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학
권성수 교수
9월 1일
1. 성경해석학의 기본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
1) 성경의 본질과 맞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
성경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이것은 가능하다. 성경에 대하여 잘 말해주는 성경 구절은 딤후 3:16-17에 잘 나타난다. 개혁주의 성경관은 하나님의 “영감과 무오” 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성경의 자증 때문에 이것을 증거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는 현실적으로 후현대주의(상대주의)의 도전을 받기 때문에 강조되어 진다. 특별히 후현대주의는 종교다원주의와 연결되어서 도전해 오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개혁주의 성경관에 한계점이 있었다. 그것은 문맥을 간과하여 중요한 문제를 흘려버렸기 때문이다. 문맥에서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이것을 무장하기 위하여” 라는 문맥에서 성경은 고통의 현장, 삶의 현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삶의 책이므로 고통당하는 삶의 현장에 전해진 책으로 고통스런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말씀이다.
2) 성경해석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성경해석의 조건은 지평의 융합이 필요하다. 본문이라는 지평과 현실이라는 지평을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 본문이 오늘의 삶의 현실과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서 현실을 강조한 철학적 해석은 불가하며, 성경을 기준으로한 현실의 감각을 필요로 한다.
철학으로 성경으로 들어가서 철학으로 나오는 자유주의자들의 융합 방식이 있지만 개혁주의는 철학으로 들어가서 성경에 의해서 변형, 재형성하는 현실 감각을 가지고 성경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가) 성경의 지평 (맥을 찾아야 한다.)
o 문맥 : 문맥을 잡아야 한다. 문맥에는 문법, 언어학, 문학장르, 언어학, 등을 고려
o 사색 : 역사의 맥을 찾아야 한다. 당시의 역사, 신약사, 구약사, 문화, 등의 배경
o 경맥 : 성경의 통일성을 찾아야 한다. 신약신학, 구약신학, 성경신학, 조직신학, 철학
(지평융합이라는 입장에서)
o 영맥 : 영적인 맥을 찾아야 한다. 영감성, 중생, 바로 삶, 성도의 교제 등
8월 9일
1. 후현대주의와 성경해석
후현대주의는 현대주의의 반발로 생겨났고 어떠한 정체성과 통일성의 개념 자체를 거부하므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현대주의는 인간 이성에 근거한 전통적인 가치관, 보편적 기준을 인정하고,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통해 인간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는 낙관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러한 현대주의의 반발은 인간의 이성으로 보던 모든 사고 방식인 객관, 보편을 부정하고 전통을 부정한다.
안토니 시쓸튼은 “자아가 그 자체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순진한 신뢰심이 깨어진 것”이라고 했고, 버나드 젤레차우는 “기존문화의 타당성에 도전하고 전통의 기초적인 정경들을 문제시함으로써 학문의 지적인 전경을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공식적인 존재론을 뒤흔들어 놓았고 전통의 규범적 관념을 탈 중앙화하고 탈 합법화하였다.” 라고 말하였다. 아담은 코넬 웨스트의 말을 인용하여 후현대주의를 “반토대적, 반전체적, 탈신비적”이라고 요약한다. 장-프랑스와 료타르는 후현대주의를 메타네러티브들에 대한 불신으로 지적한다.
1. 후현대주의가 나타난 배경
1) 철학적 배경
서구의 사상은 전통적으로 이원론에 근거한다. 이성과 감각을 둘로 나누고 이성에 그 가치의 척도로 두었다. 이 사상의 맥은 플라톤에서부터 모든 철학하는 사람들의 주제였고, 때로는 양자간에 대립적인 양상으로 발전해 왔다. 플라톤은 이성과 감각을 나누고 감각보다는 이성이라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고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를 감각의 세계로 끌어들어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바꾸어야 한다는 일원론 사상을 표출했으나 이것 또한 감각이 아닌 이성에 무게중심을 둔 철학함이었다. 이러한 사상이 중세까지 이르러 인간의 이성의 절대화는 신과의 일치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 사고는 인간의 세계는 가치가 없음이며 저세상의 것만이 최대의 가치를 준다는 의미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실존에 대하여는 냉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를 뒤바꾸어 놓는 것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가 이성이 곧 인간 존재와 같은 것으로 되어버리고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성은 이데아였고, 초월자에게 향하던 것이었으나 데카르트에 이르러서는 생각하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외어버렸다. 이 또한 이성에 무게 중심을 실은 철학이었고 이것이 계몽주의 사조와 결합하고, 경험주의와 과학주의에 연결되었다. 다만 이성의 중심이 신이 아닌 인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의 자리는 사라지고 과학만이 인간의 모든 것을 충족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조에 진화론이 득세하여 더욱이 종교의 자리는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이 시대에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슐라이어마허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지만 시대적 산물인 인간의 사상은 인간 이성에서 벗어난 신학을 하지 못하고 자유주의의 아버지라고 별명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성주의 과학주의 시대와 대항하여 신의 자리를 외치던 외로운 투쟁은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조의 이성주의는 칸트 피히테 쉘링을 이어 헤겔에 와서 완성된다. 헤겔은 인간의 절대 정신이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임을 궁극적인 것의 완성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헤겔 좌파인 포이에르바하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반박하게 되고, 키에르케고르에 의한 실존철학의 시작을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니이체가 등장하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의 배경을 갖게 되는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니이체는 모든 가치들을 뒤집어 엎는 힘의 의지의 철학이다. 인간의 모든 사고와 실존들은 권력에의 의지가 숨어있는 것들로 보고 있다. 그는 “도덕의 계보”에서 양심이라는 근원을 밝히면서 모든 가치들의 근원은 가치 판단이 아닌 힘의 논리만이 있었고 선악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부정되어야 하고 삶의 긍정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성주의는 철학하는 자들의 힘의 의지의 표현이었고, 이것은 신, 초월자를 말하는 사제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방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겔런은 이성을 다르게 표현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영혼은 첫째 감각과 의도라고 말하고 둘째 감각(동물적 상태) 로 말하며 동물과 비슷한때는 조건반사때이다. 이성이라는 것은 감각과 감각을 연결해주는 사이의 연결쇠에 불과하다. 다시말해서 인간 개체의 감각과 감각 사이에는 하나의 작은 틈이 생기는데 이것에서 이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탈중심적 인간으로 바뀌었다 . (탈-진리, 탈-체계)
플레스너(plessner) : es - zentrisch (탈 중심적 성격, 탈 진리, 탈 체제) 라고 한다. 여기서 탈 현대와 현대에 대한 논쟁은 이성에 대한 논쟁이다.
