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전천년설 비평
전천년설 비평은 앞에서 문제점으로 제기한 순서대로 차례대로 할 것이다.
1. 전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계시록 20장 해석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무천년설 해석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무천년설 해석에서 구체적으로 다룬다.
2. 전천년설은 성도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의 문제
2.1 천년 왕국 기간에 성도들의 부활의 문제
전천년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의 부활이 있으며, 역사적인 천년 왕국이 세워진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휴거를 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남게 된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에 천년 왕국 기간에 태어난 사람들도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언제 어떻게 부활하는가?
A. 문제점 제기
전천년설에 의하면 부활의 시기와 장소, 회수 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① 성경의 부활: 성경에 부활은 단회적인가? 다회적인가?
② 부활의 시기: 천년 왕국 시대에 죽은 사람은 즉시 부활하는가?
③ 부활의 장소: 천년 왕국 시대에 죽은 사람은 무덤에서 부활하는가? 지상에서 부활하는가?
④ 부활의 회수: 천년 왕국 시대에 죽은 사람은 매일 부활하는가? 모았다가 1년, 10년, 100년, 1000년 만에 부활하는가?
B. 비평
(1) 비성경적 사상이다.
전천년설은 부활의 문제에 심각한 문제가 온다. 천년 왕국기간 중에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천년 왕국 기간에 있을 부활에 대해 전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 재림시에 있을 부활만 말하고 있다. 예수의 강림과 동시에 먼저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 이것을 흔히 ‘무덤에서 부활’이라고 말한다. 다음에 이 세상에 생존해 있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으로 들림을 받는다. 이것을 흔히 ‘공중으로 휴거’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무덤에서 부활과 공중으로 휴거 두 가지 뿐이다. 그 어떤 부활은 없으며, 또한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부활은 일회적으로 단 한 번에 순식간에 일어난다. 결코 다회적으로 부활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성도들의 부활이 두 번 이상 다회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비성경적 사상이다. 그런데 전천년설은 반드시 다회적으로 부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2) 성경의 증거
① 데살로니가 전서 4:16,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4:16)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4:17)
․ 기록 배경: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 부활 현상: 4:16: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무덤에서 부활)
4:17: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부활이다. (공중으로 휴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부활의 현상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과 휴거는 하나이다. 부활의 장소가 다르기 때문에 현상만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부활과 휴거는 오직 한 번만 있는 현상이다. 두 번, 세 번 다회적으로 일어날 현상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천년설은 반드시 다회적으로 부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② 고린도전서 15:23, 24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15:23)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15:24)
․ 기록 배경: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 부활의 순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
․ 부활 현상: 5:23: 성도들의 부활 (부활과 휴거)
5:24: 누가 부활할 것인가는 모르지만 부활이 있을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순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이 말은 부활의 세 순서이다. 먼저는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1)이며, 다음에는 성도들의 부활(2)이다. 여기 성도들의 부활은 무덤과 휴거를 구별하지 않고 동시적으로 말한다. 다음은 ‘그 이후이다.’(3)
여기 문제는 ‘그 이후이다.’ 사도 바울이 누구의 부활을 의식하고 기록했을까? 보편적으로 두 가지 해석을 따른다. 1) 불신자들의 부활을 말한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부활이 있은 후에도 아직 부활하지 못한 '그 남은 자들', 곧 불신자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2) 부활이 아니라 마지막 종말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강림에 따라 성도들이 부활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엔 완전한 종말이 온다는 의미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 17절과 고린도 전서 15:23, 24절 모두 예수 그리스도 재림시 성도들의 부활(무덤, 휴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천년 왕국 시대에 죽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천년 왕국 시대 이후에 있을 어떤 부활도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천년 왕국 시대 이후에 있을 부활론은 비성경적이므로 전천년설의 두 부활론 혹은 다회적 역시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3) 부활의 시기, 장소, 회수에 대한 문제점
전천년설에 의하면 성도들의 부활이 몇 번 있을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천년 기간에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들에 부활에 문제가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천년설이 성경적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해 답해야 한다.
