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머리말
본 강의록은 서 철원 교수님의 허락 아래 학생들의 편의와 효과적인 학습을 위하여 강의 녹음 테이프를 풀어서 정리한 것입니다. 강의실 분위기와 교수님의 독특한 표현과 그 의미를 잃지 않도록 설명과 소소한 이야기들을 빼지 않고 거의 다 수록하였읍니다. 그래서 약간의 중복이 있을 수 있고 더러는 매끄럽지 못한 구어체의 문장들도 있읍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강의를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하였으나 저희들의 이해 수준 때문에 편집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을 수도 있으니 양햬를 바랍니다.
본 교재의 내용은 87년도 1학기 신학부 교회론 강의입니다. 교수님께서 처음에는 벌코프의 신학개론을 교재로 사용하셨으나, 86년의 강의 내용을 기초로 87년에는 조그만 분량의 강의록이 나왔고 이제 87년의 대폭 확장된 강의 내용을 이렇게 강의록으로 꾸며서 발행하게 되었읍니다.
특별히 이 교재는 목회자와 신학도뿐만 아니라 교회학교 교사들과 청년들에게도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을 사용하시는 분들이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 구원 경륜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와 은혜가 넘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강의록이 해마다 더욱 부요해질 수 있도록 교수님과 편집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988년 3월
편집자 일동
목 차
머리말 --------------------------------------------------------- 1
목차 ----------------------------------------------------------- 2
제 3 권 교회론 ------------------------------------------------- 4
제 1 편 서론적 고찰 ------------------------------------------- 4
제 1 장 교회론과 성령론과의 관계 ----------------------------- 4
1.오순절파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심, 2.성령강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 3.성령은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4.현대 신학적 논의의 촛점은 그리스도와 영과의 관계임
제 2 장 교회의 형편 ------------------------------------------ 7
제 2 편 교회 --------------------------------------------------- 8
제 1 장 교회의 본질 ------------------------------------------- 8
제 1 절 교회의 정의 ------------------------------------------ 8
1.어원적 정의, 2.성경적 정의
제 2 절 교회론 전개의 기초: 그리스도와의 연합 ---------------- 9
1.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는 연합, 2.성령에 의한 신비한 연합,
3.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 논의의 기초, 4.성도의 교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능
제 3 절 본질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 11
1.로마교회의 두 교회론, 2.비판, 3.구교의 신교화, 신교의 구교화,
4.개신교회의 교회관: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 5.교회의 본질에
관계된 목사의 사명, 6.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문제
제 2 장 교회의 특성 ------------------------------------------- 15
제 1 절 교회의 속성 ------------------------------------------ 15
1.통일성, 2.거룩성, 3.보편성, 4.사도성
제 2 절 몇가지 관점에서 본 교회의 여러 성격들 ---------------- 21
1.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2.유형교회와 무형교회,
3.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제 3 절 교회의 시대적 특징 ----------------------------------- 27
1.족장시대의 교회, 2.모세시대의 교회, 3.신약시대의 교회
제 3 장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 30
제 1 절 말씀의 참된 전파 ------------------------------------- 30
1.말씀전파와 교회의 발생과 존속, 2.말씀 선포의 내용,
3.말씀 선포와 사도적 권위의 계승
제 2 절 성례의 정당한 집행 ----------------------------------- 31
1.성례의 내용을 설명함, 2.한 잔과 한 떡을 먹도록 해야 함,
3.성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집행해야 함, 성례의 집행자와
대상자들
제 3 절 권징의 신실한 시행 ----------------------------------- 34
제 4 장 교회의 정치 ------------------------------------------- 35
제 1 절 교회 정치에 관한 이론들 ------------------------------ 35
1.퀘이커파와 달비파, 2.에라스티안파의 제도, 3.감독파의 제도,
4.로마교회의 현 제도, 5.회중파의 제도, 6.국가교회 제도
제 2 절 개혁파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 원리 ------------------ 38
1.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세의 원천이시다
2.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3.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
4.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제 3 절 교회의 직원 ------------------------------------------ 41
1.비상직원, 2.통상직원, 3.직원의 소명과 취임
제 4 절 교회 회의 -------------------------------------------- 51
1.각종 교회 회의, 2.지교회의 정치, 3.광대 회의
제 5 장 교회의 권세 ------------------------------------------- 55
제 1 절 교회 권세의 원천 ------------------------------------- 55
제 2 절 이 권세의 본질 --------------------------------------- 55
1.영적 권세, 2.사역적 권세
제 3 절 여러 종류의 교회 권세 -------------------------------- 57
1.교리권 혹은 교훈권, 2.치리권, 3.봉사권
제 3 편 은혜의 수단 -------------------------------------------- 62
제 1 장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 ------------------------------ 62
제 1 절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말씀 ----------------------- 62
제 2 절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 64
제 3 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의 두 부분 ------------------- 67
제 2 장 은혜의 수단인 성례 ------------------------------------ 70
제 1 절 성례의 정의 ------------------------------------------ 70
제 2 절 말씀과 성례와의 관계 --------------------------------- 70
제 3 절 성례의 구성 부분 ------------------------------------- 72
제 4 절 성례의 필요성 ---------------------------------------- 74
제 5 절 구약성례와 신약성례와의 비교 ------------------------- 76
제 6 절 성례의 수 -------------------------------------------- 77
제 3 장 기독교 세례 ------------------------------------------- 79
제 1 절 세례의 제도 ------------------------------------------ 79
제 2 절 세례의 바른 양식 ------------------------------------- 79
제 3 절 세례의 합법적 시행자 --------------------------------- 81
제 4 절 세례받을 사람들 -------------------------------------- 82
제 4 장 성찬 -------------------------------------------------- 84
제 1 절 성찬의 제정 ------------------------------------------ 84
제 2 절 성찬이 의미하고 날인하는 것들 ------------------------ 84
제 3 절 성찬과 주의 임재의 문제 ------------------------------ 86
1.로마교회의 견해(화체설), 2.루터파의 견해(공재설),
3.쯔빙글리파의 견해(기념설), 4.개혁파의 견해(영적 임재설)
제 4 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효과 ---------------------- 90
제 5 절 주의 성찬과 그 참여자 -------------------------------- 91
제 3 권 교 회 론
제 1 편 서론적 고찰
제 1 장 교회론과 성령론과의 관계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발생했다. 그러면 그 전에는 교회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구약의 교회가 있었고 예수님 재세 당시의 교회는 잠재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좀 사변적이지만 잠재적 교회로 창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정식으로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출발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것이다.
통상 벌코프의 재래 조직신학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란 용어의 정의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야 맞기는 하지만 교회란 말을 안 쓰다가 처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그렇게 전개해야 맞다고 할 수 없다. 신학은 어느 한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신학 활동은 교회의 한 활동이다. 그러니 처음에 교회가 무엇이냐고 어원을 찾고 정의해야 교회가 무엇인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교회가 발생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직신학은 성령론 아래 교회론을 포함시키거나 성령론과 연관해서 교회론을 연구해야 한다. 성령론을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론 다음에 성령론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교회론을 성령론하고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발생했기 때문에 성령론 안에 혹은 성령론과 함께 교회론을 논하는 것이 바르다.
1. 오순절파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심
그러면 성령은 그리스도와 별개적인 존재로 오셨는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오순절파처럼 오해한 것이 된다.
알미니안파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순절파에 의하면 Dispensationalism (세대주의)로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구약은 성부 시대이고 다음 신약은 성자 시대이고 그 다음엔 성령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초보적인 신앙 단계가 성부 하나님을 믿는 고넬료와 같은 신앙 단계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었으나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그때는 성부 하나님 시대니까 그런 신앙 단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래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같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이 성령 시대로서 성령을 신앙하는 제일 높은 단계인데 이때가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완전해진다. 이것이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제2의 특별은혜의 역사라는 교리이다. 알미니안파만 아니라 현재 오순절파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신학의 배경, 뿌리, 근본이 어디냐 하면 완전주의를 부르짖는 알미니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부흥이 목표여서 그 신학이 어디서 왔든지 간에 성령 충만을 외치고 뜨거워져서 열정적으로 예수 믿어 축복도 받고 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이다. 옛말처럼 꿩 잡는 게 매인데 우선 잡고 보자는 식이어서 신학 따질 것이 있느냐고 말한다.
바로 알미니안에서 오순절파가 주장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나왔다. 그러므로 오순절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직 어린아이이고 장성한 그리스도인,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해진다. 그것이 곧 오순절의 은혜이다.
2.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성령께서 오시므로 교회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이 오시기만 하면 되느냐? 또 성령이 별개의 독자적 존재로 오시느냐?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순절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분리된, 구분된 독자적인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이고 그 사건의 완성과 완결이다.
성령께서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영하고 바뀌어져서 없어져 버렸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글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살려주는 영,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고린도후서 3:17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주는 영이시다는 문장을 주어와 술어를 반대로 바꾸어 해석하여 " 영이 곧 주이시다"고 하는 주석가도 있다. 즉 ho de kyrios to pneuma estin인데 여기서 to pneuma estin으로 되어 있으니 ho de kyrios estin to pneuma로 바꾸어 읽을 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이후에는 영이 그냥 오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또 오시는 영이 독자적으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시는 영이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오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다. 그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있기 전의 영과 다른 별개의 영이란 말이 그리스도와 같아진 영이다. 기독론적 성령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래서 베를린 신학교 Otto Dilschneider 교수는 성령론을 가리켜서 정의하기를 " 오순절 이후의 기독론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신다 혹은 영 안에서 오신다고 할 것이다. 완전히 그리스도로 인각되어 그리스도의 특성을 지닌 영이 우리에게 오신다. 그 영이 와서 우리에게 나타나면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성령이 강림하셔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발생하게 하셨다.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게 하여 다 죄 아래서 하나님과 적대되어 있는 백성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낸다.
세대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것같이 신약에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3. 성령은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그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시냐 할 때 성령을 그리스도와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된다. 영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신 영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나도록 자기의 얼굴을 그리스도로 나타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Raymond Brown이 영을 정의하기를 "그리스도가 지상에 안계실때 그리스도의 현존의 영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계시지 않지만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오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살려주는 영, 생명을 주는( zoopoioun ) 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 라고 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냥 하나의 별개의 단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역사하니까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든다. 성령께서 오심으로 죄와 죽음 아래 있는 백성들을 새 백성으로 살려서 교회가 되게 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연결하고 결합하는 띠이고, 고리 혹은 끈이다. 그러므로 교회론도 성령론과 기독론과 함께 논의해야 바르게 이해된다.
4. 현대 신학적 논의의 촛점은 그리스도와 영과의 관계임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논의해 왔던 주요 논의는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의 논의가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곧 삼위일체론적인 논의이다.
제 2 장 교회의 형편
사실 기독교인이 그렇게 많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개신교 교인수가 2-3억, 카톨릭 교인수가 7억 정도라고 한다. 87년 3월에 Simon kistmaker와 이야기했는데 화란 인구 45%가 종교를 물으면 개신교도 카톨릭도 아닌 무교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화란에는 교황 물망에까지 올라간 유명한 추기경이 둘이나 있다. 그런데 화란 카톨릭은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왜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냐고 물으면 변명하기를 고해성사 안하는 곳이 우리 화란뿐이냐고 말한다. 전에는 교회 안나가는 사람도 종교란에 카톨릭이라고 썼는데 이제 아무것도 안쓰는 사람이 45%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어떠냐고 물으면서 미국도 같은 계열에 속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키스트막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형편은 40%가 복음주의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45%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 화란은 점점 약해지고, 미국은 40% 이상이 복음주의 교회에 속하는데 이것이 미국의 힘이라고 했다. 그들이 T.V. 방송국, 라디오 방송국을 다 가지고 있고, 또 계속 책을 많이 내고 있어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려고 보통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번 곤두박질 쳤다가 회복 단계에 있으니 미국이 아직 덜 약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은 정치 현실이 저급해도 그래도 기도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라 할 수 있다. 교회론을 지식으로만 배우지 말고 정말 바른 개혁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배워야 할 것이다.
제 2 편 교 회
제 1 장 교회의 본질
제 1 절 교회의 정의
1. 어원적 정의
교회를 말할 때 보통 라틴 계통에서는 Ecclesia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어 ekklesia에서 온 말로 ek ( out of )와 kaleo ( call )의 합성어로서 "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셨다 " 는 뜻이다.
그리고 구약에는 qahal (Hebrew)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qadosh 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qadosh의 어원이 qad (cut)이므로 qahal의 뜻은 "세상에서 혹은 이방 종족에게서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를 보통 어원적으로는 "불러내서 모여진 단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게르만 계통에서는 Ecclesia를 쓰지않고 Church를 쓴다. 이 Church는 독일말로 Kirche, 화란말로 Kerk인데 이런 말들은 희랍어인 Kyriache에서 나왔다. 그 뜻은 " 주님께 속한 것 혹은 주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Church, Kirche, Kerk는 주께 속해진 자들의 단체가 교회란 뜻으로 썼다.
가장 쉬운 말은" the called out"이다. 그러나 그렇게 글자풀이만 하여 " 세상에서 불러내서, 뽑아 모은 단체가 교회다 " 라는 등의 정의는 바른 정의가 못된다. 어원적 정의로는 미흡한 점이 있다.
2. 성경적 정의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시지 않는다. 사람을 부를 때 보통 그 이름을 부르나 이 경우에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서 오라 하는 곳에 모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아시지만 우리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그러나 불렀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그래서 부른 그들을 새 사람이 되게 해야 하니까 죄를 씻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으신다. 이것으로 교회가 다 됐느냐? 이제까지의 정통 교회는 여기까지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어서 교회에 들어오면 다 된 줄로 생각한다.
3)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
그러나 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결합시킨다. 그냥 쇠 용접하듯 붙이는 것이 아니고 생명적 연결을 시키는데 그런 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인 것이다.
4) 종합적 정의: 그리스도의 몸
이 세가지를 종합하여 교회의 정의를 내린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셔서 예수의 피로 구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심으신 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soma Christou ) 이다. 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가 일치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을 고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나사렛 이단 종파를 박멸하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를 잔해하고 핍박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을 부르시면서 하시는 첫마디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다. 그러니 여기서 보면 교회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 2 절 교회론 전개의 기초: 그리스도와의 연합
1.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는 연합
교회는 다른 곳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성령이 별도의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고 애쓰는데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가? 방언, 치병(신유), 투시, 예언, 입신등인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성령이 가져온 은혜는 다른 은혜가 아니라 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은혜이다. 다른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게로 가져온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기와 교회를 일치시킨다. 다른 생명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동일한 생명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
2. 성령에 의한 신비한 연합
그러면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백성과 그리스도간에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이 있다. 이 연합은 막연한 공상적인, 추상적인 연합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물질적인 연합은 아니지만 가장 실제적이고 (realis) 구체적인 연합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루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이 연합의 고리(띠)이다. 성령에 의한 연합이니 신령할 뿐만 아니라 변개의 여지도 없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데는 성령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면 성령이 어디 계시느냐? 교회에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령의 거소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거소이기 때문에 성령을 떼어놓고 교회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론을 성령론과 분리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교회가 발생한 것이 성령의 오심으로 된 것이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 논의의 기초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하며, 그 생명의 연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이다. 그러므로 교회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비한 연합, 생명의 연합 때문에 자기와 교회를 하나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 생명적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하고 교회를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체와 머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의 근본 핵심이다.
이 신비한 연합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칼빈인데 그가 이 신비한 연합에 대해 보통으로 감격해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이 교회의 통일성을 제일 많이 강조했는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 칼빈의 마음을 감동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나누었다는 로마교회의 비난에 대해 적절히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최소한의 바른 말씀의 형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만 답했던 것이다.
4. 성도의 교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능
또 지체간의 연결 때문에 상호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지체간의 상호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과 특히 최근에는 본훼퍼(Bonhoeffer)가 성도들의 교제를 많이 강조하였는데 우리는 성도 상호간의 교제가 가능한 것은 지체와 머리가 연합되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communio sanctorum은 unio cum Christo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연합을 전제하지 않고 교회에 개별적으로 가담한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유기체라는 의식이 없고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있는 그런 존재들이지 개별적으로 와서 함께 엉글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심기워져 있고(insertio in Christum),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다(insistio in Christum).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의 분열은 불가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나눔은 곧 그리스도를 나눔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론을 잘 알아야 교회 정치를 바로 하여 교회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교회를 잘 모르니 목사들이 정치와 돈에 제일 약하다. 유신 정권 때 목사님들 500만원씩 주어서 잡아라고 했다. 그런데 200씩 먹고 다 타협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 500이나 다 받아먹고 떨어질 일이지 하면서 비웃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일부 목사들의 경우겠지만. 교회론을 정말 잘 배워서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제 3 절 본질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1. 로마교회의 두 교회론
로마교회는 교회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외부적 혹은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로마 교회는 바로 이 외부적 조직체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nulla salus extra ecclesiam) 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조직체는 가르치는 교회 (ecclesia docens)로서 사제들, 주교들, 대주교, 추기경, 교황 등 교권자들로 이루어진 단체이다.그래서 ecclesia docens가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과 같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고, 반면에 신자들의 단체인 듣는 교회( ecclesia audiens)는 그 속성들을 간접적으로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르치는 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하나로 조직되어 있으니까 한 교회이고, 그 교회의 조직이 거룩하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예배모범과 윤리적인 결정과 교리적인 결정에 있어서도 거룩성을 귀속시킨다. 말하자면 그들의 거룩성은 성도들의 내적인 거룩이 아니라 그들 교회의 거룩이다.
이렇게 로마교회는 교회를 이원화하여 진정한 교회는 사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이고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준교회라고 한다. 지금 개신교회도 거의 카톨릭화해서 목사, 장로급 이상에서 교회를 이루고 룬영하는 것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완전하게 가르치는 교회가 진짜 교회라 하여 거기에 교회의 특성과 본질을 부여한다.
준교회는 평신도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평신도는 상부 조직인 가르치는 교회가 가르치는 전체를 진리의 체계라고 믿으면 그것이 신앙이다.
2. 비판
그러니 로마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령을 강조한다. 종교 개혁 시대에도 로마교회가 가장 성령을 강조했다. 그래서 칼빈이 소위 재세례파, 광신파들하고 로마교회를 일치시켰다. "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광신파와 같다. 성령의 역사가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너희에게 그런 것이 없다. " 성령께서는 성경의 저자이시므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교회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그대로 믿는, 그냥 그런 것으로 아는 내포적인 신앙( fides implica)의 자세를 가졌다. 개신교회는 진리의 분명한 지식을 가르친다. 그리고 사제와 평신도의 벽을 헐었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의 봉사자이다. 그 말씀의 봉사 때문에 목사는 권위가 있고 그 외에는 다 똑같다.
3. 구교의 신교화, 신교의 구교화
지금 로마교회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많이 달라졌다. 로마교회도 개신교를 본따서 수녀들을 보내어 구역 예배를 한다. 로마교회도 이제는 복음을 강론하고 성경을 가르친다. 그런데 오히려 개신교는 모이는 것이 주가 되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communio sanctorum 으로 교제하는 교회여서 교제만 하니 이제는 반상회처럼 되어버렸다. 지금은 목사도 완전히 귀족 세력으로 정착을 했다. 앞으로 교회론을 하면서 개신 교회의 현상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구교화 현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4. 개신 교회의 교회관: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
개신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교회의 조직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에서 찾는다. 교회의 제일 근본되는 것은 거룩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가 교회의 본질이다. 외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교회의 특성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적인 영적 교통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곳 외에는 구원이 없다. 조직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렇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으므로 교회가 되고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가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인데 칼빈이 반복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여서 모든 신자들이 다 교회에 와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화된 사람이라도 설교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다고 칼빈은 말했다.
교회가 생명을 갖고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 연합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연합이 강화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이다. 말씀으로 성도들의 내적인 영적 교통이 이루어진다.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5. 교회의 본질에 관계된 목사의 사명
말씀의 선포와 교제가 약화되면 조직을 강화한다. 성도들의 교제가 없어지면 조직화 추세가 우세해진다. 그리고 은혜가 감소하고 영적 역사가 후퇴한다. 성도들의 교제가 잘 되려면 항상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없이 사람만 모이면 안된다. 말씀이 없어지면 곧 세속화이다. 교회는 말씀을 떠나서 존속하지 못한다. 말씀이 없어지면 교회가 곧 사람들의 조직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럴 때 교회가 기업이 된다. 말씀 없이 모이고 말씀 없이 흩어지면 그것은 완전히 세상단체이며 사교 단체이다. 그냥 모일 수는 없으니까 의식만 남는다.
말씀이 없으면 성령만 강조하고 결국 체험으로 되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신비주의와 자유주의는 다른 점이 없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체험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체험이 말씀에 의해 해석되고, 표준이 말씀이다. 그러니 자기의 체험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개신교의 생명은 말씀의 선포에 있다. 교회가 거룩하고 바른 교회가 될려면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한다, 그럴려면 목사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데만 바빠야 한다. 설교를 너무 여러번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설교하는 데 두려움과 긴장이 있어야 한다. 입만 벌리면 잘 나오니까 기도, 성경 읽기, 명상, 참고 독서도 하지 않고 적당히 하면 설교가 세속화되고 은혜가 없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우리 목사님 제발 그만 돌아다니고 설교준비하고, 기도하고 공부했으면 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재정은 집사에게 맡겨야 한다. 헌금 관리는 사도들도 하지 않았다. 사도들도 구제와 돈 관리를 집사에게 맡겼다. 목사는 주는 사례만 받고 만족해야 한다. 사도들처럼 말씀 연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한다.
6.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문제
오늘날 로마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로마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인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구원이 타종교에도 있다는 말은 한스 큉의 말인데 그는 로마 교황의 무오설을 시비하다가 교황청 교수에서 물러났으나 그 주정부의 교수로 튀빙겐에서 계속 일했다. 그의 저서 " 그리스도인 됨" ( Christ sein )을 보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을 한다.
종교개혁으로 상당 부분을 상실한 로마교회가 그것을 회복하기 의해 16세기에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중국으로, 인도로, 일본으로 선교사를 보냈다. 그래서 400년 동안 카톨릭을 전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발전이 미약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했어도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만 택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한다는 것 때문에 선교가 나온다. 그래서 온 인류에게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나 일본, 중국, 인도에 가서 성공을 못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다. 그러면 그들이 무종교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불교, 선도, 유도, 힌두교, 이슬람교 등 고등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불교도 윤리를 강조한다. 선행과 자비를 강조한다.어느 영국인이 불교를 정의하기를 종교적 윤리주의라고 했다. 이 종교들도 기독교가 가르치는 높은 도덕적인 윤리적인 차원을 제시하고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 그러면 이렇게 배운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이 고등한 종교들이 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들이다.
바로 그 원리에서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타 종교와의 대화가 나온다.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이 길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가는 곳마다 대화 제스쳐를 하고 다른 종교의 지도자를 만난다.
제 2 장 교회의 특성
제 1 절 교회의 속성
교회의 정의와 본질에서 교회가 갖는 몇가지 속성을 쉽게 도출해낼 수 있다. 라틴어 신앙고백에 Credo unam ecclesiam sanctam catholicam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una sancta catholica ecclesia 라는 교회의 성질이 드러난다. 이렇게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이 나온다. 이 교회의 속성들은 주로 무형교회에 속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그것들을 거의 결정적으로 유형교회에 속한 것으로 만들었다.
1. 통일성(Unity)
여기서 통일성이란 말은 하나(una)란 표현에 있다. 왜 하나인가? 그리스도의 한 머리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한 생명에 연결되었으니 교회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하나이다.
로마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해서 그 밑에 전세계에 하나의 조직체로 조직된 자기들의 교회가 통일된 하나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즉, 외부적 조직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 통일성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머리 아래서 신비한 몸으로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하나이다. 그러나 조직에서 하나가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W.C.C.처럼 외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성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분파가 아니다. 교회하고 분파하고 어떤 면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워도 잘 구분해야 한다. 항상 나를 따르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분파이다. 또 자기 교회 외에는 모두 이단이라고 하여 시비하는 것도 분파이다.
2. 거룩성(Holiness)
교회의 일차적 특성이 거룩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룩하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한다.
1) 내면적 원리적 거룩
로마교회는 교회의 거룩성을 외부적 형식, 교의, 도덕적 교훈, 예배와 권징에서 찾는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니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다고 말한다. 즉,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도들 안에 와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거룩하며 그러니 교회가 거룩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 실제적으로는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와 있으므로 원리적으로 다 거룩하니 완전히 거룩한 사람들이다. 곧 내면적 성격에서의 거룩이다.
성령께서 와 계신다는 말이나 그리스도께서 와 계신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연장으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나타날 때는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리고 성령께서 독자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을 교회에 갖고 오신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오해된 부분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를 중생시키실 때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을 가져오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이 우리에게 와서 자라도록 성령께서 일하신다. 이것이 교회의 거룩이다.
2)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을 가지실려고 이처럼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신 첫마디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었다. "내가 너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애굽에서 해방하였다"고 되어 있다(출 19:5-6, 레 11:45).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가지실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도 거룩한 백성을 가지시려고 이 땅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이다.
