라 순복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징계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을 바꾸시고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고쳐 나가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징계를 주거나 환경을 통한 고통과 환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성도들이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을 판단해 보고, 시험해 보고, 바르게 하는 일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병들고, 약하여 있다고 매우 노골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통해서 그들을 다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그는 어떤 자들은 자는 자들도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성도들을 다룸에 있어서 죽음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물이 없는 완전한 작품을 만드시기 위해서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기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가 살아 나가야 할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계속해서 죄를 제거하고 싶고, 적극적으로 거룩해 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어 하느냐는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엡2:11-13절

 

 

 

 

2장 11~13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장애는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있는 장애로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그들의 위치와 상태입니다.

 

 

 

 

이 두 번째 장애는 옛 시대에 있어서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는 두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둘 사이의 화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떠한 말이든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서로 함께 하나가 되어 무릎을 꿇고 같은 하나님과 같은 주님께 예배하고 경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전달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11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그들이 전에 “육체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문자 그대로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로서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분명 이방인 이었고, 유대인이 가진 표적과 상징을 가지지 않았으며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함으로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한 가지가 육체 안에 있는 표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할례 자체의 목적마저도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의 이 큰 장애물과 거침돌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육체의 차원에서만 말하는 이 사람들, 오직 사람의 행한 그 일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차원에서만 생각함으로서 자신들을 따로 떼어서 “우리는 할례당”이라고 말했던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무 할례당”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율법적인 문제는 우리 주님에 의해서 해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육체의 표징이 분쟁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고대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준 방식 그대로 동일한 문제들로 인한 분쟁과 쟁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떠한 제도나 방법들을 모색하며, 대화로, 혹은 글로서 수 없이 해결해 보고자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이방인이나 유대인, 또는 종이나 자주자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진리는 변치 않고 오직 복음으로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은혜와 같은 긍휼과 같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것들을 받고 함께 누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는 같은 분을 경배하고 있으며 같은 구원을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이후의 나의 충성은 내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충성도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향함으로서 우리는 같은 지향 점을 가지고 서로 질투와 시기와 분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오히려 다함께 그에게 가고 그에게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일을 해내는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참된 평화에 대한 오직 유일한 소망은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신 그분의 발 앞에 함께 모이는 것이라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제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국면 곧 어떻게 이방인들인 에베소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으며 어떻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새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데 동참했는가를 상세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과 할례의 표를 소개해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일을 너무 작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에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점에서 잘못 빗나가 외적인 표증만을 의미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육체에 있는 것이며 외적인 것으로,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어 모든 것이 잘 된 것이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 모두 잘못되어 소망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롬2:29의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이 할례의 전체 목적이 하나님 의중에 영적인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거나 인식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약속의 언약들 또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셨던 소망, 그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던 조건과 지위들은 아주 특별했으며, 그 외의 모든 나라들은 이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존재의 유무의 차원에서 그 모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는 것들을 그 자체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된 믿음의 때까지 갇힌”(갈3:23)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으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교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에 많은 자손을 낳았습니다. 땅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는 전 세계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나라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까지 하나의 중요한 의미로 볼 때 구분이 없었지만, 이미 가인의 노선과 셋의 노선 사이에 일종의 구분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시초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할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다른 한 편에는 이방인들로 구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서 그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동일한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성도와 동일한 후사들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해 놓으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고”,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으니 그 보다 더 악한 것은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오직 두 가지 입장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소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속이며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새롭게 주어지는 새 생명을 가지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천국이며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가까워짐


사도가 쓰고 있는 서신의 주제는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연약하고 작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눈을 밝히사” 우리가 이것을 진실히 알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첫 번째로 구원 밖에 있는 우리의 조건이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해야 하고, 두 번째는 구원의 결과로 인해서 되어진 우리의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12절에서 묘사된 구원을 떠나 있던 우리의 조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상, 죄의 결과로 인해서 도저히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위대성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더 예리한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구원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 순간에 당신의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실을 더 자랑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 만일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것이 전부가 됩니다. 그것에 비교할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특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지위의 영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13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의 가장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요약 가운데 하나를 대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것이 전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이전에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삶을 살았든지, 악한 삶을 살았든지, 그러한 조건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떠한 토양에서 자랐든지,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든지 그러한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훌륭하게 양육을 받았든지 그렇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아무렇게나 살아왔든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워졌는지, 내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 왔는지, 그것이 문제일 뿐 다른 어떠한 조건들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가까워졌는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확신과 신뢰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교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모든 복락들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4.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할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되어 찬송과 감사로, 그리고 흔들릴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과 신뢰로 인도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며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됨됨이나 행위의 결과들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의 선함과 우리의 도덕성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공공에 기여하는 사람들, 삶에 있어서 존경을 받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큰 희생을 치루면서 자기의 큰 소유를 포기하고 가정의 안락을 희생하는 사람들, 이들은 확실히 선한 일을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께 열납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열심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약마다 피로 인을 치셨고 그 피로 보증되어졌습니다.

 

 

 


구약을 읽어 보면 그것을 어디서나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과 성구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성별되었고 하나님께 봉헌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피를 뿌림으로서 인쳐 졌고 비준되었습니다. 새 언약도 같은 방식으로 비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때에 경외심과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들어간 것이니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2:14-17절

 

 

 

 

2장14~17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사도 바울은 이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는 말로 논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 말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구원의 문제 전체에 관련해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히브리서 13:20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오, 그의 독생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그 안에서 화평과 평강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왕”일 뿐 아니라, “평강의 왕”이시기도 하며,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우리가 1~10절까지의 말씀에서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11~13절 사이에서는 “죄가 언제나 분열을 가져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열 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4절에서 우리는 죄가 사람을 분리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더해 나가서 사람을 원수 관계에 놓는 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는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적대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정을 갖게 합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기독교 복음의 시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세우고자합니다. 사단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군가?” “사람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여 하나님은 너를 노예처럼 계속 붙잡아 매어두고 종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너 자신을 세우지 않으며, 어째서 너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는가?” “엎드리지 말고 일어나라!”


 

 


그래서 인간은 일어났고, 일어났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결코 일어서서 버티지 않아야 할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설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서려고 노력함으로서 타락으로 인도되어 그 결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교만과 자기중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하나의 신으로 세웁니다. 그는 자기가 자율적인 존재요, 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의 권리와 요구들에 의해서 말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관심, 자기 찬양, 자기 자랑, 자기주장에 대한 하나의 표증입니다. 그는 부단히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 주위에 쓸어 넣습니다. 자기 혼자 존재한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었을 것이지만, 모든 다른 “”가 나와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분쟁이 있고 투쟁과 질시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 목표를 놓고 동맹하기도 하지만 내분으로 가득 차 서로 대적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똑 같은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를 떠나서는 어떠한 화평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악한 영의 지배에 따라 조종되어질 수밖에 없고 사람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은 죄의 영향을 받고 있고 또한 병든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교육이나 환경을 통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화평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화평이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화의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누릴 수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된다는 또 다른 방식의 논리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고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화평의 복락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하며, 그의 몸의 부분으로서 생명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나가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 있는 중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막힌 첫 번째 분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두 하나로 받아들여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지체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하나의 명령체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만드시고 사람들이 적대감정에서 해방되도록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림으로 그것에서부터 구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2.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방식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라는 말씀처럼 그는 자신이 화평이시며, 또 화평을 만드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으로서 화평의 조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화평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화평은 실제적인 적대감정을 막는 일만 의미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으로 교회를 생성하고 만드시고 또한 존재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이러한 일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되어 존재케 되었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머리되시는 예수님이시고 교회는 물과 말씀으로 창조되기 전에는 있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막혔던 담이 헐어진 상태에서 교회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인해서 “새로운 사람들” 이라고 불리게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 입니다.