예, 아니오, 무답(침묵) |
첫 번째 물음은 부활의 시기/ 죽은 즉시 부활하는가?
‘예’라고 대답한다면, 부활의 회수에 심각한 문제가 온다. 즉시라는 말은 매일 시시때때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루에 한 번이면 1,000년이라면 365,000회 부활이 있으며, 1년에 한 번이라도 해도 1000번의 부활이 있게 된다.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몇 년 만에 두 번째 부활이 있게 되는가?
1년, 10년, 100년, 1000년 만인가? 성경 어디에 이런 부활을 말씀하고 있는가? 성경에 없는 부활을 지금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가? 전천년설자들이다.
두 번째 물음은 부활의 장소/ 무덤에서 부활하는가? 지상에서 부활하는가?
‘예’라고 대답한다면, 무덤에 있는 기간은 얼마인가? 여기 무덤은 장사 지내 땅에 묻힌 것을 말한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천년 왕국 이후에 있을 부활에 장소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지상 부활이 이루어지는데, 개인적 부활인가? 집단적 부활인가?
지상적 부활이라면 매일 세계 각 지역 이곳저곳에서 부활(휴거)가 목격될 것이다.
세 번째 네 번째 물음은 부활의 회수/ 천년 왕국이후에는 몇 번의 부활이 있게 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전천년설자들은 대답을 한다. 천년왕국이 끝나고 이들의 부활이 있게 될 것이다. 이 대답에 의하면 전천년설은 두 번의 부활이 있게 된다. 첫 번째 부활은 예수님 재림 때이며, 두 번째 부활은 예수님 심판 때이다. 다시 말해서 전천년설은 ‘두 부활론’을 성경적 사실로 믿고 가르치고 있다.
이 부분은 데살로니가 전서 4:16, 17절에서 이미 밝혔다. 4:17절은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16절과 부활과 17절 부활의 간격은 결코 천년이 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부활은 한번이지만 죽은 자의 부활과 산자의 부활이 다른 모습(현상)으로 오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 17절은 두 번의 부활을 말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간격을 천년 동안 두는 것은 더더욱 성경적인 부활이 아니다.
그래서 전천년설에 두 번의 부활론(필자는 ‘두 부활론’이라고 말함), 예수님 재림과 심판 때 있을 부활론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사상이다.
(4) 천년 왕국 기간에 죽은 사람은 천국 왕국에 참여 하는가?
천년 왕국에 죽은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천년 왕국에 참여하는가? 천년 왕국 기간이 끝나 백보좌 심판 때는 천년왕국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전천년설에서는 성경적인 답변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구원받은 성도가 천년 왕국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나, 특수한 상황을 말하거나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천년설에서는 성경적인 답변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앞 단락에서 말한 부활의 시기, 장소, 회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2 불신자들의 부활의 문제
성경은 신자들의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부활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부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아 그래서 불신자들의 부활의 때에 대해서도 사상에 따라 각각 달리보고 있다.
A. 문제점 제기
전천년설에 의하면 불신자들의 부활의 시기는 천년 왕국이 끝나는 동시에 일어난다. 그리고 악인들은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의 재림시에는 불신자 부활이 없다. 만약에 있게 되면 불신자들의 부활의 시기, 장소, 회수가 신자들의 부활과 똑 같은 문제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성도와 불신자 부활의 간격이 1,000년이 생긴다. 양자의 부활의 간격이 천년이 성경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가?
B. 비평
(1) 성경의 증거
① 요한복음(5:28, 29) : 생명의 부활, 악인의 부활
② 고린도전서(15:23, 24) : 부활의 순서(예수 - 성도 - 불신자(해석의 문제))
③ 계시록(20:5) : 해석의 문제
④ 데살로니가전서(4:16, 17) : 성도들의 부활(무덤 부활 - 공중휴거)
(2) 비평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부활에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암시하고 있는 곳이 부활장이라고 고린도전서 15장이다(24절).
