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 목사
▸ 어린아이와 세례와의 관계
세례가 더러운 것을 정결하게 한 다 할 때 사람이 손에다 물을 찍어 발라서 씻는 표시를 하는 것으로 그가 진정 내적으로 정결케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교회에 약속으로 주신 부분인 까닭에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서 시행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으로 그 안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어린아이들의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시지 우리는 알 길이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린아이도 붙드시사 그에게 중생의 은혜를 끼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라고 해서 아기인 까닭에 스스로 중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별다른 무슨 방법으로도 중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성령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셔서 중생의 은혜를 끼치시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이대로 그가 가지고 있는 부패한 품성과 죄로 말미암은 오염 때문에 제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특별한 은혜 가운데 성령께서 아이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하나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교훈이라는 큰 은혜 가운데 자라나면 굉장한 변동을 일으킨다거나 크게 감격하는 일은 대체로 적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없는 그대로 오히려 순조롭게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늘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늘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사고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그릇으로 이 땅위에서 영광스런 그 나라를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집안에서 어린아기들이 나면 아기들을 방치하지 않고 가급적 그리스도의 씻으시는 크신 역사를 받도록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례란 이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해서 교회가 행하는 것인데 그 명령에는 약속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물론 성령께서 사역하셔서 실제로 효과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나라를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시사 발전시켜 나가시는 데 어린아이들을 거룩한 교회의 일원으로 유효히 쓰신다는 것입니다.
▸ 은혜언약 안에 있는 가정
사람은 누구든지 사람인 까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 위에 편만 하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하나님을 모르고 자행자지하든지 오히려 마귀에게 속하든지 하면 자기의 자녀를 바로 가르칠 줄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오직 자기에게만 속해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서 자녀가 나오면 이 세상에 있는 질식할 만한 혼탁한 여러 가지 그릇된 정신과 사상으로 행복을 얻을 듯한 목표를 자녀에게 보여 주면서 가르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안에서 만큼은 이런 잘못들을 용납지 아니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자손이 번성하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직접 맡으사 당신의 거룩한 계회과 경륜하심을 따라 역사 위에서 계속 기르시면서 거룩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악한 왕에게서 선한 아들이 나온 것도 아실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같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선량하고 훌륭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감화로 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충실히 살고자 한 히스기야의 소원을 주께서 들으시고 말씀과 교훈으로 양육하여 주신 까닭입니다.
은혜의 언약 가운데 태어난 자식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가르치면 그는 하나님의 자식다운 의식을 가지려 하는 것이고 또한 마음 가운데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항상 하나의 중요한 인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이 남아 있을 때 성신님께서 그것을 쓰셔서 그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녀들을 땅 위에서 쓰셔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계획을 역사 위에 발전시키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확장이란 밖에 나가서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함으로만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교회 안에 있는 자녀들이 거룩한 도리 가운데서 장성해 가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유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서 교회의 확장이란 면모를 잘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들은 아무리 어린아이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의 일원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종교 모임에서도 반드시 회중의 한 사람 몫으로 다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결코 부모에게 붙어 다니는 어떤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명기에 나타난 중요한 법칙입니다(신29:11).
구약의 성례라면 유월절과 할례일 것입니다. 구약의 중요한 성례라면 유월절과 할례일 것입니다. 구약의 중요한 성례의 하나인 하례를 어린아이들에게 준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을 어려서부터 친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땅 위에서 장성시키시고 전진시키면서 유기적으로 그 나라의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크신 뜻이 또한 담겨 있는 것입니다.
▸ 가정의 유기적 작용
하나님 나라의 유기적 발전은 사람의 생활 형태 가운데 가정이라는 데서 제일착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의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유기적인 중요개체입니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흔히 피의 관계라고 자꾸 설명하지만 사실 피의 관계라는 말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신 자연 법칙에 의한 결과입니다. 피로 연결된 사실이 동인(動因)이 되고 능력이 되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법칙을 이미 마련하셨기에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칙에 의해서 가정은 다른 무엇보다도 강렬한 유대와 연결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피의 관계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개씨의 피를 받더라도 그것은 그것일 뿐 그의 생활 감정이나 모든 성향이 받은 피의 영향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피가 무슨 신비하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정이 다 같이 예수를 믿고 주님을 의지하여 한 신앙으로 밀고 나가는 것 같은 큰 복이 이 세상에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정이 그렇지 못하고 교회 밖에 있으면서 자기네 주장을 할 때에는 거룩한 교회의 지체된 개인에게는 심히 중요한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단체도 그렇게 부담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가정의 주장이 교회의 거룩한 주장과 나가는 길에 반대되든지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자꾸 나가려고 하면 그는 가장 큰 괴롬을 맛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강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정은 전체적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거룩한 교회의 한 세포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정이 개인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는 연결은 아닌 까닭에 개인의 신앙도 다 따로따로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신앙과 아내의 신앙이 꼭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목표와 행진이 동일한 방향으로 나간다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바른 교육을 받아 나가면 자연스럽게 동일한 방향을 취하고 나가되 거의 본능적으로 의식하고 따라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커서 여러 그릇된 이 세상의 물을 먹게 되는 까닭에 그 물을 먹고 잘못되는 일도 많습니다. 그럴 때라도 그런 대로 다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여러 도리와 교훈들이 있어서 거기 귀를 기울이며 바로 서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자녀들을 계약가운데 들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도 어린 자녀와 같이 나누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받는 징벌도 자녀와 같이 나누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부모는 가르치는 동안 그들이 하나님의 복의 그릇이 되도록 늘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복이 없이는 그 자녀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귀한 그릇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생활기조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생활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제 부모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볼 때 거기에서 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딱 믿고 신뢰하고 살아가는 부모의 생활 태도를 보면서 자식은 크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유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쓰이는 그릇이 되도록 자꾸 장성하게 하는 것이 부모이 중요한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가정을 쓰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약에 와서 서로 남남끼리라도 합해서 거룩한 백성과 한 식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고로 교회의 유기성이란 강렬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강렬한 유기성을 만드는 중요한 세포, 중요한 인자들은 바로 믿는 가정들입니다. 그런 믿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하나가 확실히 믿음 위에서 서서 그 가정을 이끌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누구보다도 가장이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를 보더라도 혹은 그 이후에 아브라함의 시대를 볼지라도 항상 가정을 단위로 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발전시키시고 또 교회로서 인정하신 것입니다.