메들로 퐁더는 몸과 대상은 다르다. 라고 한다. 진리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 폭력, 임이성을 수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탈 현대, 탈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이성의 대한 관념이 고정화 되어서 이성은 감각을 지탱해 주는 힘이요, 모든 진리를 생각하는 근원으로 이성에서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만이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해석되어지지 않은 진리들이 무수히 많은 것을 이성은 경시여겼으며 오히려 이성은 인간의 감각과 감각의 개체의 연결 부분의 틈에서 생겨나는 부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정치, 경제적 배경
상업광고와 인기정치의 역할, 큰 전쟁을 통해서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룰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인간을 죽이는 전쟁을 통해 인권에 대한 이성주의 과학주의의 불신
2. 후현대주의 사상가들
1) 롤랑 바르트
“영점으로 씀” 이라는 글을 통해 탈구조주의 이론 전개한다. 이 책은 스타일이 없는 글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근원은 니이체에게서 보인다. 니이체의 글쓰기 방식은 경구(aporism)을 사용하여 글쓰는 자체에도 고정화를 없애려 했다. 바트트 역시 그의 글 조차도 또 하나의 스타일일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중립적인 글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바르트의 해석학은 인습을 타파하는 작업으로 신화에 대한 해석을 통해 결국 신화는 정치적인 중립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좌파의 시각으로 보면 제도권의 이권을 위한 도구라는 점이 파악된는 것이다. 이것을 연결하여 탈자연화를 더 깊이 전개하여 기호를 통해 자연스러운 순진한 진리 주장을 위해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즉 중산층의 가치 제국주의 이권등에 대한 기호들이 명백한 의미를 뛰어넘어 이권을 표현하는 기호체계의 일부 기호는 하나의 사태에 대한 순진한 진리주장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기호는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한다는 미명으로 보이지 않는 이권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언어또한 기호로서 단순한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습을 표현한 것으로 초언어라는 말을 쓴다. 초언어는 다른 초언어에 의해 조사되고 폭로되고 이것이 계속해서 비판에 비판을 낳는다. 이것을 기호의 층이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기호학의 두 번째 관심으로 사회적 행동의 역할을 말한다. 교통신호, 화환을 통한 언어.
바르트의 “비판과 진리 중 라치네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레이몬드 피카드의 비판에 대하여 해석학적 선택에 의존하여 저자의 상황은 바뀌지 않지만 독자의 상황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작품의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해석학적 의심에서 언어학적 의심으로까지 나가 언어체계의 층이 무한하기 때문에 표면적인 언어 배후에 있는 이권적 의미를 폭로한다는 것 자체도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객관성을 지닐 뿐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s/z"에서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네러티브 문법의 보편성을 거절하고 발자크의 ”사라지네(sarrasine)"를 분석하면서 저자적 본문과 독자적 본문으로 나누고 언어외적 목적을 가지고 있는 언어를 사용한 저자와 순수한 언어적 활동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저자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텍스트의 언어는 규정된 대상이 아닌 의미를 생산하는 작업활동이며 텍스트는 멈추지 않고 피지시물의 의미를 무한히 연기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는 하나의 종이가 되었고 텍스트에 저자는 해체되어버리고 모든 가능한 의미의 복합성 속에서 “놀이를 한다” 즉 텍스트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보다 그 속에서 누구나가 의미를 산출해가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와는 별개이고 그 독자들에 의해서 조종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 작크 데리다
해체주의라는 것은 구조를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모든 체계는 불완전성과 모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것처럼 행사하기 때문에, 모든 체계를 거절하고 불신한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 진리와 진리사이에는 틈이 있다. 그 틈 사이로 흘려보낸 것들이 있는데 이것 또한 진리일 수 있는데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진리라고 생각했던 모든 체계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데리다는 니이체와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플라톤 이후의 철학의 전통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초월과 내재, 이성과 감각, 영과 육 등의 이원론적인 상황에서 전자의 것들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것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실존적인 것들에 대한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이상학, 흰신화는 백인들은 자기 자신이 이성이라고 부르기를 원하는 보편적인 형태로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하이데거는 양자의 대립가운데 전자의 것이 진정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존재가 아니었고 존재자에 대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존재 추구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하는 의미에서 니이체의 “우상의 황혼”을 인용하여 “증발하는 실재의 마지막 구름 조각” 이라는 말을 했다.
데리다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영향을 가지고 니체의 영향을 받아 텍스트는 “자취들”과 “진로들”이라는 말을 했는데 전자는 모든 텍스트에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또다른 자취들로 가고 있는 의미에서 진로들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바닥없는 장기판과 같은 것이다.
데리다는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진리는 유도적인 메타포가 고정된 것에 불과해서 착작적이며 교리와 같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체의 구조와 의미와 체계들의 개념을 탈 중앙화를 해야 한다고 한다. 사상사는 센타들의 연속으로 되어있다. 그 센타들은 메타포에 불과한 것인데 이것을 중심으로 교리, 체계, 의미등이 조직화되었고 이것이 진리라고 받아드렸다는 것이다. 그 센타와 센타 사이에 더 많은 진리들이 흘러 내렸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센타들은 의식의 세계였고 그것에서 제외된 것이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그 무의식이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자취들(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 흔적들은 “신비한 집필지”라고 비유를 들어 말한다. 그 자취들은 결코 의식 속에 있지 않으며 과거의 자취들의 시리즈 속에 들어 있는 과거는 절대적인 과거에 있으므로 기호는 자취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허셀의 기호이론을 비판하지만 영향을 받는다. 또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는다. 하이데거는 언어에는 개념적 언어와 시적 언어를 구분하다. 개념적 언어는 인간의 삶과 개념을 서술하는 기능적 언어로서 과거에 있었던 곳으로 우리를 던져 놓음으로 그 안에서 맴돌게 만든다. (피투된 언어), 시적 언어는 기다림의 언어로서 우리를 열림 자체로 인도한다. 개념 언어는 우리를 열려진 과거로 퇴행 시키지만 시적 언어는 우리를 앞을 향해 인도한다는 약속을 지닌다. 데리다는 언어라는 것은 과거의 자취들과 미래의 진로들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시리즈로서 ‘지움’ 하에 배치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지움이라는 틀은 끊임없이 열려진 과정으로 임재보다 부재를 중시함으로 존재에 대하여 논하면 존재는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데리다의 존재는 부재를 전재하는 존재이다.