 


 


옛 것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우리의 몸에는 모두가 똑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어, 모두가 한 형제로 화평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로 동일한 사람들이 된 성도들은 “너와 나”라는 각자의 개념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같은 한 몸의 각 지체로 살게 되어 모두가 하나로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3. 유일한 중보자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모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며, 이런 일로 고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가 깨어지고 우리는 이 모든 고통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함께 화해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이웃들과 다른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되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신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기 전에는 두 번째 계명으로 주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코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목케 하다”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적대감정에서 우정의 관계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원수의 상태에서 다시 합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적대감정이 철저히 없어진 완전한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4. 원수의 상태에서 서로 합하기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 자발적으  로 완전히 일치되고 친밀한 위치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어떠한 것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화목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화목의 관계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을 “화목케 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성도들은 죄의 문제도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전혀 없는 분이신데, 나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손상시키고 있으며 그 죄의 행동은 나와 동반자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빛 되신 하나님에게 혐오스럽고 역겨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무서운 점이 죄가 교제를 손상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화목”이란 말은 우리가 교제 밖에 있으며 그 교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마주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화목은 우리의 어떤 조건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며 산출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떠나서는 어떠한 화목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다는 말씀이 그 요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위대한 축복의 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영예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는데, 그것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나 이적을 통해서 행해지지 않고 그가 죽으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이미 되어진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를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다른 말로 해서 그 길과 가능성을 만드신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그렇게 행하셨음을 말하였고, 그것을 선포하여 주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소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처럼 애절하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가능케 되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지상사역에서 주님 자신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진 메시지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선포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일은 가능하고 또한 이런 일은 일어났으며,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그것을 전파하셨고, 그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셨으며, 그들 앞에 그것을 세웠으며, 그들을 그곳으로 초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먼데 있는 이방인이나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똑같이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최고되고 제일차적인 요구는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죄에 빠진 사람은 안식이 없고 곤고하고 불행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사야 57:19절의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 지어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은 끊임없이 요동하는 바다의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바다와 같이 휴식이 없습니다. 

 

 

 


에덴에는 어떠한 요동도 없었으며 안식이 없는 것이란 도무지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인간에게 작용하는 한 가지 세력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와 교제하며 서로 교통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누리고 있었고 그의 생명은 평안과 불안이 서로 뒤섞이지 않은 상태에서 불행이나 걱정, 고통과 같은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은 무죄한 상태에서 완전히 평안하고 고요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다른 세력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복종하게 됨으로서 타락하여 마귀의 세력, 악의 세력, 지옥의 세력이 거기에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휴식이 없는 갈등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사람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마귀가 이런 공격을 할 때가 있고 우리는 공격을 받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폭풍이 바다를 때리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마귀와 그의 세력이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작은 생명들은 거대한 폭풍 속에 있는 바다의 물결처럼 이리저리 떠밀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환경을 통해서 전쟁이 오고, 질병이 오고,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려 죽거나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전복당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이 타락의 결과로서 주어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인간이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밑 빠진 독과 같이 채우고 채워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평화가 없습니다. 어떠한 학식이 있고 지성적이고 높은 도덕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또 그리스도만이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평화를 제공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분으로 채워질 때에라야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누릴 수 있으며 참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 엡2:18절

 

 

 

 

2장18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아버지께 나아감


이 논증은 11절에서 시작되어 가장 높은 정상에 도달해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 단계, 한 단계 진보하여 가장 높은 정상에 도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복 되신 성 삼위일체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성령으로 성부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위대하신 성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드리는 예배는 경외로움과 경배로 그리고 외경스러운 느낌과 영광의 느낌으로 찬양과 참된 찬미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마다, 또는 우리가 예배드리려 함께 모일 때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을 감지하지 못하며 엄위와 위대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영을 그렇게 준비시켜야 하며, 묵상해야 하고 이 문제를 좋아해야 하며 성경을 탐구해야 합니다. 영광과 거룩과 전능하신 가운데 계신 영원하신 성 삼위 하나님께서 “”라는 개인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고 또한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텐데, 그보다 무한하신 권세와 영광 가운데 계신 분, 더군다나 성삼위의 전체로서의 하나님께서 “”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보다 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에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영광과 놀라운 특권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감격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는 사실에서 “나아감”이란 말은 너무나 중요한 말로서 “접근하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소개됨”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소개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가 될 것인데, 그것은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호의를 베푸신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이것에 대한 길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효력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산출하여 우리를 아버지께 소개하시고, 손을 붙잡아 이끌고 그의 존전으로 데리고 나아가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해결해 주는 것에 머무는데, 그러나 구원의 장엄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땅의 삶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에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나아감”을 얻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히 나아가 그분과 교제를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나아감”을 얻게 된 우리들이 이제 어떻게 나아감을 얻느냐 하는 것인데, 구원의 목적과 목표가 그러하다면 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여기서 기도라고 하는 위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기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어 가까이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① 우리가 하나님을 아느냐?

②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느냐?

③ 우리의 기도가 진실 한가?

④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자유롭게 하고 있는가?

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확신을 가지고 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볼 때 그렇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떠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또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기진해 있을 때 기도가 어떠한 것인가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또 그들에게 가서 상의를 하며 성경을 읽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들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바로 이 구절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 이 말씀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의 나아감이 효력적이고 효과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기도를 할 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믿고 문제 거리를 맡기고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의식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해결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친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는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의 의를 받았고 그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다시 태어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고 그의 완벽한 사역을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놓으신 일에 감사하며, 또한 그를 보내사 그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전적으로 주님에게 달려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아뢰고,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성령으로 기도함


어느 의미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어려움도 많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보아왔고 그들의 말하는 소리를 들어왔으며, 그들과 교제하고 서로 친교를 나눌 때에 얼굴을 마주대하고 대화를 나누며 어떤 때는 슬픔으로 또 어떤 때는 기쁨으로 교제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나, 어떤 느낌, 아니면 황홀지경에 빠지거나 전신으로 느껴지는 격렬한 감동으로 주어질 때도 있는 반면에 사단에 의해서 사단이 보내는 암시들과 환상들도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어떤 심리적인 경로를 겪고 나가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을 설득하고 기만하고 사실상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처럼 흔하게 불평하는 비 실제성의 보편적인 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집중성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나, 책을 읽고 있다면 그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런 문제가 전혀 야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우리의 생각들이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려는 의도로 무릎을 꿇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쉽고 또 어제 일어났던 일, 또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무가치함의 느낌이 드는데, 아직도 우리의 죄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접근해 나갈 권리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며, 또 다시 의심이 들어오고 또한 의심들이 마음속에 침투하여 여러 가지 의문과 갈등들이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일들과 친숙해 있고 이러한 일들은 기도가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마음과 생각을 모으고 진정으로 집중시켜서 우리의 기도로 하여금 살아있고 진실하고 생명감이 넘치는 행위가 되게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모든 지역의 세력들이 우리에게 방해 공작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의 노력을 흩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실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기도가 너무 안일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무엇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혼의 큰 원수에 특별한 표적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로 볼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를 배우는 것은 매우 필요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 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기도를 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인식하지 않고 여러 가지 간구들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먼저 멈춰 서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묵상하고 스스로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입니다.

 

 

 


그것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그저 급하게 돌진해 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한 성령”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없이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없으며 참된 기도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기도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이 없이는 기도가 기계적이고 생명이 없고 어려운 것이고 또 기도라는 것이 고역이 되지만 성령과 함께 하게 되면 모든 것은 변하여 기도가 자유롭고 영광스럽고 영원히 누릴 최고의 누림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정확히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지에 대하여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어째서 내가 기도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언제나 기도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기도하고 싶어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 답은 내 속에 신령한 마음을 창조하는 이가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살리시고, 다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움직이시고, 자극시키시고, 우리 육신적인 마음을 영적으로 작동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영역을 의식하게 되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하여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셔서 사람을 기도로 인도하시는데,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더 좋은 것은 없으며,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저 단순히 구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진해 나가는 것과 진정으로 교제와 진정으로 하나님과 누리고 있는 차이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아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보게 하시고,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경건한 슬픔과 참된 회개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촉진제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도록 준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은사와 정신과 혼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구별되고 독특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는 것이며, 그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알고 싶어 하는 소원을 느끼게 되고 그와 접촉하고 싶어지는데, 그 일을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직도 무언가 확실하게 와 닿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때는 매우 중요한 단계에 접어든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굶주려 있으며 자기들의 영혼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모세에게 그러셨듯이, 또한 여호수아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영광과 엄위 속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그것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이해하도록 하시며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환난과 난제들에 의해서 둘러 싸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또한 “내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더라도 약속들에 대한 소망을 주셔서 기쁨과 행복의 감정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인데,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적으로 무력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라 절망적일 때, 우리가 신음하고 있는 처지에 있게 될 때 또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마저도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말로 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요구가 없이도 성령께서 그렇게 행하신다면 우리가 그에게 요구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그가 확실히 우리의 도움에 응하실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성령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2:19절