“천년 왕국 기간에 성도들의 부활의 문제”에서 다루고 있듯이 고린도전서 15:24절도 불신자의 부활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 이후’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은 부활할 사람보다 종말에 대한 상황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천년설에서 말한 것처럼 고린도전서 15:24절을 불신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고린도전서 15:23절과 24절 사이를 천년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신자와 불신자의 부활의 간격을 천년을 두고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천년설은 지극히 비성경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의 부활의 시기, 장소, 회수, 신자와 불신자 부활의 간격 등은 의문의 연속이다. 그래서 서두에 전천년설의 교리는 의문의 연속으로서 꼬리를 물고 있다고 한 것이다.
3. 전천년설에서 말한 천년 왕국이 이 땅에 도래했을 때 오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장에서 성질상 변화하는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령한 몸은 성질상 썩지 않는 몸이며, 영광스런 몸이며, 초자연적인 몸이며, 불멸의 몸”이다.
전천년설에 따르면 예수님 재림과 동시에 이 세상에 역사적인 천년 왕국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부활한 성도들과 부활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양자의 사이에 조화 문제가 대두되지 않을 수 없다.
3.1 부활의 몸과 부활하지 못한(육신의 몸)과의 조화의 문제
A. 문제점 제기
전천년설에 따르면 예수님이 재림하면 성도들은 부활하여 신령한 몸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대로 남는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부활의 몸)과 불신자(육신의 몸)이 천년 동안 함께 살아야 한다. 양자가 이 세상에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B. 비평
부활의 몸은 공간을 초월하여 다닌다. 그러나 육신의 몸은 여전히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부활의 몸은 일하지 않고 먹지 않아도 된다. 반면에 육신의 몸은 여전히 일하며 욕심을 부리며 먹어야 산다. 부활의 몸은 결혼하지 않고 성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에 육신의 몸은 결혼하여 성생활을 하며 즐긴다. 부활의 몸은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육신의 몸이 성생활을 하는 것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부활의 몸이 이런 현상을 보면서 육신의 몸에게 무엇이라고 할까?
영광스럽게 변화된 성도들과 죽을 육신을 입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 섞어 살 임시 왕국(천년왕국)에 대한 개념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성도들의 부활한 육체가 다시 죄악된 세상으로 돌아와 육신적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이치상 어울리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 왕국은 이런 왕국을 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부활의 몸과 육신의 몸이 함께 한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 왕국이 아니다.
3.2 천년 왕국과 세상의 관계
A. 문제점 제기
전천년설에 따르면 예수님이 재림하면 천년 왕국이 도래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대로 유지한다. 이 세상에 도래한 천년 왕국은 어떤 형태로 세워지며 어떤 성질을 갖고 있을까? 다시 말해서 천년 왕국이 세워질 장소적 문제와 천년 왕국의 성질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B. 비평
(1) 천년 왕국의 장소
예수님 재림과 함께 도래할 천년 왕국이 어디에 세워지는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세워지는지 우주 어느 공간에 세워지는지 알 수 없다. 아니면 이 세상에 함께 지내는 것이 천년 왕국인지 이해는커녕 상상도 할 수 없다.
(2) 천년 왕국의 성질
천년 왕국의 장소는 그렇다 치고 천년 왕국의 성질은 어떤 형태일까?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성질로 도래하는가?
만약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면 영원한 나라, 즉 새 예루살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만약 같은 것이라면 새 예루살렘도 이중적으로 도래하게 되는가?
그리고 아니라면 천년 왕국은 어떻게 건설되는가? 새 창조적으로 건설되는가? 이 세상의 변화로 건설되는가?
(3) 천년 왕국 기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구원의 문제
전천년설에 의하면 ‘천년 왕국 기간’에는 부활한 성도들과 불신자들과 함께 살게 된다. 불신자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모르고 천국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천국에 대해 실제적으로 보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99.9%는 다 믿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라면 천년 왕국의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4. 계시록 21장과 22장 기록과 해석의 문제이다.