데리다는 이런 면에서 존재를 합리화한 데카르트를 비판한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서, 생각하는 나도 존재하는가? 의심을 해볼 때 의심하는 자신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므로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라고 말했는데, 데리다는 생각하는 나는 지워질 수 밖에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한 것을 비판한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의미 = 차이 = 연기” 라는 것을 이어받아 차이성의 원리(차연)를 말한다. 차이성이란 ‘개’가 dog, hund, dhien, 등으로 사용된다. 다시말해서 오렌지 색은 빨강과 노랑의 차이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차이성이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라면 기호들 간의 차이성에 집중해야 한다면, 차이성은 의미를 연기하게 되고, 의미 해석에 있어서 최종 포인트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9월 15일
글은 말에 우선한다. 화자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말이 글에 우선한다고 생각한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다. 이것을 뒤집어 엎었다. 말 중심주의라고 표현하면서 데리다는 이것을 해체한 것이고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각 요소는 오든 과거의 자취들이 글로 나탄난 것이고 끊임없이 유동적인 흐름의 일부이기 때문에 말하는 자가 있다고 해서 그 의미가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text가 중요해서 text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독법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후현대주의에 대한 평가
1) 방법론과 세계관의 혼돈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세계관으로 만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기호학적인 방법론을 확대하여서 세계관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후현대주의는 기호학적인 방법으로 어떤 한계를 뛰어넘어 완전하다고 본다.
2) 주관적인 인식론이 존재론으로 바뀌었다. 자기 중심적인 주관적 인식론이 존재론이 된다면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큰 문제를 일으킨다.
3) 화자로부터 분리된 언어관을 갖는다. 저자가 없는 글도 더 중요시했다. 화자가 임재함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기호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죽은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사용할 때 의미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상호 주체성이 중요한데 이것을 해체했다. 4) text 놀이를 일반화 시켜 적용했다. 성경을 놀이로 할 수 없다. 해석학적 방종으로 윤리적인 쾌락주의에 빠진다. 공식적인 법문서를 가지고 text play를 할 수 없는 것이다.
5) 현대주의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자아가 이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파악 할 수 있다는 것을 반대하여 이것은 현대주의의 위기로 말하였고 이것을 해체로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기독교를 부정하고 인본주의의 한계에서 넘지 못하였다.인식론의 자율성의 문제였다.
6) 서구 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혼돈을 가져왔다. 서구 사상의 이원론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바울의 문자는 죽이고 영을 살린다는 의미는 구사적이며 종말론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문자는 율법을 의미하며 율법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새마음, 새언약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서구 사상의 이원론과 기독교 사상과 동일시 해버렸다.
3. 후현대주의적 성경해석
9월 22일
*** 이중표 목사의 별세 신학적 설교
중요한 것은 관습 타파를 하는 설교이다. 내가 죽으면 나도 살고 모두 산다.
해석자의 생활 강해자의 별세 순교자적 자세로 싸우는 것, 우리의 싸울 대상은 마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승리하였다. 라고 말했는데 부분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완성될 그날까지 마귀와 싸워야 한다.
목회의 별세 : 목회 할 때에 어렵게 하는 사람이 사라질 수 없다. 목회의 현상은 제일 힘든 사람을 품을 수 있다. 자신이 죽어야 품을 수 있다. 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렵게 할지라고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들이니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 교인들과 싸우는 목회를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받고 어려운 성도를 바라보니 품을 수 있다. 제일 힘든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십자가를 고백하는 것이다. 갈2:20,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가정의 별세 : 벌거벗고 편안히 살 수 있는 것, 술을 많이 먹는 아버지를 업고 대화 할 수 있는 것, 예수 안 믿는 부모에게 목회의 스승으로 배울 수 있었다. 가정의 행복이 없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하더라고 가족들이 갈등을 겪는다. 이중표 목사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었는데 바꾸어서 가정에 대한 소중함으로 바뀌었다. 아내는 최고의 교회라고 본다. 자녀를 제자로 삼는고 양육해야 할 대상, 아내와 자녀를 목회해야 할 대상.
탐욕에서의 별세 : 성철 스님의 사상을 배우고자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신길을 배우고자 한다고 생각하여 성철 예찬같은 예화를 들고 있다. 탐욕에서 벗어난 것.
물질에 대한 별세 : 불쌍한 자들에 대한 마음, 목회자들에 대한 물질관의 별세, 장기 기증에 대한 별세, 화장이 비 성경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무덤조차 남기지 않겠다고 한다. 신학교 교수들의 별세
성경 해석자의 눈물 : 1)주님의 눈물 : 가슴 깊은 곳에서 흐르는 주님의 모습을 체험했다고 한다. 내가 네 한테서 흘린 눈물이다고 하신다. 현대는 눈물이 메말랐다. 사랑하는 마음이 울게하고 그 눈물이 주님에게로 달려간다. 할머니의 음료수 한 개가 “피의 향유”라고 본다. 영적 지도자는 눈물을 흘리게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울고 웃기고 울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고 한다. 2)민중의 눈물 : 지도자는 민중의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 로메로 주교를 예를 듦, 문익환 목사는 역사 현장에서 순교자의 길을 갔다. 여기서 민중은 계급 투쟁적인 것이 아니라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다만 가난하고 소외 받은 불쌍한 인생들을 말한다. 로메로는 민중에 의해서 전도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민중을 전도한 것이다. 민중의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고, 민중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고 보는 것은 민중 신학적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 한신에 들어갈 때 민중에 대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갔다. 예수님도 민족을 위한 눈물을 흘렸다. 민족의 가장 큰 적은 죄였고 그 죄와 싸워야 한다. 분단된 조국을 애통해야 한다. 무기 아래는 망하고, 눈물아래은 망하지 않는다. 민주화 “본훼퍼가 암살단에 가입한다.” 에 대한 눈물, 청치 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나라를 말한다.
성경 해석자의 communication : 말씀을 체험, 고백적, 전달 방식이 좋다. 목회자는 좌측뇌를 많이 활용하라.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느낄 수 있게 한다. 상상력으로 하는 설교 워런 위어스비, “아히도벨의 충고, 후세의 충고” 전자는 좌측, 후자는 우측뇌를 활용하여 말을 들으면서 느끼게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목사는 좌측뇌보다 우측뇌를 사용한다. 무형식의 형식, 충격을 주고 마음을 풀어주는 -영적 지도자는 하늘이 세우고 하늘이 죽인다-, 목사는 배우이다.- 예수를 보여주어야 한다. 설교는 죽어서 들어가는 것이다.
