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전쟁

[스크랩] 신자가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지요?

수호천사1 2016. 2. 28. 20:24

신자가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지요?

[질문]


다름이 아니라, 저희 교회 청년들과 토론 중 어떤 청년이(A) 본인의 구원의 확신을 갖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이 크심으로 설령 본인이 피치 못할 선택으로 자살을 해도 구원자체는 취소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저와 다른 사람들은 신자가 자살을 했다면 그는 정녕 하나님을 믿었던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 청년은 하나님의 구원의 절대적인 능력이 자살이란 죄로 취소되는 게 아니라 했고, 저희는 자살은 단순한 율법적 죄가 아니라 했습니다. A청년은 자살이 그럼 하나님의 구원을 취소할 만큼 그렇게 큰 죄라고 성경 어디에 쓰여 있냐고 했고. 성령 훼방 죄의 논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 A라는 청년은 가롯 유다는 성령님이 내재 하시는 세대(오순절이후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내재하셨다는 주장)의 사람이 아니므로 구원 받지 못했다고 했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시인한 사람은 성령님이 함께 내재하시므로 절대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급기야 A의 누나에게 (총신대 신학대학원과정)전화해서 물어보게 되었고 A의 누나는 본인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을 믿으므로 자살도 하지 않지만, 만약 자살을 가정해 본다면 그래도 구원은 취소되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와 다른 이들은 자살은 결국 생명의 주인이 나임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인정했어도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A 청년에게 성경적으로 잘 얘기 해줄 수 있을까요?

[답변]

이 주제에 대해 한번 쯤 궁금해 하지 않았던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딱 부러진 결론이 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성경에 명확한 설명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은 현대의 독자와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구체적 언급이 전혀 없는 과제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마약, 낙태, 안락사, AIDS 같은 문제가 그 예이지만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면 얼마든지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은 현대에만 있는 시대적 현안이 아니라 고래로 있어온 것이며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길 문제입니다. 그런 중요한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가부간(可否間) 분명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뿐인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둘로 나뉜 것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보건대 이미 상당한 수준의 토론이 오고갔고 결론도 정확히 내린 것 같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질문자님께서 언급하신 그대로 자살이라는 죄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해 내는데 달렸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 전에 죄의 본질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에 대비해 기독교 구원이 얼마나 풍성한 내용을 지녔는지부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구원은 아시는 대로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인간 쪽의 자격, 능력, 조건, 공적은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영적인 시체인지라 하나님을 찾아서 그분 뜻대로 거룩하게 살려는 소원이 전혀 없습니다. 어둠을 사랑하여 죄악을 쫓기 바쁩니다. 간혹 절대자에 대한 어렴풋한 소망이 생겨도 인간 스스로는 자기 죄를 씻을 수도 아니 그분께로 나아갈 수조차 아예 없습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부패된 영혼을 먼저 변화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셔야 구원이 이뤄집니다.

바꿔 말해 단순히 인간의 의지적 선택과 결단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해선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접 이전에 혹은 동시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 존재를 새롭게 바꿔주어야만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자 선물이라면 당연히 그분 쪽에서 한 번 주신 선물을 다시 빼앗을 리는 결코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셨기에 구원을 선물로 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도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구원받았다면 예수님이 직접 명시한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말고는 신자의 어떤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간혹 인간 스스로 예수를 부인해 버리면 이미 주었던 구원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자연 히 취소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진술만 따로 떼어서 보면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시어 모든 자의 일생을 꿰뚫고 계시며, 특별히 구원을 주실 때에 이미 그 신자의 남은 생애를 통해 당신께서 영광을 받을 실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이 그런 자에게 구원을 주실 리는 없습니다.

앞에 인용한 에베소서 말씀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당신을 배반하도록 계획을 당신께서 미리 세워 놓고 구원을 주면 완전히 병 주고 약 주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스스로 개종하는 자는 제 삼자의 눈에는 구원이 취소되는 것처럼 비췰지 몰라도 엄밀히 따져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이 아닌 개종(改宗), 즉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스스로 택한 종교를 스스로 버리거나 다른 종교를 또 다시 스스로 택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만약에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취소될 구원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선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할 수 있느냐 여부보다 구원 받은 신자가 과연 자살을 할 수 있느냐에 오히려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나아가 자살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 즉 성령을 훼방하는지 여부도 따져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천국 도피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인지라 오직 본인과 하나님만이 구원 받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혹 본인도 모르거나 착각해서 구원 받은 양 행세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의 확신이 없다면 사실은 구원 받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우리의 영혼에 간섭하여 구원이 이뤄지더라도, 하나님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순간적 혹은 점진적으로, 본인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끔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이처럼 신자에게 생전에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구원이 다른 종교의 그것과 가장 다른 점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종교는 죽어봐야 그 운명이 결정되거나 아예 혈통이나 종교형식 자체로 구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죽기 전에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해준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와의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형성하여 이 땅에 그 관계를 시발로 해서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을 단순히 죄 씻음 받아 천국 가는 차원만으로 따져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새 생명을 부여받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변화된 삶으로 주위 사람들도 그 은혜에 들어오도록 영향을 끼쳐야 할 소명도 함께 받은 것입니다. 지옥에 갈 영벌을 면제 받은 것 외에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고 사는 것이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이자, 더 중요한 측면입니다.