 

 

 

 

2장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1.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그들은 한 가족이며 “하나님 집”의 권속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들이 지체를 이룬 교회를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집으로 생각하십니다. 외인들은 자기들의 나라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나그네이며 시민권이 없고 영주권도 없어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며, 법적인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에 수년 동안 살아서 거의 그 가정의 일원이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가정의 권속은 아닙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똑 같이 적용이 되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그 나라를 방문하여서 살고 있음으로서 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침에 출근하고 밤이면 같은 차를 타고 귀가하고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틀에 박힌 일을 하며, 심지어 그 나라에 속한 사람과 결혼하여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실상 그 나라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고 단지 여권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그 나라의 시민들과 별반 차이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급박한 일, 전쟁이나 법적인 소송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들은 전혀 보호 받을 수 없고, 오히려 그 나라에서 추방당하거나 감금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나라의 시민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시민도 되고 시민이 아닌 사람도 될 수는 없습니다.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는 어느 한 국적을 포기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보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유의 일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평안하고, 자기 집에 온 것과 같이 느껴지며,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자유로우며, 언제나 마음이 교회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천국의 시민권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쳐 주심을 통해서 알게 되며,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으로서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어떠한 시련이나 큰 위기가 왔을 때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대적하는 자리에 서든지 아니면 떠나가는 것을 볼 때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는 한 나라의 국민이며, 한 아버지를 둔 가족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서로가 사랑하며 서로의 아픔을 돌보아 줍니다.

 

 

 


또 아버지의 말씀에 순복하여 모든 일들을 질서대로 처리해 나갑니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어떠한 난관도 끝까지 남아서 해결하고자 노력하며, 더욱 생기 넘치는 가정으로서의 교회를 세우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가집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은 외인이 아니며 손도 아니고 오직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2. 하늘의 시민권


교회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구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제도상의 기구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그 특별한 제도들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해의 눈이 열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엡1:18~19)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하나의 몸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위대한 국가로서의 나라인 교회로, 또는 하나의 가정으로서의 교회로 비유하는데, 그것 또한 하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교회를 하나의 도성 , 하나의 국가 , 하나의 나라 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갑자기 떠오른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관통하여 흐르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교회를 나라나 국가, 어떤 성읍에 비유했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며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대 도성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방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성벽의 목적은 시민들을 구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성벽은 시민들을 그 안에 넣고 성 밖의 다른 사람들을 몰아내고 문을 닫은 것입니다.

성을 들어가기 위한 여러 대문들이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에 닫혔고 다음 날 아침에도 어떤 주어진 시간에 열렸습니다. 그 도성에 대한 전체 개념이 구별을 의미하고 따로 떼어 놓는 것을 의미하며, 또 어떤 둘러싸는 것을 의미하며 그릇에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구별되어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도성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서로 결속을 맺고 있는 한 시민입니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 노릇과 통치와 권위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토록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의 시민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그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외인과 손이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3. 특권들과 의무들


교회는 하나의 국가요 나라요 도성과 같다고 합니다. 이제 이 위대한 나라 시민들에게 속한 특별한 특권들 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이것은 이 특별한 나라의 모든 복락을 요약한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그 나라와 그 도성은 이러한 모든 복락들이 값없이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특별하고 유별난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처럼 온 우주와 만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펼치시고 계시다는 진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기이하고 말로 할 수 없는 부요함과 모든 축복들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로 우리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께 나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 왕께서 개인적으로 “”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로 우리가 동일한 성도로서 하늘나라의 자원들이 우리 가운데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시민권의 요구들과 책임 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긍지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시민임을 영광스러워하고 그 나라를 자랑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고 감추고자 하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속해 있음을 드러내놓고 자랑해야합니다.

두 번째 로 자신보다 나라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왕과 나라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있듯이, 나 자신의 특별한 유익이나 관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과 나라를 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고 했습니다.

 

 

 

 

세 번째 로는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 시민으로서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네 번째 로 우리는 언제나 나라를 선양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나라의 법을 지키고 또한 그 나라가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세금도 내야하며, 외부로부터 오는 많은 공격들을 막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공격을 받고 있고 조롱을 받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작은 봉사라 할지라도 나라의 방호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가장 최대의 소원과 최고의 야망은 나라의 영토가 넓혀지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 나라가 더욱더 강해지고 더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속


그리스도인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진전된 하나의 요점이 있습니다. 국가의 한 시민 보다 더 가까운 것이 민족이라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가까운 것이 한 가정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 속한 권속이라는 개념은 아주 특별하고 깊고 가까운 관계입니다.

 

 

 


사도는 이 연합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정말 한 단계를 더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참으로 밀접하고 친밀하게 결합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국가가 법률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지 않기로만 작정하시고 또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지 않기로만 했다 할지라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인데,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자신의 나라의 시민권과 영주권을 주셔서 시민으로 받아들이시고 더군다나 양자로 받아 주셔서 한 가정의 형제들로서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영원토록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높여진 하나님의 권속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라는 말씀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관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3:2) 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벧후1:4) 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과 가진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에게는 모든 별들과 혹성들이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공기 돌에 지나지 않고, 세계의 열방들은 먼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신 분이 우리의 미미한 작은 일들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세신바 되신다고 하시며, 우리의 상세한 부분까지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참 고 : 마6:32]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집의 권속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엡2:20-22절

 

 

 

 

2장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아멘

 

 

 


1.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 이제는 “그가 거하실 처소”로 묘사함으로서 점진적으로 우리의 처한 환경에 더 가까워지게 의도적으로 유도 합니다.

권속! 그 다음은 집! 이제는 건물을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우리를 더 큰 클라이맥스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로 비유한 것보다 가정으로 비유한 것이 더 우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정에 있는 식구들이 국가에 있는 동일한 시민들보다 더 밀접하게 매어져 있으면서, 또 어떤 국면에서는 여전히 그 가정의 식구들은 자유롭고 밀접한 연합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결국 개인들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건물을 생각하게 될 때에 건물에는 각 구분들끼리 더욱더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전체 건물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해하는데 좋은 열쇠가 됩니다. 가정과 별도로 생각할 때에 그 한 건물 안에 있는 벽돌들과 개개 돌들 사이의 연합은 가정과는 다릅니다. 가정의 식구들은 분리되어 있으며 별개의 개인들이지만 건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가정의 식구들은 동일하지 않으며 가정의 식구들이 되기 위해서 자기들이 지닌 특성들을 멸절시키지도 않으며 여전히 개성이 존중되고 때때로 그것은 매우 두드러지고 또 그것이 너무 두드러진 나머지 가정의 식구가 전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기보다 더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정의 식구들입니다.

결국 가정의 식구들은 서로 분리 될 수 있지만 여전히 식구들이며, 서로 나누어 질 수 있지만, 그리고 서로 다툴 수도 있고, 심지어 상대방을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정을 와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그런 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건물에서 큰 돌 몇 개를 빼내면 건물은 붕괴하여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합의 원리를 생각할 때에 가정 보다는 건물이 더 긴밀하고 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개념은 주님의 거룩한 전이라는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 성전에 주님께서 지성소에 임재 하여 계셨듯이, 지금도 주께서는 그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교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그 일부이기 때문에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란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9~17에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등등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에 너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 말은 너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전을 멸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뉠 수 없는 한 연합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건축의 과정에 있는 하나의 건물로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한 직후부터 이 세상에서 행해 오셨던 일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이루시고 하늘로 돌아가신 이후에 행하고 계셨던 일이 하나의 건물을 세우시는 것인데, 그 건물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터 위에 지어져 가느니라.”라는 말씀이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건물이 점점 올라가고 확장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은 자기의 설계도와 청사진을 작성하신 영원한 건축가이십니다. 그는 집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세대마다 어떠한 돌들을 캐내서 다듬고 건물에 붙이는 그런 작업들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대 건축물의 일부이며 이 장엄한 성전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돌들을 세상에서 빼내어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계시며 이 놀라운 건물과 이 영광스러운 전을 건설하고 계십니다.

