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의 기원 연구
I.
들어가는 말
A.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구교나 신교를 망라해서 세례와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교회에 주신 성례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초대 교회 이후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례는 정식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관문으로 생각되었다. 성만찬은 고대 교회이래 교회 생활의 핵심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다락방의 예전이라고 불리는 성만찬 예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세례와 성찬이 기독교 고유의 독특한 예전이기는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모르고 지냈던 관습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행하고 있던 여러 가지 풍습들 속에서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시며
예전을 제정하신 것이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기독교에
나타난 가장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종교개혁 이후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 온 교회의 분열 역사를 종결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하는 교회와 신학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예배 예전인데, 교회가 보다 성서적, 역사적 전통에
근거한 예전을 통하여 하나됨의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 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한 예전의 개혁,
개신교 내에서 일어난 예배 복고 운동이 있게 되었다.
이렇듯 예배 예전이 중요한
요소인데 만일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예전의 기원이 잘못 알려지거나 해석되어 온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됨의 구체적 징표와 의미를 갖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기원이 자의이건, 타의이건 곡해되어 왔다면 이 예전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일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 연구는
기독교 성례전 중에서 성찬의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풍습이나 문화와의 연관성을 살펴 성만찬이라고 불리는 최후의 만찬의
기원 양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성만찬의 기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의 의미에 더 가까이 가고자
한다.
B.
연구 방법과 범위
본고는 성만찬의 기원에 관한
성서의 진술들과 역사적 정황들에 대해, 그 기원을 다른 가능성 있는 풍습과 정황들과 비교를 하고 좀더 예수의 말씀과 의도에 적합한 것을 발견하려
한다. 이에 대해서 본고의 구성은 이렇게 되어 있다.
제 I 장에서는 문제의 제기와
연구의 목적, 연구 방법과 범위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제 II 장에서는 유대인의
식사관습 유래를 다루어, 주로 구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식사의 역할과 제사들의 역할, 기념제에 대하여 기술할 것이다.
제 III 장에서는 주후
1세기경의 예수 시대 유대교 제사의 식사 관습을 다룰 것이다. 이 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식사 관습에 나타나는 축복노선과 감사노선, 에세네 이론,
Haburah식사 이론에 대해 기술하려 한다.
제 IV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이 연구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인 유월절에 대한 것을 기술할 것이다. 주로 유월절 식사의 기원과 내용, 순서를 주로 다룰 것이다.
제 V 장에서는 성만찬의 가장
유력한 기원인 키두쉬 만찬에 대하여 기술할 것이다.
제 VI 장에서는 예수의
성만찬 제정을 다루고, 성만찬의 성격, 제정한 날짜, 장소, 절차, 사용하신 빵과 포도주의 설명, 반복령 등을 전승비평적으로 살피려 한다.
그리하여 전승에 따른 우선성에 대한 문제들과 전승의 성향에 관한 이론들, 그리고 전승간의 관계를 마태, 바울, 누가의 순으로 고찰하겠다.
마지막으로 제 VII 장에는
성만찬의 재해석과 거기에 따른 문제점을 서술할 것이다. 여기서 성만찬이 유월절 만찬이라는 증거와 아니라는 증거를 기술하였고, 유월절 · 키두쉬
· 최후의 만찬을 비교하여 유력한 기원을 추정하기로 한다.
II.
유대인의 식사 관습 유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전통을 수렴하여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셨다. ‘유대교 예식’과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반복의 명령을 내리신 성찬을
이해하고 해석했다.1)따라서 먼저 성찬(최후의
만찬)의 외형적 배경인 구약성서와 유대교 생활 전통을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적 배경 안에서 당신의 고유한 성찬을 거행하셨기
때문이다.
A.
구약 성서에 나타난 식사의 역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잘
보여주듯이 이 백성들에게는 항상 ‘먹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민11:4-6, 31-34.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식사를 통해서 허기를
면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끼리의 일치를(시128:3, 113:9, 삿19:4-8, 삼상1:1-8), 모르는 사람과의 친교를(창18장,
민22:40, 삿1:7, 삼상9:22-24), 정치적 유대를(삼상9:22-24), 원수와 화해를(삼하3:20), 사회적 연대와 계약의
관계를(창26:30, 31:44-54, 레2:13, 민18:19, 대하13:5, 스4:14) 가져왔다.
이와 같은 식사의 개념은
인생의 문제를 넘어서 종교적인 의미까지 내포했다. 즉 종교적인 의미의 식사는 그 식사를 마련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 관계를
의미했다.2)육적인 양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 수 있었고(신8:3, 암8:11, 마4:3), 두루마리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깨쳤다(겔3:1-3,
계10:8-11).
요약해서 말하면,
이스라엘인들의 ‘식사’와 ‘잔치’는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가족관계, 사회관계, 종교적 관계 속에서의 ‘평화’, ‘화해’,
‘계약’, ‘말씀’, ‘일치’, ‘친교’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B.
구약성서에 나타난 제사들의 역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제단은
제사를 올리는 장소이자 제물을 나누어 먹는 식탁이었다.3)제사들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레위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첫째, 제물 전체를 제단에
바치거나 완전히 불살라 버리는 ‘번제’가 있었다(레1장). 이 제사는 ‘완벽한 제사’, ‘완벽한 봉헌’으로
통했다(레2:1-5).
둘째, 무교병, 기름, 향
등의 식물성 제물을 바치는 ‘소제’가 있었다(레2:1-5).
셋째,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지고 제사장이 몫을 떼어놓고, 봉헌자의 손님들이 함께 나누는 화목제가 있었다(레3장, 7:11-38, 10:14, 22:21-25,
29:30). 이는 ‘친교의 제사’라고도 불린다. 화목제에는 ‘찬미의 제사’가 덧붙여지기도 했다. 여기에는 누룩 없는 빵과 과자가 별도로
봉헌되었다. 구원에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으로서 예수 시대에 크게 발전하여, 최후의 만찬에서 감사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4)화목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거나 유지시키는 것이었고, 식사자체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창26:30, 31:54, 수9:14). 친교를 이루는 종교적
식사이기는 했으나, 하나님과 한 자리에서 나누는 식사는 아니었다.5)
넷째, 레위기 4-5장에서
다루어지는 ‘속죄제’가 있다. 이 제사의 첫째 특징은 피의 역할(생명 - 창9:4, 레7:27, 신12:23)이다. 피는 생명과 동일시되었으며,
속죄의 성격을 가진다(레17:11). 나머지는 제단 위에서 불살라 바쳤다는 점이다. 특히 이 희생물은 거룩한 제물로 여겨졌다(레6:22). 이
제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마20:28, 막10:45, 눅1:68, 2:38, 24:21, 행7:25,
롬3:25, 4:25, 딛2:14, 히9:12).
다섯째, 속건제가
있었다(레5-7). 여호와의 성물에 범죄 하거나(5:14-16), 금령을 범하거나(5:17-19), 또는 이웃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주었을
때(6:1-7) 속죄제를 드려 속죄 받아야 한다. 이 때 속건 제물로 수양이 요구되었고, 또 가해자는 피해액에 1/5을 덧붙여 배상해야 했다.
실로 구 어떤 죄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속죄되어야 했다. 그리고 참회는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가 따라야 했다. 속건제의 방법으로는 기름
부위를 소각하는 방법(7:1-5)은 속죄제와 동일하다. 속건 제물은 여호와께 불살라진 것 외에 모두 제사장 몫으로 제사장의 다른 자손에게 균등히
분배되었다(7:6-10).
종합적으로 볼 때,
레위기(신명기 역시)는 가나안의 축제와 구별하는 의도에서 ‘번제’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성서전체를 보면, ‘화목제’가 더욱 중요하다. B.C.
3-4세기에 ‘화목제’는 구약의 고대 시대와 같이 중요한 위치를 되찾는다(대하29:31, 30:22, 33:16).
C.
기억제(기념제)
이스라엘의 구원과 범죄는
‘기억하다’와 ‘잊다’의 두 종사로 표현할 수 있다. 우선 ‘기억’은 하나님의 행위이며, 구원을 의미했다(창8:1, 9:15, 19:29,
30:22, 출6:5, 시78:39, 105:8, 42). 또한 ‘기억’은 인간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기억하고, 계약을 통해 구체화되는
그 구원에 참여하게 한다(시78:3-8, 삼하19-20장, 사46:8, 47:7, 57:11, 65:17 참조). 이와 같이 ‘기억’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베푸신 구원사건과 계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되새기게 하는 것으로서, 전례행위 안에서 ‘현재화’되었다. 기억의 현재화 행위는
곧 전래였으며, 전례행위 전체를 ‘기념제’였다.
‘기념제’는 우선 백성이
하나님의 기억을 간청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과거의 구원 행위를 기억하시고 지금 예식을 거행하는 백성을 기억하셔서 다시 구원행위를 해
주십사는 것이다(출28:12, 29, 30:16, 39:7, 레2:2, 9, 16, 5:12, 26, 6:8, 24:7, 민5:15, 18,
17:5, 31:54, 슥6:14, 말3:16). 반면에 ‘기념제’는 백성의 기억을 북돋운다. 백성은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에 베푸신 구원과
계약을 기억하고, 그 구원의 연속적 의미를 파악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행위였다(출12:26, 신4:6,6:6-25). 더 나아가서 이
‘기념제’는 미래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억 그 자체’가 이미 미래의 구원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이다.
III.
