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크랩] 전직 승려가 말한 불교의 정체 (2)

수호천사1 2014. 12. 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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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땅에는 5만개의 불교 사찰과 15만여 명의 승려들, 50여만 명의 무당들, 그리고 2,000여만 명의 불교 신자들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 불교는 일신 해탈의 득도 위주에서 탈피하여 불교 대중화 포교 방법으로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을 벗어나 도심에 절을 지어서 적극적인 도심 포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에 옥상에 올라 가보면 교회 십자가 네온사인뿐 아니라 불교의 ‘卍’자 표시도 간간이 눈에 뜨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 불교는 솔직히 할머니들의 기복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학문의 불교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전도 방법보다는 논리적인 교리 비교 전도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려면 불교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불교의 허와 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부처

부처란 말의 원래 의미는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부처는 석가를 말하는 것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한 사람의 인간을 나타내는 단어였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초인간이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으며, 또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감임을 자처했습니다.

일예로 ‘박카리’라는 제자가 죽어가면서 마지막 소원으로 석사모니 스승에게 예배드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석가모니는  “박카리야,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하면서 예배를 거부했습니다.

또, 언젠가 석가모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대체 어떤 분입니까?” 석가모니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신입니까?” 석가모니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는 다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천사입니까?” 석가모니는 여전히 고개를 옆으로 저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체념 어린 질문을 받았을 때

석가모니는 조용히 “나는 깨달은 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석가모니는 신이 아닙니다.

신은 전지전능합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석가모니는 결코 전능하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시다림에서 한 과부가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석가가 그 곳을 지나다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과부는 병중에 있는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에 석가는 한번도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끊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후에 돌아온 과부는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그런 집이 없어 빈손으로 왔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때 석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여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석가는 죽음 앞에 무력했고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누가복음 7장 11절~17절).

또한, 석가모니는 결코 전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석가의 경우는 이와 다릅니다.

석가는 전지하지 못한 까닭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쿠시나가라로 가는 중에 ‘춘다’라는 신도가 대접하는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 죽었습니다.

춘다가 돼지 요리에 독버섯을 넣었던 것입니다.

석가는 이 요리를 먹고 설사병에 걸려서 죽어갔습니다.

석가가 힘없이 설사병에 걸려 죽어갈 때 아난다라는 제자가 슬퍼하면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석가는 냉정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난다여,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 의소(依所)로 하여 다른 이를 의소로 하지 말며 머물라.” 이 말은 쉽게 말해서 “나를 의지할 생각일랑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하긴 독버섯을 먹고 설사를 줄줄 하면서 죽어가는 신세에 어떻게 자기를 의지하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석가는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았으며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어이없게도 이렇게 죽은 석가모니를 신격화해서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의 개조인 석가를 ‘구원 실현의 부처’라 하여 영원 전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석가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석가는 영원 전에 이미 부처가 되었다. 그럼 왜 세상에 태어나서 수행했는가? 그것은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영원한 그리스도 사상의 불교 판입니다.실제로 인도의 유명한 종교학자 아만드 샤 박사는 “그리스도의 사도인 도마의 복음에 대항해 석가를 성인에서 구세주로 승격시킨 것이대승불교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가 영원부터 부처였다고 주장하여 석가를 신격화하는 것은 석가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며 기독교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기독교를 모방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부처에 관해서는 이 외에도 할 말이 많지만 시간관계상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철스님의 초팔 법어에 나타난 부처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그 대신 결론에 가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성철 큰 스님의 법어에서 참 희한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1986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들,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 오늘은 당신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천지도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시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여기서 성철은 재소자들과, 호스티스들이 부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이듬해인 1987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보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은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와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

이와 같이 성철은 심지어 사탄이 곧 부처요 부처와 사탄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이런 것이 부처라면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겠습니까?

그리고 이왕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제가 신학교 4학년 때 울산에 있는 모기도원에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장로교 목회자 한 분이 강사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자신은 기도 중

입신을 하여 지옥엘 여섯 번 갔다가 왔는데 그때 그 곳에서 부처를 보았다 고합니다. 부처가 그 곳에서 형벌을 받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를 한다면 불교신자들이 얼마나 펄펄 뛰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자제하고 가급적이면 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초팔 법어를 읽고는 그럴 필요가 없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89년 음력 4월 8일 법어에서 그는 급기야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천상천하에 독존 무비한 부처님의 처소는 험악하고도 무서운 저 지옥,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모든 중생들의 그 고통을 대신 받고, 그들을 안락한 곳으로 모시며 그들을 돕기 위하여 부처님은 항상 지옥에 계십니다……. 중생계가 한이 없으니 부처님의 지옥생활도 끝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중생계가 다 할 때까지…….”