 

 

 


이 건물은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자라나고 있는 유기적이며 생명이 있는 건물입니다. 베드로 전서 2:5에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돌이 살아 있으며 돌에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 22절에서 같은 개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건물이요 살아있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2. 오직 유일한 터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성전을 만드시고 그 성전에 거하시는데, 이 성전은 이전의 유대인의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구별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러한 새로운 성전이 존재하게 되어 하나님께서는 지금 거하시는 전은 그의 백성으로서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둘로 한 새사람”을 만드셨으니 이것은 새로운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계속 자라나는 생명적인 것입니다. 성도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회가 자라나고 확산되어갑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연합을 이루고 하나님의 건물을 이루는데 쓰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는 터 위에 이것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른 터가 없이는 참된 건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초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연합에 대한 오직 유일한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건설됩니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로서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특별히 부름 받아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복음의 전도자로 보냄을 받은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적들을 행하고 교회들을 설립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중요한 골격은 그들 위에 세워진 것으로, 그것은 이 큰 건물 안에 있는 주춧돌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먼저 놓여졌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아 둔 자가 없나니”라는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다른 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3. 영적 화해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으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또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짓고 계신 이 큰 성전의 건설 과정에 세워지고 있는 여러 벽들의 지체들입니다. 하나님이 짓고 계신 이 위대한 성전은 주 안에 있는 거룩한 전입니다. 하나님의 이 신기한 집을 짓는 데 있어서 우리가 어떤 위치와 부분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이 그 거룩한 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 일은 시작이 되었고 그들이 그 일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들로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이 하나님의 위대한 전에 있어서 개개 부분들이 되는 우리는 기초들과 상호 연락이 되어야 하며 참되고 바르게 그 기초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집을 짓는 재료로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지는데,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집을 짓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가 보배롭고 또한 모퉁이 돌도 그러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배로운 것들밖에는 적당치 않아,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집을 짓는 것은 무가치하여 공력을 밝히는 날이 오게 되면 불로서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이 와서 나무나 짚이나 풀을 순식간에 태워 버릴 것이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집을 지은 사람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이 터 위에 어떻게 집을 지을지에 대하여 조심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의 일은 단순히 벽을 빨리 세우는 것이 아니고 벽에 들어갈 모든 것이 그 터와 서로 잘 상합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터 위에 진정으로 확고히 세워진 것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을 알고 또한 전적으로 무능하며 무력한 존재임을 알며 오로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하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만이 그러한 데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속죄의 은혜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이며,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집을 짓기 위하여 특별하게 선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 있는 돌들로 각자가 다 다른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큰 건물의 담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돌들은 건축가에 의해서 그 쓰임새에 꼭 맞도록 다듬어 질 것입니다.

 

 

 

 

4. 교회의 성장


이 본문 말씀에서 교회가 일종의 건물이요 큰 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에 계시고 여전히 더 크고 더 충만한 방식으로 거하시려고 하십니다.

이 건물을 짓는 데 있어서 돌들처럼 우리는 기초와 모두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완성 될 때 하나님께서 거하시게 될 그 “거처”를 위해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제 우리는 이러한 돌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 건물에 놓여지게 되는가 하는 큰 문제에 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에베소 사람들은 이 건물로 들어왔고 지금 이 건축의 부분들이다. 너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주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이 큰 전의 부분들이다. 그럼 언제 그런 다듬는 준비가 일어나는가가 관건이 될 것인데, 일차적으로 이 준비는 우리가 교회 안에 있기 전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준비를 받고 있지 않았으면 결코 이 건축의 부분들이 될 수가 없고 이 벽의 돌들일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6:7에서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기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기사의 일부분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입니다.

 

 

 

 

성전을 짓는 모든 과정과 재료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짓는 것에 대해서도 내역을 세세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 진술은 교회의 본질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빛을 던져 주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돌들을 준비하는 과정은 은밀히 진행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들이 될 수 있기 전에 성령에 의해서 능력 있는 준비의 사역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행해집니다. 이것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이며, 세상은 그것에 관해서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그 돌들이 준비되는 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듯이 세상은 이것에 관하여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지체가 될 때에는 반드시 중생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된 돌들로 건물을 짓는 동안에는 어떠한 시끄러운 소리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생명에 관계되는 진리에 관해서 어떠한 논쟁이나 불일치도 있어서는 안 되며, 방망이나 망치 소리나 철 연장 소리가 나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어떠한 지위와 조건에 관해서도 논쟁의 소리나 다툼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엡3:1절

 

 

 

 

3장1절: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3장의 처음에 나와 있는 “이러하므로”라는 단어는 이 장의 앞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밝혀진 놀라운 진리는 복음을 믿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한 몸이 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하므로”라는 말로 시작을 하지만, 여기서 논술을 중단하면서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학자들이나 문장가들은 바울의 서신에 오점으로 지적하면서 아주 좋지 못한 문체라고 비평합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주제를 떠난 이야기를 하게 했던 원인을 찾아보면 1~2절과 13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라고 말하며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라고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말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은 어떤 신학적 논문이나 문학적 걸작을 쓰기 위해 곁길로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에 대하여 건강과 장래에 대해 걱정하고 그가 죄수로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목회자적 심정으로 그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껏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광스러운 면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다 헤아리신바 되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참으로 잘 섬기는 사람은 언제나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현제 처한 상황이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그의 서신을 읽을 성도들을 돕고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가 단순히 일반적인 말로 편지하거나 일반적은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 모든 일이 결국에 가서는 잘 해결 될 것” 이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들도 자기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언제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여야 할 영원한 원리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번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혹은 그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말씀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교회 안의 어떤 일에 대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박해를 당하고 있든지, 혹은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혹은 낙심하고 있든지, 그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위대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 로 바울은 한 순간이라도 마음속에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속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불평이나 불만을 한마디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불요불굴의 극기 정신으로 그 고통을 대처해 나가라고 하지 않으며, 지금 처해진 환경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고, 불평이나 불만을 품지 말라고 말하거나 침착하게 참고 견디라고 하거나, 장부처럼 견디라거나 용기를 내라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고 하며 자기가 “이기고도 남은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도 이기고도 남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견뎌 내고만 있지 아니하며 그것을 초월하여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환희에 넘쳐 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1:12에서도 똑같은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죄수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나 나의 상태에 대하여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나는 여러분들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하여 내가 깨닫고 있는 바와 같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즉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 2:3에서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라고 하며 12절에서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그리고 3:1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 일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할 장성한 분량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발에는 착고와 쇠사슬로 매여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히게 되었으니” 로마의 법률 때문에 갇힌 일반 죄수들과 다르며, 그는 로마의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옛날에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자로, 유대인들의 율법교사로, 서기관들과 권위자들의 모든 해석을 가르치는 자라면 감옥에 있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로마에 가게 되고 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던 그의 생애의 놀라운 사건을 상기하고, 자신이 회심한 일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훼방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랑하사 그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이 생애 중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므로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있음으로 해서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을 때조차도 감사하고, 최고의 영예, 곧 최종적인 영광의 면류관으로서 주어지는 순교를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높은 차원의 단계가 남아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여러 환난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과 그리스도의 제자 된 신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딤후 3:12) 빌 3:10에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라고 표현하고 “이 고난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 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지극히 큰 특권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박해를 즐거워하고, 우리 자신에게나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힘겨운 일로 인하여 낙심은커녕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이 극심할 때에, 그 영광의 기회와 특권들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며 즐거움과 기쁨으로 이러한 일을 맞이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3:2-7절

 

 

 

 

3장2~7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터이니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게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1. 그리스도의 비밀