밥상 목회 : 밥상 공동체,
유모어가 많으면 본문이 죽는다. 유모어는 적당히 사용해야 한다. 중요한 것으로 유모를 사용하면 안된다. 존 스타트는 지나친 해악을 주의해야 한다. 지도자와 지배자의 차이, 상품과 작품, 목회자는 교인들의 유모, 양모, 식모이다. 출생과 중생, 온순과 온유,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자신의 허물을 보여주지만 씻어주지는 못한다. 배움터, 일터, 세움터, 고역과 교역과 성역, 물성과 영성,
상대성을 갖는 별세적, 후현대주의의 인습타파는 잘맞는 것이다. 일상성을 깨고 친근하게 맞아들이고, 깨면서 끌어들이는 스타일.
별세신학이 대속성이 미약하고 원형공동체에 약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별세적으로 한국교회에 적용되고, 성경해석자로서 별세적 목회는 하나님과 가까워 있다. 별세를 통해 한국 교회의 갱신, 참신과 회복을 위한 기분 좋은 갱신, 복음적, 육정을 죽이고, 현대인의 불신과 거부감에 대하여 복음적으로 갱신.
9월 29일
*** 옥한흠 목사의 성경해석과 설교
권성수 “21세기 신학과 교회” 중에서
-An Awakening Preacher: A Hermeneutical. Study of Rev. Oak, Han-hum's sermons-
(각성하는 설교 : 옥한흠 목사의 설교에 대한 해석학적 연구)
1. 설교의 개괄 pattern
5분은 주제 소개, 20분은 설교 본문에 대한 해석, 10-15절은 적용으로 청중을 포위.
2. 개혁주의적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설교
10월 13일
개혁주의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 해석하여 설교한다. 그러나 부당한 전체(부당축의)를 한다. 다른 의미를 끌어 모으는 것(한 단어의 의미가 여러 가지 인데 문맥 속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부당축의(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는 한 단어의 모든 의미를 포괄해서 그 단어에 덮어씌운다. (179쪽) 제임스 바르가 말하기 부당한 정체를 말한다. 마6:14-15, 마4:22에 단어가 반복 사용되었는데 그의미는 다르다는 것이다. 옥목사님은 마6:14-15에서 용서를 그물을 버리는 것처럼 형제의 잘못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단어가 같아도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주14번에서 바울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인데 아날뤼시스는 사전에서 많은 의미들이 있는데 “천막을 거두는” 의미로 사용한다. 옥목사님은 여기에 4가지 의미를 다 덮어씌운다. 짐승의 멍애를 지우는 것을 짐을 벗은 동물로 사용한다. 죄수의 발에서 쇠고랑을 풀어준다는 것으로 사용하고, 텐트의 끈을 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배의 닻을 올리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즐거운 항해를 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설교한다.
또한가지 “어원화의 실수(the root fallacy)”(180쪽) 어원을 찾았을 때 그 단어가 당시에 쓰일 때 의미가 바뀌었을 수도 있는으면 당시의 의미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어원의 의미로 사용하면 잘못된 의미가 된다. 185쪽에서 걱정, 염려의 어리석음의 설고에서 "메림나아우“에서 물어뜯어 괴롭히다. 목을 물어뜯어서 질식시켜 죽이다. 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본문에서 나오는 것은 헬라어 단어인데 영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실수이고, 영어의 어원을 찾아가서 의미를 해석한다.
이러한 실수는 설교자는 강단에 서면 명쾌하게 하려는 의도이지만 성경을 해석하려면 그래서는 안된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모세 실바의 칼빈주의적 해석학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다.
1). 설명의 탈월성과 명료성 2). 상식 3). 신학과 주석의 불가불리성 4). 성경 해석의 님의 주권성
이것으로 볼 때 한국의 가장 탁월한 칼빈주의적 해석학에 따른 설교자다.
3.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로서 탁월성이 있다.
설명하고 적용하고, 직감적이고, 구체화시키며 생활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영광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여 설교할 때 (182쪽) 칼빈의 말을 던지고, 모세의 예를 들고, 유명한 사람들의 위험성,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위기, 설명한 후에 영광을 돌리는 실제적 방법으로 들어간다. 1)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2)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같이 살아야 한다. 3)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4)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것을 기뻐하시기에 모여야 한다. 다른 형제들을 모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5)상실된 사람들에게 전도해야 한다.
이것이 강단 해석의 중요한 점들이다. 삶의 터치를 해주어야 한다.
184쪽 성경본문의 지평과 성도의 지평을 융합시키는 말, “어찌하란 말입니까” 다리를 놓는 설교이다. 알레고리칼한 해석을 아주 드물게 하기도 한다. 왕하3:16에서 “골자기를 개천들을 많이 파라” 라는 말에 대해서 성령 충만을 위한 준비를 하라고 한다.
심리적인 상태를 설명한다. 바울의 죽음에 대한 설명한다. (딤후4:6-8) 그리고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질문으로 도전하고면서 생활로 끌고 들어간다. 바울처럼 살고 싶으면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슈바이쳐를 소개한다. 주22번 예수님을 1세기 착각한 유대 묵시가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묵시가라는 것은 이세상이 망하고 새로운 새상이 올것이라는 것이 묵시가인데 예수님이 돌아가고 있는 역사 앞에서 역사를 막아야 종말이 온다고 생각하여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깔려서 지금도 돌아간다. 그런데 그것에서 배울 점은 예수님의 희생을 배울 점이다. 그러므로 실패한 묵시가의 희생을 배움으로 선교사가 된 것이다.
바울의 삶과 슈바이쳐의 삶을 소개하고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러면 우리같이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로 회중으로 들어간다.
187쪽에서 스펄전은 창문을 적절한 예화로 보고 있는데, 옥목사님도 적절한 예화를 사용한다. 행4:12를 설교하기에 예수 안믿는 것이 무서운 암이라고 표현한다. (188쪽) 노루목을 잘 알고서 교인들이 도망하는 길을 잘 알고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삶의 현장에서 다각도로 알아야 한다.
