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종말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작성자 : 노성주
목 차
Ⅰ. 서 론 / 2
A. 연구목적과 문제제기 / 3
B. 연구방법과 연구범위 / 3
Ⅱ. 종말과 관련된 주제들 / 4
A. 종말과 말세 / 4
B. 예언적 종말과 묵시적 종말 / 8
C.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 / 9
D.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 / 10
E. 천국(하나님 나라)와 천년왕국 / 11
1.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하는가? / 12
a. 과거에 임했던 하나님의 나라 / 12
b. 현재에 확장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 12
c.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 13
2.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임하는가? / 13
a. 하늘에 / 13
b. 너희 가운데 / 13
3. 천년왕국이란 무엇인가? / 14
a. 천년왕국은 존재하는가? / 14
b. 천년왕국은 종말의 사건인가? / 16
4. 소요약 / 17
Ⅲ. 전체요약 / 18
Ⅳ. 적용 / 19
A.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 19
B.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20
Ⅴ. 결론 / 21
Ⅵ. 부록(『요한계시록 맥잡기』요약발췌) / 21
참고문헌 / 27
Ⅰ. 서 론
ㆍTV로 생중계한 희대의 사기극 “오늘 밤 자정 예수님이 세상으로 오시고 우리는 하늘로 들림을 받게 됩니다.”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다미선교회에 모인 흰 옷 입은 신도 1000여명은 예정된 시간에 자신들이 휴거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열광적인 기도에 빠져들고 있었다. 교회 앞 주택 대문 위에 설치된 멀티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예배 모습을 지켜보던 취재기자 200여명은 뒤숭숭하면서도 희극적인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운명의 시각’인 자정에 과연 이들의 기이한 주장이 현실이 될까. 자정에 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면 199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는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 될 터였다. 이들 중에는 모든 것을 두고 하늘로 갈 텐데 세속의 물질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선교회를 이끌던 이장림 목사에게 재산을 헌납한 이들이 많았다. 부동산을 팔고, 전세금을 빼고, 직장에서 종말론을 전파하다 해직된 뒤 받은 퇴직금도 아낌없이 바쳤다. 어차피 하늘로 함께 ‘들림’을 받을 목사에게도 물질은 필요하지 않았을 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목사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92년 9월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사기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신도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지상이 아닌 천상의 삶이었다. 지상에서의 시련 따위는 가뿐하게 이겨낼 것이었다. 그리고 자정으로 운명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십, 구, 팔… 삼, 이, 일, 땡! 교회는 찬송가도 기도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한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목소리 큰 한 방송사의 리포터가 손나발을 만들어 ‘휴거 됐어요?’ 외치자 잠시 후 하얀 휴거 복장을 한 중학생이 비좁은 유리창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교회 안과 밖의 첫 대화였다. ‘휴거요? 누가요? 나도 원래 안믿었어요.’ 사뭇 심각한 얘기가 나올 줄 알고 침을 삼켰던 보도진과 구경꾼들은 일제히 ‘와하하하’ 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세상에 저런 코미디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일순간 온몸의 기운이 쭉 빠졌다.” 휴거는 목사의 말대로 ‘에러’가 났고, 신도들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갔다. 실망한 이들이 자살소동을 벌이는 일도 없었다. 온 국민이 TV생중계로 구경한 사건은 시시하게 마무리되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났다.
ㆍ스티븐 호킹 "천국은 없다… 동화 속 이야기일 뿐" 무신론자인 영국의 과학자 스티븐 호킹(70)이 인터뷰를 통해 사후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15일(현지시간) 가디언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호킹은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호킹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지만 빨리 죽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며 “그 전에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같이 그것의 요소들이 고장나면 작동을 멈춘다고 생각한다”며 “망가진 컴퓨터에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으며 그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 속의 이야기일뿐이다”고 주장했다. 인터뷰에서 호킹은 사후 세계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했다. 호킹은 “우리는 우리 행동의 가장 최고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며 우리의 삶을 잘 이용해서 지구에서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호킹은 21살 때 루게릭병으로 알려진 운동신경원 질환(MND, Motor Neuron Disease) 진단을 받았으며 49년 동안 이 병과 싸워오고 있다.
A. 연구목적과 문제제기
우리는 위에서 종말에 대한 두가지 태도를 볼 수 있다. 종말에 대해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는 다미선교회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스티븐 호킹과 같이 종말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종말에 대한 태도가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두 부류의 공통점은 종말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다미선교회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미혹에 빠지게 되고 스티븐 호킹과 같은 태도를 보이면 노아의 때(마 24:36-39)와 같이 부지불식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종말론적 신앙을 이야기하는데 종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종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통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며, 세상에 종말에 대해 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B. 연구방법과 연구범위
종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위해서 성경신학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종말에 대해 성경 각각의 책들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순서대로 살펴보는 것은 종말에 대해 이해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종말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의 내용들을 나열하기만 하면 더 혼란스럽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종말이 무엇인지, 종말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종말과 관련된 소주제들을 Ⅱ장에서 연구하기로 한다.
Ⅱ장에서는 종말과 말세, 예언적 종말과 묵시적 종말,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 천국(하나님 나라)과 천년왕국 등 종말과 관련된 소주제들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할 수 있는 용어끼리 묶어서 살펴볼 것이다. 이 용어들의 사전적 의미와 함께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연구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종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다.
Ⅲ장에서 전체를 요약하고 Ⅳ장에서는 연구한 내용들을 교육과 설교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제시한 후 Ⅴ장에서 결론을 맺도록 한다. 마지막 Ⅵ장에서는 요한계시록의 이해를 돕기 위해 M.Div. 과정 신약개론 시간에 발표했던 발제물 중 번 포이쓰레스의『요한계시록 맥잡기』를 요약발췌한 내용을 부록으로 실었다.