3) 교회의 삶에서 계속되는 거룩하게 하는 역사
거룩은 죄를 떠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예수 믿으면 완전히 새사람이다. 그러나 예수 믿은 후에도 우리 안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같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이 거룩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역사한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사람을 살리는 일(mortificatio et vivificatio)은 한 일의 양면이며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같은 일이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새사람이 살며 새사람이 살므로 옛사람이 죽는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옛사람과 새사람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4)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는 방법
(1) 말씀 선포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교회의 거룩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연합)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이니 계속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즉 새생명을 공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 선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도 허공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되어진다. 외부적인 것으로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면 부작용만 일어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 선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생활로 불도저처럼 막 밀고 올라가야지 가만히 놔두면 껍데기 즉 종교적 습관만 남게 된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고 핑계하여 억지로 꾸민 거룩은 거룩이 아니다. 죄의 옛사람을 죽이지 않고 새사람이 사는 법이 없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설교가 밀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는 비법이 성령 받아 방언을 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선포로 된다. 말씀 선포도 막연한 소리, 구름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참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면 사람들이 죄와 투쟁한다. 그러니 목회자는 설교에 전부를 걸어야 한다.
오순절파와 알미니안에 의하면 은혜를 두번째 받으면 완전해져서 옛사람을 다 벗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개혁교회는 끝까지 죄와 투쟁해야 하고 결코 완전해지지 못한다고 하니 모두 오순절파나 알미니안파로 가서 쉽게 단번에 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하와의 태도이다.
대부분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은 돈 벌 연구부터 하여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돈을 반대하느냐면 그렇지 않고, 돈을 많이 벌되 댓가를 지불하고 바르게 벌어야 한다. 그리고 잘 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나의 수고를 통해서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많이 벌어서 많이 저축하면 부자가 된다고 했다. 그 법이 지금도 제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가 많이 연구된 지금은 꼭 그렇지가 않다. 돈 의식이 많으면 그만큼 돈이 많아진다고 한다. 결국 돈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법이다. 가난한 사람만 돈의 종이 아니라 부자들도 더욱 돈의 종이 되어 있다. 돈이 삶의 목표가 되어 있는 현실이다. 기복 종교는 하나의 빠르고 확실한 길로 이용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4절부터 29절까지에서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사람이다. 여기까지 밀어야 한다.
(2) 권 징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권징을 해야 한다. 먼저 윤리적인 권징을 시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면 교리적인 권징도 안되기 때문이다.
5) 거룩한 교회의 특징
나는 일차적인 거룩의 특징이 참을 말하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면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법으로 살아야 한다. 별짓 다하면서 겉으로만 거룩, 거룩하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제 1 계명은 참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3. 보편성(Catholicity)
Catholic Church가 공교회라는 말이다. Catholic, 즉 "공"이란 말이 보편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나쁜 말이 아니다. 로마교회에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니까 우리가 안 쓸 뿐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 의 공회가 바로 Catholic Church ( 공교회 혹은 보편 교회 )이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지나치게 많이 ecclesia catholica, ecclesia catholica 를 강조하니까 루터가 그것이 싫어가지고 교회를 Gemeinde(공동체)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서양 개신교에서는 Catholic이란 말을 안 쓸려고 Universal 이란 말로 바꾸었다. 여기서 보편이라는 말은 모든 백성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즉 우주적이란 말이다.
1)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자기들의 교회가 전세계에 다 흩어져 있고 없는 데가 없다. 그리고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또 장소적으로 부분적이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다. 남미, 북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도 있다. 아직 어떤 교회도 로마교회처럼 되어 보질 못했다. 개신교는 한국에 조금 많고, 일본에 조금, 중국에도 조금, 구라파에 조금, 그러니 보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또 로마교회는 회원 수도 많다. 이런 점들, 외부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포괄성을 이유로 들어 로마교회는 자기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로마 교황청을 정점으로 완전히 하나로 조직되어 통일되어 온 세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2) 개혁파의 견해
그러나 개혁파는 그리스도의 보편성 때문에 교회가 보편하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주적인 왕이시고 그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교회가 보편한 교회이다. 그리스도가 우주적이니 거기에 유기적으로 연합된 교회도 보편하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인 모든 사람을 가리켜 공교회라고 한다.
우리가 결코 분파가 아니다. 종교개혁 후에 신경들을 결정할 때 그 교회만 모인 것이 아니라 대륙의 교회들이 거의 다 모여서 항상 공교회의 형식으로 결정되었다. 개혁 교회의 교리들이 결정될 때 그렇게 되었으므로 개혁교회가 분파가 아니다.
니케아 신경에 "Credo unam ecclesiam sanctam catholicam apostolicam", 즉 한, 거룩한, 공,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로 되어 있다. 교회는 한 교회, 하나의 공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나누면 안된다.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고 보편한 교회이고 거룩한 교회이면 교회 분열을 해서 교회를 찢는 일을 하면 안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교회를 나누는 일을 예사로 하는데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었음을 모르니까 찢어 나누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분파들은 고집하여 우리와 같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한다.
우리 개신 교회가 소수여도 개교회주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개신교회가 다 일을 해 놓으면 로마교회가 결국은 다 먹어버린다.
교회의 통일성 때문에 교회는 전체로 하나의 교회이지만 보편성 때문에 각 지교회도 그것대로 하나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연합된 하나의 유기체적 조직이다. 교회를 몸이라고 하는데 몸만큼 완전한 유기체는 없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완전한 유기체요, 살아있는 조직체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생의 원리가 성령이어서 성령에 의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이 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만 성령께서 교회의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3) 보편 교회의 특성
그러면 이런 교회의 존속이 언제까지인가? 이 보편 교회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상에 존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의 임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상에 인류의 역사가 존속하는 날까지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다.
계시록의 천상 예배를 보면 찬송의 두 주제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이고, 둘째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이다. 우리는 구속의 은혜만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의 창조도 찬양해야 한다. 창조가 있으니까 구속이 있다. 창조를 소홀히 하고 구속만을 강조하면 새창조가 되어 새로운 창조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새 창조가 아니라 처음 창조의 회복이다. 그러니 창조가 늘 전제되어 있다. 우리의 예배는 천상 예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해야 한다.
천상에만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도 끝까지 교회가 있어 그 일을 한다. 아무리 지상에 교회가 없는 것 같은 때라도 하나님은 꼭 자기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는 교회를 두셨다.
4. 사도성(Catholicity)
교회의 사도성에 관한 언급은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에 처음으로 추가되었다. 그래서 Credo unam ecclesiam sanctam catholicam apostolicam이 되었다.
1)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자기 교회의 교황이 예수의 제자 중 수제자인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했기 때문에 자기 교회가 사도적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교황은 사도적 권위의 직접적인 계승자요, 그리스도의 유일한 지상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2) 비판
우리는 여러 면에서 그것을 시비한다. 첫째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다는 증거가 없다. 아마 바울의 성질로 보아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주장하고 있으면 로마서를 안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로마 감독에게 베드로가 자기의 사도권을 넘겨 줬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할 때 근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배척한다.
또 초대교회의 상황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교회의 설립자로 일한 것은 사실이다. 첫날 사도들을 대표해서 설교하였다. 그러자 오순절 날 3,000명이 회개했다.베드로가 구제와 재정 관리를 위해 집사들을 세웠다. 그가 실질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며칠 후 다시 설교해서 5,000명이 회개했다. 교회가 8,000명 이상 약 만명 교회로 커졌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 그러나 천사에 의해 기적적인 구출이 된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뒤로부터는 베드로의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이 교회의 초기 단계이다.
그러다가 주의 형제 야고보가 그 대권을 받았다. 12사도에 속하지 않았어도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했다. 바울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사도들이 공회를 열었을 때도 결정을 베드로나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야고보가 했다. 베드로는 약 15년간 은신해 있었다,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후 베드로의 권위가 대폭 약화되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사도성의 계승은 말씀 선포의 계승이지 베드로의 사도직의 계승이 아니다.
3) 개혁파의 견해
교회의 사도성은 로마교회처럼 베드로에게서 계속 교황에게 연결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사도적 증거를 가지고 있고 또 증거하기 때문이다. 즉, 사도적 증거의 계속 때문에 교회에 사도성이 계속된다.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잘 선포하면 사도적 권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제 2 절 몇가지 관점에서 본 교회의 여러 성격들
1.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1) 교회의 거룩성으로 인한 투쟁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은 죄와 악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이 그 근본 본성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거룩이란 죄와 단절하고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생명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의 생명 자체가 죄와 악에 대해 투쟁한다. 이렇게 교회는 거룩하기 때문에 죄와 악에 대해 투쟁하도록 작정되었다.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내지만 우리 안에 죄와 악이 다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리적으로는 완전히 거룩하지만 실제로는 죄와 악을 다 벗어버리지 못했다.
2) 말씀의 선포로 일어나는 투쟁
그런데 죄와 악에 대한 예리한 감정이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말씀의 선포에서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나면 죄와 악에 대해 회개한다 하지만 말씀의 선포 없이 죄와 악에 대한 경각심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 말씀의 선포가 올 때 죄가 무엇인지 안다. 예수 믿으니까 그냥 내버려둬도 자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단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권면하여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노력을 해야 한다.
알미니안 교리의 완전주의에 의하면 두번째로 오순절의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완전해져서 사랑이 완전해진다고 한다. 물론 성화 과정이 매우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랑과 윤리면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충만히 받는다 해도 이 지상에 사는 날 동안은 죄의 오염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다. 루터가 말한대로 우리가 다 우리의 옛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해 무덤을 파는 자들이다.그러나 우리 손으로 우리 옛사람을 장사지내지 못한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한은 성화가 완결되지 않는다.
3) 교회적인 투쟁: 말씀 선포와 권징
그래서 우리에게 늘 죄악이 씌워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나 교회에서 그것과 싸워서 그것을 떼어내야 한다. 그럴려면 교회에서 권징과 말씀의 선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개혁 교회의 강조는 언제나 해석되어 선포된 말씀에 강조가 있다. 말씀의 선포와 함께 죄의식이 생겨나고 예리해진다. 성령의 역사를 아무리 강조해도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으면 자기의 행실을 고치고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말씀의 선포가 약해지면 죄성에 대하여 범연해진다. 그러면 권징이 끝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도록, 거룩에 이르기까지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는 권징을 하려고도 안하고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죄와 투쟁하고 있으므로 교회가 권징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교회가 커도 권징이 없으면 그 교회는 다된 교회이다. 교회가 권징하지 않으면 죄와 악과 투쟁하는 전투하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근본 속성인 거룩을 다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가 거룩하기를 그친 것이요, 일단 세속 단체로 남기로 정한 것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해서, 은혜라는 말로 다 덮어서는 안된다.
4) 축복 종교와 권징의 소멸
축복 종교에는 죄의식과 윤리적 심각성이 없다. 왜냐하면 복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왜 가나안의 종교가 자녀를 불태워 죽였겠는가? 풍요의 신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피를 바침으로 쇠해진 지력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축복 종교의 눈에는 그것이 바르고 합당하고 좋은 것이다. 선지자들의 눈에만 이런 가증한 죄악이 없다. 한국 교회가 축복만 강조하니까 권징이 없어졌다.
5) 사회악과의 투쟁
우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투쟁하면 그것은 정치를 하는 것이다. 먼저 교회 강단에서 무엇이 잘못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개 교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상회가 모일 때에 그런 현행 정치나 경제 정책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가르치고 시정 요구를 결의하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잘못된 것에 대해 항의하거나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가거나 편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물리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바른 사람을 생산해냄으로 사회를 고친다. 우리도 경제와 정치에 관해서, 노동에 관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바른 이론 전개를 해야 한다.
이런 것을 안하니까 운동권 학생들이 교회에서 소외된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의 악을 과학적으로 지적하고 전개하여 학생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직접 거리로 뛰쳐나가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와 담을 쌓고 앉아있어 버리면 안된다. 교회가 교회로서 사회에 대하여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영역이 아니라 다 그리스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 되게 하는 일을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를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 밖에 두면 안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애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기반으로 해서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 영역도 왕으로서 권세를 가지셨다. 우리는 그 권세를 그리스도의 권세로 귀속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에서 악이 성행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화란의 Van Ruller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정치적이라고 했다. 정치의 근본이 사회의 악을 제거하고 혼돈을 제거해서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혼돈과 무질서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고 이 사회에 질서를 가져왔으니 정치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정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정부가 그리스도의 봉사자이다.
6) 투쟁의 방법
죄와 투쟁하는 것을 그치면 그 사람은 병들었거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은 늘 회개하는 것이고 늘 기도하는 것이다. 회개란 그냥 죄만 늘어 놓는 것이 아니다.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피에 호소해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그 회개가 하나님께 열납되고 용서받는다. 회개란 죄만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 받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피에 호소해서 죄를 고쳐야 한다. 우리의 투쟁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에 호소하여 기도함으로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죄를 고치는 것이다.
7) 승리적 교회
한편 하늘에 있는 교회는 개선의 교회다. 하늘의 교회에 있어서는 창검이 승리의 종려 나무와 교체되고 전투의 함성은 개선자로 바뀌어 십자가는 면류관으로 대체된다(L.Berkhof). 승리적 교회는 죄와의 투쟁이 종식되어 고통이 끝나고 완전해진 교회이다.
2.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1) 무형교회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는 칼빈주의의 신학, 특히 선택교리 때문에 구분한다. 물론 선택된 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형교회라고 말하지만 꼭 선택교리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지상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이어서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령한 연합이어서 누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육안으로 볼 수 없으니 모른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진정으로 중생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다 바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무형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무형교회가 보편교회이고 모든 성도들을 다 포괄하는 교회이다. 그렇다고 무형교회와 유형교회가 구분되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 교회 밖의 교회라는 말을 썼다. 혹은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생겼다. 혹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정상적으로 교회를 떠나서는 생활할 수가 없다.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만 있다. 진정으로 교회와 연합된 자만이 교회에 속한다.
2) 유형교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밖으로 그 신앙이 표현된다. 이렇게 교회 회원들의 신앙고백과 신앙행위에서 그리고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에서, 그리고 교회의 외형적 조직과 정치에서 교회는 유형적이 된다. 즉 신앙이 행동화되어 밖으로 나타나 보이니까 유형교회라고 한다. 여기서 신앙고백을 하면 개별적으로 신앙고백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가 신앙고백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배 드릴 때마다 신앙고백을 하는데 보편한 신앙고백은 아니어도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교회로 모이고 모이면 조직이 없을 수 없으니 조직을 한다. 이것이 유형교회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어떻게 구별해내겠는가? 물론 우리가 영안이 있어서 겉만 보고도 식별해낼 수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비밀 박스 속에 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신앙고백을 한 사람을 다 받아야 한다. 세례 받을 때의 신앙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는다. 그러니까 교회에 위선자들이 있다. 또 신자의 자녀들도 다 중생한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6개월 학습 문답해서 6개월 후에는 세례를 주는데 이는 잘못이다. 중고등부 6년동안 목사가 직접 기독교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 후에 입교한 사람들을 세례를 주어야 한다. 세례를 빨리 주고 책임을 맡기려고 하지 말라. 세례는 자발적으로 자워해서 받도록 해야지 억지로 밀어가지고 받으라고 해서는 안된다.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기쁨으로 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부흥,부흥 해서 수만 많아지면 뭐하겠는가? 차곡차곡 가르쳐서 알갱이를 만드는 것이 쭉정이 많은 것보다 낫다.
3) 현금 교회의 고쳐야 할 점들
(1) 조직의 최소화
외형적인 조직이야 없을 수 없지만 최소한의 조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교회가 자유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너무 억지로 조직에 얽어매면 그리스도인의 신앙교제와 생활이 좋지 않다. 너무 많이 조직화하면 수는 많이 붙지만 은혜는 없게 된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새벽부터 나와 밤중까지 봉사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조직은 최소화하라.
(2) 성가대
그런 면에서 보면 성가대를 해야 예배답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니까 다 찬양대이다. 음악가가 아닌 한은 성가대 노래나 평신도 노래나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모든 성도가 다 찬양대이다. 예배 직전에 온 교회가 찬양할 수 있다. 왜 어떤 사람은 하고 어떤 사람은 듣고 있는가? 듣는 것은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구경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개혁교회의 예배 모범이 아니다. 온 교회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사실 성가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카톨릭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온 교회가 힘있게 찬송하는 것이 몇 사람이 찬송하는 것보다 더 좋다. 그 성가대 할려고 몇사람 허리 부러지게 일해 밥 해 먹여 가면서 하면 주일성수를 못하지 않는가? 안식일은 남종이나 여종이나 문안에 거하는 객이라도, 또 동물까지라도 일하지 못하게 하셨다. 주일은 다 쉬어야 한다. 그것이 주일 성수이다.
(3) 여러 직분들
주일학교 반사도 목회자가 직접 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반사들에게 맡겨서 성경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겠는가? 설교만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교육도 우리의 책임이다. 목사님들도 당회장만 되면 주일 낮 설교만 하고 교육은 저 밑에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데 그런 귀족의식을 버려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평신도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기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사람이 한 책임만 맡도록 해야 한다. 잘 훈련된 교사가 있으면 주일 학교만 하고 성가대는 성가대만 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여러 직분이 감투가 아니다. 교회 정치도 교회의 진리의 보전과 건덕을 위해서 하는 보호 행위이다. 교회에는 감투가 없다. 다 봉사직이다.
교회는 귀족이 따로 있지 않고 다 귀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만큼 거룩한 귀족이 없다. 바른 행함을 하는 것이 귀족인데 그리스도인만큼 바르게 행동해야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교회의 직분을 감투로 생각한다거나 한 사람이 여러 일을 맡으면 바로 행하여 봉사를 이룰 수가 없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교회에만 적용된다.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위에서, 말씀과 성례집행에서, 또는 교회 정치의 일정한 형식에서 교회의 형태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오히려 성도의 교제에서, 신앙고백에서, 죄와의 투쟁에서 유기체적인 교회이다.
1) 유기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개별 신자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와서 그냥 집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한 생명의 유기체요, 생명체로서 한 몸이다. 인간의 몸만큼 완전한 훌륭한 유기체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에다 비유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니까 성도의 교제에서, 신앙고백에서, 죄와의 투쟁에서 유기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교회에서 한 사람이 죄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목사가 죄 지으면 목사만 죄 지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온 교회가 상처를 입는다. 교회의 어느 한 지체가 죄를 지으면 그 사람만 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 사람이 제일 먼저 해를 보지만 교회가 전체로 얼마나 욕을 먹고 영적으로 침체되고 상해를 입는가?그것은 교회가 다 한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교회에 죄가 들어와서 말할 수 없이 상처를 입고 타격을 입어도 잘 해체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체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장난감 교회들은 종종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오늘 여기 섰다가 안되면 다음에는 저리로 가고 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은 진짜 교회가 아니라 돈벌이 교회여서 목사 혼자 마음대로 세우고 허물고 하는 장난감 교회들이다. 교회가 한 교회이면 이사를 가더라도 같이 가야 하는데 대부분 가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교통 때문에 평행적인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다. 교회 전체가 이 교제에 참예할 수 있도록 활성화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이다.
2) 조직체로서의 교회
교회가 하나의 유기체로 유지될려면 조직을 해야 한다. 어느 단체든지 조직없이 유지되지 않는다. 유기체인 교회를 봉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목사와 장로들의 당회와 집사들로 구성된 제직회, 집사회 등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조직을 최소화하고 유기화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교회의 조직에서 모든 직위와 직책은 다 봉사하는 직이다. 그 직분의 권위는 은사의 권위요, 봉사의 권위이다. 주장하는 권위가 아니다. 이젠 개신교의 목사들이 신부를 능가한다. 신부는 3년마다 옮겨다니니까 그런 권위가 없다. 그런데 목사는 한번 위임해 놓으면 용접한 것처럼 밀어내도 안나간다.그러니 오죽 권세가 강하겠는가? 이젠 봉사자가 아닌 주장하는 자요, 주권자가 되어버렸다.
그리스도는 봉사하는 자요, 그의 섬김 때문에 교회가 생겼다. 왜 목자라 하면서 양을 후려쳐서 가죽만 남기고 살을 빼먹으려고 하는가? 마음을 바꿔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목사되고 전도사 되기 전에 마음을 바꿔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조직 교회에서 목사가 가장 큰 봉사자이다. 그러니 음식 먹을 때도 제일 높은 자리에서 에헴 하면서 받지 말고 문간에 서서 그릇 패스하고 그릇을 먼저 씻으라. 처음엔 어색해도 다 훈련하기에 달렸다. 그렇다고 목사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말씀 선포의 권위이고 그것을 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목사는 복음을 선포할 때 권위가 있는 것이다. 목사가 강단에 섰다고 다 목사가 아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겠는가? 목사니까 다 존경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조직적으로 얽어매 놓으면 많이 오기는 하지만, 그런 목적으로 또 헌금을 많이 내게 할 목적으로 조직을 강화하면 구원의 기쁨이 없고, 참 소망과 능력으로 힘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러니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가 겸손하게 말씀을 잘 준비해서 봉사해야 한다. 말씀을 준비하는데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서 성실하게 해야 한다. 입만 벌리면 설교가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면 다 끝난 사람이다.
제 3 절 교회의 시대적 특징
교회는 에덴에서 시작하여 세상 마지막까지 존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찬송하는 백성을 두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덕을 기리는 일이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에는 그치지 않는다. 그 일을 하는 백성의 임무를 맡음이 교회이다. 우리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교회가 없었던 것 같은 때에도 지상의 교회는 없었던 때가 없었다. 언제나 교회는 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지상에 존속하되 항상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또 다 칼빈주의의 개혁교회가 되면 좋지만 그러지 못한 교회도 많다.
1. 족장 시대의 교회
족장 시대의 교회는 경건한 가정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가장이 제사장의 역활을 하였다. 처음으로 제사한 사람이 아담인데 그는 가족들을 데려다 놓고 제사하였을 것이다. 이 사실은 가인과 아벨이 제사드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 아버지 아담에게서 제사법을 배웠을 것이다. 모세 시대까지는 족장들의 가족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보존되었다.
종교는 항상 사적인 것이 아니다. 또 마음만의 일도 아니라 전인의 일로 그리고 전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간대사이다.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매이게 하는 것이다. 종교를 사적으로 만든 것은 근본주의적인 영향 때문이다. 종교가 사사로운 개인의 일로서 어느 골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배하는 의식과 종교를 혼동하면 안된다. 예배 의식을 종교의 전부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예배가 제일 중요한 종교 행위이다. 그렇지만 종교는 예배 행위만이 아니라 전 사회의 일이어야 한다. 지금은 다 공업화하고 탈교회화해서 사회는 무관하고 교회 와서만 자기 안방에서만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경건이지 종교가 아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이 종교의 일이다.
2. 모세 시대의 교회
모세 시대 즉 구약 시대는 교회와 국가가 그 범위에 있어서 일치한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다. 외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국가와 교회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국가 존속은 항상 교회의 존속으로만 가능했다. 여호와의 종교가 존립하지 못할 때 국가도 존립을 그쳤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이 아주 심각할 때 여로보암의 때, 아하스 때, 므낫세 때에는 교회와 국가의 범위가 항상 일치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많이 타락하면 국가의 범위도 줄어든다. 그러니까 국가교회(Church State)이다. 그래서 외국인은 그 국가에 입적함으로써만 교회에 참예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구약학자들의 눈에는 구약의 소위 한 성소에서, 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은 요시야 이후의 일이고 그때 그것을 그 이전으로 확대한 것으로 보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배 처소가 순례길의 실로, 라마, 벧엘 등의 여러 곳에 계속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어떻게 구축되어 있느냐 하면 성전에 궁전에 붙어 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왕가의 Chapel이다. 여기에 중요한 구속사적 의의가 있다. 다윗에게서 메시야 나라의 시작을 보이셨으니까 예배하는 중심이 항상 메시야 왕을 대표하는 다윗 왕가에 부속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이 의식의 최고 표현은 중앙 성소에서 행해지는 예배에서 본다. 그러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이 백성들을 이 성전으로 예배하러 보내면 다윗 왕가에로 마음이 다 돌아가 버리는 것이 필연적이므로 기필코 그것을 막았다.
구약 교회에 왜 의식과 법이 많으냐 하면 계시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배 받으실 분이 예배 모범을 다 정하셨다. 그러니까 길고 세밀하다. 그렇게 함으로 영이 오시기 전에 백성들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진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원리로만 거룩한 것이다. 마음까지 그리고 죄까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많은 법들이 신약의 눈으로 보면 구약 백성을 얽어매는 것이다. 영이 오기 전이니까 자유함이 없다. 그런데 지금도 율법을 도구로 하여 백성들을 얽어매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3. 신약 시대의 교회
오순절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에서 떠나서 독립적 조직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국가 교회는 이제 세계적 성격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국가의 제약과 그 범위에서 벗어나서 보편 교회, 즉 우주적인 교회가 된다. 국가적인 제약을 벗어나므로 이스라엘의 국경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리고 국가 교회의 형태에서 벗어나 개별화됨으로 전 세계로 확장되어 보편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 형태와 상관 없이 교회가 존속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정부가 있으면 좋다. 가정생활, 국가생활, 사회생활이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있으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보편 교회는 율법의 제약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도 받는 교회이다.