4. 예언자의 소추와 제사장의 치유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189쪽)
교인들의 상태를 직선적으로 지적하기를 날카롭게 한다. 교회의 골치 아픈 사람이 누구입니까? 고집쟁이가 제일 골치 아프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이라고 하면서 ----- 라고 하는 지적이 성도의 영적인 상태의 정확한 진단에서 나온 것이다. 고름을 짜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고, 그 고름이 짜졌는지 확인한다. 진정한 선지자의 입장으로 지적하는 것은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날카로운 지적이 깊은 치유를 하는 것이다. 냉소적인 비판이 아니라 돌보는 목자의 가슴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독약을 독약이라고 말해야 한다. 지적하고 치료하고, 율법을 말하고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치료하는자의 책망이 필요하다.
5. 감각에 대한 호소를 한다. 허공에 매달리는 설교가 아니다. 추상적인 철학 강의처럼 하지 않는다. 달변가가 아니다. 많은 어휘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문학에 제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깨우는 설교를 한다. 그 이유는 감각적인 호소를 하는 것이다. 단어 사용이 감각적인 호소를 해야 한다. (194쪽) 웅변을 멸시하는 웅변을 한다. 거창한 신학적인 용어를 가지고 하지 않음, 신학적인 안개로 설교를 하면 안된다. 단문을 사용한다. 수사적인 질문을 던진다. 비교와 대조로 밝힌다. 성경을 분해하면서 성경을 죽이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 (195쪽) 워런 위어스비의 도전 “설교자로서 신학교 강사로 나는 지쳤습니다. 강단의 해골을 들고 올라가는 것에 지쳤습니다” 해골을 들고 올라사서 시체를 양성하는 설교를 한다고 한다. 상아탑에서 나와서 시장으로 나가시오, 즉 생활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문적인 용어에서 벗어나 생활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6. 성령의 불
강단에 올라가면 불이 올라온다는 것이 한국 설교의 특징이다. 한국 목회자들의 표현 방식이다. 강단에 올라가는 동시에 불을 토한다고 표현한다. 학문적, 해석학적, 수사학적으로 잘 닦여 있다 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설교는 금물이다. 설교를 듣는 동안에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을 때 불이 되는 것이다. 교인들의 죄 때문에 괴로워해야 하고, 심령이 애통스러워야 한다. 옥목사님은 불과 같은 성령의 임재를 감지할 수 있다. 죄를 회개하기를 요구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할 때, 부도덕과 방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할 때, 피조물의 청지기가 되라고 요구할 때 성령의 임재를 느낀다.
자신의 불을 유지하는 방법(198쪽) 웅변과 지혜에 인기를 의지하면 몰락한다. 한편의 설교를위해서 수십시간의 진통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편의 설교에 목숨을 건다.
7. 개인적인 터치를 한다. 말씀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삶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설교를 할 때 공감을 한다. (200쪽) 찬송과 가스펠을 부를 때 감동과 감격에서 하는 것이다. 창13:17-19에서 환경 설교할 때 샴프를 쓰지 않고, 이면지를 사용하는 것 등을 설명한다. 이것은 복음으로 의식하게 한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갈등을 고백하고, 노동자를 보고 아버지를 생각한다고 한다.
10월 20일
역사적 비평적 방법의 영향을 받았지만 학회에서 부정적으로 흘렀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 문학적인 시각으로 많이 본다. 그런데 성경을 문학으로 보고 강조하면 문제가 일어난다. 스토리(이야기)를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상상력이 특징이 되는데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읽고 듣는 자들의 반응을 끌어낸다는 것의 주안점이 문제다. 그럼에도 성경을 문학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스토리를 강조하면서 성경의 역사성을 약화시키는 문학적 접근법이 위험하다. 성경이 역사적인 사실성을 약화시키면서 성경의 스토리를 말하면 성경의 권위가 약화된다. 상상력을 강조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성을 약화시킨다. 문학적인 부분을 사용은 하지만 주의하면서 사용해야 한다.
문화적 접근법이 요즈음 나오고 있다. 여성안수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감독이 여성이 없는 것은 문화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문화는 달라졌으므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보면서 성경의 규범적 경향을 약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로즈메리 루터라는 여성신학자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많다고 한다. 남성 중심의 내용이 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시 써야 한는데 제 3약을 써야 한다. 여성 신에 대한 내용과 여성의 권위를 다시 인식하는 것을 다시 써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 He를 S/he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남성을 중성을 만들든지 여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현대주의, 문학적, 문화적인 접근법이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약화시킨다. 성경이 영감으로 된 무오한 책이라고 하는 성경관이 정통적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경관으로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어진다는 성경을 패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사도들의 성경관, 칼빈, 웨스터민스터, 구 파, 비비 워필드 등의 성경관을 만든다. 이것이 국제 성경 무오 협회 (international Council on Bible) 가 재 천명한다.
장신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 성경의 권위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권위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하신다. 그러나 오류가 있다고 한다. 특별히 과학과 역사부분에 오류가 있다고 본다. 감신은 기독교를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과 접목시키려 한다. 주로 문화적인 양상을 띤다. 변선환, 홍정수, 윤성범 교수등이 있다. 이것이 요즈음은 종교 다원주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다음에 상생 신학으로 나타난다.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유교, 흰두교 등과 공존하자는 것이다. 그 나름대로의 진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상극으로 가지말고 상생으로 가자는 것이다. 한신은 정치경제적 현실 속에서 접목시킬려고 한다. 학과들이 많이 증설되어서 경제, 윤리 등의 분야에 관심이 극대화 된다. 안병무의 민중신학등이 그러하다. 이로한 분위기 속에서 성경관을 논해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우리의 비전 신학적 정체성은 21세기가 상대주의 시대, 다원주의 시대에 잡다한 신학들이 나오기에 우리는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년 후에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다. 성경무오에 대한 분위기에서 75쪽에 무오에 대한 정의가 있다. 구 프린스톤 학파의 워 필드의 성경관을 다루면서, 동류설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이 100%를 성령의 영감으로 전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단어까지도 그러하다.
워필드의 성경관에 77쪽, 성단창문색유리를 비유로 들었기에 워필드도 오류를 인정했다고 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본래의 건축가가 특수하게 유리를 고안해서 본래의 색조와 색체가 분명하게 그대로 살리게 하였다고 말한다. 인간 유리를 통과했지만 하나님의 뜻이다. 78쪽에 원본의 영감과 무오를 말하는 성경관은 성경의 자증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요10:45에서 성경은 패할 수 없다고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 논쟁에서 말한 것이다. 이것은 생명으로 건 논쟁에서 성경은 폐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 성경의 절대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자증에 의해서 무오를 주장하는 것이다.
