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학

[스크랩]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조심하라!

수호천사1 2014. 11. 30. 13:58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조심하라!

 

다윗의 기도문을 묵상하라.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다방면에 출중한 인물이었다. 용감한 군인에다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왕이었고, 하프를 능숙하게 타던 악기연주가이면서, 무엇보다도 훌륭한 시인이었다. 그가 얼마나 감정이 풍부한 언어의 마술사였는지는 그가 지은 시편에 보면 잘 나타나 있다.

 

필자는 찬양과 감사를 할 때 시편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곤 한다. 그의 찬양과 감사의 내용은 어느 성경구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시편이 마음이 와 닿는다면 신앙이 성숙한 단계라고 보아도 된다. 시편은 피조물인 인간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경배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시편 23편은 빼어난 내용으로 채워진 백미이다.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왕의 신분이었지만 참혹한 고난과 뼛속까지 스며든 고통의 삶을 짊어진 다윗이었기에 그런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시편 23편은 필자가 기도 중에 묵상하는 기도문이지만, 무엇보다 삶의 환란과 고난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가장 먼저 추천해주고 싶은 기도문이다.

 

이 말씀을 고요하게 그리고 천천히 묵상하고 있으면 좌절과 슬픔의 눈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위로의 눈물로 바뀌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과 감사를 20~30분 하다가 성령이 내주하는 느낌으로 채워지면 위의 기도문을 차례차례 묵상하며 기도한다.

 

묵상은 암송과 다르다. 암송은 글자 그래도 외우는 것이라면 묵상은 그 뜻을 음미하며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묵상할 때는 순서가 조금 틀리거나 일부를 빼먹어도 상관이 없다. 성령이 내주하는 대로 맡기면서 찬찬히 기도하면 잔잔한 평화와 넘치는 기쁨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위로와 깨달음이 샘솟듯 솟아나온다.

 

기도문 묵상이 끝나면 간구와 중보기도로 들어간다. 약 1시간~ 1시간 30분간 기도하는 아침기도시간에 3분의2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위의 기도문을 묵상한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사역이나 영혼구원을 위한 간구나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로 채운다.

 

이렇게 기도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으로 채워야 한다.

다니엘의 기도습관을 본받으라.

아시다시피 다니엘은 탁월한 영적 능력을 지닌 성경의 위인이다. 그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왕족출신으로 꿈과 이상을 해석하는 능력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 이야기는 유명하며 벨사살의 왕궁 벽에 쓴 손가락 글씨를 해석한 대목은 지금도 기이하다. 그뿐 아니라 대바벨론의 제국의 미래와 메시야 왕국의 도래한 자신의 꿈들 역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성경의 위인으로 하나님이 구하게 사용하게 된 데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영적인 습관에서 그 탁월한 영적 능력의 원동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다니엘은 그의 정적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30일 동안 왕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기도하지 못하도록 한 금령을 어기고 기도하여 사자굴에 빠뜨려지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 근거는 아래의 성경말씀이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6:10)

 

이처럼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어겨 사형에 당할 줄을 알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는데, 그것도 정적들이 볼 수 있도록 집의 윗방의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한 것으로 보아 평소에도 그렇게 기도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행을 물려받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3번 기도했다는 대목이 성경곳곳에 나온다.

 

베드로도 고넬료를 방문하게 한 환상을 본 것도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통해서였다. 하루 3번 기도하는 것은 깨어있는 시간을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루에 한번,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것도 어려워하고 있는 이유는 기도를 단지 종교적인 의무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기독교를 단지 여러 종교의 하나로 생각하겠지만, 크리스천의 입장이라면 종교가 아니라 진리이다.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일뿐 아니라 평안하고 형통한 삶의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 습관을 들이는 일이며, 이 습관이 규칙적으로 하루 3번 간절히 기도하는 삶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다니엘의 기도를 따라하는 사람들은 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기도는 종교적인 의무감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절대적인 과정이다.