또 신약 시대의 교회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종교가 아니므로 선교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선교의 근거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한 한스 큉의 말이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선환 교수의 말이 그 하나님의 작정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모르나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작정과 교회의 본질에서 선교의 사명이 나온다. .new
제 3 장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유형 교회에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여주는 세가지 근본적인 특징 혹은 기호가 있다. 이것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들인데 말씀의 선포와 성례 집행, 권징의 시행이다. 개혁 교회는 항상 이 세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말하는데 이것들은 결국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곧 교훈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제 1 절 말씀의 참된 전파
말씀 전파로 교회가 발생하고 존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며, 이것이 사도적 증거의 내용이다. 우리의 설교가 마땅히 사도적 증거의 계속이어야 한다. 설교가 약화되면 교회는 후퇴한다. 이 전파는 근본적으로 진실해야 하고, 신앙과 행위에서 지배적인 감화와 평안이 있어야 한다.
1. 말씀 전파와 교회의 발생과 존속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선포하면 그대로 그 결과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설교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교회가 안되는가? 그것은 거짓 설교하거나 가짜 복음을 전했거나, 듣기 좋은 소리만 했으니까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 그대로 일이 진행되어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고 죄와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 교회가 발생하고 성장하고 존속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선포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혹은 그 후에 말씀과 연관되어서 말씀대로 다 되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그런 기적은 안 일어나도 내적으로 영적으로 기적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는데 잘못된 기도인지 모르나, 그런 말씀의 권세를 구한다.
2. 말씀 선포의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도를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에 왜 회개가 없는가? 축복 설교만 하니까 교회에 회개가 없다. 복음이 들어가야 회개가 나온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후퇴한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신실하게 신앙으로 감화와 평안을 주어야 한다. 바로 설교하면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친히 오시기 때문에 그렇다. 별 희한한 것이 생겨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생각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그리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며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연구하고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3. 말씀 선포와 사도적 권위의 계승
우리가 복음을 바로 선포하면 사도들의 계승자이다. 사도적 선포가 사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우리가 계속 선포하면 우리가 사도적 계승을 하고 있고 사도적 선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된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사도들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사도는 아니어도 사도적 증거를 계속하니까 우리가 사도들이다. 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나라 사람을 만드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영광이고 특권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찌 사도적 증거에 연결하는가이다. 거기에 설교의 생명이 있다. 사도적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이다.
제 2 절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란 말은 형식이 안맞으니까 맞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르친대로 집행하면서 그 성례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1. 성례의 내용을 설명함
성례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 성례가 주는 은혜를 말씀으로 말해야 한다. 성례레가 말씀과 분리된 새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이다. 성경의 종교는 듣는 종교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 선포에 이어서 그 구원의 사실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 내용에 따라서 성례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당한 집행이다. 항상 보는 것에 선행해서 듣는 것이 앞서 와야 하고 또 보는 것 후에 듣는 것이 와야 한다.
불란서의 개혁교회의 평신도로 유명한 신학자요, 보르도 대학의 사회학 교수, 시장도 했으며 많은 저술을 남긴 Jacques Elull이 쓴 책 중에 "Apocalypse" (계시록)란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그가 지적하기를 " 보는 것의 앞뒤에 반드시 말씀이 선행하고 후속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의 설립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듣는 것없이 성례가 집행되면 죽은 성례이다. 죽은 성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된다. 성례에 대한 설교를 했어도 다시 집행할 때엔 설립의 말을 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내가 떼는(따르는) 이 떡은(이 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흘리신) 그의 몸에의(피에의) 동참입니다. 이것을 받아 먹고(이 잔을 마시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찢으셨음을과(그 피를 흘리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또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왜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기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말을 하지 않고 떡과 피만 나누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선포하고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고 그리고 설명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먹을려고 하는 이 떡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이 말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떡과 포도주 그것 자체가 그냥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하면 화체설이 된다. 떡을 받아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달콤한 카스테라가 들어오니까 그 맛만 좋다고 생각하거나 떡 씹느라고 다른 생각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는, 그것을 꼭 교리화할 것은 아니지만 무교병은 단 맛이 없으니까 무교병이 좋다. 그것을 먹으면서 주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말을 해야지 절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와야 생각을 한다.
2. 한 잔과 한 떡을 먹도록 해야 함
무교병 흰 떡을 앞에 갖다 놓고 목사가 하나씩 떼어주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면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큰 조각으로 떼어 장로들에게 주어 나누도록 한다. 다 한 몸에 동참이니까 한 떡에서 먹어야 한다. 또 떡의 경우에는 씹어 먹으면서 구체적으로 기념해야 한다. 좀 보기에는 흉하지만 주의 살을 먹는 것이니까 먹는 행위를 해야 한다. 잔을 따를 때도 바울 사도의 말대로 다 한 피에 동참했으니까 다 한 잔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 영미 전통을 이어받아 위생적으로 각자 조그만 잔으로 받아 깨끗하게 한 것은 좋지만 한 잔에서 돌려가며 마셔야 한다. 그러면서도 위생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 몸과 한 피에 동참한 형제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동참이라는 말은 함께 먹는다는 말과 같다.
3. 성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집행해야 함
그리고 성례가 공공의 신앙고백의 행위이지 개별자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전체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서 언약의 백성이 모인 공공의 자리에서 이 예식을 집행한다. 그래서 성찬과 성례를 공교회에서, 예배당에서, 예배시에 해야 한다. 이것이 다 신앙고백의 일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그 찢기심에 동참함이다. 그 때문에 생겨난 것이 교회니까 교회가 전체로 동참한다. 그러니까 성례 집행 하기 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바르다.
성찬만 아니라 세례도 반드시 교회 앞에서 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이미 목사 앞에서 했어도 공공 앞에서 반드시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흔히 모씨는 성경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 라고 묻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을 신앙고백의 행위에 속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성경을 언제 읽어봤으며 언제 성경을 알았다고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고 묻는가? 거기에 다 진리가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찬동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로마교회와 같은 잘못이다.로마교회의 신앙은 fides implica라고 분명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다 진리로 믿습니다 하면 정말 믿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신앙이다. 그 내용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믿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카톨릭의 내용하고 무엇이 다른가? 개신교판으로 싹 바꾼 것뿐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정확무오한 진리로 믿느뇨?"라는 구교 것을 " 모씨는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라는 개신교판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으면 안되고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모씨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과 그로 인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상실과 죽음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유일한 구주로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 믿는 것인지 세례 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4. 성례의 집행자와 대상자들
그러면 집행은 누가 하는가? 말씀 선포자로 합당하게 세워진 자들 곧 목사가 집행해야 한다. 장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집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평신도나 여자가 하는 것도 아니다. 목사가 한다. 왜냐하면 성례와 함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도록 세움을 받은 목사가 하는 것이다. 목사가 무슨 특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또 그것 때문에 어떤 특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말씀 선포의 권위뿐이다. 그 외는 다 봉사자이다. 항상 교회 머리가 가신 길을 목사들도 가야 한다. 목사는 봉사하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무슨 특권의식 주려고 목사가 집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세우신 설립의 법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수녀도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없으면 권찰같은 사람도 하고 성당지기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표지 정도가 아니라 세례받아야 구원받는데,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 즉 주입 은혜(gratia infusa)가 오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성례는 은혜가 오는 필수적인 통로이다. 또 실제로 은혜 자체이다. 구원이 교회에 의탁되어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을 나누어 준다. 그러니까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이 세례이다. 그러니 평신도라도 아무나 급하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세례 안 받았다고 천국 갈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와 그 자녀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니 범죄자와 불신자는 제외된다.
제 3 절 권징의 신실한 시행
권징은 목사가 그저 칼처럼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성례를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왜 이렇게 권징을 하는가? 교회의 근본 특징이 거룩이요, 아직은 전투교회이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한 죄인이고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한다. 인간적인 자연의 법칙으로야 범죄가 당연하지만 예수 믿어서도 그 법을 행한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에 대해 금치산 선고를 받았는데 그 일을 하면 괜찮을 줄로 아는데 또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권징함으로 금치산 선고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가 거룩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제가 많은 것인가? 다 권징이 안되니까 그렇다. 그러면 권징을 하지 못하는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말씀 선포의 결여에 있다. 복사들이 제대로 못사는데 어떻게 권징을 하겠는가? 목사에게 탐욕이 가득하고 거짓이 가득한데 어찌 권징을 하겠는가?
성화가 완결되지 않았으니까 탈선하는 일이 교회에 있다. 그러니 권징을 해야 한다. 권징에는 권고와 징계와 수찬정지, 출교등 여러가지가 있다. 벌써 수찬정지는 상당히 큰 벌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합당하지 못하다는 선포이다. 화란에 추기경이 둘이어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우리 권징 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권징하지 않고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성례를 더럽히는 것이요, 성례를 더럽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권징은 윤리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로서 윤리와 가르치는 교리의 교훈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윤리 면에서 권징을 못하면 교리적인 문제가 생겨도 권징을 못한다.
제 3 장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유형 교회에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여주는 세가지 근본적인 특징 혹은 기호가 있다. 이것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들인데 말씀의 선포와 성례 집행, 권징의 시행이다. 개혁 교회는 항상 이 세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말하는데 이것들은 결국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곧 교훈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제 1 절 말씀의 참된 전파
말씀 전파로 교회가 발생하고 존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며, 이것이 사도적 증거의 내용이다. 우리의 설교가 마땅히 사도적 증거의 계속이어야 한다. 설교가 약화되면 교회는 후퇴한다. 이 전파는 근본적으로 진실해야 하고, 신앙과 행위에서 지배적인 감화와 평안이 있어야 한다.
1. 말씀 전파와 교회의 발생과 존속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선포하면 그대로 그 결과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설교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교회가 안되는가? 그것은 거짓 설교하거나 가짜 복음을 전했거나, 듣기 좋은 소리만 했으니까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 그대로 일이 진행되어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고 죄와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 교회가 발생하고 성장하고 존속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선포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혹은 그 후에 말씀과 연관되어서 말씀대로 다 되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그런 기적은 안 일어나도 내적으로 영적으로 기적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는데 잘못된 기도인지 모르나, 그런 말씀의 권세를 구한다.
2. 말씀 선포의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도를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에 왜 회개가 없는가? 축복 설교만 하니까 교회에 회개가 없다. 복음이 들어가야 회개가 나온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후퇴한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신실하게 신앙으로 감화와 평안을 주어야 한다. 바로 설교하면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친히 오시기 때문에 그렇다. 별 희한한 것이 생겨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생각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그리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며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연구하고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3. 말씀 선포와 사도적 권위의 계승
우리가 복음을 바로 선포하면 사도들의 계승자이다. 사도적 선포가 사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우리가 계속 선포하면 우리가 사도적 계승을 하고 있고 사도적 선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된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사도들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사도는 아니어도 사도적 증거를 계속하니까 우리가 사도들이다. 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나라 사람을 만드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영광이고 특권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찌 사도적 증거에 연결하는가이다. 거기에 설교의 생명이 있다. 사도적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이다.
제 2 절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란 말은 형식이 안맞으니까 맞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르친대로 집행하면서 그 성례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1. 성례의 내용을 설명함
성례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 성례가 주는 은혜를 말씀으로 말해야 한다. 성례레가 말씀과 분리된 새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이다. 성경의 종교는 듣는 종교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 선포에 이어서 그 구원의 사실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 내용에 따라서 성례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당한 집행이다. 항상 보는 것에 선행해서 듣는 것이 앞서 와야 하고 또 보는 것 후에 듣는 것이 와야 한다.
불란서의 개혁교회의 평신도로 유명한 신학자요, 보르도 대학의 사회학 교수, 시장도 했으며 많은 저술을 남긴 Jacques Elull이 쓴 책 중에 "Apocalypse" (계시록)란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그가 지적하기를 " 보는 것의 앞뒤에 반드시 말씀이 선행하고 후속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의 설립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듣는 것없이 성례가 집행되면 죽은 성례이다. 죽은 성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된다. 성례에 대한 설교를 했어도 다시 집행할 때엔 설립의 말을 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내가 떼는(따르는) 이 떡은(이 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흘리신) 그의 몸에의(피에의) 동참입니다. 이것을 받아 먹고(이 잔을 마시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찢으셨음을과(그 피를 흘리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또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왜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기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말을 하지 않고 떡과 피만 나누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선포하고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고 그리고 설명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먹을려고 하는 이 떡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이 말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떡과 포도주 그것 자체가 그냥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하면 화체설이 된다. 떡을 받아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달콤한 카스테라가 들어오니까 그 맛만 좋다고 생각하거나 떡 씹느라고 다른 생각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는, 그것을 꼭 교리화할 것은 아니지만 무교병은 단 맛이 없으니까 무교병이 좋다. 그것을 먹으면서 주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말을 해야지 절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와야 생각을 한다.
2. 한 잔과 한 떡을 먹도록 해야 함
무교병 흰 떡을 앞에 갖다 놓고 목사가 하나씩 떼어주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면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큰 조각으로 떼어 장로들에게 주어 나누도록 한다. 다 한 몸에 동참이니까 한 떡에서 먹어야 한다. 또 떡의 경우에는 씹어 먹으면서 구체적으로 기념해야 한다. 좀 보기에는 흉하지만 주의 살을 먹는 것이니까 먹는 행위를 해야 한다. 잔을 따를 때도 바울 사도의 말대로 다 한 피에 동참했으니까 다 한 잔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 영미 전통을 이어받아 위생적으로 각자 조그만 잔으로 받아 깨끗하게 한 것은 좋지만 한 잔에서 돌려가며 마셔야 한다. 그러면서도 위생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 몸과 한 피에 동참한 형제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동참이라는 말은 함께 먹는다는 말과 같다.
3. 성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집행해야 함
그리고 성례가 공공의 신앙고백의 행위이지 개별자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전체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서 언약의 백성이 모인 공공의 자리에서 이 예식을 집행한다. 그래서 성찬과 성례를 공교회에서, 예배당에서, 예배시에 해야 한다. 이것이 다 신앙고백의 일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그 찢기심에 동참함이다. 그 때문에 생겨난 것이 교회니까 교회가 전체로 동참한다. 그러니까 성례 집행 하기 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바르다.
성찬만 아니라 세례도 반드시 교회 앞에서 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이미 목사 앞에서 했어도 공공 앞에서 반드시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흔히 모씨는 성경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 라고 묻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을 신앙고백의 행위에 속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성경을 언제 읽어봤으며 언제 성경을 알았다고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고 묻는가? 거기에 다 진리가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찬동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로마교회와 같은 잘못이다.로마교회의 신앙은 fides implica라고 분명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다 진리로 믿습니다 하면 정말 믿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신앙이다. 그 내용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믿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카톨릭의 내용하고 무엇이 다른가? 개신교판으로 싹 바꾼 것뿐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정확무오한 진리로 믿느뇨?"라는 구교 것을 " 모씨는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라는 개신교판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으면 안되고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모씨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과 그로 인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상실과 죽음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유일한 구주로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 믿는 것인지 세례 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4. 성례의 집행자와 대상자들
그러면 집행은 누가 하는가? 말씀 선포자로 합당하게 세워진 자들 곧 목사가 집행해야 한다. 장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집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평신도나 여자가 하는 것도 아니다. 목사가 한다. 왜냐하면 성례와 함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도록 세움을 받은 목사가 하는 것이다. 목사가 무슨 특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또 그것 때문에 어떤 특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말씀 선포의 권위뿐이다. 그 외는 다 봉사자이다. 항상 교회 머리가 가신 길을 목사들도 가야 한다. 목사는 봉사하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무슨 특권의식 주려고 목사가 집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세우신 설립의 법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수녀도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없으면 권찰같은 사람도 하고 성당지기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표지 정도가 아니라 세례받아야 구원받는데,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 즉 주입 은혜(gratia infusa)가 오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성례는 은혜가 오는 필수적인 통로이다. 또 실제로 은혜 자체이다. 구원이 교회에 의탁되어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을 나누어 준다. 그러니까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이 세례이다. 그러니 평신도라도 아무나 급하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세례 안 받았다고 천국 갈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와 그 자녀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니 범죄자와 불신자는 제외된다.
제 3 절 권징의 신실한 시행
권징은 목사가 그저 칼처럼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성례를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왜 이렇게 권징을 하는가? 교회의 근본 특징이 거룩이요, 아직은 전투교회이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한 죄인이고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한다. 인간적인 자연의 법칙으로야 범죄가 당연하지만 예수 믿어서도 그 법을 행한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에 대해 금치산 선고를 받았는데 그 일을 하면 괜찮을 줄로 아는데 또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권징함으로 금치산 선고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가 거룩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제가 많은 것인가? 다 권징이 안되니까 그렇다. 그러면 권징을 하지 못하는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말씀 선포의 결여에 있다. 복사들이 제대로 못사는데 어떻게 권징을 하겠는가? 목사에게 탐욕이 가득하고 거짓이 가득한데 어찌 권징을 하겠는가?
성화가 완결되지 않았으니까 탈선하는 일이 교회에 있다. 그러니 권징을 해야 한다. 권징에는 권고와 징계와 수찬정지, 출교등 여러가지가 있다. 벌써 수찬정지는 상당히 큰 벌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합당하지 못하다는 선포이다. 화란에 추기경이 둘이어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우리 권징 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권징하지 않고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성례를 더럽히는 것이요, 성례를 더럽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권징은 윤리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로서 윤리와 가르치는 교리의 교훈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윤리 면에서 권징을 못하면 교리적인 문제가 생겨도 권징을 못한다.
제 4 장 교회의 정치
제 1 절 교회 정치에 관한 이론들
1. 퀘이커파와 달비파(Quakers and Darbyites)
이 파들은 교회의 모든 정치를 원리상 배척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교회의 모든 외면적인 형식 혹은 조직은 마침내 퇴화하여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적 조명을 강조한다. 즉 내적 조명을 통해 오는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을 중요시한다. 이들은 공중 설교 대신 성령으로 고무된 교훈의 말씀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가 따로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고정된 설교자가 없다는 것은 조직이 전면 부정된다는 것이다. 퀘이커파는 성령의 역사가 오면 몸을 떤다고 하여 진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은 성령에 의한 특별 계시의 직접적인 말씀을 강조하고 말씀을 무시하는데 그것은 바울의 말, 글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오해한 것이다. 이들의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은 실은 소위 인간적인 자각을 말하는 것이어서 인간 정신의 산물이므로 성령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을 무시하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말씀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도 없다.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떠나서는 혹은 선포된 말씀을 떠나서는 역사하시지 않는다.
오순절파의 잘못이 여기 있다. 그들은 말씀과 연관되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한다. 그러나 성령이 저자가 되시는 성경계시는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성경을 제쳐놓을 만한 새로운 계시는 없다. 성경의 계시는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그리고 찬송도 아닌 복음송을 많이 부러서 고조시킨 감정의 흥분을 성령의 역사로 여기는데 그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의 달비파를 형제단이라고도 하는데 영국 국교회가 너무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데로 흘러가는 것을 반대해서 의식과 조직을 무시하고 성도들의 교제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달비파이다. 그들은 외적 조직을 반대하고, 말씀의 권위를 배척하고 인간의 자각을 성령의 조명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대론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이렇게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한 이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이 합리론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한 것은 참 좋은 것같은데 18세기 초엽까지 개신교의 정통주의 시대를 지나고 자유주의, 근세주의,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하는 재세례파들이다. 이런 파들이 빨리 자유주의가 되게 하는 문이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진리가 없다. 성령께서 다 해버리니 그저 은혜, 은혜만 떠든다. 그래서 은혜가 좋은 것같지만 말씀 없이 바른 은혜가 없다.
2. 에라스티안파의 제도(The Erastian System)
이 파는 교회를 정부에 의해 제정된 법칙에서 그 존재와 형식을 받은 하나의 결사로 보았다. 교회의 교직자는 반드시 국가의 위정자로부터 나와야 하고, 국가는 교회를 치리하며 권징하며 필요할 때는 파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파는 교회의 독립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무시하였다. 교회의 본성은 정부의 것과 별개이다. 칼빈이 제네바 시에 가기 전까지는 제네바 시 의회가 교회의 권한을 다 쥐고 있었다. 칼빈의 투쟁은 교회의 권세를 정부로부터 빼앗아내는 것이었다. 즉 시의회에서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3. 감독파의 제도(The Episcopalian System)
이 파의 사람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또는 독점적으로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게 위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자들의 단체는 절대로 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주교들과 감독 이상만 결정권을 갖고 신자에게는 무조건 순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감독파도 교회의 본질이 사도적 계승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계승권이 주교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데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그래서 교회의 기본 속성을 사도적 선포의 계승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도적 계승권은 강조한다.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게 교회 정치가 위임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정치에 관한 한 로마교회도 감독파이다. 로마교회는 베드로의 감독권이 교황에게 전승되었다고 하고, 영국교회는 사도적 계승권이 감독들에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때문이어서 그리스도의 보편성에서 교회의 보편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도성은 사도적 선포의 계속 때문이다.
우리 한국 장로 교회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는데 완전히 감독정치화되어서 장로 제도가 교회 민주화를 막고 있다.
4. 로마교회의 현 제도
로마교회의 제도는 감독파의 제도를 논리적으로 결론지어 놓은 것이다. 로마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설립권을 베드로에게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 베드로 수제자의 교회의 머리로서의 권한이 로마교황에게 계승되고 있다.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죽으면서 베드로에 의해서 이 계승권이 로마 감독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5 대교구 중에서 머리 노릇을 했던 것이고, 그래서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가장 세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도 그런 면에서의 무오이다.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대표, 대리자(vicar Fil Dei)로서는 무오하다고 한다. 인간으로서의 교황 자체가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자리에 앉았을 때(exofficio), 즉 그 위에 앉아서 교리와 예배와 윤리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고 칙령을 내릴 때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정도 혼자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대주교 이상 추기경들의 모임에서 결정해서 교황이 공포한다. 바티칸 제 2 공회의(1963-1965)도 개회는 교황이 했어도 결의 사항은 다 신학자들과 대주교와 추기경들이 하도록 위임해 준다. 그리고 결정이 나면 교황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렇게 교황이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니다. 바티칸 제 2 공회의의 배후에도 Karl Rahner의 신학이 서 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것같이 교황이 독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한스 큉이 교황도 오류가 있다고 반박함으로 로마 카톨릭이 파송한 교수직에서는 떨어졌지만 그 주정부의 교수로는 계속 일했던 일이 있다.
5. 회중파의 제도(The Congregational System)
이 제도에 의하면 각 교회는 상호 독립된 완전한 교회이다. 이같은 교회의 정치권은 독점적으로 교회의 회원들에게 있다. 회중파의 교회가 제일 민주적이어서 제일 좋은 교회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회중파 교회를 이루었다. 그래서 민주화하고, 부흥회 각성운동도 일으켰지만 가장 빨리 자유주의화되어간 교회이다. 가령 하바드라든지 하는 대학들이 목사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 세워졌다. 그런데 교회도 학교도 대부분 자유주의화되어 버렸다. 프린스톤은 특수하게 오래도록 보수 전통을 이어받아서 지금도 하바드나 뉴욕의 유니온처럼 완전 자유주의는 아니다.
침례교가 지금 어느 정도 회중교회적이다. 전체로 모이기는 해도 정치에 관한 한 완전 자유이다. 그러나 회중파의 제도는 교역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을 때 방어하는 면이 약하다. 칼빈주의적이지만 제일 먼저 자유주의로 넘어간 교회가 회중교회이다. 이 면을 볼 때 장로교의 제도가 가장 좋은 법이라 생각된다.
6. 국가교회 제도(The National Church System)
이 제도에 의하면 교회는 국가와 똑같은 자원적 결사라고 한다. 개별적 교회 또는 회중들은 단순히 하나의 국가교회의 소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교회를 무시한 것이다.
독일교회는 국민의 세금에 의해서 목사와 신부의 사례를 준다. 현대화된 사회에서도 어떻게 이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로마교회의 교황 요한 21세도 한 목자로서 서려 했다. 요한 23세는 바티칸 제 2 공회의만 열어놓고 죽었는데 예배모범을 정할 때 신부들이 설교할 수 있고 평신도가 찬송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제 2 절 개혁파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 원리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세의 원천이시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통치하시는 왕이라는 통치권의 의미에서 혹은 유기적 의미에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가 자기 피를 지불하시고 교회를 사셨으니 교회가 그의 소유이고 그러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냥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오시고 성령이 가져 오신다.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지배받으니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런 생명의 원천이시니까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다스리신다. 이런 자격으로 교회를 설립하시고 교회를 만드시고 직원들을 세우시고 권위로 옷입히시는데 그 권위가 신령한 권위이고 말씀의 권위이지 육체적인 세상적인 권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권위이기 때문에 로마교황같은 권위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령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권위요, 신령한 권위이다. 말씀의 권위이고 봉사자의 권위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에 계신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리스도가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신다. 천상에 계신다기 보다는 교회 안에 계시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가 지금도 교회에 현존해 계시고 교회를 말씀으로 이끄신다. 그런데 직접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봉사자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러니까 말씀의 봉사자들이 잘해야 한다. 권위는 그리스도가 입히신 것이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면 모든 권위가 절로 선다. 권위만 부르짖으면 권위가 유지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말씀도 강도라고 해서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받았다. 그러나 지금이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으로 보는 자가 어디 있는가? 목사들이 진정으로 말씀을 잘 준비해서 선포하여 교회에 참 영혼을 살아나게 하여 기쁨과 평안의 기적들을 생산하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헌금을 절로 한다. 교회 생명의 원리는 성령이시니까 성령의 역사를 좇아서 해야 한다. 성령 역사의 방식은 말씀을 통해서이지 다른 길이 아니다.
