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약

[스크랩] 피 터지게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수호천사1 2014. 11. 30. 14:04

피 터지게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시간이나 여유가 있어서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의 취미나 여가선용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다. 세월이 거듭될수록 시간을 쪼개어 신앙생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삶의 최우선 순위를 무엇에다 집중하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갗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간편한 복장과 함께 최고의 컨디션을 요구함과 동시에 달리는 과정에 있어서 장애물이 없어야만 제대로 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 앞에 반드시 장애물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편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많은 분들이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교회를 찾을 때 여러 가지의 여건을 고려하여 선택하기도 한다. 그 반면 어려운 개척교회를 찾아 섬기는 분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선택하는 신앙의 여정이 아닌 줄로 안다.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의한 다짐과 충성에 의한 열매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상급이 구분되기보다 얼마나 주님과 함께 말씀에 따라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앞에 놓여진 과정을 달리기 위해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거추장스러운 복장과 장식을 달고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자존심, 타인의 눈초리, 비교의식에 의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허세, 선입견, 피해의식 등등 너저분한 것을 달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를 비롯하여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허세와 추태를 부려왔는지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전도의 문을 가로막은 악행을 저질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전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아래 위선과 왜곡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친구 목사에게 들은 기가막힌 사례를 기술하려고 한다.

 

어느 여성 기독교 단체가 근교 지방 시골 장애인단체에 방문하소자 예배설교를 부탁하기 위해 친구목사를 초청했다. 그곳에 방문하기 위해서 떡과 과일 간식을 준비해서 가는데 그곳에서 점심 식사할 수 없어서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가기 위해서 어느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거창하게 식사하고 난 뒤 친구목사는 1인당 식사비가 25,000원 이상이 되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거기에 참석한 인원이 20명이 넘어 식사비만 해도 50만 원 이상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준비해간 간식으로 떡과 과일값은 고작 10만 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장애인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며 수다를 떨고 사진을 찍어 장애인들과 거기에 관계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게 하는 것을 본 친구는 다음 번 초청에 거절했다고 한다.

 

단면적인 사례를 언급했지만 한국 교회 안에 이러한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필자가 대구 근교 변두리에 장애인교회를 일반 성도처럼 다니며 섬기고 있다. 비닐하우스 안에 예배당에 세워져 있는데 주일마다 장애인들이 출석하기가 용이하지 않아 오후 2시 30분에 단 한번의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부분 힐체어를 타거나 아니면 보조용품에 의지하여 출석하고 있다.

 

그들이 오는 과정에 넘어지기도 하고 다쳐 피를 흘리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교회 예배드리려 오는 것이 죽음과 직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교회를 오고 있다. 매주 차량봉사와 함께 식사준비를 위해 타교회 성도들의 손길로 이루어져 식사를 하게 된다. 열약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신앙의 각오와 결단을 엿볼 수 있다.

 

신앙생활 그 자체가 바로 죽음이며 순교라고 한다면 과연 몇 분들이 교회를 다닐 수 있겠는가? 몇 주 전에는 장애를 가진 청년이 예배 후 식사도 잘 하고 모임의 찬양를 한 후 잠시 기도하는 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일어났다.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무사히 장례도 치렀으며 가족들이 그 다음 주에 함께 예배를 드렸다.

 

피를 흘리면서 아니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결단과 다짐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각오를 해야만 된다. 어느 장로님은 새벽기도를 가다가 강도를 만난 성경책이 찢기고 몸을 다치는 일을 당했다. 예수 믿다가 핍박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눈물과 아픔을 감추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있다.

 

히브리서 12:4에 너희가 죄와 싸우도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 라는 구절처럼 피 터지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하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북한 지하교회에 숨어 있는 성도들을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편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봤으면 한다.

 

한국교회 가운데 어렵게 목회하는 분들이 숨어계신다. 목회자들끼리 가는 야유회마저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분들이 있는 반면 친목도모라는 미명아래 자주 모임을 갖고 있는 부류의 목회자들도 있다. 성도들은 피가 터지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안일하게 희희닥거리고 있다면 징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마땅하며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징계를 받는 이유를 명시하고 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를 하는 목적은 우리가 거룩하심에 참예하기 위함임을 알려주고 있다. 자신의 몸을 쳐서 단련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것처럼 신앙의 건강을 위해서는 연단과 징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운동선수가 훈련을 받지 않고 운동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신앙의 훈련을 받지 않고 경건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를 믿다가 넘어지고 다치며 피를 터지는 일이 일어나고 심지어 심한 사고를 당하거나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서 잘못 믿었다거나 죄가 많다고 하는 표현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에 따라 내려진 징계와 연단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한 훈련이라고 한다면 과연 신앙의 시금석은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과정을 주님과 함께 갈아 왔는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고도의 훈련 속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향해 믿는 과정 속에 무서운 시련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주님과 한 몸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은 이미 죽음을 초월해진 존재로 거둡났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해서 안 된다. 언젠가는 경험해야 되는 것이지만 벌써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필자는 이미 몇 번의 죽음을 맛본 적이 있어서 담담한 면도 있지만 죽음이 신앙의 걸림돌이 아니다.

 

지난 번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피가 터지도록 다치기도 했을 것이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내동댕이쳐지고 두들겨맞기도 하며 모진 구박과 수모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죽기를 각오하고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한 것처럼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었을 것이다.

 

선교의 꼿을 피워보기도 전에 비행기 사고로 죽거나 교통사고로 죽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신앙의 문턱에 겨우 들어선 이들이 죽음으로 인해 온 가족들을 예수 믿게 하는 사례들도 있다. 또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주님을 만나게 하는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피터지게 예수를 믿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보게 되어 천만다행이다.

 

만약에 그런 분들로 인해 우리들의 신앙에 자극제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벌써 말살되었을 것이다. 신앙의 순교자들이 없었다면 복음의 원형과 본질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죽음이요, 순교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어야 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피터지게 예수 믿는 이들 가운데 피곤한 손을 붙잡아 줘야 하며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하고 길을 반듯하게 만들어줘야 하고 저는 다리를 고쳐줘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목회하다가 한가롭게 여가선용을 하는 취미생활도 포기하고 오직 피터지게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일사각오의 목회로 돌봐야 할 것이다.

 

거듭 부탁한다. 예수 믿는 것은 시간이 남아서 여가선용의 종교놀이가 아니다. 죽음을 초월된 신앙생활에 매진하여 주님과 더불어 사역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사도 바울이 나는 말마다 죽노라는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르게 간파하고 그 분처럼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십자가를 지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예수님께서 보좌 앉아 계심을 바라보고 나아가자....이보문목사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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