이 내용은 본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의 시작부분으로서, 사도는 자기의 갇힘을 인하여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기를 바라고, 왜 기뻐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그 말씀은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 또는 “내가 이 특별한 자리에 놓이게 된 사실에 대하여 너희가 아는 것은 당연하다.” 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막상 실천해 보려고 하면 그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일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곤경에 처했을 경우에 그 지식을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의도하고 스스로 행했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받은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바울의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전파하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 하셔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를 파송하셨으며, 그에게 전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이적을 행함으로써 진리를 증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인 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들은 믿고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그런 일로 인하여 자기가 갇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아마도 대부분이 보통 노예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에베소인 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사 성도가 되게 하시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면전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당하신 고통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나의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며 내가 갇히게 된 것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일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깨닫고 “나에게 필요 없는 동정을 베풀지 말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있는 것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일이 자기에게 맡겨졌다고 하는데 그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일은 청지기들을 임명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이 일을, 저 사람에게는 저 일을 맡기는 일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비밀은 밝혀졌고,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로 바울은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감추어졌던 것”이며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알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말로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받았으며,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받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친절로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것의 영광과 놀라움과 경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결과로서 여러분이 어떤 신분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2. 두 가지 비밀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인내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3,4절에 그에게 계시된 비밀의 본질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하는데, 사실 비밀은 성령의 조명과 계시가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4절의 삽입구에서 말하고 있는 “비밀”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됨이라.” 는 특별한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 복음의 모든 메시지,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모든 진리를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리스도가 복음이기 때문이며,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모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는 자기에게 위임된 메시지, 즉 자기가 이미 사람들에게 입으로 전한 바 있는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엡2:3)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 밖에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위대한 일반적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특별한 비밀로 바로 건너 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역사의 모든 사건 중 지극히 장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며, 지극히 크고 감격적인 일이어서 바울은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놀라운 방법이 바로 그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방법이 “비밀”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일어난 모든 일이며 참으로 놀라운 비밀입니다.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조명과 계시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밀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제 교회 안에 나타났고 역사하고 있다는 특별한 비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그 목적의 최종적인 형태인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으며, 지금 똑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고 장차 영원한 영광의 축복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소망이 없던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며 우리는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며, 우리는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가능케 하시고 우리에게 가져다주셔서 우리와 유대인을 함께 후사가 되게 하고, 함께 지체가 되게 하여, 그 거룩한 소망에 함께 참예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영원토록 감탄과 경이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성경: 엡3:7-8절

 

 

 

 

3장 7~8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하시고 전하라고 위임하여 주신 말씀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 난 후 사도 바울은 한층 더 심오하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계속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자기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꾼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그가 이방인들을 가르치고 이 큰 은혜를 그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비밀”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 큰 축복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받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에게 전파한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의해서 전파 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후사가 되어 누리게 된 모든 축복과 자기가 그 일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으로서의 기독교 사역자에 대한 놀라운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현대의 교회가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첫 번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시대에는 성직의 권위가 상실되고 무시당하고 있으며, 성직에 대한 참된 개념이 격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유일한 화해의 방법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라고 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비꼬는 말도 아니고, 겸손을 가장한 것도, 위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주장에 대한 부정도 아닙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훼방하였던 다소의 사울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되었으니 이 사실에 대하여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이 처해있었던 위치를 뒤돌아보고, 그것을 기억하여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주님과 항상 가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결점과 부족을 잘 알고 있었고, 꾸준히 일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일은 거의 없으며 얼마나 더 많이 일을 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예와 존엄성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복음을 전파할 특권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부적당함에 대하여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직면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증오하던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것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살고, 그리고 그의 가장 큰 소원이 그 하나님의 일들을 더욱더 아는 것이 되게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적인 역사” 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험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적인 역사” 가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라 할지라도 바로 이 능력을 떠나서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할 것인데, 그의 전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그를 일꾼으로 부르시고 그 임무에 필요한 은사를 주셔서 진리를 깨닫고, 설교하고, 글을 쓰고,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목사님들을 교회에 주셨으며,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봉사의 직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무기력한 존재이며, 실로 아무도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유창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효과적인 목회사역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이 “활력적인 사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재능이나 방법이나 재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연마시키고 적응시켜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의 활동적인 사역”의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우리는 무엇을 전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풍요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측량할 수 없는 풍요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풍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비밀” 이었지만 이제 “계시”됨으로서 우리가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그 풍요를 발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으며, 밖에서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그 풍요를 찾아낼 수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풍요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계속해 가면서 이 풍요에 대해서 더욱 놀라고 있으며, 그는 때때로 이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모든 방을 둘러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때마다 또 다른 방을 발견하게 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나가게 될 것이며 측량할 수도 없고 끝을 찾아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풍요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비록 그것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일 지라도 단 몇 가지라도 설명해 보려고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가난뱅이며 빈털터리로서 존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큰 세계 속에서 세계의 여러 가지 문제와 가능성들 속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 가운데 있었을 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바로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을 입고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의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만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도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셔서 우리를 흠과 티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빈곤 가운데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가운데 있게 하시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필요는 생명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며 기뻐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충만함 속에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이 생명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소유하게 될 때 그의 풍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화이며,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재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께서 그의 평안을 주실 것이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빌4:6~7)

 

 

 


이 모든 것이 그 풍요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아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 창고에 있는 것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풍요, 즉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즐길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이 모든 보화로 인하여 우리는 조금도 궁핍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궁핍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욕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는 말씀은 회심하지 않은 자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회심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시고 그 풍요를 기대해야하며, 그 풍요에 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뱅이로 살아가는 것을 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과 궁핍과 고통과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금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파산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해답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서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들의 눈이 열려 회개하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에로 나아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3:9-13절

 

 

 

 

3장 9~13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1. 하나님의 각종 지혜


기독교의 메시지와 구원의 복음은 항상 개인적인 면에서 출발하지만, 그 개별적인 것을 초월 하여 훨씬 더 크고 넓게 계속해서 확장되어 갑니다. 복음이 개인의 구원 방법으로 우리에게 준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커다란 범위와 보다 더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항상 고난과 시련과 전쟁과 살육과 그리고 당황하고 의문에 싸여 있는 그런 세계 속에 계속하여 전파되어집니다.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는 어떤 희망을 제시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며,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복음은 어떤 빛을 주고 소망을 주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첫째로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그 받은 소명 중의 하나가 이 문제와 관련된 인간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어둠이 있는데 그들이 정직하다면 자기들의 무지를 고백할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역사의 전 과정은 어느 의미에서 순환의 문제 라고 합니다.

하나의 거대한 힘이 일어난다는 것은 억눌리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자극해서 그것에 반대하여 일어나게 되는데, 부패하고 게을러져서 하나의 힘이 쇠퇴하면 또 다른 여러 가지 힘이 일어나고, 그들은 또 다른 힘들을 자극하고, 그 힘에 대항하여 일어나게 해주며, 이렇게 하여 전 과정은 또 다시 순환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토인비가 말하는 역사의 흥망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참 된 발전도 없이 사람들은 단지 계속 원을 그리며 순환 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피상적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많은 거대한 제국과 국가와 왕국이 융성해서 힘이 증대되다가 다음은 쇠퇴해 가는데, 그런데도 세상은 전처럼 아주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사학자인 휘셔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를 연구한 후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역사에는 어떤 목적이나 어떤 목표가 없는 것 같다 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그와 같이 뿌리 깊은 염세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사건들은 일어날 뿐, “왜” 또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인류는 전 세계의 상황에 대해 참으로 어두우며 ,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 역사를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모든 시도, 미래를 위해서 어떤 희망을 지속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전도서 저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했으며 바울은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의 상황에 비교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의 가장 좋은 소식은 이런 어둠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빛이 보이듯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전파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 특히 복음이 주장하는 바는 빛이 있다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고 증거하셨으며, “나 혼자만 세상의 빛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정치가나 철학자나 사회학자나 인도주의자나 쾌락주의자들에게서 결코 빛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곳에도 빛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처럼 중요하고 독특한 위치로 이시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빛을 줄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지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비밀의 계획”, “비밀의 경영”, “비밀의 보조”, “비밀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목적으로 “그가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기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한 부분이며, 근본적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이 세상에 있는 전 생명을 위해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영원부터 또는 태초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있던 비밀의 경륜 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비밀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그 시기까지 모든 시대에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 없었던 것이 다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거기에 있었지만 나타나 보이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예속되시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며 영원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그는 시간 세상을 내려다보시고 계시며, 태초가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히 이와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는 가장 위안이 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상관없이 거기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에는 우연한 것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 때문에 당신의 방법을 고치거나 수정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원한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이며, 모든 악과 부정과 죄의 모든 형태는 불과 파멸의 구덩이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는 깨끗하게 되고 정하게 될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그 날에 하나님의 목적의 최후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