A. 문제점 제기
전천년설에 따르면 계시록 21장과 22장에 천년 왕국 생활에 대한 기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기록이 없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B. 비평
전천년설에서 말한 천년 왕국의 제 문제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해 많이 할애하고 있다(살전 4장; 고전 15장 등). 그러나 천년 왕국의 생활과 천년 왕국 이후에 있을 부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몰라서가 아니라 그런 부활이 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요한이 계시록 쓰기 전에 순교했기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계시록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마찬 가지이다. 천년 왕국은 신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새로운 이정표다. 다시 말해서 B. C. 와 A. D. 역사처럼 천년 왕국도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이정표인 것이다.
천년 왕국 이전에 성도들의 구원과 부활이 중요하다면 천년 왕국 이후에 성도들의 구원과 부활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이러한 중요 점에 대해 부활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나 천년 왕국을 요한이 몰라서 기록에 누락시켰을까? 아닐 것이다.
천년 왕국 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들의 구원과 부활, 부활의 시기, 장소, 회수 등 모두 부활에 대해 기록한 사도 바울 서신에는 없다. 특히 종말의 현상(징조를)을 목격하고 기록했던 사도 요한 역시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천년 왕국이 역사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도 요한은 천년 왕국을 언급하고 있는 계시록 20장을 지나 21장과 22장에서 최소한 구원, 부활, 천년 왕국의 성질과 성도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했어야 한다. 반면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악인들의 심판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히려 사도 요한은 천년 왕국 이후에 있을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요한의 침묵의 의미는 앞으로 있을 현상에 대한 침묵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기록을 하지 않는 침묵이다.
(五) 전천년설 비평결론
전천년설에 대해 비평하기 위해 아래 네 가지 문제점을 먼저 제기하고 비평에 임했다.
1. 전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계19장과 20장 해석의 문제
2. 전천년설의 성도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의 문제
3. 전천년설에서 말한 천년 왕국이 이 땅에 도래했을 때 오는 문제
4. 계시록 21장과 22장 기록과 해석의 문제
1번만 제외하고는 성경을 근거로 비평을 하였다(무천년설 계시록 20장 해석에서 다룰 예정). 전천년설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은 아직도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특히 중국 교회는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교회가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는 것은 필자에 생각에는 신학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보고 싶다.
전천년왕국설은 비평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도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밝히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전천년설은 이단성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천년왕국설은 신학의 사상이며, 역사에 한 기류(气流)였을 뿐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년천년설 견해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부활의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때 일회적이며, 부활의 장소는 무덤에서 부활과 땅에서 휴거 한 번뿐이며, 부활의 회수도 성도들의 부활과 휴거, 불신자들의 심판과 지옥행, 새 예루살렘 임재, 영원한 구원이 동시에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천년 왕국 시대에 있을 죽음과 부활의 문제, 생활의 기록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천년 왕국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없는 천년 왕국이 아니라 분명히 존재하는 천년 왕국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천년설 계시록 20장 해석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서두 적인 의미에서 먼저 말한다면 천년 왕국은 계시록 20장 단 한 번만 나온다는 사실과 천년 왕국을 다루고 있는 계시록 20장 이후에 기록한 계시록 21장과 22장에 천년 왕국 이후에 있을 어떠한 현상에 대해 사도 요한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천년왕국설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역사적전천년설’ 사상을 염두하면서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전천년설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남긴 말이다.
⇒ 전천년설 사상에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 말은 전천년설 사상 속에는 문제가 문제를 낳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이 문제는 비평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
二. 후천년설
(一) 후천년설 핵심내용
1. 순서적 도래/ 위 도표 참조
2. 그리스도의 왕국이 전도와 가르침을 통해 지금 확대해 가고 있다. 복음 전파가 세계를 기독교화 시킬 것으로 보며, 그 결과 천년 왕국이라는 평화와 번영의 세월이 도래하게 된다.