복의 그릇이 될 책임자는 가장입니다. 만일 가장이 책임을 잘 이행하지 못하면 주부가 그 책임을 받아서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 살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할 때 가장이 못하면 주부라도 일어나서 책임을 지고 밀고 나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한 도리입니다.
▸ 유아세례를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의미 이상임.
유아세례가 지니는 심오한 의미를 잠깐 사이에 다 깨달을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부모가 어린아이을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 이상의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반드시 파악하셔야 합니다. 만일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하나님께 바친다 하는 의미라면 반드시 유아세례라는 형식을 취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은 헌상의 형식만 취하더라도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아이의 세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교파들이 있어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행치 아니하고 대신 어린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친다는 예식만을 행하기도 합니다.
세례란 하나님께서 은혜의 계약으로 사람을 부르사 계약의 머리로서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은혜 계약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를 받고 그와 일체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지만, 그 계약의 강한 세력은 거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반드시 유기적으로 역사 위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유기적 작용이 잘 나타나는 것은 한 개인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집합으로서 유기적인 작용을 한다고 할 때는 일반 사회에서 가정 밖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확장하시고 역사를 통해서 흘러 내려가게 하실 때에 개인뿐 아니라 개인으로 말미암은 그 가정에도 같이 계약의 의미를 끼쳐 주십니다.
이스마엘이나에서 같은 사람도 나면서부터 다 계약의 은혜 가운데 할례를 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보아면 가정을 통해서 거룩한 교회를 확장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회중에서는 어린아이들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이들은 아무 의미없이 부모에게 붙어다니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어린아이의 위치를 어른에 못지않게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을 당연히 용납하고 크게 환영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단속이 잘 되지 않아 떠들지라도 환영하고 부모가 책임을 지고 단속하는 것입니다.
▸ 은혜 언약의 복을 함께 나눔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내게 나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대개 이러한 사람들의 것이니라”(마19:14)하셨습니다.
아마 성인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기 위해 모두 모여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듯 울고 떠들고 왔다갔다 한 듯 합니다. 아이들이 가만히 않아서 들을 턱이 없지요. 자꾸 움직이는 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런 경향이니까 쉬자 않고 움직여야 하는 아이들한테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것도 대단한 고역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꾸 움직이고 하니까 제자들이 ‘에이, 너 여기 오면 안되겠다’하고 뒤로 물리려 할 때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아이들이 나오는 것을 용납해라. 이 아이들도 너희와 같이 진리를 들으려고 함께 돌아다닌다면 이것도 곧 내게 나오는 것이니라“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회중 안에서 같이 역하시는 까닭에 회중 가운데 있는 어린아이에게까지 같이 역사를 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내게 나오거든 그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자태가 너희 어른들보다 자연스럽게 어린아이에게 더 잘 구비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에게도 계약의 은혜를 베푸시려는 크신 뜻을 가지고 계약 가운데 두셨다는 사실을 심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 가운데 복을 나누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복을 주실 때는 어린아이도 복을 나누는 것이고, 만일 부모가 하나님을 배반하든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행자지하든지 세상으로 나가서 징벌을 받으면 어린아이도 같이 그 징벌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어린아이는 운명의 공동체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받고 있는 거룩한 은혜의 계약의 복을 어린아이도 나눈다는 것을 부모로서 책임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의 부모는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자기가 은혜계약의 복리와 하나님이 주시는 빛을 자녀와 나누어 가진다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려서부터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은혜의 계약 안에서 나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일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가운데 한 편만이 은혜의 계약 가운데 들어와 있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너로 인하여 너희 자녀도 거룩하니라’ 하셔서 구별되어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은혜의 계약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곧 그들에게 위대한 중생의 신앙이 똑같이 틀림없이 작용한다고 확인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 가운데 넣어서 그 안에서 자라게 할뿐더러 그 아이가 자기 의식이 생겨서 제 정신으로 서약하되 ‘하나님만 늘 의지하고 중생의 확신한 사실을 나타내고 살겠습니다’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가 어린아이 시기를 벗어나서 성인이 되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되는 까닭에 자기가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려서 세례 받은 아이들이 나이가 차서 철이 들고 제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고백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입교(入敎)를 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교회의 완전한 일원으로서 같이 모든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아기 세례란 부모가 이런 사실을 생각하고 ‘아이를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그 도리와 교훈과 사상으로 기르겠습니다’하는 중요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원래 성인의 세례도 자기의 서약의 한 증표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약 가운데 넣어 주셨다는 큰 증표가 되는 것이고, 자기로서는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세례를 받을 때는 부모가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이 아이는 저와 운명의 공동체로서 제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장성한 상태가 아니온즉 이제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제게 맡기신 의무를 앞으로 충실히 이행하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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