 

의무감으로 시작했다면 오래 갈 수 없다. 다니엘은 목숨을 내놓을지언정 기도행위를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사람은 탁월한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음은 물론이다.

야곱의 기도를 배우라.

성경의 위인들의 기도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기도문과 바울의 기도문 그리고 다윗이 지은 시편의 기도문이 알려졌고, 요사이는 일약 베스트셀러가 돼서 유명해진 짤막한 야베스의 기도문까지 등장하였지만 야곱의 기도는 좀 덜 유명하다.

 

그렇지만 야곱은 절박한 기도로 그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다. 그가 식구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하란의 삼촌라반의 집에서 떠난 것까지는 좋았지만, 어릴 적에 원수가 된 그의 형 에서가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맞으러 나온다는 소식을 듣자 최악의 상상으로 몸서리를 쳐야만했다.

 

그는 마지막 날 가족들과 가축들을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낸 후 홀로 밤을 맞았다. 그리고는 거기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자와 목숨을 건 기도를 시작했다. 얼마나 기도가 치열했든지 사자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자 그의 허벅지 다리를 쳐서 골절이 되어 평생 장애인이 되어 지팡이를 의지하며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명예로운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뤄서 싸워 이겼다는 의미로, 지금 유대인의 국가이름이기도 하다.

 

성령께서는 야곱의 기도를 배우라고 하셨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기도란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청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을 따라다녔던 과부도 끈질김으로 소원을 이루었고, 귀신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수로보니게 여인도 자신의 민족이 개로 비하되는 모멸감을 참고 견디면서 끈질기게 요청해서 고침을 받았다.

 

참고 견디면서 기도하는 것은 견고한 믿음을 담보로 해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를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이다. 중요한 기도응답은 쉽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응답이 없더라도 오랜 기간을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기도하는 끈기를 배우지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하는 일꾼을 원한다. 그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성경의 위인들의 기도를 배우기보다는 세상적인 방식이나 관행적인 기도를 따라 하기 일쑤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데 무지하기 때문이지만, 정작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지 않는 성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게 우리네 교회가 마주한 현실이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기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희생적인 기도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을 붙들고 호소하는 기도이다. 그 기도의 모본을 야곱이 보여주고 있다.

 

야곱이 어린 시절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여정에서 노숙하던 차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꿈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베개로 베던 돌을 세워놓고 평안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평생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이 자식들인 이스라엘 12부족에게 전승되어 의무적인 십일조 헌금의 효시가 되었다.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존재를 눈으로 보고 행동에 옮긴 사람이다. 얍복강에서의 처절한 기도가 끝난 후 하나님은 그에게 야곱이란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아다시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겨룬다는 게 언뜻 애해가 되지 않겠지만, 선한 뜻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견고한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게 성경의 숨은 의도일 것이다.

사무엘의 기도를 하라.

성경에 기록된 사무엘의 인생은 심상치 않다. 그의 어머니인 한나의 고뇌에 찬 기도로 젖을 떼자마자 성전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언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엘리 제사장의 시중을 들으면서 마지막 사사로서 위대한 선지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웠다는 얘기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중요한 종이었는지는 잘 설명해준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영음으로 들려주시는 세미한 말씀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다.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기도를 하며 살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의 기도에 대한 성경의 언급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이라고 말한 것을 미루어볼 때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같은 기도의 태도는 사무엘만 말한 것이 아니다. 사도바울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사무엘이나 바울이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귀한 쓰임을 받게 된 것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이같은 기도의 권면을 듣기 힘들다. 새벽기도회에만 성실하게 출석해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우리네 교회의 풍토에 기도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하루 종일 기도하며 사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모래밭에 바늘 찾는 격이다.

그러나 교회의 관행이나 크리스천의 생각이 어떠하든 간에, 기도의 열매를 맺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에서 요구하는 기도방식에 따라야 한다. 하루종일 기도의 삶을 사는 게 불가능해 보여도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라면 순종하며 따라야 할 것이다.