물론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죽기 직전에도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서 새 생명을 누려본 적도 앞으로 그럴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가난하고 부끄러운 구원(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님)일 뿐입니다. 살아 있을 때 미리 구원의 확신을 주는 이유는 그런 가난하고 부끄러운 구원으로 일생을 끝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만으로 절대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과 동행하여 죄와 사단과 사망을 이겨내며 은혜와 권능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그분이 오히려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구원은 영혼이 천국으로 도피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럼 구태여 미리부터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이유도, 나아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올 이유조차 없습니다. 구원을 주기로 예정된 자들을 죽기 직전에 그냥 성령이 간섭해서 구원 주면 끝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공생애를 보냈다는 것은 구원받은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 속에서 거룩하고 신령한 열매를 맺히게 할 필요와 또 그 열매를 주위에 나눠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도록 당신께서 직접 그런 삶을 본으로 보여주시려는 중요한 뜻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 구원은 단지 죄에서 용서 받는 측면만으로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또 다른 측면을 반드시 함께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만 용서해주려면 얼마든지 존재 자체는 옛날 그대로 두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선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만 동참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새 생명을 더욱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위에 아직도 옛사람 가운데 죽어 있는 자에게 그 생명력이 흘러들어가게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본인부터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 쪽의 죄 씻음과 동시에 인간 쪽의 중생(重生)이 동시에 이뤄져야 유효합니다. 말하자면 창조 당시의 모습으로 회복되어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명령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뿐 아니라 부활에도 연합해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6)

구원 받은 확실한 증거

그러나 죄 씻음과 중생은 서로 다른 현상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신 행위라는 측면에서 죄 씻음과 그 행위의 결과로 인간에게 생긴 상태라는 측면에서 중생으로 나눠서 설명한 것뿐입니다. 죄 씻음이 중생이자 중생이 죄 씻음입니다. 그렇다면 씻어지는 죄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는 죄와는 다르다는 뜻이 됩니다. 즉 새 생명을 받은 것이 바로 죄 씻음이기에 그 씻음은 일반적인 윤리적 죄를 용서 받는 차원이 아니라 새 생명이 없는 상태를 고친 것이 됩니다. 한 마디로 타락한 옛 사람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근본적 죄입니다.

원죄로 영혼이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인간은 존재 자체가 철저하게 더럽고 추해졌습니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sinner)이기에 죄 된 행동(crime)으로 나타나지 죄를 범했기에 죄인(criminal)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의 죄 된 행위를 고친다고 구원받을 수는 결코 없으며 그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자기 존재를 바꾸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주어야 하고 인간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껏 죄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던 사단의 영을 하나님이 쫓아내고 성령님이 그 자리에 임재 해야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 임재의 순간 비로소 그간 하나님을 거부하고 배반했던 원죄(original sin)와 그 죄책이 벗겨집니다.    

그러나 구원으로 신자가 갑자기 거룩한 성자가 되어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뿐입니다. 이제는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게 된 것뿐입니다. 이전에는 죄와 흑암과 죽음을 향해 혼자서 걸어가면서 사단의 농간에 놀아났다면 이제는 의와 빛과 생명을 향해 하나님의 손을 잡고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자의 가장 큰 특성은 그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 쪽으로 향해 있기에 다시는 그분을 포기하고 사단을 쫓겠다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새 생명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 생명을 받지 못한 이웃을 예수님의 십지가 긍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웃에게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는 신자마다 각 자 사정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전혀 실천도 못하고 오히려 죄악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님과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근본적인 변함이 없습니다.  

자살은 죄가 아니다.