교회 직원의 권위는 봉사하는 권위이다. 세상적인 권세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다스린다. 당회장도 봉사자이다. 사회에서 돈 많이 번다고 교회에 와서도 신앙이 좋으란 법은 없다. 그런데 한국은 돈 있으면 다 장로로 앉힌다. 그러니 장로들이 권한을 행사하여 오히려 교회를 세속화시킨다.
말씀을 선포할 때 말씀의 봉사자로서의 권위는 사도롸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계승하지만 그 말씀의 권위 자체 때문에 다른 것까지 다 그냥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교회의 설립자가 자기를 희생해서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은혜로 지금도 다스리신다. 그러니 교회 봉사는 희생하고 남을 봉사하는 일이다. 말씀의 봉사도 교인들을 살려내기 위한 봉사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시민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봉사의 기능 면에서 볼 때 당회장도 봉사자이니 경찰서장같은 권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목사님은 신부들의 권세를 능가한다. 그러나 목사는 사제가 아니다. 평신도 위의 특권층이 아니라 봉사자이다. 그래서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면에서 교인과 다르지만 목사라고 해서 다른 면까지 교인과 다르거나 교인보다 능하란 법이 없다. 단지 목사가 말씀에 충실하면 그 신령한 지혜 때문에 다른 일을 지도할 수 있고 조언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게 되는 것이다. 제일 서글픈 존재가 목사 허울만 뒤집어 쓰면 권위와 존경과 대접이 절로 올 줄 아는 자이다. 완전히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말씀의 봉사자로서 복음의 말씀을 바로 선포하면 권위가 있고, 그러면 목사가 허리나 목이 뻣뻣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목사가 특권이 있는 게 아니다.
로마교회 신부들은 Omnibus omnia, 즉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목회원칙으로 한다. 그들은 최소한 그런 정신으로 한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장로는 유교에서의 장로나 유대교의 회당에서 했던 장로, 로마교회의 그런 장로가 아니라 칼빈이 세운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한 대로 사는지를 살피기 위해서 장로들을 세웠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그러니 장로가 심방을 해야 한다. 목사들이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는데 다리가 부러지도록 심방만 하고 다니는 것은 바르지 않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니까 그가 그 권위의 원천이시다. 그 권위 아래 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적인 칼의 권세가 아니라 은혜의 질서의 권위이다. 또 말씀으로 행사하는 권위요, 봉사의 권위이다.
2. 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그의 영으로 다스리시는데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다스리신다. 그리스도의 영은 허공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큰 소리로 기도를 많이 하고 손뼉치고 해야 하는 줄로 알지만 그것은 감정의 흥기여서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것이지 말씀이 가져오는 생명과 말씀이 가져오는 기쁨이 아니다. 자기 도취, 자기 스트레스 해소, 자력에 의한 카타르시스,정화 작업일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역사하신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성령께서 그 회중에 역사하신다. 말씀이 바로 성령이 역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목사님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다스리고 말씀을 선포하고 하니까 항상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서 교인들이 바른 말을 하는 것도 주의 종을 대적한다는 식이 되면 안된다. 선포된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었는지 살피는 그런 식별 능력이 교인에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개신교회의 모습이다. 감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시비하느냐고 할 것이 아니다. 성도는 다 제사장이어서 만인 제사장이다. 한 사람은 목사의 사역에로 소명을 받아서 말씀의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평신도들도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말씀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목사만 옳은 줄로 알면 안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힘있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의 표준이지 내 의견과 내 판단이 절대적인 것으로 알면 큰 일이다. 우리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아집이 바로 거기이다. 교회에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장로 정치가 대의 정치가 되고 회중 정치가 되어야 한다. 장로 자체에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견해를 표명하고 그 합당한 견해를 좇아서 결정하는 것이다. 장로정치는 장로가 마음대로 하는 그런 정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 시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서 한번 투표해서 3,4년 하고 나면 자동적으로 장로직이 박탈되도록 하고 그 사람이 1,2년 쉬었다가 다시 장로 투표를 해서 장로가 되게 해야 한다.
3. 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
그리스도는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다. 교회의 직원은 교회에 의해서 선출되지만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직원들에게 베푸신 이 추가적 권세는 신령한 권세이지 세상적인 권세가 아니다. 권면하고 위로하고 신앙으로 성장하게 하는 그런 권위이다. 강도 장로는 가르치는 권위이고 말씀을 바르게 해명하는 권위요, 치리 장로는 약한 자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봉사하는 권위이지 당회를 열어 제명하고 하는 그런 권위가 아니다.
교회는 신령한 성격이어서 신령한 권세를 행사하고 신령한 봉사를 한다. 그런데 교회가 항상 칼의 권세를 쥘려고 한다. 로마교황만 그런게 아니고 목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천명 이상의 교회만 되면 당회장의 권한을 장관도 따라오지 못한다. 목사들이 가장 독재가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은 결코 그럴 수 없다.
4. 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지교회가 모든 교회의 기본 단위여서 치리권, 진로 결정권, 재산권이 지교회에 있다. 이것들은 지교회에 속한 기본 권한이다. 그런데 총회를 유지재단화해서 총회에다가 재산권을 다 넘겨주니 교회의 기본 권한을 스스로 박탈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썩어도 다 같이 썩는 일이다. 재산권이 지교회에 속한 것이나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서로 편익을 제공할 수는 있다. 미국의 Christian Reformed Church도 그 교회당을 팔려고 할 때는 상회의 허락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교인들이 자신들이 헌금해서 교회 재산을 이루었는데 왜 그것을 총회에다 주는가? 그것이 모이면 권한을 행사한다. 돈이 모이면 권력이 형성된다. 돈을 쥐는 자가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놓을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싸우는 것이다.
재산권은 지교회에 속한다. 이것이 지교회 전체의 소유이다. 목사의 소유가 아니다. 개인 소유가 아니다. 그러니 교회의 이름으로 등록해야 한다. 재산권을 넘기면 진로의 결정을 못한다.
치리권도 그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기본 단위로 해서 치리가 이루어진다. 어려운 큰 문제는 노회와 그 상회에 부탁해도 근본적으로 치리가 그 지교회에 속한다.
제 3 절 교회의 직원
1.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s)
비상 조치는 통상의 정상적인 조치가 아니다. 그 비상사태가 끝나면 그 조치가 해제되는 것이 바른 법이다. 그러므로 비상직원은 어떤 의미로 임시직원이다.
1) 사도
사도들은 교회 설립과 구원계시의 최종적인 해석을 위하여 특별하게 세워진 특별한 자들이다. 특별히 12제자와 바울에게, 어떤 경우에는 바나바에게도, 적용한다.
사도라고 불리우는 데는 조건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복음 전파와 교회 설립의 사명을 위탁받은 자들이다. 둘째, 부활의 증인이다. 왜 바울이 사도로 될 수 있느냐 하면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40일간만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셨다.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에게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으니 그도 사도인 것이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직접 목격자들이니까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했다.
사도들은 계시의 기관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구원 사건을 해석하게 하셨다. 그들의 해석으로 구원사건의 진행이, 계시의 진행이 종결된다. 왜냐하면 그 구원이 궁극적인 구원이니 그 해석도 궁극적인 해석이다. 그래서 구원사건이 반복되지 않고 그 해석도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원사건의 해석이 끝나므로 성경도 끝나고 사도들도 그 임무가 끝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궁극적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으로서 마지막이다. 종말론적으로 큰 것이 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해석도 또 다른 큰 것이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성경이 재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를 근본에서 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진행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러니 더 다른 구원이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하기로 하셨다. 그것에 대한 해석이 끝나면 그 해석도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그러니 구원계시로서 그 해석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과 함께 사도들의 사명이 끝난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도 이 사도성에서 찾는다. 누가와 마가는 사도가 아닌데 어째서 그들이 쓴 복음서를 정경으로 인정하는가? 왜냐하면 복음서가 다 공히 베드로의 설교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마가는 주로 베드로의 예루살렘 설교를 기록했다고 본다. 마태도 일단은 베드로의 설교에 기초하고 자기의 목격과 경험을 추가했다. 그리고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 주로 안디옥에서 한 설교에 기초했다고 본다. 거기에다 누가는 - 누가만이 헬라교육을 완전히 받은 사람이다 - 여러 사람에게 여러 증인에게 다 확인하고 조사해서 첨부해 놓았다. 공관복음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풀려하면 해결되지 않는다. 마태도 그냥 자기가 해도 될텐데 베드로의 설교에 기초하고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거기에 추가했다.
요한은 그것보다 더 간다. 예수를 잡으러온 무리들이 단지 대제사장들과 그 하속들만이 아니었다. 누가는 군관들까지 써놨다. 요한은 거기에다가 천부장까지 왔다고 써놨다. 요한이 더 성격이 안정된 사람이고 대제사장을 아는 사람이다. 사태의 진행을 잘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못쓴 것을 추가해 놓았다. 새로운 독창적인 것이 나온 게 아니다. 양식에 의해서 새로운 상황에 의해서, 새것이 전개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마태와 마가도 다 베드로의 설교에 기초했기 때문에 그 증거의 사도성이 성립한다. 왜 공관복음 문제가 많은가? 많을 것이 하나도 없다. 다 베드로의 설교에 기초하고 있다. 마가의 기록이 제일 생생한 게 많은 것은 제일 처음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쓴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기도같은 것도 보면 얼마나 진지하게 단판하는 모습을 그대로 썼다. 베드로가 졸긴 졸았어도 졸면서 그리스도의 기도하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
그러니 교회의 설립자이다. 베드로의 교회 설립권을 부인할 수 없다. 초대교회를 사도들과 함께 베드로가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메세지에 있어서 초대교회의 대변자, 입노릇을 했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나오도록 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권위가 큰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바울도 예루살렘에 있는 얼마동안 베드로에게서 자기의 가진 복음을 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권을 로마교회가 주장하지만 그것이 베드로에게서 로마 감독들에게 넘어갔는지는 별개 문제이다.
2) 선지자 (Prophets)
선지자가 신약에도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왜 구약의 선지자 같은 것이 없느냐? 사도들이 계시의 기관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까 선지자가 성행하지 못했다. 그들의 제일 중요한 임무가 구원계시를 받는 것인데 구원계시와 연관해서 계시기관은 사도 이상 없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지금도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의 예언같은 것이 있느냐는 것이다. 고전 14장에서 에언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있다 했는데 그 예언이 미래의 예언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다. 그때는 아직 성경이 종결되지 않을 때이고 완결되지 않은 때이니 방언도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말들이 사사로운 어느 교회에 관계된 일이지 사도적 증거에 이르러가지 못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의 예언도, 그때는 사도시대니까 그런 예언이 있었지만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예언은 그때 없었다.
고전 13장의 완전한 때는 언제인가? 종말의 때이다. 더이상 책이 필요없는 때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잘 모르겠으나 서울 찾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지만 서울 다와서는 지도가 필요없듯이 실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요즘에 천국에 다녀왔다는 간증들이 많다는데 혹 우리의 신앙에 조금의 유익은 가져올 수 있어도 그것은 전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표준이 못된다. 그런 것에 상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하다. 더이상 다른 계시를 보충할 만한 것이 필요없도록 충분하고 완전하다. 성경계시는 충분하고 완전하다. 하나님의 계시를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지 자기 경험으로 속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권위로 서있으면 그 권위를 전부로 해야 한다. 그것을 성경에 맞추어 보아야 한다. 안맞으면 배척해야 한다. 그리고 하다가도 중단해야 한다.
3) 전도자
빌립,마가,디도,디모데가 바로 전도자에 속한다. 그들은 사도들을 도와 일하며 가르치고, 직원으로 임명되어 파견되어 권징을 시행한다. 이들에게 권위가 있었던 것은 사도들이 끝나고 사도들의 직접적인 제자이니까 이들에게 권위가 있었다. 이런 자들이 지금은 없고 사도적 증거만 계속되고 있다. 계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계시가 종결되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성취되고 해석이 끝났다. 계시가 더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왜 구약에는 계시가 계속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구약의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구약 선지자들의 목표이니까 계속 진행된다. 그들은 완결되지 않았다. 신약에 와서 급하게 진행되는 진행이 멈추고 평안하다.
2. 통상 직원 ( Ordinary Officers)
통상 직원은 항존직을 말하는데 이는 직분의 항존이지 직분자의 항존(종신)이 아니다. 직분자의 항존이면 귀족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니 장로도 새로 선거해야 하다. 서양에서는 3-4년마다 다시 선거한다 (재신임투표). 화란은 장로 4년하면 자동 해임되면서 2년동안은 재선될 수 없게 한다.
장로의 직분자가 항존이 아니라 그 직분의 항존이다. 장로제도가 항존이다. 사도제도는 없어졌다. 전도자제도는 없어졌다. 그러나 목사와 장로제도는 지금도 없어지지 않는다. 교회가 없어질 때까지 항존직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신이 아니다. 직분은 맡은 자가 죽을 때까지 항존으로 생각하는데 잘못이다. 이것은 유교사상이다. 그러니 강단에서 설교하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노인이 끝까지 버티는 것은 큰 잘못이다. 물론 복음이 넘치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1) 장로 (Elders)
"장로"라는 이 말은 때로는 신자의 단체에서 연장자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장로제도는 구약과 유대교의 장로제도의 유산이 아니고,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을 하면서 구교의 감독제도를 버렸던 것이다. 장로는 칼빈이 세운 것이다. 칼빈은 장로를 세울 때에 신령적 유익을 위해 그리고 선포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지를 살펴서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장로는 한개인이 종신하라는 것이 아니므로 진정으로 개혁하려면 종신으로 장로하는 법을 없애고 논 팔고 밭 팔고 빚내가면서 장로되는 것 없애야 한다. 교회봉사자를 세우는데 교회가 다 비용을 대서 해야지 왜 봉사자가 비용을 다 대게 하는가?
그러니 심방의 책임은 장로에게 있지 목사는 기도하고 말씀 준비하고 교육하는 책임이 있다. 특별한 요청이 들어왔을 때, 장로에게 보고를 받고 심방해야 한다. 화란교회를 보면 장로가 교인 집에 심방와서 얘기한다. 일상적인 이야기 즉 가정문제,자녀문제,재정문제,직장형편을 이야기하고 끝나면 기도하고 간다. 장로를 구역별로 세운다. 장로는 구역별로 두 명, 집사는 한 명, 그러니 집사 수가 장로보다 반이상으로 적다. 조금후에 목사가 또와서 똑같이 묻는다. 형편의 보고를 장로로부터 받고 상황여부를 판단하여 재방문한다. 만일 재정문제가 어려우면 목사가 재정집사에게 보고하여 집사 둘이 가서 확인하여 집사회에 보고하고 구제한다. 집사회의 결정후 돕되 온 교회는 누구를 돕는지 모른다. 다만 목사와 담당집사만 안다.
장로는 목사의 보조자이다. 신령한 유익을 위해서 장로를 사용해야 한다. 장로가 심방하면 얼마나 좋은가? 교육전도사, 심방전도사 많이 둘 필요가 없다. 교회가 신령한 유기체로 그 교회에 속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자유롭게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교회만 크게 하면 뭐하는가? 영광과 존귀를 세상에서 이미 다 받아 버렸으니 천국에서는 상이 없을 것이다. 정신을 좀 차리고 이 법을 고쳐야 할 것이다.
장로는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게 하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는 사장이 더 높겠지만 교회에서는 신앙의 덕이 있고 영적 지도력이 있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해야 한다. 사회에서 부요한 자가 신앙에서도 부요하란 법이 없다. 각 영역에 영역주권이 있는 것이다.
장로는 치리장로와 강도장로가 있는데 치리장로는 장로를 말하며 강도장로는 목사를 가리킨다. 장로와 감독 명칭은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장로는 주로 연령을 강조하고 감독은 사역면을 강조한다.
2) 교사 (Teachers)
교사란 직책이 현재엔 없다. 사실 목사와 장로가 다 하고 있다. 그러면 교사가 누구냐? 신학교에서 진리를 변호하고 확증하기 위해서 가르치는 목사를 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교사에게는 진리의 체계를 세우고 확립하며 그리고 신경 즉 믿음의 내용을 바로 해석하고 그리고 또 가르치는 책임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목사에게 중요한 책임도 교육의 책임이다. 물론 개신교가 설교가 주이기 때문에 설교를 전부로 알지만 교육을 해야 한다. 설교만 해 가지고는 정예부대가 되기가 어렵다. 그러니 교육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당회장님이 되시면 높아져가지고 심방과 설교에 전념하실려고 하시는지, 아니면 심방과 설교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지 교육은 전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하급 기관자들이 맡아서 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목사의 2대 직무가 무엇이냐? 설교와 가르침 즉 교육이다. 심방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심방은 세째나 네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냥 심방으로 모자란 것을 때우는데 심방가 가지고 기도 많이 해주고 이름 불러서 다 축복해 주고, 감기만 들어도 좇아가서 기도해주고 그러니 감사해서 다른 곳에 안가고 감지덕지 나오겠지만 그러지 말고 심방은 유고시에 필요할 때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무해야 한다. 입만 벌려서 하면 설교가 퐁퐁 쏟아져 나오면 벌써 일은 다 되버린 것이다.
일주일 내내 갈한 영혼들이 목사의 설교 한번 들어보겠다고 주일날 그렇게 오지 않는가? 또 월요일부터 시작하여 일주일 내내 모이니까 주일이 그렇게 그리운 것이 안되고 그런 불규칙한 교회생활 때문에 평신도들이, 집에 부녀들이, 가정의 일과 자기의 정상적인 일과를 진행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것은 결코 바른 법이 아니다. 그것은 무법의 법이지 바른 은혜의 법이 아니다. 교회의 생활 때문에 가정의 질서가 깨지면 그것은 벌써 광신교도로 가는 길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세운 사회생활에, 인류가 선 기본단위가 가정아닌가? 그런데 교회행사 때문에 가정생활이 위축되고 파탄에 이르게 되고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여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가정이다. 그러니 가정에 여자가 있어야 한다. 물론 지금의 현대 세상이 남녀간에 다 돈을 벌게 돼되 있지만, 글쎄 남편의 수입이 적은 경우는 여자가 벌면 보충이 되겠지만 그것이 좋은 가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자는 집에 있는 것이 좋다. 그래야 아이들을 보살피고, 어머니의 사랑이 있고 따뜻함이 있으니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정서있게 자란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여자도 사람인데 몫은 둘이어서 가정이 한 짐이고 그런데다 또 직장에 나가니 뭐가 좋겠는가? 돈만 좀 더 벌면 좋은지 모르지만, 참 중요한 것은 다 잃은 줄 모르니 큰일이다. 이런 문제를 열심히 가르쳐야겠다. 가르치는 일이 목사에게 두번째로 중요한 일이다. 복음을 잘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
자기만족, 자기숭배 때문에 너무 일확천금 할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고 가르쳐서, 수고한 대로 열매가 나오는 대로 살도록 열심히 가르쳐야 한다. 화란교회는 - 화란교회 뿐만아니라 Christian Reformed Church 라고 하는 미국에 있는 개혁교회도 그렇게 하는데 - 주일 저녁이면 하이델베르그 소요리 문답을 강해한다. 그것이 주별로 돼 있는데 열심히 가르치면 1년에 끝마칠 수 있게 돼 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가르친다. 그리고 또 설교한다. 그러니까 그것에 대한 해설서가 늘 나온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6년동안 소요리문답을 가르친다.
우리도 복음의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대.소요리문답을 채택해 놓았지만 그런게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이 어디에 붙어 있는가? 우리 헌법에는 그래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고 소요리문답서가 들어 있어서 다행스럽다. 소요리문답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헌법책만 사면 이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있어서 그런 것을 알 정도다. 옛날에도 제일 중요한 소요리문답은 유치부 아이들이 앵무새같이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이 무엇이뇨?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해서 한 10문까지 하다가 끝난다. 그러나 이것을 어른을 위한 설교때, 주일날 저녁예배때 해야 할 것이다. 교육은 여러분의 책임이나 교육전도사는 군대로 말하면 특별 참모 밖에 안된다. 특별참모는 책임이 없다. 책임은 전부 다 지휘관에게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육의 책임은 담임목사에게 있다.
3) 집사 (Deacons)
집사는 초대교회 사도들이 처음 집사직을 세우면서 확정하였다. 구제하는 일과 재산관리 그것을 위해서 집사들을 세웠다. 그러니까 집사는 구제와 재정관리를 해야 한다. 집사가 있으면 꼭 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집사는 무슨 벼슬을 줄려고 집사를 수 백명씩 세워 놓은 것이 아니고 구제할려고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집사를 그렇게 많이 세울 필요 없는 것이다. 현재 500명 교인이면 250명의 집사를 세울 정도인데 집사,권찰 빼면 직분 아닌 사람 50명 밖에 안남는 경우가 있다. 구제와 재정관리인데 무슨 집사가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집사라도 세워나야 돈을 내니까 그러지 않는지 반성해야겠다. 100명에 하나씩만 세워도 5명인데 5명도 넘친다. 옛날 김현봉 목사님의 1,500명 모이는 교회에 내가 나갔는데, 60년대 초반에 교인 1,500명 모였는데 그런 교회가 서울에 별로 없었다. 승동교회도 교회당은 2,000명 모일 수 있는 교회에 200명 모일 정도였다. 이대영 목사님이 산동반도 선교 갔다 오시니 대륙기질을 많이 받아 오셔서 장로들을 다 싹 잘라버리니까 교인 200명 모였다. 60년대 후반까지 그때 1,500명 모이는 교회는 서울에 몇 교회 안되었다. 그런데 교인 1,000여 명에 집사 셋, 남자집사 1명, 여자집사 2명, 그래서 집사 3 명뿐이었다. 그런데 재정관리하고 구제하는데 150명, 200명, 300명, 500명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집사 셋, 그것도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초대교회는 3,000명 하고 5,000명, 8,000명 그 이상인데 집사 일곱이었으니까 그 비율로 따지면 많은 것이다. 뭐할려고 그렇게 많이 세우는가? 그리고 집사가 있으면 반드시 구제를 하게 해야 한다. 돈이나 세고 그런 것이 아니고 구제가 집사의 기본 직무다. 없어도 다 나누어 갖도록 하고 구제해야 한다.
그리고 서리집사는 전부다 임명을 하는데 그 서리집사 임명을 해 놓으면 빠진 사람 기분 좋지 않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서리집사도 투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는 통합측이 잘한 것 같다. 60년대부터 통합측이 서리집사 투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냥 집사 임명하면 들어야 될 사람 안들고, 또 안들어가야 될 사람 들어갔다고 얼마나 불평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집사 투표는 교회 투표에 한 번으로 족하다. 그러니 두 번 세 번 투표하는 것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도 한 번이면 족하지 않은가? 한 번 나와서 법이 정한 수준으로 딱 끊으면 끝난다.
그리고 안수집사 뭐할려고 세우는가? 안수집사로 얼마 안 있다가 바로 장로 되버리고 안수집사로 남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 김 00 씨가 장로인데, 국회의원이고 민주당의 실권자라고 교회가서 꼭 장로가 되야 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돈 관리를 제대로 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집사돼야 한다. 화란교회는 무슨 중소기업연구소 소장인데 교회 와서 장로는 안하고 집사를 한다. 우리 대학촌 교회도 보니까 여자판사가 회계집사로 늘 주일날 끝나면 그것 붙들고 가서 돈 계산하는 것을 보았다. 판사라고 꼭 장로해야 되고 권사해야 되는 이유는 없다. 이것도 영역주권이다.
재정은 집사의 권한이다. 그러니 목사님들이 다 손에 꽉 쥐고 앉아서 마음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흔히 그래가지고 쫒겨나는 경우가 많다. 돈은 집사회의 권한이다. 그러니까 집사회에 넘겨야 한다. 그리고 집사 너무 많이 두어가지고 책임없게 하지 말고 집사 몇사람만 두면 될 것이다. 교인 수가 여자가 좀 많으면 여자가 좀 많고 남자가 많으면 남자가 좀 많게, 그렇지 않으면 여자 한사람 남자 한사람 그래도 좋고, 혹은 숫자의 비례에 의하여 세움이 좋을 것이다. 집사를 세우는 목적은 구제해서 물질 생활의 평준화를 이루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도록 함이다. 최저수준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또 도와줄 때는 더 공손히 해야 하며, 생활이 되도록 해 주어야 하고, 도와주는 자와 도움받는 자만이 알게 은밀히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무한정 도울 수는 없지만 일정한 기간동안 도우면서 자립하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지 말고, 생활이 되도록 돕되 비밀히 해야 하는 것이 주님이 하신 교훈이다.