성경신학 과목은 다른 신학자들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자체를 연구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이번 발제물은 가급적 참고문헌을 최소한으로 했다. 그래서 각주는 거의 성경구절과 사전으로 채워넣었다. 단, 천년왕국을 연구함에 있어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을 주석하는 부분에서 정훈택의 “하나님 나라와 천년”이라는 논문을 참고하였으며 Ⅵ장은 번 포이쓰레스의 요한계시록 맥잡기』를 요약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Ⅱ. 종말과 관련된 주제들
종말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종말과 관련된 주제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종말과 말세가 무엇인지, 그 차이가 무엇인지를 성경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종말이라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예언적 종말과 묵시적 종말의 차이,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의 의미,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의 의미, 천국(하나님 나라)과 천년왕국의 개념들을 차례대로 살펴볼 것이다.
A. 종말(終末)과 말세(末世)
종말이란 용어는 한자어 終(마치다, 끝내다, 죽다)과 末(끝, 마지막, 시간의 끝)이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즉 이 용어는 ‘시간의 끝을 마치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는 ‘계속된 일이나 현상의 맨 끝’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말이라고 하면 먼저 미래의 어떤 시간에 일어날 일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이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바로 그날, 그 시점을 말한다.
반면, 말세란 용어는 한자어 末(끝, 마지막, 시간의 끝) 世(세상, 시대)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즉 이 용어는 마지막 시대나 마지막 세상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는 ‘정치, 도덕, 풍속 따위가 아주 쇠퇴하여 끝판이 다 된 세상’, 또는 ‘예수가 탄생한 때부터 재림할 때까지의 세상’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말세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이 말세의 끝에 종말이 오는 것이다.
도표 1. 신약의 종말과 말세에 대한 이해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말세(the last days)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재림(종말) |
따라서 종말론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용어이다. 종말은 영어로 eschaton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신학적인 전문용어로써, 헬라어 e[scaton(끝, 마지막)에서 가지고 왔다. 여기에서 eschatology(종말론)이라는 단어가 파생된다. 성경에서는 명사보다는 거의 형용사 e[scato"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용어는 성경에서 시간의 끝이라는 의미와 함께 공간의 끝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때로는 순서의 끝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용어가 종말론적인 의미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hJmevra(날, 낮, 하루, day), w{ra(시간, 때, 시점, hour), crovno"(시간, 때, 기간, time), kairov"(시간, 시점, 결정적인 순간, moment)와 같은 단어들과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절들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말세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구별해야만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e[scato"와 결합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또 그 단어가 단수로 사용되었는지, 복수로 사용되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전부 hJmevra를 사용했는데, 또한 전부 단수로 나타난다. 그리고 몇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종말 때의 부활과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hJmevra를 사용한 다른 성경구절에서는 전부 복수(hJmevrai")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말세 때의 징조와 사건들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hJmevra가 단수(마지막 날)로 사용될 때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을 의미하며 복수(마지막 날들)로 사용될 때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ra는 ‘어떤 것을 위해 지정된 시간’을 의미하며 e[scato"와 함께 사용된 것은 요한일서 2장 18절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마지막 때’라는 의미가 된다. 이 단어는 다른 구절에서의 용법을 살펴보면 어떤 사건이 정해져 있으며 그 사건이 곧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즉, 이 이 단어는 종말과 관련해서 예수께서 곧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crovno"는 베드로전서 1장 20절에서는 복수로, 유다서 1장 18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문맥적으로 볼 때 둘 다 말세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crovno"는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는데, 베드로전서에서는 이 시간이 거듭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되었고 유다서에서는 이 시간을 하나의 시기로 표현하였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오신 것이 이 말세에 나타났으나 종말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거듭되어야 함을 표현하였으며, 유다는 말세 중에서도 이단이 횡행하는 자신의 시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kairov"는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간(때), 종말론적으로 찬 때'를 가리키며, 따라서 '위기의 시간(때),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라는 의미도 지닌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에서 이 단어는 구원의 때를 말한다. 즉, crovno"의 시간 속으로 구원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이 들어온 사건을 kairov"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crovno"와 kairov"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고전헬라어 용법에서 crovno"가 시계의 시간, 달력의 시간, 운명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kairov"는 의미의 시간, 도전의 시간, 결단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crovno"의 시간 속에 kairov"의 시간이 들어오게 된다. 즉, crovno"는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며 이 시간 속에서 결단과 행동을 통해 kairov"라는 유의미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결단과 행동을 하는 주체가 인간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다. 인간이 결단하고 행동한 결과는 일반역사, 즉 세속사가 되고 하나님이 결단하시고 행동한 결과는 하나님의 역사, 즉 구속사가 된다.
도표 2. 하나님의 카이로스와 인간의 카이로스
하나님의 카이로스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말세(the last days)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인간의 카이로스 재림(종말) |
사도행전 1장 7절은 crovno"와 kairov"가 함께 나온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6-8)
6 OiJ me;n ousunelqovnte" ejphrwvtwn aujto;n levgonte", Kuvrie, eij ejn tw'/ crovnw/ touvtw/ ajpokaqistavnei" th;n basileivan tw'/ !Israhvl_
7 eide; pro;" aujtouv", Oujc uJmw'n ejstin gnw'nai crovnou" h] kairou;" ou}" oJ path;r e[qeto ejn th'/ ijdiva/ ejxousiva/:
8 ajlla; lhvyesqe duvnamin ejpelqovnto" tou' aJgivou pneuvmato" ejf! uJma'", kai; e[sesqev moi mavrture" e[n te !Ierousalh;m kai; ejn pavsh/ th'/ !Ioudaiva/ kai; Samareiva/ kai; e{w" ejscavtou th'" gh'".