잘 아시는 대로 복음 안에 들어오면 예수를 믿기 전에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용서 받습니다. 아주 많은 죄를 아니 거의 대부분을 자발적으로 회개하지 않고 넘어갔어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근본 이유도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죄 씻음을, 심지어 참 회개도 할 수 없음을 하나님이 누구보다 더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살은 그런 용서 받을 수 있는 일반적인 죄와는 다릅니다. 자살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져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이 확실히 있다면 자살하지 않습니다. 생명이란 원래 스스로 보존 발전하는 특성을 지녔지 스스로 포기 사망하려는 본성은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수명이 다해 쇠퇴해져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도 생명이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주관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할 인간의 생명은 더더욱 예외가 아닙니다. 자살은 그럼에도 인간이 자기 생명을 다스리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었음이니라.”(창9:5,6) 생명의 피는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사람이 살인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피의 보수를 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죽였기에 당신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에게 하나님이 최초로 주신 선악과 금령은 어떤 뜻입니까? 하나님의 권위에는 절대 도전하지 말되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의 다른 모든 윤리적인 죄는 용서받을 수 있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만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십자가 복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죄와 구원에 관한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치도 변함없습니다.  

구원으로 얻은 새 생명은 영적인 생명이므로 육적 생명을 죽이는 자살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윤리적 죄는 인간 존재 자체는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존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본성 때문에 신자는 사단의 방해에 넘어갈 수 있고 때로는 고의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라면 불신자 시절과는 달리 차후 회개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죄책(guilt)은 깨닫습니다. 영혼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재 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존재 자체가 살아 있는 한 회개의 기회는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또 설령 신자가 자발적 회개를 등한히 해도 성령이 강권하여 회개로 인도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후에 짓는 모든 윤리적 죄는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살은 인간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는 죄입니다. 회개하여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봉쇄해 버립니다. 물론 회개하지 않았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영혼에서 성령의 임재를 중지시켜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은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당신을 직접 거역하거나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적극 방해하는 죄입니다.(성경문답 #106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참조 바람) 그런데 자살은 성령을 훼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을 아예 자신의 존재에서 없애버리는 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새 생명 가운데 행하려는” 소망이 있다면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살이 용서 받을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

신자의 자살이 용서 받을 수 없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낙태와 안락사와 자살 방조 등은 하나님께만 속한 생명을 인간이 끊으려는 것으로 분명 그분의 뜻에 위배되는 큰 죄입니다. 그래서 작금 보수복음주의 진영이 불신 세상과 진보진영을 향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살을 하면 지금껏 목청 높여 그들을 설득, 반대, 심지어 정죄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완전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신자가 자기 구원은 전혀 취소되지 않는다고 자랑(?)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면 너무나 표리부동한 위선자라는 비방을 받을 것 아닙니까? 생명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그런 일에 반대해놓고 자기 생명은 파리 목숨조차 못하게 취급하면 마치 자기가 불륜을 저지르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죄라고 비방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불신자들보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해놓고는 뒤에서 죄를 지어 입만 살아있는 예수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판국에 말입니다.    
    
자살을 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구원의 의미가 얼마나 풍성한지 미처 모르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새삼 강조하지만 죄란 인간이 행한 어떤 잘못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중심에 두기 싫어해 부인 외면 배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심히 좋아 하셨던 참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상태가 죄입니다.

따라서 구원도 단순히 이전에 지었고 앞으로도 지을 죄 된 행동을 용서 받는 수준이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그 영혼만 천국으로 도피하듯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건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죄인의 영혼에 임재 함으로써 하나님을 다시 자신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육체와 정신과 영혼 모두가 이 땅에서부터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이끄신다는 뜻으로, 거룩한 그분의 통치를 받아 풍성한 새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새 생명은 신자가 그분과의 관계만 올바르게 유지하면 자생적으로 충만해지는 본성이 있습니다. 절대로 약화, 변화,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하면 당신의 나라는 당신께서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해 주십니다. 그런데 신자 스스로 그 새 생명의 활동을 끊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새 생명을 아직 받지 않은 것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살한다는 말은 기독교 신자에게만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지 않습니까?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닥쳐도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자살은 그 어려움을 하나님조차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안 것입니다. 아니 부인한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살을 윤리적 죄보다 오히려 더 안타깝게 여기는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오죽하면 믿음이 있는데도 자살했을까? 얼마나 형편이 어려우면 그렇게 했을까?”라고 동정합니다. 반면에 현재 바람이 나서 두 집 살림을 하면서 교회에선 경건하게 장로 행세를 하는 자가 있다면 아주 가증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나 만약 그 장로가 죄책감에 사로 잡혀 괴로워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스스로는 놓지 않겠다면, 즉 교회 출석을 계속하면 자살자보다는 훨씬 경건한 것입니다. 이러다 언젠가  하나님에게 크게 징계 받을 것이라고 염려하면서도 죄가 주는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그 역시 우리와 동일하게 진토 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스스로는 놓지 않겠다는 것은 언젠가는 회개해 돌아가거나 아니면 항상 죄스런 마음을 지난 채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죄책조차 없으면 아예 신자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는 다른 모든 것은 관두고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가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니 하나님 쪽에서도 신자가 포기하도록 절대 방치하지 않으시며 억지로라도 끌고 가십니다.      