예수 시대의 유대교 제사의 식사 관습(AD 1세기)
예수님 시대의 제사와 식탁
관습의 연구는 “최후의 만찬”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작업이다. 주후 1세기경 유대인들의 식사는 제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최후의
만찬” 예식과 흡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6)
요한의 관점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단 최후만찬이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 식사의 성격을 다른 방법으로 규명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 상당히 많은 가설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식사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함께 먹는 제사 후의 식사(고전10:18 참조), 특별한 기회에 함께 먹는 가족들의 식사, 유월절과
오순절에 함께 하는 축제의 식사(토비2:1 참조), 에세네, 쿰란, 바리새파 등 여러 종교 단체들의 식사 등이 있었다.7)그 중에서도 쿰란 공동체의 식사
형태는 두드러진다.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성찬 양식에 가까운 외적 배경과 식사 이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의 식사관습 중 유월절
만찬과 키두쉬의 식사 양식은 따로 제 III 장과 제 IV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A.
유대인들의 식사 관습에 나타나는 “축복(찬미)” 노선과 “감사(제사)” 노선
유대인들의 식사는 전부 전통적
관례에 따라 거행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경우, 안식일 전날 저녁(금요일 밤)과 대축제 전날 밤에 일상적 시간 및 식사와 구별하는 의미에서
“축복의 잔(kiddush)"을 마시는 관례가 있었다. 식사 장소는 회당이었고 순서는 가정의 일상적 식사와 같았다. 인원은 10 -12명이
모여야 했고 회당장만이 축복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사실상 본토 유대인들도 1세기경에는 자주 모여 공동식사를 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운동도 했다.8)
식사의 요소는 “말씀”과
“먹고 마심”이었다. 또한 “정결예식”과 “축복의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특히 “식사 후의 축복”은 식사의 제사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축복 기도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첫째 부분은 순수한 “찬미(berakah)”로 시작되었다. 둘째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
- 즉, 창조로부터 구원(해방)까지 - 에 대한 “감사”이다. 셋째 부분은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는 “청원”으로 끝맺고 있다.9)
그런데 1세기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축복”보다는 “감사”를 강조한다. 이런 노선을 초대 교회가 수용했다고 보이는데, 디다케 9:1-2와 10장 전체의 “감사”의
성찬례에서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히10:5-7 참조). 그러나 축복의 성격이 배제된 것은 아니고 감사의 성격이 강조되고 축복의 성격과 구별될
뿐이었다.
유대인들이 식사에서
“축복(berakoth)”이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헬라어로는 ευλοειν으로 번역된다. 그런데 “감사와 친교(합일)의 식사”로
구성되어 있는 구약의 Todah를 번역하면 ευχαριστια(감사)이다. 유대인들은 “축복”과 “감사”를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뚜렷이 구별되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분명“Todah제사”를 바치고 있었고, “공동식사”를 했던 것이다. 이 식사에서는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의 일부를 나누어 먹으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기대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B.
에세네 이론
K.G.Kuhn은 쿰란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초대교회의 식사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에세네 사람들의 일상의 공동식사 속에서 최후만찬을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먼저 외적인 형태를 보면 쿰란
공동체 예루살렘의 공동체는 매일 모여서 공동식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쿰란 공동체의 관습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쿰란에서는 오전 11시와 늦은 오후에 수도 공동체의 삶을 대변하는 두 차례의 공동식사가 있었던데 반하여, 그리스도교인들은 밤에
일정하지 않은 가정집에서 여인들의 수발로 하루 한차례만 이루어졌다. 더구나 디다케를 보면 그리스도교인들의 식사는 술과 빵의 순서로 이루어졌으나
쿰란에서는 빵과 술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외관으로 보아서는 둘을 비슷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K.G.Kuhn은 최후만찬에 대한 마태와 마가의 보도가 쿰란의 관습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빵과 잔에 대한 축복의 순서는
쿰란의 영향을 받아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늦은 바울과 누가의 전승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다르게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변하기 어렵다.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한 예레미아스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10)
쿰란 공동체의 문헌들은
“감사의 제사(Todah)”나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성찬의 제사(Shelamin)”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행위에 대해 감사와 고백을 뜻하는 “야다(yadah)” 동사를 자주 사용하고 있으며, 모세 오경의 제사적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 쿰란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내던 제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식사는 “제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같다.11)
이러한 쿰란 공동체의 식사
형태는 초대교회의 성찬 예식과 흡사했다. 그러나 내용과 의미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12)다만 여기선 쿰란 공동체의
식사가 가진 “제사의 성격”이 최후의 만찬의 제사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C.
Haburah식사 이론
H. Lietzmann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은, 최후 만찬이 필요할 때마다 동료들과 함께 종교적인 예식으로써 행할 수 있는 Haburah 식사였으며, 예수가 이것을
통해서 종교적인 모임을 만들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당시에 토라와 할례, 결혼, 장례 등의 특별한 의식적인 식사와의 연관 속에서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13)이 이론은 kiddush 이론이
지닌 24시간의 공백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예레미아스는 개별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식사가 다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후 만찬은 결코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보통의 식사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14)사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이러한 종류의 어떤 정형화된 틀을 지닌 식사모임을 만들었다는 어떤 근거도 발견하기 어렵다.
IV.
유월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명절은
유대인의 유월절이고,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다. 이 절기는
유대력으로 니싼월 15일에 시작되며 칠일 동안을 명절로 지킨다.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을 ‘욤 토브(בוט מוי : 좋은 날)’라 부르며 이
날은 일을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중간의 5일간은 ‘홀 하 모에드(דאומה לוח)’라 부르며 이 날엔 일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팔일 간을 명절로 지킨다. 이들은 팔일 중의 처음이 이틀과 마지막의 이틀을 포함한 사일간을 ‘욤 토브(בוט מוי :
좋은 날)로 지킨다. 보통은 부활절과 비슷한 시기에 겹친다.15)
유대인들은 대축일의 잔치와
마찬가지로 유월절 축제에도 공동으로 준비했고 식사 장소 및 비용까지 공동으로 부담했다. 이 유월절 축제는 요시아(BC 639-608) 개혁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여기서는 유월절 식사예식을 중심으로 고찰하기로 한다.
A.
유월절 식사16)
유월절 식사는 보통 가장이
인도한다. 유월절에는 여섯 가지의 특별한 음식들이 준비된다. 정강이 뼈, 삶은 달걀, 쓴 나물, 파슬리, 샐러리, 혹은 양상치, 소금물,
하로셋(תסורח)17)등의 음식이다. 쓴 나물을
먹으며 애굽의 노예 생활의 고역을 기억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애굽에서 진흙으로 벽돌을 굽던 노예 생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쓴 나물을 하로셋에
찍어 먹는다. 정강이뼈와 삶은 달걀은 제 2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이 음식을 먹으며 성전에서 행하던 희생 제사를 기억한다.
소금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흘렸던 눈물을 상징한다. 파슬리나 샐러리, 양상치 등은 봄이 왔다는 의미에서 생명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과 축복을 의미한다.
유월절 음식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짜(무교병)이다. 유월절 식사에서 빠질 수 없는 유월절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마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유월절 첫날 저녁에 먹는 유월절
식탁을 위한 마짜와 유월절이 끝나기까지 일주일간 평소에 먹는 보통 마짜이다. 유월절 첫날 저녁에 쓰기 위하여 만든 마짜를 가리켜 ‘계약의
마짜’라고 한다.
1.
식사의 순서
식사의 순서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촛점을 맞추어 진행된다. 과거의 고난과 슬픔을 기억하며 현재의 축복을 감사하며 미래의 소망을 기원하는 순서이다.
유월절 식사의 전례는 유월절
어린 양을 먹는 순간을 기점으로 해서 전식(Vorspeise)과 주식(Hauptmahl)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a.
전식(Vorspeise)
(1)
첫 잔(Kiddush - Becher)과 식사의 시작
첫번째 컵의 포도주를 따른 후
가장이 쎄데르18)에 적혀있는 축제일에 대한
축복문을 낭송하여 축복(kiddush)함으로써 유월절이 온 것을 축복한다. 이 첫잔을 키두쉬 잔이라 하는데, 일상적 시간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이
잔을 마신다. 축복이 끝나면 각자 부엌이나 화장실로 가서 오른손을 씻는다. 파슬리나 샐러니 혹은 양상치를 소금물에 찍어 먹는다. 야채는 새봄의
새로운 생명을 상징하고 소금물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흘린 눈물을 상징한다. 다음은 마짜(무교병)를 손으로 부러트린다. 세개의 마짜를 포개서 쥔
다음 가운데를 잘라 접시에 내려 놓는다. 첫 번째 컵의 포도주를 마시고 빈 컵에 다시 포도주를 채워 놓는다. 그리고 주식 준비를 하고 막내는 두
번째 잔을 돌린다.
(2)
과거를 기억하며
유월절 식사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은 출애굽 사건을 재현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질문에 대한 아버지(인도자)의 답변의 형식을 따른다. 전통에 따라 두 번째
잔을 돌린 가장 어린 자녀부터 가장에게 “왜 이런 예식을 행합니까?”하고 네 개의 질문을 던진다. 성경이 출애굽기에서 세번, 신명기에서 한 번
모두 네 번 아버지는 반드시 그의 자녀들에게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19)이 질문들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억하도록 고안된 질문이다.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20)
첫째, 왜 이 밤에 우리는
마짜를 먹습니까?
둘째,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
셋째, 왜 우리는 이 밤에
파슬리를 소금물에 두 번 찍어 먹습니까? 또 쓴 나물을 하로셋에 찍어 먹습니까?