앞절(6절)에서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한다.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주님, 이때에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나라를 회복시켜주십니까?”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crovno"(단수)를 사용하였다. 즉, 제자들은 “주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 안에 이스라엘에게 그 나라를 회복시켜주십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세에 두신 때(crovno"의 복수)와 기한(kairov"의 복수)은 너희가 알 것 없다.”라고 대답하신다. 즉,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세에 두신 거듭되는 시간들과 하나님이 결단하시고 행동하시는 구속사들은 너희가 알 것 없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 안에 있으니 인간인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어지는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종말과 말세에 대한 개념이 신약과 약간 다르다. 평화와 축복의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고(사 2:2-4) 이스라엘이 다윗 가문의 왕 아래서 구원받게 될(호 3:5) 마지막 시대를 가리켜 말세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이스라엘은 세상 끝날에 메시야가 와서 이방을 멸하고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종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습 1:14-18, 욜 3:14-21). 이러한 희망은 보통 하나님의 일회의 종말론적 오심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도표 3. 구약의 종말과 말세에 대한 이해
창조 종말(야훼의 날)-말세 |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 3:4-6)
이 비밀은 그리시도의 비밀이다. 이 비밀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는 성령으로 나타내셨으나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비밀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감추어져 왔을까? 그것은 사단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귀신이 이렇게 외친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 9:28,29)
귀신들조차 예수께서 미리 오실 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의하면 아직 야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는 징조가 없었기 때문이다(욜 2:31). 사단과 귀신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종말 때에 오실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때가 이르기전에’ 미리 오신 것이다.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미리 오셔서 말세라는 기간을 만들어 주셔서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말세는 우리에게 구원의 때요 은혜의 때가 되는 것이다.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B. 예언(豫言)적 종말과 묵시(黙示)적 종말
예언이란 용어는 한자어 豫(미리, 먼저)와 言(말씀, 말)이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즉 이 용어는 ‘미리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함’ 또는 ‘기독교에서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또는 그런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역사서도 예언서로 구분한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의 역사들은 과거의 사건들의 기록이지만,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역사들은 사실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역사를 통해 미래를 예견할 있다는 점에서 역사 자체가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시대(역사)를 분변하라고 말씀하신다(눅 12:56). 시대(역사)를 바로 봐야 미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묵시란 용어는 한자어 黙(잠잠하다, 입다물다, 묵묵하다)과 示(보이다, 보다, 알리다)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즉 이 용어는 ‘말로 하지 않고 그림을 그려 보여주듯이 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국어사전에는 ‘직접적으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임’ 또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계시를 내려 그의 뜻이나 진리를 알게 해 주는 일’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전형적인 묵시문학이다. 요한은 천상계의 일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예언과 묵시의 차이는 그 배경에서 드러난다. 예언은 이스라엘이 평안하던 중에 나타나며 묵시는 고난 중에서 나타난다. 예언은 평안하던 이스라엘이 곧 멸망당할 것에 비중을 두고 말하며 묵시는 나라를 잃고 기나긴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이 곧 회복될 것에 비중을 두고 말한다. 따라서 예언은 회개를 촉구하며 묵시는 소망을 이야기한다.
예언과 묵시 모두 미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예언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이 땅과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의 종말을 말하며 묵시는 온 세상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종말을 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언적 종말은 종말이 역사 안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묵시적 종말은 종말이 역사 밖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기대한다. 이 역시 시대적 배경에 따를 차이라고 하겠다. 평안할 때는 비록 약간의 고통이 닥쳐도, 그 고통이 곧 끝나고 이 땅에서 좀더 나은 삶을 살기를 소망할 것이고 기나긴 고난 중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소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은 신약보다는 구약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구약의 개념에서는 메시야가 두 번 오실 필요가 없다.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 외에 이방 나라를 멸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때가 종말이다. 묵시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구약의 개념을 이어받았다.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신약시대에 와서 변화되었다. 이제 구약의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성취되었고, 묵시는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이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온 세상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히 다른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뀔 것이다.
도표 4. 예언적 종말과 묵시적 종말의 차이
말세(the last days) |
||||
창조 예언적 종말 묵시적 종말 |
C. 개인(個人)적 종말과 역사(歷史)적 종말
우리는 종말이라고 하면 전세계적인 역사적 종말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임박한 종말은 사실 개인적 종말이다(히 9:27). 역사적 종말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나 의미가 있지 내가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론 신자들은 역사적 종말에 부활하지만 그것 역시 신자가 살아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결과일 뿐이다(요 5:24).
역사적 종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듯이 개인적 종말도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역사적 종말이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된 말세의 끝이듯이 개인적 종말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중생한 순간 시작된 인생의 끝이다. 역사적 종말이 성령께서 오셔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듯이 개인적 종말도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개인의 삶을 인도해 가신다. 역사적 종말 이후에 성도들은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가듯이 개인적 종말 이후에 성도는 영원한 시간(영생)으로 들어간다.
도표 5.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
5-1. 역사적 종말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말세(the last days)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
5-2. 개인적 종말
영원 |
성화의 시간 |
영원 | ||
탄생 중생 성령 구원(종말) |
D. 시간(時間)적 종말과 공간(空間)적 종말
우리는 종말이라고 하면 주로 시간의 끝을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의 끝에, 우리가 사는 공간인 이 땅도 끝나고 새하늘과 새땅이 된다(계 21:1). 앞에서 형용사 e[scato"가 시간의 끝이라는 의미와 함께 공간의 끝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종말이라고 할 때 우리는 시간적 종말과 함께 공간적 종말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시간적 종말에서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을 말한다. 즉, 시계의 시간, 달력의 시간, 운명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결단하고 행동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때, 그 시간의 끝에서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반면, 공간적 종말은 하나님께서 결단하고 행동하셔서 최종적으로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사건을 통해 인간은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시간적 종말만을 강조하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인본주의가 싹트게 되고, 공간적 종말만을 강조하면 인간의 역할을 무시하는 시한부 종말론이 등장하게 된다.