3. 직원의 소명과 취임
1) 통상 직원의 소명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해서는 철저한 소명의식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목사되겠다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은혜받았다 하면 주의 종이 되겠다고 그런다. 부른 사람도 없는데 소명 받았다고 그러니 답답한 경우들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소명이라고 들어보면 희한한 것이 많다. 옛날 김현봉 목사님 교회에 내가 다닐 때에 어떤 사람이 주의 종 되겠으니 길을 열어주시고 도와주십시오 한다. 누가 주의 종 돼라고 그랬나 묻는다. 까딱하면 주의 종 된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참 바른 신앙과 바른 그리스도인의 심정을 갖고 행실이 바로 될 뿐만 아니라 주의 교회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있고, 그리고 설교에 재능이 주어져 있음이 분명하고, 그런 사람이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냥 아무나 다 와서 주의 종이 된다고 그러니 이게 큰 문제다. 그래가지고 미끄럼틀 타서 빨리 나가야 되니까 여기에 체면이 너무 크게 걸려있다. 그러니 신학교는 졸업장 하나 받아 걸어 둘려고 한다. 옛날에는 후두도 없이 검은 까운만 입고 그냥 졸업했는데 지금은 목회과나 연구과나 전부다 빨간 후두 다 두루고 그래가지고 졸업했다고 큰사진 벽에 붙여 놀려고 그러니 큰일났다.
너무 목사된다는 사람이 많아가지고 큰일났다. 서울에서 지금 목사된 사람들 중에 목회 못하고 있는 사람이 약 20,000 명이라고 한다. 경찰 중에도 목사가 있고 지하철에 일하는 사람 중에도 목사가 많이 있는데 뭐할려고 목사가 되는가? 왜 그렇게 목사를 욕되게 하는가? 이사람들이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목사를 만들어 놓았는가? M.Luther는 목사 되는 것을 독사를 피하듯이 하라고 했다. 더운 지방에서 그 독사 물리면 그만이다. 독사가 물려고 덤벼들면 죽어라고 피해야 된다. 강한 호랑이도 독사한테는 못 당한다고 한다. 한번 물어버리면 끝장이다. 지금은 우리 주변에 다 잡아 먹어버려 입으로 다 들어가 버리고 없으니까 독사 피하는 것이 별볼일 없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다 입으로 들어가 버리니 농담이지만 여인의 후손이 분명한가 보다.
아까 말한대로 분명한 신앙을 갖고 참 크리스챤의 심령으로 변화되어 그의 행실이 바르고, 뿐만 아니라 주의 교회를 사랑하는 특심한 열심이 있고 말씀의 선포에 재능이 있다고 인정된 사람, 그런 사람들만 목사가 되야 한다. 그러니 아무나 목사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중에 신학교 졸업했다고 다 목사 돼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원설 박사 신학교 버젓이 잘 나오신 분이다. 그런데도 한남대학교 총장님이시다. 우리 손봉호 박사, 그 훌륭하신 분도 신학을 반듯하게 다하신 분이시다. 그런데 일반대학교 교수한다. 그런데도 겸손하고 겸손하다. 꼭 신학교 졸업했다고 다 목사 돼야 된다는 법이 없다. 분명히 소명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몰라도 제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신학교 졸업하자마자 강도사 고시 치기가 바쁘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1년동안 신부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간을 준다. 그리고 졸업하기 1년전에 그 사람에 대해서 신부 되어도 이의가 없느냐는 공고를 써 붙인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가정이 어떠한 사람인가? 방을 붙혀가지고 이 사람 신부 되어도 이의가 없느냐고 전국에 방을 내려 알아본다는 것이다. 신학교 내에서만이 아니고 전국으로 알아본다.
그런데 우리는 신학교 졸업만 했다 하면 강도사 빨리 되고 목사 빨리 될려고 그냥 달음질 치는데, 분명히 신학교 공부했다고 목사 안하면 죄짓는 것 아니다. 신학교 공부 잘하면 좋지 않는가? 김홍전 박사 얼마나 신학공부를 잘했는가? 그리고 신학박사다. 그런데 목사가 아니다. 장로도 안되고 목사도 아니다. 김홍전 박사처럼 그렇게 훌륭한 신학을 가진 사람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예로는, 내가 대학교 때 좀 들어 봤는데 자기 집에서 가르쳤다. 그분도 좀 보통사람은 아니어서 그런 학을 가진 분이 신학교 와서 가르칠 욕심은 않고 집에서 몇 명 모아놓고 가르치고 계셨다. 그 재미보고, 그것도 신학박사가... 그래도 목사 안했다. 그 좋은 분을 활용해야 되는데 못하고 있으니 참 아쉬운 것이다. 참으로 나는 목사 안하고 철학교수 되는 것이 오랜 꿈이었는데 그게 안되고 결국 의지가 약해서 목사가 된 것같다.
(1) 내적 소명
특별계시의 수단이 된 초자연적 소명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어떤 섭리적 지시들로 되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강력한 요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해야 할 특별한 일, 필요한 은사가 자기에게 적절히 주어졌다는 확신, 그리고 하나님께서 길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는 체험 등의 섭리적 지시들인 것이다.
(2) 외적 소명
소명이 외적으로 확인되는 것이 청빙인데, 교회의 직원들은 사람의 소리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목사는 청빙이 없으면 안된다. 그런데 요즘에는 청빙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전부다 돌아다니면서 내가 들어가겠다고 해 가지고는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어느것이 진짜 법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전에는 교회 대표가 스스로 찾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전부다 장로님,집사님 데려다가 다 밥 사고 들어가도록 운동을 한다. 그러니 청빙할 때도 강제적으로 누구 누구를 꼭 되게 해 주시요 하면 안된다. 민주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신임투표할 때도 꼭 부표 나오지 않게 해 주시오 하면 안된다. 자발적으로 투표하도록 해야 한다. 부표 던질 사람은 부표 던지도록 자발적으로 하게 해야 한다. 지금은 바로 청빙하지 않고 임시목사로 와가지고 이제 신임투표하는데 기분이 안좋지만 그렇지만 억지로 하게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하게 해야 할 것이다.
또 자기의 준비가 끝나도 교회에서 정식으로 청빙이 와야 한다. 그런데 청빙도 오지 않을 사람들이 어쩌자고 서울에 목사들이 2만명이나 지하철에 가서 일하고 경찰서 직원으로 일하고 복덕방이나 하는지, 목사 사표내고 하면 안될런지 모르겠다. 목사 사표내면 저주받을 줄 아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 사람의 신앙태도에 달렸다. 목사 안된다고 신앙생활 안한다면 정말 목사 못 될 사람이요, 본래 목사될 자격이 없던 사람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국회에 나갔다. 첫번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의회에서 목사는 못 모신다 하니까 목사 사표냈다. 그 다음에 다시 기도하고 어떻게 할까 진로를 결정하는데 또 청빙이 왔다. 그러니 목사 안수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 청빙 거부했다. 끝내 카이퍼가 목사가 아니었다. 사표내면 목사 아니다. 장로 노릇했다. 그것도 평생 시켜주는 장로가 아닌 4년 하다가 마는 장로를 했다. 그러니까 목사로서 당수가 되고 수상까지 된 것이 아니다. 평신도로 되돌아갔다. 그러고도 자유대학 세우고 조직신학을 20년간 가르치고 그러다가 수상되니까 바빙크를 데려왔다. 바빙크를 데려와 앉혀놓고는 안심하고 수상으로 갔었다.
목사 되었다가 사표내면 저주받는 줄로 아는데 저주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표내도 된다. 저주받는 것은 목사했다가 사표냈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타락해 가지고 죄 지으니까 저주받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가 소명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이 있어서 꼭 목사되는 것만 소명으로 아는데 그것은 칼빈주의의 소명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으로 부터서 그 직책에로 그 직업에로 소명 되었다. 목사 되는 것만 소명이 아니므로 책임은 다 꼭 같다. 하나님 앞에 책임과 의무를 갖고, 묻고, 서기는 전부 꼭 같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으로 부터 그 직업에로 그 직장에로 그 직책에로 소명되었다. 그 소명의식 때문에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꼭 목사 되라고만 권하지 말아야 한다. 어려움 당하니까 목사되려고 할 필요 없다. 내가 가르친 제자중 서울상대를 나와서 현대에서 과장으로 일했는데 언더테이블을 못하니까 보직도 안주고 보직도 없는 딴 데로 옮겨, 나가라 하니까 사표 쓰고 나왔다. 내게 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했는데 내가 당장 직장을 구해 줄 수 없어서, 그러나 직장 구하는 법은 가르쳐 주었다. 꼭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 했더니 지금은 어디 과장으로 들어갔다. 그때 내가 너 내게 와서 신학을 배우면 안 좋으냐고 물으니 자기는 목사될 뜻이 없다면서 결코 목사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자기에게 와서 권고했지만 자기는 결코 그 길로 갈 뜻은 없다고 했다. 자기는 목사님이 옛날 왕십리 교회에서 가르쳐 주신 대로 비지니스 맨이 되는 것이 일생의 목표라고 하면서 그렇게 어려워도 , 한 1년간 쉬고 있는데도, 그 길을 가려고 않고, 끝내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그 길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조금 어려움만 당하면 그냥 목사되라고 권하는데 그러면 안된다. 본인이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 원칙에 의해서 본인이 정해야 되는 것이다.
2) 직원의 취임
(1) 임직식 (Ordination)
임직될 후보자의 소명과 시취를 본 후에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회 혹은 노회의 행위로서 후보자의 성직에 대한 소명을 공적으로 승인 확증하는 것이다.
구교에서는 안수가 큰 은혜 역사의 통로이다. 옛날 칼빈은 안수없이 목사일을 했다고 하는 추론이 있다. 화란에 종교개혁 연구에 큰 교회사가로서 ------ 대학의 교회사 교수인___________라는 사람이 쓴 책 " Dankbaar Calvin Zyn Wege Werk" (칼빈 그의 길과 사역) 에 보면 칼빈이 안수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에 있을 때 보니까 안수 받았다고 논문 쓴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시의회에 가서 보고하고 그것으로 다 되었던 때이다. 그러나 성경대로 안수하는 것이 바르다 하므로 후에 목사들이 안수를 했고 또 안수 받으라 했지만 칼빈 자신이 안수 받아 목사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가 안수식을 얼마나 성대하게 했는가?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 구교로 돌아가서 그렇게 성대하게 하고 목사 안수 할 때 잔치하여 안수 받는 사람이 그 비용을 다 내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가난한 전도사들은 빚을 내고 보통 큰 짐을 지는 게 아니다. 이런 불합리한 것들이 부정의 씨가 된다. 노회의 정상적인 행사 중의 하나로 뜻있는 일이지만 푸짐한 음식에 큰 잔치를 해야 거룩한 안수식인가? 이것도 간소화하는 시정이 요망된다.
(2) 안수 (Laying on of hands)
이것은 후보가 일정한 직위를 위하여 구별되었다는 것과 또 특별한 영적 은사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안수는 단순히 후보자가 성직을 위해 따로 구별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제 4 절 교회 회의
1. 각종 교회 회의
당회, 노회, 대회 등으로 되어 있으며 어떤 교파는 노회와 대회 위에 총회(General Assembly) 를 두고 있다.
2. 지교회의 정치
지교회의 정치는 대의정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장로교회의 장로제도는 대의정치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장로를 특권층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대의정치가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이제는 장로들이 상당히 개명해서 지금은 목사들이 마음대로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옛날처럼 목사님이 검은 것도 희다 하면 예 하고 따라가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장로들로 하여금 특권층이 되도록 해놓으므로 오히려 목사들이 장로들에게 절절매게 되었다. 또 목사의 자리가 큰소리 치는 자리가 아니다. 당회장을 큰 금뱃지로 아는데 당회장이 권력의 자리가 아니다. 담임목사로서 당회를 소집했을 때만 당회의 장이다. 그리고는 담임목사다. 교회가 대의정치 즉 민주정치가 돼야 한다.
그러니 어느 장로로 하여금 교회재정을 독점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미국은 의료기관이나 대학을 돕는데 해년마다 돕는 단위의 액수를 낮춘다. 우리같으면 높일 것 같은데 20불에서 10불로 10불에서 5불로 자꾸자꾸 낮춘다. 그러면 여러 사람이 균일하게 동참한다. 그러니 한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없어지게 한다. 지금 집사와 장로들로 교회재산을 독점적으로 내게 하니까 집사와 장로들이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데 자기재산이 대부분 다 들어가 있는데 왜 권한 행사를 안하겠는가? 그것은 어느 장로의 교회이고, 어느 집사의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어느 누구의 교회가 아니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게 한 장로에게 의존해서 교회 재정을 충당하고 운영하는 것은 바른 법이 아니다. 그건 교회의 대의정치에 어긋난다. 교회 전체가 모여서 하는 것이지 돈 많다고 특정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안된다.
물론 그 개인이 성경의 헌금정신을 따라 무명으로 선한 청지기 처럼 그 일을 할 경우는 다르겠다. 그것도 잘 가르쳐야 한다. 교회가 민주화가 될려면 책임이 장로에게가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있을 뿐이다. 여러분이 돈을 좇기 때문에 민주화가 안되는 것이다. 돈 냈으면 돈에는 반드시 권력이 따라온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미국이 원조해 주니까 얼마나 미국이 고맙고 좋은가? 미국이 다 우리나라 예산을 세워주었다. 빚은 빌려오니까 우리 마음대로 하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는다. 빚도 많이 주는 사람이 주인이요. 그러므로 후진국의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경제계획을 해도 경제계획이 국내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데 있다. 전부다 국외에서 경제계획해 가지고 들어온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다. 빚을 지면 자주국이 아니다. 완전히 종속국이 된다. 지금 미국이 우리를 지켜주니까 좋은 것은 사실이다. 미국이 아니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천만번 감사해도 감사를 다할 수 없다. 난 미국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했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지휘권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 마음대로 다하지 않는가? 우리는 허수아비로 서 있을 뿐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여러분이 돈을 좇지 말고, 그리고 헌금해도 무명으로 하게 해야 한다. 이름을 써내지 못하게 해야 민주정치가 된다. 교회가 민주정치가 안되는데 사회가 어찌 민주정치가 되겠는가? 교회가 더 독재를 한다. 당회장이 얼마나 독재 하는가? 돈 많다고 두번 천국가겠는가? 오히려 한번도 못갈 수가 있다. 지교회의 재산권과 치리권과 진리결정권이 다 여기에 속한다. 이것이 교회의 기본 권한이다. 그러니 지교회가 교회의 구성원을 치리할 수 있고 권징할 수 있다.
그리고 재산은 누구의 것은 아니다. 그 전체의 것이다. 그러면 교회가 분란이 생길 땐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수가 많으니까 다 빼앗아야 하는가? 그러면 안된다. 나가는 그들도 헌금한 사람들이니까 교인 수에 비례하여 재산을 나누어야 된다. 그렇게 한 왕십리 교회가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분이 성자니까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한푼이라도 안 내줄려는 판에, 갈라져 나간 교회는 통합측으로 가고 남은 교회는 합동측에 남아 있었는데, 그런데 인구비례로 재산을 나누었다. 땅도 떼 주고 했었다.
그러니까 전체 재산에 대한 주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교인총화, 총의, 총의가 그 소유자다. 그러니까 재산 이름도, 교회재산 등기도 교회 이름으로 해야 된다. 대표자가 꼭 들어가야 된다면 목사, 장로, 집사, 평신도의 네 부류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의 본성 즉 교회의 통일성 때문에 상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그 법이 지교회를 구속할 수 있는 구속력을 행사할려면 그리스도의 법에 맞게 결의될 때만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다. 상회 결의라고 무조건 구속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법에 맞게 결정된 상회 결정만이 지교회를 구속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안된다.
교회정치의 기본 단위는 지교회이다. 지교회는 완성된 독립적 교회이다. 그러므로 지교회의 재산권과 치리권과 진로 결정권이 다 지교회에 속한다. 목사도 노회에 속하나 당회의 권위에 종속한다.
3. 광대 회의
노회와 총회를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광대 회의에 대한 성경적 근거
노회와 총회를 구성할 수 있는 근거는 교회의 본성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영적 통일을 이루는데 그 표현이 하나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상회 조직은 그것의 바른 귀결이다.
2) 그 직권에 속하는 사건들
(1) 교회의 통일과 질서를 위한 일( 교리와 도덕, 정치와 권징)과
(2) 진리의 바른 유지를 위한 일만을 다룬다.
특히 성질상 소회의 영역에 속하나 거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이나 그 내용이 일반 교회 전체와 관련된 사건들일 때 상회가 취급한다.
3) 이 회의의 권세와 권위
광대회의는 당회에 주어진 것보다 더 높은 권세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꼭같은 권세이지만 보다 더 방대한 분량에서 대표할 뿐이다. 여러 교회가 대표하였기 때문에 권세의 축적이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큰 권세를 가졌다 하더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된 결정을 할 때에만 권위적이다. 상회는 권력기관이 아니라 섬기는 기관이다. 모든 정치는 진리에 이르도록 하는 데로 모여야 한다.
그런데 재산을 총회로 한곳에 모이게 되므로 지교회가 진로 선택이 나올 때는 선택을 못하게 되고 또 감독정치를 하기 위한 필연적인 준비작업이 되어 장로정치가 교황 정치가 되고 말았다.
분파의 특색중의 하나가 진리를 중심해서 모이지 않고 사람을 중심해서 모인다. 그러므로 진로 결정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산을 다른 곳에 귀속시켜 놓으면 그 결정권이 없어진다. 여러분 교회의 기본권을 여러분 스스로가 박탈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썩으면 다같이 썩는 것이 되어 신학적으로 타락하면 다같이 타락하고 못나오고 만다. 이런 악법이 개명된 잘 믿는 교단까지 들어왔다. 물론 교회의 재산을 한군데 귀속시켜 놓으면 빨리 못 빼내가니까 분열은 안되지만 그렇지만 진로를 결정 못한다. 자기 재산권 행사를 못하면 대의정치가 못된다. 이것은 교회의 근본 성질을 말살하는 것이다. 그러니 유지재단 제도는 악법이다. 그 법은 도입하면 안되는 법이다.
제 5 장 교회의 권세
제 1 절 교회 권세의 원천
교회 권세의 원천은 그리스도이신데 그가 교회의 설립자요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교회의 권세도 그에게서 나온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신다. 그리고 메시야에게는 사죄의 권세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메시야로서 죄를 사해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왕으로서 더 나아가서 모든 구속을 이루신 이로서 모든 죄를 사하셨다. 그러니 신부에게 고회성사했다고 신부에게 사죄의 권세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죄는 하나님이 사하신다. 죄가 사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해지는 것이요, 그 피를, 그 이름을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다른 길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제자들)에게 매고 푸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죄를 사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의미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그 사죄의 권세는 죄를 직접적으로 그들이 사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로 죄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가능한 말씀이다. 말씀의 권세는 그 영으로 되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자에게 성화가 늘 동반되어야 한다. 영으로 된다고 했으니 영이 역사하는 길은 항상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선포로 된다. 성령이 뭘 하려고 오셨는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또 그의 사역을 계속하여 확장하고 적용하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가 단번에 이루신 사역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 사역의 계속이다. 그를 영화롭게 함이 성령의 오신 근본 목적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심, 즉 설교가 은혜가 되게 하는 길은 항상 복음을 선포해야만 한다. 혹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전경륜 즉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야기할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
제 2 절 이 권세의 본질
1. 영적 권세
교회의 권세가 세상적 물리적 권세가 아니라 영적 권세이다. 그런데 다 착각을 해서 교회가 커지고 조직이 강화되면 권력이 몇사람에게 집중돼서 세상 권력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신령적 성경의 권세이다.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권세이고 신자에게 도덕적 영적 방법으로만 행사되는 그런 권세이지 물리적인 세상적인 권세가 결코 아니다. 교회에서는 참으로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다루어야 한다. 다른 데는 이익공동체이기 때문에 관계가 유지되지만 교회는 이익공동체가 아니고 생명공동체 이기때문에 그렇게 잘 안된다. 또는 신자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관계를 가지며 더우기 영적 도덕적 방법으로만 행사되기 때문에 만일 너무 마음 상한 일이 발생하면 다른 데로 가버린다.
교회일을 처리하는 데는 늘 폭력을 배제해야 한다. 폭력은 비인격적 행위 일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구타만 말하지 않는다. 폭력이 일단 활용되는 그런 교회들은 목사가 진짜가 아니든지, 목사가 잘못 가르쳤든지, 일차적으로 목사의 책임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목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쓴 뿌리가 나서 다른 곳에서 독종이 흘러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재산이 연관되어 싸움이 난다. 그리고 목사가 항상 봉사하는 직인줄 모르고 세상적인 권세와 위엄으로 명령하는 권세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영혼을 살려내는 봉사하는 자리로서 생명을 살려내는 권세이기 때문에 전혀 차원이 다른 권세이다. 신령한 권세이니까 권위, 권병(_____)이라는 용어가 권세란 말보다 나을 것 같다.
신령한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지상의 것보다 더 위의 것이니까 교황이 지상권과 함께 영적 권세도 잡아야 한다는 유혹이 로마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봉사자의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교회 서열에서 감투쓰려 애쓰고 요새는 경목위원, 향목위원등으로 세상적인 권세를 부릴 수 있는 표딱지를 하나씩 구해서 행사하려 한다. 그것도 그 본래의 목적인 복음 전도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재산분규가 나면 물리적인 권세를 행사하려 하는데 그러면 폭력이 나온다. 우리의 권세는 생명을 살리려는 영적 권위요 말씀의 권위이지 권세의 근거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정치이니까 권세 잡은 자가 아니다. 우리가 주권자인 것 같지만 우리는 복종하는 자이다. 재산분규가 있어서 교회가 나뉠 때는 교인수에 의해서 재산을 나눠야 한다. 그래서 폭력이 없어져야 한다.
2. 사역적 권세
교회에 주신 권세는 독립적이거나 주권적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종속하는 권세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도되고 하나님 말씀과 일치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사역적 권세란 다른 권세가 아니고 목회권세이다. 이 권세는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니까 하나님 말씀의 권세에 의해 수행해야 한다. 내 마음대로 판단해 놓고 목사의 말인데 안듣는다고 그러면 안된다. 목사도 오류가 있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으로 권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학자가 되라는 교훈처럼 학자가 되어야 한다. 목사 칭호만 붙이면 다가 아니라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고 말씀 연구하는 일과 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한다.
목회자는 사람 자체로 존경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권위가 있다.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존경 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말씀권위 때문에 존경 받는 것이다. 또 복음이 선포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렇지만 자기가 기도의 교통이 없으면 영의 역사가 그렇게 활발하지 않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행해야 한다.
제 3 절 여러 종류의 교회 권세
1. 교리권 혹은 교훈권
구원의 말씀을 전파하고 수호하는 권세가 교회의 교리권이다. 우리에게는 당대에 설교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갖는 이 믿음의 도리를 잘 전승하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다. 그런데 가르치는 자부터 우리가 만든 도리도 잘 모르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니까 설교만 성인들을 향해서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은 2세들을 가르치는 데에 특히 중고등학생들을 여러분들이 잘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심방하려고 애쓰는 것도 좋지만 중고생들 열심히 가르치면 2-3년 후에 성인이 되니 바깥 사람 데려오는 것도 좋지만 안의 사람을 그리스도인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니 교육이 목사의 책임이니까 잘 가르쳐야 한다. 소요리문답을 가지고 2세들의 교육을 통해서 후세들에게 전해야 한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의무를 지닌다. 이 의무는 교회의 근본적인 중요한 일이어서 지상교회가 존재하는 한 계속된다. 성경해석 주석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항속적인 요소와 시대적인 요소인데, 항속적인 요소는 교부때 했던 성경해석이 지금도 타당하다. 종교개혁자들이 했던 요소가 지금도 타당하다. 그러나 시대적인 요소는 교부시대적 상황에서의 적용과 그때의 주석, 종교개혁자들이 했던 적용된 설교와 주석 그런 것은 지금 안맞는 경우가 많다. 주석이 계속 다시 쓰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하므로 진리의 이해를 약화시키기도 하지만 점점 깊이 나아가게 하는 일을 한다.
로마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로 나누어 가지고 해석할 권리를 가르치는 교회에만 있다고 했는데 그러나 물론 평신도도 해석을 한다. 그들의 해석이라고 틀렸다고 배척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 이 일을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개신교나 구교가 동일하다. 그런데 이들은 추기경이 내린 해석, 교황이 내린 해석이 완전히 전체적으로 옳다고 하지마는 우리는 일차적으로 교회가 내리는 성경해석은 꼭 전체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누가 통일된 해석을 온전히 내릴 수 있는가? 얼마만큼 궤도를 이탈하느냐 이것이 큰 문제이지만 성경해석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신조나 신경과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것도 교회 목사의 해야 할 일이다. 물론 이것은 총회차원에서 한다. 말씀의 이해가 깊어지면 신앙고백이 바뀌어지므로 신경과 신앙고백도 수정되어야 한다. 신조에 대한 것은 치리권에 속한 것이기 보다 교리권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신조가 정해질 때 신학자가 주로 일하고 총회가 결정하는 것이다. 신조의 결정은 총회수준 가지고는 결코 되지 않는다. 지금은 공회를 열수 없으니까 고대교회의 결정을 수납하는 것이다. 성령론의 토론이 끝나면 로마 카톨릭이 공회를 소집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고대 공회의의 결정만큼 된다고 하기는 어려워도 공회로서의 교리적 성격을 갖는 결정을 할 수 있다.