넷째, 왜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뒤로 비스듬하게 기대어 먹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며 가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며 경험하였던 일들을 장엄하게 아람어로 들려줌(이것은 Pascha - Haggada라고 한다)으로써 유월절 전례가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급하여 무교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설명한다.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의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하여 쓴 나물을 먹는다고 설명한다. 애굽에서 흘린 눈물을 기억하며 소금물에 파슬리를 찍어 먹는다고 설명한다. 이제는 자유로운 백성으로서
뒤로 기대어 먹어도 될만큼 여유와 기쁨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로 기대어 편히 음식을 먹는다고 설명한다. 이때 인도자를 위한 베개가
준비되며 인도자는 의자 뒤에 베개를 받히고, 편안한 자세로 음식을 먹으며 출애굽에 대한 설명을 재현한다. 인도자가 베개를 베는 이유는 이젠 옛날
같이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으로서 편안히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인도자(가장)가 애굽에
임하였던 열가지 재앙에 관한 이야기를 재현할 때 식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재앙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약간이 포도주를 입에 머금고 있다가 준비된
그릇에 뱉어낸다. 이와 같은 일은 유대의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출애굽은 약 3500년 전의 사건이다. 그러나 이 과거의 사건은
유월절 식사를 통하여 현재의 유대인들에게 늘 새로운 출애굽으로 경험된다. 모든 식구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들에게 베푸신 이적과
기사를 찬양하며 ‘다예누’라는 노래를 합창한다. 이것은 Pascha - Halle의 첫부분(시113 - 114)을 히브리어로 노래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신나는 곡조와 간단한 가사 때문에 특별히 이 노래를 좋아한다. 그 내용은 “그가 우리를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만으로도 얼마나
충족한가!”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노래가 끝나면 두 번째 잔(포도주)을 마신다. 이때 전식에서는 빵을 먹지 않는다.
b.
주식(Hauptmahl)
(1)
현재를 축복하며
가장이 유월절의 음식과 마짜를
위하여 식사 기도(Tisch gebet)와 축복(Segen)을 드림으로써 주식이 시작된다.21)식사 내용으로는 오후에 성전에서
희생된 유월절 어린 양, 누룩없는 빵, 쓴 나물, 과일 잼, 그리고 포도주이다. 먼저 쓴 나물을 먹는다. 이 때 쓴 나물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기억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므로 뒤로 비스듬히 기대어 먹지 않고 똑바로 앉아서 먹어야 한다. 쓴 나물은 달콤하고 고소한 하로셋
양념장에 찍어 먹는다. 이와 같은 관습은 과거엔 쓰디쓴 노예 생활을 살았으나 오늘은 달콤하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을 상징한다. 쓴 시절이 지나
달콤한 시절이 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쓴 나물을 마짜 사이에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 이것은 가장이 빵을 나누어 나물과 함께 돌리면, ‘아멘’하고 받아서 그것을 먹는 것으로 이 샌드위치를 가리켜
‘힐렐22)샌드위치’라고 부른다. 마짜는
발효가 안되었기 때문에 아주 맛이 없는 음식이다. 유대인들은 이와 같이 유월절의 맛있는 메인 디쉬(Main Dish) 전에 맛없고 쓰디쓴 힐렐
샌드위치를 먼저 먹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얼마나 쓰디 쓴 인생을 살았으며 못 먹고 못 살았는가를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힐렐 샌드위치를 먹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특별히 맛있게 준비된 유대인 최고의 요리 유월절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음식을 다 먹은 후
아피코만(ןנמוקיפא)을 후식으로 먹는다.
(2)
아피코만 (ןנמוקיפא)
유월절 식사가 시작될 때 모든
사람은 마짜 세개를 포개어 손으로 쥔 다음 가운데를 부러뜨려 자른다. 이때 부러진 마짜의 큰 쪽을 아피코만(ןנמוקיפא)23)이라고 부른다. 이 아피코만은
메인 디쉬가 끝날 때까지 먹지 않고 보관했다가 후식으로 먹는다.
미쉬나에 보면 유월절 식사
후에는 아피코만을 남기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 밤에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은 반드시 유월절에 제물로 바친 희생양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2성전이 파괴된 후 더 이상 성전에서 양이 제물로 바치는 일은 없어졌다. 자연히 제물로 바친 양을 먹는 일도 없어졌다.
성전 시대에는 제물로 바친 유월절 양을 마지막 음식으로 먹었으나 오늘날은 아피코만이 마지막 음식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전이 파괴된 후 아피코만은
성전에 바쳤던 희생 양을 대신하는 상징으로 쓰이게 되었다. 오늘 날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아피코만을 먹으며 성전에 제물로 바쳤던 희생 양을
기억한다.
아피코만을 먹으면 유월절
식사가 끝난다. 인도자는 음식에 대한 감사 축복 기도(birkath ha mmacon)를 올린다. 모든 사람은 세번째 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이
잔을 축복의 잔(Segen becher)이라고 한다.
(3)
미래를 바라보며
식사가 끝나면 문을 열어
놓는다.24)인도자는 준비된 엘리야의 컵에
포도주를 채운다. 그리고 나면 모든 사람은, “이 일이 필요한지 안 필요한지는 그(엘리야)가 결정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미리 와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고 메시야의 도래를 선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어떤 문제를
논의하다가 해결책이 없으면 흔히 ‘엘리야의 결정에 맡기자’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함께 ‘엘리야후 하나비(선지자 엘리야)’라는 노래를 부른다.
유대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메시야가 이 땅에 들어오기를 기다린 후 유대인들은 감사와 찬양의 시(시115 - 118)를 낭송한 후 유대인 특유의
노래들을 몇 곳 부른다. ‘레샤나 하바아 베루샤라아임(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노래를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 마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자는 그들의 꿈을 이 노래를 통하여 표현해 왔다. 네 번째 잔에 대한 찬양기도를 드린 후
잔을 마신다. 이 잔을 할렐의 잔(Hallel - Becher)이라 한다. 이 잔을 마심으로써 유월절의 모든 식사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이 넷째 잔이 없었다고 한다.25)
V.
키두쉬 만찬
성만찬이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그의 제자들과 함께 베풀었던 유월절 만찬이었다는 전통적 견해에 대하여 최근의 학자들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제도와 풍습을 연구한
학자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성만찬과 같은 형태의 식탁이 이미 유대인 공동체 속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키두쉬라는 것이다. 이에
여기서는 키두쉬란 무엇인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찰하여 유월절 만찬과의 비교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키두쉬는 ‘성화’를 의미한다.
안식일이나 축제일마다 가장은 그와 가족이 마실 잔에 대해 축복(Kiddush)의 기도를 하며, 이는 안식일과 축제일의 시작을 선언하는 구실을
하였다.26)G.H.Box에 따르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다음날 양들이 실제적으로 희생되는 성전에 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목요일 오후에 시작하여 안식일의 kiddush로 끝나는 식사를
거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kiddush는 항상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밤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이론 역시 24시간의 간격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A.
무엇이 키두쉬인가
키두쉬(kiddush)란
성화를 의미한다. 키두쉬는 매 안식일이나 축제일의 시초에 선포되는 하나의 축복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했다. 즉 ‘R. Eleazar b.
Zadok27)은 말하길 : 아버지는 잔
위에다 이야기하시곤 했다. “그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는 마치는 축도를 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축복은 단지
habdalah(안식일과 축제일을 마칠 때 하는 ‘분리의 축복’)가 마지막에 하는 것처럼, 시작 때 불경한 것으로부터 신성한 기간을 분리하는
것을 나타낸다. 신성한 날로부터 kiddush나 habdalah의 분리는 절대적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고, 전례도 찾아 볼 수
없다.
B.
키두쉬는 어떻게 행해지는가?
일몰 후 첫 번째 별이
나타났을 때, 가장은 포도주 잔을 테이블 위로하여, 그의 가족과 손님들 중앙에서 축복을 말한다.28)그리고 나서 가장이 마시고, 그
후 다른 사람들이 마신다. 금요일 식사의 경우는 안식일의 시작이나 안식일 까지 계속되었다. 이 식사가 사라진 후에 축복 안으로 키두쉬가
삽입되었다.29)유월절 식사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일몰 후에 시작하는 그 해의 유일한 식사였고, 축제의 거룩함이 그 식사의 거룩함을 대신했다. 그러므로 키두쉬는 식사도30)아니고, 희생도31)아니고, 희생의 의미도32)아니고, 단순한 축복일 뿐이다.
‘키두쉬 식사’ 는 결코 존재되지 않았고, 만일 더 많은 어떤 것들이 식사보다도 그것들에 의해 의미지워 진다면 특별한 축복은 안식일이나 축제일이
시작되었던 기간이나 그 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평범한 은혜 안에 끼워졌을 것이다.
F. Spitta, P.
Drews, J. Foxley, G. H. Box, P. Batiffol, R. Otto33)는 최후의 만찬은
‘안식일-키두쉬 제의’로 정의되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즉 안식일의 거룩한 희생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를 수용하기 위한 강한 유행이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포도주의 축복은 식사를 시작하는 쪼개진 빵을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포도주와 쪼갠 빵의 축복을 결합하는 것은,
단지 바빌론의 금요일 저녁식사 의식의 발전 결과로, 후대의 Tannaitic, 또는 Amoraic에서만 생겨났다. 예수시대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식일의 거룩함은 일몰 후의 금요일 저녁을 대신한다. 4복음서 모두의 이의없는 증거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은 목요일
저녁에 행해졌다. 어떻게 예수님이 목요일 저녁에 안식일 의식을 축하하려고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 따라서 W. O. E. Oesterley는,
최후의 만찬은 축제 시작 24시간 전의 저녁에 일어났다는, 축제의 제의적인 ‘희생’인 ‘유월절 키두쉬’로써 설명해왔다. 그러나 안식일을 위한
키두쉬는 24시간 전이 아닌, 금요일 저녁에 행해졌다. 따라서 ‘유월절 키두쉬’는 유월절 식사의 시작이었고, 4개의 유월절 잔들 중에서 첫 번째
잔 위에서 말해졌다.
VI.
예수의 성만찬 제정
A.