이와 같이 그는 부처가 지옥에 있으며 부처의 지옥생활은 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1993년 11월, 그는 다음과 같은 열반 송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한 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여러분, 대한민국 불교 신자 중에 성철보다 불심이 강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부처가 사탄이라고 했으며, 부처는 지옥에 있다고 했으며, 자신도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죽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불교란 지옥에 가 있는 부처를 믿다가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허탄한 종교입니다.

2. 사리

사리(舍利)란 원래 범어인 ‘사리라(sarira)’의 음역으로서, 우리말로는 사골(舍骨), 영골(靈骨), 유신(遺身)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므로 사리는 사람이 죽은 뒤 화장하고 남은 뼈를 말합니다. 사리는 아무리 고열을 가해도 타지 않는 특색이 있고, 작게는 좁쌀, 팥알만한 크기에서부터 크게는 콩알 크기만한 것들도 있다고 하는데, 검은색, 흰색, 붉은색 등이 뒤섞여 오색 찬란한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불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화장 후 8말 8되나 되는 사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리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분석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리가 불가해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교에서 사리를 신성시하여 내주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리성분을 분석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의학자들은 사리가 몸속의 결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뼈를 제외하고 인간의 몸에 생길 수 있는 무기물로는 콩팥의 결석과 간이나 쓸개의 담석이 대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담석은 모두 칼슘을 포함하며, 나이가 많아질수록 잘 생긴다고 합니다. 특히 정좌한 채로 몇 년씩 움직이지 않고 수양하는 스님들에게는 담즙이나 소변의 배출이 원활치 않아 이들이 생길 수 있는 소지가 더욱 높다고 합니다.

 즉 사람이나 짐승이나 불에 태우면, 생전의 칼슘 양에 따라 배출되지 못한 칼슘성분이 사람의 뼈에 맺혀 있다가 녹아서 구술 같은 조직체가 적게 혹은 많게 생길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 외에도 스님들이 금욕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액 축적에 의하여 생성된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리는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여러분께 입증해 드리겠습니다.

1993년 11월 4일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이 입적(사망)했습니다.

당시 성철스님의 죽음은 불교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도 그간의 행적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성철스님에게서 과연 사리가 나올 것이냐?

나온다면 과연 몇 과나 나올 것인가? 에 모아졌습니다.

결국 성철스님에게서 2백여 과의 사리가 나왔을 때

불교계는 축제 분위기였고, 세인들의 입에서도 ‘사리’가 자주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후인 1994년 1월 8일 참으로 기막힌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그날 경남 고성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몸에서 성철스님보다 훨씬 많은 4백여 과의 사리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 동안 사리는 불가에서 수행이 높은 스님들의 몸에서만 나온다고 가르쳐왔고 사리의 많고 적음으로 수행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의 사리가 2백여 과인 것에 비해 조기순 할머니의 몸에서는 그 배가 되는 4백여과의 사리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계의 최고의 참선가이며 고승인 성철스님보다 많은 사리가 나온 조기순 할머니는 어떤 사람일까요?

조기순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정신적으로 정상상태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에서 바보라고 따돌림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렇게 자라서 시집을 갔는데 시댁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친정집에서 한 두 차례 신랑을 맞은 후 바로 소박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가 교통사고로 숨져서 일반 화장터로 그 시신이 운구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의 몸에서 사리가 나온 것입니다. 사리는 할머니의 가슴과 좌골 무릎 부분에 사마귀처럼 붙어 있었으며 왼쪽 정강이 부분에 특히 많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사리는 크기가 6cm 1과에서부터 5cm 1과 3~2cm 15과, 콩알만한 것 15과 등을 합쳐 4백 13과가 나왔으며 좁쌀만 한 크기까지 모두 수습했다면 몇 백과가 더 나왔을 것이라고 그 할머니의 생질은 증언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비구니도 아니었고 더더구나 불교신자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기순 할머니는 무종교인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리가 도를 통한 스님의 몸에서만 나오는 신비의 물체인양 세상을 기만했던 불교계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임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시리를 불교가 참 종교임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증거인양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소개해드린대로 사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리를 신성시하는 불교 역시 엉터리에 불과합니다.

3. 열반

열반이라는 말은 불교에서 구원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열반은 해탈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럼 해탈은 또 무엇일까요?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의 ‘윤’(輪)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집착과 욕망과 번뇌의 끈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해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법화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자기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면 윤회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 죽음, 슬픔, 고통, 번뇌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집착하는 마음”은 모든 욕구와 욕망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구와 욕망을 버리면 고뇌가 사라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만약 불교에서 버리라는 욕구와 욕망이 단지 사욕(邪慾)만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도 여기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선악을 가리지 말고 모든 욕구를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크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선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선을 행하지 말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이 불교지도자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바로 이 주제에 대해 서로 말했는데, 먼저 불교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욕구라 하여도 그것은 이기적인 기초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려 할 때도 (알던 모르던) 좋은 갚음을 받으려는 목적 의식이 있다.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든지 그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다.