구약에서는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의 개념보다는 상황의 끝이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마지막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tyrIj}}a 는 주로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ymiY:h' tyrij}a' (아하리트 하야밈)이라는 형태로 사용되어 문자적으로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단어는 역사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끝, 결말, 결국을 말할 때 사용한다. 구약의 종말은 역사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약의 종말은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끝, 결말, 결국을 의미한다. 구약에는 역사적 종말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단지 자기 민족이 당한 고난이라는 상황이 끝나는 것을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포로기를 거쳐 중간기에 와서 공간적 종말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포로기와 식민지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통해 이방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공간적 종말을 기다린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이러한 기대를 품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이다.
도표 6. 공간적 종말
공간적 종말에서는 인간의 역할이 없다.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행위에 의해 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인간은 단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여기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위치에 머문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서 역할을 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해야 했었는데 오직 자신들의 나라가 회복되는 날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했다. |
천국
땅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한다. 제자들은 이때까지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간적 종말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세에 두신 때(crovno"의 복수)와 기한(kairov"의 복수)은 너희가 알 것 없다.”라고 대답하신다. 공간적 종말이 이루어지는 때는 하나님의 권세 안에 있으니 너희가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은 분명히 장소를 지칭하지만, 그 장소를 이동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게 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에 두신 공간적 종말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너희가 해야할 일, 시간적 종말로 가는 그 과정에 관심을 두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20절에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다. 또한 마태복음 24장 14절의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말씀과도 연결된다. 결국 종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의 종말은 하나님께서 최후에 이루실 공간적 종말이 없다면 완성되지 못한다. 우리가 시간의 종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공간적 종말은 도적같이 이를 것이다. 우리는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늘 깨어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도표 7.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
공간적 종말(하나님의 카이로스)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말세(the last days)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
시간적 종말 (인간의 카이로스)-복음전파
E. 천국(하나님 나라)과 천년왕국(千年王國)
종말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천년왕국이다. 천년왕국의 존재유무에서부터 천년왕국이 예수님의 재림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를 위해 먼저 천국(하나님 나라)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천년왕국은 천국의 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언제, 어디에 임하는지 성경을 근거로 알아보고 나서 천년왕국의 근거가 되는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을 주석하면서 과연 천년왕국은 존재하는 것인지, 그것은 종말의 사건인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하는가?
도표 8. 하나님 나라
승천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하나님 나라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
초림 - 하나님 나라 임함 - 성자 - 영역(영토)
말세 - 하나님 나라 확장 - 성령 - 국민(백성)
재림 - 하나님 나라 완성 - 성부 - 주권(통치)
하나님 나라는 주권, 영역, 백성 중 어느 하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 그 주권이 미치는 영역, 주권을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구성되는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초림하셨을 때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여서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그 주권을 돌려드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주권, 성자 예수님의 영토, 성령 하나님의 백성이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오심으로 과거에 이 땅에 임하였고, 성령의 임재로 현재 확장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a. 과거에 임했던 하나님 나라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임하였다’는 뜻을 가진 헬라어 동사 ‘프사소멘 φθασωμεν(φθανω의 과거형)’은 신약에서 다섯 번 나온다. 그 중 네 곳(롬 9:31; 고후 10:14; 빌 3:16; 살전 2:16)에서 이 동사의 의미는 분명히 어떤 것이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씨앗이 심겨졌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의 영토를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이 영토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는 점점 크게 확장될 것이다.
b. 현재에 확장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시작되었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했으며 지금도 전도자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
c.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11:2)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완성될 것이며 주님 혹은 인자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해 간구하며(마 6:10), 그 날에 그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며(마 25:34), 그 때에 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막 9:43-45,47), ‘영생’(막 10:17, 23-25; 마 25:34, 46)을 얻는 것이며 ‘주인의 즐거움’(마 25:21,23)과 ‘메시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마 8:11; 막 13:25; 눅 14:15)이다. 또한 ‘구원을 받는 것’(막 19;23-26)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각각의 경우들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올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시리니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4-26)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사단의 권세를 멸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이다. 예수께서 왕으로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은 사단을 멸하시기 전까지이다. 그 이후에는 주권을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a. 하늘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성경에서 헬라어 단어 우라노스(ούρανός)는 공간으로서의 하늘(sky)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heaven)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시는 나라가 하늘에 있다는 뜻으로서 이 땅에 이 하나님의 주권이 완전히 회복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된다는 미래적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b. 너희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당대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두 가지 사상 즉, 하나님의 나라가 순전히 미래적 이라는 것과 또 눈에 볼 수 있는 세상적 나라라는 사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자신이 선호하는 나라는 근본적으로 영적일 뿐 아니라 이 나라는 바로 그들 자신이 서 있는 영적인 실재로 이미 현존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는 과거적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수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기에 현재적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수도 있다.
3. 천년왕국이란 무엇인가?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용어이다. 따라서 구약에 천년왕국에 대한 개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외의 다른 신약의 책들에도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게다가 이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도 20장에서만 나타난다. 이렇게 성경에서 천년왕국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다 보니 오랜 시간동안 기독교회사에서는 천년왕국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존재하는가에서부터 있다면 언제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로서, 이로 인해 후천년설, 무천년설, 전천년설 등 세가지 천년왕국설이 제기되었다.
a. 천년왕국은 존재하는가?