워필드는 성경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내증을 약화 시켰다는 비판이 나온다. 칼빈은 두기둥, 성경과 성령의 두 기둥 중에 약화시키는 어느 하나도 없다. 워필드는 성경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대항해서 성경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경을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성경의 강조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절대 권위는 놓치면 안된다. 그러면서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를 강조해야 한다.
1978년도에 국제 성경 무오 협회의 성명서을 발표한다. 353쪽 ICIB 협회의 주장과 부인을 알아야 한다.
1조
2조
3조 칼 바르트의 실존주의 성경관을 비판, 부활을 설명할 때 사실성 보다는 부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실재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실재적으로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고 오늘날에 의미로 부딪치는 것을 강조한다.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인간의 개인에게 종속시키는 잘못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준인데 개인에 종속시킨다. 이들은 성경이 계시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한다.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4조 인간의 언어와 문화를 사용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이 있기에 오류가 있지 않다.
5조 점진성과 종료성을 강조(씨와 모판) 창세기에 3:15절에 복음이 들어있고 계시록까지 가면 환하게 밝혀진다. 앞과 뒤에 충돌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부딪힘이 없다.
6조 신적 영감을 주장, 부분적인 영감 반대, 전체 영감, 축자영감,
7조 성경의 기원, 성령이 인간 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심, 방법은 신비, 예수님의 완전한 신적, 인적 관계의 신비처럼, 성경 영감의 신비성, 성경은 작가의 영감 정도가 아니다.
8조 유기적 영감, 인간 저자의 개성, 문학 스티일을 사용하심, 유기적 연합
9조 성경 저자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앞으로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들의 영감의 내용을 잘 모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저자들은 전지하지 않다. 창조자와 피조물은 천국가도 동일하다.
10조 원본을 말함, 지금은 사본밖에 없다. 사본을 가지고 원본을찾아가는 것이 사본 비평이다. 네슬26, 27판은 거의 원본과 가깝과 같다고 말한다. 유오자들은 원본이 없으니 유오하다고 말한다. 성경이 성경을 무오하다고 하니 무오하다.
11조 불오와 무오
12조 역사 과학의 오류가 있다고 본는 것을 부정, 창1-11장을 가지고 하는 말이 대부분인데 이것을 역사냐 아니냐 하는 문제의 논쟁이 심각하다. 칼빈의 성경관도 맞이 갔다. 역사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지구 연대의 문제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성인 우주로 창조하심, 역사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책도 아니고 과학책도 아니다. 성경은 통상적인 표현을 쓴다. 눈에 보이는데로 기록한다. 성경의 4모퉁이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이 평편한 것으로 말한다. 성경은 전문술어로 말하면 안된다. 역사와 과학책은 아니지만 역사와 과학 부분도 역사적 사실이다.
13조 성경 무오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성경에 성경 무오라는 말이 없으나 의미들이 나온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없으나 내용은 나타난다. 성경은 자체의 용법과 목적에도 무오이다. 전문성이 없으나, 철자법의 불규칙한 것이 있으나 문제되지 않는다. 통속적으로 되어있다. 사탄의 말은 사탄의 말로, 허휘적인 것은 허위적인 것으로, 병행적으로 자료의 선택이 다양하다. 인용을 자유롭게 다양하게 한다.
14조 통일성, 내적 난제가 있으나 오류는 아니다.
15조 성경의 절대 권위를 예수님이 말하셨다.
16조 교회 역사의 본질 - 도날드 불레쉬의 『holy scripture』등에서 의하면 교회의 주류적 입장으로 무오를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교회의 주류는 예수님 어거스틴 칼빈 칼 바르트 로 연결한다. 구원을 주는 것은 전혀 오류가 없고 사소한 것은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구 프린스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다가 보니까 무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콜라 개신교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17조 성령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다. 성령이 성경을 증명한다.
18조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문법, 역사, 문화, 신학적 해석 여기서 상대화 시키지 말라, 비 역사화 시키지 말라, 삭감해도 않되고, 저자권에 대하여 부정하면 안된다.
19조 성경의 무오를 붙들고 있으면 보물을 들고 있으니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무오하다면 무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오를 말해도 구원은 받는다. 성경무오가 생활로 나와야 한다.
79쪽 오해
가연설적 오해 : 신성을 인정하고 인성을 부인한다고 이해하는 것(Docetic) 80쪽 워필드는 성경을 100%인간, 하나님의 말이라고 말하는 동류설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인성의 완벽함을 말하고 이것은 모두 신비적인 것이다. 성경이 인간이 쓴책임을 인정하지만 인간이 쓰면 항상 오류가 들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고 해도 오류가 없는 말을 할 수 도 있다. 오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는 것의 필연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성은 유한성은 있지만 반드시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셨기에 오류가 없다.
베르카우 : 성경의 개념을 적응이라고 말한다. 베이비 토크를 하는 것, 아버지가 자식의 수준으로 내려서 대화하는 것,
학문적 원시인 취급을 하는 사람. 성경 무오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83쪽 디에이 카슨은 성경무오를 말할 때 요즈음 복음주의 학생들이 월씬 똑똑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성경 무오를 않믿으니까 교회의 부흥이 없어지고 신학교가 학생이 없으니 아무나 뽑고 공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헬라어, 히브리어, 등을 요구하기에 똑똑하다. 84쪽, 88쪽
연역적 성경관의 오해 ; 성경의 사실을 놓고 도출하면 오류가 나온다고 본다.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연역적 방법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면 않된다. 성경의 무오를 말할 때 귀납, 연역 복합적으로 사용한다.
교회(91쪽) 성경 무오가 교회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교회의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무오가 주류라고 반증한다. 루터는 정경관은 우리와 다르지만 성경관 은 같다.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목숨을 걸고 절대 권위를 인정했다. 칼빈은 행7:14-16절에 해석을 말하면서 오류를 말하는 데 서사자의 오류라고 말했다. 예레미야의 이름이 어떻게 기어들어 온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절대 칼빈은 성경의 오류를 말하지 않는데, 원래 예레미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10월 27일
*** 형식적 성경관이라는 오해 (98쪽)
기능주의 성경관 신앙과 행위에 관한한 성경에 오류가 없다고 하지만 과학과 역사에 관한한 오류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기능과 형식의 이분법을 말하고 있다. 기능과 형식이 분리될 수가 없다.