 인생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의 욕구는 거기에 따르는 갈망과 불만이 함께 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욕구도 사악과 한 가지로 제재해야 한다. 이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곧 열반이다.”

불교 지도자의 이런 말은 듣고 썬 다싱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는 자가 지각없이 살 수 없는 것 같이 욕구 없이 살 수 없다. 욕구 없이 존재한 자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일 것이다. 감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영, 육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것이야 말로 생존의 법칙이다. 만약 완전히 욕구를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욕구를 가진 생명까지도 죽여 버리는 일이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욕구를 제거하는 것은 파괴요 구원이 아니다.”

그런 후에 그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만약 완전한 구원이 욕구를 버리는 것이라면 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벌써 욕구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하고 물을 말리려고 물을 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사실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멸망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한편, 열반에 대한 불교계의 해석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먼저, 열반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 정적, 즉 절대적 무(無)의 상태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이 근본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실제로 “열반”이라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는 “꺼져버린 상태”라는 뜻입니다. 마치 거센 바람에 꺼져 버린 불꽃처럼 열반은 거센 바람에 의해 생명의 불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날 석가는 “열반에 들어간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히 살아날 수 없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에게 그러한 것을 측량할 만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렇다 저렇다 논할만한 실마리가 그에게는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끊어지고 모든 논의의 길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스타니파타)

결국 석가는 열반은 윤회라는 생존의 틀 밖으로 나간 것이기에 통상적으로 말하는 유무의 차원에서 “열반에 들어간 자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물을 수는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반이란 윤회와 분리된 상태로 생명에 관한 모든 것들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래 석가가 가르친 열반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허무하고 재미없는 것입니까? 제정신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따위 것을 얻기 위해 일생을 수행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불교계 안에서도 일부 후세 사람들이 열반의 상태가 너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면 기쁨을 누린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열반에 대한 제2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변화해 열반이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같은 이미지를 주게 됩니다. 열반이 ‘정토’나 ‘불국토’라는 말과 결부되어 그곳에는 환희와 행복과 영생이 있다고까지 말하게 된 것입니다(대승불교).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 본래 사상이라기보다는 후세에 와서 부가 또는

 변질된 것입니다.

초기의 불전을 보면, 열반은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단절된 절대적인 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원시불교의 열반 교리는 너무도 허무하고, 대승불교의 열반 교리는 좋기는 하나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4. 재(공양)

한국불교에는 예불 외에도 재(공양)가 있습니다. 재는 원래 공양을 올리면서 행하는 불교 의례 중의 하나입니다. 본래 재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려 선근공덕을 쌓는 목적이 있으나, 지금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보다 각종 목적을 지닌 여러 형태의 재의식으로 변했습니다.

재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한 49재, 유주무주(有主無主)의 여러 고혼을 천도함에 의하여 자신이 복락을 누릴 수 있다는 목적에서 행하는 수륙재, 살아생전에 미리 고애덕을 쌓아서 죽어서 극락왕행하기 위하여 행하는 예수재 등 여러 가지의 재공양이 있습니다. 이 중 49재와 예수재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49재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49일이 되는 날 절에 가서 49재를 지냅니다. 49재란, 죽은 이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울리는 재입니다. 사전에 보면 49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49재란 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의 명복을 빌어주는 의식으로써 돌아간 날로부터 49일이 되는 날에 부처님께 공양하고 돌아가신 이에게 경전을 읽어 줌으로써 망령이 지혜의 눈이 열려 좋은 곳으로 환생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49재는 죽은 사람을 천도하기 위해 지내는 재입니다.

불교신자들은 부모나 친척이 죽으면 최하 100만원에서 최고 몇 백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49재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스님들이 하는 염불 내용은 어이없게도 죽은 사람 극락가라는 내용이 아니라 참선하는 중들이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옛날 중국의 참선하는 중 조주는 제자나 신도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차 마시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차 마시게’가 바로 49제 염불의 한 토막입니다. 또한 참선하는 중 운문은 그 자신이 떡을 좋아해서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떡 자시게” 하면서 떡을 권했습니다. 이것도 49제 염불의 한 토막입니다. 이뿐 아니라 중국의 선승 황매와 임재 문하에서 그 제자들과 주고받던 이야기가 전부 염불로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차 마셔라” “떡 먹어라” “엿 먹어라”이런 염불 때문에 과연 죽은 자가 극락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49재는 사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전문적으로 각종 불교재를 올릴 때 염불만 해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전국적으로 염불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큰 재만 있으면 뽑혀 다닙니다. 박월정이라는 스님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번은 이렇게 실토했다고 합니다.