천년왕국이란 요한계시록 20장 4-6절에 기록되어 있는 “천년동안 왕노릇하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나온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사실 천년왕국 이론은 조직신학에서 등장한 것이지 성경적인 용어는 아니다. 본문에는 “천년왕국”이라는 용어가 없다. 단지 4절과 6절에 “천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라고 번역된 내용이 있을 뿐이다. 천년왕국이라는 번역은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시대’나 어떤 ‘지상왕국’을 의미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왕노릇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basileuvw는 ‘왕이 되다,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다’에서 ‘통치하다’,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다스리는 주체가 왕이라면 ‘왕노릇하다’가 ‘왕이 되다, 왕의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고, 다스리는 주체가 다른 것이라면 ‘왕노릇하다’는 ‘통치하다, 다르시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누가복음 1장 33절, 고린도전서 15장 25절, 요한계시록 11장 15절은 다스리시는 주체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왕노릇하다’가 ‘왕이 되다,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로마서 5장 14절, 6장 12절에서는 왕노릇하는 주체가 사망이나 죄가 되기 때문에 ‘통치하다, 다스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왕과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왕노릇한다’는 것은 그들이 왕이 된다거나 왕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린다, 왕과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전제이다. 성도들은 자신들 스스로 통치하고 다스릴 수 없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할 뿐이다. 6절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왕노릇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성도들은 왕으로서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이미 1장 6절에 나타나 있다. 1장 6절에는 성도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미래에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에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며 현재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즉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은 복음서의 ‘천국’의 시간적 표현이다. 반대로 ‘천국’은 ‘천년’의 시공간적 표현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며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문자적,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천국(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이며, 미래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도표 9. 천년왕국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천년왕국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
b. 천년왕국은 종말의 사건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6절 상반절의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부활’과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이 종말 때의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둘째 부활이라는 표현이 있을 법 하며, 둘째 사망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첫째 사망이라는 표현도 등장할 법 한데 성경에는 그러한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은 무엇이고 ‘둘째 사망’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알려면 요한의 다른 작품인 요한복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공관복음의 ‘천국’과 비슷한 개념을 갖는 단어는 ‘영생’이다. 공관복음에서 천국이 예수께서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현재도 확장되고 있고 종말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듯이 요한복음의 영생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생명이 왔고(요 1:4) 현재 그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고, 종말에 부활하여 완전한 영생으로 들어간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된다. 반대로 믿지 않는 자는 사망한 상태로 남게 된다. 즉 그들은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예수님께는 죽은 자들로 간주되는 것이다. 25절에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종말에 성도들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사람들이 듣는 순간 살아난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11장에서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절)라고 하셨다. 마르다는 24절에서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 죽은 자가 살아나고 현재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살다’, ‘죽다’라는 단어가 그 본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죽음 이후의 문제나 예수님의 재림, 종말, 부활 보다는 현재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어지는 거듭남, 살아남, 영적 생명, 영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종합하면 요한계시록 20장 6절의 ‘첫째 부활’은 종말 때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한다. 자연스럽게 ‘둘째 부활’은 종말 때의 부활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 역시 종말 때의 사망을 의미하며 ‘첫째 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게 된다. ‘첫째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은 사람은 종말 때의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고 ‘둘째 부활’을 통해 완전한 영생으로 들어간다. ‘첫째 사망’을 통해 심판을 받은 자는 종말 때의 ‘둘째 사망’으로 영벌로 들어간다.
도표 10. 첫째부활과 둘째사망
10-1. 개인적 종말과 관련된 첫째 부활
영원 |
성화의 시간 |
영원 | ||
탄생 중생 성령 구원(종말) 신 자:첫째 부활 불신자:첫째 사망 |
10-2. 역사적 종말과 관련된 둘째 사망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말세(the last days)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신 자:둘째 부활 불신자:둘째 사망 |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종말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께서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바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적인 사건이다.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천년왕국의 끝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새하늘과 새땅을 건설하실 것이다.
3. 소요약
도표 11.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천국(하나님 나라) 천년왕국 |
예정된 시간 |
영원 |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
하나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셔서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개념과 함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에서 공간적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을 주석한 바에 따르면 미래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천년은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천국의 시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6절에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왕노릇한다’는 표현에 근거한다. 여기서 왕노릇한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basileuvw는 ‘통치하다, 다스리다’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왕이 아니라 제사장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제사장이 되어 왕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이 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요한계시록 1장 6절에 의하면 성도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라고 하여 이미 성도들은 이땅에서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은 미래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천년왕국의 끝에 종말이 오는 것이다.
Ⅲ. 전체요약
도표 12.
영원 |
선재하는 시간 |
말세(the last days) 은혜의 때, 구원의 날 성화의 과정 시간적 종말 천국(하나님 나라) 천년왕국 |
예정된 시간 |
영원 |
역사적 종말: 창조 초림 성령 재림(종말) 예언적 종말 묵시적 종말 개인적 종말: 탄생 중생 성령 구원(종말) 공간적 종말 |
지금까지 종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종말과 관련된 여러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먼저 종말과 말세에서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며 종말을 그 말세의 끝이라는 것을 헬라어 에스카토스와 이 단어와 결합된 시간과 관련된 단어들(헤메라, 호라, 크로노스, 카이로스)등을 통해 알게 되었다. 특히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비교하면서 신자들은 무의미한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지 말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기다려야 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 쪽에서의 카이로스는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다. 또한 초림이라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들에게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최종적인 카이로스인 종말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우리들의 카이로스인 복음전파를 위해 결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할 것이다.
예언적 종말과 묵시적 종말에서는 예언과 묵시는 모두 미래의 최종적인 구원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예언적 종말은 역사 안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묵시적 종말은 종말이 역사 밖으로부터 오는 것을 기대한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성취되었고, 묵시는 예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이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은 완전히 다른 새하늘과 새땅으로 바뀔 것이다.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에서는 둘 다 종말의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고,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며, 성령께서 종말까지 인도하시고, 종말 이후에 영원한 시간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살폈다. 그러나 역사적 종말보다는 개인적 종말이 더 임박한 종말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역사적 종말에 관심을 갖기보다 개인적 종말을 항상 염두에 두고 매일 매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에서는 시간적 종말은 인간이 결단하고 행동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 때, 그 시간의 끝에서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며, 공간적 종말은 하나님께서 결단하고 행동하셔서 최종적으로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사건을 통해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특히 사도행전 1장 6-8절에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시간적 종말을 사는 신자들의 사명이며,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는 이 사명을 다했을 때 종말이 온다고 하였다.
