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에 여성 앙가슴 노출이 잦은가?" 남성 칼럼니스트 존 업처치가 노출의 계절 여름에 앙가슴 문제를 제기했다. 앙가슴이란, 여성의 경우 시쳇말로 '가슴골'로 불리는, 보기에 민감한 신체부위이다. 같은 질문을 연전에 이미 여성 칼럼니스트 제니퍼 르클레어도 던진 바 있다.
업처치의 칼럼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예배 후 귀가할 동안 아내가 이 토픽을 떠올렸다. “그런 옷이라면 아예 교회 강단·무대 위에서 입을 수가 없어요.” 나는 아내가 뭘 뜻하는지 금방 알아챘다. 찬양경배 도중 한 이끔이 자매가 몸에 찰싹 달라붙고 앙가슴이 헤쳐진 거의 수영복 같은 윗도리에다 짧은 스커트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젊은이의 전쟁>이라는 책과 거기 연계된 레슨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녀에게 잠시라도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오로지 노래 가사만 내려다보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 | | ▲ 교회 결혼식은 특히 여성노출이 심해지기 쉬운 때이다. ⓒitalianlakeswedding.com |
"그런 옷을 입게 되면요." 아내가 말을 이었다. "초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모으게 만들어요. 왜 거기 서 있는지 이유까지 다 말아먹는 거죠."
나는 지금 잃은 영혼들이나 베이비 크리스천들을 갖고 말하는 게 아니다. 소위 '성숙한 크리스천'들이라고 자임하는 자매들이 토요일 밤 댄스클럽에서나 입을 수 있는 수준의 옷을 주일날 아침 입고 하나님 성소에 나타나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블라우스는 몸에 바짝 들러붙어 실루엣 '곡선미'를 온통 드러내며, 네크라인은 너무 깊게 내려와 뭔 '계곡'인가를 시위하고 있고, 스커트의 양옆도 위로 깊게 트여 허벅지의 순진한 '언뜻보기' 이상을 노골적으로 제공하려 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하나님을 찾아 나선 죄인들이나 기존 신자들보다 영 잘 모르는 새 신자를 논하고 있는 게 아니라 거듭나고 세례(침례) 받은, 피 값으로 산 교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에서 여성교우들은 단정한 옷차림과 소박함과 정절로써 단장해야 한다고 말했다(디모데전서 2:9). 또 고린도교회에는 "차마 드러내지 못할 신체(부위)는 더 조심스럽게 감싸고 보기가 안 된 부분을 더 보기 좋게 꾸며야 한다"(고전 12:23. 일부 번역은 다를 수 있음)는 뜻으로 권고했다. 고린도교회에는 타락하고 음란한 이교에서 갓 개종한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변이 아무리 '핫'하고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성령 충만한 여성들이 교회에 들어올 때 일부 남성 교우들로 하여금 영적인 요소보다 육적 요소에 더 신경 쓰게 만드는 옷차림을 하고 들어오는 것은 정당화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일부 크리스천 여성들은 단정과 검소를 강조하는 것은 회중의 여성들을 낯부끄럽게 하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숙한 게 가장 핫(hot)하다"는 등의 슬로건을 사용할라치면 여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존재임을 가르치려는 의도보다는 마치 자기네가 유혹의 요인을 제공하는 존재로 부각된다고 느껴지는 모양이다.
여성의 몸을 물품시·상품화하지 않고 더 순결하게 여겨지도록, 그들의 신체를 존귀하게 보는 관점으로 어떻게 정숙·단정을 가르칠 수 있을까? 칼럼니스트 섀런 호드 밀러는 이 문제를 태클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그 첫 해법은 신체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용어부터 쓰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어떤 면에서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수치본위적 언어를 쓰지 않으셨다.
둘째로는 여성의 몸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의 가치나 의미성이 곧 검소·소박의 이유는 아니다. 여성의 신체에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유혹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여성의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감히 말하건대 여성의 젖가슴과 둔부, 입술 등은 모두 주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바로 창조주께서 그들의 몸을 지으셨으니 선할 수밖에 없다.
소박과 단정, 검소 등 언어의 초점이 곧 여성의 몸을 감추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창조주께서 지으신 각 신체부위의 고유한 역할을 이해하는 데 있다. 단정·방정치 못하다는 것은 본래 신체 부위를 드러냄이 아니라 바로 몸의 오리엔테이션을 부적절하게 이해하는 데 있다.
남녀 교우들은 우리 자신의 영광은 최소화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단정·검소함을 추구하도록 요구된다. 몸과 영과 마음은 모두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도록 창조된 역할을 갖고 있다. 하나님 대신 우리 자신을 중심삼을 때, 우리는 우리의 단정치 못함을 최대화하게 된다.