“한참 염불하다보면 할 염불도 없을 때가 있다. 그때는 꽝과리를 크게 치면서 마구 욕설을 섞어하다가 간혹 나무아미타불하면 내용 모르는 신도는 돈만 잘 놓고 자기 친척 영혼 극락 가는 줄 알고 신나게 절을 꾸벅꾸벅한다. 욕하는 줄도 모르고서 참 재미있다.”

또 이들과 한 패인 한일정이라는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본서방 죽으라고 백일 산신 기도 드렸더니 본서방은 죽지 않고 샛서방만 죽었네.

머리를 풀라하니 시가 식구 알까봐 겁이 나고 흰 댕기를 하자니 동네 여편네들 알까봐 겁이 나고

아무도 모르는 삼베 꼬장주나 해 입을까?”

심지어는 이렇게 부도덕하고 음탕한 내용까지도 염불이랍시고 외우는 중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염불로 무슨 극락왕생이 가능하겠습니까?

꼭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49재는 본래가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고 석가 자신이 영혼문제를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없는데 내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참선하는 승려들은 대부분 영혼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반신도들에게 영혼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야만 신도들이 시주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9재는 죽은 자의 영혼을 천도하려는 목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불교에서 꾸며낸 것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49재 염불중에 죽은 영혼이 목욕을 해야만 깨끗한 몸으로 극락에 간다고 하며 목탁과 징을 쳐가면서 목욕 비를 가족들로부터 받는데 그 비용이 산 사람 사우나 비용보다 비쌉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종이로 인형 옷을 접어놓고서 옷 갈아입으니 부처 앞에 돈 놓아라. 또 죽은 영혼 머리를 단장하여야 하니 '빚 가지고 오라. 양말 수건 비누 치약을 가지고 오라.” 저승 가는데 마차를 타고 가야하니 “말 먹는 풀을 베어 오라. 그렇지 않으면 돈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어떻게 불교에는 교통수단이 현대화 되지 않아서 항상 말만 타고 저승에 가는 지? 한 마디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그들은 옛날 만화 같은 ‘전생록’이라는 책을 만들어 놓고는 음력으로 생년, 월, 일, 시를 넣으면 “당신은 전생에 남에게 빚진 돈이 100만 냥이요 금강경 1000부, 이것을 갚지 않으면 지옥도 여러 곳이 있는데 당신이 갈 곳은 독사 지옥이다.” 하는 등 해괴 망측한 말로써 시주를 내도록 합니다. 무엇보다도 49재는 석가의 가르침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49재는 뒤늦게 승려들이 영혼을 속이고 돈을 갈취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② 예수재(預修齋)

49재나 영산재 등은 모두 죽은 이들을 위하 재 의식인데 반해, 예수재는 특이하게도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재입니다.

 죽은 후 극락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살아있을 때 미리 지내는 재가 예수재입니다. 예수재를 지내는 이유는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식들이 자신을 위해 49제를 지낼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재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예수재입니다. 예수재 때스님들에게진짜 돈을 주면 스님은 가까 종이돈 두 장을 그에게 주어 한 장은 그날 예수재를 지냈다는 증표로, 또 한 장은 머리에 이고 탑돌이를 하고 시왕전에 올림으로써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즉 예수재를 지냈으므로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속된 말로 염라대왕도 돈 앞에는 약하다는 말이 됩니다. 염라대왕이 돈을 받고 지옥갈 사람을 극락으로 보내준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말입니까?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라는 말이 있는데 사회에서는 법정의 불의함을 꼬집는데 사용되는 이 말이 불교에서는 진리요 염라대왕 앞에서는 재판의 기준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누가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사기극입니다.

여러분, 불교의 근본 교리는 무구소욕(無救小欲), 즉 구하는 것이 없고 욕심이 적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와서 이런 불교가 국가적으로는 호국불교로, 개인적으로는 복을 준다는 기복 불교로 변해 버렸습니다. 쉽게 말해서 욕심을 버리라는 불타의 가르침이 욕심대로 복을 구하는 기괴한 불교로 변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49재와 예수재 외에도 절에서 행해지는 각종 재수불공, 병 낫는 불공, 생남불공입니다. 또 부적을 파는 것 또한 그 증거 중 하나입니다.

만해선사는 ‘불교 유신론’에서 불교에서 행해지는 재공양 의식을“ 매우 번잡하여 질서가 없고 비열 잡박한 연극”이라고 까지 힐난했습니다. 왜냐하면 순수 불교에는 불공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 불교는 바른 깨달음으로 자아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양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것들은 신도들을 속여서 재물을 갈취하려는 무당들과 야합된 해괴망측한 유희일 뿐입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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