 

사실 기도의 능력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게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 역시 하나님의 소유물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도능력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능력을 공급한다면 불가능할 게 없다. 해보지도 않고 못 올라갈 나무라고 미리 짐작하고 포기하기 일쑤이다. 일주일에 한번 기도하는 사람도 기도의 열매가 없다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열매를 맛보는 사람이라면 하루종일 기도의 삶을 사는 것도 어렵지 않다. 형통하고 평안한 삶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영적인 습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울이나 사무엘은 성경의 위인 중에서도 탁월한 영적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들이 행한 기도방식을 따라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기도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래서 당신의 종들을 통해 성경에 기록하고 권면하시는 것이다.

기도를 방해하는 악한 영을 조심하라.

기도를 시작하며 기도목록을 줄줄이 외며 유창하게 기도하는 방식의 기도가 아니라 성령과 깊게 교제하며 침묵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에 몰입하는 게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기도의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라면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버거운 일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기도 습관을 들인 이들이라면 기도를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도란 정신집중을 필요로 하는 정신노동이기 때문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을 피해야 한다. 또한 감정을 격동시키는 그 어떤 것도 피해야 한다.

 

욱하는 성격에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말다툼이나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면 당분간 기도는 물 건너갔다고 보아야 한다. 걱정이나 염려, 불안과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이 역시 몰입하는 기도를 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영적인 존재가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사탄과 귀신으로 이름 붙여진 악령들이다. 그들은 인간인 우리보다 더욱 강력한 능력을 지녔기에 성령의 도움이 없다면 그들과 대적하여 이길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통로가 기도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를 시작하며 이를 강력하게 방해하고 있다. 그러나 악령들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로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들의 존재나 공격을 알려면 영안에 눈을 떠야하고 그들의 공격에 대해 해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악한 영들의 공격은 생각을 통해서 공격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인지 악한 영의 공격으로 인한 생각인지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사탄이 생각을 통해 틈타는 것은 성경 여러 곳에 소개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화가 나도 오랫동안 화를 품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탄이 틈타서 공격하기 때문이다.(엡4:26~27)

 

베드로도 사탄에게 당한 경우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이 족음 당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즉각 그러지 말라고 붙들고 항변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일성하고 계시는 대목이다.(마3:31~33) 순간적으로 베드로의 생각에 잠입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인지 아님 사탄이 주입된 생각인지 깨닫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분별력을 얻어야 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화가 나고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부정적인 사건에 반응하는 자연스런 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탄이 생각을 읽어내고 부추겨서 감정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소한 말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져서 이혼을 하거나 폭력사건 혹은 살인사건으로 저지르게 되기도 한다. 그 때마다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토로한다. 그 때가 바로 사탄이 생각으로 틈을 타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음란한 생각으로 기도를 못하기도 한다. 인터넷에 실린 야동이나 음란물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면 그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찾게 되고 그러면 아주 기도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음란한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런 생각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증폭이 되어 음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때가 바로 사탄이 틈을 타는 데, 음란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몰카를 찍거나 성추행을 실행하게 된다.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에 빠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든다.

 

이런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탄이 생각의 틈을 타서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해하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몰입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악한 영의 공격을 철저히 예방하여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나면 자리를 피하고 인터넷 메일로 들어온 음란물은 금방 지워버리고 중독이 될 만한 것들은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다.

 

술에 약한 사람은 술자리를 피할 것이고, 컴퓨터 게임을 좋아한다면 게임 사이트에 접속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약한 분야는 악령도 죄다 알고 있어 틈을 주면 순식간에 정신을 공격하여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듯 이들을 경계하며 조심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몰입하여 열매를 맺는 일은 요원하다. 성령에 집중하는 기도를 하려면 악령과의 끝없는 싸움에서 승리해야 가능하다.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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