*** 과학적 도구 무시한다는 오해
이것은 역사적비평적 방법에서 18세기 계몽사조에서 나온 것으로 이성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후현대주의로 넘어가면서 이것은 비판은 받고 있다. 역사비평법에서 트뢸취가 자연적인 전제를 제시, 성경은 비판의 대상이다. 성경도 일반 다른 책들처럼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비판받을 때 유추의 원리를 사용해야 한다. 과거 성경의 기록을 현재 경험에 의해서 유추를 해야 한다. 라고 한다. 셋째 인과율을 따라서 비판, 원인없는 결과가 없다고 본다. 원인은 자연주의적 원인이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방법을 베제하기에 자유비평을 한다. 성경의 자체충돌을 비판하고 성경 이전에 기록된 자료들이 합쳐졌기에 서로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Q 문서가 있었다고 본다. 또 양식비평을 한다. 기록된 문서 이전에 구전에 관심을 갖는다. 문서 이전에 말로 이어진 것이다. 마1:21-28장 까지 한자리에서 이어진 것이 아니다. 구전은 단위들이 있다. 그 단위들이 양식이 있다고 한다. 신화, 전설, 경기, 탄생, 순환, 치유, 부활 등의 form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삶의 정황이 나타나 있다고 말하다. 이 부분을 분석하는 것을 양식비평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편집비평이 있다. 각 저자에 신학에 초점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모든 것을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라고 한다.
성경 기록 이전에 문서가 있었는가? 있다. 누가가 많은 자료가 있었고 목격자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의 입장은 자료가 있었지만 자료의 충돌은 있지 않다. 성경에 들어온 이상 모순이 없다고 본다. 양식비평도 삶의 정황이 있고, 당시 신앙공동체의 고백이 있다. 그런데 이 신앙공동체의 고백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틀리다고 본다. 마태복음의 기록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원 역사적 예수로 찾아가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라사데 라고하면 예수님이 하신 것이다. 성경의 양식이 분명이 있다. 그러나 신화라는 양식은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문학적인 요소를 받아들이지만 성경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도 편집비평을 말하지만 성경의 오류를 믿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성경 연구에 도움이 되면 사용을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오류를 믿지 안는다. 우리는 방법을 취하지만 그 도구는 중립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우리의 입장은 무오함을 믿는 것이다. 사용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들어가면 그 도구는 그 가치관을 가진사람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님의 절대 무오한 성경의 가치관이 들어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편집비평을 사용한다. 그 전제는 우리는 초자연주의적인 것이다. 마태마가누가에 대한 특징을 보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음을 말한다.
로버트 건드리는 각 복음서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목동들이 방문한 것을 마태는 동방 박사점성술사로 뜯어 고쳤다는 것이다. 이사람은 편집비평을 잘못해서 사용한 것이다. (106쪽) 스톤하우스는 마태마가누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사람도 편집비평을 잘했고 충돌을 이야기 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을 그대로 보았다. 이처럼 방법은 같아도 그 전제가 제대로 해야 한다.
*** 해석학적 획일성에 대한 오해
한 사람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해석학적 획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가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 성경 해석에 대한 우리의 입장
1. 성경의 권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수호해야 한다.
2. 성경 무오를 견재하는 경우 학문적으로 공세를 취해야 한다.
3. 생활을 변화시켜야 한다.
4. 생명성을 살려주어야 한다.
제 3 장 성경해석의 역사
성경해석의 역사는 성경해석의 오해한 역사이다. 역사의 중요성이 강하다. 역사를 모르면 실수한다. 성경의 해석의 역사를 알야야 잘 깨닫는다.
유대인들의 성경해석
랍비유대주의 해석 : 에스라에서 바리새주의 까지 힐렐과 샤마이 해석 힐렐은 미쉬나를 6등분한 6법 전서라고 한다. 육법전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전통적인 것으로 주님을 만나는 일을 못하게 했다. 너무 구체화된 이유이기 때문이다.(책 참고) 미드라쉬가 성경해석법 7법칙 힐렐의 성경해석 법칙을 구체적으로 잘했지만, 힐렐이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다.
필로의 해석은 헬라문면권에서 철학적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영향으로 알레고리칼하게 했는데 구약해석에 적용했다. 모세 오경 전체를 알레고리 시스템하게 했다. 이것을 그랜드 알레고리로 했다. 호머의 오디세이를 지의 추구 과정, 백과 사전적으로 해석하는 등을 적용하여서 아브라함이 지를 찾아가는 것이고, 하갈은 백과 사전적인 것이고 사라는 하나님의 것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고의 부름(124쪽) 샤마이는 철저한 (121쪽) 3식법칙 아담에 성경이 다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필로의 해석 :
쿰란의 해석 :
11월 3일 화요일
122쪽 성경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유대인들의 해석을 소개했다. 유대인들중에 정통해석자 랍비들의 해석을 소개했다. 오늘은 디아스포라를 살펴본다. 필로, 분파주의, 종말형성 공동체가 있다. 정통 유대주의 해석학은 힐렐과 샤마이 가 있다.
필로는 헬라 문명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약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쿰란 공동체는 사해 서북의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메시야 진통시대에 살고 있는 선택 공동체로 생각해서 구약의 예언을 자신들과 연결해서 해석했다. 쿰란의 의의 교사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인다. 카리스마적 미드라쉬가 절대적이 되었다.
랍비들은 구전, 필로는 헬라적, 쿰란은 자기들 중심으로 해석
*** 오리겐은 연속주석, 해석학을 시작했고, 축자영감의 70인경, 외경까지 넣는다. 그래서 알래고리칼 시스템화 시킴, 신성모독을 하지 않기 위해서 알래고리칼을 할 수 밖에 없다. 문자적으로 하면 비도덕적인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유다와 다말등 구체적인 것들.129쪽, 알래고리칼 해석을 증명, 셋째로는 삼분설을 주장, 넷째 불완전한 언어학적 지식 때문에, 다섯째 구체적인 예는 아브라함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아래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비젼으로 말한다. 사마리아 여인의 물가, 모세 실바의 평가 변증적 신학적 상황에서 있기에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알래고리칼 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적용이 어렵다고 말한다.
132쪽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학파,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 그와 동료인 디오도는 독창성이 있었고, 크리소스톰은 통찰력이 있었다. 목회자로서 뛰어났다. 영혼에 대한 애정과 대중적 설교, 대중에 익숙, 문자적 의미, 문맥을 강조, 성경의 이해해의 보조자료를 사용, 문자적 예표론을 알았다.
어거스틴의 해석은 성경을 해석할 때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 몰랐다. 티코니오코스의 법칙을 따름. 신비와 몸, 주님의 몸, 약속과 율법, 종과 속, 수자, 총괄이론, 악마의 그의 몸등이 티코니오스의 법칙을 인용해서 해석했다.
