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전통주의를 극복하자
기독교회의 잘못된 전통주의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이 말씀에서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가리키고 뒤의 죽음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사후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게 됩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당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어떻게 관계 단절이라는 의미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에서 그때까지 지속되던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의 시대를 여시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언약에 속해 있던 이들은 새 언약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예수님 당대는 포로 후 회복 언약(렘 32:40)의 시대였습니다. 그 언약이 주어지는 시점에서는 새 언약으로 이야기되었습니다(렘 31:31). 예수님은 그 언약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하게 된 새 언약의 시대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시점의 언약과는 다른 새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지 않은 유대인들은 옛 언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완전하게 된 새 언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곧 죽은 자들입니다. 죽음이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쓰였을 때에 둘 중의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문맥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의미를 동시에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됩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와 연관되는 여러 내용들을 바르게 이해하는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것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때에 둘 중의 한 가지 의미입니다. 문맥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후자의 경우에 직접적으로 영원한 구원(히 5:9)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관계 단절이라는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구원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식인 믿음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의 구원과 관련된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요1:12).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영접함인 믿음입니다. 후자의 구원과 관련된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상태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 존재 곧 전 인격과 전 삶에서 그분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지함인 믿음입니다. 주님 곧 주인으로 받아들인다거나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곧 순종입니다. 그렇기에 의지함인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에서 저는 전자의 믿음은 영접함인 믿음을 후자는 의지함인 믿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와 연관된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마음을 열어 들려진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것입니다(행 16:14). 공중 권세 잡은 자인 마귀의 종 곧 마귀의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와 자기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본성 곧 스스로가 자신에게 신이 되어 자기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후자와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는 육체의 소욕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입니다(갈 5:17).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서도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욕심은 여전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신자가 육체의 욕심으로 거스를 수 있습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이기에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특권을 바르게 누리느냐 아니면 잘못 누리느냐는 당사자에게 전적으로 위임된 선택의 권리입니다. 전자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칼빈주의나 알미니안주의에서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서술되고 있는데, 저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제목의 내용들 곧 선택, 속죄, 견인도 모두 은혜이기에 여기에서만 은혜라는 제목을 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불가항력적입니다. 반드시 그 열매를 맺어 당사자가 복음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죽음과 관련된 내용들은 모두 견인 곧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 견인은 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곧 의지함인 믿음 다르게 말하면 순종을 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마 7:21, 히 5:9). 신자가 자신의 육체를 위하여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 조건입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판단을 받는데, 조건을 충족시켰다면 곧 성령을 위하여 심었다면 영생을 거둡니다. 반면에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곧 육체를 위하여 심었다면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갈 6:8). 영생과 대조된 썩어질 것이란 영원한 멸망을 뜻합니다.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결과입니다.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하는 은혜(고후 6:1)를 헛되이 받은 결과입니다. 바울 사도는 신자에게 그들의 이전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진술합니다(엡 2:1~3). 이 세상 풍조를 따랐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곧 사탄의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였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양심이 있으며 지성도 살아있습니다만 하나님을 향하지 않기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전적 부패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교회에게 하나님의 선택에 관해 말씀합니다(엡1:3~6). 창세전에 택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은혜를 누리는 이들에게 그 은혜를 누릴 만한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신 7:7~8).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한 가지 기억하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은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난 이후에 “내가 어떻게 관계 회복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가?”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일반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그들 중에 누군가는 선택되었고 누군가는 선택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중선택’ 나아가 ‘삼중선택’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의 사용 예를 따라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요 3:16)고 진술되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대상은 세상이고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대상은 그를 믿는 자입니다. 독생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를 주셨다는 표현에는 죽으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그 대상에 있어서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력을 얻게 되는 이들은 믿는 자입니다. 믿는 자는 결국 선택된 자들입니다. 보편적 속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대상으로 피를 흘리셨고 선택된 자들이 그 효력을 얻는다는 제한적 속죄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무조건적 견인을 말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나 부분적 부패,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가항력적 은혜, 조건적 견인을 말하는 알미니안주의 5대 강령. 양자 모두 부분적으로 옳은 내용과 잘못된 내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각자 자신들은 전적으로 옳다고 상대방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신학계는 이런 면에서 비극입니다. 저는 이렇게 성경의 가르침을 밝히면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을 정립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을 최우선을 삼고서 그 가르침을 따라 교리나 관습을 평가하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 스스로도 칼빈주의자이었다가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고서는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현실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각 신학전통의 공고한 힘을 간과하였던 것입니다. 너무나도 강력한 전통주의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페이스북에서 팔로우로서 존경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기독교 출판사인 새물결플러스의 대표인 김요한 목사입니다. 