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 글 / 김남준 목사 예수님께서는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도록 우리에게 지시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이 하나님의 본질에 관계된 것이라면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기도하는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신지를 기도할 때마다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A. 아버지의 4중 호칭 성경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중의 호칭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성자가 성부를 아버지로 호칭합니다. 이것을 위격적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창조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모든 인간의 기원은 모든 만물과 함께 하나님께 있습니다. 넓게 보면 창조된 모든 것들의 아버지이시고, 좁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십니다. 셋째는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당신의 나라로 삼으시고 특별한 언약을 통해 신정 국가를 형성하셨습니다. 넷째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 삼으시는 구속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것을 양자적 아버지 되심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실 때에 호칭은 창조와 신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백성들을 양자로 삼으신 구속받은 백성들의 아버지로 자신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가끔 기도할 때에 여호와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호칭입니다. 여호와는 독일신학자들이 히브리어[엘로힘אלהים]-창조의 하나님을 영어로는 YHVH(야훼)로 표기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잘못된 어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도록 가르치셨는데 실제로 성경을 찾아보면 개인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른 용례는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는 예수님과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예수님이 이 기도에 우리와 함께 동참하신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호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지셨던 관계의 독특함은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와는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너희는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일인칭 복수로 가르쳐 주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수준에 맞는 화법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호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보시면서 “얘들아 너희들이 기도할 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부르면서 기도하거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여’라는 구절은 희랍어로 ‘파테르’(πατρ)라는 단어입니다. 파테르는 가족 관계들 속에서 통용되는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아빠라고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좀 과격한 해석입니다. 아버님, 부친 이런 뜻이 아니라 아빠라고 부르는 아버지하고의 중간정도의 관계이며 그래서 외부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부르지 않는 그런 종류의 호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제자들이 기도 속에서 구현하여야 할 관계가 가족 관계에서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와는 현저하게 다른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의 자녀들은 예전과는 달리 부모인 우리들을 의존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의 뉘앙스를 우리들이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아버지는 힘과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계가 아버지에게 달렸고 우리는 아버지를 의존하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이런 의존의 감정들이 잘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늘에 계신 아빠라고 기도함으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된 아버지의 관념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버지가 거의 같이 있지 않아 아버지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아버지가 폭력적이어서 많은 상처를 입고 아버지를 공경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정당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관념을 갖는데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가족 관계와 가족 안에서 누리는 가족관계는 아주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제일 먼저 가족관계가 깨뜨려졌고 그래서 참된 아버지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에 우리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현저하게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의 계시를 통해 정확히 알고 성품과 속성들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아버지에 대한 정당한 개념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도 속에서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호칭하셨을 때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아버지의 관념은 무엇이었을까요? 영원 전부터 신적인 인격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셨던 그 아버지에 대한 자각,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후에도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신적인 인격 사이의 교통, 성육신을 넘어서는 신적인 인격 사이의 본질적인 교통 속에서 터득한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그 아버지를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최대의 과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계시며, 그 관계의 본질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누리는지에 대한 이해 하나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은 물론 우리와 이 세계를 아는 모든 지식과 함께 회기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안 사람은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이처럼 창조의 아버지 되심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지만 이런 계시는 이후에 나타날 양자적 아버지 되심을 향하는 시작이며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아들 삼으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당하게 터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시고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재료삼아 만드셨습니다.
이유는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고 이후로 두 사람의 생식에 의해서 똑같은 원리로 인류는 증식되어 갔습니다.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 고백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고백인 동시에 이후에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가 하나의 가족과 같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사회를 꿈꾸며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사랑으로 교통하셔서 그 사랑이 생명의 근원이 되신 것처럼 또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류가 사랑의 온전한 교통을 이루고 그 속에서 생명이 이어져 가기를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두 나라가 연관을 이루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 부를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형제 자매의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기에 우리는 내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조금도 시샘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누리고 누려도 끝없는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이 세상 수많은 사람이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내가 받는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호칭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개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나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의 모든 아들, 딸들과 함께 손잡고 드리는 기도이기에 그들의 기도가 나에게, 나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에 성내전적으로 연합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올리셨던 대제사장의 기도에까지 연결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그 기도와 간구의 뒤를 이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종 우리를 배신하고 버려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간절히 우리를 부르시며 당신의 식탁 앞으로 나아와 그 분의 말씀의 성찬에 참여하고 그 분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 가족 속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제는 기도할 때 아버지를 부르시며 기도하시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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