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전적인 삶과 일
(주준태 목사)
(고전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피타고라스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신자의 삶과 일의 척도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식을 통하여 이 땅위에서 일하시고 말씀하시던 전체 메세지를 요약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찬 상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명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 전체적인 표상을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금년 첫 번 성찬식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산 모범과 함께 표준적인 성도의 삶과 일을 명상해 보십시다.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는 성찬 상에서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했지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현대감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미래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내일을 불안해하고 미래를 두려워합니까? 일생을 죽음에 매어 종노릇하는 것이 우리들의 내면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는 미래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미래와 평화하고 미래를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시편기자가 노래합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오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4-25).
의심 많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도마는 그에게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보증해 주신 예수님께 이렇게 자기 신앙을 고백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절대 지배자란 뜻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을 나의 최고의 주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당신의 통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자란 뜻입니다. 높기만 하고 자원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이름뿐인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분은 허장성세나 명불허전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상천하지의 실세시며 우주의 실력자입니다. 그분은 영원무궁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결코 다함이 없는 창조자시며 무궁한 자원이십니다. 이렇게 성찬 상에서 주님은 우리들의 삶의 성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성찬 상에서 자기의 피를 부어주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속죄의 피요 언약체결의 피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짐승의 피와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서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서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히 9:16-22)
히브리서 기자가 계속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짐승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짐승의 피가 부정한 육체를 정결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1-15)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유전된 원죄의 역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제없는 오늘이 있습니까? 조상이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역사적 유산이 없는 새로운 역사의 창조가 있습니까? 우리는 역사의 아들이요 인류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그 연속성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실존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신과 이웃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모두가 어제의 짐을 메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짐은 어떤 짐입니까? 원죄의 짐이요 자 범죄의 짐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그 멍에를 자기 힘으로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망과 질병의 무거운 멍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구원자요 구속자이신 예수께서 우리 죄 짐과 사망과 질병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사망으로 권세를 잡은 자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인류의 죄악 된 과거를 청산하였습니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예수께서 당신의 피를 우리에게 쏟아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감격스럽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님은 성찬 상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동안 항상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바로 이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끝 날까지 전하라는 것입니다. 찬 471장을 함께 부릅시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에게 매일 매일 연속적으로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그늘 속에 쉽니다.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은혜속에서 자라갑니다. 이 은혜 속에서 늘 새롭게 됩니다. 강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받은 만큼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전달자이지 은혜의 발명자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의 은혜를 받습니다. 유브라데와 같고 큰 바다와 같은 속죄의 은혜를 받습니다. 태평양과 같고 대서양과 같은 용서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습니다. 사랑의 능력으로부터 새털같이 많은 성령의 각양 은사와 도움을 받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의 모본으로서 물 붓듯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날로 새롭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쁨이 생깁니다. 은혜를 받으면 힘이 생기고 길이 열립니다. 어떤 병약한 청년이 실의에 빠졌습니다. 자기 몸도 추스리지 못하는 판국에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의 가족까지 부양해야 했습니다. 우울한 마음이 생기고 온 세상이 회색으로 보였습니다. 급기야는 어두운 세상 떠나야겠다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형도 원망스럽고 옹기종기 많은 자녀도 밉고 귀찮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내 과거를 수용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믿음이 들어 왔습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원망할 필요가 있는가? 감사하며 살아야지, 그는 믿음으로 현재를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위해 몸이 찢기고 피를 쏟는 일에 아무 갈등이 없었습니다.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진실로 우리 주님은 원수인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경건치 않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비울 사도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6, 8, 10-11)
이 병약한 청년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병약하고 가난한 청년은 기꺼이 그의 짐을 지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여, 주님이 짊어지게 하신 이 짐을 잘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사랑의 힘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부어졌습니다. 인생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성찬 상에서 성례전적인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사랑으로 지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믿는 우리들에게 성례전적인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네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기 위하여 구하라고 하십니다. 섬기기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성례전적인 삶은 한마디로 "섬김"입니다.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남을 무시하는 교만을 버립시다. 쓰레기 같은 자존심을 버립시다. 세상에 교만보다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잠 16:18). 반드시 들어납니다. 무너집니다. 교만하면 잘한 것도 남지 않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온갖 형태의 자기 중심성, 과시성, 지배성을 회개합시다. 허리를 굽히고 말없이 짐을 집시다. 변치 않고 끝까지 봉사합시다. 언제나 쉽고 작은 존재가 됩시다. 겸손과 충성을 다짐합시다. 예수님은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고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여러분은 무엇을 회개하였습니까? 새롭게 깨달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결심하신 비전과 도전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섬기신 것처럼 세상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으로 섬길 두 가지 교회적 과제는 세계선교 1,000원 헌금과 세계선교 분담기도입니다. 올해도 물질로 선교하고 기도로 선교합시다. 온 교회 젊은이들의 선교훈련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헌금합시다. 일정한 시간에 온 구역원이 합심하여 세계선교를 위해 분담하여 기도합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세계를 섬기고 젊은이를 섬기는 좋은 길인 줄 믿습니다. 오늘 아침 겨울 성찬 상에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성례전적인 삶과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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