예수의 성만찬 제정
성만찬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으로, 성서에서는 성만찬 제정에 관하여 4번 언급되고 있으며(마26:26-29, 막14:22-25,
눅22:15-20, 고전11:23-26), 간접적으로는 요한복음 6:51-59에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서
95%가량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어서 최후만찬 기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65%가량을 참조하고 있는 누가복음의 경우에도
최후만찬 기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만 볼 수는 없다. 더구나 복음서와 무관한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최후만찬 기사가 초대교회에
어떤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네 만찬기사는 각기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저술되었음에도 그 보도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공관복음 저자나 바울 사도를 포함하여 초대교회 전체가 최후만찬에 대단히 높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마태복음의 경우 마가복음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긴 하지만 조금의 차이는 있으며,
누가복음에 이르면 그 차이가 상당히 두드러진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역시 나름대로 고유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34)
성만찬 제정에 대한 기사들이
이렇게 차이가 있는 까닭은 성만찬이 제정된 시기와 순서,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위에 대한 진술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동체 별로
조금씩 다르게 전승되었을 수도 있고, 성서 저자가 그 전승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과정에서 차이를 보였을 수도 있다.35)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과정에서든지 중요하다고 인정되던 부분은 거의 그대로 전승되고,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만 공동체나 저자의 관점이 개입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성만찬 제정에 대한 신약성서의
배경을 살피기 위해 본 난에서는 성만찬 기자들의 기록 내용과 시기, 순서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예수의 성만찬 제정
예수의 성만찬 제정에 관한
기사는 공관복음서와 고린도전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가 잡히시던 날 밤 그의 제자들을 모으고 최초의 성만찬인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그리고 이 성만찬의 예식을 계속 행함으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베푸신 최초의 성만찬 사건에 대하여 알프레드
엘더샤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36)
1) 그 장소는 마가
요한의 가정으로 추측되는 큰 다락방이었다.
2) 그 시간은 초저녁,
또는 밤이었다.
3) 그 만찬에서
유월절과 관계가 있었건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언급이 있었다.
4)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예수와 12제자에 한하였다.
5) 그 식탁에서
사용되었건 성물(elements)은 빵과 포도주였다.
6) 예수님은 그 만찬을
예배하는 정신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7) 예수님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받아 먹게 한 후, 다시 포도주가 든 잔을 그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였다.
8) 예수님은 그 떡과
잔의 의미를 설명했고, 하나의 예전으로써 주님의 재림시까지 반복할 것을 명령했다.
9) 그들은 만찬 이후에
시편송을 함께 불렀다.
10)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식사를 끝낸 후 모두 감람산으로 나갔고 그 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별도의 장소에서 기도를 드렸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 모두가 일치된 견해로 기록한 것을 재정리한 내용이다. 이 기록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의 근원을 이의없이 받아들여 왔다.37)
예수께서 최초로 제정하신
성만찬 예전의 순서는 일곱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38)
1) 먼저 주님이 빵을
취하셨고
2)
축사하셨고
3) 그것을
쪼개었으며
4)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셨고
5) 그 후에 잔을
드셨으며
6)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7) 제자들에게 주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이 피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순서는 성만찬 예전의 최초 모델이며, 가장 근원적 형태이며, 성만찬 순서의 골격이 되고 있다 하겠다.
2.
최후만찬 날짜
네 복음서의 한결같은 증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목요일 저녁 때, 최후만찬을 집례하고, 금요일 오후에 숨을 거두셨다. 자정으로 하루가 끝나고 새 날이 시작하는 일반적인 계산
방식으로는 최후만찬의 날과 처형되신 날이 다르다. 그러나 일몰에서 다음 날까지를 하루로 보는 이스라엘 계산 방식으로는 최후의 만찬과 처형, 이
두 가지 사건이 하루 동안에 일어났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그 날은 유월절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월절 저녁 때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같은 날 체포되고, 종교 재판과 정치 재판을 거쳐 사형까지 받은 셈이다. 그러나 제 VI 장 제 B 절에서 언급한 대로 민족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에 종교 재판과 정치 재판을 하고 사형 언도에다 사형 집행까지 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최후의 만찬에서부터 임종까지의 비극적 사건들은 유월절 당일이 아니고, 그 전날에 일어났다고 한다(13:1, 18:28, 19:14,
19:31-42). 요한복음의 날짜는 예수님의 비극적 최후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안식일과 유월절이
겹치는 날보다 하루 앞서, 곧 안식일 겸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에 최후만찬에서부터 처형까지의 일을 당하셨다. 이는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에
있는 “유월절의 전날 저녁 때 사람들은 예수를 매달았다”는 증언과도 일치한다.39)
3.
최후의 만찬 장소
장소에 관한 언급은 최후의
만찬 준비 이야기에만 나오고 있다.40)
예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를 따라 가거라.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가서, 그 집 주인에게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내 사랑방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십니다’
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자리를 깔아서 준비한 큰 다락방을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니, 거기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를 하여라(마가복음 14장
13절-15절).”
이 기사를 보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시내에 살고 있는 어느 사람의 친지의 다락방에서 최후만찬을 드셨다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없다. 즉 요즘 순례자들이 으레 참배하는
시온산 위의 최후만찬 기념 성당은 전혀 역사적 근거가 없다.41)
4.
최후의 만찬 절차
최후만찬 직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는 이야기는 오직 요한복음 13:1-17에만 나오고 있다.
유대인들의 회식은 전식,
본식, 후식 순으로 진행된다.42)예수님의 만찬 절차도 거의
유사하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식범절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빵을 나누어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실 때, 아주 독특한 말씀을
하셨다. 곧, 두 가지 행동의 뜻을 밝히신 말씀들인데, 빵과 포도주에 대한 설명어이다.
5.
빵의 설명어, 포도주의 설명어
a.
빵의 설명어
헬라어 원전에서는 “받아서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λαβετε φαγετε τουτο εστιν το σωμα μου 마26:26).”라고 하나, 예수님의 상용어인
아람어로 되번역하면 단순히 “받으시오, 이는 내 몸”일 뿐이다. 아람어에는 서술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 ‘내 몸’은 나의 일부분인 육신만이
아니고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인간 전체를 지칭하는 히브리 표현인 것이다.43)그러니까 “받아서 먹어라, 이는
내 몸”을 의역하면 “받으시오, 이 빵은 나”라는 뜻이다. 이 또한 두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다. 서술법으로 간주하여 “받으시오, 이 빵은
나입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상징적으로 풀이하여 “받으시오, 이 빵은 나를 뜻합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 빵이 예수가 아닌 이상 아무래도
상징적 풀이가 옳다.44)곧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헌신의 결의를 드러내셨던
것이다. 이런 뜻이 바울의 설명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고전11:24)” 및 누가의 설명어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이다(눅22:19)”에 극명하게 드러난다.
b.
포도주의 설명어
마가의 형태는 이렇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막14:24).” 헬라어 원전에는 “이는 내 피입니다”라고 하나, 서술법이 없는
아람어로 되번역하면 그냥 “이는 내 피”일 뿐이다. 이 경우에도 ‘내 피’는 내 몸 속에 흐르는 혈액만이 아니고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는 내 피’를 의역하면 ‘이 잔에 담긴 포도주는 피를 쏟아 죽을 나’라는 뜻이다.45)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뜻있는
죽음이 되기를 원하셨다. 곧, 자신의 피가 ‘계약의 피’, ‘많은 이들을 위해서 흘리는’ 속죄의 피가 되기를 바라셨다(막14:24).
6.
반복령
최후만찬을 거듭 행하라는
반복령은 마가나 마태에는 없고, 고린도전서에는 빵의 설명어와 포도주의 설명어에 이어 각각 나오며(11:24-25), 누가복음에서는 빵의 설명어
다음에 한차례만 나온다(22:19). 최후만찬을 거듭 행하라는 반복령은 예수 친히 내리신 명령이 아니고 본디 초대 교회의 성찬 전례 규정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전례 규정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뀌어 설명어들에 덧붙여졌을 것이다.46)어쨋거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기억(아남네시스)하여, 그 분의 죽으심을 기억하여(고전11:26) 성찬을 거행하였다.
B.
최후만찬 전승
예수님의 최후만찬기는
신약성서에 네 차례 나온다(마26:26-29, 막14:22-25, 눅22:15-20, 고전11:23-26). 이 가운데서 마태는 분명히 마가의
최후만찬기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는 한편으로 마가의 최후만찬기를 수용하고 또 한편으로 고리도전서에 채록된 최후만찬 전승 또는 그와 유사한
전승을 합쳐서 혼합형 최후만찬기를 엮었다. 그러니 기록 이전 외 구전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크게 보아 마가형 최후만찬 이야기와 고린도전서형
최후만찬 이야기가 유행했다 하겠다. 두 가지 형태 가운데서 어느 것이 예수님의 최후만찬 사실을 좀더 충실히 반영할까? 마가의 최후만찬기가 더
신빙성이 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고리도전서의 형태가 더 오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47)그러나 두가지 만찬기 모두
역사적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하기보다는, 마가와 바울이 제 각기 자신이 소속한 교회의 성찬 전례문을 옮겨 썼다고 볼 것이다.48)마가는 70년경에 아마도
이스라엘밖에 있는 어느 헬라 유대계 기독교에서 사용하던 전례문을 옮겨 썼겠고, 바울은 55년경에 아마도 안디옥 교회에서 사영하던 전례문을
전제했을 것이다. 성서의 기술 연대만 보아서 전승의 우선순위를 따진다면 고린도전서 - 마가 - 마태와 누가의 순서가 되지만, 최후만찬 기사처럼
독자적인 독자적인 생명력이 강한 전승단위들은 단순히 성서의 저술 연대만 가지고 우선성을 정의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49)마가와 바울이 제각기 자기
교회의 전례문을 옮겨 쓴 이상 그들의 최후만찬기들에는 객관적 사실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주관적 예수관도 함께 들어 있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사건을 풀이한 구원론적 해석들이 객관적 사실들과 함께 뒤섞여 있다 하겠다.50)
마태의 만찬 기사가 마가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마가와 누가와 바울의 보도가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 동향을 소개하면 이렇다.51)
첫째, 모든 면에서 셋중 어느
것 하나만을 원본에 더 가까운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세 기사는 나름대로 원래적인 형태를 보존하고 있어서, 셋을 통합하여 재구성하면
그 기원이 되는 원래형태를 찾을 수 있다.52)
둘째, 자주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문제로, 만찬기사 중에 어느 것이 셈어형태를 더 많이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전승의 우선성을 판별해 볼 수 있다. 최후만찬에서 예수가 한
말씀은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헬라 말보다는 이 둘 중의 하나가 만찬기사의 첫 언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53)결과적으로 현재의 만찬기사는
번역된 것으로서, 아람어나 히브리어로부터 그리스어로 옮겨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번역의 과정에서 훨씬 그리스어의
문체에 어울리게 순화되었다. 그러므로 여러 만찬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언어중에서 셈어로 바꾸어 볼 수 있는 말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 더
이른 전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식의 추정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 예레미아스는 마가 - 누가 - 바울의 순으로 전승의 우선성을 정의한 바
있다.54)
셋째, I. H.