반면에 자살하는 신자의 심경은 어떠하겠습니까? 틀림없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도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 정 해결해 주지 않으면 교회도 안 나가고 하나님도 아예 모른 척 할 겁니다.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해결 안 해주면 진짜 죽을 것입니다. 절대 빈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 불신을 넘어서 아예 협박까지 했습니다. 부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식이 부모 자식 관계를 끊겠다고 협박할 수 있습니까? 또 실제로 끊고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자살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정(情)만 끊은 것이 아닙니다. 비유컨대 자식이 먼저 소송해서 부모를 호적에서 완전히 제거하고 나아가 부모를 아예 생매장시키는 꼴입니다.

자살에 비해 장로의 간음을 더 나쁘게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자살은 직접적으로는 본인에게만 피해를 주는 반면에 간음은 여러 당사자에게 그렇게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죄가 아니라는 불신자 시절의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죄의 궁극적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은 것입니다.

간음 같은 윤리적 죄는 인간끼리 범하는 죄입니다. 물론 그런 죄의 근본적 시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그 미치는 효과는 인간이 대상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바로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대드는 죄입니다. 모든 윤리적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성령의 임재마저 중지시킨 자살이야 말로 바로 그런 죄입니다.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너무 문자적으로 고집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구원 후에 어떤 죄를 지어도 이미 십자가에서 모든 죄의 용서가 이루어졌기에 구원이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교리는 분명 맞습니다. 그러나 자살마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원과 죄의 본질은 모른 채 순전히 문자적 의미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와 인간에게 범하는 죄로 나누는 가장 기초적인 구별마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리라도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고 그분의 나라가 확장되는 모습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교리로만 머무르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자 없는 분명한 진리일지라도 교리라는 도그마만 붙드는 교조주의를 낳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반드시 구원 받은 자의 새 생명이 그것도 육체, 정신, 영혼이 합쳐진 전 인격체에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실현되어져야 합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일단 구원 받았으면 취소되지 않는다는 교리를 생명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이 없어지고 죽음으로 결말짓는 자살에마저 확장시키려 고집하는 것은 명제적 복음만 붙든 것이지 실제 살아 역사하는 복음으로 이해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리적으로도 죽음은 죄의 삯이지 않습니까?

두 가지 진리가 서로 상치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만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는 뜻입니다. 지금 신자가 자살해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는 진리에 위배됩니다. 그런데 한 번 구원 받으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살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적으로 A 군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해 하셨는데 그 어떤 설명보다 그분에게 이렇게 한 번 정말로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너라면, 네가 확실히 구원 받은 온전한 신자라면 과연 자살하겠는가? 아니 자살할 마음이 들겠는가? 꿈이라도 꾸겠는가?”라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만 더 강조하겠습니다. 참 구원을 받은 가장 큰 표시는 비록 인간 사회에서 어떤 죄악에 빠져 있어도 하나님의 손을,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놓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은 능치 못할 하나님께 피치 못할(과연 진짜 피치 못할 사정인지 모르지만) 사정으로 그분의 손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내 쪽에서 영원히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새 생명이 그에게 임재 해있지 않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5/12/2008 박 신 목사

 

신자가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지요?”에 대한 보완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인 가운데 자살 충동을 느낀 자가 19.2 %에나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실천신학회에선 “현대인의 자살증가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은 없는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자살을 무조건 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인들에게  성경적으로 잘 가르칠 것을 촉구했습니다.(뉴스파워 6/10 기사)

이런 기사를 접한 분들이 성경문답에 올린 상기 제목의 글을 읽고선 자칫 오해할 소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주위에서 자살하는 기독교인들이 간혹 나오는데 그럼 그들은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랐다가 다시 지워지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글의 요지는 자살과 구원의 취소여부를 따지기보다는 진정한 신자라면 그 영혼에 이미 거하고 있는 성령의 간섭으로 자살까지는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기독교인도 온갖 정신 질환이 들 수 있고 심지어 자살까지 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자살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진정으로 중생한 참 신자는 일부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다 신자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단순히 기독교인이 아닌 중생한 참 신자를 의미함, 자살의 충동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정말 주위 사방이 벽으로 완전히 막혀서 탈출구가 그것 말고는 없는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것도 수시로 말입니다.