천국(하나님 나라)과 천년왕국에서는 천국과 천년왕국은 같은 개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하나님 나라(천국)는 예수님께서 초림하셨을 때 이미 이 땅에 임하였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셔서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개념과 함께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에서 공간적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을 주석한 바에 따르면 미래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천년왕국은 미래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천년왕국의 끝에 종말이 오는 것이다.
Ⅳ. 적용
여기서는 지금까지 연구한 종말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가르치고 설교할 것인지를 적용해본다. 먼저 종말에 대한 교육은 교육학의 이론에 따라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평가라는 교육과정의 틀을 갖추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설교는 주제설교와 본문설교의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A.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교육학에서는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평가라는 교육과정을 따라 교육계획을 세운다. 종말에 대해 교육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교육학의 이론을 따랐다.
1. 교육목적
우리는 종말에 대한 두가지 태도를 볼 수 있다. 종말에 대해 열성적으로 관심을 갖는 다미선교회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스티븐 호킹과 같이 종말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종말에 대한 태도가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두 부류의 공통점은 종말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다미선교회와 같은 태도를 보이면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미혹에 빠지게 되고 스티븐 호킹과 같은 태도를 보이면 노아의 때(마 24:36-39)와 같이 부지불식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종말론적 신앙을 이야기하는데 종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 성경공부는 종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통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며, 세상에 종말에 대해 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2. 교육내용
종말이 무엇인지, 종말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종말과 관련된 소주제들을 공부한다.
1) 종말과 말세
2) 예언적 종말과 묵시적 종말
3) 개인적 종말과 역사적 종말
4) 시간적 종말과 공간적 종말
5) 천국(하나님 나라)와 천년왕국
6) 요한계시록의 이해
3. 교육방법
인도자의 일방적인 강의보다는 참석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위해서 강의 전과 강의 후 토론 주제를 제시하고 나눈다.
강의 전
1) 종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2) 만약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먼저 준비하시겠습니까?
3) 3일 후에 죽는다면 3일 동안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4) 요한계시록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강의 후
1) 말세를 살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2)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필요한 사상은 예언적 종말입니까, 묵시적 종말입니까?
3) 시간적 종말의 과정에서 당신은 무엇으로 복음전파를 하시겠습니까?
4) 당신은 현재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5) 요한계시록에 대해 새롭게 안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4. 교육평가
강의 후에 참석자들이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 쪽지시험을 치른다.
시험지 끝에는 앞으로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다짐하는 결단의 글을 쓰도록 한다.
B.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종말에 대해 설교할 때는 주제 설교와 본문 설교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위에서 연구한 종말과 관련된 주제들을 성경 구절들을 근거로 5주에 걸쳐 설교하여 종말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게 한 후, 요한계시록을 강해 설교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권면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연구한 주제에 들어있는 성경 본문을 분석하면서 설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장 6-8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아 분석하고 종말의 때에 신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다.
Ⅴ. 결론
발제물을 준비하는 기간에 인터넷 신문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기사가 올라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종말의 때는 본 발제물을 완성한 날(5월 21일)이다. 그런데 지금(밤 9시 30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기 전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이 발제물을 완성해야 한다. 이것이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가 아닐까?
마태복음 24장 40, 41절에는 어떤 사람은 밭을 갈다가, 어떤 여자는 맷돌을 돌리다가 종말을 맞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냥 일상적인 일을 하다가 종말을 맞는 것이다. 직업도 버리고 재산 다 바치고 종말의 날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신자들이 시한부 종말론에 현혹되고 이단에 빠지는 이유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같은 이단들은 성경공부하자고 달려드는데 교회 지도자들, 목회자들은 무조건 피하라고만 한다. 그러는 사이 이단들은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소극적인 방어자세에서 벗어나 좀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성경으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종말론에 있어서도 정확하게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신자들이 시한부 종말론 같은 것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지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까지 우리가 해야할 일이 있다. 종말은 우리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만 오는 것이다. 이러한 종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를 통해,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며, 세상에 종말에 대해 바르게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란다.
Ⅵ. 부록(『요한계시록 맥잡기』요약발췌)
성경에서 종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고 오해하고 있는 책도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종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해야겠기에 번 포이쓰레스의 『요한계시록 맥잡기』를 요약발췌하여 소개한다.
A.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주의할 점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겸손해야 한다.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며 지금까지 알고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이라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계시록으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것은 우리의 공상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종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특정한 사람만 알 수 있는 비밀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료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계시록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계시록을 그릇된 목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상징적인 단어나 숫자에 집착하다 보면 계시록의 큰 그림을 무시하게 된다. 계시록은 일종의 그림책이지 수수께끼 책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성도들에게 갈채를 보내며, 짐승을 증오하고, 마지막 승리를 사모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먼저 1세기에, 로마의 박해 하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전체적인 주제를 잡아 나가면서 읽어야 여러 가지 오류를 피할 수 있다.
B. 큰 그림(주제)을 가지고 해석하기
우리는 계시록의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인 영적인 전쟁의 주제를 가지고 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예를 들 수 있다. 악의 세력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여 싸우나,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패배를 당한다.
계시록 12:3절에서 용과 계시록 13:1-8절에 묘사된 짐승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짐승은 놀랍게도 용과 흡사하다. 사실 그는 용의 한 형상이다.
사탄의 형상과 보조자인 짐승
사탄(12:3) |
보조자(13:1) |
모형 |
짐승 |
용 |
짐승 |
일곱머리 |
일곱머리 |
열 뿔 |
열 뿔 |
머리들 위의 면류관들 |
머리들 위의 면류관들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7). 용은 사탄의 한 그림으로(계 12:9) 하나님께서 창세기 1:27절에서 하신 것을 계시록 13:1절에서 흉내낸다.
골로새서 1:15-16절에서 따르면 심지어 만물의 창조 전에 삼위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이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모방의 관계를 본받고 있다.