Marshall과 X. Leon-Dufour는 전례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을수록 더 후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각
만찬기사에 담겨있는 전례적 요소들을 분석하면 전승의 고대성을 밝힐 수 있다.
넷째, 누가에 대해서 대단히
중요한 이론이 있다. 마가와 바울은 각기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고유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서, 누가의 만찬기사는 그 둘을 혼합한 듯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누가는 마가의 본분을 바탕으로하여 바울에 간직되어 있는 다양한 형태를 참조하여 편집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누가의 만찬기사는 무시하고 마가와 바울만 다루면 될 것이다. 이 주장은 최근에 R. Pesch에 의해서 강하게 주장되어
왔다.55)
그러나 H.
Schurmann에 의해서 새로운 가설이 등장한다. 그는 언어를 연구한 끝에 누가의 만찬기사가 바울과 마가를 편집한 것이 아니라 그 둘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56)
만일 H. Schurmann의
주장이 옳다면 누가의 만찬기사를 어 이상 변두리로 밀어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실 그에 대한 R. Pesch의 반박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먼저 그는 여러 곳에서 누가가 바울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근거를 대지 못하고 있으며, 오리려 누가가 더 원초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다음에 그는 누가복음 22:19-20이 누가의 것이 아니고 누가에 의해 인용된 원전을 표현한 것이라는 예레미아스의
주장을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57)만일 이러한 주장이 옳은
것이라면, 마태는 제외하더라도 세 만찬기사를 모두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이론들 중에서 전승의 우선성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어떤 방식을 취할
것인가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나올 것이 틀림없다.58)
1.
전례의 영향에 따른 우선성
a.
역사적 전승인가? 전례적 전승인가?
바울은 유월절 식사의 배경없이
고린도인들의 악습을 꾸짖는 상황에서 만찬기사를 직접 전해주고 있고, 마가와 마태는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και εσθιοντον
αυτων ; εσθιοντων δε αυτων)’라는 말로 만찬기사를 유월절의 배경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최후만찬 기사는
독립 전승이었다고 인정받고 있다.59)예레미아스는 현재의 네
만찬기사가 모두 전례문을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전례문으로 고정되기 이전의 형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네 만찬기사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대개 전례화 이전의 매우 이른 전승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또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전례화의 흔적으로 본다. 첫째, και는
전례화 이전의 단어로서 누가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은 이 자리에 ο κυριος Ιησους εν τη νυκτι η
παρεδιδετο ελαβεν이라는 신앙고백문을 삽입시켜 전례문으로 꾸몄고, 마태와 마가는 εσθιοντων αυτων을 첨가시켰으며, 한 발
더 나아가 마태는 και마저 δε로 바꾸었다. 둘째, 셈어의 설화체에서는 이름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여 자꾸 나오는 경우 생략하는 것이 보통인데
마태(ο Ιησους)와 바울(ο κυριος Ιησους)은 이를 첨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레미아스는 바울이 전례적 영향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른 전승보다 후대의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60)
불트만은 성서에 소개된
만찬기사가 본래 전례문이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마가에서는 ‘나의 피(το αιμα μου)’에 부가된 ‘계약의(της διαθηκης)’와
‘흘리다(εκχυννομενον)’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특히 της διθηλης 는 ‘나의(μου)’와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차적인
부가문이다. 바울에서는 이런 어색함 때문에 εκχυννομενον 을 없애고 ‘여러분을 위하여(το υπερ υμων)’를 빵에 관한 말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마태는 ‘죄를 용서해주려고(εις αφεσιν αμαρτιων)’를 첨가하여 εκχυννομενον υπερ πολλων의
의미를 주석하였다. 그래서 부가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원래의 전례문을 밝혀 보면, ‘이는 내 몸이고, 이는 내 피입니다(τουτο εστιν
το σωμα μου τουτο εστιν το αιμρ μου)’였다고 한다.61)
만찬기사는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려는 글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과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만찬기사가 담고 있는 예수의 몇몇 행동과 말씀은 당시 어느
곳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만찬기사가 어떤
꼴을 지니고 있든 간에 초대교회나 성서저자들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을 잦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한
발 더 나가면, 빵과 잔에 관한 말씀이 ‘감사기도-설명말씀-기념명령’의 순으로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는 바울의 만찬기사는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다른 만찬기사들보다는 전례적 경향을 더 많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역사적인 최후만찬이 점차 전례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가성에 따르면 예레미아스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 바울이 공관복음보다 훨씬 후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의 이런
가설은 너무 단순하게 보여진다. 비록 유월절의 배경이 직접적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만찬기사가 유월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특히 고린도전서 10장 16정에서 언급하고 있는 ‘축복의 찬(το ποτηριοξ της ευλογιας)’은
만찬기사에서 언급한 잔이 유월절 식사의 세번째 장임을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공관복음이 아닌 바울의 보도까지도 만찬기사의 배경이
유월절이었다는 것만큼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만일 바울만 전례적 성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면 반대로 공관복음은 역사적 성향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다는 말도 가능한데 예레미아스가 가장 이른 것으로 간주하는 마가조차도 역사적인 보도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흔히 마가와 바울을
혼합한 것이라고 알려진 누가가 유월적 식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적인 보도문에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62)그러므로 불트만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가설을 다시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만찬기사는 공관복음의
수난기사와 어울리는 유월절 식사를 역사적 배경으로 갖고 있었다.
둘째, 이것이 점차 초대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고유의 전례로 발전하였다.
셋째, 복음사가들이 이
전례문의 기원과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애초의 역사적 배경인 수난사에 위치시켰다.63)
예레미아스도 만찬기사의
도입부에서 και만 등장하는 것이 더 원래적이며 여타의 부가어가 붙은 것을 이차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원래의 전례적 틀에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여러 수식어가 부가된 것이라는 불트만의 이론은 현 만찬기사가 전례문을 토대로 하여 전승의 양식을 규명하여 삶의 자리를 복원해 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가설이 지닌 함정에 빠져들 위험은 가능한 한 피하면서 전승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b.
전승의 성향에 관한 이론들
3 - 4세기의 전승을 통해서
성찬을 연구하던 H.Lietzmann은 Missa
und Herrenmahl(1926)이란 저서에서
초대교회에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던 고대 애굽의 전례와 비 예루살렘 전승인 히폴리투스 전례의 두 형태의 성찬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히폴리투스
전례는 고린도전서와 공관복음 안에 담긴 만찬기사로부터 발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데 반해서, 고대 애굽 전례는 사도행전 2장 42절의
‘빵을 뗌’에서 유래하며, 디다케와 기타 초대교회의 여러 저술에 반영된 주의 재림이나, 식탁에 모인 사람들 간의 친교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O.Cullmann은
H.Lietzmann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초대교회 안에 서로 구분되는 두 형태의 성찬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의 성찬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반영된 ‘빵을 뗌’의 축제적 분위기는 누가복음 24장 36-43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발현에
토대를 둔 것이다. 누가복음의 발현사화에 등장하는 유일한 음식은 물고기인데, 요한복음 21장 에서도 디베랴 호수가에서 발현한 그리스도가 빵과
물고기를 드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성찬의 예표로 알려지는 요한복음 6장의 ‘많은 사람을 먹인 기적’에서도 빵과 물고기가 등장한다.
그래서 후기의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물고기가 성찬의 상징으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성찬의 고유한 명칭이었던 ‘빵을 뗌’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발현한 누가복음 24장 30-35절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며, 사도행전 10장 41절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음을 강조한다. 이런
모든 요소들은 첫 성찬이 일상식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보다는 초대교회에 만연한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의식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바로 이것이 최후만찬과 연결되면서 공동체적인 면이 강조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종말론적인 기대가 부각된다. 만찬기사나 성서의
여러 곳에 등장하는 성찬의 묘사가 조금씩 다른 것은 이 둘 중에서 어느 한쪽을 좀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64)
H.Conzelmann은
이러한 O.Cullmann의 견해에 대해서, 부활 현현보도의 식사장면은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며, 사도행전의 보도에서 기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매일의 식사가 의식적으로 수행되었음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면서, 공동기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한다.65)최근에 와서는 비록
H.Lietzmann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공관복음과는 상당히 구분되게 바울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신학적인 관점 때문에 초대교회
안에 ‘마가-마태 형태’와 ‘바울-누가 형태’의 두가지의 다른 성찬이 있었고, 그것이 성서에 반영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66)
마가-마태와 바울-누가의
내용을 비교해 보았을 때 그 배경으로 깔려 있는 신학적 관점들이 결코 동일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래서 학자들은 흔히 마가-마태 형태를
예루살렘 전승(마가전승)으로 그리고 바울-누가 형태를 안디옥 전승이라고 부른다.