1967년 고백서는 웨스터민스터 고백서와 바르트의 신학이 합해졌는데 그래서 화해가 그 중심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선택되어 결국은 다 하나님의 존재에 동참하게 되니 예수 믿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그릇된 것이다. 구원사적 개혁신학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서서 제2 신앙고백서이다.
항속적 신학은 없다. 그러니까 결국 계속해서 열심히 말씀 연구하고 신학교육을 잘해서 진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도 신학교육이 중요하며 신학교육을 바로 해야 한다. 교리권 행사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신학교 교육이다. 신학교 권위를 많이 높여야 한다. 신학교가 목사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말씀을 잘 수호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이니까 신학교의 권위를 많이 높여야 된다.
* 축도의 문제 *
목사의 축도권은 교훈권에 속한다. 목사의 축도권도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회식에서 예우로 축도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도 축도는 설교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한 것에 근거해서 복을 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속에 고후 13:13 을 고정된 우리 한국교회의 표준적인 축도로 하고 거기에 많이 부가를 하는데, 성령의 감동,감화,충만,교통하심이 거기에 위로까지 첨가한다. 말씀선포의 그 권위 때문에 축도를 하더라도 꼭 설교의 내용이 축도에 요약해서 반복될 필요는 없다. 사도의 축도를 하는데 사도의 축도에 성령의 교통하심이라고 되어있다. 거기에다 다른 말을 더 붙일 필요가 있는가? 사도보다 더 앞설려고 그러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 하면 된다. 흔히 "있기를 축원하옵나이다" 하는데 "있을지어다"가 맞다. 있으라 그 말이다. 그러면 그 복이 내리는 것이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면 복이 내린다.
그리고 민 6:24-26 의 레위 제사장의 축도가 있다. 여호와는 여러분을 복주시고 여러분을 지키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로 비추사 여러분에게 은혜 베푸시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여러분에게로 향하여 드사 여러분에게 평강 주실지어다. 서양교회는 구약교회의 전통을 좇아서 Lord, 주님으로 고쳐서 외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빌면 복을 내리시기로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다. 내가 복을 주시기를 간구해서 내가 받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마교회는 강복(_____), 즉 복을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빌 1:2에 보면 바울의 특징적인 축복이 나온다.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 성령이 빠졌으니까 삼위일체적인 축도가 아닌 것 같아도 이 축복도 얼마나 좋은가?
그 다음 민수기의 우리말 성경번역 보다 내가 지금한 번역이 더 좋은 것 같다. 우리 말하고 어법이 달라서 화란은 그 다음에 붙이는 말이 더 있다. "여러분의 나가고 들어옴에, 여러분의 웃음과 눈물에, 여러분의 노동과 휴식에, 그날 예수 앞에 설 때까지" 가 붙어있다.
이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도 좋다. 아침 오전예배에는 민수기 레위 제사장의 축복을 했으면 저녁예배는 고린도후서 사도의 축복을 하는 것도 좋겠다.
그 다음에 계 1:4-5 에 축복이 있다. " 은혜와 평강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와 그 보좌 앞의 일곱명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 그 축복기도는 좀 길어도 3위가 다 나온다. 여기에 일곱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화란교회는 장로가 예배를 인도할 때 장로가 설교를 한다. 설교가 끝난 뒤 "오늘 설교는 누구 목사의 설교를 읽었읍니다" 라고 말한다. 장로는 말씀의 훈련을 안받았으니 설교를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목사의 설교를 가져다가 읽는다. 장로나 신학생이 와서 설교를 하고 민수기의 축도를 하는데 목사는 손을 들고 "여러분에게... " 이렇게 하는데 반하여 장로나 신학생은 눈을 감고 "우리에게... 계시옵고, 우리에게 복주시고... " 그렇게 하고 "아멘" 한다. 예배모범은 동일하나 하나는 손을 들고 복을 내리고 한쪽은 기원을 한다. 이것은 교회적인 통일이 있은 후에 해야지 지금 하기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축도는 말씀을 선포하도록 세움받은 자가 해야 한다.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축도할 수 있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복을 받는 청중을 보고 해야 바르다. 레위 제사장들이 눈 감고 축도했을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설교하고 말씀을 바로 했으면, 그리고 믿음으로 받으면 복이 온다. 그 자체가 마력적으로 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참 복 즉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임한다. 원문으로 보면 어법구조가 그렇겠지만 은혜와 평강이 맨처음에 나온다. 바울의 주요 편지가 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이다. 몇 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바울의 인사패턴이 동일하다. 사도적인 축복권이다. 사도들에게는 그 축복으로 복이 임하여 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도들을 내보내시면서 가서 평강을 빌라고 하셨다. 그러면 평강이 그 각 집에 임하리라고 하셨다. 마력적으로 임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복음의 사실을 가져왔으니 말할 수 없는 큰 평강이 그 집에 찾아 온 것이다. 결코 세상적인 축복이 아니다.
2. 치리권
1) 질서유지권
예배모범과 교회생활의 절서확립을 위하여 규칙을 세우는 것이 질서유지권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일반적 원리에 기초를 두지만 교회의 구체적인 사례에 관계되는 것이니까 교회의 신령적 유익을 위해서 구체적 상황에서 정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교인의 자격을 인정하고 공예배의 방식을 형성하고 또 권징의 규칙 등을 규정한다. 교회의 건덕과 유익을 위해서 제정하는 것이니까 이것들이 교회의 정당한 생활을 방해할 때는 개정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법,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으려면 여러분이 다 목회에, 교회의 바른 생활에 권위자가 되어야 한다.
2) 순결유지권
결국 권징의 권한이다. 그러면 왜 권징해야 하는가? 기독교 진리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바로 윤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윤리와 진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이다. 그러니 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권징이 따라온다. 우리는 어쩔수 없다고 그대로 내버려두면 교회가 교회되기를 그치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와 윤리가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는 일치하도록 제재제를 가하여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의 순결유지권 혹은 권징이다.
권징은 교회에서 썩은 가지 혹은 마른 가지를 골라내는 것이다. 이미 병들은 사람, 돌이킬 수 없는 사람은 내보내고 병든 사람 회복되도록 고치고 그런 일을 위해서 권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윤리적인 문제고 인격적인 문제이기에 참으로 다루기 어렵다. 그러니 권징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사심없이 목사의 직무를 감당하고 말씀의 권위 아래 설 때에만 여러분이 권징할 수 있다.
지상교회는 죄와의 투쟁이 끝난 승리한 교회가 아니다. 승리한 교회라니까 항상 전리품을 생각하는데 그런 승리가 아니라 죄와의 투쟁이 끝난 교회를 말한다. 지상교회는 그런 승리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항상 권징이 있어야 한다. 거룩이 교회의 생명인데 교회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순결유지권, 권징권이 필요하다. 그래서 수찬정지,공포와 경고,파문을 한다.
그리고 성찬을 행할 때에도 성찬직전에도 회개 기도를 해야 되지만 여러분들이 다 살펴야 한다. 범죄한 자는 수찬정지시켜야 한다. 쉬쉬 덮어두면 교회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 다 썩어버린다. 그러므로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 수입의 손해, 교인의 손해보다 더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죄를 살피지 않고 성찬에 참여하게 하면 죄에 대한 무감각증이 생긴다. 고린도교회는 이런문제로 병든자와 약한자가 많았다. 권징이 교회의 생명이다. 권징이 없으면 이익단체로 유지되는 것이 된다. 말씀을 늘 힘있게 바로 선포해야 권징을 바로 할 수 있다.
권징의 방법은 수찬 정지, 죄목을 교회에 공중 공포, 범죄자 이름 공포, 파문 예고, 파문 등의 순서로 징계가 가중된다.
3. 봉사권
구제하는 일은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 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면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면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구제는 하나님 나라의 평준화 원칙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정상적이 되도록 재분배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손을 펴서 따뜻하게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직장 알선 위원회도 조직하여 직장까지 구해주어야 할 것이다. 집사는 이 구제하는 일을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또 구제할 때는 도와주는 자와 도움받는 자만 알도록 은밀히 해서 도움받는 자가 떳떳이 교회생활을 하도록 해야 한다.
십일조의 의미는 (1) 신적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요 (2) 교회의 유지를 위함이다. 구약의 율법과 규례들은 다 그 시효가 만료되었지만 십일조는 그 정신에 입각해서 하는 것이다. 그 외의 헌금 제약은 다 풀어버려야 한다. 헌금은 자유로이 하도록 해야 하고, 이 헌금으로 교회끼리 돕고 노회끼리 돕고 교회중에 가난한 사람과 그 지역사회를 돕고, 특히 신학교를 돕고 어려운 학생을 도와야 한다. 그리하여 봉사하는 참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제 3 편 은혜의 수단
제 1 장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
제 1 절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말씀 선포
보통 "말씀" 을 말할 때 (1) 선재한 Logos로서의 말씀 (2) 처음 창조의 말씀 (3) 직접 계시가 온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말씀, 이것은 보통 생략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4) 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 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풀어서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선포로서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다.
"은혜의 수단" 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말씀 전파, 성례, 안식일의 기도 등 신자의 영적 향상을 도모해 주는 일체의 것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그러나 특수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가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중 말씀이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씀이 바로 은혜의 수단이며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가지고 설교할 때 말씀과 함께 성령이 역사하시고 우리에게는 은혜가 된다. 그러므로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된다.
그렇게 되려면 바로 전파해야지 지엽적인 글자풀이나 하고 있으면 말씀은 했는데도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다. 50년, 60년대 한국교회가 얼마나 말씀을 높이 받들고 열심히 성경을 가르쳤는가? 그래서 목사께서 하는 설교를 강도라해서 위에서 내려온 말씀으로 그렇게 받아들였으나 지금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고 전부다 테크닉만, 기교만 남아있어서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의 기록자이시고 주인이시기 때문에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선포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왜 성령께서 역사하시느냐?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 따라서 구원의 도가 확증되면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보신다.
목사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교통이 없으므로 그 말씀에 성령의 역사가 적은 것이다. 설교 준비할 때 그 말씀을 깊이 겸손히 연구해야 하며 잠을 못자며 고민하는 그 정도는 되야지 입만 벌리면 퐁퐁 나오고 남의 설교집 베껴다가 그대로하고 그러면 은혜가 안되고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남의 설교 안베낄려면 여기서 공부 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학 하고 왔어도 신학부 3년 과정의 기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교수진이 보강되면은 어학과정을 1년 더해 가지고 시험 합격하면 졸업시켜야 될 것이다. 그래서 바른 신학을 배워가지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니까 헌금 보상을 늘 축복설교로 갚아 줄려고 한다. 생명의 말씀을 못 주었으니까 대신 복으로 갚으려 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교회가 발생하고 자라간다. 교회가 자라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말씀 선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병들고 이지러진 사람이 있으니까 안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대다수에게 말씀을 선포하면 교회가 자라간다.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면 기적이 생긴다. 사람들에게 기쁨이 생기고 그리고 평안이 온다. 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난다. 말씀의 권세 아니고 어떻게 딴 길로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일은 보통 일이 아니어서 기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지식에 관한 일이요, 인격을 다루는 문제요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서 인격에 관한 문제다. 그러니까 말씀을 바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회개하게 하고 평안을 주고 생명을 자라게 한다. 그러니까 말씀이 항상 회개를 동반하고 사죄를 함께 가져다 줄 수 있다.
긴장만 하면 살 수가 없다. 늘 회개만 하면 슬픔만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 기쁨이 있어야 찬송도 하게 된다. 오순절운동은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에서는 마찬가지다. 영국의 유명한 오순절운동의 지도자 Donald Gee는 말하기를 "옛날의 선조들은 부흥회 할 때에 정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눈물을 흘리고 회개했는데 지금은 전부 '행복합니까? 행복합니까? 할렐루야! 아멘!'만 한다"고 했다. 그런데 회개가 어디있는가? 기뻐하고, 기뻐만 한다. 다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도 그렇다. 더 이상 성화의 노력이 필요없는 사람들이어서 기뻐하고 즐거움 밖에 없는 것인가? 여러분들이 말씀으로 귀만 좋게 하지 말고 회개하게 해야 된다. 그냥 놔두면 성도들이 절로 신앙생활하는 것 같지만 여러분들마저도 가만 있으면 절로 신앙생활 잘 되던가? 그냥 내 옛생활과 습관으로 되돌아가서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 되지 않던가? 그러니 교인들을 가만히 놔두면 절로 잘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그냥 적당히 해 놓으면 일이 안되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자라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인격자들을, 백성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다. 무엇으로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말씀을 표준으로 해서 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 말씀을 선포하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진행되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이제는 교회부흥에 너무 힘쓰고 부흥회하고 박수치고 그렇게 하는 때가 이미 지났다. 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교회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지금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다. 전쟁 안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죄악의 도가 심각한 때다.
말씀 선포가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오신다. 그러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심령의 평안이 있고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아무렇게나 할 수 있겠는가? 정치하고 돌아다니고 욕하고 다니면서 설교하면 어찌 되겠는가? 지금은 말씀을 잘 전해서 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서 교회를 바로 만들어 내야 할 때다. 교회가 잘 안되면 여러분들의 설교에 문제점이 있다. 그러니 다시 전도하여 새사람으로 낳아야 한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교회가 발생하고 자라간다. 여기서 선포해야 할 말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그리고 설교할 때는 죄에 대한 책망과 위로가 함께 와야 한다. 즉 회개와 사죄가 함께 와야 한다. 설교를 들으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그렇게 할 때만 기쁨과 평안이 있게 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때에 원문에서 해석하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말 선지자들이, 사도들이 받은 말씀이, 내 입을 통해서 재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은혜가 된다. 희한한 소리 안해도 본문에서 하면 은혜가 넘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경말씀 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생명의 원천이 거기에 계시니까 그렇게 하면은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다.
여러분들이 정말 말씀에 사로 잡혀서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면서 말씀을 전하면은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벌써 말씀을 타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설교 잘 하는 일이 생명을 결정하는 일 아니가? 지금은 교인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세뿐이고 내세가 없어서 조금 있으면 내세를 못 믿을 때가 올 것이다. 여러분들이 정말 말씀을 연구하고 바로 알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서 말씀에 사로잡혀서 살면서 기도하고 부지런히 가르치고 잘 가르쳐야 한다. 정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자리를 내놔야 한다.
한편 우리는 말씀을 말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파되는 그 말씀에 중점을 두지만 그러나 이 말씀은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다. 즉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또는 대화와 문학을 수단으로 하여 소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설교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하나님 말씀이 전파되야 한다. 우리가 내 교회를 크게 해 가지고 나만 열심히 영웅시하는 것도 좋지만 그리스도의 일을, 하나님의 나라를 같이 합동해서 이루어 다 흥왕하도록 해야 한다.
제 2 절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성령의 역사 방식에 대한 문제인데 성령이 말씀 없이도 역사한다는 주장과 말씀 없이는 역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그러면 성령이 지금 역사하시는데 말씀없이 성령이 역사한다고 강조하는 두 그룹이 재세례파하고 로마교회인데 로마교회도 말씀과 상관없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칼빈은 재세례파와 로마교회를 같은 선에 놨었다.
그러니 ______주교가 제네바교회에 편지해 가지고 제네바를 로마교회로 돌리려고 했다. 그 이유는 칼빈이 와가지고 얼마나 제네바를 시끄럽게 했냐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이 유명한 답을 했는데 "내가 제네바에 가서 말씀의 역사를 일으키므로 시끄러워서 그런다면 그리스도의 일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이 정죄를 받았다. 평화의 이름으로 기독교가 저주를 받아서 이 지상에서 소실될 뻔하였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위해 얼마나 분쟁과 분요가 많이 일어났는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조용하지 안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불법을 덮는 것이 은혜로 통한다. 부활의 생명은 불의를 보고 덮는 생명이 아니라 자라가야 한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 부활이 좋느냐? 앞으로 부활할 것이니까? 그리고 그때 부활했다는 그것만 생각하는데, 그렇지만 부활의 생명이 지금 역사해서 불의와 죄악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부활의 종교가 가는 곳마다 소망이 있고 살아남는 것이다.
그래 재세례파도 성령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른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내적 조명하신다. 그리고 로마교회도 우리가 모교회인데, 어머니 교회가 평화가 있고 성령이 역사하시는데, 로마교회에서 살 때에 얼마나 평안하고 좋았느냐? 그런데 칼빈이 와 가지고 얼마나 제네바를 요란하게 했느냐?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칼빈이 가고 50년이 지났는데 거기는 아직도 권징이 진행되고 있었고, 칼빈이 죽은 후 100년이 지났는데 거기는 아직도 권징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빈이 세운 교회는 지금도 철저히 법이 지켜지고, 칼빈은 가고 거의 40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제네바 대학은 칼빈이 가르친 대로 절도,규범,스케쥴이 잘 진행된다.
한국이 성령의 천국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은혜란 말로 불법을 전부 다 덮으면 은혜를 욕되게 하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교회요, 성령의 이름으로 돈버는 교회, 저주받을 교회지 종교개혁 교회가 아니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니까 넉넉하게 못살았다. 밀가루 두 말하고 돈 조금 교회에서 나오는 것으로는 생활이 안되었다. 그러니까 주석을 썼다. 추기경이 와가지고 금으로 된 권총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을 받아 자기 것으로 하지않고 교회 연보궤에 넣었다. 칼빈이 죽을 때 로마교황이 말하기를 정말 "저 이단자 같은 종이 있었으면... " 했다. 그런데 우리 개혁교회가, 장로교회가 그 전통을 받은 교회들이 어디있는가? 다 욕망만 전부로 한다. 그러니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우리 개혁교회의 방식은 절제하는 것이다. 돈 많이 벌어도 풍덩풍덩 쓰는 것 아니다. 그것은 내 돈이 아니라 위탁된 것이니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그리고 공것을 바라면 안된다. 이것이 부정의 시초다. 수고한 댓가만 받아야 한다. 수고한 댓가만 받고 수고한 댓가를 정당히 받도록 해야 한다. 돈은 수고한 댓가이다. 왜 남을 도울 때 불평이 있고 그렇게 짜증이 나고 하는가? 내가 번 돈을, 수고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니까 불평이 난다. 욕망을 절제, 먹는 것도 절제, 잠자는 것도 절제, 부부생활도 절제, 옷입는 것도 절제, 마시는 것도 절제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교육 시키는데 적게 먹고 절약하여 저금하라.
어떤 교회에 들어갈 때에 갈 때는 내발로 들어갔을지라도 나올 때는 내 발로 나와서는 안된다. 반드시 청빙받아 나와야지 내 발로 걸어나와서는 안된다. 여러분도 꼭 이렇게 하시기 바란다. 다른 사람이 먼저 가버리면 앞차로 보내고 그 다음에 내 차례가 온다. 잘만 가르치면 절로 소문나면 여러분을 가마 가지고 모시러 온다. 그러면 가마 타고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쫓아다니면서 목사님, 장로님에게 정치하고 돌아다니면 교인들이 다 알아버린다. 다 영적인 존재들이어서 속까지 알고 있다.
성령의 역사를 재세례파와 로마교회는 말씀을 배제하고 역사한다고 한다. 그들은 전통을 중시하니까, 이들에 의하면 교리, 교의, 신앙의 표준을 교회가 정했으니까 교회 전통이나 성경이나 다 똑같은 권위로 받는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고 교회하고 밀착되어 있으니까 말씀이 없어도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은혜를 배분하는 은혜기관이니까 성례전을 통해서 은혜가, 구원이, 다 배분되어 온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교회에 필수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말씀없이도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했다. 재세례파에 의하면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시니 외적인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없이 성령이 직접적으로 역사한다는 주장에 대해 종교개혁이 "말씀을 통하여" (per Verbum) 로 맞섰다. 즉 말씀없이는 성령의 역사도 없고,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이 역사한다고 맞섰다. 루터교회가 이렇게 주장했는데 말씀만 선포하면 다인가? 물론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성령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또 목회 현실을 참작하여 성령이 말씀의 저자이므로 주권적으로 역사한다고 주장하므로 칼빈과 그의 제자들은 "말씀과 함께" (cum Verbo) 역사하신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루터가 옳으냐 칼빈이 옳으냐 할 때 문제점은 다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성령의 주권을 생각하면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성령이 역사하여 다 구원에 이르고 신앙이 자라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다.
구라파에 가도 독일교회들이 보여주는 것을 보면 루터의 나라가 이렇게 될 수가 있느냐? 정말 참담하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가득 가득 모인다. 멧세지를 들어보면 다른 것을 느낀다. 아하! 저러니깐 많이 모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성으로는 도저히 못 받아들일 동정녀 탄생을 말하는데 젊은이들이 온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그 높은 학위의 박사들, 교수들이 그런속에서도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 참 놀라운 일이다. 복음을 선포하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지성으로는 안되는데 믿고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 통상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러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성령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종속적으로 역사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설교를 끝까지 들어도 예수 안믿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말씀을 말씀되게 하신 이가 성령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설교가 되도록 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통상의 경우 성령께서 말씀없이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루터의 말처럼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면 불신자도 없어야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선포해도 안믿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말씀이 읽혀질 때마다 성령이 종속적으로 필연적으로 일하시도록 되면 성령의 주권성이 무시된다.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에 말씀과 함께 일하셔도 종속적으로 필연적으로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목회자의 현실을 참작해서 성령의 역사와 말씀과의 관계를 말씀과 함께로 바꾸었다. 그래도 문제점은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cum Verbo 나 혹은 per Verbum , 둘 다 문제점은 조금씩 있다. 우리의 원칙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그런데 말씀없이 역사하는 경우가 있느냐? 가령 갓난아이가 죽었을 경우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외의 경우 즉 성년의 경우엔 성령께서 말씀없이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가령 시골 부인이 자연을 보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다고 각오해서 교회에 나왔다고 했을 때 이렇게 인도된 데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그 정도의 깨달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구원에 이르려면 교회에 와서 구원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고넬료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구제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어도 그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설교 즉 복음선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말씀의 선포가 중요한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말씀을 떠나서 역사하는 경우가 없다. 그러는 경우엔 per Verbum "말씀을 통해서"라고 해야 맞다. 성령께서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종속적으로 역사한다는 것과 그 말씀이 선포되어도 선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 둘 다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성령은 주권적인 하나님이시니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은 역사하신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선포가 진행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것이 성령의 사명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것때문에 오셨다.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성령께서 와서 일하신다.
그런데 말씀과 함께 (cum Verbo) 라는 것 때문에 말씀 없이도 성령이 역사한다고 생각하다 보면 자칫 오류에 빠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할 때 반드시 그리스도의 설교가 되게 해야 하고, 하나님의 전경륜에 대한 이해가 있고 나서 설교해야 한다.
제 3 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의 두 부분
여기서 항상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옛언약과 새언약과의 대립 관계의 바울의 이해에 개혁신학이 충실하지 못했다. 언약의 동일성 강조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 예리하게 대립시키는 옛언약과 새언약의 대립 관계를 잘 이해 못한 것이다.
율법자체를 아무리 전파해도 회개하지 않는다. 구약시대에도 복음으로 회개했다. 복음으로 죄를 깨닫지 율법으로 죄를 깨닫지 않는다. 구약의 역사가 전부 다 실패의 역사인데 그건 영이 오시기 전에 인간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산 교훈이다. 구약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요 실패의 반복이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이 그렇게 철두철미했어도 구약백성을 멸망시키는 데서 구제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개혁했어도 그 개혁은 영이 오시기 전이니까 겉으로 되는 외적인 개혁이였다.
신약교회도 마찬가지다. 율법만 자꾸 선포하면 사람들이 굳어지고 더 반항적이 되고 죄지을 궁리만 만들어 낸다. 복음을 선포해야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 그러니까 율법이 복음의 보조물이다. 요시아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종교개혁을 했어도 유대나라가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개혁은 내적인 개혁은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우상을 훼파하고 유월절을 잘 지켰어도 그것은 외적인 개혁이였으므로 영이 와서 사람들을 새롭게 못했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준비케 했다. 그러니 루터의 말대로 예수 믿을 사람에게 율법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루터는 먼저 율법을 선포하여 저주와 정죄가 있게 하고 그 다음 복음을 선포한다. 이렇게 종교개혁에 와서도 율법이 구원의 길로 역사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모든 율법의, 구약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다. 구원을 위한 준비가 끝남으로 율법의 모든 기능은 끝났다. 구원의 길로 더 이상 역사할 길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 실패하고 넘어지면 망해 없어져 버려야 할텐데 왜 안 없어지느냐? 구원의 길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백성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내시기로 하셨으므로 죄지었다고 찍어 없애버릴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때문에 그 백성을 지키고 계신다.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때문에 그 백성을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의 신실성!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들이 존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복음은 선포하지 않고 율법만 강조하면 사람이 꾀만 생긴다. 그리고 사람이 완악해진다. 선지자의 선포가 가르쳐졌는데도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완악해졌다. 영이 오시기 전에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한국교회도 구약하고 신약하고 그 언약의 동일성 때문에 같은줄 안다. 그러나 하늘과 땅 차이다. 비교할 수 없다. 소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하고 우리가 받은 축복하고도 비교할 수 없다.