사탄은 모방자이다. 그는 거짓된 아들, 짐승을 만듦으로써 성자 하나님을 흉내낸다. 짐승은 분명히 아들 그리스도의 모조품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되고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통제하기를 열망한다. 사탄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유사한 계획을 가진다. 사탄은 그의 집행자 짐승을 통하여 이 계획을 실현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위조품 짐승
짐승 |
그리스도 | |
면류관들 |
13:1 |
19:11-12 |
이름 |
13;1 |
19:11-13, 16 |
능력 |
13:2 |
12:5, 10 |
부활 |
13:3, 12 (~처럼) |
행 2:32, 눅 24:6 (실재( |
경배 |
13:4, 8 |
1:6 |
찬양 |
13:4 |
출 15:3, 11이하 |
인 |
13:16 |
7:3, 14:1 |
만국의 충성 |
13:7이하 |
5:9 |
계시록 13:11-18절에는 성령의 모조품도 나온다. 여기에 보면 땅에서 나오는 다른 짐승이 언급되었다(13:11). 이 짐승은 나중에 “거짓 선지자”로 밝혀진다(16:13). 거짓 선지자가 행하는 기적적인 표적들(13:13)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같이 성령이 행하신 기적적인 표적들을 상기시킨다. 기적적인 표적들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사람들을 이끄셨다. 이와 유사하게 거짓 선지자는 짐승의 경배를 장려한다(13:12). “다른 보혜사”로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진다(요 14:16, 18). 유사하게 거짓 선지자는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한다”(계 13:12).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요16:13). 거짓 선지자는 속인다(계 13:14).
그러므로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일종의 위조된 삼위일체를 형성한다. 그들은 마지막 전쟁을 위해서 백성들을 동원하여 조직할 때 삼인조로 함께 연결되어 있다(계 16:13).
위조된 삼위일체
원형 |
위조 |
기능 |
아버지 |
용 |
창작하고 계획한다. |
성자 그리스도 |
짐승 |
집행한다. |
증인으로서의 성령 |
거짓 선지자 |
증거하고, 선전한다. |
우리는 계시록에서 흉내내기의 또 하나 다른 양식을 연급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탄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로 구성된 부정한 삼위일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루어진 거룩한 삼위일체를 흉내내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계시록 19:7-9절에서 어린양의 순결한 신부로 묘사된다. 신부를 모조한 형상은 계시록 17-18장의 음녀이다. 음녀의 부패성과 부도덕성은 신부의 순결성과 대조된다. 음녀의 몰락은 신부가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19:1-6). 신부는 참된 경배자이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음녀가 거짓 경배자, 위조된 교회를 대표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사탄은 속임수와 교리의 혼잡을 통하여 교회를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그는 교회를 진리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애쓴다(12:15). 하지만 그는 역시 짐승과 음녀의 모양으로 그의 부하들을 일으켜 교회를 공격하게 만든다. 짐승은 국가권력을 대표하고 그것을 숭배하지 않는 자들을 박해하려고 위협한다. 그것은 위협과 고통과 죽음을 통해 신자들이 우상에게 굴복하도록 공포를 조성하려고 한다.(강압책, 채찍) 그것은 만일 당신이 굴복하지 않으면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일반화하여 우리가 인간의 조롱이든, 육체적인 고통이든, 빈곤이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경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의 치유책은 사람과 대립적인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이다.
그러나 사탄은 다른 방식의 공격도 한다(회유책, 당근). 음녀는 섹스와 돈과 쾌락을 대표한다. 협박과 두려움 대신에 음녀는 유혹과 쾌락의 매력을 이용한다. 이것의 치유책은 새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있고자 하는 욕망이다(계 22:4).
두 가지 양식의 반대에 대응하는 방법
교회의 사명 |
반대 |
반응 |
빛을 지닌 증거 |
짐승의 핍박하는 권세 |
인내(13:10) |
처녀의 순결성 |
음녀의 유혹적인 사치품 |
분리(18:4) |
흉내내기에서 배우는 교훈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거나 그를 대적한다. |
사탄은 단지 하나님을 모방할 수 있을 뿐이다(고후 11:13-14) |
모조품을 믿을 위험이 있다. |
사탄은 창조자가 아니다. |
우리는 모조품의 혐오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추종자들에 대한 적절한 심판은 짐승 아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은 사탄을 지배하신다(욥 1-2장, 시 76:10, 롬 8:28). |
C. 해석의 학파들
해석가들은 6:1-18:24절에 기록된 이상들이 성취되는 시기와 방식에 관하여 의견을 달리한다. 네 가지 주요 접근 방식 혹은 해서학파들은 수세기 동안 발전해왔다. 과거주의자들은 그 성취가 예루살렘의 멸망 때와 로마 제국의 멸망 때 혹은 로마 제국의 멸망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래주의자들은 성취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마지막 위기 때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주의자들은 1세기부터 재림까지 교회사의 과정에 대한 연대기적인 기본적인 개요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주의자들은 계시록의 장면들이 구체적인 사건들보다는 영적인 전쟁의 원리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본다. 이들 원리들은 교회시대 전 기간동안 적용되고, 반복된 구현을 가질 수 있다.