한편 누가는 아주 두드러진
면을 보인다. 19-20절의 대부분의 내용은 바울과 비슷하면서도 잔에 관한 말씀에서 마가와 동일한 속죄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또 마가-마태와
비슷한 내용을 17절과 18절에 포함하고 있다.
c.
전승간의 관계
여기서는 전승 단위별로 독립성
내지는 종속성을 분석하려고 한다. 이 일은 전승의 선후를 가리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하나, 전승의 연대까지 규명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의미도
그다지 없다. 다만 전승의 연관성과 갈래는 정리해 볼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신학적인 의미를 밝히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1)
마태
예레미아스는 마태에 보이는
셈어 형태는 모두 마가에서 온 것이며, 헬라어법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더 많다는 이유를 들어 마가에 완전히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다.67)이런 점은 본문을 살펴보면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26절에서, και대신 δε를
기용한 것은 마가에 비해 이차적이다. 그리고 주 동작자 ο Ιησους를 삽입한 것은 전례적인 목적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요소이다. 주로 팔레스틴
밖에서 그런 경향을 보이는데,68)마가에서 이미 암시된 것을
구체화한 것일 뿐이다. 또 마가의 ‘그들에게 주시고(εδωκεν αυτοις και)’가 ‘제자들에게 주시고(δους τοιε
μαθηταις)’로 구체화된다. 열 두 제자를 후대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 부각시키려는 마태의 신학적 관점에 의해 바뀐 듯
하다.
27절에서 마가의 ‘···,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και επιον εξ αυτου παντες)’는 말이 ‘···말씀하셨다.;모두 이 잔을 마셔라(λεγων
πιετε εξ αυτου παντες)’로 바뀌어 나온다. 이것은 ‘받아 먹으라’는 빵에 관한 말씀과 대치를 이루기 위해서 마태가 바꾼 것으로
보인다.
28절에서 마가의 υπερ이
마태에서는 περι로 바뀌어 있다. 예수시대에 이 둘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었다.69)그리고 마태는 ‘죄를 사하려
주려고(εις αφεσιν αμαρτιων)’가 부가되어 있다. 이는 마가에서 반영하고 있는 이사야서 53장이 대속사상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피흘림’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마태가 삽입한 것이 명백하다.
29절에서는 마가의 ‘이제는
···아니(ουκετι)’ 대신 구세사상의 결정적인 전기를 좀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지금부터는(απ αρτι)’으로 바꿨다. 그리고
μεθ υμων을 삽입하여 26절에서 처럼 제자들과의 일치를 좀더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가의 ‘하나님의(του θεου)’를 ‘내
아버지의(του πατρος μου)’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70)
지금까지 보았듯이 마태는
마가에 비해 이차적일 뿐만 아니라 마가를 기초로하여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도 마가의 내용을 생략한 것보다는 첨가한 것이 훨씬
많다. 이것은 마가의 원래 이야기를 대부분 확장시켜 보도하는 마태의 평소 저술 성향과도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태는 마가에 종속된
이차적인 전승이다.71)
(2)
바울
바울과 마가는 문학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성서에 보도되기 전단계에서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살피기로 한다.
만찬기사를 소개하는 배경으로
보아 바울은 서기 51년경 고린도에 머물면서 공동체를 건설할 당시 이미 이 전승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죽은지 20년도 채 안되는
시기에 이미 최후만찬에 관한 전승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가 이 전승을 입수할 가능성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그가 개종한 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을 만난 다메섹이고, 둘째는 그가 개종한 후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갈1:18)이다. 셋째는 그의 선교 거점이었던 안디옥
교회이다. 이 중 다메섹이나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니 만큼 바울의 전승은 예루살렘과 긴밀한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레미아스의 분석에
따르면 바울의 전승은 일부 셈어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헬라어법의 흔적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72)직접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예루살렘에서 전해져 안디옥 교회에서 독특하게 발전되어 온 전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73)
(3)
누가 22:15-18
누가의 만찬기사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전승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안고 있으므로, 누가의 전승의 성격을 우선적으로 밝혀야만 여러 전승들의 상호관계를 추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누가의 전승은 15-18절과
19-20절로 양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중 15-18절은 고유한 전승으로서 인정받기에는 매우 불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언어의
차원에서도 이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유별난 형태를 하고 있어서 과연 고유한 전승으로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두고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5절은 다른 만찬기사에서
병행되는 구절이 없으나, 16절은 18절과 비슷하고, 이것은 다시 마가의 25절과 비슷하다.
누가복음 22장
16절 |
누가복음 22장
18절 |
마가복음 14장
25절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
λεγω γαρ
υμιν |
λεγω γαρ
υμιν |
αμην λεγω
υμιν |
나는 다시는 ··· 먹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이제부터 ···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
나는 ···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
οτι ου μη
φαγω |
οτι ου μη πιω απο
του νυν |
οτι ουκετι ου μη
πιω |
유월절
음식을 |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
αυτο |
απο του γενηματος
της αμπελου |
εκ του γενηματος
της αμπελου |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
내가 하나님이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
εως οτου πληρωθη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
εως ου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ελθη |
εως της ημερας
εκεινζς οταν αυτο πινω καινονεν τ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
또한 17절은 마가복음 14장
23절과 비슷하다.
누가복음 22장
17절 |
마가복음 14장
23절 |
그리고 잔을
받아서 |
또 잔을
들어서 |
και δε ξαμενος
ποτηριον |
και λαμων
ποτηριον |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
ευχαριστησας |
ευχαριστησας |
말씀하셨다. |
그들에게
주시니 |
ειπεν |
εδωκεν
αυτοις |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셔라 |
그들은 모두 그 잔을
마셨다. |
λαβετε τουτο και
διαμερισατε εις εαυτους |
και επιον εξ
αυτου παντες |
이상에서 보듯이 15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가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15절은 만찬기사 중 유일하게 성찬이 유월절 식사라는 점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으나,
누가가 전해받은 전승인지 아니면 창작인지 의심스럽다. 예레미아스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15절의 το πασχα φαγειν, 16절의
πληρωθη, 17절의 δεξαμενος ποτηριον ευχαριστησας, 18절의 ου μη, του γενηματος της
αμπελου, ελθη 등의 말은 전형적인 셈어형식을 보존하고 있다.74)그러나 이 가운데 15절의 το
πασχα φαγειν과 16절의 πληρωθη, 그리고 17절의 δεξαμενος ποτηριον ευχαριστησας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마가와 동일한 내용이며, 17절 역시 마가와 비슷하다. τουτο το πασχα φαγειν마저 셈어의 어순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독립된
전승에서 볼 수 있는 독창성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구절에서는 마가보다 훨씬 헬라어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και ειπεν του μη παθειν προς αυτος 등은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75)결국 셈어에 따른 분석으로는
마가보다 이차적이며 마가에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1939년에 P.Benoit가 누가복음 22장 15-18절을 누가의 편집이라고 선언한
이래 최근의 R.Pesch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76)
그렇다면 누가가 왜 이
구절들은 편집하였을까? M.Dibellius에 따르면 누가가 뒤이어 나오는 성찬제정기사(22:19-20)를 유월절 식사 장면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15-18절을 편집하였다고 한다.77)
반면에 누가가 안디옥 전승과
마가전승을 연결시키려고 이 부분을 창작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마가전승의 포도나무 열매에 관한 말씀을 안디옥 전승의 친교의 잔과 연결시키려고
성찬제정문 앞에 위치시켰는데, 그러다보니 잔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른 어색함을 없애기 위하여 급기야 15-18절까지 창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78)
그러나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일방적으로 마가에 종속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증거가 발견된다. πληρωθη는 神的受動態로서 마가에 없는 고유한 셈어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고, επιθυμειν, λεγω γαρ υμιν, εως οταν, απο του νυν 등은 마가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없고, 원래 누가가 좀처럼 쓰지 않는 표현들이다.79)이런 요소들은 누가의 창작설을
매우 궁색하게 만든다. 만일 누가가 창작했다면 자신이 즐겨 쓰는 말과 마가전승에서 온 말들만으로 15-18절을 꾸몄을 것이다. 따라서 제 3의
전승이 존재할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누가가 최후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묘사하려 했다면 좀더 매끄럽게 꾸밀 수 있었을텐데, 누가의
만찬기사는 애써 유월절 식사로 보아줄 수는 있지만, 너무 엉성한 모양을 하고 있다. 더구나 누가는 반복을 싫어하여 자신이 창작하였다고 하더라도
16절과 18절처럼 병행하는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전승을 참조할 경우에도 전승의 고유한 순서를 파괴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이용하며, 자신의
말을 첨가하여 확장시키기보다는 축약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누가가 마가 전승보다는 특수사료를 우선적으로로 참조하였다는
점이 앞에서 본 정체불명의 단어들의 출처를 해명하는데 설득력이 높다.80)
그렇다면 15-18절이 반영한
전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초대교회에는 요한의 수난사를 근거로하여 그리스도교 고유의 유월절을 거행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니싼월 14일 밤에 유월절을 지내고 있는 동안 전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단식하며, 그 동안 출애굽기 12장을 읽고 해설을
듣다가, 대략 새벽 세시 쯤 되면 단식을 풀고, 아가페와 성찬으로 구성된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처음에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음이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의 희망인 유월절 밤에 오기로 되어있는 메시야의 재림이었다. 매년 유월절 밤에 그리스도교 유월절
식사가 있었다. 누가는 자신이 보유한 전승을 이용하여 이것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다.81)
(4)
누가 22:19-20
다른 부분은 거의 바울과
일치하지만 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το υπερ υμων εκχυννομενον)’이라는 말이 첨가됨으로써 차이를 보인다. 이 말은
마가복음 14장 24절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το εκχυννομενον υπερ πολλων)’이란 말을 윤색하여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19절에서는 빵에 관해서도 ‘너희를 위하여 주는(το υπερ υμων διδομενον)’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바울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므로 결국 원래적인 이 말과 조화시키기 위하여 마가를 참조하여 창작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I.H.Marshall은 누가가 마가와