그러나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것과 자살을 감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말로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려면 치밀하게 계획하고 도구도 장만해야 하며 또 그러는 동안에 시간적으로도 상당한 경과가 지납니다. 그 사이에 신자 안에 하나님이 주신 참 생명이 있고 또 성령이 간섭한다면 자살의 결행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전국에 여호와를 아는 자라고는 혼자 밖에 남지 않은 듯싶은 절망에 빠졌고 곧 이사벨의 군대가 와서 자기를 죽이리라는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기로 작정했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19:4) 심지어 하나님더러 자기 목숨을 앗아가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지는 않았습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3:11)라고 하면서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그도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찌라도 내가 있지 아나하리이다.”(7:19,21) 졸지에 최고의 불행을 겪고 몸에 병이나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했던 욥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할 정도이지 않습니까? 그는 최소한 하나님이 자기를 침 삼키는 순간도 놓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는 “하나님 이제는 도무지 아무런 수가 없으니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옵소서!”라고 간구는 할지언정 스스로 자살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까지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서 절규하는 신자를 하나님이 그대로 죽도록 놔두시겠습니까? 특별히 순교시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계획이 따로 없는 한 절대 그러지 않을 것 아닙니까?        

따라서 “신자가 자살하면 구원이 취소되는지요?”라는 질문은 엄밀히 따지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라면 자살할 충동은 느껴도 자살을 결행하지는 않고 또 성령이 그 전에 막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회 안에 중생하지 않은, 참 신자가 아닌 단순히 기독교인인 경우는 때로 자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았기에 사실은 여전히 구원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것이므로 그 취소여부와는 처음부터 관계없습니다. 따라서 정작 따져 보아야 할 주제는 신자가 과연 자살할 수 있을지 여부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혹시라도 중생한 신자가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사단에 미혹되어 순간적으로 자살하게 되는 가능성이지만 그것도 사실은 무망합니다. 우선 사단은 욥기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신자를 함부로 조종할 수 없기에 신자의 생명을 앗는 것은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스스로 감정에 격동되는 경우도 같은 맥락입니다. 거듭난 이후의 신자의 일생은 욥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강한 오른 손으로  죽을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영원토록 붙들고 계시므로 신자가 자살하도록 방치하실 리는 결코 없습니다.

재삼 강조하지만 거듭난 신자에게 와있는 하나님의 참 생명은 절대로 다시 상실되지 않기에 스스로 죽는 일은 참 신자에겐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만 차마 제 손으로 목숨을 끊지 못합니다. 하나님더러 죽여 달라고 간구까지는 해도 말입니다.

교회는 자살 충동을 느끼는 교인들에게 단순히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거나, 마음의 질병을 심리학적으로 치유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성령이 간섭하여 새 생명을 부여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교회마저 자살에서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그럴수록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6/25/2008      

제대로 다루지 않은  미진한 부분이 남아서 또 다른 오해를 부를 것 같아서 조금 더 보충합니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정신질환에는 걸릴 수 있습니다. 또 그 질환으로 인해 자살하거나 자살처럼 보이는 사고사를 겪는데 이 주제와는 별도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으로 이미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었다면, 구원 여부는 하나님만이 아시고 주관하지만, 그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은 것이기에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는 귀신 들려 완전히 귀신의 종이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서 거듭나서 성령이 내주하게 된 신자는 사탄의 세력에 의해 시험, 유혹, 훼방은 받을 수 있으나 그 종은 되지 않습니다. 신자 안에 임재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그런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신질환은 이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최근의 의학과 심리학의 발달로 귀신들린 것처럼 보이는 증상 중의 대부분이 뇌의 신체적 이상으로 인한 육체적 병으로 밝혀졌고 약물로 치료가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정신분열, 조울증, 뇌의 이상으로 인한 중증 우울증 등을 치료하지 않아 병이 깊어지면 환청이나 환시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병으로 죽은 것이지 자신이 의도하고 계획하여 하나님이 주시고 그분만이 주관하시는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 아니기에 예외인 것입니다.

최근 이런 질환이 성행하기에 교회는 이런 이들의 전인적 치유를 돕기 위한 전문적 상담 치유 사역을 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전문가가 없으면 외부 전문가에게 협조 위탁을 구해야 합니다. 전인적 치료라는 뜻은 뇌 기능을 정신과 의학으로 정상화 시키고, 그 지정의 활동을 심리학적 기제를 응용하여 상담 치유 회복시키되, 무엇보다 영적으로 복음의 진리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과 하나님 안에서의 새 생명을 스스로 온전히 정립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2008-06-26 박 신 목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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