이제 사도 바울은 정사와 권세들에 관하여 말씀을 계속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그가 전파한 결과인 에베소 교인들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총체, 곧 그 깜짝 놀랄 만한 이 진리는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자들조차 알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는 어떤 일이 이같이 존귀하고 능력 있는 것들에 대하여 그 이해를 넓혀가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지극히 영광스럽고 광명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너무나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면전에서 보내고 있는 광명한 천사들조차도 자기들이 교회를 통해, 그리고 교회 안에서 깨닫게 된 것에 대하여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천사들은 항상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지식과 이해와 상상조차 초월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관계된 지식을 천사들이 알아야만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은 천사들이 “교회를 통해서” 즉 우리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와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의 최고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과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실현 시킬 수단을 결정하셨다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견하여 결정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입니다. 지혜와 지식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지식은 있지만 지혜는 없습니다. 지혜의 일면에는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있으며, 지식은 사람이 배울 수는 있지만 지혜가 없다면 사회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직업과 모든 실제 생활에 적용되며 지혜는 위대한 예술가나 훌륭한 과학자나 또는 실제 생활에 적용됩니다. 지혜는 위대한 예술가나 훌륭한 과학자나 또는 어떤 직업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를 구분해 주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지식 위에 그가 계획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용할 수 있은 차원 높은 자질 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 안에 있는 특질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특질이 이전보다 더 훌륭한 방법으로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자들에게 알려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지혜가 나타나게 하는 매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교회가 없이도 천사들은 빛을 볼 수가 있고, 그리고 일반적인 지혜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변화는 볼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의 초월적인 영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교회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나타난 가장 놀라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연에서 보인 어느 것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온 교회의 결합과 성도들의 연합이 얼마나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은 우주 안에서 가장 훌륭한 현상이며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신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

 

 

 

 

3. 담대함, 나아감, 당당함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우리의 현재 위치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이런 일이 왜 허락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쉽게 받는 유혹입니다. 자신의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하여 낙심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는 자기는 상심하지도 않으며 동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영원한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고 하나님께로 기쁘게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한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에베소 교인들이 이러한 체험이 그들에게도 열려져있고 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공격을 받고 슬픔을 느끼고 당황하게 될 때에 그 사건의 원인을 밝히느라고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곧장 하나님께 나아가,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과 시험의 목적을 깨달아, 그 결과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항상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그것을 적용하여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반영되어야만 할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통해서 얻게 된 모든 축복 중에서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또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배운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시는 피를 힘입어서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도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면전으로 담대하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특전을 우리는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로와 힘, 그리고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과 친절과 연민으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 3:14-16절

 

 

 

 

3장 14~16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 아버지께 기도함


본문의 “이러하므로”라는 표현은 사도가 2장 끝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2장 끝부분과 관련이 연관하여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는 말씀에서 기독교에 대한 고상한 개념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바가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한, 그들의 위치가 이스라엘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자기의 거주지를 삼고 있는 주 안에서 거룩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과 같이 “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라고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은 로마의 감옥이라는 것과, 악한 원수들에 의해 붙들려 있고 속박당하고 있어서 에베소 교인들을 방문하여 설교하는 것이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설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을 지라도 원수 마귀는 바울이 기도 하는 것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수는 그를 감옥에 가둬 놓을 수 있고 문에 빗장을 질러 잠글 수 있으며, 병사들을 시켜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게 할 수 있으며, 창문에 창살을 질러 잠글 수 있고, 그를 에워싸서 육체적으로 가둬 놓을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기도할 수 있었으며, 원수는 그것을 막을 수가 전혀 없습니다.

 

 

 


지극히 어린 성도의 마음이라도 영원한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기도의 영은 여전히 자유로우며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할지라도 우리는 영으로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 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감옥에 갇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유익하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며, 혹은 개인의 일들과 사무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가 없다든지,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현 세계를 위해,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정말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가 교육만큼 항상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에 의해서 여기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들에 대해 숙고하며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고 주석을 읽으며 교회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교리에 대한 책들을 읽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알아도 지나치지 않고, 우리는 교육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지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들보다 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것이 단지 우리의 지성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우리의 감정과 의지에 까지 나타나서 전 인격에 영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교훈 그리고 어떠한 것을 한다고 할지라도 기도는 항상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다른 중요한 문제는 사도 바울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않고 신중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기도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매우 신중히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극단적인 형식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든지 서서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엎드려서 해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세는 성경에서 모두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묘사로 사람의 중심 자세, 즉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하는 표현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분의 존전에 나가기 위해 취해진 자연스럽고 반사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영으로 겸손하게 그리고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라고 말한 것은 10절에서 “이제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려고 하신”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1장 끝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는 분”이시라고 훨씬 더 자세하게 쓰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여러 집단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일반 천사들과 천사장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모든 부권과 국가, 그리고 구역이 결국 하나님의 부권에서 유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바로 그 집단이 이 우주적 부권 아래 모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구속받은 족속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이라고 하는 족속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가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가족의 이름”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와 계급 또는 집단이나 학교, 즉 그 이름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책임지어진 그 이름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 족속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족속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아버지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책임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며,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위에 두신 그 이름을 통하여 우리 것이 된 그 특권과 그 높음과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그 두려운 책임에 우리가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 속사람


14절에서 시작하여 21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말씀은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영광스러운 영역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실제로 기도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서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몇몇 기도들은 모두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기도가 가장 귀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우리를 곧바로 하늘나라로 인도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용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라고 간구함으로서 우리를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합니다.

 

 

 


그는 개종한 이교도들로 전에 노예였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풍요함과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것을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자신의 어떤 환경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곤경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이나 그들을 위하여 환경을 변화시켜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들도 참으로 해 볼만한 것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큰 일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간구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입니다. 그의 기도는 오직 영적인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언제나 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특징 은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들추어내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씩, 하나씩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기도와 헌신에 있어서 주된 관심을 가지며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에게 맨 먼저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에 대한 모든 문제,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사귐에 관한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하여 주된 관심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었으며,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축복에 대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언급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 방식도 이러해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육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육체는 쇠하여 지고 영혼은 영원히 남아 있으니 우리는 이 쇠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적인 일을 우선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달라고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육체 안에는 그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법이 있고, 또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속사람은 겉사람과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과의 차이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속사람은 육체의 모든 재능과 기능과 상반되며 그것들과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 곧 영적인 부분입니다. 중생되지 못한 자의 문제는 이 속사람의 결여인데, 그들은 속사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오직 겉사람으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육체로만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생명 곧 우리가 인간의 육체적 부분이라고 부르는 그 생명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인생은 자신의 깨달음, 즉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감각과 세상의 사물들에 대응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에 의하여 한정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삶이고 그들의 전적인 삶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이성을 가진 동물에 불과하며, 짐승들보다 더욱더 크게 발전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비극은 모든 시련의 은신처인 속사람을 가지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부터 참고 견디었던 전도와 여행과 박해와 곤경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 가고, 침침한 눈으로 인해 여전히 괴롭힘을 당했으며 그의 몸은 병들어 있었을 때에 “겉사람은 후패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퉁이에 앉아서 “이제 종말이 왔구나. 나는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었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며 나의 시대는 가버렸구나! 나는 이제 벽을 향해 돌아서서 종말이라는 사실을 대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고 말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해져 가는 반면에 속사람은 강건하여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외적인 생명을 가져가 버릴 때 겉사람은 불가피하게 죽어가지만 속사람은 하늘과 영광으로부터 오는 힘을 받게 됩니다. 그는 속사람에로 퇴각하여 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참으로 가엾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주위 환경에 의지하고 그것들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 태어나게 되고,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새사람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므로 인생에 새로운 삶의 질서를 시작하게 되어 우리는 새로운 영역,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 신의 생명의 씨앗이 속에 심어진 결과로서 그 생명은 성장되고 발전되어지며 때때로 고난과 시련이 그 생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성장하게 하려고 자극합니다.