계시록의 해석방법
해석학파 |
성취의 시기 |
1-3장 |
4-19장 |
20-22장 |
과거주의자 (로마제국의 멸망까지) |
|
역사적 교회 |
현상황의 상징 |
하늘과 승리의 상징 |
미래주의자 (마지막 위기 중에) |
|
역사적 교회 또는 교회사의 7단계 |
미래의 고난,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교회의 배교에 대한 심판에 집중 : 그리스도의 재림 |
천년왕국, 사악한 자는 심판을 받아서 죽음 : 영원한 도성 |
역사주의자 (교회역사 전기간 동안) |
|
역사적 교회 |
역사사건을 상징 : 로마의 함락, 회교의 성행, 교황권의 타락, 종교개혁 |
최후의 심판, 천년왕국, 영원한 도성 |
이상주의자 (반복된 모형 속에) |
|
역사적 교회 |
선과 악의 갈등을 상징 |
선의 승리 |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계시록 13:1-8절을 해석하는지 고찰함으로써 해석학파들의 차이점을 예증할 수 있다. 짐승의 이미지는 언제 어떻게 성취되는가? 과거주의자들은 짐승 속에서 로마황제에 의한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본다. 미래주의자들은 미래의 적그리스도, 곧 데사로니가후서 2:3-12절에 묘사된 불법의 사람을 본다. 역사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한 교황을 여기서 발견한다. (그러나 일부 로마 카톨릭 역사주의자들은 마틴 루터가 묘사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이상주의자들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기독교인들을 위협하는 국가와 그 박해하는 권력을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들의 결합은 아마도 진리에 가장 가깝다. 계시록에서 상징적인 표현은 다중적인 측면을 가지며 원리상 다중구현이 가능하다. 이상주의자들은 일반적인 원리들이 표현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들 원리들은 1세기의 일곱 교회들과 그들의 고통에 구체적인 적합성을 가졌다(1:4). 원리들은 또한 재림의 마지막 위기에 결정적으로 표현될 것이다(22:20). 우리 자신들은 동일한 영적인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원리들은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시대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구절들은 적어도 세 개의 주된 적용, 다시 말해서 1세기, 마지막 위기, 우리가 처해 있는 시대에 각각 적용된다.
1. 이상주의로부터 얻는 통찰 : 성취의 반복된 유형
- 계시록은 “그의 종들”(1:1; 22:6)에게 주어졌다. 이로써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의 모든 신자들을 포함한다(22:18).
- 2-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들은 모든 곳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
2. 미래주의로부터 얻는 통찰 : 마지막 위기 때의 성취
- 어린양의 혼인 만찬에서 축하(19:6-9)와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 위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19:11-21)은 틀림없이 재림을 가리킨다.
- 21:1-22:5절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상은 재림의 다른 편에 있는 완전함을 보여준다.
- 1:3절에 언급된 “때”는 22:10-12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때이다.
-“모든 눈이 그를 볼 것이다”는 1:7은 재림을 묘사한다.
-“그렇다, 내가 곧 오리라”는 마지막 약속(22:20)은 재림을 가리킨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란 경배의 반응(22:20)은 원래 아람어로 (마라나타, Marana tha) 초대교회의 기도 “오소서, 오 주여”를 반영한다(고전 16:22).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만찬에서 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의미로 “오실 수도” 있고, 예루살렘의 멸망 때와 같이 불신에 대한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 “오실 수도” 있는 것을 알았다(눅 21:20-24). 그러나 우리는 이 기도에서 가장 흥분되고, 결정적이며, 모든 것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그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배제시킬 수 없다(살전 4:13-5:11). 재림은 초대교회의 가장 큰 소망이었고, 1세기 신자들은 이 소망을 염두에 두고 계시록을 읽었을 것이다.
3. 과거주의로부터 얻는 통찰 : 로마제국에서 성취
과거주의적인 해석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계시록과 일곱 교회들의 상황과의 연결에 있다. 2-3장에 등장하는 모든 메시지는 도시 내의 더 넓은 환란에 대한 미묘한 암시와 1세기 교회상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포함한다.
- 계시록은 묵시문서다 묵시문서는 먼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당대의 시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묵시문서들은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을 포함한다.
- 때가 가깝다(1:1, 3; 22:10)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까울 수도 있고, 곧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가능성의 진술이 아니라, 확신에 찬 주장을 제공한다.
4. 역사주의로부터 얻는 통찰 : 성취는 교회역사 전반에 나란히 펼쳐있다
이것은 시간의 선을 계시록 2-3장에 언급한 1세기부터 19:11-21절에 나오는 재림까지 늘어뜨리고, 그 사이에 있는 이상들을 세계역사의 사건들과 연결하려고 시도한다. 계시록의 이상들은 단순히 연대기적이 아니고 주제적이다. 그러므로 역사주의 접근은 그것이 엄격한 연대기적인 순서를 가정하는 한 포기되어야 한다.
D. 해석학파의 통찰들을 통합하기
역사주의 학파를 제외하고 모든 학파들은 상당한 장점을 가진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이것들을 통합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이상주의 접근법으로 출발한다면, 이것들이 어떻게 통합되는지 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계시록에 있는 이미지들은 다중적인 성취를 즐긴다. 이것들은 일반적인 유형을 구현하기 때문에 그렇다 미래주의를 지지하는 논쟁들은 계시록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직전에 있는 마지막 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다(살후 2:1-12 참고). 그러나 마지막 위기 때의 성취는 일반적인 유형과 마지막 위기 때의 그 유형의 구체적인 구현을 모두 가진다.
이와 같이 과거주의를 지지하는 논쟁들은 계시록이 일곱 교회와 그들의 역사적인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상징들은 1세기 때 구체적인 구현을 가지며, 우리는 이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역사 속 어딘가에, 다시 말해서, 계시록이 적용되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어딘가에 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오늘 우리들의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주의 접근 속에 약간의 진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계시록의 주요 상징들은 하나의 반복된 유형을 제시한다. 이 유형은 일곱 교회들은 1세기 상황 속에 실현을 가진다. 우리는 계시록의 교훈들을 우리가 처해있는 곳에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적인 구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참고 문헌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서울: 기독교문사, 2003.
『디럭스바이블』. 서울: 미션소프트, 2001.
이병철 편. 『바이블렉스4.0』, 서울: 브니엘성경연구소, 2003.
개역개정 성경
NIV 성경
정훈택, “하나님 나라와 천년”, 『신학지남』, 신학지남사, 1992 가을.
번 포이쓰레스, 『요한계시록 맥잡기』. 유상섭 역. 서울: 크리스찬 출판사. 2002.
H. 웨인 하우스, 『차트 신약』, 박용성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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