교회는 수치에 기반을 두지 않는 몸의 신학을 가르쳐야 옳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직접 디자인하셔서 경이롭게 지음받았다(시 139:14).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모든 것은 "매우 좋았다"(창1:31).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특히 남성들이 여성의 몸을 바라볼 때 영향을 끼친다. 육의 근성은 태초에 남녀가 서로를 볼 때 순수했던 데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우리가 이제는 더 자신의 죄성에 대한 노예가 아니지만(로마서 6:6) 우리의 마음까지 성적 불순에 귀착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롬13:14). 그래서 남녀 교우들 모두 서로의 연약함을 돕는 방향으로 입고 살아야 한다(갈라디아서 5:13).
덧붙여, 우리는 노골적인 패턴의 의상 디자이너들과 제조회사의 숨은 동기를 간파해야 한다. 여기저기 살갗을 드러내는 의상들은 그들이 여성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생각해선가, 아니면 몸을 착취하기 위해선가? 후자이기가 더 쉽다.
이제 르클레어의 말을 간추리면 이렇다:
탱크탑에다 타이트한 반바지를 입은 어떤 젊은 교우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알아요. 제 차림새가 부적절한 거. 울 엄마가 통과시키질 않죠. 하지만 시간 절약상 그런 거죠. 하지만 교회에 결석하는 것보담은 더 낫지 않나요?"
그러나 그런 말은 다음과도 같다. "나도 알아요. 교회에서 욕질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거. 하지만 달리 더 잘할 말이 없네요." "찬양경배 때 담배 피는 거 부적절한 거 알죠. 하지만 피우던 말보로를 미처 끝낼 시간이 없어서요."
워십 아티스트 제이미 잼고션은 '소박한 게 젤 핫하다'라는 캠페인을 틴에이지 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펼쳐왔다. 잼고션은 부적절한 옷차림의 십대 소녀가 "나는 큐트하게 보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늘 그 이상의 무엇을 말해 주고 싶단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더 연장인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성결교운동의 가이드라인이나 그 옛날 여성검약절제운동의 구호를 여성 전체의 의상코드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종교적 계율이나 규제를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크리스천 여성들이 교회나 딴 데서라도 세상 여성들과 똑같은 차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수치감에 바탕을 둔 어프로치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존중과 남에 대한 존중에 관한 것이다.
12-18세 소녀들을 위한 컨퍼런스인 '핑크 뚜껑'의 알리사 셜 목사는 아름다움과 순결을 키 테마로 강조한다. 자신이 16세 딸을 둔 그녀도 제이미에게 동의하면서 "하나님의 여성들은 몸 드러내기 위주보다 하나님이 보실 때 고저스(gorgeous)하게 입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내가 검소하고 소박하게 입는 것이 실상 나 자신과 주변을 존경하는 태도이죠. 오늘날 우리네 문화에는 육욕이 팽만해 있어요.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28에서 육욕에 찬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여성들이 남의 육욕을 돋우지 않는 방향으로 적절한 차림을 할 수가 있다고 믿어요. 단정하면서도 얼마든지 스타일리시 할 수 있어요!"
페이스북 같은 데는 이런 말도 나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세요. 남의 복장에 신경 쓰지 마세요. 더 좋은 새 옷을 사 줄 마음이 없는 이상." 이게 과연 크리스천으로서 바람직한 말일까?
"잃은 영혼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어요. 그런데 누가 누구를 판단하겠어요?" 이런 말도 신자로서 썩 맞는 말은 아니다. 교회에서 여성은 앙가슴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정체성 위기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부분에 대하여 분명치가 못한가? "야한" 옷차림의 자매가 우려되어 새 옷을 사 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좀 더 나은 모범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진리를 말해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이젠 너무 자주 세상 방식을 따르고 있다. 옷차림새도 그렇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좇지 말고 오히려 마음이 새롭게 변화받아 무엇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을 만 하시고 온전한 뜻인지를 헤아리시오."라고 말했다(롬 12:2).
교인들이 다 패션경찰이나 재판관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확신을 주시는 대로 옷도 가려 입고, 마귀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말라는 말이다.
아담하고 단정한 몇 가지 옷을 사다 입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괜스레 부도덕과 죄악이 문틈으로 기어들어오지 못하게 하라(창4:7b). 어떤 페이스북 유저는 "여성이라면 삼베자루를 입어도 여전히 음욕을 품을 사람은 품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다 주워 입고 주워섬길 것인가? 이건 아니다. ⓒ 교회와신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