그의 글에 담겨 있는 신앙관과 사상, 정치와 시민 의식, 출판사 운영철학 등이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출판하는 책들도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글을 읽고 지속적으로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구원론과 관련한 전통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한 구원론을 정립하게 된다면 선한 파급 효과가 결코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구원론이 책으로 출판되고 읽혀진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강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유망한 신인 작가 발굴이라는 운영 철학과 관련하여서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제가 무명이 아니라 저명하였다면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각자 따르고 있는 신학적 노선 안에 머물러 안주하는 전통주의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밝히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신학과 관습을 개혁하게 되면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리라고 여겨집니다. 구원론에 있어서는 세계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고한 전통주의에서 벗어나서 참된 개혁주의를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 곧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잘못된 전통주의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는 수정 자유주의의 틀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민총생산은 늘어났다고 하는데, 실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맞벌이를 하고도 살기가 만만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 어려움으로 인해 가족들을 죽이고 스스로도 목숨을 끊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국가적으로 복지의 확산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편적 복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국가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아닙니다. 보편적 복지가 제대로 되면 경제는 더 활성화됩니다. 문제는 재원인데, 이명박 정부에서 사대강 사업과 자원 외교 그리고 국방산업을 통해 잃어버린 돈이면 충분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국가를 털어먹은 MB는 대한민국에 재앙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아직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현실은 치가 떨릴 지경입니다. 이보다 더 근원적인 해결책은 각자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부자는 이미 돈이 더 많은 돈을 버는 상황이기에 별 상관이 없지만 가난한 사람은 다릅니다. 현재의 일반적인 경제구조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네트웤입니다. 내가 가게를 하는데, 좋은 상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상품을 사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 방식의 하나로 가게의 상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사도록 해주는 고객에게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줍니다. 고객은 소비자이면서 상품 판매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소비자이면서 생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프로슈머(Prosumer)라고 합니다.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를 합성한 말입니다. 이는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혜택을 공유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혜택의 정도가 경제적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고 안정된 생활을 가능하게 한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여기에서 상품의 가격이 다른 회사의 동일한 제품과 비교하여 너무 높은 경우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품질이 더 좋아서 가격이 더 높다면 문제삼을 일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다른 문제는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사재기를 하여야 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잘못된 네트웤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계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일정한 돈을 일정 기간 모으고 정해진 순서를 따라 한 사람에게 그 돈을 몰아주는 것입니다. 목돈을 만들게 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게 됩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주가 모은 돈을 가지고 도망가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 계원들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경우에 도망하는 계주가 잘못된 것이지 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사고를 고쳐야 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됩니다. 네트웤에는 계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 내는 돈의 총합을 일정한 시점에 한 번에 돌려받는 계와 다른 점은 그 이상의 수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상품이나 시스템을 활용합니다. 양자를 다 활용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액의 돈을 받고 회원을 받아서는 낸 돈 이상의 수익을 보장하는데, 그 이후에 모이는 돈으로 그것을 충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명 떳다방의 방식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파산하고 뒤에 참여한 이들이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네트웤의 악용입니다. 이 경우도 그 악용이 잘못된 것이지 네트웤 자체가 잘못인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네트웤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사고를 고쳐야 합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됩니다. 정상적인 네트웤은 경제적인 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이면서 생산자가 되어 수익을 창출하고 경제적인 면에서 자유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이면서 좋은 네트웤에 대한 정보는 그런 면에서 큰 자산입니다. 제가 알게 된 정보를 한 가지 소개합니다. 금 공동구매 프로그램입니다. 7인이 한 조를 이루어 금을 공동으로 구매합니다. 두 과정으로 구성되는데, 계속적으로 회전하게 됩니다. 구매에 참여하는 비용은 150만원입니다. 한 조가 완전히 형성되면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금을 지급합니다. 현금을 원하면 회사에게 금을 사서 판매하여 지불하는데, 약 300만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나도 지급받을 차례가 오면 동일한 수익을 얻게 됩니다. 다음 과정으로 가서 동일한 방식으로 수익을 얻습니다. 정상적으로 두 과정을 거치는 기간은 한 달 정도입니다. 600만원의 수익이 생기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그 기간이 단축됩니다. 이런 수익을 얻는 자격은 단 한 가지입니다. 다른 두 사람을 나와 같이 공동구매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매 과정마다 두 사람을 참여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만 두 사람을 참여시키면 됩니다. 이 자격을 갖추면 시스템에 의해서 매월 600만원 이상의 수익을 얻게 됩니다. 무한반복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https://www.youtube.com/watch?v=qG4VBoSrsfg에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최고의 네트웤입니다. 그 시스템을 알고 나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이를 개발한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 시스템으로 매월 600만 이상의 수익을 얻는 사람들은 전 세계적으로 60만명 정도입니다. 작년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그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리라고 여겨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시스템이지만 많은 경우에 신자들은 예외입니다. 경제활동에 대한 전통주의를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직접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고서 수익을 얻는 것만을 바른 경제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주의입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말씀을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네트웤은 일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의 형태에 변화를 준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양극화가 심화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고통 받는 것과 가난한 이들이 힘을 모아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경제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어느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제 신앙양심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라고 여겨집니다. 김요한 목사의 새물결플러스에서 출판되는 책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한국교회에 꼭 필요하지만 구매하는 이들은 제한적입니다. 간증집이나 설교집에 길들여진 신자들의 손이 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예 책을 읽지 않는 신자들로 가득한 상황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운영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적자가 누적되는 것입니다. 독자층이 점점 확대되고 있기는 하지만 출판으로 적자에서 흑자가 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에 이런 출판사는 존속되어야 합니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네트웤을 활용하면 가능합니다. 직원들의 급여 인상의 효과도 있습니다. 경제활동에 있어서 전통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가능한데, 활용하지 않는 것이 제 입장에서는 안타깝습니다. 인간다운 삶에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하여야 합니다. 자기 가치 창출이라는 면에서도 중요합니다. 네트웤을 활용하면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면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돕는 구제나 시민단체를 돕는 기부에 참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경제활동에 대한 전통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 길이 활짝 열립니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그 길을 가면서 지금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생애를 가꾸시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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