3. 새로운 시대는 현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세대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가는 비율이 점점 증가할 것으로 본다.
4. 악의 세력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혹은 영적 영향으로 악의 세력은 점점 축소하게 된다.
5. 교회는 세상에서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교육적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 된다.
6. 이 기간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죽은 자의 부활이 오게 된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과 함께 이 세상이 종말이 온다.
핵심/ 후천년설은 예수 재림 이전에 천년 왕국이 건설된다. 이것은 전천년설과 다르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무천년설처럼 상징적으로 본다. 다른 것은 천년 왕국이 임하는 시기이다. 후천년설은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의 중간을 지향하는 종말론이다. |
(二) 후천년설의 대한 문제점 제기
1. 후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준(시기)이다.
2. 후천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전에 천년 왕국이 상징적으로 임할 것으로 본다.
3. 복음 전파와 사회적 현상에 문제가 있다.
4. 후천년설은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중간을 지향하는 중심이 없는 사상이다.
(三) 후천년설 비평
1. 후천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준(시기)에 문제가 있다.
후천천년설에 의하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는 기준(시기)에 문제점이 있다. 악의 세력이 제거되고 평화의 시대가 오면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곧 종말이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전해진다고 해서 평화 시대가 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기서 후천천년설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어떤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이 바로 ‘복음 전파와 평화 시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시기를 어떤 기준으로 정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다(초림; 갈4:4). 마찬 가지로 재림도 하나님의 때에 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아무도 모른다(마24:36).
2. 후천년설은 예수 재림 이전에 천년 왕국이 상징적으로 임한다.
후천년설 도표를 보면 천년 왕국 시대가 분명하게 나온다. 이 천년 왕국은 전천년설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천년설에서 말하고 있는 전형적인 상징으로 보는 천년 왕국설도 아니다. 한 마디로 중간에 끼어 있는 사상이다 이것은 비평할 가치도 없다.
3. 복음 전파와 사회적 현상에 문제가 있다.
후천년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전도와 가르침을 통해 지금 확대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세계를 기독교화 되며, 그 결과 천년 왕국이라는 평화와 번영의 세월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평화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가는 비율이 점점 증가해 악의 세력은 점점 축소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더욱 영향력을 갖게 될 것으로 본다. 만약 이렇게 세상에 변해간다면 모두 좋아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 때는 오히려 세상이 더 악하게 될 것으로 반대 입장을 취한다(마24장).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갖는 다는 말은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통해 나타나 마치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이 다가 와서 교회가 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 후천년설은 전천년설과 무천년설 중간을 지향하는 중심이 없는 사상이다.
후천년설은 자기 사상이 없는 중간 지대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후천년설은 전천년설의 성경과 모순된 점은 배제했다. 반면에 무천년설에 좋은 점은 받아드렸다. 예를 들어 후천년설은 “천년 왕국을 역사적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좋아 보인다. 왜냐하면 좋은 것은 받아드리고 나쁜 것은 받아 드리지 않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세 사상 중에 대부분이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후천년설은 거의 따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자기 핵심 사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후천년설은 전천년설에 모순점을 도피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반면에 무천년설에 좋은 점도 받아드리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무천년설을 완전하게 받아 드릴 수 없어서 이상한 천년 왕국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여기 후천년설의 이상한 천년 왕국설이란 무천년설처럼 초림부터 재림까지 보지 않고 중간에 임하는데 역사적으로 임하는 것도 아니고 상징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상징적으로 임하는 시기도 문제이지만 천년 왕국의 기간, 성격 등 다양한 문제가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四) 후천년설 비평결론
후천년설은 전천년설의 개선 혹은 보완책으로 나온 것이지만 무천년설 보다 오히려 전천년설에서도 따르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자기 핵심이 없는 사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후천년설은 간략하게 비평한 것도 이유해서 이다. 다시 말해서 비평할 내용보다는 가치 때문에 간략하게 비평한 것이다.
후천년설은 사상은 한 마디로 팽귄에 비유하고 싶다.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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