예수의 어록에 충실하고 있는 사실은 누가가 복음서의 많은 부분을 창작했으리라고 보는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면서 그 대신 누가가 특정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을 자기의 서술관점에 따라 수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 구정 역시 누가가 창작했으리라고
보기 어렵다. 누가가 만일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이다’는 빵에 관한 말씀과 병행시키려 했다면 마가 전승에서 아예 τουτο
εστιν το αιμα μου란 말까지 차용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이다’라는 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는 ‘이 잔은
···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란 말을 고수한다. 그 결과 το υπερ υμων εκχυννομενον이란 말에 의해서 아주
어색하게 두 문장이 연결된다. 이러한 누가의 문장을 요약하면 ‘계약이 쏟아진다’는 형식으로 말이 안되게 연결되어 있어서 평소에 문장을 매끄럽게
꾸미는 누가의 방식과는 반대된다.82)이에 관해서 누가가 피를
마신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계약’이라는 말을 강조했다는 예레미아스의 주장은 성서의 다른 구절들이(특히 요6:53-56) 그러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το υπερ υμων εκχυννομενον이란 구절은 누가가 마가를
참조하여 창작한 것이 아니라 누가의 특수자료가 그 형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83)
누가가 고린도전서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두 전승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바울이 인용한 전승을 누가가 수집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잔에 관해서 부가된 내용이 누가가 수집한 전승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거기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고리도전서를 짓고 난 후에
전승에 변화가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과 차이를 보이는 곳에서 대부분 바울보다 이른 표현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오히려
누가의 전승이 더 원래적이라는 주장이 강하다.84)
먼저 도입부를 보면, 여타의
부가어가 없이 και만 나와있는 누가가 전례적인 신앙고백문(ο κυριος Ιησους)으로 장황하게 시작하는 바울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85)다음 빵을 주는 동작에서 누가는
마가전승과 같은 λαβων을 사용하는데, 바울은 과거형인 ελαβεν을 사용한다. 이것은 바울이 변조시킨 것으로 보인다.86)빵에 관한 말씀에서 누가는
‘주어지는(διδομενον)이란 말이 더 붙어있다. H.Schurmann에 따르면, 이 표현을 담고 있는 말이 아람어에 가깝기 때문에 바울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적 수동태를 갖추고 있는 이 말은 본래 희생제사나 순교를 가리키는 데 쓰이는 용어라고 한다.87)기념명령이 누가에는 한 번,
바울에는 빵과 장에 두 번 등장한다. 초대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계속 기념해왔다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반복명령이 만찬기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일차적이고, 또 세부적인 빵과 잔의 동작이 기념하라는 식으로 강조하는 바울보다는 예식 전체를 지향하고 있는 누가의 것이 더 앞선 것으로
보인다.88)
VII.
성만찬의 재해석과 거기에 따른 문제점
IV장과 V장에서 유월절
만찬과 키두쉬 만찬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장에서는 문제가 되는 요한복음의 보도와 공관복음의 보도를 비교, 분석하여 최후만찬의 성격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흔히 역사적인 보도의 차원에서 공관복음보다는 더 정확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요한복음의 보도
역시 그의 신학적인 견해가 역사적인 보도와 치밀하게 혼합되어 있어서 역사적인 배경을 분리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어느 정도 결말이 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복음의 보도가 역사적으로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공관복음이
보도에 너무도 진하게 깔려 잇는 유월절의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식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유의를 하면서
논란이 되어 왔던 문제들을 정리하려 한다.
A.
유월절 식사라는 증거
공관복음은 물론이고
요한복음까지도 어느 정도 최후만찬이 유월절 식사였다는 가능성을 반영하고 있다.89)
첫째, 공관복음에서는 유월절의
날짜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보도하고 있으며,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였다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막14:12-16, 마26:14-16,
눅22:7-13). 만일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초대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예수께서는 보통 대단히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하였으나, 여기서는 열 둘로 한정시키고 있다. 이 숫자는 유월절 식사를 최소한 10인 이상이 거행하도록 규정한 인원에
어울린다.
셋째, 요한복음 13장
10절은 제자들이 정결례를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준다.90)유월절 식사를 위해서는 정결례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넷째, 유월절 식사는 밤에
거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최후만찬 역시 오후 늦게 시작되어 밤까지 연장되었다.
다섯째, 유대인들은 보통
식사를 그냥 앉아서 하였으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식탁에 ‘기대고 앉아서(ανακειμενων:막14:18)’ 식사를 하였다. 이것은 애굽을
탈출한 자유인의 신분을 상징하는 유월절 고유의 식사 자세이다.
여섯째, 유월절 식사에서는
빵을 나누기 전에 주로 야채와 쓴 나물로 구성된 ‘전식’을 하게 되어있다. 공관복음에서도 예수가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전에 식사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일곱째, 술을 일반 잔치에서도
흔히 마셨지만,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기록된 ‘요빌서’에 근거하여 유월절 식사에서는 술을 마시는 일이 예수 시대에는 관습화되었다. 특히 유월절에
마시는 술은 붉은 포도주였다. 술을 자신의 피와 동일화시킨 것으로 보아 최후만찬의 포도주도 붉은 포도주였을 것이다.
여덟째, 최후만찬은 찬가를
노래하면서 끝난다.91)그것은 유월절 식사를 마감하던
할렐이 두 번째 부분이었을 것이다.
아홉째, 식사 후 예수는
베다니로 가지 않고 감람산으로 갔다. 감람산은 넓은 지역으로써 예루살렘에 속하였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 후 나머지 밤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유월절 규정을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열번째, 식사를 주도하는
예수의 행위가 유월절 하가다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어른이 식사의 여러 요소를 설명하던 관습과 유사하다.92)
B.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는 증거
주로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의
보도내용에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93)
첫째, 막14:22와
병행구절들은 ‘보통빵’을 가리키는 ‘αρτος’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만일 유월절 식사였다면, ‘누룩 안든 빵’을 가리키는
‘αζυμος’라고 했을 것이다. 공관복음이 역사적 사실을 보도한 것이라면, 분명히 유월절 빵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만찬
의식에서는 보통 빵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역으로 성서구절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둘째, 행2:42와 46절에
반영되어 있는 초대교회의 일상 식사관습은 1년에 한 번씩 거행되는 유월절 식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를
반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살아있을 때에 주변에 모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함께 거행하던 보통의 식사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일상식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신 마지막 식사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일상식사를
반복한 것이다. 이것이 점차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식사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유월절 식사에 꼭
포함되어야 할 희생 양과 쓴 나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꼭 그리스도교의 식사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성전파괴 이후에는
성전에서 양을 잡기 어렵게 되자 미쉬나 규정에서마저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Pesahim 5).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성찬예식이 이런 추세를
따라서 양을 제외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성서의 보도에서 양과 쓴 나물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눅22:15절의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는 말씀은 직접적으로 유월절 양을 유월절 양을 언급하고
있고, 막14:20은 간접적이긴 하지만 쓴 나물이 최후만찬 식탁에 올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94)
넷째, 유월절 식사에서는
참석자마다 별도의 잔을 사용했는데, 잔이 하나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별도의 잔을 사용하는 것이 위생상으로도 적합하지만, 2세기와 3세기의
기록들을 보면, ‘예수시대에 과연 별도의 잔을 사용했었느냐’ 하는 것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리고 전례상의 목적으로 보면, 하나의 잔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는 행동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막14:1-2(병행;마26:1-5)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일까’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하고 말하였다(마가복음 14:1-2).
이런 표현을 볼 때, 그들이
계획에 따라서 예수는 축제 전에 붙잡혔고, 유월절 식사를 거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레미아스에 따르면 μη εν τη εορτη라는 말은
그들에게 해당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축제 여러 날 전에 이미 예루살렘에 와 있는 순례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한다.
여섯째, 빌라도가 바라바를
풀어준 행위(막15:6)가 “당국이 감옥에서 내놓기로 약속한 사람을 위해서 ... 양을 잡아야 한다(Pesahim 8:6)‘는 미쉬나의 규정에
따른 행위로 이해된다. 만일 바라바가 이 규정에 의해서 석방되었다면 유월절 식사 전에 그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규정은
죄수가 유대 직권자의 관할권에 속할 때에나 해당되므로, 유대인들도 아닌 정복자 로마인들이 이러한 규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 규정을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일곱째,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바울은 예수를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각에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최후만찬 석상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하신 예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 역시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라고 표현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을 부활의 날로
기념하였다. 그런데, ‘첫 열매’라는 관념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다음날 아침에 추수의 첫 결실을 봉헌하던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니산월 16일에 있었으므로 십자가형이 니산월 14일에 있었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 강조점은 ‘첫 열매’라는 데에
있다. 이 말 속에서 시간적인 증거까지 찾아내려는 시도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아홉째, 이 밖에도 공관복음에
보도되어 있는 여러 가지 정황들이 유월절에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중 두드러진 것만 보면 다음과 같다.
- 유대규정에서는 축제일에
재판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어서, 산헤드린이 유월절 밤에 열리고, 거기서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보도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의 규정95)에 따르면 몇몇 극악한 범죄의
경우에는 축제기간라도 처형할 수 있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거짓 예언자로 보였고, 따라서 지체없이 처형했을 것이다.