 

 

 

 

3. 능력으로 강건해짐


이제 바울 사도는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1장과 2장에서와 같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여전히 계속해서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 있어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살피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게 했습니다.

 

 

 


용서와 구원의 체험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멈추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자신의 안전과 무사만을 마음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자신의 관심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에 쏟아야만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또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될 소망이 있는가를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장하지 못하여 50년 후에 본다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어떠한 차이도 없이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크고 영광스러운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들 중의 하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져야 ” 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축복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모두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처음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하고 무지하며 주위에 있는 많은 세상일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덤벼들기 쉬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항하도록 면역되어 있지 않아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히 자라고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원수 마귀, 곧 형제를 참소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음흉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그를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지성이 강건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는 늘 마음속으로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또한 지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성도 강건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상상이 우리를 엄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망하거나 자칫하면 불길한 예감에 빠지기 쉬우며, 만사가 잘 되어 갈 때에 조차도, 마음속으로 “지금은 모든 게 좋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라고 생각하고 이내 풀이 죽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살펴보고 분석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연약한 것을 알고 강건해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렸던 그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없다면 약해져서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성으로, 혹은 감성으로, 혹은 의지로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해왔는지, 우리가 방임한다면 우리를 위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강건해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 순간에 우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느낄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많이 실패했을지라도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실 수 있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힘이 있는데, 그분은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바라고 성령께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내주하실 것입니다.

 

 

 

 

 

성경: 엡3:17절

 

 

 

 

3잘 17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


이 구절은 참으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교회의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며, 그들은 이제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안에 계십니다. 다시 말한다면,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비록 주님께서 이미 그들 속에 오셨을 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신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바울의 진술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속에 계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상태와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계신다.”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산다.”는 복합어로서 “아래로”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를 붙인다면 그 단어는 “정착하여 집안에 산다.” 는 뜻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거처를 차지한다는 관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말을 선택하여 사용했습니다.

 

 

 


계3:20은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힌 문을 두드린다는 그 말씀은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에게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주님과 관계있는 위치에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계시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지” 않으며, 그곳에다 “주님의 거처를 삼지” 않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를 깨닫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더욱 가능한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더욱 친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집으로서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말씀한 바와 같이 그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처” 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는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거처가 된 마음 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아직 에베소 교인들에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준비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진술 속에는 이것을 더욱더 확실하게 설명하는 차원 높은 요소가 있는데, “거한다.”는 말의 시제를 부정과거형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단번에 일어났지만 영원토록 효과를 미치는 어떤 의미를 수반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단순히 일반적인 축복이 아니라 특별한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며, 이 축복은 지금까지는 내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몰랐지만 이제는 주님이 자신을 나에게 나타내셔서 나는 그분을 알고 주님은 참되시며 나에게 살아계시며, 그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축복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며 주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의식적인 교제를 즐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즐기는 것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와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주님과의 의식적인 즐거움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그가 하신 일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이 똑같은 방법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친히 네 속에 들어갈 것이며 네게 나 자신을 나타내겠다. 네가 그때 이제까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친교로서 나를 알 것이다. 나는 네 속에 들어가 네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진리의 서광


우리가 이 구절을 대하면서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이 기도는 이미 성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며, 기초가 튼튼한 성도들과 여기서 지적한 가능성들과 견주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도달한 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경지까지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며, 이전의 것은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귀한 소명과 상급과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과 성령의 인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 쳤다는 것은 우선 구원의 확신의 문제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 기업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로 되어 있다는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확신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로 주님과의 교제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인침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체험은 우리를 주님과 더욱 깊고 위대한 교제로 인도합니다.

 

 

 


분명히 두 가지 체험은 아주 위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체험은 인친다고 하는 그것보다 더욱 영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종종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는 훨씬 영구적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거한다.”라는 말은 바로 “거주한다.”, “거처로 삼다.”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여 구분해서도 안 되지만 실제로는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에서 사람이 의식하는 것은 긴급성과 광명인데, 이는 모든 것이 갑자기 분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체험은 더욱 깊은 수준이며 더욱 영구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더 감미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 간의 문제에 비유로 들 수가 있는데, 처음에 연애 할 때의 감정과 부부가 된 상태에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상태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연애 할 때에는 열렬한 사랑의 표현들을 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부부의 사랑의 표현은 감소됩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어지거나 적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원숙하여 지고 더욱 발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인치심과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는 것은 더욱 위대한 사랑과 지식이며 더욱 절친한 친밀성이며 더욱 깊은 교제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의 처음 체험인 짜릿한 요소가 항상 수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적 진술이며 체험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와 같이 우리의 몸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며, 성령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도 계신데, 이것은 신비적 관계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적인 이해의 영역보다 아주 더 고상한 다른 영역이 있고 우리는 진리의 광명과 광채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고 정착하실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활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리스도께 도취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준비 된 마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확실히 계시는지를 아는 것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최상의 특권과 이 지극히 큰 기쁨의 원천을 즐길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돋우고 우리의 소원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위대한 경험 중에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중 하나를 예를 들겠습니다.

 

 

 


당신의 풍요롭고 신성한 사랑으로 고요한 평안의 원천에 숨기시네.

나의 원수로부터 나의 도움이 되고 피난처 되시니

당신께서 나와 같이 할 때 나는 안전하네.

보라! 죄와 슬픔과 부끄러움에서 예수님,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숨기옵니다.

당신의 능력 있는 구원의 이름은 나의 행복한 영혼을 지키네.

그것은 안락과 능력과 평화와 기쁨과 끝없는 사랑을 가져오네.

당신의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나에게 용서와 신성함과 천국을 주시네.

피곤할 때에 나의 휴식이 되시며, 고통 중에 나의 안락 되시니

예수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 되시옵니다.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전쟁 중에 평화와 잃은 중에 얻게 하시네.

고통 중에 나의 미소가 되시며 부끄러움 중에 나의 영광과 나의 왕관되시네.

내가 궁핍할 때에 풍부하게 채워 주시고

약할 때에 나의 능력 있는 힘이 되시네.

속박 중에 나의 완전한 자유되시며

사단의 어두움 속에서 나의 빛이 되시네.

내가 부를 때마다 나의 도움 되시며, 내게 머무르시고

죽음 중에 나의 생명 되시며, 나의 천국이며, 나의 모든 것이니 이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과 그로 인한 충만한 만족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찰스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완전한 만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주께서 만일 누구든지 그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고”, 만일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진리라는 것을 증명했으며,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박당한 심령의 완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육신을 믿으며, 성령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그 삶은 그리스도의 참 평안과 자유,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많은 영적인 복들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참으로 가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중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었고, 같은 생명을 선물로 받았으며,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며, 같은 부활에 대한 지식을 알고, 같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개개인의 축복된 경험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에베소 성도들에게서 증명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깨닫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우리를 감동케 하사 우리가 원하고 할 수 있게 되며, 우리의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분은 그분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것인데, 그 약속은 “나는 너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며, 내가 와서 네 속에 나의 거처를 정할 것이고, 아버지와 나는 네 속에서 살리라.”는 것입니다.

 

 

 

 

4.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


우리는 이제 17절의 마지막 말씀인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혀져 왔고 터가 굳어져 왔다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이나 거룩함보다 우선적으로 주님 자신을 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과 축복과 모든 상태는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시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결과로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첫째 소망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나 불교의 안에는 “거룩한 사람들”을 지향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특별한 진리는 우리의 거룩함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결과이며 주님과의 관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사랑이 깊게 될 때에 우리의 영적 생활도 당연히 깊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신다면 그 결과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사랑에 관하여 매우 특별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그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의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일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주된 특징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두 가지 표현을 한 것입니다.