율법 자체가 은혜의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고 율법으로 믿음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믿음의 길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인데 율법은 믿음의 길에 이르도록 그 길을 재촉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다. 율법으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율법시대조차도 은혜로 구원이지 율법으로 구원이 아니었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범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위에서 폐위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처사였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32:1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라고 했는데, 바울은 롬 4:6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함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할 때 은혜와 복음의 사도 바울은 다윗을 예표적으로 인용했다. 밧세바 사건에서 가정이 파탄되고 아버지로서의 권위와 왕으로서의 권위가 다 망가졌다. 그래도, 큰 재앙이 있었지만, 죽이지도 않고 퇴위시키지도 않으셨다. 이렇게 하심은 일이 은혜로 이루어짐을 보이시는 것이다. 다윗이 구워사적인 위치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되어 전개되고 있지만 다윗이 가장 두드러지게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왕되심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복음과 함께 할때 죄를 깨닫게 하고 영생과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 율법 준수도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실패의 역사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실패하는 역사뿐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즉 율법으로는 실패뿐임을 밝히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망한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 백성들을 보존하셨는가? 구원의 길을 내시려니까 보존하신 것이다.
언약관계에서 보면 율법은 언약의 거룩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울타리로 주신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주어졌으니 언약은 자동적으로 지켜지는가?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언약이 지켜지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역사가 바로 구약이다. 그 언약에 하나님 자신을 묶으심 때문에 언약이 지켜지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은혜가 동반되지 않으니까 자꾸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신실성 때문에 구약의 백성은 없어지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길되신 구세주를 지시한다. 그래서 몽학선생이라 한다. 이 율법은 이방 백성에게는 주시지 않고 이스라엘 택한 백성에게만 주셨는데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는데,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의 일이기 때문이다. 은혜 언약 내에서 율법이 은혜의 수단이 되는데 그것은 새백성의 생활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인데,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여러분들도 새사람이 되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선포로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면서 주를 향한 감사도 크지만 여러분에 대한 감사도 골수에 사무칠 것이다.
제 2 장 은혜의 수단인 성례
제 1 절 성례의 정의
성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한 제도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전달되는 감각적 표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적 표호로서 물과 떡과 포도주를 감각적인 촉감으로 느낀다는 점이다. 그래서 흔히 침례교회는 완전히 물속에 잠긴다. 이렇듯이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각적 물질로 신자들에게 날인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한편 성례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의 회복이므로 신자들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로 신앙과 순종을 표현한다. 그것은 언약관계가 회복된 백성은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특히 피로 연결된 쌍방 관계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는 신앙하며 순종한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결단이 따르기 마련이다. 만일에 성례를 참석하고도 주를 위해 살기로 하는 작정이 없다면 성례식을 말씀없이 집행했든지 아니면 받는 자가 믿음으로 받지 않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도리어 주의 몸을 더럽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죄와 싸우고 거룩하게 살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떡 한조각, 즙 한잔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니 정신차려서 말씀을 좇아 행해야 한다.
제 2 절 말씀과 성례와의 관계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므로 세례와 성찬이 은혜의 방편이다. 그러나 그 은혜의 방편이 로마교회처럼 마력적으로 기계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말씀과 함께 성례가 집행될 때에 말씀으로 선포된 동일한 은혜가 성령의 역사로 성도들에게 임하여 온다. 그러니까 설립자의 설립의 의도대로 설립의 말씀을 따라서 성례를, 떡만 나누고 잔만 나누지 말고, 분명히 설명하고 바로 말해주어야 한다. 지금은 성찬식을 해도 은혜가 없고, 주님의 살이다, 주님의 피다 해도 감동, 감격이 없다. 이는 성례가 바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례는 그 자체로는 부족하니까 말씀과 병행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귀로 확인되야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귀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성경의 종교는 들음의 종교다. 말씀의 종교니까 보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 들음이 최고이다. 성례는 말씀과 함께 바로 시행될 때에 은혜의 역사로서 믿음이 강화된다.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고 강화하고 자라게 한다. 성례는 이미 자란 이미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할 수 있지만 성례는 언약 백성에게만 제한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은혜의 수단으로서 완성적인 것이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완성적일 수도 없다. 그리고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고 강화시키지만 성례는 그것을 강화할 뿐이다. 또 말씀은 온 세계에 전파되나 성례는 언약 백성에게만 시행된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말씀만 중요시하고 성례는 너무 약화시키는데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성례도 좋은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교회는 성례가 필수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왜냐하면 성례에 주입은혜 (Gratia infusa)가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성례를 베풀면(미사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마력적으로 죄가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은혜를 성례에 연관시켰는가? 몬타누스의 과격한 성령운동의 역사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로마교회는 은혜를 교회에다가 그리고 성례에다가 부착시켰던 것이다. 즉 은혜가 교회의 고유한 분깃으로서 교회가 그것을 배분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에서는 교회가 성육신의 계속이다. 그러나 최근의 헬베트 뮐렌이라는 카톨릭 교의학자는 교회가 성유신의 계속이 아니라 성령충만이고 성령 체험이라고 했다. 우리 개신교같으면 당장 이단으로 정죄해서 목을 떼어버렸겠지만 그대로 둔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에다 부착시켰다. 그리고 과격파(재세례파) 때문에 말씀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교회는 성례를, 개혁교회는 말씀을 구원의 도구로 삼고 있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의 보충이요 연장이다. 그러니 말씀이 동반되지 않는 성례는 죽은 성례이다. 성례는 처음부터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으로 이미 와있는 은혜를 강화할 뿐이다. 그러니 말씀의 은혜와 성례의 은혜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를 가져온다.
또 주의할 것은 세례와 성찬을 분리해서 최소한 한 주 전에 먼저 세례를 주어서 성찬에 대비해서 준비케 해야 한다. 화란의 어떤 교회는 예배 마치고 성례 참석할 사람만 남아서 집행하는데 그것도 바르지 못하다. 온 교회가 주의 죽으심을 기리며 주의 임재와 연합을 기리고 강화하는 일이므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온교회가 모이는 예배때 해야만 한다.
흔히 동참하지 않은 사람 생각하고 또 예배 후 할려니 목사가 피곤하고 교인이 지루할까봐 그 진정한 의의도 말해주지 않는데 이래서는 안되겠다. 그런 일이 없으려면 세례식 따로 성례식 따로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은 성례를 행하여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범죄하게 하고 주의 법을 무너뜨리는 큰 죄를 범한다. 많은 경우 한번 정해서 하면 정통이고 그것 고치면 이단 시비하는데 이런 것은 말씀의 바른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방법은 고칠 수 있다. 그리고 유아세례도 6개월 혹은 4개월에 하는데 옛날 할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본래 할례는 8일째 했고 또 세례가 그 정신을 좇기 때문이다.
화란의 경우는 산모는 병원에 누워있고 어린아이만 데려다가 유아세례니까 의식 없는 것을 전제하고 세례를 주었는데 통상 산모가 기동할 수 있는 한달 정도 기간에 세례를 준다. 유아세례는 꼭 성찬식에만 끼어서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인세례도 성찬과 분리해서 1주나 2주 전에 시행함이 좋을 것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바쁜 것 핑계 삼고 화려한 T.V.에 정신 팔려 성례식을 미리 생각하고 경건하게 준비하지 않는데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러니 사전에 미리 잘 가르쳐 준비케 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은 주일 하루만 주의 것이요 나머지는 내것으로 아는데, 우리의 모든 것이 예배하기 위해서 있고, 우리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여기서 신학교에서 잘 배워서 자신이 변화되어 성례식도 미리 잘 가르쳐서 은혜되게 시행해야 한다. 그래서 성례만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전체를 다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성례를 아무리 성대하게 형식을 갖추어 해도 우리의 삶이 정말로 헌신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가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구속하셨으니 전생활 영역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전체가 헌신된 삶이어야만 한다.
칼빈은 성만찬을 베풀때 잘못을 범한 직원들이 참석하려고 하면 주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기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며 반대했다. 두 가지 옷입어 교회에서는 거룩 거룩 하며 주님 모시고 앞만 보다가 예배당 문 밖 나가면서 혼자 가서 사회에서는 옆으로 돌리지 말고, 자기 발로 서서 주를 위해 목을 내놓을 각오로 헌신하고 전폭적인 순종의 삶으로 성례의 의미를 생활로 열매 맺어야 한다.
제 3 절 성례의 구성 부분
1. 성례의 외적 요소
세례는 물을, 성찬에는 떡과 포도즙을 사용한다.
2. 성례가 상징하는 내면적 영적 은혜
성례 예물들은 외적으로는 그것 자체만을 지시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넘어서서 실체를 지시한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한다. 성례전이라고 할 때 그 지시 사물과 일치되며 또 그 자신을 넘어서서 실체를 지시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례전적이다. 즙은 곧 믿음으로 받으면 주의 살이고 믿음으로 받으면 주의 피이다. 떡과 주의 몸을 일치시키고 포도주와 피를 일치시킨다. 그렇지만 그 떡 자체를 몸, 즙 자체를 바로 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과 일치 형성을 넘어서서 본래의 실체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 몸을 지시한다. 그래서 성례전적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성례에서 제일 강화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묶어진다. 그의 살과 피로 신령한 한 몸을 이룬다. 이 신령함 때문에 가상적인 게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 몸이 되어 그의 살을 이루고 그의 피를 이룬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한몸이다. 어렸을 적부터 이상한 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친척만 찾는 것이다. 예수의 피가 자기의 혈육보다 더 강한 건데 어째서 핏줄만 찾는가? 가짜로 믿으니까 그럴 것이다. 종말에 가면 그런 가족관계에 유대되어 있는 그런 관계는 일단 다 해소되고 다 동일하게 친밀해진다. 부모였다고 가깝고 아내였다고 가까운 것이 아니다. 처음 진정으로 만나면 형제간 이상으로 친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양사람이라고 해서 덜 친하는 그런 것은 없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육의 피보다 더 강한 것이다.
새백성이 되기로 했으니까, 거룩한 백성이 되게 했으니까 한 몸을 이룬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교회가 한 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이 되고 실제로 피가 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잘 이해하면 신앙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바르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설명할 수 있으면 신학을 잘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 정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동일한 생명으로 우리가 산다. 몸만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피로 한 생명으로 산다. 그러니 우리도 그의 영으로 산다. 그러니까 내촌감산이 미국 갔다 오면서 유명한 말을 했는데 "성령이 피보다 진하다" 그리스도의 피가 육의 피보다 더 진하고 강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형제 자매로 살 수 있다고 했다. 내 친척만 찾고 내 친척만 위해주고 그런 족친관계 그게 좋은 게 아니다. 빨리 없어져야 한다. 교회에서 자기 친척 아니면 안되고 친척을 가지고 교회 세워가지고 주종을 이루면 교회가 안된다. 친척이면 항상 교회보다 우선하니까 교회가 잘 안된다. 친척을 높은 자리에 앉히지 말아야 한다. 돈 있는 친척에 의지하는 것 결코 좋은 게 아니다. 목사가 세상에 의지하는 데가 있으면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는다. 할 수 있는대로 다 해보고 병 걸렸을 때도 다 안되면 그때 하나님을 찾는데 그래서 절망중에 가니까 기도해도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한 살과 한 피를 이루고 함께 자란다. 그러니까 성찬에 참여할려면 항상 성화생활이 필수적이다. 차라리 죄를 회개하는 것 하지 못하면 맘에 걸리니까 성찬에 참석 안하는 게 좋다. 목사도 그럴 때는 연기하는 것이 좋다. 목사가 먼 장거리 여행 갔다가 와가지고 성례하는 것도 좋지 않다. 성화가 필수적이다. 주의 거룩한 몸에 참예하는 것이기 때문에 범죄자는 제외해야 한다. 교회가 바로 권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권징을 해야 한다. 결국 일 중심으로 따지면 성찬의 거룩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성례에 참석하는 자격은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 사도신경을 해야 좋다. 앞으로 조금만 더 발전하면 사도신경과 대등소이하니까 콘스탄틴노플 신경이나 그런 것을 읽어 주는 것이 좋다. 신앙고백 없이 성찬 행하면 안된다. 교회가 거룩할려면 성찬상의 거룩을 지켜야 한다.
화란교회는 두달에 한번 한다. 여름방학에 쉬고 두달에 한 번한다. 자주하니까 굳어져서 별의미가 없으니 한국에는 1년에 4번, 3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교회가 거룩하게 하는 것은 목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설교하기에 달렸다. 교인들 한테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에게 달렸다. 목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교인들도 다 따라간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귀로 듣고 거룩 거룩 하는 게 아니다. 물질적인 생활에까지 구체적인 바른 질서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3. 표호와 의미를 표시하는 사물과의 연합
이 말의 뜻은 은혜와 성례와의 동반관계를 말한다. 성례에 있어서 은혜가 어떻게 오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1) 로마교회의 화체설
화체설에 의하면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떡과 포도주가 피와 살이 되므로 성례를 행할 때마다 은혜가 필연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가 육체로 변화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실체는 변화되었는데 왜 속성은 그대로인가? 그러니 맞지 않은 얘기다. 그러니까 성찬의 외적 요소가 주의 몸과 피로 변한다니까 호소력이 있는 것 같으나 이것은 성육신의 반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변화되고 남은 것을 숭배하니 우상숭배라고 배척했다.
2) 루터교회의 공재설
그 물질 혹은 그 요소에 항상 은혜가 함께 온다는 것이다. 화체설처럼 그 물질적 요소가 변화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해서 그 떡과 함께 떡안에, 떡 주위에 그리스도의 몸이 와있다고 한다. 우리는 공재설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피조물이어서 편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개혁교회에서는 기념과 영적 임재를 말한다
그러나 쯔빙글리 계통에서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한다는 기념설만 말했다. 그러나 기념 정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으면 영으로 그 은혜가 함께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기로 한 모든 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개별자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유기체로 산다. 그러니 우리가 이 일을 행할 때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 함으로 참으로 큰 은혜를 받는다.
제 4 절 성례의 필요성
성례가 구원의 방편으로서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로마교회에서 말하는데 반하여 우리는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례를 행해야 한다. 너무 외적인 것을 무시하면 과격파, 재세례파가 되는 것이다. 신령한 것만 추구하면 외적인 것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데 우리 개신교에 상당히 많은 재세례파적인 면이 있다. 재세례파적인 것이 다 실현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교회가 말한 것들이 지금 실현된 것이다. 칼빈주의가 가는 곳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는데 돈에 탐욕이 들어서 자본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로 봉사함이어서 그것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 하나님의 것이 내게 위탁되니까 내가 함부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합한 경우가 아니면 못쓴다. 사치는 죄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집을 지을 때 못 하나 박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박는다. 지금도 그 집이 건재하고 있다. 우리처럼 날림을 지어 떼죽음을 죽게 하지 않는다. 크리스챤들이 다 그런 문화의식 소명의식이 있다. 예수 믿어서 목사되는 것만 소명이 아니다. 소명은 우리의 생의 직업에로의 소명이다. 거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책임은 목사가 되나 일반 직장이 되나 똑같다. 얼마나 하나님께 성실하게 행하였느냐가 중요하다. 목사가 상을 더 받고 칭찬 더 받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모든 직종에로 하나님이 다 자녀들을 부르셨다. 그것이 소명이다. 모든 직종에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으니까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에서 그런 면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안 가르치고 돈만 많이 내는 것을 좋아해서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치도 않고 돈만 많이 내면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안나오면 왜 안나오셨읍니까 그러는데 그것은 교회가 다 돈을 위해서 굿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돈을 위해서 찬송하고 돈을 위해서 기도하고 돈을 위해서 심방하고, 돈! 돈! 돈! 돈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남의 호주머니를 긁어내면 그것은 도적이다. 내가 수고하지 아니하고 사기해서 끌어내는 것은 도적이다. 가서 바로 가르쳐서 바로 길러야 한다. 숙명론이 되어서는 안된다. 자연 과학은 사람이 발달시키는 것이 아니다. 제도도 사람이 만들고 운영하는데 바른 진리의 가르침을 받은 바른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면 사회가 달라지고 제도가 바꿔진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썩은 사람들만 갔다 놓으면 다 썩어버린다. 자유당때 헌법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헌법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면 갈수록 독재만 더하지 않았는가? 여러분들이 바로 하면 소망이 있다. 정치를 잘하고 경제를 먼저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로 고쳐 만들어 내야 한다.
성례의 필요성을 로마교회는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개신교회는 덜 강조하는데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다. 배척하면 재세례교파가 되고 퀘이커 교도가 된다. 그리고 무교회주의가 된다. 성경도 필요없고 다 필요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주님이 세우신 것이고 그것이 은혜의 방편으로 언약의 길로 세우셨으니까 성례를 해야 한다.
어린아이를 두살,세살,네살 될 때까지도 세례를 주는데 그렇게 하면 안된다. 차라리 스스로 신앙고백 할 수 있을 떄 세례를 주는 것이 낫다. 그러니 날 때 부모에게 권해서 유아 세례를 받게 해야 한다. 1년에 한번 모아서 성대하게 하면 그것이 좋은 게 아니다. 영국 대학제도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캠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철학과 2명을 모집한다. 교수는 어떻게 먹고 사는지 우리대로 하면 걱정이다. 한국은 수가 많은 것을 자랑하지만 일류대학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아들은 출생했다고 하면 출생 축하선물을 가지고 가서 부모님과 세례날을 정해야 한다. 가서 복만 빌어주지 말고, 잘되고 건강하도록 그렇게 해야 되지만 그렇게만 말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 백성으로 키우도록 권고하고 그것을 가르치도록 하고 그것을 강조해야 한다.
제 5 절 구약성례와 신약성례와의 비교
로마교회는 이 두 성례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인정할 수 있다. 즉 구약의 성례들은 단순히 예표적이어서 영적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다만 받는 자의 법적 위치만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성례의 역사는 받는 사람의 믿음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례들은 단순히 비적적 행위 (ex opere operato)에 의하여 받는 자의 마음 속에 영적 은혜를 일으켜준다고 주장한다. 여기 비적적 행위 (ex opere operato) 는 행하기만 하면 은혜가 자동적으로 임한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나 신령한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르는 한은 같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성례는 민족적인 단위로 행해졌고 신약의 단위는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구약의 성례하고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은혜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져서 그의 은혜가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성령이 직접 우리에게 내주 역사하시므로 구약백성이 사는 은혜의 양과 질에 있어서 비교할 수가 없다. 그들이 갖는 구원은 은혜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히브리 저자가 말을 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의 은혜 방편은 말할 수 없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직접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니 우리의 은혜가 말할 수 없이 크다.
한국에는 은혜가 고맙지 않아 감사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문제이다. 그것은 완전히 무당 신앙이다. 나에게 떨어지는 복이 얼마냐 하는 이것만 생각하니까 목사님들이 신령한 참 교회를 만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수를 어떻게 하면 많이 불릴까 애를 쓴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인데 영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교회에 한번 나왔다고 하더라도 계속 나오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구약의 유월절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어린양을 예표하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의 해석에 의하면 유월절에 양을 먹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는 출애굽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다 구원에 이른다. 그 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혜의 풍성도를 따지면 신약에서 받은 풍성한 은혜와 구약백성과 비교할 수 없다.
구약에 물질적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아브라함에 대해 설교를 했는데 아브라함이 얼마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가? 치즈도 많이 먹고 우유도 많이 먹고 버터도 많이 먹고, 318명 군사가 호위하고, 절색미인이 부인이고, 종들도 많아 좋은 점이 있었다. 그러나 육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령으로 역사하는지 모른다. 아브라함에게 재물이 많아진 것은 물론 축복의 표지만은 재물을 많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생명을 지키신다. 그 적성세계에 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에게서 아브라함의 생명을 지킨다.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 아브라함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아브라함을 지키게 하셨다.
구약 백성들은 달과 별들의 빛 아래 사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다 지금의 태양을 예시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밝은 태양 아래 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잘 이해를 못하고 구약 백성들처럼 그렇게 범죄해도 대로를 활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새사람으로 바른 법으로 살아야 한다. 은혜로 구원을 다 얻어 놓았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은혜가 온다. 은혜는 집행자의 자격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고 설립자의 설립 때문에 오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으면 내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목사가 집행해도 은혜가 온다. 그러나 죄진 목사가 집행하면 그것은 안된다.
제 6 절 성례의 수
구약에서 두 개이니까 신약에서도 두 개이다. 구약에는 할례와 유월절이고 신약에는 성례와 성찬이다.
로마교회는 거기다 종유(기름 부음) 안수례, 고해성사례, 견신례 (신앙을 강화하는 예식, 십자가의 정병으로 되기로 서약하는 예식), 결혼례, 임종례 그것까지 성례를 넣는데 이층 이론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전 생애가 다 주를 위한 생이다. 예수 믿어서 목사될 때만 주를 위해 사는 것이고 다른 직종에 가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다 주를 위해 사는 생이다. 그러니까 그외에 또 다른 성례들을 행해야 하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결혼례는 결혼의 신성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예식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성례가 아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질서이지 구원의 질서가 아니다. 그러니 성례가 아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교회가 가는 곳에는 이혼이 제일 많다. 남미 나라는 가정이 다 파괴되어 나라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다. 그런데 결혼을 성례로 넣어 놓고서 그 모양이 아닌가? 제일 무서운 곳이 로마이다. 로마교황청 바티칸시가 있는 곳이 지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다. 제일 안심하고 다닐 수 없는 곳이 그곳이다. 결혼은 참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중요한 기본질서요, 사회가 존속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을 신성하게 여기지만 성례는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 세례와 성찬이 주가 세운 합법적인 성례이다.
제 3 장 기독교 세례
제 1 절 세례의 제도
세례제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부활 후에 제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세례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는 결례가 있었고 세례 요한은 회개의 예로 물로 씻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 후 그의 충만하신 중보적 권위로 세례를 제정하시고, 다음에 오는 모든 세대로 하여금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였다.
그러므로 세례의 의미는 (1) 공적 신앙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로 고백하고 그리고 그를 위해 살기로 헌신하는 서약의 표를 나타내는 예식이다.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를 위해 사는 것이다. 내가 섬기는 주가 바뀌었다.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사적인 고백이 아니라 공적인 고백이다. 공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로 모셔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약의 백성 앞에서 행해야 한다. 사사로이 세례 주는 것이 아니다. 침상에서,병상에서 주는 것이 아니다. 언약백성 앞에서 주는 것이다. (2) 그리고 처음 언약관계가 파괴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관계의 회복이다. 세례 받으면 물로 죄를 씻는다는 정도만이 아니다.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자녀의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다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는 예식이다. 정식 그리스도 교회에 소속하는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례 받은 자를 세례만 주고 끝나지 말고 축하하는 악수하고 잔치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 몸에 가입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는데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니까 잔치를 해야 할 것이다.
제 2 절 세례의 바른 양식
세례의 바른 양식이 무엇이냐 할 때 세례는 약식세례와 침수세례가 있다. 침례교회는 로마서 6장에 기초해서 침수세례를 베푸는데 물속에 들어가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 옛사람이 죽고, 물에서 나오므로 새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침수세례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설을 설치하기가 어렵고 시간이 많이 지체되며 물에 들어갔다 나오므로 세례복이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서 시각상 좋지 않은 점이 있다. 우리는 약식세례를 베푸는데 아무리 약식이더라도 물이 흘러내리도록은 부어야 한다.
침수세례와 약식세례 중에 아마 초대교회는 침수세례를 주로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니까 물에 들어가셨다가 곧 물에서 나오셨다. 그런데 그 세례를 많이 했겠지마는 오순절날 5,000명씩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을 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으로 데리고 가서 세례를 주었을까? 사도들이 많으니까 한사람이 몇 명씩 맡으면 세례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사도들이 강으로 데리고 가서 세례를 베풀었을까? 또 하루종일 세례만 베풀었을까는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이다. 언제부터 약식세례를 베풀었느냐. 이것은 교회사 하신 분이 논할 문제이다. 침수세례를 하면 내가 보기에도 더 좋은 점 있는 것 같다. 내가 세례 받을 때 물 몇방울 떨어뜨리니까 세례받은 것같지 않았다. 그런데 침수세례를 베풀면 요단강에도 가겠지만 대부분 교회들이 뒤에 목욕탕을 설치한다. 이렇게 하는 미국 교회들이 많고 화란의 오순절 교회에 내가 참석해 보니까 강단 앞에다 상당한 물통을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 놓았다.
여자가 세례를 받는데 세례자가 물에 들어간다. 그때 따뜻한 물을 공급한다. 여자는 가서 세례복을 갈아입고 나오고 물이 낮으니까 목사가 한손에 세례 받을 여자를 안고 한손으로 이마에 손을 얹고 물속에 눕혔다가 일으켜 세운다. 내가 보기에 그것부터 좋지 않았다. 앞으로 십계명에 나오지만은 여자는 악수하는 손 이상을 넘어가면 안된다. 벌써 몸이 어깨에나 등에 가서 다면 안된다. 미국의 어떤 목사가 남부에 신학대학교를 세웠는데 남녀학생이 50cm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어쨋든 남녀간에 접근하면 좋지 않다. 마음껏 만질 수 있고 할수 있는 여자는 자기 아내뿐이며 자기 딸도 성년이 되면 손대면 안된다. 이것이 십계명중 중요한 계명이다. 그리고 남의 아내 좋다 하지 말고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서양사람들이 아내사랑을 확실히 더 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물들도 자기 암컷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 정말 아내를 주님의 말씀처럼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의 여자 등에, 어깨에, 이마에 손대는 것 좋지 않았다. 그때는 사람이 천사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세례복이 젖으니까 속이 다 비치고 덮는 것 갔다주지만 윤리적으로 또 미관상 좋지 않고 시간이 너무 걸려서 그리 좋지 않았다.