중세의 해석 :토마스 아퀴나스 4중 어미를 사용, 문자, 풍류(신앙), 도덕(삶), 천상적(하늘) 해석, 교부신학이 주석에 근거했다. 니콜라스는 중세의 4중의미, 중세 주석가의 예외자, 어학적 능력이 없었다. 변증을
루터와 칼빈 : 루터는 36살까지 헬라어 히브리어를 몰랐으나 4년간 히브리어를 하고 고해성사가 틀린 것을 발견한다. 로마교회의 기둥인 메타노가 고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40세 이후에 성경의 최고 권위로 삼았다. 성경의 충족성을 말했다. 4중의미가 아닌 확실한 문자적 의미를 제시, 성경의 명료성, 139쪽,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신앙의 유추를 했다. 그리스도의 중심성, 칭의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았다. 그래서 좁은 해석을 해석했다. 정경속에 정경이라는 말을 한다. 정경을 해석할 때 또하나의 정경으로 해석하는데 그 것은 칭의였다. 삶과 교회등도 그리스도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을 간과했다.
칼빈 : 간단 명료성, 성경 해석학을 쓴 것이 없다. 멜랑히톤과 부처의 해석과 비교해서 차이가 난다. 멜랑히톤은 주제중심으로 했다. 본문의 주제중심은 관련되지 않은 부분은 사라진다는 것은 약점이다. 본문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잘 살아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빠지는 부분이 많다. 부처는 이것과 한절한절 주석을 했다. 그러니 너무 내용이 않다. 칼빈은 양자의 약점을 알았다. 주제는 기독교 강요로 달리하고 주석을 또 기록했다. 간단 명료, 문화에 따라 설교하지 않고, 교회력에 따르지 않고, 본문에 흐름에 따라 한절한절 설교해 나갔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했다. 칼빈의 간단함은 내용이 깊이가 있다. 강해설교를 했다.
144쪽 17.18세기 : 신앙고백적, 합리주의, 경건주의 역사의 아이러니 카톨릭은 제도, 교황, 분열이 없다. 루터가 개인의 성경해석을 주장해 놓으니까 다른 것이 나오고 고집을 하기에 분파하는 것이다. 하나로 묶여지기 어렵다. 개신교의 특성이다. 그래서 선을 그어 놓은 것이 웨스트 민스터 신앙 고백이 그것이다. 시대마다 신앙고백서는 보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약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요리 문답을 잘못 가르치면 신앙이 경직된다. 신앙 고백서의 카터키즘을 가르칠 때 성경 구절을 찾아가서 성경과 부딪쳐서 교리 교육을 시켜야 한다. 교리논쟁을 하면 매말라 진다. 논쟁을 할 때 잘못하면 경직된다. 18,19세기는 신앙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었지만 신앙이 경직된다.
합리주의는 기준을 이성, 디이즘(이신론)-이치가 신이라는 것이다. 하님이 창조하시고 이치에 따라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은 손을 놓으신 것이다. 기적이 사라지는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고, 인간주의, 경험주의가 나올 수 밖에 없으며, 성경을 철학에 맞추는 것이다. 성경을 철학에 맞추는 것은 성경에 대하여 새로운 변화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합리주의는 성경을 철학의 시녀로 본다.
경건주의 146쪽 거룩, 교리를 가슴으로, 생동화, 벵겔 사본비평가. 독창성, 학문, 헬라어 원어 연구도 했다. 간결한 글귀, 주석가, 가슴, 생활, 영혼을 강조, 한국의 복음주의적인 것이 경건주의와 가깝다.
*** 19,20세기 해석 : 주석가들이 너무 많다. 특징은 맥락화, 학문과 학문의 연계화(학제적, 학문이 교제), 역사비평
맥락화 성경의 지평을 상황, 문화에 맞추는 것, 해방신학, 상생신학, 콘스탄틴적 속박의 해석이었다고 비판, 아시아인들을 위한 성경주석이 나올 것이다. 이것들이 맥락화이다. 서구 문화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구문화는 본문을 일반 과학 하듯이 본다. 각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여야 한다. 데카르트적 이분법을 따라가지 말자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내가 있고 내 범주를 가지고 이분법으로 객체를 말한다. 내가 있고 성령을 분석하는 것이다. 내 기준은 카테로리로 갖고 성령을 연구하다가 보니 성령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성이 사라진다. 한국적 사고는 관계성에 있다. 관계성이 약화되는 것이 이분법이다. 이것을 부정하고 맥락화하자는 것이다. 선교사들 입장에서 강조된다.
학문의 연계성 차원에서 언어학을 해야 한다. 역사적 해석을 위해서는 역사, 철학에서 철학, 사회학, 문학, 기호학, 등에 연계성 문제들로 이것을 알아야 한다. 149쪽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것이다. 원리상 기준은 성경이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의 내용을 변질시키는 내용이 되버린다. 성경해석에 도움은 되지만 조심스펍게 보아야 한다.
역사비평학적 해석들이 유행한다. 본문을 동치관계, 병치관계로 본다. 병치관계로 비교해서 보여주는 것이고 동치는 병렬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154쪽 심층구조와
*** 한국해석학
전통신학은 박형룡, 청교도신학, 칼빈, 어거스틴, 바울, 예수, 성경의 절대 권위, 안식일, 복음 전파, 전천년설, 신학적 해석에 다루기 때문에 유동식 보수적, 진보적 사회참여, 문화적 자유주의가 있다. 세가지 흐름이 있다. 정통신학의 공헌은 하나님의 초월성 강조, 성경의 절대 권위 보호, 복음의 핵심을 살려줌, 주요 교리의 틀이 정해짐, 주경신학의 기초 한국에 내놓음, 한국 교회의 성경위에 기초시켰다. 목회의 , 개인 윤리 강조, 초기 선교사 파송,
내재성 약화, 학문적 발전에 저해, 누룩인 것을 저해, 한국적 틀을 만들지 못함, 성경 해석의 깊이 없음, 청중에 이해 약화, 사회 윤리 등한히 함, 165쪽 정통신학의 갈바는 정행이다. 죽은 믿은은 바른 행위를 하지 못한다. 정행과 더불어 영성이 있어야 한다. 167쪽 복음주의의 비교, 168쪽 근본주의 분파성, 복음주의 좁은 정의, 169쪽,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경향의 차이점 성경관에서, 영감과 무오, 영감과 유오, 택스트 강조, 컨텍스트 강조,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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