 

 

 

 

  1)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힘


첫 번째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게 하고, 두 번째 표현은 한 건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두 표현의 유사점은 커다란 나무와 커다란 건물 모두 깊고도 확고한 관념, 즉 변함이 없는 영구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는 것은 나무에는 생명과 생기와 힘과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는 비전까지 포함 되지만 건물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건물은 압박과 충격과 그것에 가해지는 다른 모든 영향들을 견딜 수 있는 강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져 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있는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심겨지고, 또한 성장하는 흙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세우려고 도우며, 우리를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되게 하려는 모든 영양분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흙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그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 나무는 그런 방법으로 아주 많은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그 나무는 흙과 그 수분,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갖가지 영양분을 얻습니다. 그 필요한 것들은 그물과 같은 이 뿌리를 통하여 공급되어 그 줄기와 가지와 잎사귀에 전달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무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참된 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어떤 약하고 무기력하며 감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사랑은 강하며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사랑이시며 하나님도 사랑이십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교훈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 뿌리박힌 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이 그의 모든 동기가 사랑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으며 사랑으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강권합니다. 그는 억제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그 마음에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사랑이라는 토양에 뿌리가 박힌 것이며, 그 뿌리는 그 근원으로부터 극히 귀중한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다시 나타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사랑 안에서 터가 굳어짐


이제 두 번째 표현인 “터가 굳어져서”라는 표현을 살펴보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전 생활이 사랑 가운데 확고한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근본 원리인 이 사랑의 원리로부터 우리의 전 생활을 끌어내야 하며, 또한 그 생활의 힘과 능력과 활력소, 그리고 모든 것을 끌어내야만 하며,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뿌리가 박혀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사랑의 “터가 굳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빌딩이 깊고 단단한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원리도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행동은 언제나 사랑 위에 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건축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기초가 훌륭하고 충실하게 놓여졌는가를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거주 할 수 있고 다음 세대까지도 기거할 수 있는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기초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또 충분한 시간을 들일 것이며 기초를 세우는 데 공력을 들일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높을수록 기초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 되는 것도 사랑인데,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자기의 원수들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증오하는 만큼 같이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초 위에 서 있기도 전에 보다 차원 높은 체험을 추구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초 위에 서게 될 때가지 단지 지식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간구한 기도의 요지입니다.

 

 

 


주님은 영광의 자리를 내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종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며, 또 우리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 반대로 그를 반역하고 증오로 가득 차서 서로 미워하고 주님을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이 마음이 바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그 “마음”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성장시켜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저주하며 내게 거짓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원수들을 사랑하며 축복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진실로 이 거대한 건물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구와 명령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변덕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지고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 엡3:18-19절(1)

 

 

 

 

3장 18~19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 모든 성도가 알아야 할 것


본문의 이 두 구절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있어 사도의 참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모든 기도는 이 간구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이 거대한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그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구절 속에서 하나님과 동료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어 왔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그 복음을 믿었고 또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는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사랑을 계속해서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다는 것은 확실히 단계의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고도 심오한 사랑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사랑으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갈망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일들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체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고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 사랑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강조하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강건해 짐으로서 능히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만이 사랑을 이해하며, 사랑만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을 지녀야만 합니다. 성경은 읽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말하는데 언뜻 보기에 여기에서 다소의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미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있다면 무엇을 더 필요로 하겠습니까? 위대한 성경의 원리가 바로 이 점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역설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무릇 가진 자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 위대하고 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그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정상에 도달하여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자”한다면 바로 지금 당장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에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버리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등을 돌리고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2.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


사도 바울은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함에 있어서 치수를 재는데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세상에서 모든 성도들이 주목해야 될 매우 영광스럽고 무한한 어떤 것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하고 놀라워하며 그것에 관해 경이를 느끼면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금 이 현세에 이것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그것은 가장 위대한 성도들의 특징 중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으며 참으로 이것은 모든 사랑의 특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기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1) 사랑의 넓이


여러분은 이 사랑의 넓이 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랑을 묵상하고 그것을 숙고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도들의 수입니다. 시대를 지나오며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만큼 그분의 사랑의 넓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온 세계 각처에 분포되어 있는 성도들의 수와 이제까지 살다간 모든 성도들의 충만한 수가 그분의 사랑의 넓이이며 우리는 어느 날 영광 가운데 이 장면을 완전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길이


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의 인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창세전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이 창세 이후로부터 “어린양의 생명책”(계13;18, 17:8)에 기록 되었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나를 알고 계셨다는 이 사실은 지극히 놀라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알고 계셨으며 우리의 이름은 그분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존재에 그것을 더하는 것과 그분이 그분의 마음을 우리를 위해 주시고 그분의 애정이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존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의 길이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변함이 없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인데, 중도에 포기하거나 저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3) 사랑의 깊이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며,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 내야 할 상급으로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고” 그의 영혼은 영광의 형적을 포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죄와 수치로 가득 찬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사 동정녀의 몸에 들어가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처럼 살았습니다. 그분이 태어났던 가난하고 비천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천한 일을 하셨습니까? 본래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다음에 그분께서 인간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오해를 받으시고, 증오와 적대와 악의를 받으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피곤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당하신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체포하고, 그분을 시험하여, 조롱하고, 야유하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잔인한 인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채찍질하며, 그분을 비난했던 잔인한 사람들과 골고다로 가는 도중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나무에 못 박히신 그분을 보시고, 갈증을 참아 내면서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 고민하며 부르짖는 그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담당되어질 때의 그 무서운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또한 한 번 그의 아버지께서 얼굴을 외면하시기조차 하시는 일을 당하셨으며, 그리고 그의 영혼이 떠나 죽으시고, 매장 되었으며 무덤 속에 눕혀졌습니다. 생명의 창조자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그분이 무덤 속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왜 이 모든 일을 해야만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러분과 저를 위한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즉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4) 사랑의 높이


사랑의 높이라는 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올리시기 위해서 목적하신 그 높이를 그가 서술한 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없앨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를 형벌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목적이며 그가 하신 모든 것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이 생명, 즉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시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사랑과 이 사랑의 지식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를 강건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이 에베소 교인들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기도한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 안에서 자라가며, 그것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3.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일


우리가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를 공부하면서, 사랑을 마음과 지성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사랑은 사랑만으로 이해 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이 같은 지식의 정신적인 면을 설명하는 한 단어를 일부러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외견상으로 보이는 모순은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지적인 과정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지적인 이해가 언제나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에 대한 개념을 순전히 감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감상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이성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랑 속에는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지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깊이 생각 할 때에 우리의 지성으로 이런 치수 들을 논해야 하고 자신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말에서 “알다”라는 말은 “깨닫다”라는 말보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의미가 더 강한 말입니다.

 

 

 


그 말은 지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과 경험 안에서 터가 굳어진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개념상의 지식을 넘어서 실험과 경험을 통해서 얻은 명백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안다”라는 말은 적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사랑 속에 잠겨 보고, 싸여 보며, 사랑에 매혹되고,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 적으로 알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지식에 넘치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말은 실제로 “탁월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탁월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다 할지라도 일부분만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 바다이이며, 다함이 없는, 찾아내려야 찾아낼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처음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하여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그 사랑을 누릴 수 있기에 좀더 많이 알고 좀더 많은 사랑을 누리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최심원(最深圓)


우리가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이해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우리들 공통적인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가지 동심원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구세주의 임재를 너무도 중요시함으로 인해 그분에게서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 할 때조차도 주님의 도움으로서 그 일을 수행할 것이며, 일을 하면서도 혹시 주님의 영광의 빛을 단 한 줄기라도 놓쳐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계속해서 그분을 응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몰두하지 못하고 약간 멀리 떨어져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일들에 바쁜 나머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눈을 돌리고 이따금씩만 자신이 사랑하는 빛을 응시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계획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옆에 서서 대개 다른 길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따금씩만 그 빛을 응시하고, 자신에게 희미하게 비추이는 빛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하면서 자신의 바쁜 일과와 다른 동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며, 자신의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을 졸이고 고심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내고 구주를 위해서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에 대하여 알 수도 있고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상태에 까지 도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땅을 떠나서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신비주의로 몰아붙여 성령을 소멸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가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최상의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먹고, 마시며,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일하고,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활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을 금하십니다. 동기가 먼저 와야 하며 그 동기가 항상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어떤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지식을 찾고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가장 내부에 있는 원 안에 속하여 주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바라보면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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