침례교회는 롬 6장에 죽음으로 세례 받아졌고 장사되었다는 말씀을 근거하여 침수가 죽음을 상징하고 물에서 나옴으로 중생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침수함으로 사람이 죽고 나옴으로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도 세례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식 자체가 옛사람을 죽게하고 새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십자가의 권능으로 옛사람이 죽고 부활 권능으로 살아나는데 그것이 영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로 세례받는 것을 상징할 뿐이다. 흔히 침수와 약식세례를 가지고 정통시비를 하는데 바람직하지 못하다. 만약에 세례자가 침수세례를 원하면 그것도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형식주의는 아니지만 물속에 들아갔다가 나오므로 훨씬 더 실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리고 약식의 경우는 무릎을 꿇게 하고 장로로 하여금 물그릇을 들게 하고 내가 000씨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해야 한다. 이때 각 위격을 부를 때마다 물을 떠서 끼얹으므로 3회를 물이 흘러내리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번 하는 경우 보다는 좋겠다.
세례는 앞에서 말한대로 3가지 의미만은 아니다. 침례교회는 세례 받아도 침례받지 않으면 교회에 가입시켜주지 않는데 형식이 세례를 유효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 집례자의 자격이 세례를 유효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한번 교회에 가입했으면 두번 가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재세례파가 여기에서 틀린 점이 있다. 침례교회도 이점에서 틀렸다. 로마교회서 세례 받았으면 개신교회서 다시 주는 게 아니다. 신앙이 분명하지 않을 때 신앙고백만 하고 세례 서약만으로 족하다. 유아세례자가 입교할 때 서약함으로 끝이듯이 그렇게만 해야 한다. 세례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음으로 성령께서 하신다. 더 구체적으로 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함께 죽고, 부활하심으로 함께 살았다.
또 "000씨에게 ..... 세례를 주노라" 할 때 왜 주노라 하는가? 또 "공포하노라" 한다. 이때 "주노라" 해야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줍니다" 해도 좋겠다. 세례를 줍니다. 공포합니다. 물론 3위의 이름으로 하지만 현실상 존대말을 써도 좋을 것 같다.
제 3 절 세례의 합법적 시행자
세례의 시행자는 복음의 사역자로 합당히 세움받은 목사가 시행해야 한다. 여자나 평신도가 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그것은 로마교회 때문인데 로마교회는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신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영적자질에 세례가 관계없다고 해도 복음의 사역자로 합당히 세움을 받은 목사가 해야 한다. 이때 그 목사가 범죄한 사실이 분명하면 그 사람에게 세례 받아서도 안되고 세례를 집행해서도 안된다. 여자 전도사님들 우리도 다같이 신학공부했는데 왜 우리는 목사가 못되느냐? 섭섭해 하지 말 것은 성경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함이 좋고 또 남자를 주관하여 가르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년주일학교 교사나 엄마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옛날 말씀이라고 무시하면 안될 것이다. 말씀 선포가 중요하여 합당히 세움받은 자가 해야 하듯 성례도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요, 선포의 말씀이 은혜의 강화이니 목사가 해야 하고, 이때 시행자에게 성화가 동반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성화가 동반해야 은혜의 역사가 있듯이 세례와 성찬 베푸는 자에게도 성화가 동반된 목회자가 해야 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으면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웠으니까 또 다시 반복해서 세례 받는 게 아니다. 그러니 개신교에서는 로마교회의 세례를 인정한다.
제 4 절 세례 받을 사람들
1. 장년세례
장년세례가 통상 세례인데 이것은 신앙고백하는 사람이 세례 받으니까 장년세례가 통상 세례이다. 어디서 신앙고백을 하느냐면 교회 앞에서 언약 백성 앞에서 한다. 사사로운 석상에서 세례주는 게 아니고 반드시 언약 백성들 앞에서 준다. 왜냐하면 교회 가입하는 예식이니까 언약 백성의 증인들 앞에서 해야지 병실에서나 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경우에도 세례 받아야 하면 교회에 나와야 된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을 할 때 액면 그대로 받아야 한다. 가짜 같아도 그 양심의 문제이니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마음의 비밀을 파고 들어서 이러한 고백의 진실성을 판결하는 것은 교회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고백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법은 그 사람의 신앙고백을 받을 수 없으면 연기하는 게 좋고 이 사람에게 세례주는 것이 합당한가 하고 물어보는 것이 좋다. 그때 이 사람이 범죄 사실이 있다고 하면 대단히 힘든 일이지만 용기있게 연기해야 한다. 집약해서 타협하면 안된다. 우리는 세상 영광 보려고 한 것이 아니고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려고 왔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사람에 대해서 회중에게 물어서 이의가 없으면 세례를 주어야 한다.
2. 영아세례
성경에는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는 구체적인 명령이 없다. 그래서 침례교회에서는 반대하는데 이들은 성경을 문자대로만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글자대로 쓰여있는 것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안에 함유되어 있는 것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부모와 맺은 언약관계에서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 언약개념은 항상 언약의 당사자에게뿐 아니라 그 언약의 당사자의 자녀에게까지 미친다. 항상 가족을 대표해서 부모와 언약이 맺어진다. 개혁신학이 이 언약교리 때문에 영아세례를 준다. 영아세례는 구약의 할례의 법대로 하면 좋고, 산모의 건강 때문에 한달 정도해서 양 부모가 모두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 건덕상 신앙의 격려를 위하여 부모중 한쪽만 믿어도 유아 세례를 베푼다. 그리고 영아 세례는 부모가 요청하면 수시로 주는 것이 좋다.
아직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세례가 효력을 낼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중생했다고 보면 그 세례가 역사할 것이라고 하여 A.Kuyper 가 중생전제설을 주장했는데, 언약의 자녀이니까 이미 중생한 것으로 전제하고 세례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백성이 다 중생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근거를 세우기는 어려운 문제다.
영아세례는 부모의 신앙에 의해서 세례문답을 하는데 부모의 것과 동일한 고백이다. (1) 이 아이도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아이의 유일한 구주가 되는 것을 믿습니까? (2) 약속대로 이 아이가 언약백성이 되도록 진실히 양육하는 책임을 다하겠읍니까? 라고 양육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때 부모에게 너무 물어도 좋지 않다. 그러나 위에서 물은 대로 부모는 아이가 언약백성으로 자라도록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자녀교육이 가장의 책임이다.
영아세례도 은혜의 수단이 되는데 아이가 중생했다면 세례가 효력이 있게 되어 차츰차츰 영아세례 받을 때 그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시초적인 은혜가 어떤 신비적 방법으로 강화되어 역사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중생하지 않았다면 가정예배 때에 주님을 영접하라고 권고하고 가르쳐야 한다. 당연한 것으로 말하지 말고 권고해야 한다.
제 4 장 성찬
제 1 절 성찬의 제정
성찬은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유월절 양되심으로 다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요, 구원의 시작이요 미래 완전구원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의 완전한 언약은 시내산에서 설립되었어도 이미 언약의 시작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주시고 자기 피에 기초하고 제정하고 설립한 새언약의 예식이 옛언약의 예식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잡는 날 밤에 성찬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유월절 예식과 함께 연결된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큰 구원의 표이며 기념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구원이 생기기 전에 시행하셨다. 마찬가지로 새언약도 십자가가 생기기 전에 세우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시내산에서 맺으셨어도 피흘리는 유월절 출애굽 전날 밤에 이루셨으니까 그때부터서 언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000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미리 내다보고 이스라엘 구원을, 출애굽을 되돌아 보며 성찬을 지켰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찬을 지킨 것이다.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예표로 그때까지 유월절을 지켜 내려왔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며 성찬을 행한다. 그러니까 바울사도가 주님 오실 때 까지 이 죽음을 기념하라는 말이 합당하다.
언약은 피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그 언약으로 생명이 속량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 피로 사람을 속량하신다. 짐승의 피로는 죄가 다 속량되는 것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어린양, 참 사람의 피가 흘려져야 죄가 속해진다. 그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햇다.
이 언약의 기념이 성찬이다. 성찬의 요소는 떡과 포도주인데, 떡은 찢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상징하고 포도주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뜻한다. 떡과 포도주를 먹음은 믿음으로 그의 몸과 피를 먹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주와 연합되어 있음을 더욱 강화한다.
유월절 축제는 식사의 대용이었는데 지금은 식사까지는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했지만 지금 식사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떡이 씹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주의 몸을 먹는다는 실감은 나야 한다.
유월절 때는 어린아이도 다 참여했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왜 어린아이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가? 신앙고백 없이 어떻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지만 언약의 백성은 다 참여해야 한다.
제 2 절 성찬이 의미하고 날인하는 것들
1. 성찬이 의미하는 것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생겼다. 그러므로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고, 성찬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먹음으로 주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그것을 먹음은 찢기신 주의 몸을 먹음이며, 믿음으로 받으면 주의 피를 마심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성찬때에만 그렇게 하는 것 아니고 날마다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 죽음에 동참하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몸에 짊어져야 한다. 이것은 모든 축복에도 동참함이다. 그냥 축복에 동참하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내 구원을 위해서 생겼으니까 구원의 약속들이 다 내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더욱 강화된다. 주님 몸과 피를 먹음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비한 연합이어서 막연한 연합이 아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 성찬이다. 그런데 이 신비적 연합 (unio mystica) 은 실제적인 연합 (unio realis) 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한몸을 이루고 한뼈를 이루어 자라간다. 그러므로 가장 신비한 연합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선택 받은 사람으로 세례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택한 백성은 선행을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니 선행이 자연적인 귀결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붙어 있으니까 윤리적인 면에서, 문화의 영역에서, 학문하는 것, 사업하는 데에서도 선행을 한다.
2. 성찬이 날인하는 것
성찬은 표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호이기도 하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찬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확증해 준다. 더이상 확증할 다른 방법이 없다. 주님이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셨는데 이것을 우리가 먹고 마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받는 것이다.
2)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표로 성찬을 세우게 하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복음의 약속들이 자기 것이 되었음을 성찬은 확증해 준다. 그러니 성찬에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
3) 또 우리가 현재 실제로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증해 준다.
4) 성찬은 참여하는자 편에서는 신앙고백의 휘장이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신앙고백하고 왕으로서의 그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그의 신적 명령에 대하여 순종의 생활을 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제 3 절 성찬과 주의 임재의 문제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인해 이루어진 구속의 은혜가 성찬에 어떻게 임재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상당한 견해 차이를 가져오는 문제이다.
1. 로마교회의 견해 (화체설)
물론 로마교회가 지금 화체설을 말하지만 처음부터 화체설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기념설에 가깝도록 했는데 11C경엔가부터서 로마교회가 화체설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성만찬의 요소 문제도 동서교회를 나누는데 한 역할을 했다. 정교회는 주님께서 유월절에 성만찬을 베푸셨으니까 무교병을 사용하셨음이 틀림없다 하여 무교병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유교병도 사용을 했다. 그것이 전통에 맞지 않다고 해서 교회를 나누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성만찬 문제가 종교개혁 교회간에 열띤 논쟁을 유발한 문제이다. 심지어 루터는 칼빈이 말한 개혁교회의 성만찬론을 듣고 우리하고 다른 영을 가졌다고까지 말했고 이단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 때문에 교회의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칼빈은 어찌하든지 모든 종교개혁 교회들을 하나로 할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그래도 이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너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교회들을 합치지 못했다. 그때 합쳐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합쳐지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W.C.C.가 생기고 초기에 제일 거기에 활약을 많이 한 사람이 개혁교회 출신이다.
그때 문제는 성만찬을 행하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가 몸을 찢으시고 죽으심으로 이룩하신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느냐 하는 은혜의 전달의 문제이다. 그런데 루터교회와 로마교회는 임재를 아주 가깝게, 밀접하게 했는데 개혁교회는 그러지 못한다. 개혁교회도 두 견해이다.
은혜가 확실하게 오게 하기 위해서 로마교회는 화체설을 세웠다.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으로 변화된다. 혹은 속성은 변화가 없어도 그 실체가 변화되므로 주의 살과 피를 직접 먹게 되므로 은혜가 분명하게 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직접 변화되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직접 와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성찬의 요소와 은혜의 임재를 완전히 일치시켰다. 식사발언, 즉 신부가 떡을 들고 이것이 주의 살이요 주의 피라고 선포하면 주의 살과 피로 변한다. 그러니까 신부들은 미사주를 많이 마셔도 평신도에게는 함부로 많이 주지 않는다. 실제로 성만찬의 요소들이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니까 그것은 결국 주의 몸과 피니까 그것을 경홀히 여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숭배했다. 로마교회를 우상숭배라 함은 이 때문이다.
이 교리에 근거해서 로마교회는 교회가 바로 성육신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미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이 우상숭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화체설을 반대할 수 있는 많은 연구는 없다. 결코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을 자연의 이치로서 반대한다. 어떻게 속성의 변화없이 실체의 변화를 말할 수 있느냐? 여기에 로마교회는 그렇게 주장한다. 속성은 변화없어도 그 실체는 주님의 몸으로 변화된다. 자기들도 문제점을 알지만 실체하고 속성하고 구분한다. 문제는 실체되게 하는데 속성이 있어야 실체가 되는 것이다. 성만찬의 재료의 속성들, 떡의 속성, 포도주의 속성이 변하지 않아도 떡은 살로 포도주는 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먹으면 떡이고 포도주이어도 실체에 관한한 주님의 몸이요 피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므로 주의 은혜의 임재를 더없이 확실하게 한다. 그러기때문에 그들에게는 은혜가 비적적으로, 예식을 베풀기만 하면 은혜가 자동적으로 마력적으로 온다. 일을 하기만 함으로써 은혜가 직접온다(ex opere operato). 그러나 은혜의 전달은 성령을 통해서 한다. 교회가 은혜의 예식을 행한다고 성령이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화체설처럼 행하기만 하면 은혜가 자동적으로 온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반대하는 이유이다. 성령의 역사로 은혜가 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사람의 행동에 제약될 수 없다. 속성의 변화없이 어떻게 실체가 변화될 수 있느냐? 가령 숯하고 금강석하고는 구성요소가 다 탄소로 똑같다. 그러나 그 속성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결코 속성의 변화없이 실체의 변화는 없는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 (공재설)
주의 살과 피가 그 요소와 함께 있다. 그러니 은혜를 가져온다. 성만찬을 집행하면 은혜가 분명히 온다. 살과 피가 성만찬의 요소와 함께 있으니, 성만찬의 요소와 함께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주변에, 그 안에 , 그 요소와 함께 있다. 어떻게 있느냐는 답을 못한다. 어떻게 인성이 성찬시, 성만찬의 요소에 함께 와 있을 수 있느냐? 그리스도의 인성이 와 있다면 은혜가 분명히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냥 살이고 피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가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구속을 이룬 은혜가 그 인성이 오므로 동시에 온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인성의 공재나 실체, 화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있을 수 있느냐?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부활시 속성전달로 편재하게 되었다. 그러니 승천을 상태의 변화로 보아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부활전에는 제한적으로 계셨지만 부활하심으로 부요하게 풍성하게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이 계시게 되었다. 속성전달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갖는 편재성이 인성에 전달되니까 인성도 신성과 함께 편재한다. 그러면 성만찬시 그 요소와 함께 그리스도의 인성이, 살과 피가 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화체설은 편재때문이 아니라 신부가 기도하는 그 능력으로 교회의 권세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은혜는 완전히 전유물로 주어졌고 그리고 임으로 배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교회에 위탁되어 있다. 그러니 교회가 은혜를 배분하고 구원을 배분한다. 그러기때문에 구원얻는 데 교회가 필수불가결이다. 교회의 강조이다. 그러니 교회가 성육신의 연속이다.
승천이 장소의 이동이 아니고 상태의 변화이면 실제 승천이 아니다. 이런 인성 편재설은 칼세돈 신경에서 부정되었다. 루터교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것 자체가 비하가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의 속성들이 인성에 전달되는 것, 안쓰고 감어 둔 것이 비하인데 부활함으로 그 제약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신성으로 부터 전달된 모든 속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속성전달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다 변화되어버리니까 인성으로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루터교에서 한 인격내에 어떻게 두 본성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해서 나온 것이 소위 케노시스이론이다. 이것은 몸을 비운다, 비워낸다, 신성을, 영광을 비워낸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는 성육신이 아니다. 남는 건 인성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세돈 신경이 451년 좋은 결정을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떻게 있느냐? 그 이전에 소위 네스토리우스파는 양성이 은혜로 연합되어있고 둘이 같이 있는 것으로 주장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이것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것을 더 발전시켜서 유티코스는 인성과 신성이 결합해서 제3의 본성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반대해서 칼세돈에서 어떻게 있느냐고 방식을 말하지 않고 그것이 아니라고 한계만 지었다. 서로 혼합없이, 상호 변동없이로 유티코스에 반대하고 분열, 분리없이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여, 두 본성이 한 인격내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성이 인성에도 속성이 전달되면 상호 변화없다는 신경에 저촉된다. 후기 교리들을 이 초기 교리들에 의해서 시비를 가릴 수 있다.
상호 변동없이란 말로 루터교의 속성전달을 막는다. 이 인성은 피조물이니까 편재할 수 없다. 편재는 신성,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사탄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으면 저기에는 있지 않다. 피조물은 편재하지 못한다. 사방에 사탄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탄이 한 왕국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대조직을 생각해 보면 된다. 한번 명령을 내리면 저 밑에까지 명령이 하달된다. 군대만큼 지휘계통을 따지는 곳도 없다. 귀신들도 거라사 귀신처럼 다 악한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덜 악한 귀신이 있다. 그래서 정치계, 문화계, 군사계 등에서 역사한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방해할 정도로 큰 왕국이다. 그리스도도 인성에 관한한은 편재할 수 없다.
3. 쯔빙글리파의 견해 (기념설)
개혁파에서 두 견해인데 쯔빙글리가 서서의 한 개혁파에 속한다. 그 파에 의하면 순전한 기념이다. 바울사도가 기념하라고 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회상한다. 기념하므로 은혜를 받는 것이지 성찬예식 자체가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전한 기념설, 이것은 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은혜의 방편이어서 합당하게 시행하므로 은혜가 분명히 임해 온다. 물리적으로 마력적으로 임해 오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임해 오지만 은혜가 분명히 임해 온다. 한낱 기념만이 아니다. 과거사로 되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성만찬을 행하므로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함께 온다. 말씀 선포의 은혜와 동일한 은혜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러므로 기념과 영적 임재설을 겸해야 한다.
쯔빙글리는 성찬의 신비적 요소를 제거했는데 그가 받은 인문주의 교육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Platon같은 사람을 위해서 하늘의 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말했다.
4. 개혁파의 견해 (영적 임재설)
기념과 영적 임재설에 의하면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와있는 것이 아니고 성만찬을 합당하게 말씀대로 시행할 때에 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전해 온다. 그러니 실제로 모든 은혜를 받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선포한 그 은혜가 성만찬을 함으로 실제로 우리에게 온다. 믿음으로 받으면 영적인 은혜가 온다. 인성이 이룬 그 모든 구속의 은혜를 영으로 우리에게 가져온다. 은혜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성만찬에 임재하신다. 몸으로가 아니고 영으로, 영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으로 오신다. 믿음으로 받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다 받는다.
그러면서 은혜의 방편이니까 성만찬을 통하여 신앙이 자란다. 그래서 헌신의 결정을 다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과의 연합을 더욱 강화한다. 성만찬이 제일 강조하는 진리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다 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루터교에서는 칭의만 강조하고 성화는 그리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니 늘 죄짓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해서 제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칭의는 출발이다.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 되지만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자라가야 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 성만찬을 행하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작정을 다시 하게 한다. 떡만 먹고 그냥 그치는 것이 아니다.
떡만 나눠주고, 포도주만 나눠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은 성례가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해야 하다. "내가 떼는 이 떡을 먹음은 우리의 온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 주의 몸에의 동참입니다. 이 떡을 받아 먹으면서 주께서 우리의 온전한 구속을 위하여 그 몸을 찢기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찢기신 살을 직접 먹는다고 할때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는가? 주님의 살을 먹으니까 주님의 몸으로 같이 자라가는 것이다. 성찬은 신앙을 자라게 한다. 그의 구속의 사건을 기념하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란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다.
이렇게 주의 거룩한 몸에의 동참이니까 죄짓는 사람을 동참시키면 안된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할 사람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일주일내내 죄짓다가 동참할 수 없다. 사람이 연약해서 너무 자주하면 면역이 생겨서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자주 해서 은혜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 한국 상황에서는 절기에 한번정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니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선을 행해야 한다. 마음을 열고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말에 가면 이런 혈육으로 연결되는 것은 다 그치고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사람만이 있다. 그런데 왜 친척만 살펴보고 위하는가? 남을 유익되게 하는 생각과 사고를 해야 한다.
귀로 말씀의 선포를 들어도 믿음이 자라고 은혜가 넘치지만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에 더 확실하게 날인하셨다. 주님의 구속의 사건을 우리의 손으로 만지고, 혀에 입으로 씹고, 삼켜서 내장에 주님의 죽으심을 확인하게 하셨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혀로, 내장에, 그 이상 얼마나 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확인할 수 있겠는가?
성찬은 에덴의 생명과 나무처럼 성례전적이다. 성례전이라면 상징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 떡은 주의 몸이요 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받으면 요소와 실체를 일치시킨다. 그렇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지시한다. 실체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큰 영적은혜의 실재가 임한다. 로마교회는 그것이 바로 살과 피이니까 그것을 그냥 일치시켜서 더이상 넘어갈 것이 없다.
제 4 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효과
성찬은 결코 독립적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받은 은혜를 강화한다. 말씀 선포로 받는 은혜하고 성찬으로 받는 은혜하고 동일한 은혜이다. 또 성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를 강화한다.
성만찬의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정결하고 깨끗한 앵글로 색슨족, 미국계의 영향을 받아서 각각의 잔에 따로따로 하는데 바울사도는 한 잔에 의해 마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 잔에 동참해서 다함께 마시므로 한몸에의 동참을 알게 해야 한다. 떡도 한떡에서 떼면서 시행하는 것이 좋다. 한 떡에 동참하고 한 잔에 동참하게 하므로 한 형제로서 교제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으로서 말씀으로 받는 은혜와 동일하지만 말씀이 없으면 성만찬을 행해도 별 의미가 없다.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세례와 성찬을 분리해서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해야 한다. 이 진리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어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니까 선행을 해야 한다. 윤리적인 선행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교회는, 성공회도 비슷하지만, 주입은혜가(Gratia infusa) 동반해서 하기만 하면 은혜가 내려온다. 그 은혜를 받아야 구원에 이른다. 행하기만 하면 마력적으로 기계적으로 온다. 그런게 아니고 설립의 법도대로 믿음으로 행하고 동참하면 주의 은혜가 영으로 임재한다. 영으로 임재하기 때문에 막연한 임재가 아니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임재이다.
제 5 절 주의 성찬과 그 참여자
성찬은 신자들을 위해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받은 사람만 참여한다. 그리고 그 성찬의 영적 의미를 아는 사람만 참여한다. 신앙고백을 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만 참여한다. 그러므로 불신자나 범죄자나 또는 성찬의 의미를 모르는 어린아이를 제외해야 한다. 세례를 받았어도 그 영적인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참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범죄한다. 그러니까 권징은 성찬에서부터 시작한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한다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죄한 자는 성찬에 참여시키면 안된다. 지금이야 수찬정지가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칼빈에게는 성찬 베푸는 것이 매우 감격의 자리였다. 왜냐하면 화체설을 반대하고 영적 임재를 주장하는 그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종교개혁 당시에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그러기에 종교개혁 당시에 그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눈물없이는 집행할 수가 없었다. 화체설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무자비하게 처형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시행하는 성찬이 피를 지불하고 회복한 성찬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만났다. 성찬에서 구원의 완전한 보장을 만나는 것이다.
집행은 합당하게 목사가 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하도록 세움받은 무흠한 목사가 성례를 집행해야 한다. 참석자도 무흠한 세례교인이어야 한다. 강조해야 할 것은 주의 생명으로 연결된 거룩한 몸에의 동참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거나 회개가 안된 상태로 참여하면 꼭 굳어진다.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성찬을 조금 일찍 광고해서 늘 근신하도록 교인에게 말하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목사가 그렇게 살지 아니하고 거룩을 강조하면 다 외식만 된다. 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성찬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늘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칼빈은 시의원들이나 시장들 중에서 참석해서 안될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을 강제로 추방했다. 부당한 자가 성찬에 참여하므로써 주의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고 참여하면 받는 자의 신앙이 병들게 된다. 그러니 시행자는 퍽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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