- 로마인들은 축제일에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렇지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의 관습을 거스르면서 제멋대로행동 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두 죄수도
함께 처형한 로마인들의 행위는 축제를 모독하는 행위로 보여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반감을 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유대 지도자들이
먼저 요청했기 때문에 무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 아리마대 요셉이 아마포를
사서 장사를 치렀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축제일에는 상거래와 시체를 묻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바빌론 탈무드에는 비록 안식일과 축제일에 상거래를 하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지만, 무더운 팔레스틴의 기후로 인해서 시체를 가능한한 빨리 묻어야
했기 때문에 죽음을 포함하여 실질적인 필요가 있을 때는 예외였고, 사람들은 관과 아마포를 살 수 있었다.96)
열번째, 마지막으로 최후만찬이
유월절 식사라는 공관복음의 정황을 가장 결정적으로 반증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다룰 차례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레미아스의 반론을
주로 제시하겠다.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요13:1)’ : 예수께서 가야 할 때를 안다는 것을 유월절 식사와 필연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 ‘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요19:14)’ : 이 표현은 아람어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기록되어 있는 이상 부정할 수는 없으나, atubat di
pasha(유월절 주간 금요일)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단지 요한의 수난 시기에 대한 보조역할만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그 안식일은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에(요19:31)’라는 말은 아마도 레위기 23장 11절에서 유래하는 ‘곡식단을 바치는
축제일’일 수 있다. 바리새파 전통에 의하면 그 날은 관습상 니산월 16일이었다.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 예수는 공관복음에서와 같이 니산월
15일에는 이미 십자가에 처형되었다.’97)
그러나 이 밖에도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의 상당히 많은 요소들이 최후만찬이 유월절 식사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유월절 순례객들로 인해서 예루살렘 전체가 인파로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였다(요11:55, 12:12, 18, 20). 그 식사는 통상적인 식사 시간을 넘어서 밤까지
연장되었다(13:30). 가장 가까운 열 두 제자들하고만 식사를 하였다. 제의적 식사였다(13:12). 식사 후에 예수는 베다니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갔다(18:1). 제자들은 유월절 규정대로 정결례를 하였다(13:10). 13장
29절에 나타난 유다의 행동은 그 시간이 유월절 밤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요한복음
안에서도 최후만찬이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통일성있게 강조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진술이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 하더라도, 요한복음
저자가 명시적으로 예수의 죽음이 유월절 전날에 있었던 것으로 강조하면서, 성전에서 희생되는 어린 양의 죽음과 유비적으로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요한복음사가의 독창적인 시도는 아니었다. 이미 예수와 유월절 어린양을 비교하려는 시도는 매우
일찍부터 있었고(벧전1:19, 계5:6,9,12, 12:11), 바울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전5:7). 초대교회 안에 일찍부터 흐르고 있던
이러한 사상을 요한복음사가가 정리하여 수난사화를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그리스도교의 관습을 분리시키면서 차이점을
강조하던 분위기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요한복음사가가 그 공동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18장 28절98)과 같이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보도에서 신학적 의도를 찾는 일 이외에 정확한 시간적 배경을 찾으려는 시도는 상당한 무리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근거로
해서 다음과 같은 비교를 할 수가 있다.99)
유
월 절 (The
Passover) 만찬 |
키
두 쉬 (kiddush) |
최후의
만찬 (성
만 찬) |
언제나 가족중심의
축제 |
남자들 친구들만
모임 |
남자들만
모임 |
어린 양을 잡아
사용 |
어린 양을 잡지
않음 |
어린 양을 잡지
않음 |
누룩없는 빵을
사용 |
누룩있는 빵을
사용 |
기록이
없음 |
여러 개의 잔이
사용 |
단 하나의 잔이
사용 |
단 하나의 잔이
사용 |
출애굽의 말씀
봉독 |
말씀봉독
필요없음 |
읽지
않았음 |
연 1 회의 축제
|
매주일
가짐 |
단 1회
거행됨 |
위의 비교 결과 주님의
최후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이 유월절 만찬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랍비와 제자들이 매주 가졌던 키두쉬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특별히
제자들이 이 성만찬을 연중 행사로 하지 않고 매주 또는 모일 때마다 거행하였다는 점에서 이 주장의 신빙성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Dom G. Dix는 요한복음 기자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그것은 유월절 24시간 전에 있었던 종교성을 띤 식사, 곧 유대 종교의 공식적인 우정의
식사였던 카버락(chaburak)일 가능성이 크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100)그 근거로는 첫째, 그 식탁에는
주인이나 또는 지도자가 있었다는 것, 둘째, 빵을 들어 쪼개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가 있었으며, 셋째로,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떼어 먹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고, 넷째로, 잔을 들어 축사하시고 함께 먹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이다.101)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Dom
G. Dix는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의 식탁이었다기보다는 스승과 제자가 유대교의 관습에 따라 가졌던 특정한 식탁의 마지막 식탁(last
supper)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C.
성만찬의 재해석과 거기에 따른 문제점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의미와 그 비중은 교리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현장적 측면에서도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는 성례전이 이론적 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만남’, ‘주님과의 연접(連接)’이라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표현과 경험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102)성례전은 다른 예배의 과정이나
요소보다도 더욱 친근감있고, 밀도높은 만남의 신앙의 경험을 갖게 해 준다. Oscar Cullmann은 이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 있는 ‘역사적 연접(historical link)'을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한다.103)이렇듯 중요한 성례전의 중요성
때문에 교회가 탄생하던 때부터 중세의 종교개혁시까지 가장 핵심적인 예배의 핵심요소로 그 자리매김을 해왔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개혁의지는 도가
지나친 나머지, 성례전의 중요성을 소홀히하여 성례전을 거행하는 횟수를 거의 줄여버렸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중요성을 되찾으려 하는 노력이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교회의 일치를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과, 각 종파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례전을 통한 하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례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이다.
최후 만찬이 어떠한 종류의
식사였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단지 신학도들의 순수 학문적인 관심사만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성찬(Eucharist)이 그 배경을
최후만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식사의 배경이 유월절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마저 크게 달라지게 되는 까닭이다. 만일 유월절이
아닌 다른 배경에서 최후만찬이 거행되었다면, 최후만찬에서 유월절이 지닌 신학적인 의미를 끌어내는 일이야말로 억지행위가 될 것이고, 이미
유월절이라는 관점에서 형성되어 있는 그리스도교의 성찬 신학은 엉뚱한 것으로 흘러온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반해서 정작
신약성서 자체에는 최후만찬 기사가 아주 모호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서로 다른 진술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앞 절에서 유월절 만찬과
키두쉬, 그리고 기록된 성만찬의 내용들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이때 성서에 기록된 성만찬의 내용을 보면 유월절 만찬 보다는 키두쉬에 더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확정적으로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서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공관복음이 유월절
만찬이라고 기록하고(막14:12, 마26:14-16, 눅22:7-13) 있는 것을 보아 다른 부분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것으로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장복 교수는 여기에 대해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역사적 기원이 어느 한 견해로 굳이 확정되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104)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것이 사실이고, 그 식탁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단순한 식탁만을 나눈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하나의 성례전으로 제정된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비교표에서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이 유월절 만찬이 아닌 다른 식사 관습, 즉 키두쉬 만찬과 닮았다 하더라도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배경 안에서 거행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VIII.
나오는 말
신약성서에서 최후만찬 기사에
대한 보도는 공관복음과 고린도전서 등 모두 네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네 만찬기사는 각기 다르게 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일치된
내용을 전해주며, 바로 그 사실로부터 초대교회가 성찬에 관한 전승을 대단히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근자에 들어서 유대인들의
식사관습과 관련하여 성만찬이 일반적으로 전해져오던 유월절 만찬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본고는 최후의 만찬 기원 양식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성만찬은 모든 교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성례전으로, 교회는 일치와 화합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 제정의 본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 기원에 대한 문제의
접근은 성서의 진술이 일차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진술들이 상당히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황들은 그 기원에 대해서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 본 연구는 당시의 배경을 통해 성만찬의 기원에 접근했다. 성만찬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평범했던 일상의 식사를 새로운 성례전으로 의미를 부여하신 것임을 기억하면서 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성례전을 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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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슬리를 소금물에 찍어 먹는 관습이나 쓴나물을 먹는 관습 또는 비스듬하게 기대어 음식을 먹는 관습은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최명덕, 위의 책.
나중에 관습이 생겼는데, 바빌론과 팔레스틴 안에서도 안식일과 축제일의 시작에 봉사로 열렸다. 그리고 여전히 나중의 기간에도 그것은 일몰까지 연기되었다. 그래서 키두쉬는 이제 식사의 시초로써 말해졌으며, 여전히 오늘도 실행되고 있다. J.Jeremias. 앞의 책, 27. 각주 참조.
독자적으로 이전의 학자들은 Otto를 언급해왔다. 유대인의 거룩한 안식일에 참여하는 동안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키두쉬를 기도했고, 동시에 그것을 해석하셨는데,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 특별한 것이었다. 후에 Otto는 이 이론이 지켜질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만찬을 키두쉬와의 의식적인 유사성으로부터 유래를 찾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알려지고 일반적인 식사였다. 예수께서 새로운 의미를 주셨다. 이 의식들은 키두쉬와 유사했고, 그 존재가 조금도 제공되지 않았기에 이 의식을 Otto의 창작이라고 보여진다.
바울과 누가 계열의 최후만찬기의 우위를 주장하는 설 : H.Schurmann, Der Einset - zungsbericht LK 22:19-20, Band 2, Munster 1955, S.83-132.
정양모, 예수의 최후만찬과 교회의 성찬, 사목 1989. 10월호. 71.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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